fnctId=bbs,fnctNo=2245 총 31 건이 등록되었습니다. 게시물 검색 제목 작성자 공통(상단고정) 공지 게시글 게시글 리스트 [31] 2024 인도네시아 선거: 권위주의적 정치와 정치 왕조의 부상 | 김형준 작성자 동남아연구소 조회수 1301 첨부파일 1 등록일 2024.03.29 초록이 글에서는 대통령과 부통령, 국회의원, 지역 대표의원, 지방의회 의원을 선출하는 2024년 인도네시아 선거의 과정과 결과를 정리하고, 이를 통해 인도네시아 민주주의의 변화 가능성을 전망해본다. 이번 선거 결과 중 눈여겨볼 점은 조코위 대통령의 지지를 받은 프라보워 수비안토가 압도적인 지지로 승리했다는 점, 대통령 선거에서의 참패에도 불구하고 PDI-P가 제1당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했다는 점이다. 선거 과정에서는 특정 가계를 중심으로 한 왕조식 정치의 확장이 뚜렷하게 나타났으며, 정체성 정치는 뚜렷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정치권력을 독점할 자원과 의지를 지닌 프라보워의 대통령 당선은 기존의 정치적 균형을 깨뜨리고, 권위주의적 정치를 강화할 잠재력을 가진다고 평가될 수 있다.이슈페이퍼 바로보기 2024년 2월 14일, 인도네시아에서는 대통령과 부통령, 580명의 국회의원, 152명의 지역대표의원(Dewan Perwakilan Daerah), 2,372명의 주(provinsi)의회 의원, 17,510명의 시도(kabupaten/kota) 의회 의원을 선출하는 선거가 동시에 행해졌다. 2만여 개의 의원직을 대상으로 2십 5만여 명의 후보가 입후보했고, 2억 5백만 명의 유권자를 대상으로 8십 2만여 개의 투표소가 세워지는 등, 세계 최대 일일 민주주의 선거 라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선거는 대규모 행사로 치러졌다.이번 선거에는 18개 정당이 참여했다. 이 중 9개 정당은 2019선거에서 4% 이상의 득표율을 획득해 국회의원을 보유한 원내 정당이며, 5개 정당은 2019선거에 참여한 원외 정당, 4개는 신생 정당이었다. 국회의원 의석의 20% 이상 혹은 득표율 25% 이상을 기록한 정당 혹은 정당 간 선거연합만이 대통령 후보를 선임할 수 있다는 규정에 맞추어, 세 쌍의 대통령-부통령 후보가 후보자로 등록했다. 그림 1 대통령-부통령 후보와 지지 정당기호 1번을 받은 후보군은 아니스 바스웨단(Anies Baswedan: 무소속)과 무하이민 이스칸다르(Muhaimin Iskandar: PKB)로서, PKB, NasDem, PKS 등 3개 원내 정당과 신생 정당 Partai Ummat의 지지를 받았다. 기호 2번은 프라보워 수비안토(Prabowo Subianto: Gerindra)와 기브란 라카부밍(Gibran Rakabuming: Gerindra)으로서, Gerindra, Golkar, Demokrat, PAN 등 4개 원내 정당과 Garuda(Partai Garda Perubahan Indonesia), PBB, PSI 등 3개 원외 정당, 그리고 신생 정당 Gelora(Partai Gerombang Rakyat Indonesia)의 지지를 받았다. 기호 3번은 간자르 브라노워(Ganjar Pranowo: PDI-P)와 마흐푸드 엠데(Mahfud MD: PDI-P)로서 원내 정당인 PDI-P와 PPP, 원외 정당인 Hanura와 Perindo의 지지를 받았다. 18개 선거 참여 정당 중 신생 정당 2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대통령 후보 선거연합에 포함되었다.2023년 10월 대통령-부통령 후보가, 11월 국회의원 후보가 정해진 후 11월 28일부터 2월 11일까지 2달 반에 걸쳐 선거 운동이 진행되었다. 유세 과정에서 대중의 관심을 집중시킬만한 폭력이나 위협, 폭동이 발생하지 않았다. 이는 2004년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는 선거가 시작된 후 3차례 대선 과정을 거치며 성숙해진 정치적 전통을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유세 기간 중 가장 큰 논쟁을 불러온 사건은 캠페인 기간 종료가 임박하여 출시된 다큐멘터리 영상 Dirty Vote 였다. 유튜브에 출시된 후 곧바로 수백만 뷰를 기록할 정도로 높은 인기를 끈 이 영상은 조코위(Joko Widodo) 대통령의 직간접적 선거 개입을 고발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다.1)유도요노(Yudhoyono)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 후 새 대통령을 선출한 2014년 대선에서 유도요노는 큰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반면, Dirty Vote 영상의 선풍적 인기가 보여주는 것처럼, 조코위 대통령은 이번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플레이어였다. 이는 80%를 넘나드는 지지율이 드러내는 것처럼 그가 누리는 대중적 인기에 기반했다.대통령-부통령 선임을 둘러싸고 전개된 정치 과정, 그리고 대통령-부통령 선임 시기부터 선거 유세가 종료될 때까지의 조코위의 행보는 인도네시아 정치의 주요 특징을 요약적으로 드러냈다. 유력 정치 세력 간 연대와 타협에 기반을 둔 과두적(oligarchic) 통치에 추가하여, 유력 정치인의 가계를 중심으로 형성된 세습적 정치 왕조 (political dynasty)의 확장은 이번 2024년 선거를 주도했다. 흥미로운 점은 한동안 인도네시아 정치의 주요 요소로 부상한 정체성 정치가(서지원 전제성 2017; 이지혁 2018)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체성 정치의 핵심이던 이슬람 세력은 이번 선거에서 뚜렷한 아젠다를 제시하지도, 조직화된 힘을 표출하지도 못했다. 또한 종족적 차이나 자바와 비자바의 대립과 같은 요소 역시 주요 이슈로 부각하지 못했다. 이런 의미에서 이념보다 소수 집단의 이익에 기반을 둔 정치적 연대가 지배적으로 작동했다는 점은 이번 선거의 특징적인 모습이었다.이 글에서는 2024년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중심으로 그 선거 과정과 선거 결과를 검토하고자 한다. 2절에서는 부통령 선거 선임 과정을 통해 표출된 유력 정치 세력 간 타협과 연합을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될 것이다. 3절의 소재는 선거 캠페인 과정으로서, 캠페인 과정에서 나타난 특징적 모습이 서술될 것이다. 4절에서는 대통령 선거 결과, 5절에서는 국회의원 선거 결과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출구조사 결과를 대상으로 알아볼 것이다.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 선임(1) 대선 후보 부상과 지지율 추이선거법에 따르면, 의원 수 20%를 넘은 정당 혹은 정당 연합만이 대선 후보를 선임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 보면 정당 간 합종연횡을 통해 4명의 후보까지 등록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후보는 2-3명으로 제한된다. 9개 원내 정당 중 소속 의원이 전체의 20%를 넘은 PDI-P를 제외한 다른 정당 모두가 선거연합을 통해 대선 후보를 선임해야 하는 상태에서 세 명의 정치인이 유력후보로 부상했다. PDI-P 소속으로 중부 자바 주지사인 간자르 프라노워(Ganjar Pranowo), 2014년과 2019년 대선에서 2위를 했고 조코위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된 프라보워 수비안토(Prabowo Subianto), 자카르타 주지사를 역임했으며 소속 정당이 없는 아니스 바스웨단(Anies Baswedan)이 유력 후보군에 속했다. 2022년 후반에 이루어진 여론 조사에서 간자르가 지지율 30% 내외로 선두권을, 프라보워와 아니스가 20-25%를 기록했지만,2) 2023년 초반 프라보워의 지지율 상승으로 인해 이후 2강 1중 체제가 구축되었다.세 후보 중 무소속 아니스는 트레이드 시장에 나와 있는 자유계약 선수와 같았다. 이런 그를 수리아 팔로(Surya Paloh)가 이끄는 NasDem이 대선 후보로 선점했고, PKS와 Demokrat과의 선거연합을 통해 20% 장벽을 넘어섰다. 프라보워의 Gerindra당은 나머지 주요 정당인 Golkar, PKB, PAN과 선거연합을 구축했고, PDI-P는 PPP와 연대했다.대통령 후보가 정해지고 선거 열기가 고조되기 시작한 2023년 중반을 거쳐 2023년 10월 이전까지 여론 조사는 2강 1중 구도가 고정되었음을 보여주었다. 3자 대결을 전제로 하여 6월에 이루어진 7개 여론 조사 결과를 보면 프라보워가 4개 조사에서 선두를, 간자르가 3개 조사에서 선두를 차지했다. 두 후보의 지지율은 35% 전후였고, 지지율 격차는 5% 이내였다. 아니스는 일관되게 20-25%의 지지율로 3위에 머물렀다. 8월에 진행된 7개 여론조사 결과 역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아서, 간자르가 4개 기관의 조사에서 선두를, 프라보워가 3개 기관 조사에서 선두를 기록했다.3) 아래는 여론조사 기관 Indikator politik에서 제시한 여론 조사 결과 추이이다. 그림 2 Indikator Politik 여론 조사 추이(2023년 4월-2024년 2월) 그림 2 를 보면,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2강 1중 구도는 10월 말과 11월 초에 진행된 조사에서 큰 폭의 변화를 기록했다. 프라보워 지지율은 조금 상승하는 추세를 보였지만, 간자르의 하락세는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후 프라보워 지지율은 우상향을 지속하여 2월 초 50%에 근접했다. 간자르와 아니스 지지율에서도 12-1월을 전후하여 변화가 발생해서, 지지율 역전이 이루어졌고 이 추세는 선거 전까지 유지되었다. 10월 말에 발생한 지지율 변화는 부통령 선임과 관련되었다. (2) 부통령 선임의 동학세 명의 대통령 후보가 큰 무리 없이 등장했던 것과 달리, 이들의 러닝메이트가 될 부통령 후보 선임은 정치적 합종연횡의 잠재력을 잘 보여주었다. 대중적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을 부통령 후보로 영입함으로써, 선거 레이스 후반에 접어들어 지지세 확장과 정치적 자원 확대를 기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대통령 후보의 소속 정당이 아닌 타 정당 소속 부통령 선택은 가장 쉽게 고려해볼 수 있는 전략이다. 여기에 더해 오랫동안 주요 변수로 간주된 요인은 출신 지역으로서, 자바섬 출신의 대통령 후보와 자바 외 지역 출신의 부통령 후보가 이상적 조합으로 여겨졌다. 2014년 대선에 참여한 두 후보군은 이를 예시한다. PDI-P 소속으로 자바 출신인 조코위의 부통령 후보는 Golkar 소속으로 술라웨시 출신인 유수프 칼라(Yusuf Kalla)였으며, 자바 출신 프라보워의 부통령 후보는 PAN 소속의 수마트라 출신인 하타 라자사(Hatta Rajasa)였다. 상보적 연대의 전형을 보여준 2014년과 달리 2019년 대선에 참가한 두 후보군은 정당과 지역이라는 기준을 충족하지 않았다. 조코위의 경우 무소속으로 자바 출신인 마루프 아민(Ma ruf Amin)을, 프라보워의 경우 수마트라 출신으로 자기 당 소속 산디아가 우노(Sandiaga Uno)를 부통령으로 선택했다. 이번 대선의 부통령 선임 과정에서도 지역과 정당이 크게 고려되지 않는 모습이 나타났다. 여기에 더해 이번 대선의 부통령 선임 과정은 정당 간 거래, 유력 정치 세력의 전횡이 어느 수준까지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예시했다.먼저, PDI-P 소속 간자르 후보의 부통령 선임 과정은 극적인 모습 없이 순탄하게 이루어졌다. 같은 당 소속으로 부통령감이라는 평가를 오랫동안 받아 온 현직 장관, 마흐푸드 엠데(Mahfud MD)가 러닝메이트로 선택되었기 때문이다. 정치공학적으로 볼 때 대중적 영향력 확대의 가능성을 스스로 제약하는 이 행보는 메가와티(Megawati)가 행사하는 당내 절대적 영향력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돌발적 정치 상황을 기대하던 이들에게 아니스의 러닝메이트 선택 과정은 만족스러웠다. 영입 인물이 프라보워를 추대한 선거연합 소속 PKB의 당수 무하이민 이스칸다르였기 때문이다. 이 행보는 아니스의 러닝메이트 자리를 노리며 그를 지지하던 Demokrat을 격분시켰다. Demokrat은 곧바로 아니스 지지 선거연합에서 탈퇴하여 프라보워 진영으로 선회했다. 결과적으로 프라보워 지지 정당과 아니스 지지 정당이 각기 상대방의 자리를 차지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짧은 기간 내에 진행된 이 변화는 정치적 합종연횡의 논리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 있는가를 예시했다.Demokrat이 재빨리 프라보워 지지로 선회한 데에는 그의 러닝메이트가 결정되지 않았고, 유도요노 전 대통령의 아들로 Demokrat을 이끄는 아구스 하리무르티 유도요노(Agus Harimurti Yodhoyono)가 이 자리를 넘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하지만, 프라보워는 부통령 지명을 계속 미뤘고, 후보 등록 직전에야 중부 자바 수라카르타(Surakarta)의 시장인 기브란 라카부밍(Gibran Rakabuming)을 러닝메이트로 선정했다. 물론 그의 경력보다 훨씬 중요한 점은 그가 조코위의 장남이라는 사실이었다.조코위의 정치적 영향력을 모든 정당이 인지하고 있었지만, 기브란은 대선 레이스의 외부에 존재하던 인물이었다. 이는 인도네시아 선거법에서 규정하는 후보 나이 제한 조항 때문으로, 36살인 기브란은 40세로 규정된 후보 출마 자격을 충족하지 못했다. 물론 그가 대선 정국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던 것은 아니다. 후보자 연령 제한을 문제시하는 헌법소원이 제기되었고, 대선 후보 등록 직전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예정되었기 때문이다. 상당수 정치평론가는 이 헌법소원이 기각되고 40세 연령 제한이 존치될 것이라 예상했다. 조코위의 매제라는 친족 관계로 인해 헌재 소장이 자신의 조카인 기브란을 편파적으로 편드는 판결을 내리기 쉽지 않으리라 판단되었기 때문이다.상식에 맞는 이 시각은 결과적으로 정치 논리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헌재는 40세 연령 제한을 합헌이라 판단했지만, 직접 선거에서 지자체장으로 선출된 경험이 있는 인물에게 이 조항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예외 조항을 추가했다. 헌재 결정이 발표되자마자 프라보워는 PDI-P를 탈당할 여유조차 없던 기브란을 부통령 후보로 선임했다.정당 간 합종연횡에 대한 불만이 강하게 표출되지 않던 과거와 달리 기브란 후보의 선임은 시민사회의 광범위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기브란의 고모부가 헌재 협의 과정에 적극 개입하여 그에게 우호적인 판결을 유도했다는 고백이 헌재 재판관에 의해 제기되면서 비판적 움직임에 기름을 부었다. 시민들의 잇따른 제소에 헌재는 헌재 소장의 심의 참여가 이해충돌 방지라는 윤리 강령을 위반했는지 판단할 윤리위원회를 소집했다. 윤리위는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결정을 내려서, 헌재 소장의 선거법 위헌 심판 참여가 이해 상충에 해당하며, 그의 소장직 박탈과 선거 관련 위헌 심판 불참을 명령했다. 하지만, 헌법 재판관으로서의 신분은 박탈되지 않았고, 그가 비윤리적으로 참여한 선거법 판결 역시 유지되었다. 결과적으로, 기브란의 부통령 선임은 합법적 행위로 인정될 수 있었다. 그림 3 헌법재판소 판결에 반대하는 시위 헌법재판소를 개인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한 조코위의 행보는 시민사회 세력의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이 선거 국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 못했음은 11월 이후의 여론조사 추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조코위의 영향력을 등에 업은 프라보워의 지지율이 꾸준한 상승세를 보인 반면, 기브란의 부통령 선임을 통해 조코위가 등을 돌린 것으로 판명된 PDI-P 소속 간자르의 지지율은 35% 내외에서 20%로 추락했다. 간자르의 지지율 하락세는 선거 캠페인이 시작된 11월 이후 지속되어서, 2024년 연초에 접어들면 그에 대한 지지율은 아니스 지지율과 역전되었고, 이 추세는 계속되었다. 다음 절에서는 선거 유세 기간을 거치며 나타난 금권 선거 흐름, 후보자 간 토론회, 사이버 선거 유세를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될 것이다. 선거 캠페인 과정(1) 금권 선거의 지속인도네시아에서 선거 캠페인은 축제 분위기 속에서 펼쳐진다. 다양한 예술가들이 사전 공연을 통해 관중의 흥미를 끌고 분위기를 돋우면 후보를 중심으로 한 일군의 정치인들이 등장하며, 관중들의 환호 속에서 후보자가 연설하게 된다.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가 함께 참가하는 캠페인은 지역의 경기장에서 보통 치러지며, 수만 명의 군중이 참여한다. 대선 캠페인뿐 아니라 국회의원, 지역대표의원, 주의회 의원과 시도의회 의원의 캠페인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2023년 11월 28일부터 2024년 2월 10일까지 진행된 공식 선거 유세 기간 동안, 인도네시아 전역은 선거 열기에 휩싸인다.수만 명의 대중을 동원해야 하는 선거 캠페인을 지지자의 자발적 참여만으로 수행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대중 동원을 위한 천문학적 규모의 비용이 소요되며, 이를 정당과 후보자가 부담해야 한다. 인도네시아 선거법은 캠페인 비용에 관한 규정을 느슨하게 적용하고 있다. 후보자의 선거 비용 조달은 크게 3가지 방식으로 규정되는데, 이 중 공식적 성격을 띤 것은 개인이나 단체로부터 받은 후원금, 정당이나 정당 연합의 보조금이다. 정당 보조금은 그 규모가 정해져 있지않은 반면, 개인 후원금의 상한선은 25억 루피아(약 2억 1천만 원), 단체 후원금 상한선은 250억 루피아(약 21억 3천만 원)로 정해져 있다(8조 1,2항; 34조 1,2항). 이 규정이 대통령 후보자 뿐만 아니라 지역대표위원을 제외하고 국회의원, 주의회 의원, 시도의회 의원 후보자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사실은 금권 선거라는 현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이라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측면은 선거 비용의 또 다른 합법적 채널인 후보자 자신의 경비 부담이다. 여기에 상한선이 제시되지 않음으로써, 이론상 무제한적 비용 투입이 용인된다.2019년 대선 자료를 보면, 조코위-마루프 아민 후보는 6천억 루피아(약 511억 원)를, 프라보워-산디아가 우노 후보는 2천 132억 루피아(약 181억 원)를 사용했다고 보고했는데, 조코위의 경우 단체와 집단으로부터 모금한 기부액이 각기 2,539억, 2,510억 루피아(약 216억 원, 약 214억 원)에 달했으며, 프라보워 후보의 경우 1,925억 루피아(약 164억 원)를 스스로 조달한 것으로 기록되었다(Katadata 2019). 공식적 자료임에도 현직 대통령이던 조코위 후보의 모금 규모가 6천억 루피아(약 511억 원)에 달했음은 선거 비용에 대한 관용적 태도를 예시한다.하지만, 선관위에 보고된 자료는 전체 선거 비용 중 일부일 뿐이며 비공식적으로는 훨씬 더 큰 비용이 지출된다. 관련 자료는 많지 않지만, 2014년 자료를 보면, 국회의원 선거 후보자들이 7억 5천-40억 루피아를, 지방 의회 선거 후보자들이 2억 5천-5억 루피아를 사용했다고 추산되었다. 당시 국회의원 후보자가 6,708명, 지방 의원 후보자가 224,161명이었음을 고려해보면, 전체 규모가 100조 루피아(약 8조 5,200억 원)에 이를 수 있다고 추정되었다(Amru Dartanto 2014: 2).선거비 중 가장 큰 부분은 캠페인 비용과 유권자를 대상으로 한 기부 비용이다. 자원봉사자 사례금, 티셔츠와 기념품 제작비, 참가자 식대와 교통비 등이 캠페인 과정에서 부담되어야 한다. 여기에 더해 후보자들은 선거를 앞두고 만난 유권자에게 여러 형태의 기부금을 제공한다. 상황에 따라 규모는 다르지만, 유권자를 향한 이 기부 행태는 후보자의 필수적 의무처럼 비추어진다. 이번 선거에 참여한 당둣(dangdut) 가수 아니사 바하르(Anisa Bahar)는 선거 비용을 다른 후보와 달리 상대적으로 솔직하게 진술했는데, 그녀의 사례는 선거 비용을 이해할 실마리를 제공해준다(KumparanHITS 2024).아니사는 NadDem 후보로 중부 자바 떠갈(Tegal)과 브러버스(Brebes) 지역구에 출마했다. 그녀는 자신의 선거 비용을 50억 루피아로 추산했다. 캠페인 기간 중 한 지역을 방문하면 그녀는 보통 몇 백만 루피아를 사용했는데, 주민에게 나누어줄 가방, 손목시계, 기름, 쌀 등의 선물을 사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활동은 선거 캠페인보다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다. 가뭄이 들었을 때 그녀는 지역으로 가서 물을 구매해 나누어 주었고, 집이 부서진 주민이 있으면 그 보수 공사를 지원했다. 이러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그녀는 은행 예금을 깨고 두 대의 차를 팔았다.아니사는 선거 과정에서의 기부 행위를 주민을 돕는 일로 규정함으로써, 그 시기나 종류, 규모에 구애받지 않고 활동을 펼칠 수 있음을 정당화했다. 흥미로운 점은 그녀가 이런 자신의 활동을 금권 정치 (politik uang)로 규정하지 않은 점으로서, 그녀에게 있어 금권 정치는 선거 직전의 금품 살포를 일컫는 새벽의 공격 (serangan fajar)으로 제한되었다.아니사의 의견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지만, 상당수 유권자는 후보자의 기부 행위에 대해 수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여기에 더해 후보자의 기부에 대한 부채 의식 역시 일정 정도 존재하기에, 선거 비용이 상승하고 금권 정치가 계속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Indikator Politik이 제시한 여론조사를 통해 금권 정치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도록 한다. 후보자가 유권자에게 주는 돈이나 선물을 관례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 라는 질문에 대해 응답자의 46.9%가 긍정적인 답변을, 49.6%가 부정적인 답변을 함으로써,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금품 수수에 따른 대응에 대해서는 상이한 응답 경향이 나타났는데, 아래는 금품과 투표 사이의 관계를 묻는 말에 대한 응답이다. 그림 4 여론 조사: 금품 수수에 대한 유권자의 태도가장 높은 응답 비율은 금품을 받은 후 그와 관계없이 자신의 선호에 따라 후보를 선택한다는 항목이지만, 이보다 중요한 측면은 응답자의 90%가 금품 수수를 용인한다는 점이다. 또한, 응답자 42%는 금품을 준 후보에 대해 부채 의식을 지니고 있음을 표현했다. 이 자료는 금권 정치가 효과성을 가진 행동으로 후보자에게 인식될 수 있음을, 그리고 금권 선거에 대한 관용적 태도가 널리 퍼져있음을 드러냄으로써, 금권 선거 개혁이 제도적 차원의 노력만으로 쉽게 성취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2) 후보자 간 토론회캠페인 기간 중 대중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행사는 3차례의 대통령 후보 토론회, 2차례의 부통령 후보 토론회이다. 모든 매체를 통해 생중계됨으로 인해 토론회는 후보 간 차이를 드러낼 수 있는 자리이지만, 과거 선거를 볼 경우, 그것이 뚜렷한 정책적 차이이기보다는 후보자의 성향과 태도의 차이인 경우가 대다수였다. 이번 선거 토론회에서도 선거 판세를 변화시킬만한 내용이 후보 토론회에서 나타나지 않았지만,4) 이전 선거보다는 후보 간 정책 차이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날 수 있었다. 이는 야당 후보를 자처한 아니스 때문이었다.아니스는 NasDem, PKB, PKS 선거연합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자신은 특정 정당에 소속해 있지 않았으며, NasDem 후보 선임을 수용했을 때도 그의 NasDem 가입이 전제되지 않았다. 그를 지지한 세 정당 중 NasDem과 PKB는 조코위 내각에서 장관 자리를 부여받았고, PKS 만이 여당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로 인해 아니스를 야당 후보라 지칭하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그는 자신이 조코위 정책 중 일부를 반대함을 표출함으로써 정책적 차이를 부각하고자 했다. 이는 조코위 정책 계승을 전면에 내세운 프라보워와 간자르와는 차별되는 행보였다.정책 차이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문제는 신수도 이전이었다. 선거 캠페인이 진행되면서 아니스의 입장은 중도에서 반대로 선회했고, 그는 법으로 규정된 신도시 이전을 대통령 당선 후 재고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신수도의 목적인 국토 균형발전이 실현되기 불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신수도 이전보다 시급한 교육, 보건, 인프라 구축 등에 대한 예산 배정이 요구된다는 점이 그가 내세운 이유였다. 신도시 이전만큼 명확하지는 않았지만, 아니스는 원광 수출 금지와 다운스트림 산업 육성이라는 조코위 정책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를 제기했다. 캠페인 기간 중 언론에 서 제기한 인도네시아의 생산 확대에 따른 국제 니켈 가격 하락 문제에 대응하여 그는 원광 수출과 다운스트림 산업을 통합적인 틀에서 수정해야 함을 피력했다.5)신수도를 중심으로 한 대선 후보 간 정책 차이는 과거 대선 과정에서 나타나지 않았던 모습으로서, 대선 레이스의 진일보한 모습을 포함했다. 하지만, 신수도를 제외한 문제에서 세 후보 모두 유사한 정책을 제시함으로써, 전체적으로는 정책 대결이 선거 캠페인의 주요 이슈로 부각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3) 선거 캠페인두 달 이상 진행된 선거 캠페인 과정에서 집단 간 유혈사태나 폭동과 같은 부정적 행동이 표출되지 않았다. 이를 통해 2004년 이후 몇 차례에 걸쳐 대선이 진행되면서 민주주의 축제 에 익숙해진 유권자의 성숙함을 확인해볼 수 있었다.이번 선거 캠페인 과정에서 온라인의 중요성이 다시 한 번 부각되었다. 각 후보 모두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틱톡, X(트위터)와 같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적극적인 홍보 활동을 벌였다. 인도네시아 인구의 60% 이상이 소셜미디어를 사용하며, 이들이 하루에 3시간 이상 소셜미디어에 접속하는 상황을 고려해보면,6) 온라인에서의 선거 캠페인이 가장 중요한 활동 중 하나로 부상했음은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림 5 (왼쪽) 선거 캠페인 과정에서 프라보워가 유행시킨 귀여운 춤 (오른쪽)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프라보워가 연출한 귀여운 춤 소셜 미디어를 통한 캠페인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되는 후보는 프라보워이다. 그의 선거팀은 온라인 사용자가 많은 젊은 세대를 대상으로 하여 프라보워를 선전했고, 이를 위해 귀여운 (gemoy)이라는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웠다. 만화나 게임 캐릭터를 본떠 만든 프라보워와 기브란의 귀여운 아바타를 온라인뿐 아니라 오프라인 현수막을 통해 노출시켰는데, 이는 긍정적반응을 얻어냈다. 선거 캠페인 과정에서 반복된 프라보워의 귀여운 춤 (joget gemoy)은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는 선거 유세 과정에서 연단에 올라 거리낌 없이 춤을 추었는데, 이를 캡처한 짧은 영상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러한 인기에 고무되어, 프라보워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귀여운 춤사위를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선보이기까지 했다.귀여움이라는 이미지를 부각하려 했던 프라보워의 전략은 그가 수하르토의 사위였으며, 동티모르 주둔과 민주화 운동 진압 과정에서 민간인을 납치, 살해했고, 수하르토 퇴진 후 전개된 사회 혼란을 배후에서 조종한 인물이었다는 전력과 관련된다. 따라서, 자신을 따라다니는 강경함과 잔혹함이라는 이미지를 완화하기 위해 그는 정반대되는 성격의 캐릭터를 전면에 드러내고자했다.7) 이러한 선거 전략은 젊은 세대에게 다가가는 데 도움을 주었고, 전통 자바 문화와의 연결을 통해 장년층 이상에게도 긍정적 이미지를 전달해 주었으리라 추정된다.인도의 서사시를 기본 줄거리로 하는 자바의 전통 예술 와양(wayang)에는 토착적 성격의 캐릭터(punakawan)가 등장한다. 다른 등장인물과 달리 기이한 외모를 지닌 이들은 우스꽝스럽고 때로 천박하기까지 한 언행으로 관객의 웃음을 자아내는 광대 역할을 하지만, 실상 이들은 강력한 힘을 지닌 토착 신이다. 자신이 희화화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프라보워의 캠페인 방식은 이러한 와양의 캐릭터를 상기시킴으로써, 외유내강의 성품을 지닌 이상적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장년층과 노년층 유권자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아니스와 간자르 역시 소셜 미디어를 활용했지만, 프라보워만큼 대중적 관심을 받지 못했다. 선거 캠페인이 진행되면서 아니스를 대상으로 하여 일반인이 만든 X 계정이 시선을 끌었다. 이계정은 @aniesbubble인데, bubble 이라는 표현과 아니스 라는 한국어 표기는 K-pop의 팬플랫폼인 버블을 모방하여 이 계정이 만들어졌음을 드러냈다. 즉, K-pop 가수가 팬을 관리하는 방식처럼 아니스를 팬에게 소개한다는 형식을 계정이 취하고 있었다. 아니스의 일상을 담거나 활동 계획을 소개하는 메시지와 짧은 영상이 X를 통해 전파되었는데, 일부 영상의 경우 천만 뷰를 기록할 정도로 선풍적 인기를 누렸다. K-Pop과의 연계로 인해 K-pop 팬의 정치화 가능성을 지적하는 주장이 제기되기까지 했지만(BBC Indonesia), 이보다는 K-Pop 유통 방식을 차용한 활동이라 평가하는 편이 적절한 듯하다. 그럼에도, 인도네시아 대선 캠페인에서 K-pop이 대중적 관심의 중심부에 놓였다는 사실은 쉽게 상상할 수 없었던 현상으로서, 인도네시아 내에서K-pop의 영향력을 재확인해 주었다. 그림 6 (왼쪽) 한국어 이름이 포함된 X의 아니스 계정; (오른쪽) 한국어 이름으로 아니스를 선전하는 인스타그램 포스팅 사이버 공간에서 프라보워와 아니스의 이미지가 젊은 세대의 취향에 부합하도록 형성되고 소비되었지만, 이것만으로 이들에 대한 지지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다. 이번 선거에서 후보자들에대한 지지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제3의 변수인 조코위를 포함해야 한다. 80%에 이르는 지지도로 인해 조코위 정책에 대한 후보자의 입장은 득표의 주요 요소로 작동했다. 아래의 자료는 조코위 정부의 정책에 대해 만족/불만족 여부가 후보자 선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아본 조사 결과이다. 그림 7 출구조사: 각 후보 투표자 중 조코위에 대한 태도자료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차이는 아니스-무하이민 지지자의 높은 불만족 비중으로서 44.9%에 이르는 불만족 비율은 프라보워-기브란 지지자의 8.8%, 간자르-마흐푸드 지지자의 15.3% 보다 월등히 높다. 동일한 응답자 사이에서 조코위 정권에 대한 지지도가 80%에 육박했음을 고려해보면, 20%의 불만족 응답자 중 상당수가 아니스를 선택했음을 추정할 수 있도록 한다. 이는 아니스가 야당 후보로, 프라보워가 조코위의 계승자로 비추어지며 지지자들을 끌어모았음을 시사한다. 아래는 세 후보자 지지 이유를 직접적으로 묻는 응답에 대한 답변 중 상위에 놓인 3개의 답변을 정리한 자료이다. 표 1 출구조사: 대선 후보 선택 이유(상위 세 가지)응답 순위아니스프라보워간자르1변화추구단호함/권위 있음/군인 경력일반인에 대한 관심2일반인에 대한 관심일ㄹ반인에 대한 관심정책이 좋음3똑똑함/시각이 넓음조코위 정책 계승믿을 만함/충직함 표 1 을 보면, 세 후보 중 간자르가 명확한 자기 이미지 구축에 실패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를 지지하는 이유로 지적된 세 가지 측면은 정치 지도자에 대해 요구되는 일반적 차원의 덕목이다. 간자르와 달리 아니스와 프라보워는 서로 대비되는 이미지를 구축했다. 아니스에게 부여된 변화와 똑똑함의 이미지는 그가 조코위에 대립하는 야당 후보라는 주장, 그리고 박사 출신의 지식인이라는 배경을 반영한다. 프라보워에게 부여된 단호함과 조코위 정책 계승은 그가 군인 배경을 지니고 있으며, 조코위의 장남을 부통령 후보로 선택함으로써 조코위 계승자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음을 반영한다.선거 캠페인 막바지인 2월 초 선거에 영향을 미칠 잠재력이 있는 사건이 벌어졌다. 조코위의 선거 개입을 주제로 한 Dirty Vote 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가 유튜브를 통해 방영된 것이다. 단디(Dandhy Laksono)가 만들고 세 명의 전문가가 출현하여 이번 선거의 더러운 성격을 폭로한 이 다큐멘터리는 선풍적 인기를 끌며, 며칠 만에 수백만 회가 조회되는 기염을 토했다. 다큐멘터리는 기브란의 부통령 선임 과정, 조코위의 프라보워 지지 표현, 관료와 경찰의 선거 간여, 보조금과 쌀 배포 등 조코위 정부의 비합법적 선거 간여를 보여줄 자료로 구성되었다. 자료 대부분이 이미 알려져 있었고, 선거법 위반을 보여줄 결정적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이 다큐는 가졌다. 그럼에도 금기시되었던 정부에 대한 비판을 공론화시켰다는 점은 이 다큐가 지닌 중요성이다. 또한, 선거 후반기 여론 조사를 통해 뚜렷해진 두 경향, 즉 50%에 근접하는 프라보워 지지율의 상승, 간자르를 추월한 아니스의 지지세 상승 추이가 아니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이 다큐가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아니스 지지자에게 제공해주었다. 그림 8 조코위의 선심정치를 "pork barrel"에 비유하여 비판한 다큐멘터리 클립 대통령 선거 결과(1) 투개표 과정인도네시아 선거는 아침 7시에 시작하여 오후 1시에 종결되며, 투표소에서 곧바로 개표가 진행된다. 투표와 관련해서 주목을 받아 온 문제는 선거 관리원의 대규모 과로사와 늦은 결과 발표이다. 특히 5년 전 치러진 선거에서 과로사 문제가 두드러지게 표현되어서, 공식 사망자 수가 9백여 명에 달할 정도였다. 이번 선거를 앞두고 선관위에서는 신체검사를 통해 선거 관리원을 선발하고 인원을 보강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사망자 수가 대폭 감소했지만, 여전히 그 규모는 백여 명에 이르렀다. 82만여 개의 투표소에서 전체 유권자의 85%인 1억 7천여만명이 참여한 투표 결과 집계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됨은 큰 문제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로 인해 선관위의 공식 개표 결과 발표는 선거가 끝나고 한 달여가 지난 3월 20일로 예정되었다.선거 관리원의 과로사와 더딘 개표율은 선거에 부여된 상징적 의미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선거는 오랫동안 민주주의 축제 라 불려왔다. 일상에 민주적 관행이 뿌리내리지 못한 상황에서 선거가 민주주의의 축제임을 보여줄 방식은 개표 과정의 공정성과 투명성이었다. 따라서, 개표는 과도하게 여겨질 정도로 세심하고 꼼꼼한 절차를 거쳐 진행되었다.누구나 쉽게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환경이 인도네시아에 정착된 지도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수작업에 의존한 개표 절차는 쉽게 변화될 수 없는 전통으로 확립되었다. 이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개표 과정이 여겨짐으로써 선거 관리원의 과로사나 지연된 개표 결과 발표와 같은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관행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아래는 선관위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개표 결과 스캔 자료로서 82만여 투표소에서 진행된 5종류의 선거 자료 모두가 이런 식으로 업로드되어 있다. 그림 9 KPU 홈페이지에 업로드된 개별 개표소의 대선 개표 결과 (TPS002, Balecatur, Gamping, Sleman, DIY) 투표와 개표 과정에서 여러 문제가 보고되었다. 선거감시위원회(Badan Pengawas Pemilihan Umum)는 이를 19개 범주로 나누어 정리했는데, 가장 많이 지적된 투표소의 늦은개소 의 경우, 그 보고 건수가 4만여 건에 달할 정도로 광범위하게 발생했다. 이외에도 투표용지 부족, 미등록 주민의 투표, 중복 투표, 투표자에 대한 위협, 빠른 개표 시작, 참관인 없는 개표, 집계 소프트웨어 미작동 문제가 거론되었다(Muhamad 2024; Yuniarto 2024). 이러한 문제 중 일부는 선거의 공정성을 훼손할 심각한 사안으로 평가될 수도 있지만, 사소한 해프닝처럼 취급되는 경우가 대다수였고, 선거 결과 자체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확대되지 않았다.부적절한 투개표 절차에 대한 선관위와 선거감시위원회의 대응 역시 그 파급력을 축소할 수 있는 요인 중 하나였다. 투개표 절차에 대해 문제 제기가 이루어진 후 관계 기관의 협의를 거쳐 780여 개 투표소에서 재투표가 실행되었고, 천여 곳에 이르는 개표소에서 재검표가 이루어졌다(CNN Indonesia 2024; Mantalean Ihsanuddin 2024). 전체 개표소와 비교할 때, 재투표, 재검표가 이루어진 곳은 극소수였다. 그럼에도 제한된 범위이지만 유권자의 불만이 제도적 절차를 통해 해결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선거 공정성에 대한 논란을 잠재우는 데 일조할 수 있었다.(2) 선거 결과: 출구조사 및 공식 결과선관위의 공식 선거 결과 발표는 3월 20일로 예정되었다. 하지만, 선거 직후 발표된 십여 개 여론 조사 기관의 출구조사를 통해 선거 결과에 대한 예측이 가능한데, 과거 선거를 보면 출구조사와 선관위의 공식 발표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번 선거에서도 여론조사 기관에서 제시한 출구조사 결과 사이에는 큰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고, 또한, 세 후보의 득표율 격차가 컸기에 출구조사 결과는 실제 개표 결과를 반영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아래는 출구조사 집계율이 95%를 넘은 상황에서 6개 여론 조사 기관이 제시한 결과, 그리고 3월 20일 선관위가 공식화한 결과를 정리한 것이다. 표 2 출구조사 및 공식 선거 결과조사기관아니스프라보워간자르Indikator25.3258.0016.68Lembaga Survei Indonesia25.2158.1616.64Kedai Kopi24.7359.2116.06Charta Politika25.6657.8116.51Poltracking24.3759.3516.28Litbang Kompas25.1058.7316.17선관위 공식 결과24.9558.5916.47 표 2 를 보면, 출구조사와 공식 선거 결과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프라보워-기브란이 58% 내외, 아니스-무하이민이 25% 내외, 간자르-마흐푸드가 16% 내외를 득표했다. 이는 선거 전 나타난 두 경향, 즉 프라보워-기브란의 꾸준한 지지율 상승, 아니스-무하이민의 꾸준한 지지율 상승 및 간자르-마흐푸드와의 지지율 역전이 선거 결과에 그대로 반영되었음을 시사한다.아래에서는 3천 명의 유권자를 대상으로 한 Indikator Politik의 출구조사 자료를 통해 선거에 영향을 미친 요인을 개괄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이 조사에서 변수로 활용한 성, 연령, 종족, 종교, 교육, 소득, 직업, 거주지역, 지지 정당, 조코위 선호 여부 중 선거 결과와 비교하여 가장 적은 변이를 보인 요인은 성별 차이로서 프라보워를 선택한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는 3% 정도의 차이가 나타났다. 연령별 투표 결과는 가장 큰 격차를 보였는데, 그 결과는 아래와 같다. 그림 10 출구조사: 연령대별 투표 현황 프라보워-기브란은 27세 이하 젊은 층에서 평균 득표율(58%)을 10% 이상 상회하는 표를 획득한 반면, 간자르의 득표율은 60세 이상에서 아니스보다 높게 나타났다. 군부와 수하르토라는 구시대적 특성을 지닌 프라보워가 젊은 세대의 높은 지지를 받은 점은 유권자의 표심에서 나타난 가장 특징적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앞의 선거 유세 자료와 연결하면, 프라보워의 선거 전략이긍정적 영향을 미쳤다고도 평가될 수 있다.연령별 자료와는 모순되어 보이는 듯한 결과가 교육 수준별 투표 경향에 나타나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교육을 받은 유권자 사이에서 아니스에 대한 지지가 높아지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아래는 학력에 따른 투표 결과를 정리한 자료이다. 그림 11 출구 조사: 학력별 투표 현황대학교 재학 및 졸업자 집단에서 아니스에 대한 지지율은 36.4%로서, 그에 대한 평균 지지율을 10% 정도 넘어서며, 초등학교 학력 집단 사이에서는 아니스에 대한 낮은 지지, 간자르에 대한 높은 지지가 표현되었다. 20대의 대학 진학률이 2020년대에 접어들어 30%에 육박하기에 이들은 다른 연령 집단에 비해 높은 학력을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이 자료는 27세 이하 집단에서나타나는 70%에 이르는 프라보워에 대한 지지와는 차별적 성격을 드러낸다.아니스에 대해 고학력자들이 높은 지지율을 보임으로써, 아니스는 4백만 루피아 이상의 고소득자에게서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율(33.2%)을 얻었으며, 그가 가장 높은 지지를 얻은 직업군은 공무원/선생과 교수/전문가 집단(30.0%)이었다. 간자르 지지층은 이와 대비되는 속성을 지녔다. 간자르가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를 받은 집단은 백만 루피아 이하 집단(18.8%)이었고, 농업, 어업, 축산업 종사자로부터 21.3%의 지지를 얻었다. 프라보워에 대한 가장 높은 지지는 학생에게서 나타나서, 그 지지율이 67.2%에 이르렀는데, 이는 그에 대한 20대의 높은 지지율과 같은 선상에 놓여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아니스에 대한 지지가 30대 이상의 대학졸업자에게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선거의 주요 변수로 여겨지는 또 다른 요소는 지역이다. 자바를 놓고 보면, 아니스가 서부 자바 지역에서, 간자르가 중부 자바에서 높은 득표율을 보였지만, 동부 자바에서 프라보워의 득표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자바 외부 지역에서는 수마트라를 제외하면, 프라보워가 58% 이상의 지지율을 얻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래는 득표율이 높은 순서로 본 프라보워와 아니스의 지역별 득표율이다. 그림 12-1 출구 조사: 프라보워에 대한 지역별 투표 그림 12-2 출구 조사: 아니스에 대한 지역별 투표지역별로 보면, 프라보워는 칼리만탄, 말루쿠-파푸아, 술라웨시, 발리-누사 틍가라 등 수마트라를 제외한 자바 외부 지역에서 높은 득표율을 얻었다. 반면, 아니스는 자카르타, 반튼, 서부 자바, 그리고 수마트라에서 높은 득표를 했다. 이런 경향과 대비되는 양상은 동부 자바에서 프라보워가 기록한 높은 득표율이다. 아니스의 부통령 후보인 무하이민이 동부 자바를 기반으로 하는PKB 당수라는 점, 과거 선거에서 PDI-P가 동부 자바에서 높은 득표율을 유지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프라보워의 높은 지지도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지역별 선거 추세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특이한 점은 자바 외부 지역 중 수마트라에서 아니스가 획득한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이다. 이는 종족별 선거 추이에도 일부 반영되었는데, 출구조사 결과에 제시된 7개 종족 중, 서부 수마트라를 기반으로 한 미낭카바우(Minangkabau) 출신자들 사이에서는 이례적인 결과가 나타났다.미낭카바우 출신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아니스-무하이민에 대한 지지율은 61.4%로 나타나서, 프라보워-기브란에 대한 36.8%를 월등히 추월하는 모습을 보였다. 과거 선거에서 PKS의 정치적 영향력이 서부 수마트라에서 강하게 표출되었음을 고려해보면 일견 이해될 수 있는 결과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압도적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추가적 분석이 요구된다. 그림 13 출구조사: 미낭카바우 출신자 투표 현황 지역과 함께 인도네시아 선거의 주요 변수로 여겨진 요소는 종교, 특히 이슬람 내의 분파이다. 이번 선거에서도 이러한 흐름이 일부 나타났지만, 이보다 더욱 뚜렷한 차이가 무슬림과 비무슬림 사이에서 나타났다. 그림 14 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무슬림 후보 지지율은 전체 지지율과 유사한 흐름을 보였다. 반면, 비무슬림 사이에서는 프라보워 후보가 평균을 조금 넘어서는 득표를 한 반면, 아니스 후보에 대한 지지는 3.5%, 간자르 후보에 대한 지지는 33.1%로서 두 후보 간 차이가 뚜렷했다. 이를 설명할 하나의 요소는 2017년 자카르타 주지사 선거에서 아혹(Ahok)과 경쟁한 아니스에게 부여된 급진적 이슬람의 이미지이다.8)이슬람 단체 중 NU를 지지하는 유권자의 투표 경향은 전체 투표 흐름과 유사했지만, 무함마디야와 다른 이슬람 단체 지지 무슬림 사이에서는 일정한 차이가 나타났다. 아니스 후보에 대한 지지는 34.7%, 간자르 후보에 대한 지지는 10.2%로서, 전체 투표 결과와 비교할 때 아니스에 대한 지지가 높았다. 대선 후보 선택과 관련되어 무함마디야가 중립을 표명했음을 고려하면, PKS 소속 무슬림의 높은 지지도가 반영된 것이라 추정된다. 그림 14 출구조사: 종교별/소속 종교단체별(무슬림) 투표 현황 요약하면, 유권자의 투표 경향 중 흥미로운 현상은 아니스 후보에 대한 지지가 고학력층 사이에서 강하게 표출됐고, 프라보워에 대한 지지가 20대에서 강하게 드러났다는 점이다. 지역적으로는 프라보워의 높은 지지세로 인해 자바-자바 외부 구분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아니스 후보의 경우 자바 서부를 중심으로 강한 지지세를 보였고, 프라보워는 자바 외부에서 평균 이상의 득표를 기록했다. 무슬림과 비무슬림 사이에서 나타나는 격차 역시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추가적인 분석이 요구되는 현상이다. 국회의원 선거 결과이번 선거에서 유권자들은 2019년보다 5석 늘어난 580명의 국회의원을 선택했다. 대통령 선거에서 나타난 프라보워의 압도적 승리가 국회의원 선거에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예상할 수 있지만, 국회의원 선거 결과는 대선 결과와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가장 눈에 띄는 현상은 대통령 선과와 달리 이번 국회의원 선거 결과가 2019년과 일정 정도의 유사성을 띤다는 점이다. 아래에는 2019년 득표율 순위를 기준으로 정리된 9개 원내 정당의 득표율 및 의석수가 제시되어 있다. 표 3 출구조사: 9개 원대 정당의 득표율 득표율의석수(비율)의석수201920242019202420192024PDI-P19.316.722.319128110Gerindra12.613.213.614.87886Golkar12.315.314.817.685102PKB9.710.610.111.75868Nasdem9.19.710.311.95969PKS8.28.48.79.15053Demokrat7.87.49.47.65444PAN6.87.27.78.34448PPP4.53.93.30190프라보워를 지지한 선거연합에는 Gerindra, Golkar, Demokrat, PAN 등 네 개 정당이 포진해 있었다. 2019년과 비교할 때 이들 정당의 득표율에서는 일정한 차이가 나타났다. Golkar의 득표율이 3%, Gerindra가 0.6% 정도 증가해서 두 정당 간 순위 역전이 발생했다. Demokrat와 PAN의 득표율은 0.4%의 증감을 보였다. 이러한 변화만을 놓고 본다면, 2019년 선거 결과가 2024년에도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고 평가해도 무리가 없는 듯하다. 프라보워가 대선에서 압승을 거두었음에도 Golkar보다 Gerindra의 득표율 상승이 적었다는 점은 흥미로운 현상이다.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큰 패배를 맛본 정당은 PDI-P이다. 이는 국회의원 선거에도 일정 정도 투영되어서 PDI-P는 9개 정당 중 득표율이 가장 큰 폭으로 감소했다. 그럼에도 제1당으로서의 위치는 고수할 수 있었다. 아래는 Indikator Politik의 출구조사를 통해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나타난 PDI-P에 대한 지지도를 지역적으로 비교한 자료이다. 표 4 출구조사: 간자르와 PDI-P의 지역별 득표율지역PDI-P 득표율간자르 득표율격차Kalimantan13.44.7+8.7Jawa Timur23.119.8+3.3Sumatera11.48.8+2.6Sulawesi7.96.7+1.2Jakarta17.216.2+1Jawa Barat12.511.5+1Banten5.15.6-0.5Bali-Nusa Tenggara24.326.3-2Maluku-Papua9.618-8.4Jawa Tengah-DIY30.438.6-8.4득표율 차이가 가장 큰 지역은 칼리만탄, 말루쿠-파푸아, 중부자바-죡자로서 8.5% 내외이다. 인구로 본다면, 중부자바-죡자의 경우 Ganjar 득표율과 PDI-P 득표율 차이는 2백 3십만 명에 달할 정도로 그 규모가 컸다. 1% 내외의 차이를 보인 곳이 네 개 지역 있음에도, 이 자료는 PDI-P 지지자들의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택에 있어 일정한 차이가 존재했음을 시사한다.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 지역적 상황이 더욱 강하게 작동할 여지가 높다는 점이 이러한 차이를 가져왔으리라 추정된다.두 선거에 대한 유권자의 차별적 인식은 Indikator Politik 출구조사에서 진행한 후보 선택 시 정당 고려 여부를 묻는 질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참여 응답자 중 31.8%만이 대통령 후보와 국회의원 후보를 정당에 기초하여 선택했다고 답했으며, 64.9%는 교차 투표를 했다고 응답했다. 이 자료는 국가적 수준과 지역적 수준에서의 정치적 다이나믹스가 차별적으로 선거에개입했음을 시사하며, 지역에 밀착된 주의회 의원 및 시도의회 의원 선거 결과에 대한 추가적 분석을 요구한다. 나가는 글이번 선거에서 드러난 가장 큰 이변은 프라보워의 압승이다. 선거 후반 여론 조사에서 상승세가 뚜렷하게 나타났지만, 그가 60%에 이르는 지지율로 1차 선거에서 결과를 확정지으리라 예상한 경우는 많지 않았다. 특히 2023년 10월까지 그의 지지율과 간자르의 지지율이 큰 격차를보이지 않았기에 이번 압승을 예상하기는 쉽지 않았다.선거 국면의 급격한 변화로 인해 이번 선거에 미친 조코위의 영향력을 부정하기는 쉽지 않다. 장남인 기브란을 부통령 후보에 선임시켰을 뿐 아니라, Dirty Vote 다큐멘터리를 통해 드러나듯, 그는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유무형의 자원을 동원하여 프라보워의 당선을 지원했다. 이런 의미에서 프라보워의 압승은 조코위의 승리이며, 그의 정치적 영향력을 지속할 기반을 차기 정부에서 확보했다고 평가될 수 있다.그러나, 조코위의 강력한 지원을 통한 당선이 프라보워의 조코위에 대한 의존성을 지시한다고 평가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 프라보워가 독자적 세력을 보유하고 있고, 오랫동안 권력을 꿈꿔온 인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경력은 그가 독점적 권력을 강화할 충분한 의지와 역량을 갖추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프라보워의 선거 승리에 대해 대다수 국외 정치 분석가들은 권위주의 강화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Chen 2024; Tripathi 2014).이번 선거에서 나타난 특징 중 하나는 정치 왕조(political dynasty)의 강화이다. 법 규정을 무리하게 변경하여 기브란을 부통령으로 선임했음에도 프라보워에 대한 지지도가 상승했음은 정치인뿐만 아니라 일반인 사이에서도 특정 가계를 중심으로 한 왕조식 정치가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짐을 시사한다. 기브란 외에도 이번 선거에서는 왕조식 정치의 확장을 보여줄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조코위의 두 번째 아들의 PSI 당수 추대, 메가와티의 손녀 Pinka Hapsari의 중부 자바 제4 선거구 국회의원 1순위 공천, Gerindra 부당수이며 프라보워의 질녀인 Rahayu Saraswati의 자카르타 공천, Golkar 당수인 Airlangga 아들의 서부 자바 공천, PAN의 당수인 Zulkifli Hasan 딸의 Lampung 공천 등은 왕조식 정치가 확대 재생산되고 있음을 예시한다(Sabangmerauke 2024).정치 왕조의 확장과 달리 종교나 종족을 중심으로 한 정체성 정치가 강하게 대두되지 않았음은 이번 선거의 또 다른 특징이다. 이는 이슬람 세력이 이번 선거의 핵심으로 부상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일정 정도 연결된다, 아니스를 지지한 PKS, 그리고 선거 중립을 선언한 NU와 무함마디야가 이번 선거에서 뚜렷한 논쟁점을 만들어내지 못했음은 정체성 정치가 이슬람 내 분파 간 대립을 통해서가 아니라 다른 종교, 특히 기독교를 통해 그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조코위 정권이 임기 중반을 넘기면서 권위주의 강화에 대한 우려가 학계와 시민 사회를 중심으로 제기되었다(신재혁 박희경 2021; 이지혁 2022). 이러한 우려는 국가 기관을 통한 조코위의 선거 간여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프라보워의 당선은 이러한 흐름이 더욱 강하게 확립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권위주의 흐름 속에서도 절차적 차원의 민주주의가 유지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가 정치적 영향력을 독점한 정치 세력의 부재, 그리고 이로 인한 정치 세력 간 타협과 연대였다면, 프라보워 정권의 수립은 기존의 정치적 균형을 깨뜨릴 힘을 가진 새로운 변수이다. 따라서, 향후 프라보워 정권과 기존 정치 세력과의 역학 관계가 인도네시아 민주주의의 진로를 결정할 핵심 요소로 부각했다고 평가될 수 있다. * 각주1) https://www.youtube.com/watch?v=01olcFa7iRc2) 2022년 후보별 지지율 추이에 대해서는 정정훈(2023)을 참조할 것.3) Wikipedia. Hasil Survei Pemilihan Umum Presiden Indonesia 2024. https://id.wikipedia.org/wiki/Hasil_survei_pemilihan_umum_Presiden_Indonesia_20244) 토론회 결과에 대한 여론 조사를 보면, 아니스가 약간의 우위를 보였지만, 프라보워와 큰 차이를 나타내지는 못했다. 간자르 후보의 경우 다른 두 후보보다 지지도가 낮게 드러났다(Caritau 2023).5) 세 후보간 공약차이에 대해서는 신민이(2024: 5-9)를 참조할 것.6) https://www.statista.com/statistics/255235/active-social-media-penetration-in-asian-countries/;https://www.statista.com/statistics/1128147/apac-daily-time-spent-using-social-media-bycountry-or-region/7) 틱톡을 통한 프라보워의 선거 전략에 관해서는 Wahid(2024)를 참조할 것.8) 자카르타 선거를 둘러싼 아혹과 아니스의 대립과 그 결과에 대해서는 김형준(2020), 이지혁(2018)을 참조할 것. * 참고문헌 및 출처는 원문을 참고바랍니다. [30] 동티모르의 교육정책: 역사, 현주소, 그리고 한계 | 정은숙 작성자 동남아연구소 조회수 1502 첨부파일 1 등록일 2024.03.27 초록 신생국가인 동티모르는 지난 수 백년 동안 포르투갈, 일본,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식민지 지배를 받아왔다. 식민지배 기간 동안 교육은 동티모르의 식민지화를 돕는 도구로 전락했고 동티모르인들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식민지 교육은 극소수를 위해서 지배국가 언어와 문화를 가르치면서 주권 없는 이등국민임을 받아들이게 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졌었다. 그러나 이제 동티모르는 신생독립국가로서 동티모르 국민을 위한 교육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동티모르 시민을 성장시키고 민족 정체성을 강화할 수 있는 교육을 시작해야 한다. 동티모르는 인구 반이상이 15세 이하이고 신생아 출생률이 아주 높은 나라이므로 교육의 역할이 더욱더 중요하다. 이번 이슈페이퍼는 동티모르의 교육정책의 역사, 현주소, 그리고 한계를 알아보고자 한다. 먼저 어떤 식민지 교육 정책을 받아왔고 식민지 유산은 무엇인가를 살펴본다. 그 다음은 신생국가로서 동티모르는 어떻게 교육 시스템을 수립했는지 알아본다. 마지막으로 교육정책을 발전시키는 데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동티모르 교육 시스템을 연구하면서 필자가 주장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첫째, 동티모르는 교육의 탈식민화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지만 여전히 식민지 교육의 유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둘째, 지난 20년 동안 교육의 질보다는 양에 초점을 맞출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며 교육의 질은 여전히 많이 부족한 상황이다. 셋째, 모든 국민들이 사용할 수 있는 공용어의 부족이 의사소통의 벽을 만들고 동티모르 국민들이 불평등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교육에 대한 과감한 투자 없이는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이슈페이퍼 바로보기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 한다. 백 년 앞을 내다보는 큰 계획을 수립하는데 교육은 필수이다. 국가형성 그리고 민족정체성을 만들어내는 데에도 교육은 중요하다. 민족주의를 연구한 저명한 정치학자 어니스트 겔너(Eearnest Gellner)는 국가적 차원에서 동질적인 민족의식을 형성하는 것이 국가를 만들어 나가는 데에 중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민족의식 형성을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Gellner 1983). 동질적인 민족의식은 시민들이 의미 있는 삶을 살며, 활발한 시민사회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국가에 대한 소속감도 높여 국가에 기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준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동질적 민족의식이 아직 공고히 생겨나지 않은 신생국가에서 교육의 역할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교육을 통해서 능력 있는 시민들을 길러내고 공통의 가치를 재생산해내며, 민족 정체성까지 단단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이번 이슈페이퍼에서는 2002년 독립한 동티모르가 어떻게 교육 시스템을 세우고 지속시키고 있는지, 또한 문제점과 한계는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특히, 동티모르는 인구 반이상이 15세 이하인 젊은 국가로서 능력 있는 시민을 키우는 데 있어 교육의 역할은 중요하다. 한 국가의 교육의 문제점을 자세히 살펴보면 국가 형성과 민족 정체성 공고화에 걸림돌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동티모르의 식민지 역사와 교육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와 호주 사이에 위치해 있는 조그만 섬나라다. 섬의 반은 인도네시아 영토로 동누사뜽가라주(East Nusa Tenggara)의 일부이며, 섬의 또 다른 반쪽은 동티모르라 불린다. 동티모르의 인구는 130만명 정도이며, 국토 면적은 대한민국의 6분의 1 크기로 강원도 만하다.동티모르는 1700년부터 1975년까지 275년동안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았고 그 중 1943년에서 1945년에는 일본의 식민지를 겪었다. 포르투갈은 국내에서 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카네이션 혁명을 겪으면서 마카오를 제외한 해외 식민지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였다. 이 결과로 동티모르도 1975년 11월 28일에 독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포르투갈에서 독립한지 만 9일만에 인도네시아의 침략을 받고 강제 합병을 당했다.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 지배기간동안 민족말살정책을 경험했고 인구의 20%가 인도네시아 군대의 무력에 희생되기도 했다.1) 무력탄압, 극심한 가난, 기근, 그리고 인권유린을 경험했던 동티모르는 지속적인 독립활동과 게릴라전을 통해 독립을 이뤘다. 1999년에 주민투표를 통해 독립을 결정하였지만 지속되는 내전으로 유엔과도정부(1999년 10월-2002년 5월)를 거쳐 2002년 이후부터 신생독립국가로 독립하게 되었다.오랜 식민지 지배 정책은 동티모르 교육에 큰 영향을 미쳤다. 포르투갈은 동티모르의 대중교육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극소수의 동티모르인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잘 시켜서 포르투갈의 식민지 지배를 돕는 엘리트를 양산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동티모르인들은 어떠한 교육도 받지 못하였다(Butcher 2015). 그리고 카톨릭 포교가 식민지의 또다른 중요한 목적이었기 때문에 동티모르의 부족장들을 관리하는 데에 카톨릭을 이용하기도 했다. 포르투갈의 식민지 교육은 주로 포르투갈의 문화와 가치를 가르쳤고 동티모르 엘리트에게 포르투갈에 대한 충성심을 심어 주기 위해 교육을 했다. 1950년부터 포르투갈은 교육에 대한 투자를 늘리기는 했지만 그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1960년도 말에는 동티모르 인구의 5%만이 글을 읽을 수 있는 정도였다(Yiftach Jon 2004: 726).소수 엘리트에 초점을 맞춘 포르투갈의 교육 정책과는 달리 인도네시아의 교육 정책은 초등교육에 관심을 보였다. 동티모르를 강제 점령한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인들의 반대가 커지자 이들을 빨리 흡수하기 위한 대중교육에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초등교육을 통하여 동티모르인이 인도네시아인이라는 세뇌교육을 일찍부터 시작하려는 의도였다. 강제합병에 반대하여 자녀들을 학교에 등록시키지 않은 학부모들의 의견에도 상관없이 강제입학을 시켰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교육정책에서 포르투갈의 식민지 유산을 지우려 했고 그 일환으로 포르투갈이 사용했던 커리큘럼을 없애고 포르투갈어를 사용 못하게 했다. 대신에 인도네시아 문화와 가치를 가르치고 인도네시아 관점에서 본 역사와 지리를 교육하는데 주력하였다(Yiftach Jon 2004: 724). 초등 교육에 총력을 기울인 인도네시아 정부이지만 고등교육에는 관심이 없었다. 소수의 동티모르 학생들이 인도네시아에 유학을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은 감시를 당했다. 유학생들끼리 연락하고 단합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지향하는 교육의 목적은 동티모르가 인도네시아 영토로서 지속 되는데 필요한 기능인을 양성하는 것이었고 지식인 엘리트 계층을 만들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독립국가에서의 교육정책 신생국가로서 교육정책을 한번도 시행해 본적이 없는 동티모르 정부에게 교육정책을 처음으로 세우는 일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특히,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에서 철수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학교 시설이 불태워졌다. 세계은행의 1999년도 보고서에 따르면, 동티모르 학교 건물의 95%가 없어지고 교실에 있던 가구들은 약탈당하고 교재들은 불태워졌다고 한다(World bank 1999). 인도네시아 지배 기간동안 동티모르의 학교 선생님들은 대부분 인도네시아인들이었다. 동티모르가 독립을 하는 과정에서 인도네시아에서 온 교사들은 서둘러 동티모르를 떠났고 교육을 담당할 동티모르인의 숫자는 턱없이 부족했다.식민지 정부 이후 최초로 세워진 독립 정부는 상황이 열악했다. 그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독립정부는 2002년 당시 15세 이상 인구의 70%가 글을 읽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여성의 경우 문맹률은 남성보다 훨씬 높았다고 한다(World bank 2018/08/23). 전체 인구의 46%가 학교에 다녀 본적이 없었고, 어린아이들은 20% 정도만이 초등학교에 등록하였다(East Timor Planning Commission 2002: 145). 이런 상황에서 동티모르 정부는 어린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확대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잿더미에서 시작한 교육 정책의 시작은 유엔과 세계은행같은 국제 기구의 도움으로 기본 인프라 구축을 할 수 있었다. 또한 학교 등록율을 높이고 문맹률을 빠르게 낮출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 등록율의 경우 2005년엔 68%, 2008년에는 85% 그리고 2013년에는 93%를 달성하였다. 문맹률의 경우 2010년에는 57.8%, 2015년에는 성인의 64.4%가 글을 읽을 수 있어 문맹률도 개선되었으며,2) 2020년에는 인구의 70%가 글을 읽을 수 있었다.동티모르는 짧은 기간 안에 초등교육을 확대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교육의 질과 내용면에는 아직도 문제가 많다. 인도네시아 식민지 지배의 그림자를 지우려 했지만 탈식민지화는 쉽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인도네시아 지배 시기에 쓰였던 커리큘럼을 아무런 평가나 수정 없이 사용했고(Helen 2010: 103-107), 교과서 부족으로 인해 인도네시아 식민지 시기에 쓰였던 교과서를 재사용했다. 교과서에 동티모르인들을 이등국민으로 설명한 부분을 수정 없이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외에도 교사의 심각한 부족으로 인해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이 교사로 채용되었다. 학생들에 대한 학습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학습 내용을 따라가지 못해 중퇴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교육의 문제는 지역 간의 격차문제로 이어지기도 한다. 동티모르의 수도인 딜리(Dili)와 다른 지역과의 차이가 아주 커서 어린 학생들이 딜리로 유학을 오기도 한다. 딜리가 다른 지역보다는 교육의 질 측면에서 나은 편이므로 학생들이 딜리로 모여들고 딜리에 있는 학교들은 과부하를 겪기도 한다.동티모르의 고등교육 동티모르의 일반적 교육문제는 고등교육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동티모르의 고등교육은 각 6년간의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을 마친 다음 시작할 수 있다. 초등과 중등교육은 교육부(Ministry of Education, Culture, Youth, and Sports)가 담당하고 고등교육은 고등교육부(Ministry of Higher Education, Science, and Culture)가 담당한다. 고등교육부에서 학생들의 대학 합격 여부를 직접 결정하고 국립대학교에 통보하는 식이다.동티모르의 고등교육은 전반적으로 열악한 편이다. 고등교육의 방향성이나 목적이 명백하지 않고 교육의 질보다는 학생수를 늘리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동티모르와 태평양 국가들을 평생 연구해 온 호주 학자인 헬렌 힐(Helen Hill)은 동티모르의 교육은 누구를 위한 그리고 무엇을 위한 교육인가에 대한 고민이 빠져 있다고 주장했다.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루려면 교육의 목표를 명백하게 해야 하며 교육의 질이 받쳐주어야 가능하다. 그러나 교육을 받는 인구를 늘리는 수적인 성장에 치우친 나머지 교육이 무엇을 위해 필요한지 교육을 통해서 어떤 시민을 길러내고 싶은지를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고 주장한다.3) 이러한 주장은 대학교육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동티모르국립대의 경우 교수와 강사의 수는 총 400-499명 정도이며 학생수는 20,000명 정도 된다고 한다. 국립대에서 매해 감당할 수 있는 학생수가 3,500명 이하 정도라고 한다. 하지만 고등교육부에서 국립대학교의 역량과는 상관없이 매년 5,000명이 넘는 학생들을 합격시킨다고 한다.4)현재, 동티모르의 고등교육은 2개의 국립대학과 10개의 사립대학으로 이루어져 있다. 국립대학은 2000년에 설립된 딜리에 위치해 있는 동티모르국립대학과 동티모르 남쪽에 위치한 브타노(Betano)라는 도시에 자리잡은 폴리테크닉대학교(Institute of Polytechnic)가 있다. 폴리테크닉대학교는 지역편차를 줄이면서 동티모르 남쪽 지역을 개발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2014년에 설립되었다. 이 대학교에는 한 해 300명 정도의 학생들이 입학하고 있다. 사진 1 동티모르국립대학 (출처: 정은숙) 동티모르국립대학이 설립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유엔과도정부시기에는 대학건립을 지원할 예산을 책정할 수 없어 정부의 지원을 전혀 받지 못했다. 초등교육도 제대로 못 받은 인구가 대부분인데 고등교육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심있는 교수들이 무월급으로 대학을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동티모르 지도자들은 교육에 대한 관심이 많았지만 유엔과도정부에 이들의 목소리는 배제되었고 유엔과도정부는 고등 교육에 대한 관심이 많이 부족했다(Yiftach Jon 2004: 721-737).이런 어려움을 거치면서도 동티모르국립대학교는 점차 국립대학교로서 성장하고 있다. 현재 동티모르국립대학교는 9개의 단과대학으로 구성되어있다. 농과, 자연과학, 사회과학, 법학 대학, 경제/경영대학, 철학, 교육대학, 공과대학, 그리고 의학대학으로 나뉜다. 특히 의학대학은 쿠바로부터 도움을 많이 받아왔다. 쿠바의 의사와 간호사들이 직접 와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지난 20년 동안 1,000명의 동티모르인들이 쿠바에서 의학을 배워 돌아왔다고 한다(Asante et el. 2014; Quiddington 2009/09/05). 흥미로운 점은 역사학과와 사회학과가 존재하지 않는 다는 점이다. 특히 역사학과 부재는 심각한 문제를 보여준다. 동티모르의 역사는 주로 식민지 사관으로 쓰여져 왔다. 탈식민지적 관점에서 동티모르의 역사 연구가 절실한데 국립대학에도 역사학과가 없는 것이다. 동티모르국립대학 총장과의 인터뷰에서 현재 고등교육부에서 역사학 과와 사회학과 설립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다고 했다.5) 조만간 이 두 학과들이 생겨서 동티모르인들의 시각에서 본 동티모르 역사와 사회관련 연구들이 많이 나왔으면 한다.동티모르 대학평가인정기관(Timor-Leste National Agency of Evaluation and Academy Accreditation)은 동티모르의 대학들을 매해 평가하는데 사립대학교의 교육환경은 국립대학교보다 더 열악하다고 한다. 사립대일수록 대체적으로 규모도 작고, 교육시설이 열악하고, 수준도 낮은 편이다. 특히 대학 강사를 구하는 것이 큰 부담이다. 경력을 갖춘 교수들을 찾기도 힘들고 교수들의 월급이 낮으므로 학교에 남으려고 하는 인재들이 줄어들고 있다. 사립대의 경우 학사소지 강사들이 대부분이다. 사립대의 경우 학사학위를 받은 강사들은 한달에 미화 250불 정도를 월급으로 받으며 석사소지 강사가 450불, 박사소지 강사는 600불 정도를 월급으로 받는다.6) 국립대는 사립대보다 나은 상황이지만 아주 크게 다르지는 않다. 석사학위 소지 강사는 600불, 박사학위 소지 강사는 1,000불 정도를 월급으로 받는다.사립대의 경우 학교마다 질 차이가 많이 난다. 대체적으로 딜리공학대학교, 크리스탈 대학교, 그리고 평화대학교가 많이 알려져 있고 평판이 좋은 편이다. 하지만 2020년에 동티모르 대학평가인정기관에서 평가한 자료를 보면 딜리공학대학교, 카노사프로페셔널대학교, 그리고 카톨릭교사양성대학교가 가장 좋은 점수를 받았다. 평가 기준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예를 들어, 대학의 미션과 비전, 대학 행정 인력, 교육 인프라, 재정, 향후 5년간의 계획, 졸업생 취업률, 교수능력 등을 보고 평가한다(Tome Amado 2020/09/15). 사립대학의 경우 카톨릭 재단의 도움으로 운영하는 학교가 많다.이 사립대학교들 중 흥미로운 곳은 동티모르커피대학교이다. 2003년도에 세워진 이 대학교는 에르메라(Ermera)라는 커피가 많이 나는 지역에 세워졌다. 지역에 젊은 인재들을 교육시켜 지역도 발전 시키고 커피관련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커피산업이 많이 낙후해 있기 때문에 새로운 기술과 전략으로 커피산업을 키우려는 의도도 있다. 동티모르의 많은 가구가커피에 의존해서 수입을 벌어들이고 있다. 커피산업은 동티모르에서 석유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수출품이다(Springer 2014/10/11). 이런 의미에서 이 대학교가 지역주민이나 동티모르 경제발전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고 할 수 있다. 아래 표는 동티모르 사립대학교의 설립연도, 위치, 학생규모 그리고 학과 정보들을 취합해 놓았다.표 1. 동티모르의 사립대학교7)대학명설립연도위치학생규모학과딜리공학대학교(Dili Institute of Technology)2002딜리500-999명건설학과, 엔지니어링, 기계학과,컴퓨터 공학, 농업비지니스,관광학, 정치학, 재정학과딜리대학교(University of Dili)2002딜리2,000-2,999명법학, 경제학, 정치학, 공공건강학과,교육학, 엔지니어링동티모르 비지니스 대학교(East Timor Institute of Business)2002딜리2,000-3,999명정보커뮤니케이션 학과, 경제무역학과, 컴퓨터 공학, 엔지니어링평화대학교(University of Peace)2004딜리10,000-14,999명법학, 경제학, 공공건강학과,엔지니어링, 농업학과, 사회과학크리스탈우수대학교(Superior Institute of Cristal)2001딜리N/A컴퓨터 공학, 건강과학 교육학과동티모르동양대학교(Oriental University of Timor Leste)2002딜리9,000-9,999명농업경제학, 법학, 교육학,기술학, 공공건강학동티모르커피대학교(East Timor Coffee Institute)2003글레노,에르메라(Gleno inErmera)1,000-1,999명자료 없음티모르카톨릭대학교(Catholic University of Timor,UCT)2021딜리491명자료 없음카톨릭교사양성대학교(Catholic Institute of TeacherTraining)2003바우카우(Baucau)자료 없음자료 없음카노사프로페셔널대학교(Professional Institute of Canossa)2009딜리자료 없음컴퓨터공학과, 행정학과 복수 공용어와 교육 동티모르 교육의 질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단일화되지 못한 언어이다. 2002년 동티모르의 헌법에는 포르투갈어와 테툼어를 공식어로 지정하고, 이외에 영어와 인도네시아어가 행정업무에 쓰일 수 있도록 업무언어(working language)로 명시하고 있다. 테툼어는 동티모르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던 언어이다. 공공장소에서는 포르투갈어와 테툼어 사용을 장려하고 영어나 인도네시아 언어만을 단독으로 쓰는 것을 추천하지 않는다.복수 공용어와 언어습득의 차이는 국민들을 화합하지 못하게 하는 큰 이유다. 하지만 교육정책은 이에 대해 별다른 해법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동티모르 사람들은 나이, 지역, 교육 수준에 따라 익숙한 언어가 다르다. 1975년 이전에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은 포르투갈어가 익숙한 편이다. 그러나 포르투갈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전체 인구의 5%밖에 되지 않으며 주로 60세 이상이다. 인도네시아 점령기에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은 인도네시아어에 익숙하다(Hasbie 2021/03/26). 전체 인구 중 25% 정도가 인도네시아어를 구사하며, 인도네시아로 된 교재나 방송이 있어서 인도네시아어에 대한 접근성은 높다. 필자는 동티모르에서 인도네시아어를 하면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영어는 2%가 겨우 넘는 인구가 구사하고 있을 뿐이지만 유엔과도정부기간 동안은 주요 업무에 영어가 쓰였다. 여전히 영어의 필요성은 크지만 영어를 제대로 배울 만한 곳은 부족하다. 테툼어의 경우 90%의 인구가 구사할 수 있지만 공식언어로 쓰여진 적이 없기 때문에 표준화가 되어 있지 않고 방언이 많다. 구어로 주로 쓰여졌고 문어로서 발달 되지 않았기 때문에 표준 스펠링도 새로 만들어야 했다. 이로 인해, 테툼어가 학문의 언어나 과학의 언어로 쓰일 수 있을지 의문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테툼어로 강의할 경우 전문용어가 발달 되지 않아 포르투갈어나 영어를 섞어 쓰면서 전문용어를 설명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또한, 테툼어로 쓰여진 책이 심각하게 부족하다.8)이 네 언어 사이에서 동티모르 정부는 어떤 언어로 교육을 할 것인가에 대한 정책이 지속적이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포르투갈어를 선택했다. 정부정책상 2002년부터 2003년은 포르투갈어만이 유일하게 교육에 사용될 수 있는 언어였다. 2004년부터 2007년까지는 테툼어를 교육 언어로 고려하기 시작했지만 정부정책 자체가 공식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Taylor-Leech 2019). 2008년이 되어서야 아르민도 마이아(Armindo Maia) 교육부 장관은 기본교육법 개정을 통해 학교 교육은 동티모르의 고유언어인 테툼어와 포르투갈어를 함께 공용하도록 하였다(Language Magazine 2023/02/14). 이 정책이 시작된 시점에 동티모르 학교 교실의 80%는 포르투갈어가 쓰여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Language Magazine 2023/02/14). 현실적으로 학교 교육에 포르투갈어를 사용하기는 힘들다. 포르투갈어를 구사할 수 있는 교사 수가 아주 적고 포르투갈어를 이해할 수 있는 학생수 또한 적다. 포르투갈에서 교사와 학습 교재 지원을 받고 있지만 수요를 커버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어를 포기하지 않았다.동티모르 수업시간에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은 다음과 같다. 선생님들은 테툼어로 강의 하고 인도네시아어나 포르투갈어로 된 교재를 사용하며, 칠판에는 포르투갈어로 쓰고, 수업 토론은 인도네시아어와 테툼어를 섞어서 쓴다.9) 정부관련 자료들과 모임 및 법률 용어는 주로 포르투갈어가 쓰여진다(Macpherson 2011: 188). 재판 또한 포르투갈어로 행해진다. 이런 다중 언어정책이 개인의 언어 숙련도에 따라 신분의 차이를 만들고, 배제의 정치를 만들게 되며, 비효율성이 생기게 된다.그러면 왜 공식언어에 포르투갈어가 지정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동티모르 정부와 교육부에서는 포르투갈어를 사용할 경우 경제적인 이익에 대해 말하고 있다(Language Magazine 2023/02/14). 그러나 경제적인 이익을 생각한다면 영어가 가장 이로울 것이다. 공식언어 책정에 영향을 미친 요인들을 살펴보면 경제적인 이유보다는 문화적, 역사적 이유가 더 큰 것 같다(Taylor-Leech 2011). 첫째, 인도네시아 점령기에 저항운동을 하던 동티모르인들은 75세대 라고 불리는데 독립 이후에 75세대들의 대부분이 동티모르의 정치를 지배하고 있다. 이들의 대부분이 포르투갈 식민지 제도에서 교육을 받았고 독립 투쟁을 하면서 이들 사이에서는 포르투갈어가 인도네시아 식민지에 대항하는 저항의 언어가 되었다. 둘째, 식민지경험을 연달아 했던 동티모르로서는 이들만의 국가 정체성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했다. 특히 이웃 국가들인 인도네시아와 호주와 다른 점을 부각시키려 했기 때문에 영어와 인도네시아어가 공식어에 지정되지 않았다. 셋째, 동티모르에는 수많은 부족 언어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테툼어 이외에 외부의 언어를 가져와 정체성을 굳히는 것도 방법이라 생각했다. 여러 부족 언어 중 테툼어가 가장 널리 쓰였던 언어였으므로 테툼어가 공식언어의 하나로 선택되었다. 그러나 하나 이상의 공용어를 가지고 교육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심지어 대부분의 인구가 공용어 중하나 이상을 구사할 수 없는 상황에다 갈팡질팡한 교육언어 정책은 상황을 더욱더 악화시켰다. 대학교수들이 본 대학의 문제점 동티모르국립대학교에 재직하고 있는 교수와 강사들을 만나 이들이 느끼는 대학의 문제점에 대해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10) 필자는 미국아시아학회(Association of Asian Studies)11)에서 동남아학회장(2022-2024)을 맡고 있다. 미국아시아학회는 동북아(한국과 일본), 동아시아 및 내륙 아시아(중국과 내륙 아시아 국가), 동남아, 남아시아 학회로 나누어진다. 기존의 아시아학회는 주로 동북아와 동아시아 중심이었지만 이제 동북아 중심의 아시아 연구를 넘어서 동남아, 그리고 남아시아 연구를 지원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동티모르의 학자들이 연구하고 발표하며 다른 외국 학자들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려고 한다. 필자는 지난 2023년 7월 미국아시아학회를 대표해서 동티모르에 방문하게 되었다.포커스 그룹에서 많이 나왔던 내용은 강의와 관련되었다. 많은 교수들은 동티모르에서 석사를 마치고 강의를 하기 시작한다. 박사학위를 받은 교수들도 있지만 소수에 불과하다. 어떻게 강의를 해야 하는지 트레이닝도 없이 강의를 시작하고 어떻게 커리큘럼을 짜야 하는지에 대한 지원이 전혀 되고 있지 않다. 학과별로 가르쳐야 하는 과목들은 이미 고등교육부에서 정해서 통보하고 교수 스스로 과목의 내용을 정할 권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한 과목당 수강 학생수가 100-200명 되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대형 강의실이 없기 때문에 같은 과목을 여러 번에 나눠서 강의를 해야 한다. 이럴 경우 여전히 한 과목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주제가 다른 세 과목을 강의할 경우 대형 강의실의 부족으로 각 과목당 두세 번씩 강의를 해야 하는 경우가 흔하다. 사진 2 동티모르국립대학 도서관 (출처: 정은숙) 공통언어의 부재는 대학에서도 마찬가지의 문제점을 가진다. 대학교수들은 포르투갈어와 테툼어로 강의를 해야하는데 교수도 학생도 포르투갈어가 능숙하지 않기 때문에 보통 포르투갈어나 영어로 슬라이드만 만들고 주로 테툼어로 강의를 한다. 그러나 테툼어로 된 교재가 전무한 상태이므로 교재는 영어교재 복사본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전반적으로 교재가 부족하므로 사용할 수 있는 교재를 구하는 것이 큰 과제이다. 동티모르에는 국립도서관이 아직 없고 동티모르국립대학도 이제 막 2023년에 도서관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국립대학 도서관에는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가 한 대밖에 없고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책 수도 아직은 아주 적다. 동티모르의 초대 대통령(2002-2007)이었고 현 국무총리인(2023-현재) 사나나 구스마오가 사재를 이용해서 만든 도서관이 유일하게 도서관의 역할을 하고 있다. 사진 3 사나나 구스마오 도서관 (출처: 정은숙) 이외에도 연구를 하고 싶지만 연구할 시간도 연구 비용도 지원이 안되며 대학원이나 연구소 등이 주로 국제기구들이 요청하는 연구를 많이 해주는 편이다. 학자 개인의 연구는 하기 힘든 환경이다. 이번 필자의 방문을 시작으로 미국아시아학회는 2023년부터 동티모르학자들이 영어로 논문을 출판할 수 있도록 협력하고 있다. 한국동남아학회도 한국의 동남아학자들과 동티모르학자들이 함께 협력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면 좋겠다. 결론 동티모르는 2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많은 것을 이룬 나라다. 긴 식민지배에도 불구하고 독립 후 민주주의를 이루었다. 2006년 한때 민간정부와 군대 간의 갈등, 동서 지역차와 부족 간 갈등으로 민주주의의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여전히 지속적으로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있다(Cotton 2007).동티모르는 교육시스템을 세우는 데에 걸림돌이 많았다. 독립 당시 대부분의 학교 건물이 불탔고 학생들을 가르칠 교사도, 교재도 없었다. 식민지 유산으로 얼룩진 교육 시스템을 바꿔야 했고, 교육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국민들에게 글을 가르쳐야 했다. 낙후한 교육시설, 심각하게 부족한 교육 인력, 그리고 공통교육언어의 부재 등은 교육을 발전시키는 데에 큰 걸림돌이 된다. 특히, 모든 국민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공통언어의 부재가 국민들을 분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교육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를 통해 포르투갈어와 테툼어를 둘 다 제대로 구사할 수 있는 새로운 세대가 만들어지지 않는 한 당분간 이 문제점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각주1) https://gsp.yale.edu/case-studies/east-timor2) Timor-Leste Population and Housing Census 2015.3) 헬렌 힐과의 인터뷰, 2023년 7월 12일.4) http://timor-leste.gov.tl/?p=26803 print=1 lang=en; 총장과의 인터뷰.5) 동티모르국립대학교 총장과의 인터뷰.6) 동티모르 대학평가인정기관의 기관장인 닐튼 마우(Nilton Mau)와의 인터뷰.7) 이 표는 필자가 각 대학교 웹사이트를 통해 얻은 정보들과 미국 동남아학회 내부 보고서를 인용하였다.8) 동티모르 국립대학교 교수들과의 인터뷰.9) 대학교수와의 인터뷰, 2023년 7월 12일.10) 대학교수들과 포커스 그룹 인터뷰, 2023 년 7월 11일.11) 미국아시아학회 홈페이지. https://www.asianstudies.org/* 참고문헌은 첨부파일 내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29] '1027 작전'은 미얀마의 봄을 앞당길 수 있을까? 작성자 동남아연구소 조회수 1116 첨부파일 1 등록일 2024.02.01 초록2023년 10월 27일, 미얀마 북동부에 자리한 샨주 북부의 12개 도시에서 세 개의 소수민 족무장단체 연합군인 형제동맹 이 군부군에 대한 일제 공격을 개시했다. 공격이 개시된 날 짜를 따 1027 작전 으로 명명된 이 군사 행동을 시작으로 반군부 무장저항운동이 맹렬히 전개되기 시작했고, 수많은 군부 진지와 전초기지, 주요 무역로와 도시들이 저항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형제동맹이 첫 공격의 주체이긴 했으나, 1027 작전 이후 미얀마 전역으로 확 산한 저항군의 연합공세는 오랜 무장투쟁의 역사를 가진 올드보이 와 신흥 저항군의 연대 라는 특징을 보인다. 이처럼 다양한 저항 세력이 공동전선을 형성하여 군부를 공격하는 일 은 미얀마 역사상 전례 없던 일이며, 또한 동남아시아에서도 최강의 군대로 꼽히던 미얀마 군대가 지난 몇 달간 보여주고 있는 것과 같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모습 또한 이 나라 역사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일이다. 이런 점에서 1027 작전은 3년을 끈 미얀마 군부 대 시민 의 긴 대결이 새로운 국면에 진입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은 쿠데타 이 후 무력 충돌로 전환된 미얀마 상황에서 1027 작전이 갖는 의미를 고찰한다. 이를 위해 현 상황과 관련된 역사적 배경을 간략히 설명하고, 이 연합공세의 주요 특징과 전개 현황, 그 리고 이 과정에서 중요 변수로 지목되고 있는 중국의 행보가 갖는 의미를 분석한다. 끝으로 현 국면이 미얀마의 봄을 앞당기는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기 위해 앞으로 맞서야 할 과제들을 제시한다.이슈페이퍼 바로보기변방의 북소리2021년 2월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미얀마 군부는 전국적인 규모로 전개된 시민들의 평화시위와 시민불복종운동을 무력으로 잔혹하게 진압하였다. 봄 혁명(Spring Revolution) 으로 불리는 이 나라 시민들의 저항이 거세어질수록 군부의 총성도 높아졌고, 그에 따라 수많은 시민이 목숨을 잃고 삶을 빼앗겼다. 이에 미얀마 시민들은 보호책임(R2P: Responsibility to Protect)을 외치며 국제사회의 개입을 요구했지만, 아무런 응답도 받지 못했다. 결국 이 나라 시민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무기를 들었고, 군부와 저항운동에 나선 시민의 대치는 쿠데타가 발발한 지 3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병력과 무기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는 군부에 맞서 싸우는 일은 흡사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에 비견할 만한 것이어서, 군부의 무차별적인 포격과 공습에 목숨을 잃거나 고통받는 시민들의 희생으로만 이 긴 싸움의 막이 내리는가 하는 절망감도 엄습했다. 그렇게 다시 또 고통스러운 한 해를 마치게 되는가 싶었던 지난해 말, 이러한 상황에 일대 전환점이 될 만한 사건이 이 나라의 북동부 변방,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샨주(Shan State) 북부에서 발생했다. 2023년 10월 27일, 중국과의 국경무역 주요 관문에 자리한 12개 도시에서 일단의 소수민족무장단체(Ethnic Armed Organizations, 이하 EAOs)가 군부군과 친군부 민병대를 향해 일제 공격을 개시한 것이다(Fishbein et al. 2023).공격이 개시된 날짜를 따 1027 작전(Operation 1027) 라 명명된 이 군사 행동을 이끈 것은 20여 개에 이르는 미얀마 내 EAOs 가운데 세 단체―미얀마민족민주동맹군(MNDAA: Myanmar National Democratic Alliance Army), 따앙민족해방군(TNLA: Ta ang National Liberation Army), 아라칸군(AA: Arakan Army)―가 연합한 형제동맹(Brotherhood Alliance) 이었다. 이 첫 공격을 시작으로 샨주 북부에 자리한 수많은 군부 진지와 전초기지, 주요 도로는 빠른 속도로 동맹군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그 여파는 곧 샨주를 넘어 미얀마 전역으로까지 확산되었다. 미얀마 남동부의 까렌니주(까야)와 꺼잉주에서는 1107 작전 , 1111 작전 과 같은 후속 작전도 전개되었다. 군부가 사수하고 있는 네피도와 양곤, 만달레이 등의 주요 대도시 인근 지역에서도 EAOs와 시민방위군(PDF: People s Defence Forces)의 연합군이 주요 도로를 봉쇄하고 군부 진지를 점령했다는 소식이 연일 들려온다(Michaels 2023).1027 작전은 대립하는 양측 모두 아무것도 남지 않을 파국을 향해 기력을 다 소진해 가는 듯 보였던 미얀마의 내전 상황이 새로운 국면에 돌입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쿠데타 이래 저항운동 진영과 일정한 거리를 두며 군부와 휴전 상태에 있던 형제동맹이 돌연 군부를 상대로 대대적인 협공을 벌인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이들이 저항운동 진영과 함께 연합공세를 펼치고 있는 상황은 더욱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을 압도하여 가장 놀라움을 안긴 것은 스스로 땃마도(Tatmadaw) 라는 존칭을 붙여 국가 안보와 주권의 수호자임을 자처해온, 동남아시아에서도 가장 강력한 군대로 손꼽히는 이 나라 군대의 패배였다. 미얀마 군부에 대해 이처럼 전방위적인 공격이 가해진 전례도 없었지만, 군대가 그처럼 무력하게 진지와 무기를 빼앗기고 고전하는 모습도 독립 이래 미얀마 역사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일이다. 반대로 2년이 넘도록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던 저항군은 1027 작전을 시작으로 두 달 만에 400여 개의 군부 진지와 무기를 빼앗고 20여 개의 도시를 탈환했다. 저항군이 탈환한 첫 도시인 사가잉 지역의 껄린(Kawlin) 타운십에는 국민통합정부(NUG: National Unity Group)의 지휘 아래 민간 행정이 복원되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The Irrawaddy 2023/12/08).이 글은 지난 3년 가까이 교착 상태에 빠져 있는 듯 보였던 미얀마 군부와 저항세력 간의 대치 국면을 새로운 단계로 도약시킨 1027 작전에 대해 조명한다. 이를 위해 현재 미얀마 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상황과 관련된 간략한 역사와 1027 작전의 전개 현황과 결과를 살펴볼 것이다. 아울러 1027 작전이 수행되고 있는 주요 장소 및 경로와 관련하여 밀접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까닭에 중요한 변수로 지목되고 있는 중국의 행보에 대해서도 간략히 살펴볼 것이다. 끝으로 미얀마 역사상 초유의 사태라 할 수 있는 이 사건이 2021년 쿠데타 이후 미얀마 상황에서 갖는 의미를 고찰하고 앞으로의 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소수민족무장단체와 군부: 오랜 악연과 공생의 역사미얀마에서 버마족 중심의 중앙정부와 소수민족 간 반목과 충돌의 역사는 길다. 저지대의 버마족 영토를 에워싸고 있는 소수민족주의 여러 민족집단은 독립 직후인 1940년대 후반부터 자치를 요구하며 무장단체를 결성하여 정부군에 맞서왔고, 자치를 향한 이들의 투쟁은 쿠데타 직전까지도 계속되었다. 이처럼 긴 충돌의 역사는 1824년부터 1948년까지 미얀마를 지배했던 영국의 식민지 통치 전략이 남긴 후유증이기도 하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민족집단만도 135개에 이르는 다민족 국가 미얀마에서 영국은 분리 통치(divide and rule) 전략을 구사하여 민족집단 간의 분열을 조장하였다. 전체 인구의 70%가량을 차지하는 버마족 영토는 직접 통치하면서, 식민당국이 접근하기 어려운 소수민족 거주 지역에는 상당한 수준의 자치를 허용하였다. 꺼잉족(카렌)을 비롯한 일부 소수민족에게는 군인이나 관료, 경찰 등과 같은, 식민 지배를 받는 사람들로서는 결코 쉽게 오를 수 없는 요직을 허용하여 우대하기도 했다. 소수민족을 군인과 경찰로 동원하여 버마족 중심의 독립운동을 짓밟게 하는 등, 식민 통치 기간 영국이 활용한 분리 통치 전략은 미얀마 내 여러 민족집단 간의 갈등을 증폭시켰고, 그 후유증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Walton 2008; Sadan 2013). 1948년에 마침내 독립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얀마에서 국가 건설의 과정이 여전히 미완인 상태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그 후유증은 크다.1947년 아웅산이 삥롱회담에서 약속했던 소수민족 자치의 꿈은 이듬해 독립을 맞은 버마에서 실현되지 않았다.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정치적 혼란과 진통 속에서 소수민족들은 곧 자치와 독립을 요구하며 버마족 군대에 맞서 무장투쟁에 나섰다. 1949년 결성된, 미얀마 소수민족 정치기구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까렌민족연합(KNU: Karen National Union)은 까렌민족해방군(KNLA: Karen National Liberation Army)을 창설하여 버마군에 맞섰고, 이어 까렌니, 까친 등의 다른 소수민족집단도 까렌니군(KA: Karenni Army), 까친독립군(KIA: Kachin Independence Army) 등의 군대를 만들어 자치를 위한 투쟁에 나섰다. 독립 이래 수십 년간 중앙정부에 도전했던 버마공산당(CPB: Communist Party of Burma) 내부에서도 버마족 지도부에 항거한 소수민족 사병의 반란이 발생하여 1989년에 해산되었는데, 그로부터 다시 네 개의 새로운 무장단체가 창설되었다. 1027 작전을 개시한 형제동맹의 일원인 꼬깡족 무장단체 MNDAA와, 미얀마 내 EAOs 중 가장 강력한 단체로 꼽히는 연합와군(UWSA: United Wa State Army)이 버마공산당으로부터 갈려져 나와 새로 창설된 무장단체들이다.이처럼 독립 직후부터 다수의 소수민족집단이 자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무장투쟁을 택하였고, 그 결과 2010년대 중반까지 미얀마에는 20여 개에 이르는 민족집단별 무장단체가 활동하기에 이른다. 이 가운데 가장 잘 조직화한 단체는 미얀마 북동부 샨주 북부, 중국과의 국경지대를 거점으로 삼는 UWSA와, 샨 북부와 미얀마 최북단인 까친주의 중국 국경지대에서 활동하는 KIA, 그리고 쿠데타 전까지 군부와 맹렬한 전투를 벌여온 형제동맹의 세 단체, 즉 MNDAA와 TNLA, AA 등이다. 각 단체가 보유한 병력에 관한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대략 UWSA가 20여만 명, KIA가 정예 부대 1만여 명, 예비군 1만여 명, 꺼잉족 무장단체 KNLA의 경우 1만 4천여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Johnson, 2009; Routray 2013). 2009년 결성된 AA의 경우 지난 10년간 매우 빠른 속도로 성장한 무장단체로, 혹자는 그 규모를 3만 명으로까지 추산한다(Kyaw Hsan Hlaing 2023).주류집단인 버마족 국가에 대항하여 분리 독립 혹은 자치를 요구하며 출발하긴 했지만, 이들 소수민족집단 무장투쟁의 역사는 집단 내 그리고 집단 간 분열과 분리, 중앙정부와의 기회주의적 연대와 갈등으로 점철되어 있다(Sharma 2014). 같은 민족집단 사이에서도 균열이 발생하여 친군부와 반군부로 노선을 달리하여 맞서기도 했다. 독립 직후부터 미얀마 정규군에 맞서 싸워온 KNU의 경우 소수인 기독교도가 KNU 지도부를 장악한 데 불만을 품은 불교도들이 1994년 민주카렌불교도군(DKBA: Democratic Karen Buddhist Army)을 조직함에 따라 분열되는 진통을 겪었다. DKBA는 이후 정부군으로부터 막강한 화력 지원을 받아 KNU와 1988년 민주화 운동 시기 결성된 학생무장투쟁조직 전버마민주전선(ABSDF: All Burma Students Democratic Front)의 요새들을 함락시키는 등의 행동으로 군부에 힘을 보탰다. 소수민족집단 내부의 이러한 분열은 결과적으로 반군부 무장투쟁의 힘을 약화하는 결과로 이어졌다(정문태 2015).1962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군부는 소수종족무장단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독립 직후부터 시작된 EAOs와의 전투를 통해 군부는 자신들의 영향력과 역할을 강화해가기 시작했다. 군부는 당시 소수민족집단과 연방제를 논의하던 의회 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들이 내세운 명분은 반란을 진압하고, 연방제가 초래할 수 있는 국가의 분열 혹은 연방의 해체를 막는다는 것이었다(Kipgen 2011; Rajah 1998). EAOs의 무장투쟁은 이러한 군부에 대항하여 독립과 자치의 달성뿐 아니라 반군부 투쟁까지 포괄하는 형태로 진화하였다. 이후 군부는 소수민족 내부 그리고 EAOs 간의 분열과 반목을 조장하여 전반적으로 그 세력을 약화하면서 이들의 거버넌스가 미치는 영토, 특히 많은 경제적 이권이 자리하는 국경지대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 2011년까지 이어진 50년의 집권기 동안 미얀마 군부는 정전 협상에 동의하는 일부 EAOs를 국경수비대(BGF: Border Guard Forces)와 민병대(militia) 등의 형태로 정부군 아래 흡수하는 한편, 일정 수준의 자치권과 경제적 이권을 허용하면서 그 대가로 정전 협상에 응하지 않는 다른 EAOs 집단들을 견제하고 무력화해 왔다.2010년, 미얀마에서는 20년 만에 선거가 치러져 이듬해 준민간정부가 출범하였고, 이어 2015년 선거를 통해 완전한 민간 정부로 정권이 이양되는 격변을 맞았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미얀마 정부는 더욱 적극적으로 소수민족집단과 평화 협상을 추진하였으며, 일정 정도 성과도 거두었다. 하지만 그 성과는 부분적이었을 뿐, 무장조직 세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미얀마 북부 까친주에서는 이러한 정치적 변화와 무관하게 선거도 진행되지 않았고, KIA와 군부군이 지속적으로 천연자원과 목재, 그리고 이 지역을 관통하여 중국으로 향하는 석유ㆍ가스수송관 건설 프로젝트의 이권을 둘러싸고 전투 벌였다. 이와 함께 이전에 군부와의 정전 협상 및 전투를 통해 부분적이나 자치권을 얻었거나 관할 영토를 확보하였던 EAOs 역시 여전히 무장을 해제하지 않은 채 활동하고 있었다(Routray 2013).1027 작전을 주도한 형제동맹에 속한 세 단체인 MNDAA와 TNLA, AA는 군부와 EAOs, 그리고 EAOs 상호간의 복잡하고도 중층적인 갈등과 분쟁의 역사를 잘 보여준다. MNDAA는 중국계 꼬깡족 무장단체로, 1989년 버마공산당의 내부 반란으로 해체되어 재조직된 네 개의 무장단체 중 하나이다. 독립 이래 미얀마 정부의 큰 골칫거리 중 하나였던 버마공산당이 해체되자 군부는 새로 창설된 네 무장단체에 휴전을 제안했고, 아직 힘이 약했던 이들 네 단체는 군부의 휴전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를 대가로 MNDAA는 샨주 제1 특별구역(Shan State Special Region 1) , 오늘날 꼬깡자치구(Kokang Self-Administered Zone) 로 명명된 지역에 대한 관할권을 할당받았다(Lintner 2023/11/06). 하지만 MNDAA는 2009년 군부가 대대적으로 EAOs와 정전협정을 체결하면서 조건으로 내걸었던 무장해제와 군부 휘하의 국경수비대(BGFs)로 전환하라는 요구를 거부하였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군부가 MNDAA에서 이탈한 라이벌 꼬깡그룹과 함께 수행한 군사 공격을 받아 꼬깡자치구를 잃었다. 이후 영토를 되찾기 위한 MNDAA의 싸움은 계속되었지만, 군부의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인해 번번이 패퇴했던 쓰라린 경험이 있다.TNLA는 빨라웅(Palaung)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따앙족(Ta ang)을 대표하는 무장단체이다. 따앙 은 이 민족집단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이름이며, 이들은 샨주 북부의 험준한 산지에서 오랜 세월 국가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채 살아왔다. 하지만 독립 이후 점진적으로 이들이 사는 영역으로까지 침범해 오는 버마족 국가에 맞서 이들 역시 다른 민족집단들처럼 자치를 요구하는 정치적 목소리를 내며 국가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네윈이 쿠데타를 일으킨 1962년에 따앙족은 빨라웅민족전선(PNF: Palaung National Front)을 결성하여 군사정부에 맞서 싸웠고, 이후 1976년에는 새로 빨라웅국가해방기구(PSLO: Palaung State Liberation Organization)를 결성하여 1988년 미얀마의 민주화운동이 발발하던 해까지 계속 군부와 싸우며 자치를 요구해 왔다. 하지만 PSLO는 1988년의 민주화운동 이후 들어선 신군부와 1991년에 휴전 협정을 체결한 데 이어 2005년에는 군부의 강요로 무장을 해제하고 싸움을 중단하였다. 그 대가는 혹독했다. 휴전을 받아들인 국경지대의 다른 민족집단과 마찬가지로 따앙족 사회 역시 불법으로 유통된 마약으로 인해 높은 중독률과 그로부터 파생하는 다양한 문제들로 고통받았다(ICG 2023/09/04).군부와의 휴전 이후 마약 등을 비롯한 사회문제가 심각해지고 정체성과 자치에 대한 의식마저 상실할 위기에 처하여 따앙족은 기능을 상실한 PSLO 대신 새로운 정치조직으로 빨라웅국가해방전선(PSLF: Palaung State Liberation Front)을 결성하였다. 2009년, 군부가 국경지대 EAOs에게 국경수비대로 전환하라는 압박을 가하자 PSLF는 PNF 시절부터 동맹이었던 KIA의 지원을 받아 TNLA를 결성하여 쿠데타 전까지 군부에 맞서 싸워 왔다.AA는 과거 영국 식민지 시기에 아라칸(Arakan)이라고 불렸던 영토, 즉 여카잉주(Rakhine State)의 자치를 위해 2009년 창설된 여카잉족 무장단체이다. 그 역사는 상대적으로 짧지만, AA는 지난 10년 내 미얀마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한 무장단체로 손꼽힌다. TNLA와 마찬가지로 창설될 당시에는 KIA의 도움을 받았지만, 현재는 이를 능가할 정도의 병력을 보유한 무장단체로 성장하였다. AA가 2018년부터 2년 넘게 군부에 맞서 싸운 전투는 쿠데타 전까지 지난 수십 년간 미얀마에서 발발한 군사적 충돌 가운데 가장 격렬한 것이었다고 평가받는다(Kyaw Hsan Hlaing 2023). 이처럼 AA가 군부를 위협할 정도로 급성장한 배경에는 여카잉 자치에 대한 열망을 고취시켜 온 그 지도부의 정치적 노력 덕분이기도 했지만, 다른 무장단체와 동맹관계를 맺었던 것도 중요한 요인으로 꼽힌다. 특히 미얀마에서도 가장 강력한 단체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KIA의 지원을 받아 미얀마-중국 국경지대에서 AA가 결성된 것은 이 단체가 성장의 기반을 다지는 데 도움이 되었다. 떼인세인 정부가 전국평화협정(NCA)에서 AA를 비롯한 몇몇 단체들을 협상의 대상에서 제외한 일은 샨주 북부 및 까친주의 EAOs들이 동맹관계를 구축하여 공동 대응에 나서게 만드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2016년 12월, AA는 KIA, MNDAA, TNLA와 함께 북부동맹(Northern Alliance)을 결성하여 군부에 맞서 공동 행동에 나섰는데, 이 중 세 단체가 2019년 결성한 단체가 바로 형제동맹이다.반군부 저항운동의 진화: 올드보이와 신생 저항군의 연대쿠데타 직후부터 전국적으로 전개된 시민불복종운동과 평화시위에 대한 군부의 잔혹한 진압 이후 반군부 저항운동은 무장투쟁으로 전환되었다. 2021년 3월 중순 군부의 폭력으로부터 시위대를 보호하기 위해 시민들의 일부가 자발적으로 무장하면서 지역방위군(LDF: Local Defense Forces)을 형성한 것을 그 시발점으로 본다. 2022년 4월 현재 LDFs는 전국적으로 400여 개, 최소 30,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시민방위군(PDF: People s Defense Forces)은 NUG가 2021년 9월 군부에 대한 전쟁을 선언하면서 출범시킨 전문 군사 조직이다(Maizland 2022). 2022년 기준 미얀마 전역에서 활동하는 PDF 병력은 약 65,0000여 명 정도로 추산된다. NUG는 이와 함께 타운십(township, 한국의 구(區) 수준 행정단위) 수준의 방위와 치안을 목적으로 활동하는 시민방위팀(PDTs: People s Defense Teams)을 구성하였다. PDT는 주로 도시 게릴라전과 새로 저항군에 합류한 병력에 대한 기본 훈련, 대중 동원 및 PDF를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 PDT는 미얀마 전체 330개 타운십 가운데 250개 타운십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특히 쿠데타 초기부터 주도적으로 반군부 저항운동을 전개해온 사가잉과 마그웨 등지에서 활약이 두드러진다(Ye Myo Hein 2022).LDF가 다른 두 조직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율적으로 활동하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이 세 유형의 시민 무장조직의 90%가 NUG와 연계되어 있으며, NUG는 이들 모두를 포괄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고자 노력하고 있다. 세 유형의 조직 모두를 PDF로 통칭하기도 하는데, 이들은 다수 종족이자 그간 미얀마 군부의 중추를 구성하였던 버마족이 주축이 되어 결성되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이러한 PDF 구성은 소수민족집단과 마찬가지로 주류집단인 버마족 또한 군부에 맞서 싸우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의미 또한 발산함으로써 쿠데타 이후 저항운동에 참여하는 소수민족과의 연대를 더욱 공고히 하는 데도 일조한다. 까친, 까렌니, 친족 등으로 구성된 여러 EAOs가 PDF의 결성과 훈련, 운영 및 작전 수행을 지원하고 있으며, 일부 PDF는 각 EAOs 휘하로 들어가 함께 활동하기도 한다.1) 이전의 무장투쟁이 소수민족 거주 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된 것과 달리 PDF는 만달레이와 양곤 등 대도시를 포함하여 미얀마 전역에서 활동하면서 점유한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는 데 주력한다는 특징을 보인다. 이에 따라 국토의 2/3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도시 게릴라 활동을 포함한 반군부 무장투쟁이 전개되었고, 2022년 중반까지 미얀마 전체 타운십의 절반가량이 PDF의 활약에 힘입어 군부의 통제를 벗어났다는 추정도 나온다(Maizland 2022).신생 무장 조직인 PDF의 활발한 움직임과 더불어 군부와 오랜 적대 관계에 있던 강력한 EAOs의 반군부 투쟁 합류 여부는 전세에 큰 변화를 가져다줄 중요한 변수로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적어도 지난 2년 동안으로만 보자면, 미얀마 EAOs 중 가장 강력한 UWSA를 비롯한 샨주의 주요 EAOs와 여카잉주의 AA와 같은 무장단체들은 반군부 세력과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오히려 쿠데타 상황을 기회로 삼아 자신들이 관할하는 영토 내에서 주도권을 강화하는 데 더 주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미얀마 전역으로 확산한 저항운동을 진압하는 데 주요 병력을 투입해야 했던 군부로서는 훨씬 강력한 과거의 적들과 마주치는 것을 원치 않았고, 일부 지역에서는 자신들이 지원하던 또 다른 무장단체가 이들에 의해 밀려나는 상황을 방조하기까지 했다. 이외도 군부는 일부 EAOs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회담을 가지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소수민족집단을 회유하는 데 공을 들였다. 일부 EAOs는 PDF가 휴전 협정 대상에서 빠졌다는 이유로 휴전 논의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는 등 EAOs마다 각기 다른 입장을 취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샨주 북부 지역의 상황으로 보건대 쿠데타 이후의 혼란 상황은 반군부 저항운동에 가담하지 않은 여러 EAOs들에게 나름 호기로 작용했음이 분명해 보인다.이처럼 쿠데타 이후 군부와 EAOs 간에는, 비록 언제 깨질지 알 수 없는 임시적인 것이었긴 하나 휴전 상태가 유지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형제동맹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1027 작전은 군부가 결코 바라지 않았을 전개, 즉 이들이 반군부 저항운동에 합류하여 전선이 다면적으로 확장되는 시나리오가 현실로 구현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형제동맹은 이 작전의 목표 중 하나가 미얀마 국민의 공통된 열망인 군사독재를 종식 시키는 것임을 명확히 공표했고, 이와 함께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수많은 저항군이 사전에 조율이라도 된 양, 한편에서는 주요 거점을 점령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군부군이 증원군을 파견하는 도로를 봉쇄하거나 후미를 공격하면서 점차 수도인 네삐도가 있는 중앙을 향해 진격하고 있다.이전까지 미얀마 역사에서 EAOs들에 의해 전개된 무장투쟁과 비교할 때 1027 작전 이후 군부를 향해 일제히 전개되고 있는 무장투쟁에서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군사행동의 규모와 공격에 가담한 여러 무장조직 간에 치밀한 군사적 조율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특히 다수의 EAOs가 군사독재 타도라는 단일한 목표 아래 연합하여 군부를 공격한 일은 미얀마 역사상 전례가 없다. 1027 작전이 시작된 초기에는 이것이 어느 정도로나 EAOs와 NUG를 중심으로 한 저항 세력과 연계된 것인지, 양측 간에 사전 협의와 조정은 있었는지 등과 관련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공격이 개시된 직후 NUG가 발표한 지지 성명이나, 첫 공격 이후 여러 전장에서 들려온 소식들은 그와 같은 우려를 말끔히 씻어내기에 충분해 보인다. 오히려 그간 이들이 표면적으로 유지해 오던 중립적인 태도와는 달리 최소 일 년 전부터 NUG를 비롯한 반군부 저항 세력과 함께 공동 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준비가 이루어져 왔음을 시사하는 여러 단서도 있다. NUG와 저항운동에 합류한 EAOs가 군사 행동을 조율하기 위해 구성한 여러 조정 메커니즘 가운데 하나인 동맹관계위원회(ARC: Alliance Relations Committee)에 형제동맹의 세 단체도 포함하고 있다는 점도 그중 하나다. TNLA의 경우 조직 차원에서 직접적으로 NUG를 상대하지는 않았지만, 따앙 정치인들과 시민사회 지도자들로 구성한 따앙정치협의위원회(TPCC: Ta ang Political Consultative Committee)를 통해 간접적으로 NUG와 소통했다. TNLA 총서기의 동생인 마이윈투(Mai Win Htoo)가 NUG 연방부(minister for federal union affairs)의 차관직을 맡고 있다는 사실로부터도 이 단체가 반군부 진영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 왔다는 사실이 확인된다(ICG 2023/09/04).EAOs간의 연대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군사작전이 보다 효율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 배경이 되고 있기도 하다. 2023년 1월 5일, 꼬깡자치구의 수도 라우까이(Laukkai)에 있는 군부의 지역작전사령부가 MNDAA에 의해 점령되었다. 6명의 장성을 포함하여 총 2,395명의 군부군이 총 한 발 쏘지 않고 백기를 들었다고 한다(Radio Free Asia 2023/01/05). 라우까이는 온라인 사기 및 도박 산업의 중심지이자 샨주 북부에서 가장 큰 군사 기지인 지역작전사령부가 있는 곳이다. 따라서 라우까이 점령은, 다음 장에서 서술할, 1027 작전의 세 가지 목표 중 하나에 근접하는 성취라는 점에서는 물론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MNDAA에게 라우까이 점령은 2009년, 당시 지역사령관이었던 민아웅흘라잉에 의해 빼앗겼던 꼬깡자치구에 대한 통제권을 탈환한다는 의미까지 갖는다.전투 없이 MNDAA가 라우까이를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도시로 향하는 모든 경로를 차단하고 주변의 전초기지들을 차근차근 확보하여 군부군이 증원권과 군수품을 공급받을 수 없게 한 덕분이었다. 저항군의 협공과 여러 전선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된 전투가 없었더라면 가능하지 않았을 일이다. 그러므로 라우까이 점령은 MNDA를 포함하여 저항군 모두가 합심하여 거둔 승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중국 변수1027 작전과 이후의 공세에 대해 다수의 전문가가 이 과정에 대한 중국의 개입 여부에 관심을 보인다. 작전이 개시된 샨주 북부가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으로서 중국과의 국경무역 요지일 뿐 아니라 중국이 미얀마에서 추진 중인 대규모 프로젝트의 상당 부분이 이 지역에 자리한다. 따라서 이처럼 막대한 이권이 걸린 지역에서, 더구나 이전부터도 중국과 긴밀한 관계에 있던 형제동맹이 큰 혼란이 야기될 수 있는 군사 행동에 나서는 일 자체가 중국의 묵인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라는 진단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그간 중국은 대미얀마 외교에서 정부 대 정부 차원의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는 한편, 정부와 대립 관계에 있는 세력과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양면적인 전략을 추구하였다. 과거 미얀마 정부와 대립 관계에 있던 버마공산당과 당 대 당 차원에서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으로 정부 대 정부 차원에서 군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것이 그 전형이다(Tin Maung Maung Tan 2003). 버마공산당이 해체된 이후로도 중국은 미얀마 정부와의 관계에서 균형을 잡아줄 상대를 찾아냈다. 버마공산당에서 갈려져 나온 네 개의 무장단체를 비롯한 국경지대의 EAOs가 그들이다. 그중에서도 UWSA는 오랫동안 중국이 국경지대의 EAOs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 중요한 지렛대 역할을 해왔다. 현재 미얀마에서 전개되고 있는 군사작전에서도 마찬가지다.중국의 56개 소수민족 중 하나이기도 한 와족(Wa)을 대표하는 무장단체 UWSA는 민족적 연계와 버마공산당 시절의 인연 모두에서 중국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단체이다. 이를 배경으로 미얀마 EAOs 가운데 가장 강력한 단체로 성장한 UWSA는 2009년에 국경수비대로 전환하라는 군부의 요청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나 1989년 휴전의 대가로 와자치구(Wa Self-Administered Division)를 할당받은 이래 군부와 큰 충돌 없이 휴전 상태를 유지해 왔다. 북부동맹 이나 형제동맹 등의 형태로 다른 EAOs와 동맹관계를 구축하고 있지는 않지만, UWSA는 군부와 오랫동안 교전해온 다른 EAOs와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중국과 이들을 연결해 주는 역할을 맡아 왔다. 2017년 UWSA가 주도하여 7개 EAOs와 함께 구성한 FPNCC는 사실상 중국이 평화 중재자 로서 군부와 EAOs 간의 관계를 조율하기 위해 만든 정치기구에 가깝다.하지만 UWSA가 EAOs 사이에서 누리는 강력한 지위의 원천은, 자체적으로 보유한 최강의 군사력을 통해서도 입증되는, 중국제 무기와 장비의 주된 공급자라는 점이다. UWSA의 이러한 역할은 현재 미얀마에서 진행 중인 군사적 대치 상황에서 특히 그 중요성이 크다. 비록 1027 작전이 개시된 이래 벌어지는 전투에 대해서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UWSA가 형제동맹의 주요 무기 공급자라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Lintner 2023). 드론을 비롯한 신형 무기의 동원이 저항군이 갖는 군사적 열세를 극복하고 전장을 넓혀가는 데 게임 체인저 가 되고 있다는 분석에 비추어 보면(Reuters 2023/12/20), 이러한 장비의 조달자 또는 매개자로 추정되는 UWSA가 앞으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에 대해 귀추가 주목되는 것은 당연하다.1027 작전이 개시되던 날 형제동맹이 발표한 성명서는 중국의 영향력을 암시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성명서를 통해 형제동맹이 제시한 이 작전의 목표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시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그 수단이 되는 자기방어의 권리와 영토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한다. 둘째, 국가행정평의회(SAC)의 지속적인 포격과 공습에 단호히 대응하고, 나아가 미얀마 국민 전체의 공통된 열망을 받들어 억압적인 군사독재를 척결한다. 셋째, 중국-미얀마 국경지대에 만연한 온라인 도박 사기를 퇴치하고 관련 업체와 SAC 및 민병대를 단속한다(Three Brotherhood Alliance 2023/10/27).첫 번째와 두 번째 목표는 형제동맹에 속한 세 단체의 이해관계와 직접적인 관련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각자가 관할권을 주장해 오던 영토에 대한 주도권을 강화함과 동시에 이 작전이 군부를 상대로 한 싸움임을, 그리고 이를 위해 저항 세력과 연대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쿠데타 이후 이들 단체가 개별적으로 추구해온 자체의 목표가 미얀마 국민 전체의 공통된 열망 인 군사독재 타도라는 목표로 수렴된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는 군부의 돈줄 역할을 해 왔던 꼬깡자치구의 불법 사업을 근절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성명서가 폭로하고 있듯이 이 범죄경제의 배후에는 군부와 친군부 국경수비대가 있다. 꼬깡자치구의 수도인 라우까이는 이러한 범죄경제의 중심지이며, 이는 곧 이로부터 발생하는 상당한 수익이 미얀마 군부의 주머니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범죄경제의 중심지인 라우까이를 탈환하는 것은 곧 형제동맹 중 하나인 MNDAA가 2009년 군부와 국경수비대에게 빼앗긴 꼬깡지역에 대한 주도권을 되찾고, 아울러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는 군부의 중요한 자금줄 하나를 차단한다는 목표와도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온라인 사기 산업을 소탕한다는 목표는 또한 추악한 범죄경제의 배후인 부패하고 불법적인 군사정권을 쓰러뜨리고 깨끗한 사회를 새로 건설하기 위한 행동으로서 이 작전이 갖는 윤리성과 합법성을 강조하는 효과까지 부여해 준다(Guzman 2023).이와 함께 세 번째 목표는 중국의 요구와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미얀마-중국 국경지대를 근거지로 활개를 치고 있는 각종 온라인 도박, 보이스피싱, 스캠 등 온라인 사기 산업은 그 자체가 돈을 갈취하는 범죄행위일 뿐 아니라 중국과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등의 인접 국가뿐 아니라 멀리 아프리카 국가들의 국민까지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인신매매를 당하거나 고수익 보장 일자리의 유혹에 속아 감금된 채 사기 행각을 위한 강제 노동에 동원되는 것으로 알려져 근래 매우 심각한 국제 문제로 부상하였다. 이 사기 산업은 특히 중국 정부의 커다란 골칫거리가 되어 왔다. 사기 산업이 주로 중국인 범죄조직에 의해 운영되면서 수많은 중국인이 금전적 갈취나 인신매매를 당하는 등 피해가 속출하고 있으나, 중국 정부가 이를 효과적으로 단속하지 못하면서 중국 내 여론이 악화하고 있기 때문이다(Qian 2023). 이에 중국은 인적 피해와 함께 최소 400억 달러에 달하는 자본이 유출되고 있다고 주장하며 미얀마 군부에 이 사기 온상을 대대적으로 단속하고 주범을 체포하라는 압박을 가해왔다. 수차례에 걸친 강력한 항의와 압박에도 불구하고 미얀마 군부는 형식적인 수준에서만 단속하며 이 범죄 온상을 방치해 중국의 불만을 샀다(Lintner 2023).이러한 상황에서 형제동맹이 제시한 세 번째 목표는 작전을 주도한 형제동맹과 중국 간의 긴밀한 관계 때문에 여러 추측과 해석을 낳는 지점이 되고 있다. 형제동맹이 1027 작전을 통해 이 사기 산업의 온상을 소탕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은 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중국의 요구에 응하는 한편 친중 EAOs가 NUG 측과 연대하는 것을 꺼리는 중국이 이 작전에 반대하고 나서는 것을 막기 위한 협상 카드로 제시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분명한 것은 중국이 직면한 문제인 국경지대의 범죄 온상을 소탕한다는 목표를 내세움으로써 형제동맹은 군부를 상대로 하는 군사 행동에 대한 중국의 암묵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중국이 UWSA를 비롯한 친국중계 EAOs의 결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라는 진단은 틀리지 않은 듯 보인다. 하지만 현재 진행되는 상황을 살펴보건대 EAOs의 관계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라고까지는 보기 어려운 측면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우선 1027 작전 이후 저항군과 군부 간의 세력 관계가 변화하는 추이에 따라 중국의 입장이 변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그 과정에서 중국의 의지가 그대로 관철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그 예로 들 수 있다.1027 작전 초기에 중국은 사기 산업 근절이라는 단기적인 이익을 추구하여 국경지대에서 펼쳐지는 전투를 용인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전선이 급속도로 확장되고 정부군이 수세에 몰리기 시작하자 중국은 2023년 12월부터 평화중재자(peace maker) 를 자처하며 군부와 EAOs 간의 회담을 적극 주선하고 나섰다. 전술했듯이 저항군의 공세가 집중되고 있는 지역은 중국의 경제적 이익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중국으로서는 이 지역에서 불안정성이 증대되는 상황을 결코 바라지 않는다. 형제동맹 및 이들과 연합한 저항군의 공격이 집중되고 있는 샨주 북부의 주요 도시들은 온라인 사기 산업의 중심지라는 점에서만 중요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국경검문소가 있는 친쉐호(Chinshwehaw)와 무세(Muse) 등의 도시는 중국과 미얀마 간 전체 국경무역의 91%가 이루어지는 중요한 무역 중심지이다. 또한 중국이 중국-미얀마경제회랑(CMEC) 건설 계획의 일환으로 미얀마 북부에 건설한 3개의 국경간경제협력구역(Cross-Border Economic Cooperation Zone) 가운데 2개도 이 지역에 있다. 이를 포함하여 저항군은 중국의 주요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는 다수의 프로젝트 현장이 자리하는 도시들을 공략하여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통제하고 있다. 이외에도 만달레이와 무세 간 도로를 비롯한 주변 지역이 저항군에 의해 봉쇄됨에 따라 만달레이-무세 철로와 중국으로 가는 석유ㆍ가스 파이프라인과 국경 간 전력망 등도 위협받는 상황이다(ISP 2023/11/12). 경제적 이해관계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분쟁 상황으로 인해 발생한 대규모 난민이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유입될 수 있다는 데 대한 우려도 크다. 2015년에 벌어진 미얀마군과 반군의 격렬한 전투로 3만 명이 넘는 꼬깡족이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피신한 일이 있었던 만큼(Clapp and Tower 2021), 그때보다 더 격렬하고 장기화할 조짐까지 보이는 현재의 분쟁 상황에 더욱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또한 EAOs의 작전을 묵인했던 초기와 달리 국경지대의 전투가 점점 더 격렬해지자 중국은 저항군에 밀려 수세에 몰린 군부에 힘을 실어 주기 시작했다. 양측의 힘의 균형을 맞추는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11월 28일부터 윈난성 국경으로 인민해방군을 보내 실사격 훈련을 포함한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곧이어 세 척의 해군 함정을 양곤으로 보내 4일간 군부를 친선 방문 한 데서 이를 엿볼 수 있다(Reuters 2023/11/28). 걷잡을 수 없는 혼란으로 치닫고 있는 국경지대의 상황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군부에 보내는 무언의 경고로 해석할 수 있는 측면도 있지만, 국가 대 국가 차원에서 군부를 국가 안보 문제를 논의할 중국의 외교 상대로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행동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이 군부와 형제동맹 간의 평화회담을 주선하였다는 것은 중국은 군부와 EAOs 간의 무력 충돌이 길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분명히 보여준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당시 군사적 균형이 저항 세력 쪽으로 기우는 추세였다는 점에서 보자면(Ye Myo Hein 2023b), 형제동맹을 향해 싸움을 멈추거나, 적어도 NUG와 연대하여 협공하는 일을 중단하는 것이 휴전의 조건으로 제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12월 11일부터 시작된 회담은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언급 없이 그저 긍정적인 결과 를 얻었다는 중국 측 대변인의 발표를 통해 알려졌다(AFP 2023/12/11). 첫 회담 소식이 발표된 지 열흘이 지난 12월 22일부터 24일까지 중국은 한 번 더 군부와 형제동맹을 불러 모아 회담을 주선했다. 회담은 아무런 합의에도 도달하지 못한 채 결렬되었지만(Akhtar 2023), 해를 넘겨 2024년 1월 11일 중국은 다시 또 한 차례 회담을 주선하였다. 이 회담에서 양측은 샨주 북부에 한하여 교전을 중단하기로 합의했고, 이로써 국경지대의 안정을 추구하고자 한 중국의 노력도 결실을 맺은 듯 보였다.중국이 미얀마의 분쟁 당사자들을 불러 모아 일시적이나마 전투를 중단하도록 나선 점은 그 자체로 중국이 이들에 대해 갖는 영향력을 드러내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중재를 통해 중국이 얻은 이점은 단지 국경지대의 안정만은 아닌 것 같다. 이미 저항군의 공세가 샨주 북부를 넘어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상황이었던 만큼, 형제동맹과 군부 간에 이루어진 휴전은 수세에 몰린 군부의 숨통을 살짝 틔워 주는 정도일 뿐이다. 그보다는 샨주 북부에 집중된 중국의 투자를 보호하고 교전으로 인해 중단된 국경무역을 재개하는 등의, 사실상 중국에 더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다고 볼 수 있다(The Irrawaddy 2024/1/12). 중재 노력이 이루어지는 동안 중국은 이보다 더 노골적으로 실익을 추구했다. 여카잉주의 짜욱퓨 특별경제구역과 심해항 건설 프로젝트의 양허계약 부록에 서명한 것이 그것이다. 이 두 사업은 중국이 말라카해협을 우회하지 않으면서 인도양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매우 중요한 사업이나 지역 주민들의 지속적인 반대는 물론 계약의 세부 내용과 관련하여 신중한 논의가 필요했던 터였다(The Irrawaddy 2023/12/27b).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군부가 이에 응했다는 것은 곧 저항군의 공세에 대적할 수 없을 만큼 군부가 힘이 약해져 있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중국의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사실을 시사한다.중국이 중재한 군부와 형제동맹 간의 평화 회담은,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곧 파기되었다. 형제동맹의 한 축인 TNLA에 따르면 군부가 협정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샨주 북부 지역에 공격을 가하고 있다는 것이다(Radio Free Asia 2024/1/17). 군부가 휴전 합의를 어기고 공격한 데 대해 비난하면서 형제동맹은 정전 협상이 피치 못한(unavoidable) 것이었다고 강조한 데서 엿볼 수 있듯이 정전 합의는 형제동맹의 의지에 따른 것이기보다는 중국의 강력한 압력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Irrawaddy 2023/1/19). 중국이 긍정적인 결과 를 얻었다고 발표한 첫 회담 이후로도 형제동맹은 미얀마 국민의 목표를 결코 무시하지도, 작전을 중단하지도 않을 것이며, 공통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람들과 손을 잡을 것 이라고 입장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The Irrawaddy 2023/12/13). MNDAA와 TNLA가 주도하던 초기에는 상대적으로 활동이 두드러지지 않았던 AA가 이후 여카잉주에서 대대적인 공세에 나서고 있는 점도 그 연장선에 자리하는 것으로 보인다. 군부와 형제동맹 간에 이루어진 정전 합의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것으로 예측되었으며, 공동으로 저항 전선에 합류하고 있는 다른 EAOs 역시 이를 형제동맹의 배신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이를 저지하려 나선 중국에 대해 반감만 키우는 역효과를 냈을 수도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Ioans 2024). 이러한 면면은 국경지대의 안정을 회복하고 주요 프로젝트를 보호하기 위해 가능한 한 빨리 분쟁 상황을 끝내고 싶어 하는 중국의 바람과는 달리, 그리고 필시 중국의 중재가 힘을 내주길 바란 군부의 기대와는 달리 형제동맹이 중국의 신호에 따라 움직이는 것만은 아니고 자신들에게 더 유리한 조건을 달성하기 위해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있음을 시사한다.전장 이면에 남아 있는 과제들1027 작전이 개시된 이래 미얀마 곳곳의 전장에서 날아드는 저항군의 승전 소식에 3년 가까이 지속된 미얀마의 봄 혁명이 머지않은 미래에 완수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어린 전망이 등장하고 있다. 실제 군부가 궁지에 몰려 있다는 징후는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저항군이 군기지 점령에 성공했다거나, 장성을 포함한 미얀마군의 대규모 백기 투항했다는 소식, 샨 북부에 공습을 가하던 군부의 군용기를 EAOs가 격추했다는 소식, 저항군에 쫓겨 미얀마군이 중국이나 인도 국경을 넘어 도피했다는 소식 등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시시각각 날아든다.하지만 현재까지 전장에서 거의 일방적으로 저항군에 밀리는 형국이라고는 하나 미얀마 군부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저항군의 전방위적 공격에 더욱 얇게 분산될 수밖에 없는 군부군은 땅에 떨어진 군인들의 사기와 지상전에서의 열세를 공중폭격과 포격, 심지어 화학무기까지 동원하여 만회하려는 작전에 돌입했다. 저항군이 탈환한 껄린은 곧 군부군에 의해 봉쇄되어 외부와 단절된 상태이다. 1960년대 네윈 시절부터 군부가 소수민족주에서 식량과 자금, 정보 및 신병 모집을 차단할 목적으로 도입한 뺘레이퍄(Pya Ley Pya; 4 Cuts) 전략은 저항군이 탈환한 버마족 영토에서까지 전개되고 있다(The Irrawaddy 2023/12/27a).PDF를 비롯한 저항군의 열악한 무장 수준은 지금까지 거둔 성과에도 불구하고 아직 갈 길이 먼 군부와의 정면 승부를 낙관할 수 없게 하는 취약한 부분이다. PDF 관련 보고서에 따르면 PDF 전체 병력 중 60%만이 무장하고 있으며, 그나마도 20%가량만이 군용 무기를 갖추었고 나머지 40%는 현지에서 생산된 저품질 무기를 무장했다고 한다(Ye Myo Hein 2022). 군부의 정규군 병력에 허수가 많다는 점은 최근의 교전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지난 10여 년간 군부가 신병 충원에 어려움을 겪어왔고, 쿠데타 이후 이탈한 인원도 적지 않다는 점을 감안할 때 군부군 규모는 통상 알려진 40만 명에 훨씬 못 미치는, 많아야 25만 명이나 20만 명 정도일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Lintner 2023). 그렇다고는 해도 이전까지 미얀마군 으로 불렸던 군부군은 여전히 이 나라에서 가장 힘 있고 잘 무장된 병력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1027 작전의 성공 뒤에는 이 작전을 주도한 형제동맹의 무장 상태가 매우 중요했으며, 군부군으로부터 탈취한 무기를 전시하는 일이 저항군의 승리를 알리는 중요한 의식으로 자리 잡았을 만큼 무장 수준은 이 전투의 성패를 가를 만큼 중요한 변수가 되고 있다. 군부와의 오랜 교전 속에서 단련되고 제대로 무장한 KIA나 KNLA와 같은 EAOs와의 연대는 무장 수준이 낮은 PDF의 한계를 보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지만, 각기 다른 목표를 가진 EAOs와의 연대가 언제까지 공고히 유지될지는 기약하기 어렵다. 라우까이 점령 이후 MNDAA의 행보나 군부와 형제동맹 간의 회담 결과, UWSA나 그 배후에 자리하는 중국의 태도 등을 주시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2021년 쿠데타 발발 이후 가장 크게 피해를 입은 것은 무고한 시민들이다. 유엔 보고에 따르면 쿠데타가 발발한 2021년 이래 미얀마에서 발생한 실향민 수는 200만 명이 넘는다. 1027 작전이 개시된 작년 10월 이후 두 달이 채 안 되어 여기에 다시 66만여 명이 추가되었다(UNOCHA 2023/12/15). 특히 군부는 강력한 화력을 사용하고 주민에 대한 집단적 처벌 행위 통해 대응하고 있으며, 저항군이 도시지역에 대한 직접 공격으로 전환하면서 부수적인 피해도 발생하는 상황이다. 군부의 무차별적인 공습으로 인해 피해는 더욱 커지고 있다. 특히 공격이 집중된 샨주 북부의 주민들은 극심한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현재의 분쟁과 관련된 모든 당사자, 즉 군부와 EAOs, 그리고 NUG를 구심점으로 하는 저항세력 및 시민사회 조직의 목표가 모두 이 지역에 집중되고 있는 까닭에 샨 주민들은 그 중간에 갇힌 채 이동 제한과 극심한 물가 상승, 재산 손실과 압수 등으로 인한 고통을 겪고 있다. 군부 쪽 민병대와 저항군 양측 모두로부터의 강제 징집 요구까지 겪는 실정이다(Human Rights Watch 2023). 시민을 보호하는 것은 1027 작전은 물론 모든 저항 세력이 추구하는 첫 번째 목표이다. 이는 저항에 합류하지 않은 민족집단의 구성원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미얀마 위기의 조속한 해결을 위해서는 1027 작전이 펼쳐지는 전장과는 또 다른 전장에서 해야 할 일이 많다. 먼저 국제사회는 NUG와 다른 저항군 세력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그들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을 제공해야 할 것이다.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이재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도 시급하다. 이들에 대한 국제적 지원은 인도적 차원에서는 물론 군부에 맞서는 저항 세력이 자원을 현재의 공세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중의 효과를 가져다줄 것이다. 전장에서의 조정이 우선인 현 상황에서는 다소 이른 감은 있지만, 현재 저항에 참여하고 있는 NUG와 EAOs도 군부가 제거된 이후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과정을 준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당장은 군부 종식이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연합 작전을 펼치고 있지만, 각 집단은 서로 다른 정치적 목표를 추구한다. 예를 들어 NUG는 연방민주주의 국가를 목표로 내세우고 있지만, AA와 같은 단체는 연맹체(confederation) 성격의 느슨한 국가 연합의 형태로 여카잉족의 독립국가를 세우기를 희망한다(Hein Htoo Zan 2023). 이 글에서 간략히 다루긴 했지만, 중국과 미얀마 내 다양한 행위자와의 관계도 앞으로 계속 주시해야 할 지점이다. EAOs는 물론 NUG와 군부 모두에게 중국은 여전히 중요한 변수이다. 이들을 모두 아우르며 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폭넓은 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제안이 나오는 이유이다(Michaels 2023; Selth 2024).쿠데타가 발발한 지 3년이 되어가는 현재까지도 미얀마 위기의 끝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상에서 언급한 과제들을 염두에 두고 차근차근 해결해 간다면 1027 작전이 열어놓은 현재의 국면은 누군가의 말처럼, 지난 3년 동안 지속된 시작 단계에서 도약하여 필시 좀 더 희망적일 다음 단계로 진입하기 위한 시작의 끝(end of the beginning) 이 될 수 있을 것이다(Htet Min Lwin and Thiha Wint Aung 2023).* 각주1) PDFs 관련 내용은 미국평화연구소(the United States Institute of Peace)와 윌슨센터(Wilson Center)의 객원 연구원인 예묘헤인(Ye Myo Hein)이 쓴 Understanding the People s Defense Forces in Myanmar (2022) 에 근거하였다.* 참고문헌은 첨부파일 내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28] 인도네시아와 함께 성장하는 초등 수업 현장 이야기 작성자 동남아연구소 조회수 1928 첨부파일 1 등록일 2023.12.18 초록이번 이슈페이퍼는 2023년 1년간 인도네시아 한 국가를 중심으로 여러 교육과정을 운영한 초등 수업 현장 이야기이다. 인도네시아 현지 학교와 함께 진행한 온라인 국제교류 수업, 현장체험학습 방문을 통한 오프라인 대면 교류, 한국 초등학교 현장으로 3개월간 파견근무를 나온 인도네시아 초등 현장 교사들의 수업을 통해 성장하는 초등학생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글을 통해 독자들은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두근거리는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체험해보길 바란다.이슈페이퍼 바로보기이야기 열기: Halo, Apa kabar?Halo, Apa kabar? 인도네시아의 첫 인사말로 수업 현장 이야기를 시작한다. 첫 시작부터 이렇게까지 많은 활동을 인도네시아와 함께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당시에 할 수 있는 일을 하다 보니 여기까지 흘러오게 되었고, 지금 이렇게 전북대 동남아연구소와도 연이 닿아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필자는 2023년 APEC국제교육협력단(ALCoB, 이하 알콥) 교사로 선발되었고, 알콥 협력 프로젝트로 국제교류 수업을 운영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라북도교육청에서는 국제교류수업을 운영 하는 학교 중 일부를 선발하여 해외 현장체험학습을 지원하는데 마침 좋은 기회라 두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기로 하였다. 학생들과 함께하는 국제교류활동은 처음이라 학생들에게는 정말 생소하지만 필자에게는 가장 익숙한 나라인 인도네시아를 택하였다. 인도네시아 선생님들과 학생들을 온라인으로 만나기 전에 이 나라에 대한 문화교육을 학습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전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재학 중인 인도네시아인 학생 니탈리아 (Nitalia Wijaya)의 도움을 받아 인도네시아 문화 특강도 진행하게 되었다. 총 4시간 분량의 특강은 다채로운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 투어 Go Go, Aku Bisa Bahasa Indonesia(나는 인도네시아어를 할 수 있어요) , 인도네시아 전문가 되기라는 주제로 진행되었다. 니탈리아는 학생 교육을 전공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수업을 잘 구성하여 운영할 줄 알아서 흥미로웠던 기억이 난다. 인도네시아와 함께한 온라인 국제교류 수업필자가 속한 4학년 4개 학급은 올 한해 학년 특색 교육활동을 운영하였다. 지역 주민으로서의 나, 세계 시민으로서의 우리 라는 큰 프로젝트 목표를 세우고 그 하단에 전주다움, 탄소중립, 국제교류 세 가지 영역을 편성하였다. 전주다움 활동을 통해 우리 지역을 알아가고, 탄소중립 활동을 통해 세계 시민적 가치를 배우고 실천하며, 국제교류 활동을 통한 문화 다양성 교육을 계획하였다. 특히 국제교류 수업은 인도네시아 2개 학교(SDN Ujung Menteng 01 Pagi, SDIT Salsabila Al Muthi'in)와 함께 진행되었다. SDN Ujung Menteng 01 Pagi는 인도네시아의 수도인 자 카르타 지역에 위치한 공립학교로, 이 학교 4학년 2개 학급과 양국의 문화교류 위주의 수업 교류를 계획하였다. 그리고 현장 체험학습으로 방문하여 대면 교류 프로그램도 계획하였다. SDIT Salsabila Al Muthi'in은 인도네시아 문화수도라고 불리기도 하는 족자카르타 지역에 위치한 사립 초등학교인데 3~6학년으로 구성된 국제교류 동아리 학생들과 공동 교과 주제수업을 진행 하기로 하였다. (1) 전주다움초등 4학년 사회 교과는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 관하여 학습하고 지역민으로 성장하는 교육과정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전주다움 영역 활동을 통해 우리 지역에 관하여 탐구하고 지역의 주민으로서 정체성을 찾아가도록 교육과정을 운영하였다.사진에 소개된 우리 지역 현장체험활동 외에도 교과 시간을 통해 우리 지역에 관하여 조사하고 알아가는 활동이 진행되었다. 인도네시아 로컬학교와 국제교류활동 과정 중에 컬쳐박스 물품을 보내는 활동이 있다. 우리나라와 우리 지역을 대표하는 물건들을 그 설명과 함께 보내는 활동인데, 컬쳐박스 물품을 정하거나 설명자료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전주다움 활동은 큰 도움이 되었다.(2) 탄소중립 실천학급탄소중립에 관하여 학습하고 실천하는 활동으로, 세계 시민으로서 지켜야 하는 중요한 가치들 을 배우는 활동이다. 지구의 날 소등행사 챌린지, 탄소중립 온책읽기 활동1), 재활용 소재를 활용 한 장바구니 만들기, 멸종위기 동물과 지구 온난화 이야기 등 환경교육을 테마로 활동이 이루어 진다. 이러한 활동은 국제교류 공동 주제 활동으로 적용하기에도 좋은 소재로 쓰인다. (3) 온라인 국제교류 수업앞서 언급한 인도네시아의 2개 학교와 협약서를 작성하고 국제교류 수업을 운영하였다. 온라 인 교류 수업은 수업에 참여하는 집단에 따라 문화교류 수업과 공동 교과 주제 수업으로 나누어 운영하였다. 1) 문화교류 수업먼저 일반적인 초등학교 4학년 학생들의 영어 구사력은 그다지 높지 않아서 한국 학교 4학년 4개 학급학생 95명과 인도네시아 학교 4학년 2개 학급학생 64명의 온라인 교류수업은 한국-인도네시아 문화교류를 테마로 진행하였다. 인도네시아 협력교사(Ms. Rita Suryani, SDN Ujung Menteng 01 Pagi)와 사전에 공동 주제를 설정하고 2개의 화상 온라인 수업 채널을 열어 채널 하나당 한국에서 2학급, 인도네시아에서 1학급이 입장하였다. 첫 수업은 각 학교의 교사를 중심으로 인사 및 나라 소개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학교와 학급에 관하여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시간 관계상 각 학급에서 5명의 대표학생을 뽑아 학생인사를 진행하였고, 마지막 순서로 각국의 전통 노래를 불러주는 시간으로 첫 수업을 마쳤다. 첫 인사로 수업이 끝나고 나면 다음부터는 교류 협력 선생님들 간의 협의로 정한 주제를 가지고 다양한 활동을 시도해 볼 수 있다. 필자는 패들렛 게시글 업로드 활동 등으로 학생 자기소개, 우리 가족 주말 브이로그 공유 활동을 진행하였고, 양국의 음식문화를 알기 위해 발표자료를 만들고 실시간 발표수업도 진행하였다. 국제교류 문화 수업 주제를 고민하는 교사들이 많은데 필자가 고민해본 그 외 예시 활동을 제시한다면 다음과 같다. 2) 공동 교과 주제 수업공동 교과 주제 수업은 인도네시아 해외 현장체험학습을 떠나기 위해 선발된 4학년 16명의 한국학생들, 그리고 국제교류동아리 학생인 3-6학년 20명의 인도네시아 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하였다. 이 학생들은 영어 구사력과 프로젝트 활동 참여에 대한 적극성이 큰 학생 그룹이라 아직 어린 초등학생들이지만 공동의 교과 주제 활동을 시도해보았다. 교과에서 공동 수업 주제를 찾아 이를 진행하는 일은 교사간 사전 소통이 더욱 중요하고 더 많은 노력이 드는 일이지만, 이를 통해 학생뿐만 아니라 교과를 지도하는 교사로서 성장하는 성취감도 더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공동수업의 활동이 해외 현장체험학습의 방문지를 선택할 때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화산과 지진 관련 수업을 진행하면서 학생들이 인도네시아의 화산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고, 공동수업의 심화 활동으로써 인도네시아 말랑(Malang) 지역에 위치한 브로모 화산을 탐방하기로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국제교류 해외 현장체험학습1학기부터 실시한 온라인 국제교류 수업의 참여도를 비롯한 일련의 선발기준을 적용하여 선발된 16명의 4학년 학생들과 함께 10월에 인도네시아 해외 현장체험학습을 떠나게 되었다. 일반적인 해외여행과 이 국제교류 해외 현장체험학습의 차별점은 모든 일정이 교류수업 활동의 목적성을 띄고 있다는 점이다. 화면 속에서만 만나던 인도네시아 선생님과 학생들을 직접 만나는 일은 설레는 일이었다. 직접 웃고 떠들며 친구가 되는 시간은 정말 특별하다. 현장 체험학습 기간 동안 교류수업 협력학교인 자카르타의 SDN Ujung Menteng 01 Pagi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학교를 입장하는 순간부터 전율이 느껴진다. 학교 학생, 선생님, 학부모, 자카르타 교육청 초등교육 담당 부서원들까지 모두 일렬로 도열하여 양 나라의 국기를 흔들며 환영해주던 모습은 평생 잊지 못할 장면이다. 이 날을 위해 무려 3개월을 준비했다고 한다. 학생과 교사들이 준비한 다채롭고 짜임새 있는 문화공연과 문화체험 부스는 필자의 유년시절 대운동회와 학습발표회를 준비하던 초등학교 시절이 떠오르기도 한다. 온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함께하는 그 어릴적 학교 행사들 말이다. 인도네시아 학생들은 전통 우산 춤(tari payung)2), 닭 춤(tari ayam)3)과 태권도 공연 등 다채로운 공연을 준비하였고, 선생님들은 학교 교실수업 참관 프로그램과 학교 정원에서 직접 재배한 작물들을 이용하여 다양한 음식 문화 코너를 준비했다. 수파르디(Supardi) 교장 선생님은 "학생들은 본인이 직접 심고 기른 과일을 따먹으며 노력의 결실이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닫고 인내심과 책임감을 항상시킬 수 있다"며 "교육은 교실 안 뿐만 아니라 햇빛이 내리쬐는 텃밭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라고 이야기했다. 학교 학부모회는 한국에 남아있는 학생들까지 고려해 문화 기념품을 준비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 여러 지역을 대표하는 다양한 음식들을 고민하여 점심식사를 준비해주기까지 하였다. 한국팀은 기존에 전달한 한국 컬쳐박스 물품과 인도네시아 한인회에서 협조하여 기부받은 한국책 등을 합하여 교류학교에 코리안 코너를 만들어 주었다.이번 현장체험학습을 기획할 때에 필자는 교류학교 방문뿐만 아니라 자카르타에서 아주 특별한 행사를 준비했다. 학교의 초청손님으로서 대접만 받지 않고, 반대로 돌려줄 만한 일이 없을까 고민을 하다 한인니문화연구원(Indonesia Korea Culture Study)의 협조를 받아 코리아센터를 대관하여 교류협력학교의 학생, 선생님, 학부모들을 초청하는 특별한 행사를 준비하게 되었다. 이 행사에는 주인도네시아 대사관 박수덕 공사님, 자카르타 교육청 에르니따 나삐뚜(Ibu Ernita Napitu) 초등교육 국장님도 내빈으로 참석하였다. 인도네시아에 사는 한국 교민이자 선배 학생(김재이, Sinarmas World Academy 11학년)의 특별한 국제교류 경험 이야기 특강으로 문을 연 교류 행사가 시작되었다. 자리에 참석한 한국과 인도네시아 초등학생들은 자랑스 럽게 한삼춤4), K-pop 랜덤댄스, 실랏 공연(silat)5), 나비춤 등을 선보였다. 특히 마지막 순서로 인도네시아 전통악기 앙끌룽(angklung)을 이용하여 참가자 모두가 하나의 곡을 연주하며 소통과 화합을 즐기는 순간을 보냈고, 한국과 인도네시아 각각의 잔치상을 준비하여 함께 음식을 나누는 시간도 가졌다. 한국과 인도네시아 초등학교 학생들의 특별한 교류활동 자리를 빛내주기 위해 참석해주신 주인도네시아 대사관 관계자 분들이 참 감사했다. 한국에서 자카르타의 행사를 준비하는 동안 내 머리 속 상상의 교류행사를 현실화시키는데 물심양면 도움을 주신 한인니문화원 사공경 원장님, 정윤희 부원장님을 비롯한 문화원 관계자분들의 헌신이 있었다. 한국과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함께하는 행사는 한국어와 인도네시아어로 동시에 진행되었는데, 자카르타 한국학교 부설 영재교육원 담당 운영교사 시절에 영재수업의 인연으로 만난 김재이 학생이 진행 뿐 아니라 선 배교사 특강 역할까지 맡아주어 더 멋진 행사를 기획할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도 움이 모여 만든 특별한 행사가 이날 참석한 많은 사람들에게 오래 기억에 남고 한국과 인도네시 아가 조금더 가까워지는 작은 씨앗이 되길 바란다. 자카르타에서 교류학교 초청행사를 기획하며 주 인도네시아 대한민국 대사관과 연락을 주고 받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대사관 측에서 교류행사의 내빈 참석뿐만 아니라 한국 초등학생들의 대사관 견학 프로그램을 지원해주기로 하였다. 협조 연락을 주고받았던 김동현 참사관님이 직접 학생들을 인솔하여 대사관을 견학시켜주셨다. 학생들은 곳곳에서 설명을 들으며 대사관이 하는 일과 역할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외교관과의 만남 시간을 통해 학생들의 직업교육도 이루어졌다. 학생들은 이 시간을 통해 외교관의 역할과 중요성을 배울 수 있었고, 외교 활동의 현장을 직접 경험했다. 국제교류 행사들과 대사관 견학 일정을 마친 뒤에는 인도네시아 문화와 자연을 경험할 수 있는 현장체험지를 방문하였는데, 특히 인도네시아 바띡 체험교육과 온라인 교류수업 주제로 다루었던 브로모 화산을 방문하였다. 나중에 학생들의 소감을 물었을 때에 교류행사도 정말 특별 했지만 브로모 화산을 방문한 일을 가장 기억나는 일로 꼽는 학생들이 제일 많았다. 아마 이 학생들은 나중에 학교에서 화산이나 지진과 관련한 과학 수업을 만날 때면 어느 누구보다도 적극성을 띄고 수업에 참여하지 않을까 싶다. 국제교류 수업과 해외 현장체험학습을 마친 후 학생들과 여러 소감을 나누었다. 화면에서만 만나던 인도네시아 학생들을 교류학교 방문을 통해 직접 만나서 친구가 될 수 있었다는 점이 좋았다는 학생, 대사관 방문을 통해 외교관이라는 직업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이제는 운동선수가 아니라 외교관이라는 직업이 내 꿈이라는 학생, 화산 관련 수업을 했는데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화산을 직접 방문해보니 정말 웅장하고 앞으로 과학시간에 화산 단원을 배우게 되면 특별한 마음이 들 것 같다는 학생 등 다양한 소감이 있었다. 학생들이 남긴 소감 중 인상 깊은 2편을 소개한다. 우리 학교에 인도네시아 현지 선생님이 오셨어요.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국제이해교육원(APCEIU)에서는 국내 다문화가정 대상국과 우리나라 간 교사 교류 사업을 운영한다. 한국의 교사가 대상국의 현지학교로 파견가기도 하고 반대로 대상국 교사가 한국의 현지 학교로 파견근무를 오기도 한다. 2023년 인도네시아에서는 선발된 8명의 교사가 한국으로 파견근무를 와서 전국의 초중고 중 4개의 학교에 배치되었는데, 필자의 학교가 이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교육부에서 호스트학교를 신청 받는데 다문화 학생들의 비율과 국제교류 활동 경험 등의 외국 선생님 호스트 능력을 기준으로 이 학교들이 선정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전라초등학교는 다문화 학생 비율이 높은 편인 학교는 아니지만 인도네시아 학교와 국제 교류수업을 하고 있는 점이 선정에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전라초등학교 6개 학년 학생들은 파견 온 인도네시아 현지 초등학교 선생님들로부터 인도네시아 문화를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언어, 노래, 놀이, 전통 옷, 음식 등을 오감을 이용하여 배울 수 있었다.인도네시아 보고르(Bogor) 지역에서 온 라하유(Rahayu Sulistiyani) 선생님은 기본 수준의 한국어 실력을 갖추고 있어 어린 초등학생들에게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서 문화수업을 진행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새로운 일을 경험하는 일에 아주 큰 적극성을 보이는 성격으로 다양한 행사를 추진하는 힘이 대단한 선생님이다. 스마랑(Semarang) 지역에서 온 도니(Dony Setyawan) 선생님은 ICT 분야에 관심이 큰 선생님이고 영어실력이 뛰어난 선생님이다. 평소 조용하지만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는 협조적인 성격이라 두 선생님의 합이 참 잘 맞았다고 생각한다. 멘토 교사였던 필자는 인도네시아에 살면서 쌓은 경험과 인도네시아어 구사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두 선생님과 더욱 협력하기 좋은 환경이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국제교류 협력학교가 2개나 있어서 해당 학교에서 받은 컬쳐박스 물품을 인도네시아 문화수업 자료로 보태어 이용할 수 있었고, 인도네시아 문화 교실을 멋지게 구축할 수도 있었다. 이 교실에서 학생수업, 교사연수, 학부모 교육까지 다양한 활동을 실시했다. 교내 문화수업 외에도 다양한 활동을 계획하고 진행했다. 한국의 교육시스템이 궁금한 그들을 위해 영재교육원 수업 참관과 전라북도 과학교육원 견학을 다녀왔다. 전라북도 과학축전, 전라북도 수학체험한마당과 같은 교과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교육 축제 현장도 다녀왔다. 교사 교과 연구회 모임과 타 학교 교사들의 오픈 클래스 현장을 함께 참여하기도 하였다. 두 선생님과 함께 인근 학교로 다문화 특강을 지원하기도 했다. 특강 대상 학교의 학생들에게 특별한 수업이 될 뿐만 아니라 이 선생님들에게도 좋은 견학의 기회가 되었으면 하여 일반적인 도시 학교 외에도 시골 지역의 아주 작은 학교, 단설 유치원 등 여러 학교를 둘러보며 한국의 교육환경을 관찰할 수 있도록 도왔다. 특히 자립형 사립고인 상산고등학교에 방문했을 때에는 다문화수업이 아닌 인도네시아의 정치와 경제 이야기, 그리고 한국과의 협력관계에 관한 주제 특강을 진행하기도 했다. 나중에 두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시골지역까지도 균일한 수준의 교수 환경을 구축 하고 있는 한국의 교육환경, 인도네시아에는 아직 없는 교육청 단위로 무료 운영되는 영재교육 시스템과 교과 축제 현장7)들이 인상 깊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보고 느낀 경험을 인도네시아로 돌아갔을 때에 교육 세미나 등의 자리에서 공유하고, 근무하는 학교에서 교과 축제를 기획해보고 싶다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여러 나라 교사들의 교류가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파견교사의 활동이 마무리되는 11월에는 광주 신창초등학교의 김명희 선생님과 협력하여 광주에 파견근무 중인 말레이시아 선생님들(Asraf Bin Harun Narasid, Rusydi Bin Ruslan)과 함께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공동 문화행사를 양 학교에서 진행했다. 이 행사는 APEC에서 선 발된 알콥U8) 오현경, 이일주 대학생이 봉사자로 함께 참여하여 더 내실있게 운영될 수 있었다. 누산따라 데이(Nusantara Day)라고 이름을 짓고 함께 한 활동은 전라초 학생들이 새롭게 말레이시아 문화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행사를 함께 기획하고 진행한 선생님들에 게는 참 특별한 추억으로 남아 지금도 누산따라 팀이라고 서로 부르며 서로의 안부를 종종 묻기도 한다. 두 선생님의 파견근무 마지막 날에는 송별행사를 했는데, 전교생이 강당에 모여서 송사, 답사, 학생과 교사의 공연, 활동 영상시청 등의 활동이 있었다. 처음에는 정말 낯설었던 이국의 이방인 선생님들에게 어느덧 정이 가득 들어 펑펑 우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며 나 역시 눈시울이 시큰했다. 3개월간의 한국학교 근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두 선생님의 소감은 다음과 같다.● 라하유(Rahayu Sulistiyani) 선생님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라하유 술리스티야니입니다. 저는 인도네시아 보고르에 있는 비나 인 사니 초등학교의 교사입니다. 저는 2023년 8월부터 11월까지 3개월 동안 한국에 파견교사로 일할 수 있는 놀라운 기회를 가졌습니다. 국제교류교사로서의 저의 경험은 정말 놀랍습니다. 전라초등학교에서 새로운 가족을 찾았습니다. 멘토 선생님이신 이창근 선생님, 이경옥 교장 선생님, 그리고 다른 선생님들은 정말 친절했고 항상 저를 도와주려고 하셨습니다. 학생들도 너무 인상 깊었고, 친절하고 예의바르더군요. 언어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항상 신나고 열정적으로 인도네시아 문화 수업에 참여했습니다. 수업 중 그들의 반응은 매우 귀중했습니다. 국제 교사 교환 프로그램은 학생들이 다양한 문화를 진정으로 배울 수 있는 의미 있는 경험을 제공합니다. 학생들이 다양성을 존중하도록 장려하고 새로운 언어를 배우도록 장려하여 훌륭한 세계 시민이 되도록 준비시킵니다. 교사 교환 프로그램을 통해 나는 한국 교육 시스템에 몰입할 수 있었고, 내 환경에서 구현할 수 있는 귀중한 통찰력과 모범 사례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가장 놀랐던 것은 한국 교사들의 직업 윤리였습니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규율을 발휘하고 의미 있는 학습 활동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또한, 교사 토론, 워크숍, 커뮤니티 행사, 공개 수업, 동료 교사와의 협력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교수 능력을 향상시키려는 그들의 열정이 확연히 드러났습니다. 교육자로서 개인적 발전을 이루려는 그들의 헌신은 고무적이었습니다. 이러한 높은 수준의 교사 역량이 한국 교육의 급속한 성장에 기여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제가 교육자로서 기술과 능력을 배우고 지속적으로 향상시키도록 동기를 부여합니다. 감사합니다. #TeachingAcrossBoarder ● 도니(Dony Setyawan) 선생님밥 먹었어? 한국사람들은 밥 먹었느냐는 말로 안부를 묻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으로 교환교사가 될 수 있는 기회는 환상적입니다. 한국학교에서 근무한 2023년 8월부터 11월까지 의 3개월 경험은 나에게 놀라움을 선사했습니다. 물론 모든 학교를 비교할 수는 없으며, 이는 단지 내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개인적인 관찰과 성찰일 뿐입니다. 한국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저를 도니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제 풀네임은 Dony Setyawan이에요. 한국 사람들이 내 성을 발음하는 게 어렵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SD Hj. Isriati Baiturrahman 1 Semarang에서 근무하는 교사입니다. 교사 교환 프로그램에서 저는 전주에 있는 전라초등학교에 배정받았습니다. 이번 학교에서 저는 따뜻한 멘토이신 이창근 선생님과 이경옥 교장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외국인으로서 그들은 나를 가족처럼 잘 보살펴줍 니다. 그리고 나머지 선생님들도요. 나는 그들을 알게 된 것을 축복으로 생각합니다. 한국으로 떠나기 전, 한국의 교육제도에 대해 검색해봤습니다. 인도네시아와 비교해 보면 별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발견으로 인해 나는 놀라고 말았습니다.1) 학교문화 (The School Cultures) 첫 수업이 오전 9시에 시작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은 8시 30분에 학교에 옵니다. 학교 건물 1층에 도착하자마자 신발을 슬리퍼로 갈아 신습니다. 모든 학생들은 자신의 슬리퍼를 가져옵니다. 선생님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학교에서는 슬리퍼 상자 안에 학교 손님을 위한 슬리퍼 몇 개를 제공했습니다. 학교에 들어가는데 복도에서는 저를 마주치는 학생들이 사랑스럽게 인사합니다. 귀에 쏙 들어오는 학교 종소리는 수업이 시작되고 끝나는 시간을 알려줍니다. 각 교시는 40분 동안 진행되며 매 교시마다 10분의 휴식 시간이 있습니다. 체육, 영어, 과학을 제외하고는 각자의 교실에서 담임선생님과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특수 교실, 체육관, 학 교 운동장으로 이동하여 수업하기도 합니다. 모든 학생과 교사는 학교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습니다. 음식은 신선하고 영양가가 높습니다. 저 같은 외국인에게도 정말 맛있습니다. 담임선생님은 학생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습니다. 때로는 담임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음식을 다 먹도록 동기를 부여하기도 합니다. 점심 식사를 마친 후 학생들은 남은 음식을 음식물 쓰레기나 일반 쓰레기로 분리된 쓰레기통에 버립니다. 그들은 또한 식당의 큰 물통 기계에서 음료를 마실 수도 있습니다. 1학년과 2학년은 점심 식사 후에 집에 갈 수 있고 나머지는 오후 2시 30분까지 계속 공부합니다. 방과 후에 학생들은 로봇이나 그림 그리기 같은 학교 방과후 클럽에 가입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그들 중 일부는 사립 학원에 갑니다. 2) 학교시설 (The School Techs) 한국 정부는 교육에 대한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도시부터 시골 지역까지 몇몇 학교를 관찰했는데, 대부분 동일한 시설과 건물을 갖고 있었습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태블릿과 넷북도 제공합니다. 디지털 보드, 대형 모니터, 대형 태블릿 보관함 및 충전기는 모든 교실에서 널리 사용되고 일반적입니다. 그러면 학생들은 행복감을 느끼고 학습 과정을 즐길 수 있습니다. 제가 방문한 학교 중 학급별 다양한 첨단 기술을 선보이는 학교가 있습니다. 이 학교의 모든 교실은 특별한 특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코딩/프로그래밍, 가상 현실(VR), 드론 경기장, 로봇 공학, 방송시설 등이 있었습니다. 이 전략은 학생들이 방학 동안에도 학교에 가고 싶게 만듭니다. 그리고 독서 능력을 개발하기 위해 모든 한국학교는 매우 편안한 도서관을 만듭니다. 학생들은 아늑한 분위기 속에서 다양한 최신 도서 컬렉션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일부 도서관에는 디지털 도서 살균, 시상 제도 및 디지털 대출 시스템도 있습니다. 3) 교육 페스티벌 현장(Education Festivals) 저는 매년 1회만 열리는 전라북도 과학축제와 수학축제에 참석하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학생들은 자신이 배운 지식과 아이디어를 표현할 장소가 정말로 필요합니다. 모든 부스에는 수많은 멋진 발명품과 활동이 소개되었습니다. 방문객들은 활동의 결과로 상호작용하고 기념품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 페스티벌은 학생들이 어떻게 배우고 창의력을 발휘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사실 교사 교환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할 이야기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제가 보낸 지난 3개월의 매일은 예측할 수 없는 특별함이었고 진행한 모든 수업은 소중했습니다. 한국학생들의 웃는 얼굴로 인해 저의 하루는 더욱 밝아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창근 선생님. 스마랑에서 전합니다. 주한 인도네시아 대사관에서 우리를 초청해주셨어요.인도네시아와 함께하는 초등 수업 현장 이야기는 주한 인도네시아 대사관 측에서도 흥미로운 소식이었다고 한다. 대사관의 고곳(Gogot) 교육담당관이 본교 파견 인도네시아 교사들을 통해 전라초등학교 학생들을 초청하고 싶다는 제안을 해주었다. 대사관 측에서는 시설 견학을 시작으로 학생들을 위한 앙끌룽 가믈란 교육과 사룽9)을 이용 한 전통 놀이와 바띡 교육까지 길지 않은 시간에도 인도네시아와 관련한 다양한 문화 이야기를 전달해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대사관 직원들이 직접 요리하여 준비한 인도네시아 볶음밥인 나시고렝까지 선물로 받은 어린 초등학생들은 큰 추억을 남길 수 있었다. 마무리: Sampai Jumpa Lagi(다시 또 만나요).현재의 초등학교 현장은 점점 다문화 가정의 비율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고, 특히 전라북도는 그 비율이 아주 높은 편에 속한다. 각 시도교육청은 각 시군에 거점 한국어 학급을 설치하여 외국인 학생들 또는 한국어 능력이 떨어지는 다문화 가정 학생들에게 일반 학급과 한국어 학급을 오가며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고, 그 학습의 수는 해가 갈수록 더 늘어나고 있 다. 그리고 학생들은 과거에 비해 개인주의적 성향을 띄며 친구 관계에서도 상호이해도가 떨어지고 교우관계 다툼이 잦아져 고경력의 교사들도 담임교사로 학생들을 지도하는 데에 큰 어려움을 겪는 일이 많아졌다. 이러한 초등학교 현장 상황에서 1년 간 긴 호흡으로 인도네시아 한 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활동은 학생들의 다문화 교육과 인성교육에 긍정적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근무하고 있는 초등학교 학생들은 인도와 인도네시아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인도네시아에 대한 지식과 관심이 없었는데, 이제는 관심도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 지식도 향상되었다. 인도네시아 파견교사를 처음 만난 9월에는 나마스떼 라고 인사하는 학생들이 정말 많았다. 하나의 낯선 나라에 마음을 완전히 마음을 열어본 경험은 학생들의 문화적 이해력을 증진시킬 수 있다. 아예 무관심하거나 이상하고 특이하다고만 생각이 들었던 나라의 문화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즐거움으로 인식하는 경험으로 바꾼 학생들은 다른 새로운 문화를 만날 때에도 다양성을 존중하고 차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일 것이다. 국제교류 수업과 해외 현장체험학습에 참여한 초등학생들은 더 큰 영향을 받았다. 학생들은 다른 나라 학생들과의 온 오프라인 교류활동을 통해 문화적 다양성을 이해하고 개방적인 시각을 갖게 되어 국제적 관념과 협력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또한 현장체험학습을 통한 실제 경험은 학생들의 호기심과 학습 동기를 촉진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지난 1년간의 교육과정 운영은 즐거움과 뿌듯함도 있지만 몸과 마음이 많이 지치기도 했던 시간들이었다. 교사로서 기본 업무를 수행하면서 국제교류 수업과 현장체험학습을 준비하는 일은 보통의 큰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외국 선생님을 초청하는 일은 설레기도 하지만 이방인인 그들의 생활을 3개월간 보살피는 일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많은 사람들이 함께 역할을 해주었기에 이 교육과정을 운영할 수 있었다. 가장 고마웠던 사람들을 꼽으라면 분명 지치고 힘들기도 했을텐데 1년간 함께 참여해준 동료 4학년 선생님 박서진, 강재섭, 방유라 선생님이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내가 기획하는 활동들에 신뢰를 가득 실어 주시고, 해외 현장체험활동 중에는 참여 학생들을 엄마처럼 따스하게 보살펴주신 이경옥 교장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 이 원고에 사용된 모든 사진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습니다.* 각주1) 온책읽기란 학습에 참여하는 학급의 모든 학생이 한 권의 책을 같이 읽고 다른 이와 생각을 교류하는 수업 활동을 말한다.2) 따리 파융(tari payung)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Sumatra)에 있는 미낭카바우(Minangkabau)-말레이(Malay) 소수민족의 전통 민속무용극이다. 파융은 이 춤에 사용되는 주요 소품으로 우리말로 우산을 뜻한다.3) 따리 아얌(tari ayam)은 인도네시아의 전통 무용 예술 중의 하나로 닭 춤 이라는 뜻이다. 이 춤은 자바섬(Java) 에서 유래되었으며, 춤의 주요 요소는 닭의 동작과 자세를 모방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의미와 함께 지역의 문화와 농업 생활을 반영한 점이 특징이다. 4) 한삼춤이란 우리의 전통 한삼천을 양손에 끼워 덩실덩실 추는 춤으로 탈춤과 비슷하다. 5) 실랏이란 인도네시아 전통무술로,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한 무예이다. 실랏은 다양한 손발기술, 공격 및 방어 기술, 권총 및 단검 사용 등을 포함한다.6) 머라위는 주로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에서 전통 음악 악기와 연주를 가리키는 용어이다.7) 한국에서는 각 지역 교육지원청 안에 부설 영재교육센터가 있고 영재교육의 운영비는 국가에서 부담한다. 대학에서 영재교육원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다. 교과 축제는 지역 관광 활성화를 위한 축제와 달리 수학, 과학, 소프트웨어 등의 교과를 중심으로 교과 체험 부스들을 다양하게 구성하여 운영되는 축제를 말한다. 8) APEC국제교육협력원에서는 학교(급)간 온오프라인 (교사/학생) 교류, 봉사단 파견활동, 교육포럼, 전문적 학습 공동체 연구 등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APEC교육협력단을 운영하는데, 이 협력단에 선발된 교사를 알콥교사라 부르고 대학생은 알콥U라고 부른다. 9) 앙끌룽(angklung)은 대나무로 만들어진 인도네시아의 전통 악기로 여러 개의 대나무 통으로 이루어져있다. 손으로 흔들어 소리를 내어 연주하는데, 대나무의 길이와 지름에 따라 다양한 음을 연주할 수 있다. 가믈란 (gamelan)은 인도네시아의 타악기 오케스트라이다. 사룽(sarung)은 크고 긴 천으로 되어, 허리 등에 감싸서 싸는 형태로 입는다. 특히 자와섬(Jawa Island) 남자들은 사룽을 종교행사 때나 캐주얼하게도 자주 입는다고 한다. [27] 대만에서 만난 동남아시아: 2023 동남아연구신진학자학술대회 참관기 작성자 동남아연구소 조회수 970 첨부파일 1 등록일 2023.10.12 초록이번 이슈페이퍼는 2023년 9월 11일과 12일 대만 중앙연구원(中央硏究院) 아시아태평양지역연구센터(亞太區域硏究專題中心)에서 열린 2023 동남아연구신진학자학술대회(Asian Conference for Young Scholars of Southeast Asian Studies, 이하 AYSEAS)의 참관기를 담고 있다. 참관기는 학술대회의 현장뿐만 아니라 대만의 대 동남아 정책방향, 이를 수행하는 정책 및 연구기관, 동남아 출신 이주노동자에 관한 내용을 포괄적으로 포함한다. 이 글을 통해 독자들이 필자가 대만에서 만난 동남아를 간접적으로나마 흥미롭게 접하길 바란다.이슈페이퍼 다운받기2023 동남아연구신진학자학술대회를 참석하며 2023년 9월 11일과 12일 대만 중앙연구원(中央硏究院) 아시아태평양지역연구센터(亞太區域硏究專題中心)에서 2023 동남아연구신진학자학술대회(Asian Conference for Young Scholars of Southeast Asian Studies, 이하 AYSEAS)가 열렸다. AYSEAS는 아시아에 위치한 동남아 연구기관의 컨소시엄인 SEASIA(The Consortium for Southeast Asian Studies in Asia)가 회원기관 간의 협력을 통해 개최하는 학술대회로 2016년 11월 대만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이번 AYSEAS는 2016년에 이어 7년 만에 재개되었고, 대만이 올해도 호스트로 나섰다. 전북대 동남아연구소(이하 전동연)에서는 필자가 참석하여 신진 동남아 연구자로서 연구에 대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AYSEAS에서는 총 16개의 발표가 이루어졌다. 이 중 2개는 대만에 대한 동남아 국가의 인식과 이미지에 관한 발표로 주최 측에서 마련하였다. 14개의 발표는 소속기관 기준으로 대만,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싱가포르, 필리핀, 홍콩, 중국, 일본, 한국 등 7개국에서 초청받은 참가자가 준비하였다. 학술대회에 참석한 동남아연구 신진학자는 조교수, 박사후연구원, 박사과정생으로 다양했으며, 소속기관도 국책연구기관, 대학교, 대학 부설 지역연구소 등이어서 동남아에 대한 학술적인 관심뿐만 아니라 정책적인 측면의 조망도 살펴볼 수 있었다. 전동연의 이번 AYSEAS 참석은 국제교류 추진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전동연은 2020년 SEASIA 회원기관 가입 신청을 준비하여 2021년 운영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컨소시엄에 합류하였다. 현재 SEASIA에는 전동연 외에 프놈펜미국대학교 동남아연구센터, 대만 중앙연구원 아시아태평양지역연구센터, 인도네시아 국립연구혁신부처의 인문사회과학연구소, 태국 쭐라롱껀대학교의 아시아연구소, 브루나이다루살람대학교 아시아연구소, 대만국립정치대학교 동남아연구센터, 홍콩성시대학교 동남아연구센터, 대만지난국제대학교, 교토대학교 동남아연구소, 필리핀대학교 아시아센터, 국립싱가포르대학교의 아시아연구소, 대만동남아학회, 싱가포르 ISEAS-Yusof Ishak 연구소, 싱가포르 난양공과대학교 사회과학부 등 동남아 지역연구로 역사가 오래되고 규모도 상당한 15개 기관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1) 개방과 연대를 설립과 운영의 정신으로 하는 전동연은 SEASIA 합류를 통해 국내외 동남아 연구의 네트워크를 연결하고 확장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전동연은 SEASIA에 회원기관으로 참여하기 전인 2020년부터 이미 한국동남아학회와 SEASIA 사무국인 교토대학교 동남아연구소를 연계해 한일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이처럼 SEASIA에서도 전동연은 회원기관 간 학술대회 공동주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패널 구성과 참여를 통해 연구자 간의 교류를 활성화하고자 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AYSEAS는 전동연이 SEASIA 회원기관으로서 공식적으로 참석한 학술대회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번 이슈페이퍼는 필자가 참석한 AYSEAS의 참관기를 주요 내용으로 다루고자 한다. 여기에 대만에서 마주한 동남아를 전달할 수 있는 내용도 포함하였다. 추가로 시간을 내어 만난 동남아 출신 이주노동자 지원활동가로부터 전해들은 현장의 이야기도 공유하려고 한다. AYSEAS를 공동개최한 대만의 대동남아 정책과 관련된 연구기관 및 단체도 짧게나마 소개할 것이다. 이 글을 통해 독자들이 필자가 대만에서 만난 동남아를 간접적으로나마 흥미롭게 접하길 바란다.중앙연구원: 대만 최대의 학술연구기관2) 우선, AYSEAS가 열린 중앙연구원을 먼저 소개하고 싶다. 9월 10일 필자가 처음으로 중앙연구원에 도착했을 때 거대한 규모와 방대한 시설에 놀랐다. 주최측에서 중앙연구원 내 숙소를 제공해주었는데 깔끔하고 정돈된 상태가 인상적이었다. 바로 옆에는 수영장, 조깅트랙, 헬스장, 테니스장, 농구장, 배트민턴장, 탁구장 등이 갖추어진 대규모 체육관도 있었다. 하늘로 높이 솟은 이국적인 야자수 나무가 만들어낸 가로수길이 아름다웠다. 이른 저녁에는 지역주민들도 이곳을 찾아 산책과 운동을 즐겼다. 전반적인 느낌은 한국의 종합대학교와 유사하지만, 중앙연구원은 1928년 설립된 유서 깊은 국립 종합연구기관이다. 종합연구기관이라는 표현에 걸맞게 현재 중앙연구원에는 이공물리과학, 생명과학, 인문사회과학 세 분야의 총 32개 연구소가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서 8천 명이 넘는 연구원과 행정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특징적인 것은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 발전의 균형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주목할 만한 최근 연구 성과도 이공계뿐만 아니라 역사학과 중국학 등에서도 활발하게 산출되고 있다. 자체적인 연구뿐만 아니라 후속 연구자를 양성하기 위해 국내 대학과 협력해 박사과정생 장학금, 연구와 관련된 장비, 박사학위 취득을 독려하기 위한 상담 프로그램 등을 제공한다. 그래서인지 필자가 학술대회에서 만난 참가자 중 박사학위 취득을 앞둔 경우, 졸업 이후 중앙연구원에서 일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대만의 연구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직장이 중앙연구원이라는 것이다. AYSEAS가 열린 중앙연구원 아시아태평양지역연구센터는 2003년 중앙연구원과 세계의 아시아태평양지역 연구기관 간의 협력을 촉진하고 학술교류를 강화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주로 해양시대 역사학, 초경계적인 횡단과 순환, 개발과 인구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학술교류와 협력을 중시하면서 SEASIA에 회원기관으로 참여한 아시아태평양지역연구센터는 이번 AYSEAS의 장소를 제공하고 참가자들이 편안한 분위기에서 발표와 토론에 임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동남아연구 신진학자들의 관심사 AYSEAS의 주제는 포스트 코로나시대 동남아 연구의 미래 방향(The Future Directions of Southeast Asian Studies in the Post-COVID Era)이었다. 학술대회를 구성한 다섯 개의 세션은 1) 코로나 정책과 에너지, 2) 종교 민족주의, 생태주의, 이슬람 경계, 3) 이주노동자, 농촌-도시 개발과 이주, 4) 지식, 운동, 그리고 시각적 내러티브, 5) 춤과 치안 유지 활동으로 나누어졌다. 첫 번째 세션에서 인도네시아, 대만, 일본에서 온 발표자가 포스트 팬데믹 시기 인도네시아의 기회와 불평등, 아세안 국가를 대상으로 한 국가 주도 코로나19 팬데믹 방역 연구, 동남아의 에너지 전환에서 일본의 역할에 대해 발표했다. 두 번째 세션에서는 싱가포르, 캄보디아, 대만의 발표자가 포스트 코로나 시대 말레이시아와 태국 남부의 종교 민족주의, 캄보디아에서 테라바다 불교 신앙과 환경운동, 인도네시아 성노동자를 둘러싼 담론을 소개하였다. 세 번째 세션에서는 필자가 싱가포르 가사노동자 커뮤니티의 인정투쟁을, 대만의 발표자들이 미얀마의 농촌-도시의 변화와 개발 서사, 싱가포르 인도인 커뮤니티의 민족성과 문화적 변화를 발표했다. 네 번째 세션에서는 중국, 일본, 대만의 발표자가 싱가포르의 역사 다시쓰기, 인도네시아 시민사회의 마약 방지 운동, 시각적 내러티브를 통한 동남아 해양 시대 지도의 재구성을 발표했다. 마지막으로 필리핀과 홍콩의 발표자가 동남아 춤 전통의 변화, 필리핀의 마약과의 전쟁을 통해 본 치안 유지 활동에 관한 연구 성과를 공유하였다.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연구가 각각 두 편, 아세안을 포함한 전반적인 동남아지역을 다룬 연구가 두 편, 주제로 보자면 사회운동을 다룬 연구가 두 편(캄보디아, 인도네시아), 이주민 연구가 두 편(싱가포르) 있었다. 이 중에서 싱가포르에 관한 연구가 세 편이나 소개되었다는 점이 흥미로웠는데, 가사노동자 커뮤니티 활동과 인도인 커뮤니티의 변화에 관한 발표는 이주민을 다룬다는 점에서 결이 비슷했다. 또 다른 흥미로웠던 점은 대만의 동남아 연구자 중 몇몇이 말레이시아와 미얀마 등 동남아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필자와 같은 세션에서 미얀마 농촌과 도시의 개발 서사를 발표한 박사과정생은 미얀마인으로 대만에서 오랜 유학생활을 하였다. 인도네시아 성노동자 담론을 연구한 박사수료생도 말레이시아인이었다. 싱가포르 인도인 커뮤니티의 변화를 발표한 대만의 박사과정생은 인도인으로 대만의 동남아 연구자 구성이 매우 다채롭게 느껴졌다.동남아연구 신진학자들이 모인 학술대회여서인지 향후 연구를 더욱 발전시켜 나가는 것뿐만 아니라 동남아지역에 대한 관심을 고취하기 위한 토론이 이어졌다. 주최 측에서는 박사과정생, 박사수료생, 박사 후 연구원급의 연구자에게는 특정한 동남아지역을 연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질의하기도 했다. 또한, 코로나19 이후 오랜만에 대면으로 진행된 학술대회여서 팬데믹으로 인해 동남아지역 연구에 어떠한 어려움이 있었는지를 파악하고자 했다. 참가자들은 소규모로 밀도 있게 진행된 논의에 만족감을 표했다. 주최 측은 이번에 발표된 연구 성과를 엮어 2024년 학술서적으로 발행하기로 합의하고 이후의 절차를 진행하기로 했다. 다음 AYSEAS의 시기와 장소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브루나이에서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주최 측은 밝혔다. 특히 주최 측에서는 한국의 참가를 무척이나 반겼다. 한동안 SEASIA와 한국 사이에 네트워크가 이어지지 않았는데, 전동연의 SEASIA 참여와 이번 학술대회 참석으로 다시 상호 연결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비교적 최근에 싱가포르 이주노동자 연구를 시작한 신진 동남아 연구자인 필자 개인적으로는 AYSEAS 참여가 연구를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전동연 차원에서도 SEASIA의 공식 학술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네트워킹을 강화할 수 있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 다음으로, 학술대회 현장을 넘어서 대만으로 관점을 넓혀 대만의 동남아 정책, 관련된 연구기관과 단체의 현황을 살펴보고, 동남아 출신 이주노동자가 만들어내는 풍경으로 들어가 보려고 한다.대만과 동남아시아(1) 동남아 연구기관과 관련 정책 동향 2023 AYSEAS는 중앙연구원 아시아태평양지역연구센터뿐만 아니라, 대만아시아교류재단(Taiwan-Asia Exchange Foundation), 국립정치대학교 동남아연구센터(Center for Southeast Asian Studies)와 국제관계연구소(Institute of International Relations), 대만동남아학회(Taiwan 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Studies)가 공동으로 개최하였다. 대만아시아교류재단(이하 재단)은 2018년 설립된 대만 최초의 정책 씽크탱크로 신남향정책(New Southbound Policy)이 중요한 대상 국가로 포함하는 동남아, 남아시아, 호주, 뉴질랜드에 초점을 맞추어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2016년 총통으로 당선된 차이잉원(蔡英文)은 신남향정책을 국가발전전략의 핵심으로 제시하면서 아세안 회원국, 남아시아 6개국, 호주, 뉴질랜드 사이의 협력을 강조한 바 있으며, 2020년 재선 성공 이후에도 이와 같은 정책 기조를 유지해 왔다. 이러한 정책적 배경 아래에서 재단은 대만과 신남향정책이 포괄하는 국가 사이의 연결 촉진을 중요한 목표로 한다. 재단은 대만-아시아청년리더교류, 신남향정책의 사람 중심성 실현을 위한 시민사회 간의 연결 강화, 아시아 씽크탱크 협력, 자연재해로부터의 지역 회복, 문화교류 프로그램 운영을 통해 다양한 분야의 상호협력을 위해 일한다. 재단의 업무에서 파악할 수 있듯이 대만의 신남향정책은 경제교류뿐만 아니라 문화, 교육, 인재 교류, 자원 공동개발, 관광 등의 세부적인 영역에서 협력을 추구한다. 신남향정책은 대만을 독립된 주권국가로 주장하는 차이잉원 총통의 양안정책과 이를 공고히 하려는 외교 전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3) 중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이 대만의 자주성을 제한할 수 있다는 인식하에 차이잉원 총통은 2016년 집권 이래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동남아와 남아시아 국가를 대상으로 관계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또한 미국의 인도-태평양 구상에 따라 높아진 대만의 전략적 가치는 미국과 군사협력을 본격화하면서 인도, 호주, 뉴질랜드와도 관계를 강화함으로써 중국의 해양 진출을 봉쇄하고 있다. 이와 같은 외교 전략의 일환으로 동남아지역이 중요한 협력 대상국으로 부상한 것이다. 대만에 자리 잡은 동남아 연구기관의 역할도 이러한 정책 방향성과 일정 부분 관계가 있다. 국립정치대학교 동남아연구센터(이하 동남아연구센터)는 2015년부터 교토대 동남아연구센터와 협력하면서 설립과 운영을 준비했으며, 2016년 2월에 공식적으로 발족하고 활동을 시작했다. 출범 직후에는 대만과 동남아 관계를 정치ㆍ안보, 사회ㆍ문화, 경제ㆍ투자 등으로 나누어 분석하는 정책 세미나를 개최하고, 중앙연구원 아시아태평양지역연구센터와 교류 협정을 체결하는 등 동남아지역에 대한 학술 및 정책연구에 참여했다. 2016년 출범 이후 이어진 대만과 동남아 관계에 관한 정책 세미나는 대학 부설 연구소가 국가의 대동남아 정책의 시작과 지속 과정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보여준다.4) 아시아태평양지역의 국제관계, 정치, 경제 관계, 국제기구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는 국립정치대학교 국제관계연구소와 협업해 동남아지역 연구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학술연구도 수행하고 있다. 대만동남아학회는 2013년 SEASIA 설립에 참여한 연구단체 중 하나이고, 동남아연구센터는 2017년부터 SEASIA의 운영위원 중 하나로 참여하고 있다. 중앙연구원 아시아태평양지역연구센터가 대만과 아시아태평양지역 연구기관의 협력 촉진을 위해 활동하는 것과 같이 대만동남아학회와 동남아연구센터는 SEASIA 참여를 통해 동남아 연구의 국제교류를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2) 동남아 출신 이주노동자 대만에는 인도네시아, 필리핀, 베트남, 태국에서 온 70만 명의 이주노동자가 아이와 노인을 돌보는 돌봄노동, 농업, 어업과 반도체산업 분야 등에서 일하고 있다. 1992년 취업복무법(就業服務法) 제정에 따라 대만에 동남아 출신 이주노동자가 유입되어 제조업과 건설업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장기요양서비스 미비에 따라 이주돌봄노동자도 수용하게 되었다.5) 2022년 말 기준으로 이주노동자의 국적별 통계는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각 25만 명, 필리핀 15만 명, 태국 6만 명으로 집계되며, 이중에서 65%는 제조업, 30%는 돌봄노동, 1.9%는 농림‧어업 등에 종사한다.6) 제조업은 베트남,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국 순으로 많고, 돌봄노동은 인도네시아가 75%의 압도적으로 높은 비율을 보이며, 태국 출신 이주노동자가 가장 적다. 외국인이 대만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고용 가능한 체류자격을 취득하고 사업주가 정부로부터 고용허가를 받아야 한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이주노동자는 사업장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으며, 근무 지속이 불가능한 사유에 한해서만 이동 가능하다. 사업주는 매달 고용부담금을 납부해야하며, 이주돌봄노동자를 고용해야만 하는 취약계층은 고용부담금을 면제받기도 한다.7) 정부가 사업주에게 체류관리 책임과 비용을 전가하는 형태의 고용부담금은 이주노동자를 엄격하게 통제하는 장치가 된다.8) 이주노동자가 이탈하면 사업주가 정해진 계약기간까지 매달 고용부담금을 납부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역의 고용관리업무를 관할하는 지방정부의 노공국(勞工局) 산하에 외국인노동자 상담서비스센터가 생활정보 제공, 법령 자문 및 종교 활동 정보 제공, 노사쟁의 조정 등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9) 하지만 이주노동자 쉼터를 운영 중인 시민사회단체 Serve the People Association(SPA)의 활동가는 이러한 시스템을 인지하지 못하는 이주노동자가 많을 뿐만 아니라 통역도 충분하지 않아 이주노동자가 자신의 문제를 정확히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문제를 제기하였다. 2008년 설립된 SPA는 인구 고령화에 따라 이주노동자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미비한 법률과 권리보호에 대응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2014년부터 본격적으로 필리핀, 인도네시아, 베트남 이주노동자 쉼터를 조성해 법률 상담, 의료 지원, 임금 체불 해결 지원 등의 활동을 수행해왔다.10) 간판 없이 주택가에 자리 잡은 쉼터는 남성과 여성의 공간을 분리하고 공용주방과 거실을 공유하는 형태였다. 쉼터에 머무르는 이주노동자는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근무지 이동을 위해 필요한 절차를 밟으며 다음 일을 기다리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SPA는 이 과정에서 필요한 서류작업을 돕고 이주노동자가 대변하지 못하는 노동자로서의 권리 확보를 위해 개입한다. SPA의 활동가는 간병을 담당하는 이주돌봄노동자가 집안일을 하도록 강요받기도 하는 현실적인 문제, 정해진 사업장인 집을 벗어나 다른 지역에 위치한 고용주의 친척 집에서도 일을 하도록 요구받는 상황이 주요 문제라고 지적했다. 돌봄노동 영역에서 노동자의 권리침해는 증거확보도 어려울뿐더러 고용주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하면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주노동자가 낯선 곳에서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확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현지의 시민사회단체는 이주노동자의 권리의식을 고취하고 권리증진을 위해 노력하지만, 자원의 부족으로 최소한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그칠 가능성이 높다. 대만 체류 마지막 날이었던 일요일, 필자는 대만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타이중(台中)에서 타오위엔국제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탑승하기 위해 타이중역을 향했다. 타이중역 광장에서는 히잡을 착용한 여성들이 모여 춤을 추고,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주말을 보내고 있었다. 수도인 타이페이(台北)에서 고속철도로 1시간이 조금 넘게 걸리는 타이중은 대만 전역에서 두 번째로 많은 이주노동자(107,359명)가 체류하는 곳이다. 이주노동자가 가장 많은 도시는 국제공항이 위치한 타오위엔(桃園)으로 128,514명의 이주노동자가 있다. 타오위엔과 타이중 모두에 공업지대가 있어 이주노동자가 많다. AYSEAS를 공동주최한 대만아시아교류재단의 실무진은 신남향정책 추진을 위해 동남아에 주목하면서 대만 내 이주노동자 지원도 신남향정책에서 중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글에서는 이주노동자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대만에서는 동남아 여성과 대만 남성의 결혼이 증가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이주도 정책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낯설게 여겨졌던 대만 속 동남아는 필자가 연구하는 싱가포르의 상황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부분이 있었기에 인상적이었다.앞으로도 이어질 SEASIA 활동에 대한 관심 요청 SEASIA는 2015년 이래로 2년에 한 번씩 정기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그동안 일본(2015), 태국(2017), 대만(2019), 인도네시아(2022)에서 개최되었으며, 2024년 7월 18일부터 20일까지 마닐라에 위치한 필리핀딜리만대학교에서 De/Centering Southeast Asia 라는 주제로 5번째 정기학술대회가 열릴 예정이다. 2023년 11월 30일까지 발표문 프로포절을 받고 있다. 정기학술대회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웹사이트(https://seasia2024.upd.edu.ph/)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전동연은 공동주최자로 참여할 예정이다. 이번 정기학술대회는 그동안 동남아지역을 응시해온 서구적인 관점의 지배 서사에서 벗어나 동남아만의 다양하고 복잡한 경험, 역사, 문화를 드러내고자 한다. 세부적인 주제로는 동남아의 자율적 지식생산의 개척과 과제, 정치와 거버넌스, 정치경제 변화, 동남아의 초국가주의, 동남아의 재창조: 성과와 유산, 동남아의 사회적 생활, 지정학ㆍ외교ㆍ국제관계, 동남아와 생태위기, 뉴미디어와 신흥 디지털 기술에 대한 비판적 관점으로 나누어진다. 동남아지역의 주체성과 정체성을 되찾기 위한 플랫폼이자 해당 지역에 대한 세밀한 이해를 시도할 이번 정기학술대회를 통해 SEASIA 회원기관뿐만 아니라 이들과 연계협력 중인 연구소ㆍ연구자가 상호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전동연은 SEASIA에 합류한 신생 회원기관으로서 한국의 많은 동남아지역 연구소와 연구자가 관련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정보를 공유하고 패널을 구성하여 참가자를 모집할 계획에 있다. 패널이 아니더라도 연구자 개인 참여도 가능하니 많은 동남아 연구자의 참여를 희망한다. 그동안 대만에서만 두 차례 조직한 AYSEAS를 언젠가 한국에서도 개최할 수 있기를 바라며 전동연도 국제학술교류 활동 활성화를 위해 꾸준히 노력할 것이다.* 각주1) SEASIA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웹사이트(https://seasia-consortium.org/)에서 확인할 수 있다.2) 중앙연구원 웹사이트(https://www.sinica.edu.tw)의 소개글을 참고하였으며, 아시아태평양지역연구센터는 자체 웹사이트(https://www.rchss.sinica.edu.tw)를 통해 정보를 얻었다.3) 이 문단에서 정리된 대만의 신남향정책 결정 배경과 동기는 이권호(2021), 대만의 신남향정책과 한국의 신남방정책의 비교 연구 , 『중국지역연구』 8(4): 97-138의 104-106쪽을 참고했다.4) 국립정치대학교 동남아연구센터의 출범과 활동에 관한 내용은 웹사이트(http://cseas.nccu.edu.tw/)를 참고했다.5) 김유휘, 2020, 일본과 대만 노인돌봄 영역의 이주노동 , 『국제사회보장리뷰』 가을호 14: 79-94.6) Ministry of Labor, Statistics, Yearly Bulletin, Table 13-4. Foreign Workers in Productive Industries and Social Welfare by Industry and Nationality(End of 2022).7) 고용허가제와 고용부담금에 관한 내용은 노호창, 2019, 「외국인 고용부담금제도 도입 시의 법적 쟁점」, IOM이민정책연구원 워킹페이퍼 시리즈 No. 2019-03, pp.21-22를 참고했다.8) 고용부담금의 부정적인 효과에 대해서는 최서리, 대만의 이주돌봄노동자 도입과 한국에의 시사점 , IOM이민정책연구원 이슈브리프 No.2016-07을 참고했다.9) 설동훈‧김윤태, 2004, 대만의 외국인노동자 고용관리체계 , 『중소연구』 28(3): 69-117.10) SPA에 관한 내용은 웹사이트(https://www.spa.org.tw/english)를 참고했다.11) Ministry of Labor, Statistics, Yearly Bulletin, Table 13-6. Foreign Workers in Productive Industries and Social Welfare by Area and Nationality(End of 2022). [26] 2023 태국총선과 정국 전망 ㅣ 김홍구 작성자 동남아연구소 조회수 1396 첨부파일 1 등록일 2023.09.11 초록지난 5월 14일 태국에서 총선이 치러졌다. 총선 결과, 야권의 까우끌라이당이 제1당을 차지하고 프어타이당이 제2당을 차지했다. 양당 중심으로 야권연합세력을 구축해서 하원 312석을 확보하고 까우끌라이당의 피타 림짜른랏을 총리후보로 내세웠다. 하지만 1, 2차 상 하원 합동회의에서 치러진 총리선출투표에서 피타후보는 과반 동의를 얻지 못했다. 현행 총리선출방식에 따르면 총리는 상 하원 합동회의(상원 250석과 하원 500석)에서 양원의 과반수(376표)의 지지를 받아야 당선될 수 있다.구 여권을 지지하는 상원의 반대로 총리선출에 실패한 까우끌라이당은 야권연합내의 제2당인 프어타이당에게 총리선출권을 넘겨주었다. 프어타이당은 기존의 야권연대를 깨고 까우끌라이당을 배제한 채 구여권 친군부 정당인 품짜이타이당, 팔랑쁘라차랏당, 루엄타이쌍찻당등과 연대했다. 그리고 상원의 지지를 받아 프어타이당의 쎗타 타위씬이 과반을 훨씬 상회하는 482표를 얻어 총리로 당선됐다.결국 프어타이당은 오랫동안 정치적 적대관계를 유지해온 군부와 집권을 위해 한 배를 탄 셈이 돼 까우끌라이당과 프어타이당 내 강경세력 및 시민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게 됐다. 이로 인해 추가적인 정치적 불안이 예상되는 상황이다.이슈페이퍼 내려받기총선 전 정치구도 지난 5월 14일 태국에서 총선이 치러졌다. 총선의 가장 중요한 관전 포인트는 2014년 쿠데타 이후 줄곧 권력을 유지해온 여권인 친군부 보수 세력의 분열과 야권 진보세력으로의 정권 교체 가능성이었다. 여권의 핵심 세력은 쿠데타를 주도했던 쁘라윳 짠오차(Prayut Chan-o-cha, 1954년생) 현 총리와 쁘라윗 웡쑤완(Prawit Wongsuwon, 1945년생) 당 대표가 만든 팔랑쁘라차랏당이다. 정치적 뿌리 없이 선거를 앞두고 다양한 파벌연합으로 구성됐던 팔랑쁘라차랏당은 당권 투쟁이 심화되던 중 쁘라윳 총리가 지지자들과 함께 신생 정당인 루엄타이쌍찻당(Phak Ruam Thai Sang Chart, United Thai Nation Party)으로 옮겨감으로써 당세가 급격히 약화됐다. 쁘라윳 총리 자신은 헌법상 최대 8년까지만 허용된 총리 임기 제한 규정에 따라 재당선되더라도 2025년 4월6일까지 임기가 제한돼 총리직을 절반밖에 채우지 못할 형편에 놓이기도 했다. 뿌리가 같은 여권의 두 당은 총선 후 결국 다시 합쳐질 것이라는 관측도 있었지만 팔랑쁘라차랏당이 가장 적대관계에 있는 제1야당 프어타이당을 정치적 파트너로 선택하게 될 가능성이 더 많이 거론되었다. 이는 프어타이당이 군부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상원의 비토세력이기 때문에 연립정부 구성과 총리 선출 시 상원의 지지를 받고 있는 팔랑쁘라차랏당의 역할이 기대되기 때문이었다. 한편, 팔랑쁘라차랏당과 함께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쁘라차티빳당과 품짜이타이당은 정치적 이념보다는 실리 추구 성향이 강해 총선 후 연립정부 구성에 성공할 수 있는 정치세력과 손잡을 가능성이 크다고 예측되었다. 이런 정치적 상황들은 2019년 선거 때와 비교해 현 여권 보수 세력의 응집력이 확연하게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들과 대척점에 서 있는 정치세력은 야권의 주축인 프어타이당과 까우끌라이당이다. 우선 프어타이당은 선거 때마다 전 총리 탁씬 친나왓(Thaksin Shinawatra, 1949년생)계 정당을 지지하는 동북부와 북부에서 여전히 막강한 지지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더욱이 새로운 선거제도 변화로 가장 많은 혜택을 볼 것으로도 알려졌다. 프어타이당은 탁씬의 막내딸인 패텅탄 친나왓(Paetongtarn Shinawatra, 1986년생)을 차기 총리 후보로 내세우려 했다. 그는 부동산 전문업체인 에스시에셋(SC Asset Corporation)의 최대 주주이며, 아동교육 자선단체 타이콤파운데이션(Thaicom Foundation)의 재단 이사직을 맡고 있었다. 탁씬 계열 정당들의 전가의 보도 인 탁시노믹스(Thaksinomics)라고 불렸던 포퓰리즘 정책들을 선거공약으로 제시한 패텅탄은 대다수의 총리 후보 선호도 조사에서 1위를 달렸다. 태국 총리 후보는 각 정당에서 3명을 추천할 수 있다. 프어타이당이 제시한 3명의 총리 후보 중 패텅탄에 이어 관심을 끄는 인물은 쌘씨리 부동산개발업체의 쎗타 타위씬 회장(Srettha Thavisin, 1963년생)이었다. 그는 패텅탄 총리 후보를 대신할 히든카드로도 불렸다. 선거기간 중 득표 전략으로 탁씬 향수를 자극하기 위해 패텅탄을 총리 후보로 내세웠지만, 반탁씬 정서를 극복하고 국가의 산적한 경제문제 해결을 위해서 경륜이 많은 쎗타로 후보 교체를 할 가능성도 컸다. 경제전문가인 그는 CEO만을 국한한 총리 후보 선호도 조사에서 패텅탄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쎗타는 매사추세츠(Massachusetts)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후 클레어몬트(Claremont)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세계 최대의 소비재 판매 기업인 프록터 앤드 갬블(P G: Procter Gamble Company)에서 제품 관리 경력을 쌓은 후, 1988년에 쌘씨리 부동산 개발 회사를 공동 설립했다.1) 까우끌라이당은 사회민주주의 진보정당으로 군부와 왕실에 가장 적대적 세력으로 인식되었다. 까우끌라이당 대표 피타 림짜른랏(Pita Limjaroenrat, 1980년생)은 참신한 이미지로 각종 차기 총리 선호도 조사에서도 선두권을 달렸다. 2014년 군부 쿠데타 이후 정치의식이 크게 성장한 MZ세대, 진보적 지식인들과 학생운동세력들의 지지를 큰 정치적 자산으로 삼았다. 주요 정당 선호도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체로 까우끌라이당은 프어타이당에 이어 두 번째 순위를 차지했다. 총선 후에는 프어타이당과 연정구성을 원하면서도 양당의 중복된 지지세가 갈등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까우끌라이당은 친군부 세력인 팔랑쁘라차랏당이나 루엄타이쌍찻당에 대해서는 노골적인 비호감을 표출했다. 이번 총선은 2014년 쿠데타 후 처음 치른 2019년 총선에서 채택했던 1인 1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1인 2표 병립형 비례대표제로 바꿔 치르게 됐다. 개정된 선거제도는 지역구 의석수를 350석에서 400석으로 늘리고, 비례대표 의석수를 150석에서 100석으로 줄였다. 2019년 총선에서 적용된 1인 1표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정당의 득표율에 따라 의석을 배분하는 제도다. 총 의석수는 정당득표율로 정해지고, 지역구에서 몇 명이 당선됐느냐에 따라 비례대표 의석수를 조정하는 방식이다. 1인 2표 병립형 비례대표제는 지역구와 비례대표가 완전히 분리되어 정당별 비례대표 의석을 지역구 선거 결과와 아무 상관없이 배분하게 된다(현행 우리나라 제도와 같다). 더불어 1인 2표 선거제도에서는 유권자들이 비례 대표 의원에 대한 투표를 각 정당에서 제시한 총리 후보에 대한 투표로 인식할 가능성이 크다. 때문에 전국적인 유명 인사를 총리 후보로 많이 보유하고 추천한 정당에게 유리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Napon Jatusripitak 2022). 총선에 영향을 미칠 중요요인은 선거제도 외에 총리선출 방식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2017년 헌법에 따른 총리선출 방식은, 총리 후보를 내는 정당은 하원 전체 의석수 500석 중 최소한 25석의 하원 의석(5%)을 확보해야 하며 각 정당은 3명의 (원 내외) 총리 후보를 추천할 수 있다. 총리는 상 하원 합동회의(상원 250석과 하원 500석)에서 양원의 과반수(376표)의 지지를 받아야 당선될 수 있다(2017년 태국헌법 159조/272조).총선 결과 5월 14일 총선은 투표율 75.71%(2019년 74.69%), 출마정당 67개(2019년 77개 정당), 1석 이상 얻은 정당수는 18개 정당(2019년 26개 정당)이었다.2)선거 결과 까우끌라이당이 하원 500석 중 151석(지역구 112/비례대표 39)을 차지했다. 왕실모독죄(형법 112조) 폐지 등 개혁적인 공약을 내세운 까우끌라이당은 선거 정국 중반을 지나면서 여론조사에서 부동의 1위였던 프어타이당을 제치기 시작했다. 피타 대표도 총리 후보 지지율 조사에서 1위에 오르며 돌풍을 예고했고, 실제로도 예상을 뛰어넘는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까우끌라이당이 자주 사용한 선거구호인 "쁠리안 쁘라텟 타이 빠이 두어이깐"(태국을 함께 변화시키자)에 변화를 갈망하는 유권자들은 환호했다. 피타 대표는 넘사벽 의 스펙을 지닌 40대 초반의 금수저 정치인이다. 뉴질랜드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태국의 명문 탐마쌋대학을 졸업한 후 하버드대학과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각각 공공정책과 경영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25세의 나이에 가족기업으로 쌀겨기름을 생산하는 CEO애그리푸드(CEO Agrifood)의 부실 경영을 회생시켰고, 그랩 타일랜드(Grab Thailand)의 전무직을 맡기도 했다. 2018년 까우끌라이당의 전신인 아나콧마이당을 통해 정치에 입문한 뒤 2019년 총선에서 비례대표 의원으로 당선되며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아나콧마이당이 해산되고 당 주요 인사들의 정치 활동이 금지되자 아나콧마이당의 맥을 잇는 까우끌라이당의 대표가 됐다.3) 탁씬 전 총리 지지 세력인 프어타이당은 141석(112/29)을 차지했다. 탁씬의 막내딸인 패텅탄이 총리 후보로 나선 프어타이당은 전가의 보도 인 화끈한 포퓰리즘 정책을 내세웠지만, 2001년 이후 선거에서 1당 자리를 처음으로 빼앗기며 야권의 맹주 자리를 내놓을 처지가 됐다. 이번 선거는 한 시대를 풍미한 탁씬 정치가문의 위세가 이전과 같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프어타이당은 동북부 지역을 제외하고 다른 지역에서는 까우끌라이당을 앞서지 못했다. 탁씬의 고향인 치앙마이에서조차 총 10석 중 2석밖에 챙기지 못했으며 7석은 까우끌라이당이 차지했다(2019년 총선에선 총 9석 중에 프어타이당이 8석 석권). 방콕의 33개 선거구 중 32개는 까우끌라이당이 싹쓸이했고, 프어타이당은 겨우 한 석을 얻는데 그쳤다(2019년 선거 때는 팔랑프라차랏당 12석, 아나콧마이당과 프어타이당이 각각 9석 확보).4) 유권자들은 동북부를 제외한 전 지역구에서 포퓰리즘 정책보다는 변화와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한 까우끌라이당을 더 지지했다. 이번 선거는 2001년 이후로 지속되어온 '탁씬 대 반탁씬' 정치 구도가 '보수 대 개혁' 구도로 확실히 변화된 선거였다. 여권의 핵심 정당인 팔랑쁘라차랏당은 40석(39/1)을 얻는데 그쳤으며, 분당해 나간 루엄타이쌍찻당은 36석(23/13)을 얻었다. 두 당은 76석을 확보했으나 팔랑쁘라차랏당이 2019년 총선에서 116석을 얻은 것을 상기하면 폭망 수준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쁘라차티빳당도 25석(22/3)을 얻는데 그쳐 2019년보다(53석) 절반 이상 의석수가 줄었다. 여권에서 유일하게 존재감을 과시한 정당은 품짜이타이당이다. 품짜이타이당은 71석(68/3)을 얻어 제3당으로 올라섰다. 보수세력과 진보세력 간의 정치적 갈등이 만성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중도정당으로의 적절한 자리매김이나 정치적 양극화를 지향하는 정책 등이 호응을 얻었던 것으로 평가된다.까우끌라이당 vs. 프어타이당 이번 총선은 여권의 핵심세력이 분열된 가운데 치러져 일찌감치 야권의 승리가 예상되었다. 그래서 여야의 대결보다는 야당 간의 대결에 관심이 쏠렸다. 그것이 에스컬레이션 효과를 내 야당 돌풍이 일어났다. 하지만 야권의 속사정은 달랐다. 까우끌라이당은 예상 밖으로 선전하여 기대치보다도 높은 성과를 얻었으나, 선거정국 내내 압도적 제1당이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던 프어타이당의 성적은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 까우끌라이당은 무엇보다도 유권자들에게 명료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새 정부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확실하게 유권자에게 각인시켰다. 그것은 "변화"라는 메시지였다. 까우끌라이당은 형법 112조 개정 등 왕실 개혁에 대해서 강력한 의지를 나타냈다. 쿠데타 방지와 군이 가장 예민하게 생각하고 있는 국방정책 -징병제 폐지, 군 규모 축소, 장군 수 감소- 의 개선안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면서 왕실과 군부 정책에 대해서 모호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프어타이당과 차별화 했다. 프어타이당은 선거전략상 몇 가지 결정적인 실수를 했다고 평가된다. 선거 며칠 앞둔 탁씬의 귀국발표는 양날의 칼이 되었다. 친탁씬세력을 응집하는 효과가 있었던 반면에 과거처럼 그의 귀국소동으로 인해 친탁씬세력과 반탁씬세력 사이의 갈등이 발생하고 정치혼란이 야기될 것을 두려워한 유권자의 표는 까우끌라이당에게 돌아갔다. 탁씬은 2008년 부정부패 등의 혐의 재판을 앞두고 해외로 도피했고, 법원은 4건의 궐석 재판에서 모두 징역 12년 형을 선고한 바 있다. 이 중 1건의 공소시효가 만료돼 그는 귀국하면 10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하지만 탁씬이 스스로 귀국 후 대법원에서는 (3건 중) 2건의 사건의 형벌을 병과해 8년으로 감형했다. 그는 전 재산의 60%에 달하는 14억 달러를 국가에 몰수당하기도 했다(Prachahtai 2023/08/22).프어타이당이 쿠데타 주도세력인 쁘라윗 대표의 팔랑쁘라차랏당과의 연정설을 조기에 차단 못한 것도 패인의 하나로 볼 수 있다. 팔랑쁘라차랏당도 야당인 프어타이당과 연정을 고려하고 있음을 내비추곤 했다. 이에 반해 까우끌라이당은 친군부 정당인 팔랑쁘라차랏당이나 루엄타이쌍찻당과의 연정 가능성을 단호히 배제하면서 선명성을 과시해 유권자의 지지를 얻어냈다.까우끌라이당 후보의 총리 도전 실패 이번 총선에서 제1당과 제2당을 모두 차지한 야권은 확실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곧바로 정권교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당제와 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 태국의 경우 제1당이 됐다고 해서 반드시 총리를 배출하고 연립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제1당에게만 연정을 구성할 수 있는 우선권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총선 후 3개월 이상 연정 구성과 총리 선출을 위한 합종연횡의 수 싸움이 복잡하게 전개되었던 이유이다. 이외에도 정치권 밖의 변수도 중요하게 작동하여 고도의 정치게임이 벌어지게 됐다. 총선 결과, 제1당 까우끌라이당을 포함한 8개 정당의 야권연합세력의 의석수는 312석이며, 여권의 의석수는 188석이었다. 야권은 하원의 과반수 이상을 차지했지만 자신들이 지지하는 총리를 선출하기 위해서는 상하 양원 회의에서 376석을 얻어야 했다. 친군부 여권은 군부 지명인사들로 채워진 상원 250석의 지지를 모두 받으면 하원 선거의 패배와 관계없이 소수파 정부를 구성할 수도 있었지만 총선 결과에 반하는 것이었다. 여야 양쪽 모두 연정 구성과 자신들이 선호하는 총리 선출이 쉽지 않은 실정이었다. 이런 가운데 제1당인 까우끌라이당의 피타 대표는 376석을 확보하지 못한 채 야권세력들로만 연정을 구성하고 자신이 총리로 취임할 의사를 밝혔다. 프어타이당은 일찌감치 까우끌라이당 주도의 연정에 동의했다. 피타 대표는 상원도 민의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라는 오산을 했다. 그는 상원을 다양한 방법으로 설득했으나 가장 중요한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던 태국 형법 112조 개정 주장을 철회하지 않아서 실질적인 성과를 얻지 못했다. 형법 112조 개정은 까우끌라이당의 야권연합 내에서도 첨예한 이슈로 등장했다. 까우끌라이당 주도로 연립정부 참여 의사를 밝힌 8개 정당들은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그 초안에는 민주헌법 개정 추진, 징병제 폐지, 동성 결혼 합법화, 지방 분권, 토지개혁 등 획기적인 내용이 들어가 있다. 하지만 까우끌라이당의 핵심 공약인 형법 112조 개정은 제외됐다. 여야 정당 중 까우끌라이당을 제외한 어떤 정당도 형법 112조 개정에 찬성한 정당은 없었다. 까우끌라이당은 지난 7월 13일 상 하원 합동 총리선출투표(1차 투표)에서 과반 동의를 얻지 못했으며 상원에서 겨우 13석의 지지를 끌어냈다. 구여권 정당과 상원은 형법 112조 개정을 포기하지 않는 까우끌라이당 후보를 지지하지 않았다. 투표가 끝나고 까우끌라이당은 상원의 총리선출권을 규정하고 있는 헌법 272조 개정 동의안을 국회에 상정했다. 그러나 개정안이 국회 1차 독회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양원의 절반 이상인 최소 376표의 지지를 받아야 할 뿐 아니라 전체 250명의 상원 의원 중 최소 1/3인 84표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므로, 그 실행 가능성이 의문시되었다. 이러한 시도는 이 날 투표에서 나타난 상원의 문제점을 여론화시키기 위한 정치공세로 보인다. 또한, 이와 함께 현재 상원의 총리선출권을 갖는 기간이 내년 5월까지 끝나는데, 이 시기까지 총리선출을 연기하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헌법재판소는 같은 날 까우끌라이당 피타 대표의 의원 자격을 일시 정지시켰다. 이는 선관위의 청원에 의한 것이었다. 태국은 이해상충을 이유로 의원의 미디어 기업 지분 소유를 금지하는데, 피타 대표는 케이블방송사인 ITV의 주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ITV는 2007년 정부와의 주파수 계약이 종료되면서 방송이 중단됐다. 이와 함께 헌재는 까우끌라이당이 추진하고 있는 형법 112조 개정을 입헌군주체제를 전복하려는 시도로 위헌이라는 주장의 헌법소원을 심리하기로 결정했다. 이 두 가지 사건은 정국향방을 좌우할 수 있는 주요 변수였다. 한편으로 피타 대표는 미디어 주식 보유로 인한 선거법 위반 혐의로 헌법재판소로부터 의원직 직무 정지 결정을 받았지만 이후 선관위 내부 조사위원회는 미디어 주식 보유가 문제 될 것이 없으며 피타 대표가 주식을 소유한 ITV가 현재는 미디어 사업을 하지 않고 있고 수익도 없는 상태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이로써 헌재가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관심이 쏠렸다. 1차 투표에 이어 19일로 예정됐던 2차 투표에서 야권연합은 총리후보로 피타 후보를 재지명했으나 이번에는 투표 자체가 무산됐다. 이미 한번 거부된 동의안은 동일한 회기 내에 재심의 할 수 없다고 명시된 국회법 41조에 따라서 피타 대표의 총리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이런 결정에 대해서 까우끌라이당은 일반 동의안과 헌법에 따른 총리선출안은 그 성격이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피타 후보 재지명 불가 결정의 위헌성 여부를 판단해달라고 옴부즈맨사무소를 통해 헌법재판소에 청원했다.프어타이당 쎗타 타위씬 총리 선출 두 차례나 총리선출 시도를 했으나 실패한 까우끌라이당은 야권연합내의 제2당인 프어타이당에게 총리선출권을 넘겨주었다. 프어타이당은 기존의 야권연대를 깨고 까우끌라이당과 협력하지 않는 대신 구여권과의 연정을 추진할 것임을 밝혀 까우끌라이당과 프어타이당 내 강경세력 및 시민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게 됐다. 여권 정당들은 까우끌라이당이 제외된 프어타이당 주도의 연립정부 구성을 원했으며 까우끌라이당은 2014년 쿠데타 주도세력인 쁘라윳 짠오차의 루엄타이쌍찻당과 쁘라윗 웡쑤완의 팔랑프라차랏당과는 연립정부를 구성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까우끌라이당은 프어타이당이 여권과 연정을 구성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그것이 성사되면 친군부 여권 보수정당들에게 정치적 주도권이 넘어가 정치개혁은 불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프어타이당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여갔다. 프어타이당은 친군부 여권정당을 모두 연정에 포함시키고 싶지만 역풍이 예상보다 격렬할 것 같아서 걱정스러웠다. 총선 기간 중 쁘라윗 웡쑤완의 팔랑프라차랏당과의 밀약설이 불거졌을 때 절대로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한 대국민 약속에 대해서도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현실적으로 팔랑프라차랏당과 루엄타이쌍찻당 양당을 배제하는 경우 프어타이당이 추천하는 총리후보의 선출이 쉽지 않게 된다. 양당은 구여권의 핵심세력일 뿐 아니라 상원에 영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프어타이당은 일차적으로 구여권 정당중 비교적 중도성향인 품짜이타이당(71석)을 비롯한 7개 군소정당을 참여시켜 총 9개 정당의 238석을 확보했다. 하지만 하원 과반에 못 미치기 때문에 결국은 팔랑프라차랏당이나 루엄타이쌍찻당과의 연정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종적으로 프어타이당은 모두 11개 정당으로 연정을 구성하기로 하고(총 314석) 쎗타 타위씬을 총리후보로 정했다. 연정구성의 공식적 발표는 총리선출일 직전까지 늦추어졌는데 그 이유는 내각직 등 정치적 이익의 분배가 해결되지 않아서일 수 있지만 자신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까우끌라이당과 여론을 의식하는 측면도 있었다. 구여권 정당 중 하나인 쁘라차티빳당(25석)은 당내 파벌투쟁으로 의견이 갈려 연정참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프어타이당은 까우끌라이당을 연정에는 포함시키지 않은 채, 구여권 정당들과의 연정구성 추진에 대해 이해를 구하기 위한 다양한 정치적 시도를 했으나 까우끌라이당은 프어타이당의 총리 후보를 지지하지 않기로 했다. 그 이유는 프어타이당 주도 연정이 총선민심을 저버렸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총선 이후 이루어져 온 양 당의 공조는 종료되었다. 프어타이당은 세 명의 총리 후보 중 쎗타 타위씬을 총리후보로 선정하기로 했지만 그는 총선과정에서 형법 112조 개정 가능성을 시사한 발언에 대한 해명을 요구받았으며, 부동산업체인 쌘씨리그룹 회장으로 재직시 불법 토지 매입과 탈세 의혹을 받아 계속해서 교체될 가능성이 존재했다. 그가 중도하차하게 되는 경우 차순위 후보는 탁씬의 딸인 패텅탄이었다. 패텅탄은 총선과정에서 실시한 총리후보 선호도 조사에서 가장 많이 압도적 1위를 한 적이 있다. 전반적인 동향과는 달리 프어타이당이 구여권과 연정을 구성하되 총리후보는 팔랑쁘라차랏당의 쁘라윗 대표에게 넘기는 방안도 설왕설래되었다. 반대급부로 구여권 세력들과 상원은 프어타이당의 실소유주인 탁씬의 귀국과 사면 추진을 용인하겠다는 것이었다. 2008년 이후 해외로 도피중인 탁씬은 프어타이당이 집권하면 국왕의 사면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하고 귀국하려는 것으로 알려졌다. 원래 연정구성이 마무리될 것으로 생각했던 8월 10일 귀국할 것이라고 했지만 정치적 상황변화에 따라 다시 귀국일을 늦추어 총리선출일로 예정된 8월 22일 귀국하기로 했다. 탁씬은 지난 15년 동안 20차례 귀국의사를 밝혔지만 번번이 실현되지 못했다. 이번 총선 과정 내내 프어타이당과 팔랑쁘라차랏당과의 빅딜설이 파다했던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선거 기간 동안 쁘라윗은 SNS를 통해 태국 정치 내에서 군부 중심의 권위주의 세력과 민간 정치세력 중심의 자유주의 세력 간의 양극화와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자신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2014년의 쿠데타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했다. 정치권에서는 쁘라윗이 자신을 쁘라윳과 탁씬 전 총리를 수장으로 하는 세력 사이에서 완충 작용을 할 수 있는 적임자로 자리매김하려는 것으로 분석했다. 그것은 또한 총선 후 연립정부 구성 시 정치적 운신의 폭을 넓히려는 정치적 메시지였다(김홍구 2023). 총리 선출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열쇠는 헌법재판소가 쥐고 있었다. 8월 3일 헌법재판소는 총리 선출 2차 투표 무산과 관련한 위헌 여부를 판단해달라는 청원을 받아들일지에 대한 결정을 한 차례 연기한 끝에 마침내 8월 16일 회의에서 그 청원을 기각했다. 이로써 피타 대표가 차기 총리가 될 기회는 사라졌다. 이어서 완무하맛너 마타(Wan Muhamad Noor Matha, 1944년생) 국회의장은 총리 선출을 위한 상하 양원 합동회의를 8월 22일 개최했다. 투표결과는 찬성 482표(하원 330표, 상원 152표), 반대 165표(하원 152표, 상원 13표), 기권 81표(하원 13표, 상원 68표)로 쎗타 타위씬이 제30대 총리로 선출되었다.5) 눈에 띄었던 현상은 연정구성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던 쁘라차티빳당 의원 16명이 찬성표를 던 진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내홍에 휩싸였던 당내 분위기는 더욱 어수선해졌다. 또 팔랑쁘라찻당의 쁘라윗 대표가 투표에 참석하지 않았다. 상원의원 중 쁘라윳 지지파는 찬성표를 던졌으나 쁘라윗 지지파는 반대표나 기권표를 더 많이 던졌다. 총선 기간 중 프어타이당과 밀약설이 떠돌던 쁘라윗의 팔랑쁘라차랏당은 쁘라윳의 루엄타이쌍찻당의 연정 합류에 불만을 가졌다고 알려졌다. 내각직 분배 등 정치적 수혜의 몫이 적어질 것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Khaosod English 2023/08/23). 총리 선출 후 정국 전망 프어타이당은 쎗타를 총리후보로 내세운 후, 민주진영을 배신하고 친군부세력과 협력한다는 비난을 완화시키기 위해 선거 기간 중 공약한 포퓰리즘 정책의 이행을 특별히 강조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공약이 16세 이상 전 국민에게 10,000밧을 지급해서 경기를 활성화시키겠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내각이 출범하게 되면 그 첫 회의에서 현행헌법을 개헌하기 위한 국민투표 실시에 관해서 논의하겠다고도 했다. 헌법개정은 제1당인 까우끌라이당의 중요 선거공약이기도해서 까우끌라이당이 시민사회단체와 연계해 장외 투쟁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고 정치 갈등을 의회로 끌어들여 해결하겠다는 정치적 의도도 엿보인다. 하지만 친군부 세력과 연정을 구성한 프어타이당이 주도하는 헌법개정이 2014년 쿠데타 후 만들어진 2017년 헌법의 군정 유산을 말끔히 제거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어서 제1야당이 될 까우끌라이당과의 갈등이 더욱 심화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프어타이당은 친군부 정당들과 연정을 구성함으로써 탁씬 정권을 무너뜨린 지난 2006년 쿠데타이후 태국 정치를 양분하며 대립해온 군부와 집권을 위해 한배를 타게 된 셈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정치적 화해의 기회로 이어질 수도 있겠지만, 쿠데타를 주도한 세력과 협력한 것으로 비판받을 가능성이 높다. 최근 태국 국립개발행정연구원(NIDA)여론조사에 따르면 프어타이당과 친군부 구여권 정당과의 연정구성에 반대하는 의견이 64.5%로 나타났다. 이는 정치적인 반발이 상당히 심각한 상황임을 시사한다(Thai BPS World 2023/08/20). 까우끌라이당은 프어타이당은 기득권층이며 프어타이당이 주도한 연정 역시 전통적인 정치와 경제엘리트로 이뤄진 집단일 뿐 이라고 평가절하하고 있다. 프어타이당은 그들의 지위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소극적인 개혁에 나설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했다. 앞으로의 태국 정치는 기존의 레드셔츠(친탁씬 세력)와 옐로셔츠(왕실, 군부, 기득권세력)사이의 대립에서는 벗어나게 될 것이다. 대신에 보수세력을 대표하는 프어타이당과 개혁 정당인 까우끌라이당 간의 치열한 경쟁과 대립이 주요 특징으로 예상되며, 이에 대한 평가는 다음 총선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각주1) https://en.wikipedia.org/wiki/Srettha_Thavisin2) https://en.wikipedia.org/wiki/2023_Thai_general_election3) https://en.wikipedia.org/wiki/Pita_Limjaroenrat4) https://en.wikipedia.org/wiki/2023_Thai_general_election.5) https://www.thairath.co.th/news/politic/2719199* 참고문헌김홍구 이미지. 2018. 태국 2017: 군부의 권력유지 위한 명분 찾기. 『한국태국학회논총』24(2): 29-72. 김홍구 이미지. 2020. 태국 2019: 표면적 민간정부로의 복귀와 정치, 경제, 대외관계. 『한국태국학회논총』 27(1): 75-112. 김홍구 이미지. 2021. 태국 2020: 의심받는 타이식 민주주의와 정치과정의 변화. 『동남아시아연구』 31(1): 81-112.김홍구. 2023. 태국, 선거법 개정과 2023년 총선전망. 전문가 오피니언.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2월 10일.현시내. 2023. 태국 2022: 위기가 가지고 온 변화의 기회. 한국동남아학회. 『동남아시아연구』 33(1): 233-279.Khaosod English. 2023. The Surprises and Effects from the Votes for Srettha Thavisin. August 23. https://www.khaosodenglish.com/news/2023/08/23/the-surprises-and-effects-from-the-votes-for-srettha-thavisin/Napon Jatusripitak. 2022. Thailand s New Electoral System: More Freedom of Choice, with a Catch. Fulcrum. September 23. ISEAS-Yusof Ishak Institute). https://fulcrum.sg/thailands-new-electoral-system-more-freedom-of-choice-with-a-catch/Office of the Council of State. Constitution of the Kingdom of Thailand(2017년 헌법). https://admincourt.go.th/ADMINCOURT/upload/webcmsen/Publication/Publication_021220_132718.pdf Parchatai. 2023. Thaksin to Serve 8 Years in Jail. August 22. https://prachataienglish.com/node/10542Thai BPS World. 2023. Poll Respondents Disagree with Pheu Thai s Government of Reconciliation. August 20. https://www.thaipbsworld.com/poll-respondents-disagree-with-pheu-thais-government-of-reconciliation/Bangkok Post, Nation, Thai Pbs World, Khaosod, Prachatai , Thairath, Matichon 관련 각 호 [25] 2023 캄보디아 총선: 선거와 권력 세습 ㅣ 정연식 작성자 동남아연구소 조회수 905 첨부파일 1 등록일 2023.08.21 초록7월 23일 캄보디아에서 총선이 실시되었다. 집권당 캄보디아인민당이 77.89%의 득표율로 하원 의석 125석 중 120석을 석권했다. 2023년 총선에서 인민당의 승리보다 더욱 이목을 집중시킨 부분은 선거를 통해 권력 세습이 단행되었다는 점이다. 훈 센 총리의 장남 훈 마넷 총리 예정자가 총리직을 승계하는 한편 다수의 인민당 권력층이 장관직을 자녀에게 대물림하는 집단적 권력 세습이라는 점에서 극히 이례적이었고, 그만큼 선거에서의 압승이 요구되었다. 캄보디아인민당의 압승은 단기적으로는 경쟁 정당을 배제하고 선거를 치른 결과이기도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대안 세력이 소실하고 인민당 지지층이 확장된 결과물이다. 캄보디아와 같은 선거권위주의 체제하에서 선거의 승리는 입법 독재를 통해 합법적으로 경쟁 세력을 제거하고 승리를 복제한다. 캄보디아인민당은 2023년 총선에서 이 기제를 가동해 영구집권으로 이어지는 권력 세습을 완성했다.이슈페이퍼 25호 바로보기캄보디아의 선거: 체제 변화의 변곡점 7월 23일 캄보디아에서 총선이 실시되었다. 1993년 오랜 내전을 끝내고 유엔의 주관 아래 총선을 치른 후 일곱 번째 치르는 총선이다. 내전을 종식하는 방식으로 유엔이 제안한 선거가 채택되었고, 유엔이 주관한 선거의 결과물로는 민주주의가 전제되었기 때문에 캄보디아의 선거와 민주주의는 늘 국제사회의 각별한 관심사였다. 그러나 캄보디아에 이식 된 민주주의는 안정적으로 착상하고 발전할 것이라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채 퇴행적 변화를 거듭했다. 그리고 그간의 총선은 퇴행적 변화의 변곡점으로 기록되어왔다(정연식 2015, 2018). 1993년 첫 총선은 왕실 정당인 훈신뻣(FUNCINPEC)이 승리했는데, 당시 실질적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캄보디아인민당(Cambodian People s Party)이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두 명의 총리를 두는 변종 체제를 일방적으로 도입해 훈 센(Hun Sen) 정부의 집권을 연장했다. 1997년 무력을 동원해 훈신뻣을 제압한 후 치른 1998년 선거에서는 인민당이 승리하면서 체제의 권위주의적 성격이 강화되었지만, 이후 2003년 총선과 2008년 총선을 치르면서 권위주의 정부가 선거를 통해 정통성과 합법성을 확보하는 선거권위주의(electoral authoritarianism) 체제로 변화했다. 2013년 총선은 공정한 경쟁이 부재했던 이전 총선과 달리 선거를 통해 정권 교체가 가능한 수준으로까지 자유로운 경쟁이 전개되면서 폐쇄적 선거권위주의에서 경쟁적 선거권위주의 체제로 진화했고, 장기적으로는 온전한 민주주의 체제를 향한 발전적 궤도에 오른 것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권 교체 위기에 식겁한 인민당 정부가 경쟁 정당인 캄보디아구국당(Cambodia National Rescue Party)을 강제 해산했고, 그렇게 경쟁 없이 치른 2018년 총선은 인민당이 하원 의석 125석을 독점하는 결과를 낳으며 다시 폐쇄적 선거권위주의로 퇴행하는 변곡점이 되었다. 2023년 총선은 캄보디아의 정치체제에 어떤 변화를 초래했을까.2023년 총선 캄보디아는 의회는 양원으로 구성되는데, 총선에서 하원의원 125명을 비례대표제로 선출하고 62명으로 구성되는 상원은 하원을 통해 간접 선출된다. 7월 21일 3주간의 선거운동 기간이 끝나고 하루 냉각일을 가진 후 7월 23일 총선이 실시되었다. 선관위가 확정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캄보디아인민당이 6,398,311표를 얻어 득표율 77.89%를 기록했고, 이어서 훈신뻣이 716,490표, 득표율 8.72%로 2위에 올랐다. 그 외 134,285표(1.63%)를 획득한 크메르국가통합당(Khmer National United Party)부터 최저 득표 12,786표를 기록한 농민당(Farmer s Party)까지 16개 정당이 뒤를 이었다. 투표율은 84.58%를 기록하며 2018년 총선이 달성했던 82.89%보다 높았다. 동트(D Hondt) 방식에 따른 계산 결과 전체 하원 의석 125석 중 인민당이 120석, 훈신뻣이 5석을 얻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2023년 총선은 결국 2018년 총선과 다를 바 없는 인민당의 압도적인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인민당의 압승은 충분히 예견된 결과였던 터라 국내외 시선은 선거일 직전 전격 발표된 훈 마넷(Hun Manet) 장군의 총리직 승계에 집중되었다. 5년 후로 예정되어 있던 권력 세습이 급작스레 현실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이번 2023년 총선은 권력 세습을 위한 선거였으며 권력 세습을 통해 훈 센 정부의 권위주의적 속성이 극적으로 부각되었다는 것이 중론이다.권력 세습 선거일 이틀 전, 공식적인 선거운동이 종료된 후 훈 센(Hun Sen) 총리가 물러나고 훈 마넷이 새 총리가 될 것이라는 발표가 있었다(Torn Chanritheara 2023/07/21). 이미 수일 전부터 훈 센 총리가 물러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훈 마넷을 총리로 하는 내각 명단까지 유출되고 있었기에 충격은 크지 않았지만, 막상 공식적으로 발표되자 선거를 둘러싼 모든 논의가 권력 세습으로 집중되었다. 예고했던 대로 훈 센 총리는 7월 26일 사임을 발표하고, 8월 7일 왕명에 따라 훈 마넷이 총리가 되었다. 공식적으로는 8월 22일 부자간 총리 승계가 이루어진다. 1952년생 훈 센은 1985년에 총리가 되었으니 무려 38년간 총리를 지냈고, 보도에 따르면 정확히 14,099일 만에 총리에서 물러난다. 훈 센의 장남 훈 마넷은 1977년 민주 깜뿌찌어(Democratic Kampuchea) 치하에서 태어나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뉴욕대학교와 브리스톨대학교에서 경제학으로 각각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고, 군 요직을 두루 거쳐 사성장군으로 육군총사령관까지 역임한 후 이번 총선에서 프놈펜 선거구 1번 후보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권력 세습을 위한 준비는 이미 오래전 시작되어서 훈 마넷은 2022년 인민당 전당대회에서 공식적으로 2028년 총리 예정자로 추대된 후 꾸준히 차기 총리 후보의 자격으로 공개 행보를 벌여왔고, 특히 이번 총선 기간 실질적인 당 지도자의 역할을 맡아 선거운동을 주도했다. 선거운동 기간을 돌이켜보면 훈 마넷 총리의 등장을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을 만큼 훈 마넷은 항상 선거운동의 최전면에 있었다(Khmer Times 2023/07/02). 하지만 일찍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그만큼 훈 센 총리가 여러 차례 권력 승계시기를 2028년으로 못을 박았던 데다 보안까지 철저했던 탓이다. 선거운동이 끝난 후 권력 승계를 공개한 것은 이번 총선이 권력 세습을 위한 선거로 규정되는 것을 막기 위한 고도의 책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구국당 인사들을 포함해 누구도 권력 세습을 선거 쟁점으로 부각하기는커녕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2023년 총선이 권력 세습을 위한 선거였다는 것은 권력 세습의 집단적 성격에서 더욱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 훈 센 총리에서 훈 마넷 총리로 이어지는 권력 세습은 사실 다수의 장관직 세습을 담보로 성립된 것이다. 훈 센 가문의 권력 세습에 대한 인민당 권력층 내부의 반발을 사전에 차단하고 오히려 복종과 결속을 다지기 위한 차원에서 장관직 세습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우선 사르 켕(Sar Kheng) 내무장관과 띠어 반(Tea Banh) 국방장관을 꼽을 수 있다. 사르 소카(Sar Sokha, 40세) 현 교육청년체육부 차관보는 아버지 사르 켕의 내무부 장관직과 부총리직을 그대로 물려받는다. 현 시엠 리업 주 지사인 띠어 세이하(Tea Seiha, 41세)는 아버지 띠어 반의 국방부 장관과 부총리 자리를 승계한다. 그 외에도 하원 의원 당선을 기준으로 기획부 장관 짜이 탄(Chhay Than)의 아들 짜이 리티센(Chhay Rithisen), 산업기술부 장관 짬 쁘라싯(Cham Prasidh)에서 짬 니물(Cham Nimul), 농촌발전부 장관 욱 라분(Ouk Rabun)의 아들 욱 뽀니어(Ouk Ponhea), 국토개발부 장관이자 부총리인 찌어 쏘파라(Chea Sophara)의 사위 이엉 쏘팔렛(Eang Sophaleth), 부총리 임 짜이 리(Yim Chhay Ly)의 아들 임 리엇(Yim Leat), 부총리 께 낌 얀(Ke Kim Yan)의 아들 께 순 쏘피업(Ke Soun Sopheap) 등이 장관직을 세습할 것으로 예상된다(Phon Sothyroth 2023/07/18). 의원직이 입각에 필수 요건은 아니기 때문에 내각 명단이 발표되면 집단 권력 세습의 규모는 확대될 수도 있다. 인민당 발표에 따르면 부총리 10명, 장관 30명, 선임 장관 11명 중 90% 정도 젊고 참신한 인물로 교체될 것이라고 한다(Ben Sokhean 2023/07/23). 권력 세습이라는 비판에 대해 인민당은 권력 세습이 아니라 세대교체이며 이웃 동남아시아 국가들뿐만 아니라 일본을 비롯한 다수의 국가에서 선거를 통해 선대의 역할을 계승하는 현실과 다르지 않다며 캄보디아에 대해서만 왜곡된 관점이 적용된다고 비판했다. 인민당의 주장처럼 이번 총선은 선거라는 형식을 통해 집단적 권력 세습에 형식적 합법성을 부여하는 선거가 되었다. 그야말로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이루어진 권력 세습이다. 선거의 공정성 선거 직후 각종 선거감시단은 2023년 총선을 자유롭고 공정하게 치러진 선거로 규정한 데 반해 미국과 EU, 그리고 UN은 성명을 통해 불공정 선거였다고 비판했다(Samban Chandra 2023/07/25). 사실 선거 현장에서는 과거와 달리 부정선거로 의심할 만한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선거감시단의 감시 결과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반면 불공정 선거라는 비판은 촛불당(Candlelight Party)이 선거에서 배제된 사실을 근거로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촛불당의 전신은 삼랑시당(Sam Rainsy Party)으로, 삼랑시당과 인권당(Human Rights Party)이 2013년 총선을 앞두고 캄보디아구국당(Cambodian National Rescue Party)으로 합당한 뒤 2017년 강제 해산되자 2018년 촛불당으로 개명해 재창당한 정당이다. 비록 선거법에 따라 삼 랑시를 대표로 세울 수 없지만, 이력에서 알 수 있듯이 촛불당은 삼 랑시의 당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가택 구금 상태에 있는 껨 소카(Kem Sokha) 전 구국당 대표와 삼 랑시는 완전히 결별한 상태여서 촛불당이 전 구국당을 온전히 대체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당 전 껨 소카가 이끌었던 인권당 세력은 정당으로 재조직화되지 않고 있어서 촛불당이 반 인민당 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정당으로 부상한 후 그 존재감을 키워오던 터에 선거에서 배제된 것이다. 인민당이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선거 구도에서 그나마 인민당과 경쟁할 만한 유일한 정당을 배제한 것이다. 5월 선관위는 총선 참여를 신청한 20개 정당 가운데 촛불당을 포함한 두 개의 정당에 대해 자격 미달로 선거 참여 불가 판정을 내렸다. 사유는 제출 서류 미비다. 선관위에 따르면 촛불당은 정당 등록증 원본이 아닌 사본을 제출했고 법에 명시된 바에 따라 원본 제출을 요구했지만 제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촛불당은 헌법위원회에 선관위 결정에 대한 적법 심사를 요청했지만, 헌법위원회는 적법 판정을 내렸다. 촛불당은 무기력하게 결과에 순응했다. 선거 후에도 적법 절차라는 올가미에서 탈출하지 못한 채 이번 선거의 불공정성 문제는 거론하지 않고 합법적으로 다음 선거에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Soth Koemsoeun 2023/08/09). 지난 2022년 지방선거에서 득표율 22.2%를 기록한 정당을 서류 미비를 이유로 선거 참여 자격을 박탈한 것은 선거와 공정한 경쟁이 갖는 가치를 기준으로 판단할 때 분명 과도한 법 집행이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번 총선에서 공정성이 결여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촛불당 선거 배제가 야기한 불공정성 문제가 선거 자체를 부정하기에 충분한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1997년 무력으로 훈신뻣을 제압하고 치른 1998년 선거에서도 선거의 공정성 문제가 불거졌지만, 결과를 무효화할 수 있는 논리와 수단이 없었다. 2017년 구국당을 해산할 목적으로 선거법을 개정한 후 새 선거법에 따라 구국당을 해체했을 때에도 선거 불공정성 문제가 강력히 제기되었고 EU는 경제 제재까지 가했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으며 구국당 해산은 정당하게 의법 처리되었다는 인민당의 논리를 제압하지도 못했다. 하물며 이번 촛불당 참여 불허 판단은 기존의 규정을 엄격하게 집행한 것에 불과하다는 인민당의 주장에 대해 더 이상의 비판은 이미 실종된 상태다. 인민당의 압승 캄보디아 정치체제의 성격과 관련해 2023년 총선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인민당이 획득한 높은 지지율이다. 인민당은 84.58%의 투표율과 77.89%의 득표율을 기록했는데, 환산하면 전체 유권자의 65.88%가 인민당을 지지한 셈이며 선거권위주의체제가 추구하는 자발적 복종 과 합법적 독재 를 실현하는 비상한 지지율이다. 분명한 것은 경쟁 정당을 제거하고 권력을 독점하는 인민당이지만 지지율은 더욱 증가했다는 것이다. (1) 대안 세력의 소실 2013년 총선에서 인민당 장기 집권을 위협했던 캄보디아구국당은 법적으로 해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민당의 집요한 탄압으로 인해 실질적으로도 거의 와해한 상태다. 구국당의 두 축이었던 삼 랑시와 껨 소카는 완전히 결별한 상태이며 서로 상대에 대해 언급조차 않을 정도로 견원지간이 된 듯하다. 껨 소카가 장기간의 구금과 재판을 겪는 동안, 그리고 지난 3월 27년 가택구금형과 피선거권 박탈이 선고되었을 때에도 삼 랑시는 껨 소카에 대한 언급을 회피했다. 두 세력 간 연대와 협력은 거론조차 된 적이 없다. 삼 랑시를 비롯한 구국당 망명 인사들은 5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캄보디아 국민들로부터 지리적 거리만큼 심정적으로도 멀어졌다. 소셜미디어에 의존하는 적극적 지지자들과의 소통조차 빈도와 규모에서 모두 쇠락하는 모양새다. 아울러 지적되는 문제는 이들이 뚜렷한 전략조차 제시하지 못하는 무력한 세력으로 전락했다는 점이다. 삼 랑시는 두 차례나 공언했던 귀국 시도에서 모두 실패했는데, 그 어설픈 과정은 지지자들을 실망케 했다. 게다가 훈 마넷 미국 육사 졸업 허위와 같은 근거가 박약한 주장들을 남발하며 스스로 신뢰도를 갉아먹었다. 2018년 총선에서는 깨끗한 손가락 캠페인을 벌이며 선거 보이콧 운동을 전개했는데, 손가락 잉크 유무가 사회적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 비현실적인 전략으로 오히려 투표율을 높이는 결과를 초래해 인민당에 면죄부만 선사한 꼴이 되었다. 만약 당시에 무효표 운동을 벌였더라면 결과는 크게 달라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구국당 인사들은 뒤늦게 이를 깨닫고 이번 총선에서는 무효표 운동을 벌였으나 인민당의 적극적인 방어책에 막힌 표심은 무효표 운동에 동참하지 않았다. (2) 인민당 지지층 확대 2013년 총선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투표율, 그리고 무효표와 인민당 득표율이다. 우선 투표율을 보면 2018년 83.02%에서 2023년 84.58%로 증가했다. 이는 투표를 독려하는 대대적인 캠페인이 장기간 이어졌고 그에 따라 깨끗한 손가락이 받게 될 유무형의 사회적 압력이 증가한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다. 훈 센 정부는 득표를 극대화하여 정통성을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의 목적이기 때문에 모든 매체를 동원해 투표 독려에 나섰다. 선거일인 7월 23일 전후로 사흘을 묶어 공휴일로 지정하고 유권자들이 귀향하는 데 무료 교통편을 제공하는 등 투표율을 높이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7월 24일부터 최소 일주일간 깨끗한 검지가 초래할 시선과 압력은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기표소는 비밀이 보장되는 공간이기 때문에 인민당 정부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유권자라면 무효표 운동에 동참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효표는 440,154표(5.36%)에 그쳤고 이는 2018년 총선의 8.59%에 비해 오히려 감소한 수치다. 무효표 운동 실패의 최대 수혜자는 훈신뻣이다. 2018년 5.89% 득표에 그치며 소멸 직전까지 갔던 훈신뻣은 8.72%로 득표율을 끌어올리며 5석을 확보하고 극적으로 소생했다. 2021년 말 라나릇(Ranariddh) 왕자 사망 이후 짜끄라웃(Chakravuth) 왕자가 훈신뻣 재건에 나서 결국 의석을 확보하는 수준으로까지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극적으로 회생한 훈신뻣은 선거가 끝나기 무섭게 충성 야당이 될 것을 천명했다(Soth Koemsoeun 2023/08/08). 촛불당, 즉 과거 삼랑시당의 뿌리가 훈신뻣이었으니 촛불당 지지자들이 차선책으로 훈신뻣을 선택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무효표가 5.36%에 그쳤다는 사실이며 과거 구국당을 지지했던 유권자들 다수가 구국당을 포기한 것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인민당은 6,398,311표를 얻어 77.89%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는 2018년 총선의 76.85% 대비 1% 포인트 이상 증가한 것이다. 사실 일곱 차례 총선을 치르는 동안 인민당 지지율은 삼랑시당과 인권당이 구국당으로 통합해서 도전했던 2013년 총선을 제외하고 꾸준히 상승세를 이어왔다. 특히 인민당을 지지하지 않는 유권자들은 선택지가 제거된 2018년 총선에서 대거 인민당 지지로 선회했고, 그 추세가 2023년 총선에서 반복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대세에 대한 승복과 편승 효과로 설명할 수 있다. 대안이 사라진 상황에서 적극적인 저항을 선택하기에 충분한 명분과 사유가 없다면 대세 편승은 그리 어려운 선택이 아니다. 특히 저항의 대가가 크고 전향에 대한 보상도 크다면 더욱 그러하다. 인민당 정부는 집요하고도 치밀하게 반대자들을 탄압하는 한편 전향자들에게는 큰 보상을 제공하며 반대 세력을 와해시키는 전략에 주력해왔고, 총선을 통해 그 효과는 확인되었다. 2023년 총선을 앞두고도 수개월 전부터 야당 탈당, 인민당 입당 사례들이 줄을 이었다. 전향자들에게는 반드시 보상이 주어진다. 훈 센 총리는 인민당은 삼 랑시를 제외하고 누구든지 환영한다고 수시로 공언한다. 최근 사례를 하나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한국에서 반정부 활동을 이끌었던 임 시난(Yim Sinan)은 총선 3개월 전 인민당 지지로 전향하면서 노동부 차차관보(Undersecretary of State)로 임명되었고 총선 직후 차차관(Secretary of State)으로 승진했다(Khmer Times 2023/08/05). 전향에 필요한 명분은 인민당이 제공한다. 발전과 평화의 수사는 모든 매체를 동원해 무한 반복된다. 성장과 발전은 모두가 체험하는 것이며 그 성과를 인민당 정부에서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발전의 수사는 인민당 지지에 충분한 명분을 제공한다. 인민당 정부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산티피업(santiphap), 즉 평화다. 캄보디아에서 평화라는 단어는 전쟁과 죽음의 부재를 가리키며 그것은 곧 민주 깜뿌찌어의 종식, 그리고 그 끔찍했던 시대를 끝낸 인민당과 베트남의 공로를 함축한다. 이는 반 베트남 정서에 의존하는 반대 세력은 캄보디아를 평화가 실종된 과거로 회귀시킬 것이며 인민당만이 이를 막을 수 있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각종 행사와 저작물이 이 산티피업의 수사를 재현하며 기억의 정치를 구현한다. 77.89%의 득표율은 이렇게 구축된 것이며 인민당에 대한 유권자들의 압도적인 지지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압도적 지지 위에 구축된 권위주의 체제가 그리 특별하거나 불가능한 현상은 아니다. 2023년 총선을 통해 캄보디아 정치체제에 관해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인민당 정부의 권위주의적 속성이 아니라 인민당 일당지배체제의 불가해성이다. 의사민주주의의 고착화(1) 선거권위주의와 입법독재 훈 센 가문이 지배하는 인민당은 영구집권을 추구하고 있으며, 그 수단으로 선거를 활용한다. 선거에서의 승리는 정통성과 합법성을 부여하며 통치 비용을 최소화할 뿐만 아니라 입법 권력을 이용해 비판을 제거하고 경쟁자를 제거함으로써 차기 선거에서의 승리를 보장한다. 선거권위주의체제로 지칭할 수 있는 이 기제는 2017년 구국당 강제 해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2017년 지방선거에서 구국당이 43.83%를 득표하며 50.76%를 얻은 인민당을 위협하자 인민당은 선거법을 개정해 구국당을 해산한 후 2018년 총선을 경쟁 없는 선거로 만들어 125석 전체를 석권했다. 입법 권력을 독점한 인민당은 차기 선거 승리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모든 조치를 법제화했다. 2023년 총선의 전초전 격인 2022년 지방선거에서 촛불당이 22.2%를 득표하며 급부상하자 인민당은 촛불당을 제압할 묘수를 찾아야 했다. 인민당 계산으로는 총선에서 최소 20석을 확보할 수 있는 득표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선관위에서 촛불당의 선거 참여를 불허한 것이다. 촛불당에 정당 등록증 원본이 없다는 사실을 인민당이 사전에 인지하고 기획한 것인지 아니면 촛불당을 제거할 명분을 찾고 있던 훈 센 정부에게 우연히 찾아온 횡재인지 단정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정당 등록증 원본이 없는 촛불당은 총선에서 배제되었고, 결과적으로 인민당은 안정적인 입법 권력을 다시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촛불당이 배제된 후 무효표 운동이 전개되자 인민당은 7월 초 선거 직전에 선거법을 개정해 무효표 선동죄를 추가한 후 바로 무효표 운동에 가담한 인사들을 색출하는 작업에 나섰다(Soth Koemsoeun 2023/07/06). 아울러 미투표자에 대해 추후 총선 2회 피선거권을 박탈한다는 조항도 추가했다(Hang Punreay 2023/07/06). 7월 17일 선관위는 선거법 개정안에 의거해 삼 랑시를 포함한 전 구국당 인사 17명에 대해 무효표 선동 혐의로 피선거권 20년 정지를 명령했다. 선거가 끝난 후에도 무효표 운동에 대한 추적, 색출 작업을 벌여 선관위는 해외 거주 활동가 21명에 대해 같은 혐의로 피선거권 20년 정지를 명령했다. 경찰은 무효표 선동 혐의로 국내 거주자 44명을 공개 수배하고 검거에 나섰다(Buth Reaksmey Kongkea 2023/07/25). 영구집권을 위한 입법 권력 행사는 언론법과 시민사회단체법에서도 위력을 발휘한다. 특히 회계 재정과 같은 취약한 부분을 의법 공략함으로써 언론에 재갈을 물리거나 폐쇄하기도 한다. 시민사회단체들은 이미 크게 위축되어 정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거의 사그라든 상태다. 게다가 일명 LANGO로 지칭되는 개정 시민단체법은 모든 시민사회단체의 회계 공개를 의무화하고 있다. 현재 시민사회단체들이 이를 거부하고 있는 형국인데, 조만간 유예 기간이 종료되면 시민사회단체들에 대한 공권력 행사가 대대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2) 합법적 의사민주주의 인민당 정부의 권위주의적 지배는 모두 입법 권력이 제공하는 합법성을 획득한다. 모든 비민주적이고 반인권적인 행위가 법의 테두리 내에서 이뤄지며, 원초적 권위주의체제에서 빈번히 행사되는 초법적, 탈법적 지배는 불필요하다. 요컨대 인민당 정부는 항상 합법적이다. 명백히 비민주적이고 반인권적인 행태에 대한 내외부의 비판과 제재도 이 형식적 합법성의 논리를 넘지 못한다. 총선 참여 불가 통보를 받은 후 촛불당은 뻔한 결론이 예상되는 헌법위원회 재심을 청구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러한 형식적 합법성을 격파하는 방법은 선거 승리 혹은 혁명적 전환뿐이다. 입법 권력을 장악한 안정적인 선거권위주의체제에서 선거를 통해 그 체제를 무너뜨리는 것은 실현 가능성이 지극히 낮다. 선거를 통한 권력 교체 가능성이 보인다면 체제는 입법을 통해 그 가능성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혁명적 전환의 가능성도 마찬가지다. 77.89%가 지지하는 체제를 전복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비상한 상황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2023년 캄보디아 총선은 인민당 영구집권을 향한 선거권위주의체제 궤도를 완성하는 선거가 되었다. 이제 캄보디아는 전형적인 의사민주주의(pseudo-democracy)로 고착되어 장기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선거 직후 유럽과 미국이 불공정 선거라 규정하고 비판한 데 반해 중국을 비롯한 캄보디아에 우호적인 국가들로부터는 축하 메시지들이 쇄도했다. 8월 초에는 태국의 탁신 전 총리와 잉락 전 총리가 함께 훈 센 총리의 생일잔치에 등장해 인민당의 선거 승리를 축하하고, 훈 마넷 총리와 나란히 앉아 담소하는 모습이 보도되면서 이목을 집중시켰다. 특히 리 셴 룽(Lee Hsien Loong) 싱가포르 총리가 보낸 축하 서한은 모든 언론이 총동원되어 전파했다(Woon 2023/08/07). 싱가포르를 비판하지 않는다면 캄보디아도 비판할 수 없다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체제의 유사성과 합법적 권력 세습까지 닮은꼴이라 든든한 후원군을 얻은 셈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개념적 필수 요건을 갖추지 못한 가짜 민주주의들이며, 장기간 고착화에 따른 무감각과 무저항이 비민주적 속성을 위장하는 효과를 발휘할 뿐 진성 민주주의가 될 수는 없다. * 참고문헌정연식. 2015. 2013년 캄보디아 총선: 선거권위주의에 대한 도전. 『동남아시아연구』 25(1): 85-119.정연식. 2018. 2018년 캄보디아 총선: 캄보디아구국당 해산과 퇴행적 선거권위주의. 『동남아시아연구』 28(4): 197-221.Torn Chanritheara. 2023. Manet Could be Leader in Three to Four Weeks: PM. Cambodianess. July 21. https://cambodianess.com/article/manet-could-be-leader-in-three-to-four-weeks-pmKhmer Times. 2023. General Hun Manet Kicks Off Election Campaign for Cambodia s Ruling Party. July 2. https://www.khmertimeskh.com/501317490/general-hun-manet-kicks-off-election-campaign-for-cambodias-ruling-party/Phon Sothyroth. 2023. Nearly One Quarter of Ruling CPP s 125 Candidates are Related. Camboja News. July 18. https://cambojanews.com/nearly-one-quarter-of-ruling-cpps-125-candidates-are-related/Ben Sokhean. 2023. Generational Shift? CPP Says New Cabinet Will Mostly Comprise Younger Blood. Khmer Times. July 26. https://www.khmertimeskh.com/501330941/generational-shift-cpp-says-new-cabinet-will-mostly-comprise-younger-blood/Samban Chandra. 2023. Views Differ on Observers Evaluations of July 23 Polls. The Phnom Penh Post. July 25.Soth Koemsoeun. 2023. Candlelight Party Appeals for Right to Join in Next Election. Khmer Times. August 9. https://www.khmertimeskh.com/501339091/candlelight-party-appeals-for-right-to-join-in-next-election/Soth Koemsoeun. 2023. Funcinpec Ready to Work With CPP. Khmer Times. August 8. https://www.khmertimeskh.com/501338475/funcinpec-ready-to-work-with-cpp/Khmer Times. 2023. Yim Sinan Promoted to Secretary of State at Ministry of Labour. August 5. https://www.khmertimeskh.com/501337460/yim-sinan-promoted-to-secretary-of-state-at-ministry-of-labour/Soth Koemsoeun. 2023. Spoilers Alert! PM Seeks Arrests of Those Fooling Voters to Invalidate Ballots. Khmer Times. July 6. https://www.khmertimeskh.com/501319526/spoilers-alert-pm-seeks-arrests-of-those-fooling-voters-to-invalidate-ballots/Hang Punreay. 2023. King Issues Decree Ratifying Newly Amended Election Law. Khmer Times. July 6. https://www.khmertimeskh.com/501319530/king-issues-decree-ratifying-newly-amended-election-law/Buth Reaksmey Kongkea. 2023. The Hunt is on for Sabai Sabay Members. Khmer Times. July 25. https://www.khmertimeskh.com/501330114/the-hunt-is-on-for-sabai-sabay-members/Woon, Wallace. 2023. PM Lee Congratulates New Cambodian PM Hun Manet. The Straits Times. August 7. https://www.straitstimes.com/singapore/pm-lee-congratulates-new-cambodian-pm-hun-manet [24] 미국의 동남아언어여름학교(SEASSI): 역사, 성과 및 함의 ㅣ 정은숙 작성자 동남아연구소 조회수 1133 첨부파일 1 등록일 2023.01.01 초록이 글은 미국 동남아언어여름학교(Southeast Asian Studies Summer Institute)의 역사, 성과 그리고 함의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미국 동남아언어여름학교는 1983년도에 처음 설립된 이후 지난 40년 동안 수많은 동남아 언어 및 지역전문가들을 배출해왔으며 동남아를 연구하는 학자에게는 하나의 자연스러운 관문이 되었다. 동남아언어여름학교 참가자들은 언어뿐만 아니라 문화를 터득하며, 다른 연구자들과 깊은 연대를 형성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동남아언어여름학교는 참가자들에게는 언어학교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동남아언어여름학교의 성공은 대학간 자발적인 협력, 자원 공유, 그리고 새로운 모델의 모색이 바탕이 되었다. 또한 1958년에 시작된 미국연방정부의 보조로 동남아 언어 전문가 및 지역연구자를 키우는 것이 가능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동남아언어여름학교의 업적뿐만 아니라 그 한계도 배워보면서 동남아언어여름학교가 계속 성공적으로 지속될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이슈페이퍼 24호 원문 내려받기 미국 동남아언어여름학교(Southeast Asian Studies Summer Institute)는 영어의 앞 자를 따서 짧게 SEASSI(씨아시)라고 불린다. 씨아시는 긴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 동남아를 연구하는 학자라면 그 이름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다. 미국 대학뿐만 아니라 국내에 자리잡은 동남아 분야 교수들도 씨아시를 거쳐 가기도 했다. 이번 이슈페이퍼는 씨아시의 지난 40년간의 역사, 추진 배경, 구조, 재정 그리고 성과를 소개하고자 한다. 특히, 전북대 동남아언어캠프가 지난 3년 동안 여섯 번의 동남아언어 캠프를 성공적으로 개최해온 이 시점에서 미국 씨아시의 업적과 한계를 배워보는 것도 비교적인 관점에서 유용할 것 같다. 또한 이 이슈페이퍼가 전북대 동남아언어캠프의 미래를 계획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미국 동남아언어여름학교의 역사 동남아 언어에 대한 관심은 동남아 지역연구와 함께 시작하고 성장해왔다. 그러므로, 미국 동남아언어여름학교(이하 씨아시)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남아연구가 어떻게 시작되고 발전했는가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미국대학들이 동남아언어 교습을 비롯한 동남아 지역연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시점은 2차 세계대전 이후다. 그전까지만 해도 동남아연구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대학에서 많은 관심을 보였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강대국으로 부상했고 구소련과의 경쟁 속에서 전 세계를 미국의 세력권으로 흡수하는 정책을 펴는 과정에서 동남아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특히, 현지언어와 지역연구 인력들이 급속도로 필요해지면서 미국 국방부와 중앙정보국(CIA: Central Intelligence Agency)은 대학과의 연계를 통해 동남아 언어교육 및 동남아연구 인력들을 키울 수 있도록 지원하기 시작했다.1) 미국연방정부가 동남아연구에 지원을 시작한 시점은 1950년대 말 1960년대 초였다. 미국 의회가 국가안보교육법안(The National Defense Education Act)을 1958년에 통과시켰고 이 법안의 통과로 미국 대학들이 연방정부의 보조를 받으면서 동남아연구를 비롯한 지역연구 인력을 양성하게 되었다. 이 법안으로 국가안보에 관련된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인력을 키우기 위한 국가안보외국어장학금(National Defense Foreign Language Title VI Fellowship)도 시작될 수 있었다. 이 두 장학금은 1970년 이후에 국방부 주관이 아닌 교육부가 관리하게 되었고 국가안보외국어장학금이 아닌 외국어및지역연구장학금(FLAS: The Foreign Language and Area Studies Fellowship)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름은 바뀌었지만 지역연구와 언어교육을 유지하는 데에 여전히 가장 중요한 펀딩이며 씨아시의 주요 재정 지원이 되고 있다. 법안 통과 당시 의회 보고서를 보면 미국이 자유국가로서 성장하고 진보하는 것은 어린 세대를 우리가 어떻게 교육하는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고 쓰여있다.2) 즉, 동남아 언어와 지역연구에 대한 관심은 미국이 강대국으로 성장하려고 하는 전략과 맞물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정부가 동남아 연구에 실질적으로 도움을 준 것은 1960년대부터 이지만 미국 동남아 연구의 시작은 민간기업이 설립한 재단의 도움으로 사립대에서 시작되었다. 그 이후에 정부의 도움이 보태지면서 동남아 언어와 지역연구가 주립대에서도 성장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동남아 연구를 시작한 대학은 예일대학교이다. 카네기기업재단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1947년에 시작하였다. 동남아 연구의 시작으로 보는 시점은 동남아 연구가 대학 커리큘럼에 공식적으로 등장한 년도를 기점으로 한다. 그 전까지만 해도 미국대학에서 동남아를 하나의 연구 단위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일대학에서 동남아를 연구하는 교수들이 있었지만 동남아 연구라는 이름으로 묶이게 된 건 1947년이라 하겠다. 사회학자이면서 인류학자로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에서 현지조사를 한 래이몬드 케네디(Raymond Kennedy) 교수가 동남아 연구를 주도하였다. 그리고 언어학자이며 버마어를 연구하던 윌리엄 코오닌(William Cornyn) 교수, 말레이시아어 및 폴리네시아언어를 연구했던 이시도어 디엔(Isidore Dyen) 교수는 동남아 연구가 시작되면서 군인전문 언어 프로그램을 발전시키기도 했다.3) 그러나 군인 전문 프로그램은 1970년대에 중단되었고 예일대학의 동남아에 대한 관심도 줄어들기 시작했다.두 번째로 동남아 연구를 시작한 대학은 코넬대학교이다. 코넬대학교는 록펠러재단의 도움을 받아 동남아 연구를 1951년에 시작했다. 그 당시 아시아를 담당하던 록펠러재단의 아시아 담당자였던 씨 벌톤 화스(C. Burton Fahs)는 예일대학에 대한 선의의 경쟁자로 코넬대학교을 선택했다고 한다. 특히 예일대학이 레이몬드 케네디교수의 주도로 도서부 동남아 국가를 주로 연구했으므로 코넬대학을 동남아 대륙부 국가를 특화하는 대학으로 만들고자 했다.4) 이렇게 해서 코넬은 동남아 대륙부 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동남아 연구를 시작하였고, 태국어 수업이 제일 먼저 개설되었다. 또한 코넬대학은 1970년대에는 포드재단의 지원을 받아서 동남아 연구를 계속 키워 나가면서 동남아 대륙부 국가뿐만 아니라 도서부 동남아 국가에 대한 전문성도 갖추기 시작했다. 코넬대학의 동남아 연구 명성은 현재까지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미국의 두 사립 명문 대학이 동남아 언어교육과 연구의 문을 열어주었고 그 이후에는 연방정부의 도움으로 주립대학교에도 동남아 연구가 생겨났다. 주립대들이 동남아 언어교육과 연구를 시작한 것은 주로 1960년대이다. 각 대학교에서 어떻게 동남아 연구가 시작되고 성장하게 되었는지 각 주마다 그들만의 이야기가 또 따로 있다. 여기서 다 다룰 수는 없지만 예를 들어, 버클리가 동남아 연구를 시작한 것은 1960년이고 1969년까지는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연구소를 하나의 센터에서 담당했다. 미시간대학교는 동남아 연구를 1961년에 시작했고 동남아와 남아시아 프로그램을 묶어 함께 운영하기 시작하였다.5) 위스콘신대학교에서도 1960년에 동남아 연구가 시작되었는데 정작 동남아연구소가 설립된 것은 1973년이다. 미국 대학들 중 1972년에 동남아연구가 있었던 곳은 14개 대학교이다. 14개 대학교는 다음과 같다. 아메리칸대학교, 캘리포니아-버클리대학교, 시카고대학교, 콜롬비아대학교, 코넬대학교, 하와이대학교, 캔자스주립대학교, 미시간대학교, 노던일리노이주립대학교, 오하이오대학교, 서던일리노이주립대학교, 워싱턴대학교, 위스콘신대학교 그리고 예일대학교이다.6) 미국의 대학 수에 비해 동남아 연구에 관심을 가지는 대학교들이 많았던 것은 아니다. 또한 동남아 연구에 관심을 보였지만 모든 동남아 언어를 동시에 제공할 수 있는 역량이 되는 대학교는 없었다. 대학이 컨소시엄을 만들어 씨아시를 운영하게 된 계기는 동남아의 특수성과 미국 대학의 한계가 대학 간 컨소시엄에 기초한 씨아시 운영이라는 새로운 동남아 언어교육 방법을 강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동남아는 많은 국가, 인종 그리고 언어로 이루어진 곳이다. 동남아라는 지역으로 묶였지만 언어문화 차이가 아주 크다. 그러므로 한 대학에서 모든 동남아 언어를 제공할 수 있는 교수진, 학생 수요, 도서관련 자료, 언어 전문가 등 기본 인프라를 제대로 갖추는 것이 쉽지는 않은 문제였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동남아 언어를 여름방학 동안 한곳에서 배울 수 있는 씨아시 모델은 학생들이나 교수진들에게 큰 편의를 제공해준다. 씨아시는 그전부터 운영되고 있던 인도네시아어여름학교(Indonesian Summer Studies Institute)를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1973년에 시작한 인도네시아어여름학교는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처음 열렸으며 인도네시아어 초급과 중급을 개설해서 가르쳤다. 인도네시아에서 직접 선생님들을 모셔와 강의를 했고 여기에 참가한 학생들은 주로 인도네시아에 관심이 있었던 대학원생들이었다고 한다. 한 반에 4-5명의 학생이 있었으며 캠퍼스 근처에 집을 빌려서 학생들이 기숙사 생활을 같이 하였다고 한다.7) 프로그램은 8주 동안 매일 8시부터 12시까지 수업이 진행되었다. 인도네시아어여름학교에 1973년에 참가했던 엘렌 라퍼티(Ellen Rafferty) 교수는 대학원생 때 처음 인도네시아어여름학교를 알게 되었고 여기에서 인도네시아어를 배우고 그 이후에 인도네시아로 현지조사를 떠났다고 한다.8) 그 당시 같이 인도네시아어를 배웠던 학생들은 현재 다른 대학에서 교수직을 역임하고 있다고 했다. 엘렌 라퍼티 교수는 언어학으로 뉴욕주립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위스콘신대학교에서 조교수로 근무하기 시작해서 정교수로 최근에 은퇴를 했다. 은퇴 후에도 명예교수로서 계속 인도네시아 언어 교육에 기여하고 있다. 엘렌 라퍼티 교수는 인도네시아 정부로부터 인도네시아 언어 교육에 대한 공헌으로 감사장을 받기도 했다. 인도네시아어여름학교가 성공적으로 몇 년간 자리를 잡은 이후에 다른 동남아 언어에도 적용시켜보자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미국 교육부가 제공하는 외국어및지역연구장학금이 일반학기와 여름학기로 나뉘는데 여름학기에 수업을 제공하는 곳이 없었으므로 연방정부 교육부에서 운영하는 국가자원센터(National Resource Center) 관련 보조를 받는 대학의 동남아연구센터들이 함께 모여서 동남아 언어교육을 제공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게 되었다.9) 국가자원센터는 외국어 및 지역연구에 특화된 대학교 연구소를 지원하고 있으며 동남아연구센터가 있던 대학들을 중심으로 컨소시엄을 만들었다. 대학교 컨소시엄은 아리조나대학교, 코넬대학교, 미시간주립대학교, 노던일리노이대학교, 오하이오대학교, 버클리, UCLA, 하와이대학교, 미시간대학교, 노트르담대학교, 워싱턴대학교, 위스콘신대학교, 그리고 예일대학교로 구성되었다.10) 이 컨소시엄은 미국아시아학회(Association of Asian Studies)의 멤버로서 매년 연례 컨퍼런스 때 모여 씨아시에 대해 논의하고 프로그램을 발전시킬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왔다. 기존의 각 대학에서 제공하는 봄/가을학기 교육뿐만 아니라 여름방학에도 수업을 제공하자는 데에 동의하게 되었고 이러한 노력은 1983년에 처음 결실을 맺었다. 씨아시 창립에 참여했던 마이클 컬리네인(Michael Cullinane)에 의하면 이 컨소시엄에서 리더 역할을 했던 것은 오하이오대학교와 미시간대학교라고 한다. 그때 마이클 컬리네인은 미시간대학교 동남아연구소 부소장(Associate Director)으로 일하고 있었고 현재는 위스콘신대학교 동남아연구소에서 부소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그는 씨아시를 직접 시작하고, 조직하고, 운영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해온 씨아시의 산 증인이다. 제일 첫 번째 씨아시는 미시간대학교와 오하이오대학교가 나누어서 개최하였다. 위스콘신대학교 웹사이트에는 오하이오대학교가 첫 번째 개최 대학이라 쓰였지만 실제로는 두 대학이 언어들을 나누어서 개최를 했다고 마이클 컬리네인은 주장했다.11) 오하이오대학에서 처음 씨아시를 개최했을 때 중요한 역할을 했던 윌리엄 프레드릭(William Frederick) 역사학과 교수는 그 당시 오하이오대학 여러 과에 동남아 관련 교수들이 채용되어 있었고 전공분야를 넘어 동남아 언어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같이 일을 한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윌리엄 프레드릭 교수는 씨아시 모델이 나중에 남아시아언어여름학교 그리고 러시아언어여름학교가 만들어지는데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12) 그 이후로 표 1 에서 보여주듯이 2000년까지 컨소시엄에 속해 있는 대학들이 2년에 한번씩 캠퍼스를 바꿔가면서 개최를 하였다. 한 대학에 무리한 부담을 주는 것을 막고 각 대학이 지니고 있는 언어교육의 강점을 살려보자는 의도가 있었다. 씨아시를 개최하는데 관심이 있는 대학이 프로포절을 냈고 미국아시아학회 연례 컨퍼런스에서 투표로 개최지를 결정했다.13) 그러나 2000년 이후부터는 위스콘신대학에서 매년 지속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과거 몇 년 동안의 토론을 통해 여러 대학에서 돌아가면서 개최하는 것보다 한 장소를 결정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의견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위스콘신대학에서 씨아시를 지속적으로 운영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매번 학교를 2년에 한 번씩 바꾸었을 경우 지속성이 없기 때문에 씨아시 운영에 대한 경험과 노하우를 쌓기 힘든 부분이 있으며 학교 행정 쪽과 다시 협정을 맺어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다. 특히 등록금을 적정수준에 책정하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인데 학교 측의 동의를 얻어내기가 힘들기도 하다. 1994-1995년 위스콘신대학에서 개최된 씨아시가 성공적이었고 대학 측에서도 등록금 책정에 긍정적이었다. 이런 이유로 위스콘신은 씨아시를 장기적으로 개최하겠다는 프로포절을 냈고 컨소시엄에 있는 대학 관계자들의 만장일치로 지금까지 위스콘신에서 개최하고 있다. 위스콘신대학으로 씨아시를 옮긴 이후로 다른 대학들에서 씨아시를 개최하겠다는 프로포절을 제출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한다.14)씨아시의 구조 씨아시 동남아 언어 강좌는 총 8주 프로그램이다. 학생들은 8주 동안 8학점을 이수하고 위스콘신대학교에서 주는 공식 성적표를 받게 된다. 이수한 학점은 학생들이 속해 있는 대학교와 학점교류가 가능하다. 두학기에 걸쳐 배울 내용을 8주 동안 배우는 것이므로 프로그램이 훨씬 집중적이다. 학생들이 두 학기에 걸쳐 언어를 배우든 8주에 걸쳐 배우든 학습성과가 같아야 하기 때문에 아주 집중된 8주를 같이 보내게 된다.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레벨테스트를 통해 학생들의 레벨을 정한다. 동남아 언어를 배운 경험이 전혀 없는 경우는 초급에서 시작하지만 현지에 살아본 경험이 있거나 수업을 들었던 적이 있는 학생들은 레벨테스트를 하게 된다. 레벨테스트는 구술시험과 필기시험으로 나뉜다. 구술시험은 듣기와 말하기 중심이고 필기시험은 어휘, 문법 그리고 글쓰기를 보게 된다. 구술시험은 화상통화를 통해 여름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치루게 되고 필기시험은 학기 시작 첫날 보게 된다. 동남아 언어 레벨은 초급, 중급 그리고 고급으로 나뉜다. 각 레벨마다 가르치는 강사가 정해져 있지만 학생들이 다른 강사한테도 익숙해질 수 있도록 강사들이 수업을 바꾸어서 들어가기도 한다. 수업은 오전 8시부터 12시까지 이어지고 읽기, 쓰기, 듣기, 말하기로 나누어져 있다. 평가는 주로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같은 시험 중심 보다는 프로젝트를 바탕으로 하게 된다. 주제를 주고 관계자들을 인터뷰하고 인터뷰를 바탕으로 글을 써 마지막에는 발표도 한다. 이를 통해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목적이다. 수업은 초급반도 최대한 현지어로 진행한다. 오후에는 학생들이 3-4시간을 투자해서 수업내용을 공부하고 숙제를 해야만 수업을 따라갈 수 있다. 학점은 A, AB, B, BC, C, D, F로 나뉜다.강사와 학생 비율은 보통 한 명의 강사가 6-7명의 학생들을 가르친다. 물론 등록인원이 낮아지면 한 강사가 4-5명의 학생을 담당하기도 한다. 씨아시에서 수학 가능한 언어는 버마어, 필리핀어, 인도네시아어, 캄보디아어(크메르어), 라오어, 태국어, 자바어, 몽어 그리고 베트남어이다. 이 중, 표 2 에서 보여 지듯이, 인도네시아어와 태국어가 참가 학생수가 제일 많고 그 다음으로는 베트남어와 필리핀어가 학생수가 많다. 이외에도 버마어, 크메르어, 그리고 라오어도 많은 학생수는 아니지만 신청하는 학생들이 꾸준히 있는 편이다. 자바어는 학생수가 많지는 않지만 가르치는 곳이 없으므로 신청하는 학생이 있다면 수업을 개설한다. 인도네시아어를 가르치는 교수님 중에 자바어도 가르칠 수도 있는 분을 초빙하여 수업을 개설하게 한다. 씨아시의 교수진들은 언어를 효율적으로 가르치는 데 필요한 교수법을 지속적으로 연구하면서 강의에 뛰어난 분들을 초빙한다. 씨아시에 동남아 언어 선생님으로 초빙되었다는 것은 강사로 자질을 인정받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언어를 가르치는 강사들은 대학컨소시엄에 속해 있는 대학의 교수들을 모셔오거나 필요할 시에는 현지에서 언어교육의 경험이 많은 분들을 모셔 오기도 한다. 보통 학생수에 따라 달라지지만 선생님의 수는 13명에서 25명 사이이고 각 언어마다 언어 코디네이터가 있다. 각 언어 코디네이터는 강의도 하지만 강의계획서를 만들고 점검하며 강의의 질, 각 반의 진도, 학습 과제 성과들을 관리하는 역할을 한다. 매주 회의를 통해 강사들이 힘든 점들을 상의하기도 한다. 각 언어 코디네이터 위에는 씨아시 총괄 언어 디렉터가 있다. 씨아시 총괄 언어 디렉터는 레벨테스트부터 각 언어의 강의계획서를 점검하고, 수업을 참관하여 수업에 대한 피드백도 주며 학습평가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 주기도 한다. 총괄 언어 디렉터는 언어교습법을 전공한 교수가 주로 담당하며 학생중심의 효과적인 언어 교육 방법을 연구하면서 씨아시 언어 강좌의 질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씨아시 참가 규모는 매년 다르지만 최소 84명(1984년)에서 최고 206명(1995년)까지 참석한 적이 있다. 2015년에서 2019년까지 학생수가 100명 이내로 약간 줄어드는 경향이 있었지만 2020년에 다시 늘어났다. 특히 2020년과 2021년에는 코로나 여파로 인해 대면수업을 하지 않고 온라인 수업으로만 학생들이 참가했다. 코로나로 직접 현지에 가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씨아시에서 동남아 언어를 배우려는 학생들이 늘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온라인 수업을 매끄럽게 진행하기 위해 개강 전에 강사들과 학생들이 모두 수업에 사용할 Zoom이나 Canvas 관련 교육을 받도록 했다. 2022년에는 처음으로 하이브리드 모델을 사용했는데 대부분의 학생들은 대면 수업을 했고 각 반에 한두 명 정도 실시간 온라인으로 참가하는 학생들이 있었다고 한다. 온라인으로 참가하던 학생들은 수업 강도를 견디지 못하고 중간에 그만두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15) 강사들은 하이브리드 모델을 할 경우 언어교습법에 더 신경을 많이 써야 하고 온라인 학생과 대면 학생 모두 아우르기 힘든 탓에 선호하지는 않지만 하이브리드 모델에 대한 학생들의 수요가 있기 때문에 이 방식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하이브리드 모델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경우 그에 맞는 효율적인 언어 교습법을 찾는 것이 주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16) 참가하는 학생들을 보면 대학컨소시엄에 속해 있는 재학생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씨아시에 참가할 수 있다. 2021년의 예를 들어 보면, 대략 60개 이상의 대학에서 학생들을 보내왔다. 그 중 컨소시엄 대학에 재학 중인 대학원생이 36명이었고 학부생은 18명이며 이중 위스콘신대학교 대학원생은 7명, 학부생은 2명이었다. 컨소시엄에 속해 있지 않은 대학에서 온 대학원생은 50명이고 학부생은 23명이었다. 대부분의 대학교마다 한 명씩 참가하는 경우가 제일 많다. 컨소시엄에 참가하지 않으면서 학생을 보낸 대학들은 시카고, 스탠포드, MIT, 프린스턴, 노쓰웨스턴, 조지타운대학교와 같은 사립명문대들도 있고 조지아, 캔자스, 켄터키, 미네소타, 네바다, 몬타나, 오레곤 그리고 아이오와대학교 같은 우수한 주립대학들도 있다.17) 참가 학생들 중 대학원생이 제일 많으며 대학생이 두 번째이고, 대학원 지원 전에 수업을 듣는 학생들도 있다. 직장인들도 수업에 참가하는 경우가 많은데 군인, 외교관, 외신 기자, 교사 그리고 교수 등 다양한 직업군에서 참가하고 있다. 씨아시 학생들 중 동남아에서 온 이민자나 이민자 후세대들도 씨아시에 관심을 많이 보이고참가하고 있다. 표 4 에서 볼 수 있듯이 지난 10년간 동남아권 이민자나 그 후손의 참가비율이 21%에서 36%로 증가했다. 자신들의 모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거나 자신의 뿌리를 찾아 연구를 해보겠다는 학생들도 있고 다른 동남아 언어를 습득하여 동남아에 대한 비교 지역연구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도 많다. 씨아시는 동남아 언어 강좌 이외에도 여러 학술과 문화 활동 기회를 부여한다. 학술 활동과 문화 활동이 동남아 언어를 더 빨리 배우고 잘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학술 활동의 예로서는 매주 동남아를 연구하는 학자들을 초대해서 특별 강연을 제공하는데 최소 몇명은 씨아시에 참가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 중 학자로 성장한 분들을 초청한다. 또한 씨아시에 참가하는 학생들이 연구논문을 발표하고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씨아시 컨퍼러스도 매년 개최한다. 씨아시 컨퍼런스의 기조발표자도 예전에 씨아시에 참가했던 학생들 중에서 학자로 성장한 분으로 정한다. 문화관련 활동은 아주 다양하다. 첫째, 인도네시아 전통악기 합주곡인 가물란 수업이 오후에 있다. 이 수업은 1학점 수업으로 등록금을 더 내지 않고도 이수할 수 있다. 이 수업에 참석했던 학생들이 씨아시 마지막 주에 가물란 앙상블을 연다. 이 때는 씨아시 학생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참석해서 앙상블을 즐길 수 있다. 둘째는 동남아 언어로 시 창작과 낭독을 할 수 있는 행사를 개최해서 동남아 언어로 창작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도 만들어준다. 셋째, 씨아시에는 각종 파티가 있다. 개강 바로 전에는 환영파티를 하고 학기가 끝나기 전에는 환송회도 한다. 환송회는 씨아시의 밤 이라고도 불린다. 씨아시의 밤 에서는 각 언어 그룹이 장기 자랑도 하게 된다. 씨아시 여름학기 중간에는 동남아 음식을 각자 요리해서 같이 나누어 먹는 포틀럭 파티도 있다. 이 외에도 팀웍을 높이기 위해 필자가 참가했던 씨아시에서는 언어별로 배구팀을 조직해서 연습하고 토너먼트를 통해 가장 우수한 팀을 선발하기도 했다. 팀이 언어별로 조직되기 때문에 각 언어별로 팀웍을 조성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어떤 해에는 인도네시아 당둣(인도네시아 대중음악의 한 장르) 댄스 파티를 열어 씨아시 학생 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 유학생도 초대하여 교류의 자리를 만들기도 했다. 참가하는 학생들의 성향에 따라 문화활동이 달라질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요리에 관심이 있는 학생이 많으면 오후에 요리 교실을 열기도 했다. 이런 모든 행사들은 씨아시에 참석하는 학생들이 동남아 언어문화에 더 익숙해지고 동남아 연구자들이 친분을 쌓고 네트워크와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준다. 이렇게 쌓인 친분과 네트워크는 씨아시가 끝나더라도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대학원생들의 경우 현지조사 전에 씨아시에서 수업을 듣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들이 비슷한 시기에 현지조사를 하고 논문을 끝내면서 학회 발표나 활동을 같이 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이슈페이퍼를 쓰면서 씨아시에 참석했던 학생들에게 씨아시의 장점을 물어보니 동남아에 관심있고 연구하는 사람들이 같이 모여 그 안에서 공동체를 만들고 언어를 배우면서 우정을 쌓을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고 한다. 씨아시에 참가하는 많은 학생들이 속한 대학에서는 동남아연구 프로그램이 없거나 크지 않기 때문에 다른 연구자들을 만날 기회가 거의 없다. 2004년과 2005년에 베트남어를 배운 반리(Van Ly)는 베트남 연구자들과 함께하는 느낌이 들어 아주 좋았다 고 말했다. 현재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페이지 존슨 탄(Paige Johnson Tan)은 1994년과 1997년에 씨아시에서 인도네시아어를 배웠는데 자신이 다니던 대학원에서 혼자 하던 공부를 다른 연구자들과 같이 할 수 있어 좋았고 집중적으로 언어를 배우기 때문에 인도네시아어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 한다. 씨아시의 재정 씨아시의 재정은 그 명성에 비해 넉넉한 편은 아니다. 씨아시 재정의 50%는 학생들이 납부한 수업료로 충당하고 있다. 등록하는 학생수가 줄어들면 그만큼 씨아시 재정이 많이 어려워진다. 씨아시의 공식적인 수업료는 위스콘신대학교의 여름학기에 제공되는 다른 수업과 다르지 않지만 장학금을 통해 학생들의 부담을 줄여준다. 예를 들어, 여름학기 수업료는 여름학기 학점에 따라 등록금이 정해지는데 8학점 기준으로 위스콘신 거주자는 3,616달러이고 다른 주 거주자들은 13,159달러이며 국제학생들은 13,493달러를 내야한다. 그러나 씨아시는 위스콘신대학과의 협상을 통해 개인 수업료 비용이 8학점 기준으로 일인당 4,300달러 이상 넘어가지 않도록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정부의 등록금 보조금이 여름에는 5,000달러 이상을 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5,000달러 이상으로 책정할 경우 학생들의 개인 부담이 늘어날 수 있기 때문에 등록금액을 제한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씨아시에 참가하는 학생들은 8학점 기준 보통 2,000달러에서 4,300달러 사이의 수업료를 내게 된다. 또한, 씨아시에 참가하는 학생들은 기숙사를 사용할 수 있지만 기숙사 비용은 따로 내야한다. 기숙사 비용은 한 달 기준 650달러에서 750달러다. 기숙사에서 지내기 싫은 학생들은 여름에는 캠퍼스 근처의 아파트들이 많이 비게 되므로 학교 근처 아파트를 렌트해서 사용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수업료 이외에 씨아시 재정에 중요한 기여를 하는 부분은 미국교육부에서 운영하는 외국어및지역연구장학금이다. 이 장학금이 씨아시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대략 25%가 된다. 미국 교육부는 대학교나 대학 컨소시엄 중 우수한 대학 또는 대학 컨소시엄을 4년 주기로 한 번씩 선발한다. 지원을 받은 대학교들은 학내 경쟁을 통해서 매년 학생들을 선발하고 이 학생들이 씨아시에서 수강하면 외국어및지역연구장학금으로 씨아시 등록금을 충당한다. 학생들이 씨아시를 선택하는 이유는 중급이나 고급 레벨의 동남아 언어를 가르치는 대학교가 많이 없고 특히 여름에 이러한 수업을 개설하는 대학은 거의 없으므로 씨아시가 유일한 선택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장학금은 미국 시민권자이거나 영주권을 소지하고 있는 학부생이나 대학원생은 누구나 지원할 수 있다. 일년 장학금을 받을 경우 대학원생은 등록금 면제와 생활비 18,000달러를 받고 학부생은 등록금 면제와 함께 생활비 10,000달러를 받는다. 여름 언어 장학금의 경우 학부생과 대학원생은 등록금 5,000달러를 보조받고 2,500달러의 생활비를 보조받게 된다. 그 외에 나머지 25%의 비용은 위스콘신대학교 동남아연구소(Center for Southeast Asian Studies) 일반 예산에서 충당하고 있다. 위스콘신대학의 동남아연구소는 국립자원센터(National Resource Center)의 지원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 씨아시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유지하는 것이 연구소가 지원을 계속 수주하는데 도움이 되므로 일반 예산을 사용한다.씨아시의 성과와 한계 씨아시의 성과는 여러 분야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현지에 가지 않고도 동남아 언어를 익힐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이다. 커리큘럼이 잘 구성되어 수업을 듣는 것만으로 동남아 언어를 체계적으로 익히고 구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또한 씨아시는 언어교육장이라는 의미를 넘어 강연이나 학회를 통해 동남아 지역연구에 대해 지식을 쌓고 동남아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제공해준다. 예를 들어, 동조자(The Sympathizer)라는 소설로 2016년에 퓰리처상을 받은 베트남계 미국인 비엣 타인 응우엔(Viet Thanh Ngyen)은 남가주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재직 중인데 이분도 씨아시에서 수업을 들었었다. 둘째, 씨아시의 시작과 성공의 비결은 대학 간의 경쟁보다는 대화와 협력을 통해 각 대학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극복했다는 데에 있다. 이러한 협력은 더 많은 학생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제공했고 전문가를 키우는 데에 큰 기여를 해왔다. 또한 씨아시는 대학 간의 새로운 협력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씨아시는 연방정부와 대학 간의 협력이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미친 사례이다. 대학은 연방정부 장학금으로 동남아 연구분야의 인재를 양성할 수 있었고 정부는 국익에 전략적으로 필요한 언어나 지역연구 전문가를 고용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씨아시의 성과가 뛰어나기는 하지만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대학에서는 예산 부족을 이유로 등록인원이 낮은 언어 수업을 폐강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이런 이유로 동남아 언어를 비롯한 다른 희귀언어들의 강습이 많이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동남아 언어를 가르치던 교수들이 은퇴하면서 동남아 언어교육은 주로 계약직 강사가 맡는 경우가 많아 대학 내에서 그들의 파워가 그리 크지 않은 편이다. 예전에는 주요 대학에 동남아 언어를 가르치는 교수들이 정년트랙으로 재직했기 때문에 서로 교류하며 외부재단이나 연방정부에서 재정을 마련하였으나 계약직 강사신분으로서는 강의 이외에 다른 부분에 신경 쓰기가 힘들어진다. 동남아 언어교육이 전반적으로 약해지고 있다고 하겠다. 이 뿐만 아니라 연방정부에서 지원하는 외국어및지역연구장학금 예산도 매 주기마다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다. 언어를 잘하는 지역연구인력을 키우기보다 테크놀로지를 바탕으로 한 안보 관련 투자가 늘어나고 있다. 미국의 대학정책이 인문사회과학교육을 등한시하며 주로 과학, 테크놀로지, 엔지니어링과 수학(STEM: 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and Math) 교육에 투자하는 경향이 뚜렷해지면서 언어 및 지역연구 교육이 설 곳이 점점 좁아지고 있는 상황이다.18)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대학은 연방정부와 소통하여 외국어및지역연구장학금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한 대학은 수요와 공급을 계산하는 시장논리보다 동남아 언어 같은 희귀언어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희귀언어 교육이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대학은 학문의 다양성을 추구할 수 있고 서구언어 위주의 교육을 벗어나 진정한 국제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각주1) George Kahin, The Making of Southeast Asian Studies: Cornell s Experience, Bulletin of Concerned Asian Scholars 29(1), 1997, pp. 38-42.2) https://history.house.gov/HouseRecord/Detail/150324361953) https://cseas.yale.edu/history-southeast-asia-studies-yale4) https://einaudi.cornell.edu/programs/southeast-asia-program/about-us5) Russell Fifield, Southeast Asian Studies: Origins, Development, Future, Journal of Southeast Asian Studies 7(2), 1976, p. 154.6) 앞의 글, p. 154. 7) 엘렌 라퍼티(Ellen Rafferty) 교수와의 인터뷰, 2022년 10월 18일.8) 엘렌 라퍼티 교수와의 인터뷰, 2022년 10월 18일.9) 윌리엄 프레드릭(William Frederick) 교수 인터뷰, 2022년 11월 11일.10) https://seassi.wisc.edu/history/11) 위스콘신대학교 동남아연구소 부소장인 마이클 컬리네인(Michael Cullinane) 인터뷰, 2022년 7월 15일.12) 오하이오대학교 윌리엄 프레드릭 역사학과 교수 인터뷰, 2022년 11월 11일.13) 오하이오대학교 윌리엄 프레드릭 역사학과 교수 인터뷰, 2022년 11월 11일.14) 위스콘신 대학교 마이클 컬리네인(Michael Cullinane) 부소장 인터뷰, 2022년 7월 15일.15) 씨아시 언어디렉터인 에를린 바나드(Erlin Barnard) 교수 인터뷰, 2022년 11월 23일. 에를린 바나드 교수는 지난 3년 동안 씨아시 총괄 언어디렉터 역할을 해왔다.16) 인도네시아어 강사이며 인도네시아어 코디네이터였던 삭티 수르야니(Sakti Suryani) 인터뷰. 2022년 11월 1일. 17) 삭티 수르야니 인터뷰. 2022년 11월 1일. 18) Thonchai Winichakul, Southeast Asian Studies in Asia in the Age of Disruption, 『東南アジア -歴史と文化』 49, 2020, pp. 11-25. [23] 한-베 수교 30주년 회고와 전망: 베트남 전문가 인터뷰-사제동행 ㅣ 배양수·백용훈·김주영 작성자 동남아연구소 조회수 1435 첨부파일 1 등록일 2022.12.21 초록이번 이슈페이퍼는 한국과 베트남의 수교 30주년을 기념하여 베트남 유학 1세대이자 양국의 민간교류와 후속세대 양성을 위해 노력해온 부산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 배양수 교수를 인터뷰한 내용을 담았다. 공산권으로의 유학이 쉽지 않았던 1990년대 초반 베트남에서 공부를 시작하여 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에서 베트남 전문가로서 입지를 다져온 배양수 교수의 이야기는 그 자체만으로 양국 관계의 변화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창구이다. 배양수 교수와 사제지간인 단국대 백용훈 교수를 특별히 인터뷰어로 초대하여 배양수 교수의 유학 시절, 부산외국어대학교에 재직하면서 참여한 민간교류 활동, 교육을 통한 후속세대의 양성, 한국과 베트남 관계의 향후 전망 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이슈페이퍼 23호 원문 내려받기인터뷰의 구상 배경김주영(이하 김): 2022년은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한지 30주년에 접어드는 해이다. 1992년에 이루어진 수교는 양국 관계의 변곡점이 되면서 공식적으로 상호 연결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1964년 베트남 전쟁 파병, 1975년 북베트남의 베트남 통일에 따른 관계 단절 등 냉전체제 하의 진영논리는 양국이 멀어질 수밖에 없는 정치적 조건을 구성하였다. 이후 1980년대에 접어들어 펼쳐진 우호적인 국면은 긴장관계를 전환시키며 수교의 주춧돌을 놓았다. 북베트남의 사이공 함락 후 탈출하지 못한 한국 대사들의 무사 귀환, 직접무역의 개시, 베트남올림픽선수단의 서울올림픽대회 참가 등 양국은 이전과 다른 신호를 주고받았고, 정치적‧경제적 이해관계의 신중한 계산에 따라 1992년 12월 22일 공식적인 수교를 맺었다.1)이번 이슈페이퍼에서는 한-베 수교 30주년을 맞이하여 오랜 시간 베트남을 애정하며 공부하고 일해 온 베트남 전문가인 부산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 배양수 교수를 인터뷰한 내용을 담았 다. 배양수 교수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를 졸업하고, 하노이사범대학교 어문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베트남 문학작품인 『끼에우전』과 한국의 『춘향전』을 비교한 석사학위논문은 베트남 현지에서 많은 주목을 받기도 했다. 배양수 교수는 하노이사범대학교 어문 학과에서 100번째로 박사학위를 받은 자본주의권 출신의 외국인이라는 이례적인 기록도 가지고 있다. 졸업 직후 부산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 교수로 임용되어 베트남어와 문학에 관한 다수의 책을 집필하고 번역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공식적인 수교가 이루어지기 전인 1988년 처음 베트남을 방문한 배양수 교수는 양국 관계의 거시적인 변화를 체감하고, 이에 조응하며 민간 차원에서 양국 교류를 확대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공산권으로의 유학이 쉽지 않았던 1990년대 초반 베트남 유학을 결정한 배양수 교수의 고된 여정은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여전히 경직되어 있던 양국 관계의 일면을 보여준다. 배양 수 교수는 호찌민시종합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기 위해 교육부로부터 허가까지 받았지만, 자본주의권 학생을 부담스러워 하는 대학 측의 입장으로 인해 하노이사범대학교로 갑작스럽게 진학하게 되었다. 베트남에서 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에서 베트남 전문가로서 입지를 다져온 배양수 교수의 이야기는 그 자체만으로 양국 관계의 변화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창구이다. 이슈페이퍼에서는 배양수 교수의 유학 시절, 부산외국어대학교에서 재직하면서 참여한 민간교류 활동, 교육을 통한 후속세대의 양성, 한국과 베트남 관계에 관한 향후 전망 등을 두루 보여줄 것이다. 배양수 교수의 이야기를 보다 풍부하게 전달하고자 특별한 인터뷰어를 한 분 더 초대하였다. 전북대 동남아연구소의 공동연구원인 단국대 백용훈 교수는 부산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 졸업 생으로 배양수 교수와 사제지간이다. 백용훈 교수는 연세대학교 대학원 지역학협동과정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동 대학원 사회학과에서 베트남 공동체 복지와 보건의료에 관한 지역 간 비교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어문학에서 시작해 베트남의 사회문화, 경제사회학, 비교사회학, 사회자본, 복지, 의료서비스 등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는 백용훈 교수는 베트남 지역연구 후속세대로서 인터뷰에 함께 참여하였다. 인터뷰의 주요 내용백용훈(이하 백): 베트남과 한국의 수교가 벌써 30년에 접어들었습니다. 유학 1세대로서 지난 30년에 대한 소회를 먼저 들어볼까 합니다. 배양수(이하 배): 참 세월이 빠르게 지나갔다는 생각이 들어요. 1988년 베트남을 처음 방문하고 지금까지 왔는데, 베트남 도이머이(Đổi mới: 1980년대 개혁개방 정책) 직후에 어려웠던 그 때의 경제 상황과 지금의 베트남을 비교해보면 큰 발전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당시 베트남국제 공항의 모습은 한국 시골의 역사(驛舍)와 같았어요. 지금은 현대화된 국제공항을 보면서 지난 30 년간 이루어진 베트남의 발전을 느껴요. 많은 한국인들이 베트남을 찾고, 또 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을 방문하고 있어요. 두 국가 사이의 관계가 지속적으로 발전되어왔고, 특히 심화된 경제관계의 측면을 보면서 베트남 연구자로서 기쁩니다. 백: 선생님께서 회사를 그만두고 공부를 하신건데, 혹시 문학 연구에 입문한 직접적인 계기가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덧붙여, 현지에서 경험한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으실까요? 처음 공부를 하기 시작했을 때의 경험이요.배: 베트남 기자들로부터 받았던 많은 질문 중 하나도 왜 베트남어를 공부했습니까? 였어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처음 베트남어과에 진학할 때는 특별한 목표가 있지 않았어요. 실제 시작은 시험 점수에 맞춰서 베트남어과를 갔던 거죠. 그래도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도이머이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마음속으로는 무조건 베트남에 간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죠. 베트남과 관련된 일을 하는 회사에 취직하는 것을 목표로 했고, 실제로 1988년 6월에 미원통상에 취직을 했어요. 나중에 회사를 그만두고 베트남 유학준비를 했어요. 호찌민시종합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려고 했는데, 자본주의권에서 온 유학생을 받아본 경험이 없어서 자신이 없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어요. 그때 알고 지내던 베트남 현지인이 하노이 출장을 가면서 그곳에 있는 대학을 소개해줬는데, 그게 하노이사범대학교 국문과였어요. 선택의 여지없이 나를 석사과정에 받아주는 대학이나 학과면 진학하겠다는 생각이 컸어요. 그래서 경제학에서 문학으로 전환하게 됐어요. 사실 문학을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책을 많이 읽어야 하는데, 당시에는 힘들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방법이 없으니까 우연히 하게 되었고,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갑자기 문학을 공부하게 돼서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는 거예요. 입학 전에 하노이사범대학교에서 책을 6권 보내주면서 읽어오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때는 짧은 시간에 그런 책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이 없었어요. 15~20장 정도를 읽고 학교에 갔는데, 지도교수가 책을 읽으면서 어떤 의문이 들었는지 질문을 했어요. 그게 거의 입학시험이나 마찬가지여서 순간적으로 등에서 식은땀이 났는데, 가까스로 대답을 하나 했죠. 그랬더니 지도교수가 책상을 딱 치면서 바로 봤다 그래서 입학 원서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수업을 받고 가라고 해서 처음 대면하는 날 수업을 3시간 했어요. 식은땀을 잔뜩 흘린 그 날을 잊지 못해요.김: 선생님께서는 1991년 처음 유학을 준비하시고, 1992년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셨습니다. 선생님의 유학기간이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를 준비하고 있던 시기와 수교를 시작한 시점을 가로지르고 있는데요. 베트남 현지에 체류하시면서 수교 전후로 한국에 대한 현지의 인식 차이를 체감한 개인적인 경험이 있으신지요.배: 수교 전에도 1987년부터 한국 기업들이 조금씩 베트남에 들어가기 시작했어요. 점점 늘어나고 있기도 했었죠. 그래도 수교 이후에 베트남에서도 한국을 방문하고 김영삼 대통령도 베트남을 방문하면서 서로 소식도 알려지고 인적 교류도 많아졌습니다. 특히 베트남에 처음 갔던 1988년 10월 19일은 88올림픽 폐막식 날이었어요. 그때 베트남 사람들은 외국인인 절 보면서 일본인으로 착각해서 아리가또, 아리가또 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우리가 노, 코리안 이라고 일부러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올림픽에서 깜짝 놀랐다고 하더라구요. 베트남이 올림픽을 중계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는데, 러시아 방송이 베트남에 방영이 돼서 그 방송을 통해서 올림픽을 봤다고 해요. 그래서 관료들이나 연배가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 이야기를 그렇게 했어요. 어떤 사람들은 남베트남 시절 1960년대 서울과 사이공을 비교하기도 하고요. 88올림픽 중계를 보면서 베트남 사람들이 우리보다 못했던 한국의 발전상에 많이 놀랐다고 서슴없이 이야기를 했어요. 그때 사람들이 우리를 한국보다는 조선공화국으로 알고 있었어요. 한국정부가 요청해서 수교 1년 후쯤에 한국이라고 명칭을 바꿉니다. 베트남 사람들도 잘 모르고 있었던 거죠. 우리를 '한꾸옥(한국)'으로 불러달라고 베트남 정부에 건의했고, 당시 보반끼엣 수상이 제안을 수용해서 변경을 했다고 합니다. 이런 일화도 있어요. 수상 보좌관이 한국 대사관의 공문을 받고 수상한테 수상님, 한국 정부에서 한국으로 불러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물어요. 수상이 보좌관의 생각을 되물으니까 보좌관이 제 이름이 도안 마잉 자오여서 제가 도안 마잉 자오라고 사람들한테 불러달라고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다르게 부를 권리가 있습니까? 라고 해서 수상이 맞는 말이다. 한국이 스스로 를 한국으로 불러달라면 그렇게 해줘야지 라고 했다는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베트남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대한민국으로 명명하자고 결정을 한 것이죠. 그렇게 공식적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베트남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지는 않았어요. 베트남 사람들을 만나면 한국을 여전히 잘 모르기도 했습니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때 한국 경기를 중계 하면서 베트남 국영방송국에서 대한민국으로 공식적으로 쓰면서 널리 퍼지게 됐습니다.백: 수교 이후에는 1세대 유학생으로서 책임감도 많이 느끼셨을 것 같습니다. 제가 부산외대를 다녔을 때 기억하기로는 베트남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베사모에도 열심히 참여를 하셨던 것 같습니다. 주로 어떤 민간 활동에 참여하시면서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 강화에 힘쓰셨는지 짚어주세요. 배: 부산대 교수 네 명과 저까지 총 다섯 명이 2001년에 베사모를 만들었어요. 부산대 교수들이 1999년~2000년에 프로젝트 때문에 중국과 베트남을 다녀왔는데, 하노이에서 저의 지도교수를 만났어요. 지도교수가 정성들여 환영을 해주었고, 그게 고마워서 부산대 교수들이 베사모를 만들자고 저한테 제안을 했어요. 처음에는 40만원씩 내서 기금을 만들고, 2002년부터는 회원 확보에 주력했어요. 부산을 방문하는 베트남 학자, 고위 공무원들과 밥을 먹고 선물을 나누면서 교류활동을 시작했죠. 2003년부터 베트남에 머물고 있는 부산출신 유학생의 모임을 만들어서 서로 격려하는 활동도 했어요. 매년 통일기념일에 베트남을 방문해서 베트남 인사들과 교류하는 행사를 개최하고, 가을에는 베트남 분들을 초청해서 세미나도 정기적으로 열었어요. 그때는 사람과 예산이 모두 별로 없어서 최대한 예산을 아껴서 그런 행사를 진행했어요. 제가 2010년까지 총무이사를 했어요. 10년 정도 활동을 하고 그만두었는데, 여기에 엄청난 시간을 투자했었어요. 논문을 제대로 쓰지 못할 정도로 시간을 많이 빼앗겼어요. 정말 열과 성을 다해서 했죠.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이 하나 있어요. 베트남 유학생이 경성대 못골역 계단에서 밤늦게 넘어져서 허리가 부러진 일이 있었어요. 이 유학생이 보험이 없어서 베사모에서 나서서 해결했었죠. 건강보험공단에 가서 6개월치 보험료를 한 번에 지불하면 보험을 살려줘요. 그런 일을 베사모에서 처리해서 학생이 무료로 치료를 받았어요. 그 학생이 졸업하고 호찌민시에서 근무하는데, 그 후에도 만난 적이 있어요. 또 다른 일은, 2009년 즈음 베트남 여성이 부산으로 시집을 왔는데 한 달 만에 남편의 폭행으로 사망한 사건이 있었어요. 베트남 내부에서 한국에 대한 여론이 나빠졌어요. 베사모가 장례식에서 상주 역할을 다 했어요. 나중에 그 여성의 부모가 와서 베사모가 장례식에 필요한 지원도 해줬어요. 그때는 모금도 많이 받았어요. 당시에는 힘들었지만 국가 간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 일정 부분 역할을 했어요. 베트남에서 기자도 왔어요. 베트남 내에서 악화된 한국에 관한 여론을 완화하고, 베사모에서 모금한 3천만원 정도를 전달하기도 했어요. 베트남 산악지역의 소수민족 학교에 통나무집으로 기숙사를 지어주기도 했어요. 백: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에서 경제적인 측면도 중요하지만 선생님께서 주로 연구하시는 문학을 포함한 문화 분야의 협력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수교 이후에 베트남의 문화교류에 대한 선생님의 견해를 듣고 싶고, 보다 포괄적인 문화교류를 위해서 어떠한 접근이 필요할지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세요. 배: 문화 이야기가 나오면 한류는 베트남에서 유행하는데, 왜 베트남 문화는 한국에서 유행하지 않는가에 대해 많이 논의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문화는 억지로 균형을 맞출 수 없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영화, 드라마, 노래가 한국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리면 당연히 좋아하겠죠. 억지로 들으라고 한다고 해서 절대 되지 않아요. 그런 기계적인 균형은 의미가 없다고 확실하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다만, 어떤 기획 부분에서는 양국이 함께 협력하고 공부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문화콘텐츠를 기획하거나 시나리오를 쓰는 일 등과 같은 일은 함께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많이 배워서 세계적으로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사례를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공연 부문에서도 한국이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문학 분야에서는 한국문학번역원을 통해서 한국작품을 베트남어로 번역하고 출판하는 일이 이루어지고 있어요. 그런데 베트남은 이러한 일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베트남 정부에 권유하고 싶은 것은 베트남 문학 번역가들에게 일정 부분의 지원을 제공하고 관련 분야의 정부 간 교류를 촉진하는 일입니다. 한국 정부가 일방적으로 도와주는 방식이 아니라, 베트남이 우선 그러한 방향을 설정하고 함께 할 수 있는 안을 제시하는 것이죠. 한국 정부도 여기에 호응해서 베트남을 더 깊이 알 수 있는 자료들을 많이 확보하면 좋겠습니다. 백: 신남방정책을 논의할 때 쌍방향 문화교류와 함께 아세안 10개국에 대한 형평성이 강조된 바 있습니다. 베트남은 의도적으로 교류를 추진하지 않더라도 민간 수준에서 경제, 문화 교류가 지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균형과 형평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과하다고 여겨질 때가 있었습니다. 배: 문화교류는 향유하는 사람들의 욕구에 맡겨야 합니다.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베트남 전통예술을 한국인에게 소개하는 일은 가능하지만, 대중문화는 철저하게 선호도에 따라 이루어 질 수밖에 없습니다. 베트남 노래가 정말 좋다면 우리 국민들도 좋아하겠죠. 결과적으로 문화도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는 겁니다.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 정부에서 지나치게 개입하면 안돼요. 베트남에서 제안해서 만든 합작영화가 있었는데 흥행하지 못했어요. 예전에는 베트남 드라마나 영화 모두 정부가 채택한 시나리오에 따라서 만들어졌어요. 제작자들은 영화나 드라마를 만들기만 하면 될뿐, 상영 여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죠. 그러니까 경쟁력이 있을 수가 없어요. 요즘에는 베트남 상업영화들 중에서 나름 흥행하는 경우가 있어요. 베트남에서 흥행하는 작품들을 많이 만들고, 노하우도 쌓이면서 세계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콘텐츠가 나오길 기다려야 해요. 정부가 돈을 준다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베트남의 어떤 문화적 요소들을 한국에서 알릴 수 있는지 상상해보는 것도 꽤 어려운 일이에요. 문학 분야도 쉽지 않아요. 한국에서 베트남 문학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매우 제한적입니다. 그렇지만 한국 사람들이 관심이 많이 없다고 해도 꼭 해야 할 일이 있어요. 기록문학이라고 해야 할까요. 연구자들에게 필요한 연구자료 말입니다. 한국의 독자들에게 인기를 많이 얻지 못한다고 해도 연구자들에게 필요한 자료들은 발굴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번역한 『시인 강을 건너다』 같은 책은 분량이 650쪽 정도여서 읽기 참 힘들어요. 그렇지만 관심을 가지고 읽어보면 베트남 현대사를 한국과 비교하면서 꿰뚫어보는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있어요. 이런 느낌이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전달되면 좋을텐데, 직접적으로 느끼기 어렵다면 그런 자료를 읽은 연구자들을 통해서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연구자들에게 자료를 충분히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백: 한국에 머물고 있는 결혼이주여성이나 이주노동자에 관한 편견이 여전한 듯합니다. 앞으로 상호 인식의 전환, 무엇보다 한국의 베트남에 관한 인식 전환을 위해서 노력해야할 것 같습니다. 어떠한 노력이 필요할까요? 배: 학생들에게도 늘 이야기하는 게 있어요. 베트남에서 발생한 좋지 않은 사건이 보도되면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잖아요. 나는 그럴 때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인터넷 검색해보면 한국에서 더 심한 사건도 많이 일어났다고요. 기본적으로 한국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국가 사람들에 대한 편견 자체가 문제가 된다고 생각해요. 교육을 통해서 그런 생각이 잘못됐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가르치는 수밖에 없어요. 요즘엔 유튜버들이 조회수 올리려고 자극적인 내용들을 올리잖아요. 수업시간에 학생들하고 베트남을 비방하는 유튜브 영상들을 하나씩 찾아보면서 잘못된 부분을 이야기해본 적이 있어요. 보니까 반 정도는 모두 사실이에요. 그런데 그 사실을 교묘하게 비틀어서 거짓을 만드는 거예요. 일반인들이 보면 사실로 믿을 수밖에 없는 내용들이죠. 100% 거짓말이 아닌 것들이 대부분이에요. 제가 참여하고 있는 한-베 현인그룹에서도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2) 건전한 양국 관계에 기여할 수 있는 유튜버가 많이 활동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 백: 저도 학생들한테 전공생들이 이런 일을 해야 한다고 계속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유튜브의 잘못된 영상들의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일은 정말 필요합니다. 배: 베트남에 살고 있는 한국인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많은데, 이런 일이 있어요. 초기에 한국에 온 결혼이주여성의 아이들이 벌써 많이 성장했어요. 아이들 아버지는 나이가 많으니까 아이가 성장하면 할아버지가 돼서 한국에서 살기가 힘들어요. 아내가 차라리 베트남을 가지고 해서 가도 육체노동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요. 작은 규모로 장사하거나 식당을 운영하면서 사는 거죠. 그런데 코로나19 팬데믹 때 이런 자영업자들이 모두 어려워져서 아이들 학비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 되기도 했어요. 자녀들이 한국에 살았으면 고등학교까지 무료로 다닐 수도 있는데, 베트남에 있는 한국학교는 사립 국제학교 형식이어서 학비를 꽤 지불해야 합니다. 또,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을 내지 못하면 졸업장을 받을 수 없어요. 이런 이야기를 듣고 한국 정부에서 그런 부분은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한-베 현인그룹에서 제안을 했어요. 고등교육 분야의 교류 활성화를 위해서 베트남 대학이 한국 대학과의 교류를 원활하게 하는 준비를 했으면 좋겠다는 제안도 했고요. 백: 현재 베트남 대학에 한국학 전공이 워낙 많이 생기고, 한 학년의 학생이 200명 가까이 되는 대학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소수의 대학에서 소수의 정원으로만 학과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양국의 관계 발전을 위해서 양성해야할 분야가 있을지요? 한국에서의 교육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할지 고민입니다. 배: 한국과 베트남 대학간 교류를 활성화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뒷받침 즉, 규정 같은 것을 만들어 달라고 베트남측에 제안하고 싶어요. 우리는 지금 이 방법을 활용할 수 있어요. 제가 베트남의 한 대학과 협의를 해서 한국어과를 현지에서 개설하고 우리가 만든 커리큘럼으로 가르쳐서 부산외대의 졸업장을 줄 수 있어요. 반대로 생각해보면 베트남에서도 할 수 있는 거죠. 베트남에서 다른 나라 대학과 비교했을 때 경쟁력 있는 분야가 어문학과 역사학이에요. 부산외대는 베트남어과가 개설된지 30년 정도 됐어요. 지금 약 250명의 부산외대 베트남어과 졸업생들이 베트남 각지에서 살고 있어요. 대부분 한국 투자기업에 근무하고 있고, 개인 사업을 하는 경우도 있어요. 대기업부터 중소기업까지 다양해요. 부산외대 베트남어과를 입학하는 학생 들은 처음부터 베트남 현지 취업을 염두에 두고 들어와요. 우리도 현지 취업을 목표로 가르치고, 이 방법이 가장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산외대에서는 베트남 대학과 상호학점 인정제도를 하고 있어요. 2년을 부산외대에서 공부하고, 나머지 2년을 호찌민시인문사회과학대학교와 하노이사범대학교에서 공부하면 양쪽으로부터 졸업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2002년 3월에 시작해서 벌써 20년에 접어들었습니다. 2001년 겨울에 학교에서 학생 유치를 위한 새로운 방법을 찾을 때 베트남에서 이런 방법이 있다고 제가 제안을 했어요. 호찌민시인문사회과학대학교 국제교류처장한테 제안을 하고 시범적으로 빨리 시작해보자고 해서 베트남에 협정서 서명을 하러 갔는데 못했어요. 호찌민시 국가대학이라는 조직이 호찌민시인문사회과학대학교 위에 있어서 국가대학교에서 승인을 하지 않은 거예요. 제가 직접 호찌민시국가대학 부총장을 찾아가서 서명을 받아서 호찌민시인문사회과학대학교에 전달했습니다. 베트남에서 일을 해본 경험이 있어서 그 체계를 이해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어요. 이 프로그램으로 하노이사범대학교에서 270명 호찌민시인문사회과학대학교에서 248명, 총 518명의 부산외대 학생들이 베트남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베트남에서 오는 학생들은 대부분 한국어를 전공했습니다. 초기에 졸업한 학생들 중에 한국어과 교수가 된 경우도 있어요. 부산외대 베트남어과 입학생은 대부분 이 제도를 염두에 두고 입학합니다. 그런데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도 많아요. 내년부터는 보내는 인원을 15명으로 제한하려고 하고 있어요. 작년에는 30명을 지원해서 보냈는데 부산외대 수업 개설에 어려움이 있었어요. 백: 그동안 많은 문학작품을 번역하셨습니다.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다면 하나만 꼽아주시면 좋겠습니다. 20-30년 전과 비교해서 달라진 현재의 베트남을 표현할 수 있는 키워드도 몇 가지 말씀해주세요. 배: 소설 『시인 강을 건너다』는 베트남어 제목으로 『신의 시대』인데, 제가 베트남에 대해서 궁금했던 부분들, 특히 북베트남의 현대사를 이 책을 통해서 공부하게 되어서 가장 기억에 남아요. 분량이 많았지만 재미있게 번역했어요. 1년 정도 학교에서 보직도 맡지 않고 수업만 하면서 번역에 매진했어요. 2014년 3월에 시작해서 10월에 번역을 마무리했는데, 출판사를 찾고 기다리면서 그 다음해로 넘어가서 2015년 10월에 나왔습니다. 최근의 베트남을 표현할 수 있는 키워드라고 하면, 젊은 사람들은 확실히 다른 것 같아요. 도이머이 이후에 베트남에서 배고픔을 잊은 세대들과 그 전의 세대는 많이 달라요. 옛날에는 가난하지만 사람들이 더 순박했다고 할까요. 그런 느낌이 있었다면 지금은 경제적으로 풍족해졌지만 그런 순박함보다는 국제무대에 잘 적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지 않았나 싶어요. 학습의 측면에서도 우리와 비슷해요. 요즘 베트남 젊은 사람들도 베트남 문학을 잘 몰라요. 제가 베트남 문학을 이야기하면 거의 모르고 있어요. 학교에 오는 베트남 유학생들도 교과서에 나오는 것도 잘 몰라요. 처음에는 당황했는데 요즘은 그렇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 예전에는 베트남 사람들이 시간을 잘 지키지 않았는데, 지금은 대부분 시간을 지켜요. 개혁개방 하면서 외국인들도 많이 유입되고 약속도 중요해지면서 시간을 지키기 시작한 거죠. 백: 마지막으로 선생님께 베트남은 어떤 의미인지 말씀해주세요. 배: 쉽게 생각나는 단어는 베트남은 제게 고향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만큼 포근합니다. 예전에 베트남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나는 하노이의 먼지까지 사랑한다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어요. 하노이에 먼지가 많잖아요. 공항에 내려서 시내로 들어갈 때 먼지가 바로 보여요. 그런데 그걸 보면서도 베트남에 왔다는 느낌이 들면서 참 좋아요. 특별한 설명도 필요 없고요. 이런 것이 바로 고향의 느낌이 아닐까 그런 정도에요. 초창기에 베트남으로 유학을 떠나서 항상 좋은 일만 있지는 않았어요. 그런 어려움까지도 모두 괜찮아질 정도의 관계가 된 것 같습니다. 인터뷰를 마치며김: 배양수 교수가 1991년 1월 15일 교육부에서 베트남 유학허가 통보 공문을 받고도 1년 8개월 후인 1992년 9월에서야 하노이사범대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입학 후 2~3개월이 지나도 등록금이 얼마인지도 알지 못하던 그런 때였다. 하노이사범대학교에서 먼저 1,200달러로 등록금을 제안했을 때, 배양수 교수는 석사학위 취득까지 모든 기간을 포괄하는 등록금으로 2,000달러를 제시하고 500달러씩 네 차례에 거쳐서 지불했다고 한다. 체계가 없던 그 당시 여전히 서로가 낯설었던 베트남과 한국은 미시적 차원에서 관계를 만들어가려 는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점차 연결되었다. 수교 30주년을 맞이한 2022년, 배양수 교수가 재직 중인 부산외대와 베트남의 두 대학교에서 함께 교육을 받고 졸업장을 취득한 양국의 학생 수가 500명을 넘었다. 2022년 교육부에서 발표한 교육기본통계 조사 결과에 따르면 다문화 학생 비율은 베트남이 32.4%로 중국(24.3%)을 앞섰고, 학위‧비학위 과정을 포함하는 전체 유학생 중 베트남이 22.7%로 중국(40.4%) 다음으로 많은 학생들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3) 배양수 교수가 교육부에 유학허가 공문을 받으러 갔던 그 시절, 교육부 직원들은 미국이나 일본으로 가라면서 베트남 유학을 만류했다. 지금은 한국과 베트남 대학에서 양국 학생들이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다. 수교라는 공식적인 국가 관계가 활발한 교류를 촉진하였지만, 배양수 교수를 포함한 앞선 이들이 추진한 민간 교류와 후속세대 양성을 위한 노력이 이러한 기회를 만드는 데 미친 영향도 크다. 2022년 12월 5일에 이루어진 한국과 베트남의 정상회담에서 두 나라 관계를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기로 합의하면서 무역과 투자 활성화, 첨단산업 분야와 안보 협력 확대, 인적 교류 강화 등을 약속했다.4) 2022년 출범한 한-베 현인그룹에서는 지난 12월 1일 정치‧외교, 경제‧통상, 사회‧문화 분야의 향후 협력 방안을 제안한 바 있다. 배양수 교수는 사회‧문화 협력을 위해 온‧오프라인 문화교류 플랫폼 구축, 주한국 베트남문화원 신설, 한-베 문화협력기금 조성, 한-베 소사이어티 창립, 연구기관 간 장기 인력 교류, 양국의 상대국민을 위한 지원 강화 등을 제안하였다.5)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는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993년 수교 1년이 지난 시점, 배양수 교수는 당시 공산당 자문역(사회과학원 부위원장)으로 있던 쩐 박 당씨와의 인터뷰를 통해 수교의 의의를 물은 적이 있다. 쩐 박 당씨는 한국과 베트남의 경제관계는 이미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그 관계는 나날이 깊어졌고, 발전돼 왔다. 양국의 외교관계 수립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라고 대답했다.6) 이 대답은 오늘날에도 유효하지만 인적교류가 심화된 현재 경제와 안보 협력 뿐만 아니라, 새로운 꿈과 비전을 가지고 두 지역을 오가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양국의 협력 강화가 미치는 영향도 면밀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수교 30주년 이후의 비전이 경제보다는 사람에 초점이 맞춰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인터뷰를 마친다.* 각주1) 최은봉‧권예진. 2021. 한국은 적대국인 베트남을 어떻게 포용하게 되었는가?: 1992년 한국-베트남 수교와 인정의 삼중구조. 『담론201』 24(3): 83-121.2) 2022년 수교 30주년을 맞아 한국과 베트남 양국 외교부에서 구성한 한-베트남 현인그룹(Eminent Persons Group: EPG)은 양국 관계의 발전 방향을 제언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한국측 현인 5명(정치‧외교 2명, 경 제‧통상 2명, 사회‧문화 1명)과 베트남측 현인 6명(정치‧외교 2명, 경제‧통상 3명, 사회‧문화 1명) 총 11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배양수 교수는 사회‧문화 분야의 전문가로 참여했다.3) "교육부 08-31(수) 조간보도자료" 2022년 교육기본통계 조사 결과 발표.4) 박명기. 2022. 한-베트남 정상회담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 격상 . 아세안익스프레스. 12월 6일. 5) 박명기. 2022. 한-베트남 현인그룹 큰일 해냈다...수교 30주년 비전 보고서 나왔다. 아세안익스프레스. 12월 2일. 6) 배양수. 1993. 제2의 베트남 特需 길 튼다. 『시사저널』. 1월 14일.이슈페이퍼 23호 원본은 아래 첨부 파일을 확인하시면 됩니다 :) [22] 말레이시아 도심난민들의 건강권 현황과 과제 ㅣ 김정현 작성자 동남아연구소 조회수 1275 첨부파일 1 등록일 2022.10.19 초록국제난민법의 비당사국에서 난민의 건강권을 향상시키는 조건은 무엇일까? 위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본 이슈페이퍼는 말레이시아에서 불법체류자로서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인 난민들의 건강할 권리가 어떻게 보장되고 있는지 분석한다. 2022년 7월 한 달간 말레이시아에서 진행된 현지조사를 기반으로, 본 이슈페이퍼는 말레이시아에서 난민들의 건강권 향상을 위한 국제기구나 시민단체들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난민주도지역사회조직의 도움 없이는 이들의 난민보호프로그램이 불완전하며 효과적이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난민주도지역사회조직은 같은 언어, 종교, 민족 및 문화적 배경과 모국으로부터의 폭력과 피난이라는 공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난민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나가기 위해 집단행동을 도모하는 중요한 정책 행위자이다. 이들은 특히, 국제기구 및 시민단체들과 협력하며 파트너십을 구축함으로써, 난민들의 건강권을 보장하는 프로그램들이 성공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돕는 중요한 중개자 및 정책 이행 촉진자, 사회적 자본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이슈페이퍼 22호 원문 내려받기말레이시아 도심난민들의 건강할 권리는 어떻게 보장되고 있을까? 2022년 1월 말 기준으로 유엔난민기구(UNHCR) 말레이시아 지부에 등록된 난민과 비호신청자는 약 181,510명으로, 이 중 155,610명은 미얀마 출신이다(UNHCR-Asia Pacific 2022). 이 숫자는 대폭 축소된 수치로, 구금시설에 구류되어있거나 구금된 상태로 비호신청을 한 후 심사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제외한 것이다. 말레이시아는 1951년 난민협약과 1967년 난민의정서의 비당사국이며 난민보호제도의 부재로 인해 말레이시아에는 난민캠프가 없다. 따라서 말레이시아에 거주 중인 모든 난민들은 제3국으로 재정착 될 때까지 장기간 도심 지역사회에 수용중이다(Wake and Cheung 2016: 2). 문제는 말레이시아의 1957년 연방헌법과 1959-1963년 이민법이 자국에 체류 중인 비호신청자와 난민들을 불법체류자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듯, 말레이시아 지역뉴스나 정부문서 등에서는 UNHCR로부터 인정받은 난민이라 하더라도 이들을 공식적으로 PATI UNHCR(Pendatang Asing Tanpa Izin: 말레이시아어로 불법체류자를 의미)로 표현하고 있다. 정부 차원에서의 난민보호를 위한 법제도 및 정치적 의지의 부재로 말레이시아에 거주중인 난민들은 불법체류자로서 위태로운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부의 반난민정책의 부작용을 완화하는 기제로서 UNHCR 말레이시아 지부는 중요한 행위자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김정현 2022). 예를 들어, 말레이시아에서 비호신청자로 등록한 자의 경우, UNHCR은 해당 비호신청자의 지위를 증명하고 이들의 권리가 간략히 적힌 문서(asylum-seeker letter)를 발급한다. 인터뷰를 거쳐 난민으로 인정받은 경우에는 말레이시아에서 난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형태의 보호도구 로 알려진 UNHCR 카드를 발급한다. 각종 보고서에 따르면 UNHCR 비호신청문서 또는 신분증 카드를 가진 난민의 경우, 말레이시아에 한시적으로나마 합법적으로 거주할 권리를 부여 받아 구금 및 체포로부터 자유로우며, 정부가 운영하는 공공의료기관에서 외국인 의료비의 절반인 50%를 할인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UNHCR Malaysia 2022; Sullivan 2016: 8). 그러나 말레이시아에서 어떤 형태로든 UNHCR로부터 신분을 증명하는 도구를 취득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이러한 신분증을 얻기까지 난민들은 무기한 체포의 위험과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지난 8월 9일 말레이시아 지역매체 Malaysia Gazette는 쿠알라룸푸르에서 남서쪽으로 한 시간 떨어진 카장(Kajang) 지역에서 벌어진 불법체류자 소통작전을 동영상으로 공개했다. 이른 새벽 군복을 입은 출입국 관리소 직원들은 망치로 문을 부수고 난민들의 거주지에 강제 진입하여, 이들의 출신국과 신분을 체크하고 갓난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체포했다. 이 과정에서 몇몇은 5층 높이의 건물에서 탈출을 시도하다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우리는 미얀마에서도, 말레이시아에도, 안전하지 못해.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오직 안전뿐인데! 라며 난민들은 울부짖었다. 이러한 가운데, 지난 2020년 말레이시아 이민청은 대규모 작전을 통해 가짜 UNHCR 신분증과 비호신청문서를 발급해주는 카르텔 조직을 검거했다고 밝혔는데(Anis 2020), 이 사건은 바로 말레이시아의 난민들이 처한 필사적인 상황과 이들을 그러한 상황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UNHCR카드의 중요성을 현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일화이다. 말레이시아에 처음 도착한 난민들은 코로나19가 발발하기 전까지 이 중요한 도구를 발급받기 위해 쿠알라룸푸르에 위치한 UNHCR사무소에 직접 방문하여 난민신청서를 현장 접수해야만 했다. 그런데 UNHCR 말레이시아 사무소는 옛날 왕궁이 있던 지역의 언덕 부분에 위치하고 있어 대중교통으로 접근이 꽤 어려운 편이다. 택시를 타고 이동하더라도 도로들이 한참을 굽이 돌아가는 형세를 취하고 있어 교통비가 높게 나온다. 근처 역에서 걸어서 이동한다고 하더라도 무더운 날씨에 사람들이 발로 내놓은 산길을 포함하여 30분은 족히 넘게 걸어야한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과 높은 교통비는 주로 도시 외곽에 거주하는 난민들의 UNHCR 사무소 방문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게다가 코로나19의 발발과 함께 2020년 3월부터 시작된 말레이시아 정부의 이동제한명령(movement control order)은 UNHCR로 하여금 새로운 난민신청접수뿐만 아니라 기한이 만료된 카드의 재발급도 전면 중지하게 만들었다. 현재는 난민신청이 전면 온라인으로 전환되었으나, 이 또한 컴퓨터나 인터넷이 익숙하지 않은 난민들에게는 하나의 장애물로 인식되고 있다. 말레이시아에서 난민들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보호 수단인 UNHCR 신분증 취득이 이렇게 어렵다면, 신분증을 취득하기 전까지 불법체류자로서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인 난민들의 권리는 어떻게 보장되고 있을까? 특히 피난길에서 많은 폭력과 위험에 노출되어 각종 질병으로부터 취약해진 난민의 건강권은 어떻게 보장되고 있는가? 위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본 이슈페이퍼는 말레이시아 난민들의 건강권을 사례로 국제난민법의 비당사국에서 난민의 권리를 향상시키는 조건에 대해 분석하고자 한다. 특히 난민의 권리향상을 위한 시민단체 및 초국가적 네트워크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이주 거버넌스의 선행 문헌들에 기여하고자, 본 이슈페이퍼는 말레이시아정부 및 UNHCR, 국제 및 국내 시민단체, 난민주도지역사회조직과 같은 난민수용국 내 다양한 정책행위자들의 난민건강권 향상을 위한 활동과 전략을 분석하고, 난민주도지역사회조직이야말로 집단행동을 통해 난민들의 건강권 향상을 돕는 핵심적 사회적 자본이라고 주장한다. 본 연구는 2022년 7월 한 달간 말레이시아 현지조사 기간 동안 수행된 총 10건의 단체 방문 및 현장 관찰, 13건의 인터뷰를 기반으로 작성되었다.난민의 건강권 보장을 위한 말레이시아 정부와 UNHCR의 역할에 대한 고찰 말레이시아는 국제난민법의 비당사국으로서 국내 체류 중인 난민들을 불법이민자로 규정하고 있어 난민들의 의료권 및 교육권, 일할 권리 등을 인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인도적 차원에서 난민들이 제3국에 최종 정착하기 전까지 자국에 임시적으로 체류하도록 허용하고, 또 그 과정을 국제기구와 국제 및 국내 시민단체들이 지원하도록 허락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UNHCR말레이시아 지부는 난민들에게 일차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자국에서 무료 모바일 진료소를 운영하고 있는 시민단체를 지원하면서 공중보건프로그램(Public Health Program) 운영을 시작했다(저자 인터뷰 2022/08/04). 말레이시아에 체류 중인 난민들의 약 86퍼센트는 미얀마 출신으로, 이들은 말레이시아 정착 초기 정글과 같은 외딴 지역에 집단으로 모여 살며 농사를 지어 생계를 이어나갔다. 이들의 건강권을 위해 말레이시아에서 최초로 조직된 단체는 A Call To Serve(이하 ACTS)로, 이들은 외딴곳에 모여 살던 난민들에게 치료가 필요하다는 요청을 받으면 이들을 찾아가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이른바 모바일 클리닉을 UNHCR과 MSF(M decins Sans Fronti res, 국경없는의사회)의 도움을 받아 2003년부터 간헐적으로 운영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에 도착하는 난민들의 수가 갈수록 급증하고, 난민들이 수도인 쿠알라룸푸르를 중심으로 가까운 도심의 지역사회에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 찾아가는 서비스가 아니라 난민들이 필요하면 언제든 찾아가서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상설 클리닉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UNHCR 말레이시아 지부의 제안으로 ACTS는 2008년 UNHCR과 미국정부의 지원을 받아 쿠알라룸푸르 중앙역이 위치한 KL Sentral에 랜드마크처럼 자리하고 있는 YMCA 바로 뒤편에 말레이시아 최초 상설 난민클리닉인 ACTS-Arrupe 진료소를 개설했다(저자 인터뷰 2022/07/25). 그리고 2011년에는 UNHCR이 지원하는 두 번째 상설 진료소가 Tzu-Chi(쯔치) 불교재단에 의해 쿠알라룸푸르에 개설되었다. 시민단체들이 운영하는 난민진료소 지원을 통해 난민들의 일차의료권을 보장하던 UNHCR의 정책 방향은 2019년 후반을 기점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2017년 카타르 정부가 난민을 돕기 위해 말레이시아 정부에 미화 500억을 기부하기로 결정하면서, UNHCR가 2020년을 기점으로 평소 지원해왔던 시민단체들의 무료 진료소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게 된 것이다. 카타르의 공공개발기관인 카타르 개발기금(Qatar Fund for Development, 이하 QFFD)은 Qatar Charity(카타르 자선단체)를 말레이시아 내 난민 지원기금의 주요 시행단체로 임명하고, 기부금의 운영과 말레이시아 내 파트너 기관을 선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그리고 Qatar Charity는 공개경쟁에 참가한 말레이시아의 시민단체 중에 세 곳을 선정하고 말레이시아 정부의 최종 승인을 받아, 이들과 함께 2019년 말레이시아 전역에 걸쳐 다섯 개의 상설 난민진료소를 설립했다(저자 인터뷰 2022/08/01). 본 프로젝트의 첫 번째 시행단체로 선정된 Mercy Malaysia는 말레이시아 중부인 쿠알라룸푸르 서쪽지역 암팡(Ampang)과 남쪽지역 카장(Kajang)에 두 개의 QFFD진료소를 설립하여 운영 중이며, 두 번째 시행단체인 IMARET(Islamic Medical Association of Malaysia- Response Relief Team)은 쿠알라룸푸르 북쪽지역 셀라양(Selayang)과 말레이시아 남부인 조호르 주의 코타 팅기(Kota Tinggi)에 두 개의 QFFD진료소를 운영 중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시행단체인 MRA(Malaysian Relief Agency)는 말레이시아 북부의 태국의 국경지역 근처인 Sg Petani에 한 개의 QFFD진료소를 운영 중에 있다. 이들은 모두 보통 주치의 한명으로 운영되는 일반 진료소로, QFFD기금으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의료장비 및 시설이 매우 양호한 편이다(UNHCR Malaysia 2022). 현재 말레이시아 전역에서 난민들에게 일차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시민단체 진료소들은 이들 다섯 곳의 QFFD진료소를 포함하여 총 15개지만, 이들은 모두 UNHCR의 지원 없이 자체기금으로 운영 중이다. 유엔회원국들의 자발적인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UNHCR은 코로나19 전염병이 발발한 이래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어오다, 2020년부터 난민을 위한 주요 일차의료서비스 제공을 모두 카타르 정부의 지원 아래 있는 QFFD 진료소들에게 대부분 맡기게 되었다. 난민들의 질병 유형을 분석했을 때, 대부분은 비전염성 질환으로, 이는 이미 말레이시아 내에 시민단체들이 운영하는 진료소가 충분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 현재 UNHCR 말레이시아 지부의 판단이다(저자 인터뷰 2022/08/04). 그러나 이차의료서비스가 요구되는 만성질환 및 중증질환 환자의 경우에는 전문의료진과 치료시설의 부재로 시민단체가 운영하는 진료소에서 치료를 받을 수가 없고, 결국 말레이시아 내 정부가 운영하는 공공병원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따라서 현재 UNHCR 말레이시아 지부의 공중보건프로그램은 이러한 난민환자들을 대상으로 이차의료서비스에 대한 의료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정부의 의료정책을 위한 로비 및 자문활동에 더 집중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저자 인터뷰 2022/08/04). 말레이시아 정부는 UNHCR에 의해 난민으로 인정받아 UNHCR카드를 소지하고 있거나 또는 난민심사를 기다리고 있다는 신분 보증용 비호신청자 편지를 소지한 자의 경우, 이들이 공공병원에서 이차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외국인 요금의 50퍼센트를 할인해 주는 정책을 실행 중이다. 그러나 말레이시아 정부는 2016년 공공병원에서의 외국인 요금을 내국인 대비 26에서 50배 높게 인상하면서, 사실상 난민들이 공공병원에 접근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취약계층인 난민에게 과도한 재정적 부담을 부과하는 의료정책은 특히 말레이시아처럼 난민들이 합법적으로 일하며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부정되는 환경에서, 안정적인 소득을 담보할 수 없는 난민들에게 건강상의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난민의 공공의료시설에 대한 접근성을 낮추는 요인으로 재정문제가 가장 큰 요인으로 손꼽히게 되자, UNHCR 말레이시아 지부는 난민을 위한 보험제도 운영에 대한 가능성을 살피기 시작했다. 당시 이들에 눈에 띈 것은 이란의 아프가니스탄 난민지원정책이었는데, 이란은 난민들이 필수 이차, 삼차 공공의료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국가의 건강보험제도에 등록할 수 있도록 선택권을 부여해오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란의 국가건강보험제도는 난민들이 이란 국민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수술, 투석, 방사선, 각종 검사, 및 외래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UNHCR-Asia Pacific 2021). 이란의 시스템을 말레이시아에서 적용 가능한지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UNHCR 말레이시아 지부는 2012년 자문을 받았고, 마침내 2014년 난민의료보험(REMEDI: Refugee Medical Insurance) 제도를 실행하게 되었다(저자 인터뷰 2022/08/04). UNHCR 말레이시아 지부가 개념을 차용한 이란의 건강보험제도는 공보험이었지만, 이란과 달리 국제난민법을 비준하지 않은 말레이시아에서는 사보험만이 난민의료보험을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였다. 이에 UNHCR 말레이시아는 난민들에게 의료보험을 제공하는데 관심이 있는 사기업들에게 주요 기준을 제시하고 공개경쟁입찰을 붙였다. 당시 UNHCR이 보험사를 선택할 때 고려했던 첫 번째 기준은 난민들이 보험회사에 지급해야 하는 보험 프리미엄이 저렴하고 합리적이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저자 인터뷰 2022/08/04). 그렇다면, 이 합리적 이라는 기준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말레이시아 정부는 2011년 이래 외국인 노동자 입원 및 수술 계획(Foreign Worker Hospitalisation and Surgical Scheme) 이라는 외국인 노동자 필수 의료보험제도를 약 17개의 보험사를 통해 운영해오고 있으며, 본 제도 하에 외국인 노동자들은 연간 약 150링겟의 프리미엄을 보험사에 납부하고, 최대10,000링겟의 의료서비스를 보장받게 된다(FMM 2022). UNHCR 말레이시아가 당시 고려했던 난민들을 위한 합리적인 의료보험의 프리미엄 가격은 이와 비슷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왜냐하면 2014년 말레이시아의 난민의료보험 첫 번째 파트너로 선정됐던 Tune이라는 보험사가 난민의료보험을 위해 제공했던 플랜이 당시 외국인 노동자에게 제공되었던 플랜과 동일했기 때문이다. UNHCR 말레이시아가 보험사를 선택할 때 중요하게 고려했던 두 번째 기준은 바로 현금이 필요 없는 서비스(cashless service)였다. UNHCR 말레이시아 지부는 이 부분을 핵심 요소로 손꼽았는데, 그 이유는 난민들이 병원에서 현금을 지불하기 위해 직면하는 어려움을 전면 예방하기 위함이었다. 난민들이 의료보험카드를 가지고 병원에 가면, 병원에서는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보험비 청구는 추후에 병원이 보험사와 함께 하는 것이 UNHCR이 이상적으로 고려했던 모델이었다(저자 인터뷰 2022/08/04). 이 모델의 중요성은 난민들이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권리와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UNHCR 말레이시아 지부의 전 공중보건프로그램 책임자 수실라 박사는 안정된 수입의 원천을 가지지 못한 말레이시아 내 난민들의 의료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현금이 필요 없는 의료보험제도는 필수적이며, 이의 해결을 위해 앞으로 난민들에게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고, 의료보험이 직장과 연계되어 난민들이 직접 세금에 기여하는 방식을 통해 정부가 제공하는 의료서비스에 접근하는 방식의 포괄적인 난민정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저자 인터뷰 2022/08/04). 이렇게 잘 준비되었던 말레이시아의 난민의료보험은 2014년부터 2016년까지 그 첫번째 라운드를 보험사 Tune과 함께 한 뒤, 2016년부터 2018년까지 보험사 RHB와 함께 두 번째 라운드를 진행했다. 문제는 2016년, 정부가 공공병원에서의 외국인 요금을 내국인 대비 26에서 50배 높게 인상한 정책이, 평소 외국인 요금의 50퍼센트를 지불해 오던 난민들의 의료비를 사실상 대폭 인상하는 결과를 야기하게 되면서 붉어졌다. RHB 보험사는 난민들의 높은 의료비를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해 보험 프리미엄을 2017년에 한번 업데이트 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비스 유지가 어려웠고, 결국 2018년 UNHCR의 난민의료보험제도는 폐지의 수순을 밟게 되었다. 난민보호를 위한 법률 및 제도적 메카니즘이 결여되어 있는 동남아지역 내에서 UNHCR 말레이시아 지부가 2014년 최초 도입했던 난민의료보험 제도는 난민들이 스스로 의료보험 구입을 통해 자신의 건강권 향상에 직접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했다는 점에서 매우 선진적인 프로그램이었으나, 결국 정부의 지지를 받지 못해 최종 실패하게 되었다. 그리고 말레이시아 의료보험의 실패사례 분석은 어떠한 조건 아래서 난민들이 포괄적이며 지속가능한 의료보험제도에 편입되어 보호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남긴다. 첫째, 무엇보다도 지속가능한 난민의료보험제도를 위해 정부는 모든 난민들의 의료보험가입을 의무화해야 한다. 난민들의 의료보험가입이 의무가 아닐 경우, 보험사는 이윤을 남기기 위한 마지노선이 되는 최소 보험 가입자 수 확보에 어려움을 겪게 되고, 이러한 예측 불가능성은 결국 보험가입자 1인당 보험 프리미엄의 가격을 높이는 결과를 초래한다. 보험이 비싸지면, 사람들이 더욱 보험에 가입하지 않게 될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또한 보험가입이 의무가 아니라면 오직 질병에 취학한 연령층이나 이미 아픈 환자들이 의료보험에 가입할 확률이 증가하기 때문에, 보험 가입자 수는 적은 반면 의료비 보상을 청구하는 사람들의 수는 많아지게 된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2016년 말레이시아 정부의 외국인 진료비 인상은 난민들의 1건당 의료비 청구가격을 천문학적으로 높이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험사들은 더 이상 이윤을 남길 수 없는 난민의료보험제공을 포기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UNHCR 말레이시아의 전 공중보건프로그램 책임자 수실라 박사는 미래에 난민의료보험제도가 어떠한 형태로든 부활하게 된다면, 이는 반드시 말레시이아 정부의 온전한 지지와 지원을 담보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지난 난민의료보험 모델이 UNHCR로 하여금 난민들에게는 의료보험을 구입하도록 설득하고, 보험사에게는 해당 제도를 통해 이윤을 내고 있는지 지속적으로 도와야 한다는 점에서 너무 힘들고 어려워 제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고 소회를 털어놓았다(저자 인터뷰 2022/08/04). 그러므로 말레이시아 정부가 이미 10년 이상 외국인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의료보험제도를 의무화하여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정부가 난민들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의료보험 구입을 의무화 한다면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해결 방안이 될 것이다. 둘째, 지속가능한 난민의료보험제도를 위해 정부는 난민들에게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고, 일자리와 연관시켜 의료보험 구입을 의무화 시키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 이를 통해 난민들은 본인의 의료비를 직접 지불하고, 말레이시아 정부와 국민들의 세금 부담을 줄이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말레이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난민들은 비공식적으로 대규모 농장, 레스토랑, 건설현장, 풀 깎기 등의 분야에 주요 노동력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불법적 지위로 인해 저임금 및 사업주로부터 폭력, 산재의 위험이 많이 노출되어 있는 상태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고, 이들이 세금에 기여하는 방식을 통해 정부가 제공하는 의료서비스 및 교육시설에 접근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은 말레이시아 내 난민들의 건강권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일 것이다. 이를 위해 UNHCR 말레이시아지부는 난민들의 의료응급사례에 대한 재정적 지원과 함께, 현재 말레이시아 의회 내에서 계류 중인 난민에게 합법적으로 일할 권리를 부여하는 법안의 통과를 위한 로비활동을 지속해 나가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난민들이 말레이시아 내에서 안전하게 체류할 수 있도록 난민등록을 가속화 하는데 많은 노력을 쏟고 있다. 난민의 건강권 보장을 위한 시민단체 진료소의 역할 말레이시아에서 UNHCR이 난민들에게 합법적 체류지위를 부여하고 포괄적인 의료접근성을 보장하기 위해 정부를 상대로 정책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면, 시민단체들은 지역사회에서 진료소를 통하여 난민들에게 의료서비스를 직접 제공하면서 난민들의 건강권 향상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앞서 논의한 대로, 말레이시아에서 시민단체가 최초로 설립한 난민진료소는 KL Sentral에 위치한 ACTS-Arrupe 진료소이다. 본 진료소는 난민을 위한 상설 진료소가 필요하다는 UNHCR의 제안에 따라 2008년 설립되었으며, 설립 초기에는 UNHCR와 미국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았으나, 2022년 현재는 모든 지원이 중단된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료소의 대기실로 들어가면 두 기관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다는 커다란 푯말이 진료소 벽에 붙어있는데, 이는 경찰의 진료소 불시 검문 시 압박을 주기 위함이라고 한다 (저자 인터뷰 2022/07/14). 현재 ACTS-Arrupe 진료소 운영에 소요되는 비용은 진료소를 설립한 천주교 단체, A Call To Serve로부터의 지원과 진료소를 방분하는 환자들이 지불하는 비용으로 충당되고 있다. 본 진료소는 1일 기준 약 80명의 난민 및 비호신청자들에게 일차의료서비스 및 심리상담 서비스를 10링겟(한화 3천원 가량)에 제공하고 있으며, 부족한 재원으로 인해 시설은 매우 열악한 상황이다. ACTS는 Arrupe 진료소뿐만 아니라 쿠알라룸푸르 도심에서 북쪽으로 약 1시간 떨어진 바투아랑(Batu Arang) 지역에 PERCH라는 난민요양원을 두 채- PERCH1(남성 환자 수용) PERCH2(여성 및 아동 환자 수용) 운영 중이다. 보통 난민진료소들과 커뮤니티기관들은 말레이시아 정부의 감시를 피해 지역사회의 외진 곳,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필자는 ACTS의 대표, 주치의, 행정실장과 함께 동행하여 요양원을 방문할 수 있었다. PERCH 요양원은 암, 백혈병, 결핵, 의료사고로 인한 사지마비 등 중증질환으로 인한 장기치료가 필요한 환자 및 수술 이후 오갈 곳이 마땅치 않은 난민들의 회복을 위한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PERCH 요양원은 환자들에게 직접 의료서비스를 제공하지는 않고, 정기검진이 필요한 난민들이 지역 내 병원시설에서 체류 지위나 언어의 한계에 대한 문제없이 안전하게 통원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말레이시아 현지인 스태프가 병원에 동행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요양원 각 시설에는 난민들이 스태프로 직접 고용되어 음식과 청소를 맡아하고 있으며, 말레이시아어에 능숙하지 못한 난민들에게는 시민단체 활동가들과 소통을 위해 통역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PERCH2는 아이들이 수용되어 있다시피 이들을 위한 러닝센터도 매일 운영하고 있다. PERCH는 말레이시아에 유일한 난민요양원으로 평소 미국이민국(Bureau of Population, Refugees, and Migration)의 지원을 받고 있으나, 올해는 서류상의 문제로 지원금 지불이 지연된 상태로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저자 인터뷰 2022/07/29). ACTS와는 대조적으로 카타르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고 있는 QFFD진료소는 말레이시아 내 총 5곳이 개설되어있는데, 필자는 그 중 Mercy Malaysia와 협력하고 있는 쿠알라룸푸르 서쪽에 위치한 암팡 지역의 진료소를 방문했다. QFFD 진료소는 관대한 재정지원 덕택인지 의료장비 및 진료소 시설이 매우 양호했다. QFFD 암팡 진료소는 매주 토요일 모바일 클리닉 또한 운영하고 있어 관찰자로 동행했다. 모바일클리닉의 운영진은 매니저 1인(전체운영 및 운전), 약사 1인, 의사 2인(QFFD 진료소 주치의; 파견 지역 병원의 의사-자원봉사), 난민스태프 3명(등록, 통역, 보건교육 담당) 및 자원봉사자(당일 4명)으로 구성되었다. 당일에는 모바일 클리닉이 쿠알라룸푸르 도심에서 서쪽으로 약 1시간 거리의 셀랑고르 지역의 로힝야 난민 러닝센터에서 진행되었다. 모바일클리닉 팀이 임시진료소를 설치한 후 난민환자들이 방문하면, 이들은 등록-진찰-약처방-보건교육 순서를 거치며 진찰을 받게 된다. 임시진료소가 설치되자 난민커뮤니티의 지도자들이 모바일 클리닉에 제일 먼저 도착하여 SNS등을 통해 소식을 가가호호 전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는데, 이 때문인지 오전 10시에 약 10명의 환자로 시작된 모바일 클리닉이 정오가 되자 발 딛을 틈이 없이 환자들로 가득차게 되었다. QFFD진료소 팀은 모바일 클리닉의 행사여부를 해당지역 경찰서에 미리 신고하고 보호를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난민들은 지위상의 불안함 때문에 모바일 클리닉을 바로 찾지는 않고, 이웃에게 모바일 클리닉에 대한 긍정적 소식을 전달 받은 뒤에서야 방문했다. 모바일 클리닉은 전액 무료로 진행되었고, 당일에는 코로나19 발발 이후 처음 방문하게 된 지역이라 평소의 2배에 가까운 126명의 환자를 치료했다. 환자들은 대부분 강제이주로 인하여 표준예방접종 일정을 놓친 다양한 연령대의 어린이들로, 신생아부터 필수로 접종해야하는 백신들을 뒤늦게 접종하고 있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또한 미얀마의 씹는담배인 꿍 이라는 문화 때문에 치아 상태가 좋지 못한 로힝야 난민 환자들이 많아서, 이를 비롯하여 코로나 예방과 관련한 보건교육이 진행되었다. 수량 부족으로 인해 무료 칫솔과 치약세트는 소수에게만 전달되었으며, 코로나 예방 교육의 하나로 방문환자들에게 마스크를 나눠주었는데 아동 사이즈는 동이나 아이들이 불편함을 겪기도 했다. 또한 모바일 클리닉 당일에 발열과 기침 증상이 있는 환자들이 많았는데, 추후 코로나로 발전하지 않을지 주의 깊은 관심이 필요하다는 의사의 소견이 있었다. 이와 같이 말레이시아 내 난민의 건강권을 위해 노력하는 시민단체들은 해당분야의 전문지식과 경험 및 해외와 국내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하여 난민들이 필요한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국내외로부터 자원과 물자를 동원하고, 이를 활용하여 직접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난민들의 건강권 증진에 기여하고 있다.난민의 건강권 보장을 위한 난민주도지역사회조직의 역할 필자는 말레이시아에서 난민들의 건강권 향상을 위한 UNHCR과 각종 시민단체 진료소들의 역할을 인정하는 한편, 난민주도지역사회조직이야 말로 난민들의 건강권 향상을 위한 핵심 정책행위자라고 주장한다. 말레이시아에는 난민주도지역사회조직이 약 60개, 리더들은 약 130명 이상 존재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저자 인터뷰 2022/08/04). 이들은 난민들의 인종, 성별, 나이와 같은 특성에 따라 다양하게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으며, 지역사회기반조직(Community-Based Organizations), 난민지역사회조직(Refugee Community Organizations), 민족공동체(Ethnic community) 등의 다양한 개념으로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에 필자는 이러한 조직들을 난민주도지역사회조직(RCOs: Refugee-led Community Organizations) 라고 통칭하고, 2004년 미국공중보건협회 연례회의 중 노스캐롤라이나 간호위원회가 채택한 지역사회기반조직의 정의를 차용하여 그 개념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자 한다. 그러므로 본 고에서 설명하는 난민주도지역사회조직이란 난민들이 주도하는 조직으로 첫째, 조직의 직원과 회원 과반수는 난민 및 비호신청자로 구성하며; 둘째, 조직의 본부는 난민커뮤니티 내에 있어야 하고; 셋째, 조직의 우선순위 과제들은 난민회원들이 스스로 구별해내고 정의하며; 넷째, 해결방법 또한 난민회원들이 함께 개발해내고; 다섯째, 조직의 프로그램 설계, 이행, 평가에 있어서도 난민회원들이 리더십 직책에 밀접하게 관련되어있는 조직을 말한다. 난민주도지역사회조직은 난민들이 수용국 내에서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한 집단행동(collective action)을 취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들로, 같은 언어, 종교, 민족 및 문화적 배경과 모국으로부터의 폭력과 피난이라는 공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난민들과 높은 친밀성을 나누고, 난민들이 직면한 문제에 대해 높은 이해도를 가지고 있다는 특징을 가진다. 이들은 특히, 정부의 난민보호가 부재가 말레이시아에서 국제기구 및 시민단체들과 협력하며 파트너십을 구축함으로써,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인 난민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프로그램들이 성공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돕는 중요한 중개자 및 정책 이행 촉진자, 사회적 자본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UNHCR 말레이시아 지부 또한 이러한 중요성을 깨닫고, 2021년 커뮤니티 기반 보호(community-based protection) 부서를 개설하여, 난민주도지역사회조직의 규모를 파악하고 리더들을 소집하여 각종 교육 및 네트워킹 프로그램 진행에 착수했다(저자 인터뷰 2022/08/04). 난민주도지역사회조직들은 말레이시아에 처음 도착하는 동료 난민들의 첫 번째 접촉 지점(first point of contact)으로 활약하며, UNHCR 난민심사접수에 필수인 신분증 형태의 하나로 커뮤니티 카드를 발급한다. 이러한 커뮤니티 카드는 아직 UNHCR에 의해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상태라 하더라도, 난민주도지역사회조직으로부터 신분을 보증 받았다는 증표로서 활용되어 시민단체가 운영하는 진료소에서 UNHCR카드와 동일한 효력을 지닌다. 물론 말레이시아 경찰이나 군인들에 의해 불시의 신분증 검사를 받았을 때 그 효력은 UNHCR카드에 비해 매우 낮지만, 커뮤니티 카드를 소지한 자들은 경찰에 체포당하거나 구금시설에 구류가 되었을 때에도 난민주도지역사회조직의 리더들에게 연락하여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저자 인터뷰 2022/07/28). 난민주도지역사회조직은 수용국 내 다양한 난민문제 해결을 위해 고도로 발달한 조직체계를 가지고 있는 경향을 보였다. 예를 들어 이들은 난민들이 체포와 구금을 당했을 시, 구류된 난민들의 정보를 일차로 파악하여 UNHCR에 석방탄원서를 제출하는 역할을 하는 부서; 난민들이 치료가 필요할 경우 시민단체 진료소나 지역사회 공공병원에 대한 정보를 회원들에게 제공하고, 병원에서 직접 병원비를 협상을 하거나 응급자금요청 캠페인을 벌이는 의료복지 담당부서; 집과 일자리 구하는 것을 돕고, 커뮤니티 카드를 발급해 줌으로써 UNHCR 난민심사 등록을 돕는 정착부서; 아동들의 문화 및 현지어 교육을 담당하는 교육부서; 시민단체와 UNHCR과의 소통을 돕고 대외행사들을 도맡는 부서 등을 모두 공통적으로 갖추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선거를 통하여 리더를 선출하고, 정관을 두어 성문법에 따라 조직을 운영하는 등, 모국보다 훨씬 더 나은 민주주의 체계 를 통해 정치과정을 연습하고 있었다(저자인터뷰 2022/07/30). 그 중에서도 특히 난민의 건강권과 관련하여 미얀마 카렌족(MKO: Malaysia Karen Organization)의 난민주도지역사회조직의 의료정책은 주목할 만 하다. UNHCR의 주도로 난민의료보험(REMEDI)이 운영되고 있을 당시, MKO는 MKO Care 라는 커뮤니티 자체 의료보험을 개발하여 실행했다. MKO Care는 보험유지기간과 프리미엄, 보장내용 등을 REMEDI의 내용과 동일하게 유지하면서도, 조직 회원들을 대상으로 좀 더 포괄적인 의료보험을 제공했다. 예를 들어, REMEDI가 UNHCR카드 또는 비호신청자문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만 의료보장을 실시했다면, MKO Care는 커뮤니티 카드를 가진 회원이라면 누구나, 어떤 질병이라도 의료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저자 인터뷰 2022/07/28). REMEDI는 말레이시아 현지 보험시장의 관행을 거스를 수 없다며, 말레이시아 보험사들이 의료보장을 하지 않는 외래환자 및 모성보호에 대한 항목을 난민의료보장항목에서 제외했었다. 그러나 MKO Care는 이러한 제한을 모두 삭제함으로써 난민들의 의료접근성을 더욱 높이고자 했다. 물론 MKO Care 또한 REMEDI와 같은 이유로 2018년 폐지의 수순을 밟았으나, 본 사례는 말레이시아 내 난민주도지역사회조직의 고도의 주체성과 발달된 조직체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예시다. 난민주도지역사회조직은 자체 역량강화를 위해 시민단체 및 국제기구에 난민회원들을 추천하여 이들이 직접 고용될 수 있도록 도우면서, 말레이시아 내 UNHCR 및 시민단체와 3티어 파트너십 또한 강화하고 있다. 예를 들어 QFFD 모바일 클리닉의 경우 난민커뮤니티에서 스태프들을 직접 고용하여, 방문하는 지역의 난민들의 언어와 인종, 종교의 특성을 고려하여 난민스태프들을 파견하고 있다. 이들은 시민단체 및 국제기구의 파트너로서 난민환자가 발생한 지역을 파악하여 각종 의료 및 보건복지 서비스가 제공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고, 의료팀에 직접 소속되어 난민을 위해 일하고 있다. 이들은 보통 난민들 중에서도 모국에서 대학교육 등을 마친 훈련된 스태프들이었으며, QFFD 진료소뿐만 아니라 UNHCR과 IOM과 같은 국제기구 또는 각종 시민단체들에 통역사로 고용되거나 난민커뮤니티 대표자들로 활동하고 있어, 현지 난민사정과 시민단체 및 정부의 난민 정책에 대한 높은 이해와 경험을 보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난민주도지역사회조직은 UNHCR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자체 의료팀을 운영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프로그램은 특히 에이즈 환자 또는 가정폭력 생존자와 같이 공공의료시설에 접근을 두려워하는 여성 환자들을 돌보는데 효과적으로 나타났다(저자인터뷰 2022/08/02). 이와 같이 난민주도지역사회조직들은 자체조직을 활용하거나 혹은 각종 파트너십을 구축함으로써, 말레이시아 내 난민보호프로그램들이 성공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돕는 중요한 사회적 자본으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도심난민들의 건강권 증진을 위한 난민주도지역 사회조직의 중요성 필자는 말레이시아에서 난민들의 건강권 향상을 위해서 국제기구나 시민단체들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지만, 난민주도지역사회조직의 도움 없는 이들의 난민 건강권 프로그램의 이행이 불완전하고 효과적이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난민주도지역사회조직이 국제기구 및 시민단체들의 난민건강프로그램의 성공적 수행을 유도하는 핵심 정책행위자라는 것이다. 말레이시아에서 난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보호의 도구로 간주되고 있는 UNHCR카드의 발급을 위해서도 난민들은 난민주도지역사회조직이 발급한 커뮤니티 카드가 신분을 보증하는 도구로서 필요하며, 커뮤니티 카드만 가지면 UNHCR카드를 발급받기 전까지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이 난민주도지역사회조직에 의해 적극적인 보호를 제공받을 수 있다. 난민주도지역사회조직은 난민수용국 내에서 모국을 상기시키는 국가 내 국가(state within a state) 로써 역할하며, 난민들의 권리 향상을 위한 비공식적 정책 행위자로서 그 소임을 다하고 있다. * 참고문헌김정현. 2022. 난민네트워크의 세력화가 난민의 건강권에 미치는 영향: 로힝야 난민 사례를 중심으로. 『동남아시아 연구』 32(2): 79-124. Anis, Mazwin Nik. 2020. Major Blitz to Verify UNHCR Cards. The Star. 6 August. https://www.thestar. com.my/news/nation/2020/08/06/major-blitz-to-verify-unhcr-cards (검색일: 2022.08.09.) Fauzi, Affan. 2022. PATI Menangis Diserbu Imigresen. Malaysia Gazette. 9 August. https:// malaysiagazette.com/2022/08/09/pati-menangis-diserbu-imigresen/ (검색일: 2022.08.09.) Federation of Malaysian Manufactureres (FMM). 2022. Foreign Worker Medical Insurance. https:// www.fmm.org.my/Industry-@-Foreign_Worker_Medical_Insurance.aspx (검색일: 2022.09.20.) Sullivan, Daniel. 2016. Still Adrift: Failure to Protect Rohingya in Malaysia and Thailand. Refugees International Field Report. November 16. https://www.refugeesinternational.org/reports/ 2016/rohingya (검색일: 2022.03.11.) UNHCR-Asia Pacific. 2021. 120,000 Refugees Assisted to Access Iran s Health Insurance Scheme. https://www.unhcr.org/news/briefing/2021/4/606c19ad4/120000-refugees-assisted-access-irans-health-insurance-scheme.html (검색일: 2022.09.20.) UNHCR-Asia Pacific. 2022. Figures at a Glance in Malaysia. https://www.unhcr.org/figures-at-a-glance-in-malaysia.html (검색일: 2022.01.25.) UNHCR-Malaysia. 2022. Health Services. https://refugeemalaysia.org/support/health-services/ (검 색일: 2022.01.25.) University of Michigan, School of Public Health. 2022. What is a CBO? https://sph.umich.edu/ ncbon/about/whatis.html (검색일: 2022.08.24.) Wake, Caitlin and Tania Cheung. 2016. Livelihood Strategies of Rohingya Refugees in Malaysia: We Want to Live in Dignity. HPG Working Paper. London: Overseas Development Institute. [21] 싱가포르의 이주노동자와 시민사회를 찾아서 ㅣ 김주영 작성자 동남아연구소 조회수 986 첨부파일 1 등록일 2022.09.29 초록이 글은 2022년 8월 9일부터 19일까지 11일 동안 싱가포르에서 진행한 이주노동자와 시민사회에 관한 짧은 현지조사의 기록으로 정부, 시민사회단체, 이주노동자 단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정부는 2022년 6월 말에 문을 연 우리의 이주노동자 갤러리(Our Migrant Workers Gallery)를 그들이 원하는 이주노동자와 노사관계의 모습, 체계적인 코로나19 대응 서사를 드러내는 장으로 활용한다. 이 과정에서 이주노동자가 경험하는 어려움은 사라지고, 시민사회의 비판 역시 가시화되지 않는다. 시민사회는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거나 옹호활동을 하지 않는 자선단체가 다수인 복잡한 지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부 정책에 비판적인 시민사회단체가 설 자리가 부족한 실정이다. 이주노동자가 스스로 조직한 단체는 이주노동자의 임파워먼트를 강조하고, 싱가포르 사회에 기여함으로써 제한된 저항이라도 가능한 환경을 조성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지만 이주노동자의 건강과 의료보장에 대해서는 문제의식 자체가 거의 없거나, 여전히 고용주 책임의 틀에서 사고하는 한계를 보인다.이슈페이퍼 22호 원문 내려받기새로운 연구 현장을 탐색한 11일의 기록이 글은 2022년 8월 9일부터 19일까지 11일 동안 싱가포르에서 진행한 이주노동자와 시민사회에 관한 짧은 현지조사의 기록으로 정부, 시민사회단체, 이주노동자 단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11일은 연구주제와 관련된 현지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쌓거나 충분한 정보를 획득하기에는 부족한 시간이지만, 낯선 누군가가 자신만의 시간과 곁을 잠시 내어줄 수 있는 기간이기도 했다. 이 시간 동안 나는 아는 이 하나 없는 낯선 싱가포르에 친구까지는 아니더라도 지인을 만들어두고 싶었다. 1년 이상 체류했던 예전의 현지조사 경험을 상기하면, 내가 어떤 지역을 좋아하는 데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 요인은 바로 사람이었다. 내가 마음에 두는 사람이 머무는 그 곳이 그 사람에게 더 좋은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연구를 하는 또 다른 이유기도 하다. 이번 여정에서 내게 그런 사람들이 조금은 생겼다는 점에서 성과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11일의 기록을 크게 네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보여주려고 한다. 첫 방문인 만큼 정부, 시민사회단체, 이주노동자로 나누어 이들 각각의 입장에서 싱가포르의 상황을 이해해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싱가포르 시민사회에 관한 선행연구를 검토했을 때, 정부 관료와 직접적으로 시민사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았다. 기존의 연구들은 시민사회가 자유롭게 이주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할 수 없는 싱가포르의 제한된 정치적 상황을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었다. 문헌 속에서 싱가포르 시민사회는 정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어휘와 표현을 신중하게 선택하면서 이주노동자 지원활동에 참여해야 했다. 따라서 정부의 입장은 2022년 6월 말에 문을 연 Our Migrant Workers Gallery 의 전시를 통해 간접적으로 보여줄 것이다. 시민사회에 관한 이야기는 싱가포르에서 이주노동자 옹호활동의 대표적인 단체인 이주경제학을 위한 인도주의적 단체(HOME: Humanitarian Organization for Migration Economics), Transient Workers Count Too(TWC2)의 활동가들과의 만남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이들이 전달해준 싱가포르 시민사회의 특징을 중심으로 활동의 지형도를 파악해보고자 한다. 세 번째로, 이주노동자가 스스로 조직한 단체의 대표를 만나 그들의 활동을 정부와 시민사회단체의 관계 속에서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전북대 동남아연구소의 주요 연구주제인 보건과 관련하여 이주노동자의 건강과 의료보험을 둘러싼 현지인과 이주노동자의 입장을 간략하게 보여주고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이 글에서 이주노동자는 취업허가(work permit) 비자를 소지한 저임금‧저숙련의 노동자를 지칭한다. 시민사회단체의 활동도 이들을 주요 대상으로 한다. 싱가포르에서 취업허가 비자는 건설업, 해양‧조선업, 제조업에 주로 종사하는 인도, 방글라데시 등에서 온 남성 노동자와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에서 온 여성 가사노동자가 2년 단위로 받는다. 취업허가 비자 소지자는 가족을 동반할 수 없고 싱가포르인과의 혼인은 인력부(Ministry of Manpower)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등 여러 제약이 있다. 이번 방문에서는 방글라데시와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을 주로 만났다. Our Migrant Workers Gallery: 정부의 이주노동자 담론 생산의 장현지조사를 준비하면서 싱가포르의 인력부에서 2022년 6월 30일에 이주노동자와 관련된 전시관인 우리의 이주노동자 갤러리(Our Migrant Workers Gallery) 를 새롭게 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갤러리는 주로 교육적 목적으로 싱가포르 내 학교의 단체견학 장소로 활용되었고 대중에게 언제 공개될지는 알 수 없어서 메일로 방문 가능 여부를 문의해야 했다. 갤러리 운영은 인력부 산하의 ACE(The Assurance, Care and Engagement) group이 담당하고 있었다. 이주노동자 기숙사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한 이래로 이주노동자를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ACE group은 2021년에 인력부의 정식부서로 출범하였다.1) 관계자는 갤러리를 직접 안내해주겠다는 답변을 보내왔다.ACE group에서 두 명의 직원이 안내한 갤러리는 이주노동자가 싱가포르에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이들이 노동 이외에도 싱가포르 사회를 위해서 어떠한 기여를 하고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주노동자의 중요성은 싱가포르가 자부심을 느끼는 공공주택과 대중교통 체계를 건설한 그들의 노동력에서 나온다. 이주노동자들은 좋은 고용주와 팀 덕분에 싱가포르에서 일하는 것이 즐겁고, 컴퓨터나 의사소통 방식과 같은 특정한 기술을 배웠으며, 열심히 일한 만큼 보상을 받아서 가족들을 잘 돌볼 수 있고, 정부가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이주노동자들을 도와주어서 감사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고용주들은 기대 이상을 충족시키는 이주노동자들의 헌신과 기여를 강조하고 감사를 표하며 그들의 절대적 필요성을 언급했다. 이상은 전시장 밖에서도 흔하게 반복되고 있는 공통적인 서사로 분명 사실이다. 내가 만났던 방글라데시 노동자(건설업 10년 종사)는 싱가포르를 무척 좋아하며 생활에도 만족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이주노동자 본인이 맡은 일만 잘 한다면 고용주가 좋아하고 문제도 없을 것이라고 부연했다. 또 다른 방글라데시 노동자(건설업 15~16년 종사) 역시 자신의 능력과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월급이 올랐다면서, 싱가포르에서는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인도네시아 출신의 가사노동자(15년 종사)는 고용주 부부가 옆에 있어도 어려움을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관계가 원활한 편이다. 음악교사인 여성 고용주가 피아노 반주를 하고 본인이 노래를 부르는 등 취미생활도 함께 한다. 아플 때는 의사인 남성 고용주의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는다. 이주노동자가 취약할 수밖에 없는 1차진료에 대한 접근성이 의사인 고용주를 만나면서 쉽게 해결된 것이다. 다만, 내가 만났던 이주노동자들은 전시에서 보여주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었다. 이들은 본인이 열심히 하기도 했지만 반드시 운이 좋아야 한다 고 덧붙였다. 고용주가 채용, 의료보험, 거주지 등을 이주노동자에게 제공해야 하는 환경에서 기꺼이 법과 규정을 준수하고 호의를 베푸는 좋은 고용주를 만나는 운이 필요한 것이다. 그 운을 가지지 못한 이주노동자들은 고용주에게 계약 내용을 사기당하고, 월급을 받지 못하는 등의 문제를 가지고 시민사회단체를 찾는다. 갤러리에 전시된 이주노동자의 이야기는 이면의 또 다른 지점에 침묵하는 절반의 사실만을 담고 있었다. 코로나19로 인해 기숙사에만 머물러야 했던 이주노동자가 경험한 어려움은 공식적인 이야기 이면에 가려진 절반의 사실 중 하나이다. 싱가포르에서 19년 동안 건설업에 종사했던 방글라데시 남성은 작년 10월 페이스북에서 정부의 코로나19 대응을 비판하며 기숙사를 경찰이 포위했다고 주장하고 이주노동자를 노동 노예들 로 표현했다.2) 정부는 방글라데시 남성의 허위 정보 전달과 도발적인 표현을 비판하며 올해 6월 취업허가 비자 갱신을 승인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고용주와 이주노동자가 조화로운 관계를 맺고 있다는 공식 담론에 포함되어 전시될 수 없다. 오히려 전시는 운동과 예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긍정적인 이주노동자를 재현하며 이들도 싱가포르인과 같은 열망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 전시 구성은 코로나19에 대한 대응이 이러한 인식하에서 이주노동자를 전적으로 지원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보여주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코로나19 확진자에 대한 병원비 지원, 기숙사의 청결한 환경 유지를 위한 노력, 고립된 이주노동자의 정신건강을 위한 프로그램 등은 정부의 대응을 홍보하는 차원에서 상기되었다. 동시에, 이러한 지원이 인력부뿐만 아니라 시민사회단체, 기숙사 운영자, 고용주, 이주노동자도 참여하는 자원봉사자 네트워크와의 협력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강조했다. 전시는 어떤 갈등도 없는 화합의 세계 속에서 이주노동자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었다. 전시 관람객들은 아름다운 싱가포르를 건설해준 이주노동자에게 감사하고, 이들에게 싱가포르가 제2의 고향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소감을 메모로 남겼다. 내가 싱가포르에 도착한 8월 9일은 국경일 기념행사가 한창이었다. 싱가포르 곳곳에 나부낀 Stronger Together, Majulah(전진하라)! 라는 올해의 국경일 슬로건은 함께 더 강해지자는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있었다. 체류하는 기간 동안 내내 국경일을 기념하는 크고 작은 행사가 이어졌다. 이 행사에는 이주노동자들도 참여해 싱가포르의 국경일을 유쾌하게 축하했다. 함께 , 제2의 고향 , 기여에 대한 감사 , 이주노동자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 , 같은 열망을 가진 사람 과 같은 표현은 아름답게 국경일 행사장과 갤러리를 부유하고 있었다. 마치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시민사회단체의 지형도와 협소한 옹호활동의 공간내가 만났던 한 활동가는 싱가포르에서 이주노동자를 지원하는 시민사회단체를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이 세 가지 유형이 명확하게 분류되지는 않지만, 현지 활동가의 관점에서 싱가포르 시민사회를 이해하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주목할만 하다.첫째, 정부가 설립하거나 운영에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단체가 있다. 이주노동자센터(Migrant Workers Center, 이하 MWC), 사회적 지지와 훈련을 위한 가사노동자 협회(Foreign Domestic Worker Association for Social Support and Training, 이하 FAST), 가사노동자센터(The Center for Domestic Employees, 이하 CDE)가 여기에 속한다. FAST는 인력부의 지원을 받아 2005년에 설립된 단체로 가사노동자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 운영, 상담 및 법률지원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CDE는 2016년 싱가포르전국노동조합의회(National Trades Union Congress, 이하 NTUC)가 만든 단체로, 싱가포르에 입국한 모든 가사노동자는 인력부의 지침에 따라 몇 달 동안 이곳에서 진행하는 인터뷰에 참여해야 한다. NTUC는 싱가포르에서 유일한 노동조합이지만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MWC는 NTUC와 싱가포르고용주연합(Singapore National Employers Federation)이 함께 2009년에 설립한 단체로 법률지원, 음식 나눔, 상담을 진행하며 인력부에서 의무화하는 이주노동자정착프로그램(Foreign Worker Settling-in Programme) 운영을 주관한다. 활동가는 이러한 단체들을 통해 싱가포르 시민사회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효과가 발생한다고 꼬집었다. 활동가는 실제로 정부가 설립했든, 노동조합이 만들었든 이들을 포괄적으로 정부로 판단하고 분류하는 것으로 보인다. 몇몇 이주노동자들도 전술한 단체의 설립과 운영 주체에 대한 세부적인 구분 없이 일괄적으로 정부와 관계있는 단체로 인지하곤 했다. 둘째, 자발적인 복지단체(Voluntary Welfare Organization)가 있다. 2020년에 조직된 이주노동자 코로나 지원 연합(COVID Migration Support Coalition)과 이주민상호지원(Migrant Mutual Aid SG), 2015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비오는날의우비(It s Raining Raincoats), 의사들의 네트워크인 나의 싱가포르 형제(My Brother SG) 등 전업이 아닌 자원봉사자 기반의 활동을 이어가는 단체가 많다. 이러한 단체는 자선의 관점에서 활동하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활동가는 이들이 이주노동자를 도와주지만 옹호하지 않는, 예를 들어 말하자면 빈곤한 사람들을 돕지만 빈곤 그 자체는 절대 비판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활동의 면면을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발언이다. 관람차인 싱가포르 플라이어(Singapore Flyer) 투어 프로그램을 제공하거나 무료로 시력검사를 하고 안경을 맞춰주는 활동은 그 자체가 의미는 있지만 본질적인 문제와는 다소 동떨어져 있다. 그런데 이러한 분류도 명확하게 나누어지지는 않는다. 이주민상호지원과 같은 단체는 자선이 아니라 연대를(Solidarity not Charity) 이라는 슬로건을 전면에 내세우며 싱가포르인으로부터 이주노동자에게 자원을 재분배하는 플랫폼을 표방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자선단체와는 다르다. 이들은 긴급한 지원이 필요한 이주노동자를 위해 기금을 조성하는 동시에 이주노동자의 월급을 조사하고, 이주노동자 사망지도(Migrant Death Map in Singapore)를 제작하는 등 옹호단체와 유사한 활동을 수행하고 있기도 하다. 2006년 의사들이 설립한 헬스서브(HealthServe)는 이주노동자에게 의료서비스를 저렴하게 제공하는 클리닉을 운영하며 코로나19 당시 정부와 많은 지원 활동을 함께 했다. 2021년 인력부로부터 인력부의 소중한 파트너상(MOM s Valued Partner Award) 을 받아 그 협력의 긴밀함을 가늠할 수 있다. 셋째,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옹호활동 단체로, 현지의 활동가는 이들을 전술한 두 가지 분류와 차별화된 진정한 NGO로 명명했다. 활동가가 NGO의 진정성을 옹호활동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옹호활동은 정책비판과 개선방안 제시, 연구 및 출판을 통한 대중의 인식변화를 포괄한다. 이주경제학을 위한 인도주의적 단체(Humanitarian Organization for Migration Economics, 이하 HOME), Transient Workers Count Too(이하 TWC2)가 여기에 해당된다. 내가 인터뷰를 할 수 있는 단체도 이들이었다. TWC2의 활동가는 싱가포르에서 NGO가 정부를 비판하기란 매우 어렵지만, 문제가 있는 정책이 개선되지 못할 때 그것을 지적하고는 한다. 이 단체도 직접적인 서비스를 이주노동자의 필요에 따라서 제공하는 활동을 한다. 아주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는 무료 식사 지원과 산업재해와 월급과 관련된 법률 자문이 대표적인 서비스 제공 활동이다.TWC2는 이주노동자 의료보험제도의 개선도 필요하지만 받을 수 있는 보상을 제대로 받는 방향에 초점을 맞추어 활동하고 있다. 활동가는 건강권이 전반적인 권리와 연결되어 있다면서 고용주가 노동자에 관한 다양한 책임을 떠맡은 상황에서는 의료접근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특히 회사 규모가 작은 고용주의 경우 의료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에 분쟁이 발생할 때 정부는 사기업의 일이니 간섭하지 않는다는 기조를 유지하며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한 발 뒤로 물러나 있다. 리틀 인디아 로웰로드의 법률상담을 참관하면서 갑자기 취업허가 비자가 중단되어 버린 이주노동자를 만난 적이 있다. 1996년부터 싱가포르에서 일한 방글라데시 노동자는 회사가 이름을 변경하고 몇몇 노동자만 새로운 회사에 채용하는 과정에서 갑작스럽게 해고를 당하고 4개월 동안 월급이 밀렸다고 도움을 요청했다. TWC2의 자원봉사자는 이러한 회사는 규모도 작고 운영이 문제적이라며 인력부에게 먼저 알리고 중재를 받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렇지만 인력부는 고용주가 체불임금을 지급할 돈이 없다고 하면 법정으로 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태도로 일관해 노동자가 월급을 받아내기란 쉽지 않다. 이주노동자는 고용주가 중국인이기 때문에 정부가 중국인 편을 들 것이라며 중재 결과를 비관했다. 그래서 인력부가 아니라 시민사회단체를 먼저 찾은 것이다.활동가는 정부가 의료와 교육과 같은 필수적인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주노동자를 예외로 하는 것은 문제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TWC2는 이주노동자 정책의 미비점을 지적하고 개선방안을 제시하는 활동을 중점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그렇지만 사회적 진보보다는 경제적인 번영을 중시하는 정부와 이에 동의하는 분위기 속에서 이주노동자의 권리가 주장되기는 어렵고 정부와 단체 사이의 대화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차원에서는 인력부의 ACE group과 협업할 때도 있지만, 정책을 논할 때는 정부와의 직접적인 소통이 매우 제한적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HOME의 활동가도 집회와 표현의 자유가 제한된 싱가포르에서 시민사회단체가 목소리를 내기가 어렵다고 토로했다. 정책에 대한 열린 토론은 불가능하며, 간단한 글을 온라인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정부에게 경고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터뷰 하루 전, 이주노동자가 오물로 가득 찬 하수구에서 열악하게 일하는 사진을 SNS에 올리며 노동환경을 지적했다가 정부로부터 연락을 받기도 했다. 때로는 특정 게시글을 내리라는 직접적인 요구도 이어진다. 취업허가 비자 갱신이 이루어지지 않은 방글라데시 노동자에 대해서 정부에 서신을 보내 문제를 제기했지만, 정부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의견만을 반복했다. 정부의 힘이 강한 싱가포르에서 NGO가 운신할 수 있는 폭은 그렇게 크지 않으며. 국제적인 NGO의 영향력도 매우 제한적이라고 활동가는 지적했다.HOME의 활동가는 싱가포르의 교육시스템에서 열심히 하면 성공한다 는 생각이 강한 것도 옹호활동을 어렵게 하는 배경으로 꼽는다.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모든 사람들이 괜찮은 수준의 일자리와 생활수준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게 만드는 요인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들의 관점을 바꾸는 것이 중요한 옹호활동의 목적이라고 활동가는 강조했다. 동시에, 대부분의 활동이 자선을 기반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에도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며, 스스로를 좋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부와 자원을 재분배해야 한다는 공감대 형성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HOME의 활동가는 이러한 생각이 조금씩 만들어지고 있다면서 낙관적인 태도를 잃지 않으려 했다. TWC2의 활동가도 어려운 상황이지만 5~8년 전에 단체가 제안했던 정책 개선방안을 정부가 채택하기도 하는 등의 성과도 있어서 발전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예를 들어, 월급을 현금이 아니라 계좌이체로 지급하자는 주장을 오랫동안 해왔고 2020년에 비로소 받아들여진 것이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조금씩 변화해가고 있다는 믿음으로 활동가들은 협소한 옹호활동의 공간에서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이주노동자 단체의 활동: 임파워먼트, 기여, 그리고 제한된 저항의 내러티브싱가포르에는 다양한 이주노동자 단체가 활동하고 있다. 이주노동자를 위해 활동하는 사람들은 싱가포르인들뿐만 아니라 이주노동자 당사자이기도 한 것이다. 이번 방문에서는 이주노동자밴드(Migrant Band in Singapore), 24 asia, 인도네시아가족네트워크(Indonesian Family Network in Singapore, 이하 IFN)에서 활동을 해온 이주노동자를 만났다. 방글라데시 노동자로 구성된 이주노동자밴드는 주말마다 모여서 방글라데시 노래를 연습하고 공식적인 행사에 초청받아 공연을 하기도 한다. 내가 방문했던 기간 동안 이루어진 국경일 기념행사와 시민사회단체의 자선행사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24 asia는 영주권 소지자인 방글라데시 남성이 2018년에 설립했다. 24 asia는 방글라데시에서 온 이주노동자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고 교육과 기술 수준을 높이는 임파워먼트(empowerment)를 위해 활동한다. 인도네시아가족네트워크에서도 유사하게 춤, 합창, 공예, 영어, 컴퓨터 등을 가르치는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이주노동자들이 본국으로 돌아가 창업하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다.개인의 기술과 역량을 향상시켜 보다 높은 월급을 받고 미래를 대비한다는 관점은 이주노동자 단체의 교육 프로그램에 투영되어 있다. 24 asia의 대표는 교육 프로그램이 이주노동자의 정신건강을 돕고 직장에서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학위를 취득해 취업허가 비자에서 S Pass 비자로 전환한 이주노동자의 월급이 4배 가까이 올랐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대표는 싱가포르인들은 많은 것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배우기 때문에 업무의 질과 생산력이 분명히 다르다 면서 현지인과 이주노동자 사이의 월급 차이를 자연스럽다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개인의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이러한 배경에서 가능하다.이주노동자 단체는 시민사회단체와도 관계를 맺으며 활동한다. TWC2는 이주노동자 단체의 활동을 여러모로 돕는다. 이주노동자밴드가 연습을 할 수 있도록 로웰로드에 위치한 TWC2의 활동 공간을 내어주거나 금전적인 지원을 하기도 한다. 이주노동자밴드는 TWC2로부터 악기 구입 등에 필요한 돈을 지원받은 적이 있고, IFN도 지원 받은 연간 활동 예산에 대한 정산 보고서를 TWC2에 제출하고 있다. 시민사회단체는 이주노동자 단체의 활동을 후방에서 지원하며, 이주노동자 단체는 필요한 도움의 종류에 따라 적절한 시민사회단체와 협력한다. IFN의 대표는 시민사회단체가 이주노동자를 위해 일하고 있다고 생각할 뿐, 이들 사이의 지향과 방향성 차이를 인지하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가사노동자를 인터뷰하고 정기적으로 일터인 집을 방문하여 문제가 있는지 직접 확인하는 CDE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이들이 가사노동자의 편에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일상적 지원활동은 싱가포르 정부가 인도네시아 정부보다 가사노동자들을 더욱 신경 쓰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개인의 역량을 높이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해서 이주노동자가 경험하는 문제를 개인의 측면으로만 국한하지는 않는다. IFN은 불공정한 정책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내면서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 정부 모두를 비판한다. 인도네시아 대사관이 가사노동자를 위한 쉼터를 운영하고 있지만 실제로 문제가 발생할 경우 필요한 도움을 주고 있지 못한다는 점, 은행이나 보험회사가 대사관 직원과 함께 가사노동자를 찾아 불필요한 금융 및 보험 상품 구매를 유도하는 점 등을 문제로 지적한다. IFN은 이러한 문제를 정리해 인도네시아 대사관에 메일을 보내기도 한다. IFN의 입장에서 메일 발송은 다른 단체가 거의 시도하지 않는 적극적인 옹호활동이다. 주로 TWC2와 함께 공공기관에 문제와 해결을 요구하는 메일을 발송하며, 가사노동자의 자유로운 결혼과 임신에 대한 건의, 이주노동자의 의료비를 부담하지 않는 고용주 비판 등의 내용으로 구성된다. IFN의 대표는 시위를 할 수 없는 싱가포르에서 인력부가 그나마 자신들의 의견을 청취하려 한다는 점에서 발전이 있다고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24 asia도 이주노동자에게 법적인 문제가 발생했을 때 TWC2에 도움을 요청하지만, 이주노동자 단체가 언제나 도움을 받기만 하지는 않는다. IFN과 24 asia가 참여하는 이주노동자혈액 기부 활동은 스스로를 싱가포르 사회에 또 다른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위치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IFN의 대표는 3개월에 한 번 씩 싱가포르인들에게 혈액을 기부함으로써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는 감각을 느낀다고 말했다. 싱가포르 저소득층에게 무료로 식사를 나누어주는 봉사활동에도 참여하는 IFN은 다른 단체와 협업을 통해서 이러한 일들을 지속하고 있다. 24 asia는 해안가에서 플라스틱 쓰레기를 줍는 협력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이주노동자들이 싱가포르를 두 번째 고향으로 느낄 수 있게 한다. 싱가포르 사회에 대한 기여는 이주노동자가 다른 단체와의 협력을 통해 가질 수 있는 또 다른 감각인 동시에, 자신들이 경험하는 문제를 당당하게 비판하고 개선방안을 요구하는 근거가 된다. 교육을 강조하는 24 asia는 싱가포르 정부에게 이주노동자를 위한 교육펀드 조성방안을 제안한 바 있다. 싱가포르인의 직업능력을 강화하는 미래 기술(Skill Future) 프로그램을 이주노동자의 미래 기술(Skill Future Migrant Workers) 이라는 이름으로 이주노동자에게도 제공할 것을 요청한 것이다. 고용주가 고용하는 이주노동자 한 명당 월별 납부해야 하는 고용분담금(levy)을 이주노동자가 학위를 취득하는 데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 제안의 골자였다. 예를 들어, 학위취득에 필요한 비용을 인력부에서 50%, 고용주가 30%, 이주노동자가 20%를 공동으로 지불할 수 있는 펀드를 조성하는 것이다. 24 asia 대표는 고용분담금이 정부의 이익으로만 남아 있을 뿐, 어떻게 사용되는지 알 수 없다면서 고용주가 이주노동자 고용에 따라 납부하는 세금인 고용분담금을 이주노동자를 위해 사용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동안 24 asia는 이주노동자의 휴식공간인 레크레이션 센터에서 인력부의 협력 하에 프로그램을 제공하면서 인력부와 좋은 관계를 맺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인력부에 고용분담금을 활용하는 방안을 제안할 수 있었다. 트럭 짐칸에 이주노동자를 태우는 통근 교통수단인 로리(lorry)의 위험성 때문에 이를 버스로 바꾸자는 제안도 인력부에게 하고 있다. 한 번에 로리를 버스로 바꿀 수 없다면 30%는 버스, 70%는 로리를 이용하고 점진적으로 늘려가는 방안도 제안했다. 싱가포르에서 이주노동자는 정부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기 위해서 매우 세심한 전략을 펼쳐야 한다. 그 세심한 전략은 전술했던 취업허가 비자 갱신이 취소된 방글라데시 남성 노동자가 선택했던 SNS에서의 과격한 비판과는 거리가 있다. 그는 이주노동자 사이에서 사려 깊고 활동적인 사람으로 기억되는 동시에 제한선을 넘어선(beyond the limit) 사람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제한선 은 정부 비판이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는 기준점에서 작동된다. 제한선을 넘어섰다는 의미는 그가 사실이 아닌 발언을 온라인상에 유포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라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사실에 근거해서 이야기하며, 추정에 의해서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여기에서 사실은 직접 본 것과 경험한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을 이야기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은 안전하게 제한선 안에 위치한다. 이러한 제한선은 일견 합리적이지만 정부의 공식 입장처럼 이주노동자 기숙사를 노동 캠프 로 이주노동자를 노동 노예 로 지칭한 그의 표현을 모두 거짓으로 치부하는 것이3) 적절한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이주노동자의 건강과 의료보장을 둘러싼 다른 입장들내가 만났던 이주노동자는 아직 심각한 건강상의 문제를 경험해보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고용주가 제공하는 의료보장의 불충분함을 인지하지 않았다.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은 고용주에게만 책임을 지우는 의료보장의 문제를 인지하고 있지만, 제도적으로 큰 변화를 고민하고 있지는 않았다. 기존의 제도가 제공하는 의료보장을 이주노동자가 잘 받을 수 있도록 하거나, 정부가 보조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생각이 활동가들의 주된 의견이었다. 또 다른 생각도 있었다. 영주권을 획득하고 이주노동자 단체를 설립한 방글라데시 남성은 고용주가 가입한 보험이 보장하지 못하는 의료비가 있지만, 정부가 고용주에게 포괄적인 보험 제공을 강제한다면 그 비용이 오히려 소비자에게 전가될 것이라고 염려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지금도 비싼 집값이 이주노동자의 임금을 올려줌으로써 더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현지인의 입장과 비슷했다.곧 영국 유학을 앞둔 TWC2의 인턴인 20대 싱가포르인은 싱가포르가 아름답다는 나의 말에 이주노동자의 노예화된 노동(slaved labor)에 의해 건설된 나라 라고 시니컬하게 대답했다. 그는 이주노동자의 쉼터인 레크레이션 센터가 싱가포르인들이 이용하는 커뮤니티 센터와 달리 수익의 관점에서 운영을 고민한다는 점을 비판할 정도로 이주노동자의 삶의 질에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주노동자의 임금 인상에 대해서는 복잡한 문제라고 선을 그었다. 이윤 창출을 목표로 하는 회사가 이주노동자의 임금을 인상해야 한다면 그 비용을 소비자에게 전가할 것이라는 우려였다. 그러면서 이주노동자의 임금이 낮고 싱가포르의 물가가 비싸기는 하지만 고용주가 식사와 주거를 모두 이들에게 제공하기 때문에 이주노동자가 직접 지불하는 생활비가 많지 않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정작 SGD1012(한화 약 100만원)를 월급으로 받는 방글라데시 노동자(건설업 9년 종사)는 월급이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높은 에이전시 비용도 낮은 월급에 불만을 가지게 만드는 구조적 요인 중 하나다. 의료보험도 싱가포르인들과 비교하면 이주노동자에 대한 보장이 나쁜 편이지만, 중동이나 말레이시와 비교하면 훨씬 낫다는 의견을 펼치기도 했다. 정부가 의료자원의 많은 부분을 이주노동자에게 제공한 코로나19의 경험이 이러한 인식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싱가포르 정부는 어떤 나라보다도 더 많은 지원을 이주노동자에게 제공했다 는 이야기나 기숙사에 이주노동자를 고립시킨 것은 좋은 점과 나쁜 점 모두를 가지고 있다. 좋은 면은 그들이 코로나19로부터 안전해졌다는 것이고, 나쁜 점은 일을 할 수 없고 자유롭게 다니기도 어려웠다는 것이다 는 의견이 그렇다. 이주노동자의 출신 국가와 비교했을 때 싱가포르의 의료시스템은 보다 선진적인 것으로 여겨진다는 점도 이러한 인식을 뒷받침한다. 인도네시아는 싱가포르에 체류하는 이주노동자에게 아무런 의료보험을 지원하지 않고, 오히려 사보험 회사를 통해 상품을 판매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인다. 반면, 싱가포르 정부는 적어도 고용주를 통해 의료보험을 제공하도록 한다. 이러한 대조는 싱가포르의 상황을 상대적으로 우위에 배치하는 효과를 만든다. 이번 방문에서 만나지 못한 의료분야 시민사회단체인 헬스서브를 통해 이주노동자 건강, 의료보험, 의료지원활동, 건강권 옹호활동의 면면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주노동자 단체를 통해서도 이러한 부분을 탐색할 수 있을 것이다.함께 한 저녁 식사를 기억하며8월 17일 수요일 저녁 9시 인적이 드문 공원에 앉아 인도네시아와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을 기다렸다. 인도네시아에서 온 리사(가명)는 2007년부터 싱가포르에서 가사노동자로 일했다. 리사는 남편과 이혼하고 혼자 딸을 키우고 있다. 방글라데시 출신인 피르자다(가명)는 2015년 싱가포르에 왔다. 피르자다는 작년에 결혼해 몇 주 전에 딸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피르자다가 리사를 소개해주어 함께 아랍스트리트를 거닐고, 인도네시아식 아침을 먹고, 보타닉 가든을 산책했다. 피르자다는 이주노동자밴드를 따라다니다 알게 되었다. 리사는 피르자다와 함께 저녁을 먹자고 제안했다. 식사는 모두 리사가 준비했다. 마침 리사의 고용주가 호주여행으로 장기간 집을 비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피르자다는 일을 끝내자마자 공원을 찾았고, 양손에 먹을거리를 잔뜩 들고 온 리사도 늦지 않게 합류했다. 공원은 고요했다. 리사는 힌두교도인 피르자다가 먹을 수 있는 음식과 한국인인 내가 좋아할 치킨김밥을 고추장과 함께 준비해왔다. 이슬람 신자인 리사 본인이 먹을 음식도 가져왔다. 김밥은 놀라울 정도로 한국적인 맛이었는데, 리사는 구글에서 레시피를 검색해 만들었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고용주는 내게 어떤 음식이 먹고 싶다고만 말하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가르쳐주지 않아. 언제나 구글 검색을 통해 음식을 만들고는 해. 우리는 모두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었고, 리사와 피르자다는 싱가포르에서 영어를 배워 억양이 매우 독특했다.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단어와 표현들이 있었지만, 짧은 문장들과 현란한 손짓으로 어떻게든 의미를 교환했다. 대화의 주제도 다양했다. 리사는 피르자다에게는 방글라데시의 결혼과 이혼제도를, 나에게는 한국 페이스북의 검열 여부를 물었다. 피르자다는 열심히 방글라데시 제도를 옹호하고 종교의 다양성을 포용하려는 그의 노력을 설명했다. 싱가포르의 인적이 드문 동네 공원에서 인도네시아, 방글라데시, 한국에서 온 낯선 이들이 함께 각양각색의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날의 분위기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어쩌면 그날의 기억이 앞으로 나를 싱가포르로 이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어렴풋이 들었다. 이 사람들이 싱가포르에서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앞으로의 연구를 해보려 한다.기꺼이 나를 만나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내어준 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전한다.* 각주1) Ng, Jun Sen. 2021. MOM s ACE Group to become permanent division to ensure govt presence in migrant worker dorms. 26 September. https://www.todayonline.com/singapore/forward-deployed-moms-ace-group-become-permanent-division-ensure-govt-presence-worker (검색일: 2022.9.2.)2) Vochelet, Robin. 2022. Who Gets to Speak for Migrant Workers in Singapore? 13 July. https://thediplomat.com/2022/07/who-gets-to-speak-for-migrant-workers-in-singapore/ (검색일: 2022.9.2.)3) Ministry of Manpower. 2022. MOM statement in response to media queries on the non-renewal of Mr Zakir Hossain s work permit. 22 June. https://www.mom.gov.sg/newsroom/press-replies/2022/0622-in-response-to-media-queries-mom-statement-on-non-renewal (검색일: 2022.9.14.) [20] 동남아언어캠프 3년을 돌아보며 새로운 도전을 계획한다 ㅣ 김다혜·김현경·전제성 작성자 동남아연구소 조회수 987 첨부파일 0 등록일 2022.07.20 초록전북대와 부산외대가 함께하는 동남아언어캠프는 2019년 여름에 시작되어 3년간 다섯 차례 개최되었다. 방학 중에 2주간 진행되는 언어캠프는 코로나19 대유행도 대면수업으로 돌파하였다. 다섯 동남아언어(베트남어, 말레이인도네시아어, 태국어, 미얀마어, 캄보디아어)에 더하여 아랍어와 터키어도 가르쳤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32개 대학의 학부생, 대학원생, 학자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의 활동가, 변호사, 기자 등 총 301명이 수강하였다. 캠프에 대해 많은 분들이 관심과 성원을 보내주고 있고, 요즘 들어 상세한 소개 요청이 많이 접수되고 있다. 이제 지난 3년을 정리하고 검토할 때가 된 것이다. 이 글은 캠프의 창설 배경, 과정, 추진 성과 및 과제에 관한 것으로, 캠프를 함께 만든 이들이 3주년을 자축하고 다음 3년의 도약을 준비하기 위해 작성되었다.이슈페이퍼 20호 내려받기전동연의 스무 번째 이슈페이퍼가 발행되었습니다. 2019년 여름에 시작된 동남아언어캠프 4년차를 맞아 발행하는 이번 이슈페이퍼는 캠프의 창설부터 지금까지 함께 캠프를 위해 일해 온 김다혜, 김현경 연구보조원과 전제성 소장이 캠프의 창설 배경부터 창설 과정, 3년간의 운영 과정, 그리고 그에 따른 추진 성과들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과제에 대한 이야기들을 담았습니다. 요즘 많은 관심과 성원을 접하면서 우리는 이 캠프의 어떤 점이 이목을 끄는 것일까 되묻게 된다. 우리 캠프가 비좁고 이기적인 경계를 넘어 연대할 때 우리 모두가 누리고 나눌 수 있는 가능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영남과 호남의 대학이 울타리를 넘어 상이한 사업과 재원을 연계시키면서 동남아지역학 진흥과 후속세대 육성이라는 대의를 위해 연대하였다. 우리의 연대는 두 대학만을 위하지 않고 전국 모든 대학의 학생과 학자들과 동남아를 사랑하는 시민들에게 개방하고 공유하는 고등교육 혁신을 추구한다. 우리들의 구호처럼, 전부 함께 동남아로 가자! 고 외치면서. [19] 인도네시아 노동운동과 복지의 정치: 현지의 노동 전문 연구자 인터뷰 ㅣ 프란시스쿠스 조요아디수마르타·전제성 작성자 동남아연구소 조회수 1178 첨부파일 1 등록일 2022.04.28 초록2010년대 인도네시아의 노동계급은 복지 발전을 위한 역사적 행위자 역할을 수행하였다. 노동운동은 계급적 동원과 광범한 연대를 통해 보편적 건강보장제도의 출범을 요구하고 실현하는데 공헌하였다. 이런 복지 개혁의 노동 정치에 관하여 현지의 노동연구 전문가 프란시스쿠스 조요아디수마르타의 견해를 이메일과 줌 미팅을 활용하여 들어보았다. 그는 개념적으로 익숙하지 않았던 보편적 건강보장과 사회보장에 관하여 전개된 노동운동 내부의 논쟁을 소개하고, 이렇게 상이한 이념적 배경에 기반을 둔 담론 경쟁과 상호 작용이 사회보장관리공단법의 제정에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여전히 많은 개선이 필요하지만 이 법의 제정과 공단의 출범으로 노동자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들에게 보편적인 의료서비스가 제공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성취는 메이데이를 맞이하며 우리가 들어볼만한 노동계급의 성공 스토리 중에 하나라 할 수 있다. 이는 또한 민주주의가 민중들에게 실질적인 이득을 제공하고 있다는 인도네시아발 좋은 뉴스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이슈페이퍼 19호 원문 내려받기인터뷰의 구상과 과정전제성: 중간 소득 지대에 머무는 인도네시아에서도 복지제도가 발전하고 있다. 국가사회보장제도법과 사회보장관리공단법의 제정, 이에 근거한 공단들의 설립은 복지 개 혁과 전진의 징표이다. 특히 2014년 전국민 대상의 건강사회보장관리공단의 설립은 세계 최대 군도국가이자 제4위 인구대국 인도네시아에서 보편적 건강보장(UHC: Universal Health Coverage)을 향한 본격적인 항해를 출범시킨 역사적 사건이었다. 더구나 세계 최대 단일 보험자 건강보험의 형성이라는 거대한 계획(브릿넬 2016)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노동운동이 계급적 동원과 초계급적 연대를 통해 국회와 정부를 상향식으로 압박함으로써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점이 돋보인다. 복지 개혁 정치의 선봉에 섰던 인도네시아 노동운동 이야기를 현지의 전문가 인터뷰 형식으로 국제노동절(May Day)을 기념하여 공유하고자 한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프란시스쿠스 조요아디수마르타(Fransiscus S. Joyoadisumarta, 개명 이전은 FX Supiarso) 박사는 인도네시아 현지의 노동운동 전문연구자이자 사회복지학 박사다. 국립인도네시아대학교(Universitas Indonesia) 사회복지학과에서 학사, 석사(고용 안전 보건연구)학위를 받고, 보르네오섬 서부칼리만탄의 팜유 경작자들의 노동과 복지 상황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Media Sumutku 2019.06.09). 그는 아동노동 관련 단체 근무를 시작으로 1990년대 중반부터 국내외 여러 노동 인권 단체에서 일하며 노동현장과 노동운동을 오랫동안 관찰해 왔다. 2005년부터 2010년까지 국제공공부문노동조합연맹 아시아태평 양지부(Public Service International-Asia Pacific)의 프로젝트담당관으로 근무하였고 당시 관여한 인도네시아 공공부문노동조합연맹의 탄생 과정을 한국에 소개하기도 했다(수삐아르소 2011). 지금은 자카르타의 조사연구자문기관 시너지폴리시스(Synergy Policies)의 연구원으로 재직하며 노동 현장과 운동에 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우리의 인연은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부자바 현지조사 중에 들렀던 독립노동조합연합(GSBI: Gabungan Serikat Buruh Independen) 사무실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필자는 1998년부터 알고지낸 위원장을 면담하러 갔고 그는 미국 노동권컨소시움(Workers Rights Consortium)의 조사관으로 방문하고 있었다. 이 노조연합의 위원장은 한인이 소유한 신발공장과 봉제공장의 지부들이 분쟁 중인데 경영자들이 만나주지 않아 협상을 진행하기 어렵다는 불만을 토로했다. 프란시스쿠스는 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업체들(OEM: Original Equipment Manufacturer)의 노동문제에 관심과 압력을 가하는 미국과 유럽의 소비자운동단체들이 자신과 같은 현지 조사관을 고용하여 노동인권 실태를 상시 모니터링하는 활동 수준에 달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필자는 노사분규 중인 두 기업의 한인 공장장에게 노동자들의 불만과 요구를 전달하고 대화와 협상 없는 교착상태의 위험성도 이야기했다. 이런 계기로 프란시스쿠스와 친분이 생겼고 그로부터 지금까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인도네시아 노동 실태와 운동에 관해 의견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인도네시아 사회보장 개혁과 노동운동의 공헌에 관한 인터뷰는 2019년 9월 6일 금요일 점심 때 자카르타의 빠당음식점에서 시작되었다(사진 1). 이 사안이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필자도 인도네시아에서 2004년에 메가와티 대통령이 임기 마지막날 국가사회보장법을 인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전제성 2007), 사회보장제도의 실행을 담당할 사회보장관리공단에 관한 법 제정이 지체되자 노동자들이 2011년 메이데이 때 보건과 연금 문제를 중심 의제로 삼는 대규모 시위를 전개했다는 소식을 한국에 전한 바 있다(전제성 2011). 당시 복지 개혁의 설계 과정에 관하여 복지 정치 전문가의 논문을 필자가 편집하는 저널 특집호에 투고받아 한글로 번역 수록한 적도 있다(디나 위스누 2011). 사회보장연대행동을 주도한 활동가 수리야 짠드라로부터 무용담을 들었었고 그런 내용을 소상하게 정리한 그의 논문도 읽었다(Surya Tjandar 2014). 보편적 건강보장 제도를 출범시키는데 노동운동과 시민사회의 기여가 컸다는 학술적인 연구 논문들도 에드워드 아스피날(Edward Aspinall 2014), 정은숙(Eunsook Jung 2016)과 앤드류 로서(Andrew Rosser 2017)같은 부지런한 인도네시아연구자들이 이미 발표한 바 있다. 그런데 프란시스쿠스가 들려준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거나 생각해보지 않았던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추가 인터뷰를 통해 좀 더 정리된 방식으로 그의 견해를 들을 필요를 느꼈고, 작년에 두 번에 걸쳐 이메일로 인도네시아어 질의 응답을 주고받았다. 필자의 질문에 대한 답신을 2021년 8월 20일에 받았고 추가 질문을 보내 8월 27일에 추가 답신도 받았다. 필자는 지난 인터뷰 내용을 한글로 초역한 뒤에 줌 회의(Zoom meeting)를 활용한 화상 인터뷰를 2022년 4월 18일 오후에 진행했다. 이렇게 네 차례 진행된 인터뷰를 조립하고 간추린 결과가 이번 이슈페이퍼의 중심 내용이다.인터뷰 주요 내용 전제성(이하 전): 인도네시아에서 국민건강보험 제도의 형성에 노동운동의 기여가 컸다는 주장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프란시스쿠스 조요아디수마르타(이하 프): 인도네시아의 노동운동은 인도네시아의 보편적 건강보장 제도의 발전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노동운동은 모든 국민에게 예외 없이 건강보험을 제공한다는 국민건강보험(JKN: Jaminan Kesehatan Nasional) 제도의 형성에 있어 매우 중요한 공헌을 했습니다. 국민건강보험은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Megawati Sukarnoputri) 대통령 집권 말기에 제정된 국가사회보장제도(Sistem Jaminan Sosial Nasional)에 관한 2004년 제40호 법(이하 SJSN법)에 이미 명시되었습니다. 이 법에 따르면 시행 이후 늦어도 5년 이내에 사회보장관리공단(Badan Penyelenggara Jaminan Sosial, 이하 BPJS)을 구성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니까 차기 정권인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Susilo Bambang Yudhoyono) 정부가 이 공단을 2009년까지 설립해야 한다는 뜻이었지요. 그런데 공단 설립이 (법적 시한을 넘기며: 역자) 계속 지체되자 노동운동은 SJSN법의 구현을 위해 시위를 전개하고 정책을 제안하고 초계급적 연대를 형성하며 유도요노 정권에게 압력을 가해 결국 사회보장관리공단에 관한 2011년 제 24호 법(UU BPJS)이 제정되도록 합니다. 그런데 저는 국민건강보험제도가 BPJS의 설립에 찬성하는 노동운동 뿐만 아니라 반대하는 노동운동의 영향력도 작용한 노동운동 전체의 산물이라고 봅니다. 이런 점에서 저의 시각은 다른 선행 연구자들의 해석과 약간 다릅니다. 노동운동 내부에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상이한 입장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우선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보장제도, 특히 사회보장관리공단법의 탄생을 설명하려면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노동운동 내부의 시각 차이뿐만 아니라 이런 상이한 노동운동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한 더 내밀한 탐구가 필요합니다. 전: 국민건강보험제도가 단일한 공단 설립에 찬성하는 노동운동뿐만 아니라 반대하는 노동운동의 의견까지 반영된 결과라는 새로운 해석을 제안하셨는데, 국가사회보장의 추진 방향에 관해 노동운동 내부에서 입장이 어떻게 갈렸다는 것인가요? 프: 당시 저는 노동운동이 사회보장(jaminan social) 개념에 관해 세 가지 의견으로 나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첫 번째는 급진적(radikal) 견해입니다. 이 의견은 국가가 국민의 건강을 보장해야 한다는데 동의합니다. 그런데 건강보장의 비용은 국가에서 지불해야 하며 국민은 조금이라도 비용을 지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입니다. 그들은 국가 예산이 건강보험 자금을 조달하기에 충분하다고 보았습니다. 국민들로부터 징수한 세금으로 무상의료제공을 위한 자금을 충당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국가는 부패로부터 깨끗하고 더 효율적으로 정부 행정을 관리하여 무상의료 서비스를 위한 충분한 자금이 확보되도록 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전국민이 가입해야 하고 보험료(iuran)를 납부해야 하는 사회보험(asuransi sosial) 방식의 국민건강보험을 거부하고, 사회보험 모델에 입각한 사회보장관리공단(BPJS)의 설립도 반대하였죠. 그들은 사회보험 모델이 국가로 하여금 국민들의 건강을 보장할 책임을 방기하게 만든다며 거부했습니다. 두 번째 견해는 중도적인(moderat) 것으로서, 국가가 국민들에게 건강보장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는데 동의하지만, 그 보장제도는 지속가능하고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지속가능하다는 것은 사회보장 기금이 항시 사용 가능해야 함을 의미하고, 특히 경기가 침체하거나 쇠퇴할 때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지속가능성 개념은 사회보장 시스템의 독립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회보장 시스템은 정치적 역학과 이해 관계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 입니다. 그래서 사회보장 기금은 국민으로부터 나와야 하고 국민들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기금은 국민들의 회비로 조성되고, 통제는 노동자, 고용주, 정부 및 시민의 대표로 구성되는 독립적인 위원회에 의해 직접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견해를 가진 측은 BPJS를 사회보장제도를 운영하는 기관으로 신설하는 안을 지지하였습니다. 세 번째 견해는 현상유지(status quo) 입장입니다. 국가가 국민의 건강을 보장할 의무가 있지만, (공무원, 군경, 노동자들의 의료보험과 연금보험을 각기 운영하는: 역자) 네 개의 국영 보험사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방안에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이런 견해를 가진 이들은 국가의 건강보장 책임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새로 마련된 사회보장프로그램인 빈민건강보험제도(Askeskin: Asuransi Kesehatan Masyarakat Miskin)의 운영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합니다. 국영기업(BUMN: Badan Usaha Milik Negara)이 아니라면 제도 운영의 방향이 불명확해질 수 있다고 우려하며 기존의 4개 국영보험사를 하나의 기관으로 통합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현상 유지파는 급진파와 함께 BPJS의 설립이 서구 자본주의 체제의 확장이라고 의심했습니다. BPJS를 통해 주권을 빼앗으려는 서방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작동할 수 있다면서, 만약 BPJS가 설립된다면 국영기업이여야만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전: 노동운동 내부의 사회보장 견해 차이를 이해하려면 민주화 이후 여러 노동조합연맹들이 경쟁적으로 분립하는 양상도 알고 있어야 되겠네요. 한국인 독자들을 위해 인도네시아 노동조합의 복잡한 스펙트럼을 간략히 소개해주세요.프: 인도네시아의 사회보장 담론은 노동운동의 구조적 변화와 함께 발전해 왔습니다. 사회보장 담론이 전개되던 당시 인도네시아 노동운동은 1965년부터 1998까지 지배했던 독재정권 이 무너진 이후 펼쳐진 개혁시대(Reformasi)의 산물이었습니다. 개혁시대 이전인 권위주의 체 제의 노동운동은 수하르토(Suharto)의 신질서(Orde Baru) 체제를 지지하는 집단과 거부하는 집단으로 단순하게 나눌 수 있었습니다. 정부를 지지하는 인도네시아전국근로자조합연맹(Federasi Serikat Pekerja Seluruh Indonesia, 이하 FSPSI)을 한 편으로 하고, 이에 맞서는 독립 노조들 인도네시아번영노동조합(SBSI: Serikat Buruh Sejahtera Indonesia), 인도네시아노동자전국전선(FNPBI: Front Nasional Buruh Indonesia), 독립노동조합연합(GSBI: Gabungan Serikat Buruh Independen), 그리고 어느 연맹에도 속하지 않은 지역노조들과 기업단위노조들 이 다른 한 편에 있었습니다. 이런 독립 노조들은 FSPSI가 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하지 않았기 때문에 설립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1) 1998년에 시작된 개혁시대를 거치며 조직노동의 수가 점점 더 늘게 됩니다. 신질서 체제의 몰락은 당시 유일하게 공인된 노동조합이었던 FSPSI로 하여금 후원자(patron)와 방향성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FSPSI 내에서 수직적, 수평적 갈등이 발생합니다. 수평적 갈등은 FSPSI 연맹 내에서 자신이 가장 정통성 있는 지도자라고 주장하는 두 명 혹은 세 명의 위원장이 복수로 출현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수직적 갈등은 FSPSI에 속한 여러 업종노조들이 휘하의 사업장단위 노조들과 함께 탈퇴하는 방식으로 발현됩니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결사의 자유 에 관한 국제노동기구(ILO: International Labour Organization) 87호 협약을 1998년에 인준하자 FSPSI 산하의 13개 업종노조가 탈퇴합니다. FSPSI를 탈퇴한 13개 업종노조는 국제자유노동조합연합(ICFTU: The International Confederation of Free Trade Unions)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개혁인도네시아전국근로자조합연맹(FSPSI Reformasi)을 결성합니다. FSPSI에 잔류한 업종노조들은 2001년에 연맹을 총연맹(Konfederasi)으로 격상시키고 명칭도 인도네시아전국근로자조합총연맹(KSPSI)으로 바꿉니다. 분리 독립은 각 업종노조들이 수거한 조합비를 중앙 조직으로 상납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관리할 수 있으므로 경제적으로 유익한 선택입니다. FSPSI 산하 업종노조 중에 조합원 결속력이 강하고 조합비가 많은 금속전자업종근로자조합(Serikat Pekerja Logam Elektronik dan Metal)은 1999년에 인도네시아금속근로자조합연맹(FSPMI: Federasi Serikat Pekerja Metal Indonesia)으로 분리독립하고, 2003년에 인도네시아전국근로자조합총연맹(KSPI: Konfederasi Seluruh Pekerja Indonesia)으로 발전시켰습니다.2) 마찬가지로 섬유의류가죽 업종근로자조합(TSK: Tekstil, Sandang dan Kulit SPSI)도 1999년에 분리독립하고 KSPI 창립에 참여했으나, 2003년에 탈퇴하여 전국근로자조합(SPN: Serikat Pekerja Nasional)을 따로 설립했습니다. 전: 민주화 이후 사업장 단위 노동조합도 많이 설립되었죠. 사회보장 개혁의 중요한 행위자인 국영기업 노조도 레포르마시(개혁) 시대에 탄생했지요? 프: 수하르토 퇴진 이후에 부여된 결사와 조직의 자유는 기업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조직을 설립하도록 동기를 부여했습니다. 이 때 주목할 만한 현상 가운데 하나는 국영기업(BUMN) 노동조합의 설립입니다. 신질서 체제 하의 국영기업 노동자들은 인도네시아공화국공무원단(KORPRI: Korps Pegawai Republik Indonesia)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부는 국영기업이 국가 예산에 의존하지 않고 이윤 지향적이도록 권장하는 경제 구조 조정을 추진하였습니다. 국영기업의 법적 지위는 주식회사(perusahaan persero)가 되었고 노사관계는 노동법에 근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KORPRI의 지부들은 기업별 노동조합으로 변하게 됩니다. 급진적인 노동조합들은 대체로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그들은 이념적으로 암묵적이든 명시적이든 경제를 관리하는 국가의 큰 역할을 요구하고 시장에 맡겨두는 시스템을 거부합니다. 그런데 공공부문 노동조합들도 국제금융기구들이 인도네시아에 돈을 빌려주면서 요구하는 구조조정 패키지의 일환인 민영화(privatisasi) 경향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3) 전: 공식부문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던 근로자사회보장보험사와 노동조합연맹들의 관계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프: 신질서 시대에는 체제를 지지하는 FSPSI노조 간부들에게 전국과 도(kabupaten) 단위의 임금위원회(Dewan Pengupahan) 같은 노사정 3자조정기구(lembaga tripartit)에 자리를 주는 혜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근로자사회보장보험사(Jaminan Sosial Tenaga Kerja, 이하 Jamsostek)의 자금 운영을 책임지는 운영위원 자리도 선사되었던 것이지요. 잠소스텍(Jamsostek)은 FSPSI의 간부들에게 높은 자리, 임금이나 시설이용권을 제공했습니다. 민주화 이후 많은 노동조합들이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경쟁하며 갈등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 회사에 두 세개의 노조가 있다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이런 경쟁은 기업 수준만이 아니라 노사정 3자 조정기구에서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Jamsosek의 위원회(Komisaris) 같은 3자 조정기구는 매우 정치적입니다. 이런 위원회의 노동자 대표 위원 자리는 집권 정부에 의해 결정 되었기 때문입니다. 노동조합이 집권 정부와 가까울수록 그 간부가 노동자 대표 위원이 될 가능성도 커집니다. 2007년부터 2012년 기간 동안의 노동자 대표 위원은 인도네시아번영노동조합 총연맹(KSBSI)의 전위원장 렉손 실라반(Reskon Silaban)과 인도네시아전국근로자조합총연맹(KSPSI) 위원장 슈쿠르 사르토(Syukur Sarto)였습니다. 전: 이렇게 복잡하고 경쟁적인 양상의 인도네시아 노동조합운동이 복지 투쟁에 다함께 관심을 갖게된 계기는 무엇이죠? 프: 인도네시아의 노동조합운동은 1998년에서 2004년 사이의 전환기에 사회보장 개혁 담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노동조합들은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에 통과된 국가사회보장법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 법은 제정 과정에서 큰 반대에 직면하지도 않았습니다. 노동운동은 사회보장법 제정 이후에 사회보장 담론에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노동조합 간부들과 노동운동가들은 국가사회보장법 제정에 참여했던 사회보장 전문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국가사회보장법 제정의 의의와 BPJS 설립 필요성을 설명하는 사회화(sosialisasi) 과정에 초대되면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국가사회보장법 제정에 기여했던 전문가들은 2009년까지 사회보장관리공단법이 제정되어야 하지만 유도요노 정부가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 문제의식을 갖고 이를 알리는 사회화 작업을 수행했습니다. 당시 상황은 참여하고 관찰 했던 사회보장 연구자 디나 위스누(Dinna Wisnu 2013: 133-136)의 책에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노동조합들은 곧 국가사회보장제도에 대한 지지와 반대로 입장이 갈리게 됩니다. 전: 사회보장 개혁에 대해 반대한 노동조합들은 어떤 조직들이고 왜 반대하였나요? 프: 급진적 노조들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그들의 비판적 태도를 사회보장제도 반대 논리에 적용하였습니다. 새로운 사회보장제도를 반대한 급진적인 노조들은 독립노조연합(GSBI), 인도네시아전국노동자투쟁전선(FNPBI), 인도네시아독립근로자조합연합(Gaspermindo: Gabungan Serikat Pekerja Merdeka Indonesia), 인도네시아비공식근로 자조합(SPINDO: Serikat Pekerja Informal Indonesia) 등입니다. 급진적이진 않지만 기존의 근로자사회보장사(Jamsostek)로부터 수혜를 받던 노조들은 현상 유지를 선호하는 입장에서 사회보장개혁에 반대하였습니다. 양대 노총으로 일컬어지는 KSPSI와 KSBSI는 앞서 말씀드렸듯이 Jamsostek의 위원회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존 제도 유지를 지지하는 편향을 보였습니다. 이런 편향은 인도네시아 복지연구자 앤드류 로서(Andrew Rosser 2017: 33)도 지적한 바 있습니다. 전국근로자조합(SPN)은 복지개혁에 미온적이었던 유도요노 대통령의 민주당(Partai Demokrat)을 비공식적으로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SPN의 위원장도 Jamsostek의 위원이 되었고(Bisnis.com 2013.01.21) 사회보장 개혁도 반대합니다. 현상유지 의견을 취하는 노동조합에 국영기업근로자조합연맹도 포함됩니다. 인도네시아의 국영기업 직원들은 별도로 관리되던 연금 기금의 수혜를 이미 받고 있었기에 연금 기금들을 통합하라는 사회보장관리공단법이 통과되면 자신들이 받을 혜택이 줄어들까 우려했습니다. 근로 자사회보장사(Jamsostek)의 노조는 기존 사회보장제도에 변화가 필요 없다는 의견을 아주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조직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런 노조들의 이해관계는 사회보장보험을 취급하는 4개 국영기업의 합병을 거부했던 회사 이사들의 이해관계와 일치하였습니다. 전: 사회보장제도 개혁을 지지하고 촉구한 노동조합들은 어떤 조직들이고 어떻게 상황을 주도하게 되었나요? 프: 국가사회보장제도법과 사회보장관리공단(BPJS) 신설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여 급진파와 보수파 사이에 중도파(moderat)로 분류할 수 있는 노조들은 인도네시아근로자조합총연맹(KSPI)과 그 산하의 인도네시아금속근로자조합연맹(FSPMI), 그리고 인도네시아전국근로자조직(OPSI: Organisasi Seluruh Pekerja Indonesia), 직물의류가죽업종근로조합개혁연맹 (FSP TSK SPSI Reformasi) 등입니다. 이 노조들이 사회보장행동연대(Komite Aksi Jaminan Sosial, 이하 KAJS)를 주도적으로 결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연대체가 사회보장 개혁을 요구하는 시위를 펼치며 사회보장관리공단법을 조속히 제정하도록 유도요노 정부와 의회를 압박하는 활동을 아주 적극적으로 전개했습니다.4) 2010년 3월 중도파들이 KAJS 설립을 선언하자 BPJS법 초안에 대한 지지와 반대 논쟁이 더욱 거세지기 시작했습니다. KAJS는 5월 1일 국제노동절(May Day)을 맞이하여 임금 인상과 아웃소싱 폐지라는 기존의 요구에 더하여 BPJS법을 즉각 제정하라는 요구를 추가하고 정부와 국회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국제노동절 시위를 포함하여 일련의 노동자 시위에서 금속노련 FSPMI를 필두로 하는 KAJS측 시위대가 다른 노선의 시위대에 비해 수적으로 늘 압도하였습니다. KAJS는 국회(DPR: Dewan Perwakilan Rakyat), 특히 노동문제를 다루는 제9상임 위원회(Komisi IX)에 공개적인 대화를 요청하고 그들의 요구를 적극 투입하였습니다. 이러한 압력은 BPJS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어 법으로 제정되는 2011년 말까지 계속 가해졌습니다. 물론 현상유지파와 급진파도 시위를 전개했습니다. 메이데이 시위 때 국가사회보장제도법과 BPJS 설립에 반대하는 요구사항을 내걸고 참여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이 시위 이후에 KAJS와 달리 언론이 주목할만큼 많은 시위대를 동원하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KAJS는 정부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2010년 5월부터 2011년 11월까지 많은 시위를 전개했습니다. 이러한 압력은 자카르타뿐만 아니라 전국의 거의 모든 주에서 성사되었고, 특히 금속노련 FSPMI의 지부가 많은 산업지대에서 두드러졌습니다. BPJS 법안을 지지하거나 거부하는 노동자들의 요구에 조응하여 국회도 찬성과 반대로 양분됩니다. 반대하는 그룹은 유도요노 정부를 지지하는 정당 연합, 즉 민주당(PD), 통합개발당(PPP), 민족각성당(PKB), 골카르당(Partai Golkar), 복지정의당(PKS) 및 국민수권당(PAN) 소속 의원 들이었습니다. 찬성하는 그룹은 민주투쟁당(PDI-P), 대인도네시아운동당(Gerindra) 및 민심당(Hanura) 등 당시 집권 정부 구성에 참여하지 않은 야당 소속 의원들이었습니다. 국회의원들과 국회 밖 집단들 사이의 협력은 인도네시아에서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국회의원들은 정부 정책에 관한 질의나 비판의 정당성을 확보하게 해주는 의회 밖의 압력과 시위를 종종 필요로 합니다. 국회의원들과 사회 집단 사이의 협력은 BPJS 법안 심의 과정에서도 발생했습니다. BPJS 법안을 지지하는 KAJS뿐만 아니라 반대하는 노동조합들도 국회의원들과 협력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렇지만 호응 수준은 차이를 보였습니다. KAJS측에 호응하는 국회의원들, 특히 민주투쟁당(PDI-P)의원들이 더 적극적이고 공개적이었습니다. 그들은 KAJS가 주최하는 토론 회에 연사로 참여하고 시위까지 동참했습니다.5) 이런 현상은 현상유지파나 급진파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현상유지파 노동자 집단과 급진파 노동자 집단의 국회와의 협력은 시간이 흐를수록 약해졌습니다. 급진파와 국회의원의 협력이 시들해진 이유는 주로 건강보험을 국가 재정으로 모두 충당해야 한다는 급진파의 시각이 수용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급진파와 국회의원들의 지속적인 협력을 위한 견고한 기반이 없었던 것이죠. 한편 현상유지파는 전투적이지 않았고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의원의 수도 충분히 많지 않았기 때문에 약화되었습니다. 더구나 현상유지파의 주력은 공개적 집단행동에 익숙하지 않은 국영기업 노동자 조직들이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정부 지지 정당들 가운데 골카르당(Golkar)과 복지정의당(PKS)이 입장을 바꿔 민주투쟁당(PDI-P) 쪽으로 이동합니다. 결국 유도요노 정부는 사회보험(asuransi social) 모델과 보험료(iuran) 기반의 기금을 활용해 사회보장제도를 구축하는 발상을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4개의 국영보험사가 새로운 BPJS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계획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KAJS는 국회와 협력하며 집단행동을 통한 압력을 가한 결과 2011년 10월에 사회보장관리공단법을 탄생시킬 수 있었습니다. 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보장관리공단법이 그것을 지지했던 운동의 일방적인 승리가 아니라 타협적 산물이라고 보시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프: BPJS법은 궁극적으로 타협의 산물이었습니다. 공단이 하나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중도파 의견은 법에 반영될 수 없었습니다. BPJS법은 두 개의 공단, 즉 건강사회보장관리공단(BPJS Kesehatan 또는 BPJS I)과 인력사회보장관리공단(BPJS Ketenagakerjaan 또는 BPJS II)을 만들도록 했습니다. 기존의 국영보험사들이 사회보장관리공단으로 통합할 때 재정 실태를 모두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는 요구도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타협적인 귀결이었습니다. 이 법은 통폐합되어야할 4개 국영보험사의 보고나 감사의 필요성을 강제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국군사회보험사(PT. Asabri: Asuransi Sosial Angkatan Bersenjata Republik Indonesia) 통폐합에 대해 모호하게 처리했습니다. 정치안정을 고려하다 보니 국군사회보험사의 전환 문제를 과감하게 논의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전: 사회보장관리공단과 기존 국영보험사들의 통합 문제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주시죠. 프: 사회보장관리공단법은 (공무원과 군경에게 의료보험을 제공하던: 역자) 건강보험사(PT. Askes: Asuransi Kesehatan)가 건강사회보장관리공단(BPJS I: Kesehatan)으로, (공식부문 노동자들에게 보험을 제공하던: 역자) 근로자사회보장사(PT. Jamasostek)가 인력사회보장공단(BPJS II: Ketenagakerjaan)으로 전환되도록 했습니다. 두 전환 모두 기존 국영보험사들이 스스로를 청산할 필요 없이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국가사회보장제도법을 지지하던 세력의: 역자) 요구는 국군사회보험사(PT. Asabri)와 공무원저축연금보험사(PT. Taspen: Tabungan dan Asuransi Pensiun)도 해체하고 인력사회보장관리공단으로 합류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요구는 사회보장관리공단법에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법은 두 공기업의 기능(노후보장 및 연금 프로그램)의 이전만 규정하였습니다. 이 법의 65조 1항과 2항에 늦어도 2029년까지 국군사회 보험사의 연금프로그램과 공무원저축연금보험사의 노후보장저축과 연금 프로그램을 인력사회 보장관리공단에 이전 완료하라고 명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기업 해산은 명시하지 않아서: 역자) 이 두 국영기업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기능이나 서비스만 사회보장관리공단으로 이전하고 해체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부정부패가 심하기 때문에 군부가 국군사회보장사의 해체를 거부하고 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기업을 해산할 때는 회계 보고의 의무가 있죠. 그런데 국군사회보장사가 22조 루피아(우리돈 약 2조원: 역자)의 손실을 보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습니다. 전: 건강사회보장관리공단(BPJS I)이 운영하는 국민건강보험제도에서도 타협적 양상을 찾아 볼 수 있습니까? 프: 보편적 건강 보장 개념의 맥락에서 사회보장관리공단(BPJS)의 설립을 거부하거나 지지하는 측의 차이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국민에게 건강보험을 동일하게 제공할 의무가 국가에게 있다는 의견을 공유했습니다. 그런데 급진파는 국민들이 병원이나 의원에서 비용을 지불하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극단적으로 보이는 이런 의견도 BPJS 법의 내용에 영향을 줍니다. BPJS법이 급진파의 요구도 반영된 절충의 산물이라는 해석의 두 가지 근거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BPJS는 지역별건강보험(Jamkesda: Jaminan Kesehatan Daerah)의 존속을 허용합니다. 그리고 국민건강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국민들에 대한 구체적인 제재를 명시하지 않았습니다. 이 두 가지는 무상의료 서비스가 계속되길 원하고 보험료 납부는 거부하는 급진파의 압력이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지역별건강보험은 지방정부 재정으로 운영되었고 가난한 사람들의 병원 진료비는 면제해주고 있었습니다. 물론 지역별건강보험은 수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국민건강보험에 통합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보험료를 정부가 대신 납부해주는 방식으로 빈곤층 무상의료 제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저의 해석은 사회학적이면서도 변증법적인 것으로서 BPJS 법이 그 초안을 지지하는 이들이나 거부하는 이들 어느 한 측의 요구로 100% 채워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BPJS법에서 명시하지 않은 바들을 처리하기 위한 추가적인 시행령들을 필요로 하였고 새로운 사회보장 제도가 효과적이고 신속하게 구현되는데 장애를 유발하게 되었지요. 전: 마지막 질문입니다. 수년간의 복지 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은 결국 더 나은 건강보장을 제공받게 되었다고 보시나요? 비공식부문(sektor informal) 노동자들은 전에 없던 건강보험의 수혜 대상이 되어서 상황이 좋아졌다고 볼 수 있는데, 과거 근로자사회보장보험(Jamsostek)의 수혜를 받던 공식부문(sektor formal)의 노동자들도 더 나은 보장을 받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나요? 앞으로 많은 개선이 필요하지만, 지금 인도네시아 건강보장 투쟁의 드라마를 마친다면 해피 엔딩 (happy ending)으로 끝내도 된다고 보시나요? 프: 물론입니다. 공식부문 노동자들은 사회보장의 대상이었지만 그 보장 내용은 제한적이고 협소했었습니다. 적어도 세 가지 면에서 확실하게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과거 Jamsostek에서 제공하던 건강보험은 노동자 개인에게만 해당되었으나 현행 국민건강보험은 가족까지 포괄합니다. 둘째로 과거의 보험은 적용되는 질병이 상당히 제한적이었지만 현재는 성형과 불임치료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질병 치료에 보험이 적용됩니다. 셋째로, 과거의 보험은 근무지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으나 현재는 어느 지역이든 진료와 투약의 보험처 리가 가능합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전: 프란시스쿠스 조요아디수마르타 박사는 인도네시아의 사회보장 개혁 투쟁에 나섰던 노동 운동의 논쟁, 전략, 연대, 성과와 과제에 관해 이야기해주었다. 국제노동절을 맞이하여 우리가 되새길 점은 인도네시아 복지 발전을 위한 빅뱅 이라 할 수 있는 사회보장관리공단법의 제정을 위해 투쟁한 노동운동이 모든 민중을 위한 역사적 행위자 로서 노동계급이 공헌할 가능성을 증명하였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복지제도 진전에 노동운동의 역할이 제한적이었다는 평가(김영순 2021: 82-88)에 비추어볼 때 인도네시아 노동운동의 투쟁과 성취는 더욱 빛난다. 투쟁을 주도하고 광범하게 연대한 노동자들은 개혁 이후 더 나은 복지를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다. 특히 국민건강보험의 출범 이후 공식부문의 노동자들은 기존의 협소한 의료보험과 달리 폭넓은 보장을 온가족이 전국 어디에서나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비공식부문 노동자들과 일반 주민들까지 이런 건강보험의 대상으로 포괄되게 되었다. 물론 충분하진 않다. 국민건강보험의 개선 과제는 시너지 폴리시스(Synergy Policies)가 90여명을 면담 조사하여 발표한 정책브리프에 잘 담겨 있다. 그런데 여기서 또한 주목할 점은 현행 제도의 문제도 노동운동에 기반한 단체들에서 찾아내고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보장행동연대(KAJS)는 사회보장 관리공단(BPJS) 출범이라는 소기의 목적이 달성되자 자진 해산하면서 BPJS Watch라는 시민사회단체를 결성하고 정책감시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고, 인도네시아근로자조합총연맹(KSPI)은 건강보험감시단(Jamkeswatch)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에 배치한 천여명의 노조원을 통해 모니터링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Dinna Prapto Raharja, Retna Hanani Fransiscus S. Joyoadisumarta 2021; 표지는 사진 4). 국민건강보험의 출범에 기여한 노동운동이 보편적 건강보장의 진전에 또한 공헌하고 있는 것이다.인도네시아 노동운동이 복지 투쟁의 전면에 나섰던 동기 중에 하나는 21세기 인도네시아 정치가 내걸었던 사회보장개혁이 모든 국민을 위한 건강보험뿐만 아니라 모든 일하는 이들을 위 한 각종 사회보장까지 약속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누스대학교(Universitas Binus)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시너지 폴리시스의 소장을 겸하고 있는 복지정치 전문가 디나 프랍토 라하 르자(Dinna Prapto Raharja, 개명 이전은 Dinna Wisnu) 박사는 4월 18일의 화상 인터뷰에 동참하여 상황 이해를 돕는 보충 설명을 해주었고 특히 2015년 출범한 인력사회보장관리공단 (BPJS II)의 과제에 관해 들려주었다. 인력사회보장은 모든 일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기획이었으나 아직 비공식부문까지 충분히 포괄하지 못하고 있고, 연금보장(JP: Jaminan Pensiun)과 노후보장(JHT: Jaminan Hari Tua)은 노동자들의 납부금이 너무 적기 때문에 나중에 받을 금액도 적을 수밖에 없는 문제를 안고 있다고 한다. 56세 이후 일시불로 지급받는 노후보장금을 실직 시에 앞당겨 수령하는 방안이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월별로 수령하는 연금보장은 15년 불입 후부터 수령하므로 2030년이 돼야 확실한 진단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디나 소장의 설명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연금, 노후보장, 산업재해 및 사망 보험을 담당하는 인력사회보장관리공단의 제도와 운영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추진되어야 한다. 즉, 건강사회보장공단(BPJS I)뿐만 아니라 인력사회보장관리공단(BPJS II) 연구까지 포함할 때 인도네시아의 거대한 사회보장 개혁과 복지 발전 성과에 관한 연구가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32년간 집권한 수하르토의 독재가 무너진 뒤 20여년간 인도네시아에서 전개된 복지제도의 역동적 발전을 이해하려면 요즘 꽤 많은 인도네시아 연구자들이 인용하는 과두제(oligarchy: Hadiz and Robison 2014) 시각에 매몰되어서는 안된다. 민주화 이후도 부와 권력을 가진 소수의 지배가 지속되고 있다는 과두제 시각에 의존하면 민주화에 따른 변화를 온전히 읽어낼 수 없게 된다. 집단행동과 상호작용, 그리고 정책적 투입을 위한 숙의(deliberation; musyawarah)가 이루어지는 상향식 정치과정에 주목할 때 변화의 동인과 가치를 파악할 수 있다. 오늘날 민주주의가 세계 도처에서 의구심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인도네시아에서 복지제도의 진전과 노동운동의 공헌은 민주주의가 보통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각주1) 수하르토 체제는 buruh (노동자)를 pekerja 로 바꿔 사용토록 했다. pekerja 의 우리말 번역은 박정희 정권이 노동자 를 근로자 를 바꿔 부르도록 했었던데 착안하였다. 그래서 serikat pekerja 를 근로자조합 으로 번역하지만 조직형식 측면에서 serikat buruh 와 똑같은 노동조합이다(역자).2) 1968년생 사이드 이크발(Said Iqbal) 위원장이 이끄는 KSPI총연맹과 산하 금속노련 FSMPI는 2010년대 사회보장 개혁 투쟁에서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노조였으며 지금도 건강보험 감시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노 조이다. 사이드 이크발은 2010년 이후 이름만 남았던 노동당(Partai Buruh)을 2021년 10월 5일에 재건하고 당대표가 되었다(역자). 3) 국영기업 노조 탄생 과정의 이야기는 대담자의 논문(수삐아르소 2011)에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역자).4) 사회보장행동연대(KAJS)의 결성은 2010년 3월 초순에 금속노련 FSPMI가 개최한 3일간의 토론회 끝에 성사 되었다. 8개 전국노련 위원장들과 시민사회단체 대표 1인이 공동의장단을 구성하였고 변호사, 학생, 기자, 전문가, NGO 활동가들이 참여했다. 다음해 이 조직은 가정부, 어민, 농민, 이주노동자 단체 등이 가세하고 67 개 조직이 함께하는 광범한 네트워크로 발전했다(역자).5) 메가와티는 대통령 임기 마지막날 국가사회보장제도법(UU SJSN) 서명식을 깜짝 파티 형식으로 개최하고 법 제정 과정에서 수고한 많은 이들을 모두 초대하였는데, 어느 참석자는 서명식이 마치 대통령이 SJSN법을 국민들을 위한 선물 로 선사하는 자리처럼 느껴졌다고 회고했다. 이렇게 국가사회보장제도법을 제정하였다는 강한 자부심을 지닌 메가와티의 민주투쟁당(PDI-P) 소속 국회의원들은 그 법을 실질적으로 구현할 사회보장 관리공단법(UU BPJS)의 제정에 강한 동기를 갖고 적극적으로 임했다. 특히 리커 디아 피탈로카(Rieke Diah Pitaloka)는 KAJS 주최 토론과 시위에 매우 헌신적으로 참여하여 마담 웰페어 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역자).* 참고문헌김영순. 2021. 『한국의 복지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민주화 이후 복지정치와 복지정책』. 서울: 학고재. 디나 위스누. 이은영 역. 2011. 인도네시아 복지 개혁의 정치: 새로운 시스템을 위한 투쟁과 논쟁. 『아시아저널』 4: 94-120. 브릿넬, 마크. 이로운 역. 2016. 인도네시아: 세계 최대 단일 보험자. 『완벽한 보건의료제도를 찾아서』. 서울: 청년의사. 제8장. 수삐아르소. 2011. 인도네시아 공공부문 노동조합의 역사와 민주화 이후의 발전. 『아시아저널』 4: 58-36. 신영전. 2010. 건강보험 통합 쟁취사. 『월간 복지동향』 141(7월호): 4-8. 전제성. 2007. 인도네시아의 총체적 위기와 메가와티의 정치리더십. 『동아연구』 53: 289-326. ______. 2011. 인도네시아의 메이데이(May Day). https://www.peoplepower21.org/International/777039 Aspinall, Edward. 2014. Health Care and Democratization in Indonesia. Democratization 21(5): 803 823. Berita Satu. 2013.12.10. Serikat Buruh Tolak UU BPJS dan UU SJSN. (Ridho Syukro). https://www. beritasatu.com/ekonomi/154823/serikat-buruh-tolak-uu-bpjs-dan-uu-sjen Bisnis.com. 2013.01.21. "Komisaris Jamsostek: Buruh Pertanyakan Bambang Mathias Jadi Komisaris." https://ekonomi.bisnis.com/read/20130121/12/132339/komisaris-jamsostek-buruh-pertanyakan-bambang-and-mathias-jadi-komisaris. Dinna Wisnu. 2013. Politik Sistem Jaminan Sosial. Jakarta: Gramedia Pustaka Utama. Dinna Prapto Raharja, Retna Hanani Fransiscus S. Joyoadisumarta. 2021. The Role of Navigators in Accessing JKN Services. Synergy Policies Brief 2(June). Hadiz, Vedi R., and Richard Robison. 2014. The Political Economy of Oligarchy and the Reorganization of Power in Indonesia. Michele Ford and Thomas B. Pepinsky. eds. Beyond Oligarchy: Wealth, Power, and Contemporary Indonesian Politics. Ithaca: Cornell Southeast Asia Program. Jung, Eunsook. 2016. "Campaigning for All Indonesians: The Politics of Healthcare in Indonesia." Contemporary Southeast Asia 38(3): 76-494. Kompas. 2011.08.08. Elemen Pendukung BPJS Bertambah. (Suhartono) https://money.kompas.com/read/2011/08/08/21145428/elemen.pendukung.bpjs.bertambah Media Sumutku. 2019.07.09. Tekanan Eropa Terhadap Sawit, Dr Supiarso: Petani Sawit Harus Ubah Pola Perlawanan. https://mediasumutku.com/tekanan-eropa-terhadap-sawit-dr-supiarso-petani-sawit-harus-ubah-pola-perlawanan/ Tjandra, Surya. 2014. The Indonesian Trade Union Movement: A Clash of Paradigms. Jafar Suryomenggolo. ed. Worker Activism after Reformasi 1998. Hong Kong: AMRC(Asia Monitor Resource Centre). Rosser, Andrew. 2017. Litigating the Right to Health: Courts, Politics, and Justice in Indonesia. Hawai i: East-West Center. [18] 한국 시민사회와 미얀마의 만남: 버마 민주주의민족동맹(NLD) 한국지부의 난민신청과 연대의 시작 ㅣ 양영미 작성자 동남아연구소 조회수 1273 첨부파일 1 등록일 2022.03.16 초록한국 시민사회는 장기간에 걸쳐 미얀마의 민주화를 위한 연대 활동을 전개해왔다. 2000년, 강제 출국 처지에 놓인 미얀마 망명자들의 난민 지위 인정 신청에서부터 본격화된 한국 시민사회의 미얀마연대 활동은 이후 미얀마 해상의 가스전 개발 사업으로 야기된 강제이주와 강제노동, 환경 문제에 대한 감시, 사이클론 피해 복구를 위한 인도적 지원, 미얀마-태국 국경지대의 난민 지원 등, 미얀마의 비민주적 정치 상황이 촉발한 여러 차원의 이슈들을 포괄해가며 그 범위를 확장해왔다. 이 글은 2000년에 시작된 미얀마 난민인정심사 과정의 진행 경과와 이를 지원했던 한국 시민사회단체의 활동가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하여 당시의 연대 활동이 가진 특징과 한계, 앞으로의 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장기화할 가능성이 큰 미얀마의 현 상황으로 볼 때 난민 인정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재점화될 수 있는 사안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당시 상황에 대한 활동가들의 회고와 성찰을 정리한 이 글이 앞으로의 연대와 관련하여 적지 않은 시사점을 제공해줄 것으로 본다.이슈페이퍼 18호 원문 내려받기들어가며 2021년 2월 1일 아침, 미얀마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켜 아웅산수찌 국가고문과 윈민 대통령을 비롯한 민간정부의 주요 인사를 감금하고 1년간의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 날은 2020년 11월 총선에서 선출된 의원들로 구성된 의회가 개시되는 날이었지만 불법 쿠데타로 인해 민선 2기 정부는 출범조차 하지 못한 채 군 최고사령관인 민아웅흘라잉을 수반으로 하는 쿠데타 세력의 국가행정평의회(SAC: State Administration Council)에게 정치권력을 찬탈당했다.1) 쿠데타 직후 미얀마 시민들은 전국적인 시민불복종운동(CDM: Civil Disobedience Movement)을 전개하며 군부의 부당한 정권 찬탈에 항의했지만, 1년이 지난 2022년 2월 현재까지도 미얀마는 정상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평화시위에 대한 군부의 잔혹한 진압으로 유혈사태가 속출하는 상황에서 저항운동 진영에서는 소수종족무장단체와 연합하여 시민방위군(PDF)을 조직하여 무력투쟁에 나서는 한편, 지난 2020년 말 선출된 의원 및 다양한 사회집단의 대표자들이 참여하는 국민통합정부(NUG: National Unity Government)를 수립하여 군부에 맞서고 있다. 미얀마 인권단체인 버마정치범지원협회(AAPP: Assistance Association for Political Prisoners)에 따르면 쿠데타 발발 이래 2022년 2월 25일 기준 1,682명의 시민이 살해당했고, 체포된 시민의 수도 1만 2천여 명에 달한다.2) 유엔난민기구(UNHCR: United Nations High Commissioner for Refugees)는 쿠데타 이후 인접국인 태국으로 건너가 체류하고 있는 피난민의 수도 2,500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상황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유엔과 아세안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태도는 미얀마 사태 개입에 소극적이다. 내정불간섭 원칙을 고수해온 중국은 쿠데타 군부를 지지하는 러시아와 함께 유엔의 개입을 막았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발의된 미얀마 군부에 대한 무기 금수 조치 결의안은 상임이사국인 이들 국가의 반대표로 통과되지 못했다. 국제사회의 이 같은 미온적인 태도와 비교할 때 한국 정부의 대응은 사뭇 눈에 띄었다. 한국은 김대중 정부 당시 버마 민주화를 지지하고 연대를 표명해왔고, 이번 쿠데타 이후 한국정부는 국가 차원에서는 최초의 독자적 제재라 할 수 있는 군수품 수출 중단, 인도적 지원을 제외한 국제개발협력 86% 예산 삭감 등 즉각적이고 단호한 정책발표를 이어갔다. 정부 차원의 대응 못지않게 눈에 띄는 것이 한국 시민사회의 연대 활동이다. 군부의 불법적인 정권 찬탈을 규탄하며 국제사회의 연대를 호소하는 미얀마 시민들의 외침에 한국 시민사회는 즉각 응답했다. 쿠데타가 발발한 지 얼마 안 된 2월 26일, 106개 시민사회단체가 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한국시민사회단체모임 을 결성하여 현재까지도 다방면에 걸친 연대 활동을 전개하고 있고, 힘겨운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저항을 이어가는 미얀마 시민들을 응원하며 힘을 보태려는 일반 시민들의 참여도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 그런데, 2021년 미얀마 쿠데타가 촉발한 국제적 저항의 연대가 한국 시민사회와 미얀마의 첫 만남은 아니다. 이에 앞서 1988년의 민주화운동 이후 한국으로 망명했거나 이후 이주노동자로 들어와 국내에 체류하는 미얀마 이주민들과 한국 시민사회가 맺어온 관계의 역사가 그 전사(前史)로 자리한다. 한국 시민사회의 미얀마연대는 이 글을 통해 되짚어보려는 2000년 난민인정투쟁연대3)를 시작으로 20년 넘게 이어져 왔고, 2021년 쿠데타 이후엔 그 범위와 강도가 더욱 확장되고 공고해진 것 같다. 다른 나라와의 연대 활동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각적이고도 지속적인 연대 활동을 보여주었다는 점이 한국-미얀마연대 활동의 특징이다. 비단 민주화운동만이 아니라 라카인주의 슈에(Shwe) 가스전 개발과정에서의 강제노동과 강제 이주 등 인권침해 문제와 관련해서도 다국적기업감시운동4)이 오랫동안 전개되어왔으며, 2008년에는 14만여 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킨 사이클론 나르기스 피해 복구를 위해 적극적인 인도적 지원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이처럼 한국 시민사회의 미얀마 연대 활동은 다양한 계기와 범위에 걸쳐 오랫동안 전개되어왔다. 이 글의 목적은 미얀마 민주화운동에 대한 한국 시민사회의 연대 활동을 회고하고, 그로부터 이러한 연대 활동이 가진 특징과 한계를 되짚고 앞으로의 과제를 도출하려는 데 있다. 이는 한국-미얀마연대 활동이 다른 경우와 달리 장기간 지속하며 단일 사안이 아닌 다각적 측면에서 활동이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에 착안한 것으로서, 현 상황으로 볼 때 장기화할 가능성이 큰 미얀마 사태와 관련하여 과거에 대한 회고와 성찰이 적지 않은 시사점을 제공해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일환으로 필자는 2000년 난민인정투쟁 연대활동에 대한 회고와 더불어 그 경험이 한국의 미얀마공동체와 우리 시민사회에 남긴 과제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관련 문서기록을 살펴보는 한편, 당시 이를 지원했던 한국 시민사회단체의 활동가에게 질문지를 이메일로 발송하여 답변을 받는 방식으로 서면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초고 작성 후에는 전화로 추가 인터뷰를 진행하여 내용을 보완하였다. 당시 부천외국인노동자의집 에서 사무국장직을 맡아 활동하였던 이란주, 나와우리 버마분과에서 활동하던 강연배가 이 귀찮은 제안을 흔쾌히 수락해주었다. 이란주는 이후 아시아인권문화연대 를 설립하여 대표로 활동했고, 강연배는 현재 몸담고 있는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활동을 통해 나와우리 시절 맺은 버마와의 인연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5) 지면을 통해 두 분께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2000년 봄, 버마민주화를 위한 모임 결성 부천외국인노동자의집 에서는 버마 민주주의민족동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이하 NLD) 한국지부의 조직화를 위해 일찍이 1999년부터 이들의 난민 지위 인정을 위한 투쟁을 구상했다. 이 무렵 회원 A6)가 단속에 걸려 강제추방을 당한 일이 벌어졌는데, 당시에는 아직 단체를 결성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미얀마 본국이 아닌 태국으로 갈 수 있도록 법무부에 협조를 구하여 미얀마 대사관에 통보하지 말 것, 변장 도구를 반입할 수 있게 하는 일 등을 진행하였다. NLD 한국지부는 이후 A가 태국에 머물면서 버마 망명정부(NCGUB: National Coalition Government of the Union of Burma)의 승인을 받아 비로소 설립될 수 있었다.부천에는 수도권 이주노동자들이 그러하듯 다양한 국적의 노동자들이 크고 작은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며 생활 정보와 편의를 나누는 공간이 많다. 미얀마 출신 이주노동자들 또한 비교적 많이 모여 살고 있어 부천외국인노동자의집 을 중심으로 미얀마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훗날 NLD 한국지부를 설립하게 된 미얀마인들도 이 공동체에 속해 있었는데, 1998년 무렵 이들은 정치 운동을 해보자는 뜻을 공유하고 한국에 NLD 지부를 설립하기 위한 과정을 함께 도왔다. 당시엔 한국에 체류하면서도 여전히 군부를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아 정치적 의견이 담긴 선전물이나 NLD 홍보물을 단체 안팎에 전시하는 것을 두고 NLD 회원과 미얀마공동체 회원들 사이에 충돌이 빚어지기도 했다. 시민사회연대모임의 결성을 촉발한 것은 NLD 대외협력부장이었던 샤린7)의 구속이었지만, 전술했듯이 부천외국인노동자의집 에서 난민인정투쟁을 구상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은 1999년, A가 태국으로 추방당한 사건이었다. 이후 2000년 3월에 샤린이 체포되자 이란주는 유엔난민기구에 지원을 요청하고 시민사회에 연대를 호소하는 등 강제추방을 막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난민 인정 신청을 위해 인천출입국관리사무소와 물밑 접촉을 시도하기도 했다. 1998년 초 설립된 나와우리 는 소외된 집단과의 만남을 바탕으로 열린 사회, 문화적 다원주의에 근거해 자연과 사람이 함께 사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꿈꾼다 는 기치로 시작된 작은 풀뿌리 단체이다. 초기에는 일본, 베트남 관련 사업을 주로 진행하였으나 우리 사회 소수자인 이주노동자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 관련 활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주노동자 관련 인사를 초청하여 강좌를 진행하기도 했는데, NLD 한국지부의 모조(Moe Zaw) 사무국장도 강사로 초청된 인사 중 한 명이다. NLD 지부와 함께 한국의 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이 안장된 마석 모란공원을 다녀오는 등의 활동을 통해 노동문제 및 민주화운동에 대한 의지와 열망을 공유하기도 했다. 이후 나와우리 는 2000년 3월에 열린 회원총회에서 버마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버마분과 를 만들고 NLD 지원 사업을 결정했다. 3월 4일에 샤린이 인천출입국관리소에 구금되자 버마 민주화를 위한 모임(이하 버마모임)이 소집되었다. 버마모임 소속 강연배, 김규환, 김종현, 김은정 등은 언론홍보를 위해 버마 민주화를 위한 모임(Friends of Burma) 보도자료와 소식지를 발간하고 3월 12일 버마 대사관 앞 집회, 3월 15인 프리 버마(Free Burma) 홈페이지를 개설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3월 22일에는 14개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연대성명을 발표하여 유엔에서 거듭 지적해왔던 심대한 인권침해가 자행되고 있는 버마로 강제 송환된다는 것은 사형 선고나 다를 바 없다고 지적하며, 첫째 한국 정부는 이미 가입한 난민 지위에 관한 국제조약과 고문방지조약 등이 규정하고 있는 정치적 박해자들에 대한 강제송환금지 라는 국제법적 의무를 이행하고, 둘째 샤린에 대한 난민지위신청 조사절차가 강제송환을 위한 요식절차가 되지 않도록 국제인권기준에 부합하는 민주적 심사절차를 보장하며, 셋째로 이 사건을 위시하여 현재 진행되고 있는 다른 난민지위신청사건에서도 충분하고도 전문성 있는 조사절차를 거쳐 난민 지위 여부를 전향적으로 결정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8) 이어 난민 인정 신청과 관련하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이하 민변)에 나와우리 의 의견서를 보내 협조를 구했다. 일련의 발 빠르고 적절한 부천외국인노동자의집 과 나와우리 의 대응 이후 시민사회단체연대모임의 공동대응이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4월 19일 민변 사무실에서 열린 버마 NLD 한국지부원들의 안전문제와 관련한 민간단체회의 , 4월 23일 광화문 지구의 날 행사장에서 진행된 샤린 석방을 위한 엽서 보내기 캠페인, 4월 29일 지구촌동포청년연대(KIN: Korean International Network) 가 주관한 난민신청 제도의 문제점과 대책 토론회 개최 등이 그것이다. 한국 시민사회의 이러한 공동대응 노력에 힘입어 샤린은 같은 해 5월 10일에 석방되었다.난민신청과 기각 한국은 1992년에 유엔 난민협약에 가입했다. 하지만 2002년까지 난민으로 인정된 사람은 단 두 명에 불과했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는 난민 인정의 장벽이 높고 난민 보호에 초보적 수준이었음을 말해준다. 난민 지위 신청자나 난민에 대한 처우개선은 매우 시급한 문제이다. 법률상으로는 난민으로 인정될 경우 외국인등록증을 발급받음과 동시에 F2(거주) 체류자격을 획득하여 의료보험을 비롯한 각종 사회보장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이와 달라서, 당시 한국 사회에서 난민에게 제공되는 제도적, 물질적 지원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샤린의 강제송환을 막기 위해 대책을 논의하던 시민사회는 민변의 국제연대위원회에 이 일을 의뢰하였다. 당시 민변은 국제연대위원장인 박찬운 변호사9)가 이라크 출신 난민의 이의신청 사건을 맡아 진행하여 유엔난민기구의 인도적 지위 인정을 받아 성공적으로 난민 인정을 받아낸 직후였다. 이후 민변은 유엔난민기구가 특정 난민신청자에 대해 법률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인정해 민변에 지원을 요청하면 민변은 그에 대한 법률적 지원을 한다 는 내용의 양해각서(MOU)를 유엔난민기구와 체결하였다. 2000년 5월 17일 버마 NLD 한국지부 회원 21명은 샤린의 강제송환을 막기 위해 함께 집단으로 난민신청을 했다. 총 21명의 난민 지위 신청은 처음에 예외 없이 기각되었다. 대규모 집단신청은 한국 정부로서도 적지 않은 부담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미얀마 정부와의 관계를 고려할 때도 골치 아픈 일이었을 법하다. 일반적으로 난민신청인들이 대체로 본국과의 관계에서 신분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조용히 절차를 진행하곤 했던 것과 달리 버마 NLD 한국지부 회원들은 거침없이 미얀마 군사정권에 대해 비판의 날을 세워 발언하고 미얀마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에서 NLD 회원에 대해 난민 인정을 한 것이 영향을 끼쳤는지 모르지만, 이후 한국 정부도 전향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하여 한 명 두 명 난민 인정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10) 정작 샤린은 2004년 한국 정부에 난민 신청했던 것을 철회하고 유엔난민기구의 인도적 지위 인정을 받아 체류하고 있었다.1) 난민심사과정의 문제점 당시 한국의 난민 지위 인정을 위한 심사과정은 신청인의 인권 보호나 적절한 심사를 위한 충분한 정보제공 등이 모두 부족한 초보적 수준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었다. 많은 논란 끝에 현재는 일부 개선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더 많은 변화가 필요하다고 인권시민사회는 입을 모은다. 버마 NLD 한국지부 회원들이 집단으로 난민 지위 인정 신청서를 접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출입국관리소에서 이들을 모두 불러 모아 넓은 회의실에서 단체로 조사를 진행하였다. 조사는 모두가 나란히 앉아있는 상태에서 한 사람에게 질문하고, 또 다음 사람에게 질문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신청인의 인권 보호에 매우 취약한 것이었다. 타국으로 떠나와 민주화운동이라는 깃발 아래 모인 사람들이라 해도 신청인 개개인은 서로 버마에서의 행적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신뢰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닐 수 있어, 혹 버마 군부에서 나왔거나 비밀경찰이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존재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질문에 응답하는 조사방식은 이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는 것이다. 정치 망명을 신청한 사람의 신상이 처지나 정치적 입장이 다를 수 있는 사람들 앞에서 공개되는 데 대한 우려로 할 이야기를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돌려서 말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더구나 신청인들은 제대로 된 통역의 도움도 받지 못했다. 조사 당시 출입국관리소가 제공한 통역인은 버마 출신 이주노동자로 정치적인 문제나 민주화운동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을뿐더러, 그런 내용까지 통역할 수 있는 한국어 실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었다. 난민신청 사유는 민주화운동과 그에 따른 정치적 박해위협이 핵심이기 때문에 이런 상황은 신청인들에게 대단히 불리한 것이었다. 또한 미얀마대사관을 자주 드나들며 군사정부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온 인물이었던 통역은 신청인들의 진술 내용을 적절하고 충분하게 전달해주려 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몇몇은 해당 통역을 거부하기도 했지만, 조사는 그대로 진행되었다. 이후로는 조사가 있을 때 신청인 중 한국어를 약간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이가 나서서 통역을 진행하였다. 마지못해 형식적으로 심사절차를 진행하고 있음은 조사관들의 태도나 불성실한 조사 내용에서도 역력히 드러났다. 조사관들은 고압적인 태도로 신청인들에게 반말과 부정적 언사를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불법체류를 연장하려는 불순한 목적으로 심사를 신청한 게 아니냐는 모욕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매번 앞서 한 진술 내용과 현 거주지, 직장 등을 되묻는 형식적인 조사가 반복되었고, 그나마도 질질 끈 채 심사는 마냥 지연되었다. 신청인들은 첫 조사 후에는 간간이 개별적으로, 2000~2001년에는 서너 달에 한 번씩 출입국관리소에 불려가 거주지, 직장, 버마에서의 행적 등에 관한 형식적인 질문을 받았다. 그러다 2002년에는 그 주기가 6개월에 한 번으로 늘어지더니, 2003년부터 최종결정이 내려진 2005년까지 2년 동안에는 조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청인들의 정치적 활동 내용을 증빙할 수 있는 문서나 사진 등의 자료 요청조차도 없었다. 신청인들은 난민 인정 심사에 버마의 현실이 고려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1988년의 민주화 항쟁 이후 버마 국내에는 수천 명의 학생 및 시민이 정치범으로 구속되어 있었다. 국제노동기구(이하 ILO) 자료에 의하면 버마 군부는 2003년, ILO의 인터뷰에 응했다는 이유만으로 무고한 시민을 재판에 회부하여 사형을 언도하기도 했다. 군부는 같은 해 5월, 평화적 집회를 습격하여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고 아웅산수찌를 비롯하여 NLD 주요 인사를 불법 감금한 디베인(Depayin) 학살사건을 저질렀을 뿐 아니라 여하한 정치적 발언과 집회를 금지하고 강제노동과 소년병 징집, 소수종족 억압 등과 같은 인권탄압까지 버젓이 자행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대응으로 미국이 미얀마에 대해 전면적인 경제제재를 부과하는 등과 같은 엄중한 조치를 내놓기까지 하는 상황이었지만, 난민 심사과정에서는 이러한 현지 상황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2) 난민 신청 기각과 행정소송 21명에 대한 난민 지위 인정 심사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진행되었다. 아래 연표는 심사 진행경과를 요약한 것이다. 위의 진행 상황에서 보듯 난민인정은 긴 시간에 걸쳐, 그리고 매우 제한적으로만 이루어졌다. 신청 후 근 3년이 지난 2003년에 3명, 다시 2년이 지난 2005년에 4명이 추가되어 전체 21명 중 7명에 대해서만 인정되었다. 불허된 9명12)이 이의신청을 했지만 같은 해 4월, 5일 이내에 출국하라는 권고와 함께 최종불허 결정이 내려졌다.13) 이후 행정소송14)을 진행하여 최종적으로 2006년 다시 8명이 난민인정을 받게 되었다. 2006년 2월 3일 서울행정법원 제3재판부는 마웅마웅소 외 8명이 법무부를 상대로 낸 난민인정불허결정처분취소(2005구합20993) 청구소송에서 원고 중 1명(마웅마웅저)을 제외한 8명에 대한 불허결정을 취소하라고 선고했다. 정작 난민인정 신청의 발단이 되었던 샤린은 2004년에 한국정부에 의한 난민인정이 아닌 유엔난민기구의 권고에 의한 인도적 지위로 체류허가를 받았다. 버마 민주화운동 지원모임 중 하나였던 참여연대가 당시 이 결정에 대해 발표한 환영 논평 원고측 변호인단(정정훈, 황필규, 장석윤 - 공익변호사그룹 공감)은 이번 판결에 대해, 법원이 난민인정여부 판단에 있어서 상대국과의 외교관계 등 정치적 고려를 중요한 판단기준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법무부의 주장이 이유 없고, 아울러 법무부가 난민인정 심사 시 통역을 제공치 않고도 제공했다고 거짓 주장을 하는 등 위법한 행정처분을 한 사실 등을 인정한 것이라며 환영의 뜻을 표했다. 15) 은 그간 한국 정부의 난민 지위 인정 심사 업무가 얼마나 후진적이고 반인권적으로 이루어졌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난민 지위 인정 신청이 불허됨에 따라 신청자인 NLD 회원들은 5일 이내에 출국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들은 출국연장서를 제출하여 3개월씩 단기 체류 허가를 연장해가며 숨막힐 듯한 긴장 상태에서 그 기간을 버텨야 했다.난민 인정 그후 우여곡절 끝에 난민 인정을 받은 NLD 회원들은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마침내 한국 사회에 받아들여진 데 대해 사의를 표했고, 이후 버마 민주화를 위한 다양한 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NLD 한국지부를 통해 버마의 민주화를 해외에서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으로, 한국 단체에서 시민사회 활동을 함께하는 이들도 있었다. NLD 한국지부 내부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난민 인정 신청과 심사과정에서 초미의 관심은 서로 간에 다를 것이 없었으나 난민 인정 이후 활동을 해나가며 NLD 한국지부와 미얀마공동체는 서로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여 충돌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였다. 예를 들어 2003~2004년 미등록 노동자 단속추방 저지 운동에 NLD 회원들은 냉담한 태도를 보인 채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 이주노동자 조직인 미얀마노동자회 가 대사관에 대한 항의 활동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을 때도 NLD 측은 거절했다. 이후 미얀마공동체는 미얀마 대사관의 여권밀매, 세금강탈, 비자발급수수료 강탈 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싸우다 버마행동 이라는 별도 조직을 구성하여 독립해 나갔다. NLD는 이 단체에 대해 적대시하며 차별화를 꾀하기도 했다. 그러나 2021년 미얀마 군부 쿠데타 이후에는 두 단체가 다시 뜻을 모았다. 미얀마 군부독재 타도위원회 는 NLD 한국지부원들이 개별적으로 참여하고 버마행동 과 유학생, 이주노동자들과 모두 모여 설립한 조직이다. NLD 한국지부 내부의 갈등과 다른 한편으로 이들을 지원했던 한국 시민사회와의 관계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긴 심사기간 동안 난민 인정 심사를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부천외국인노동자의집 이나 나와우리 등 한국시민사회단체는 이들과의 동행에 종종 갈등과 무리가 있었음을 고백한다. 대표적으로 아웅산수찌와 NLD 본부의 지시로 한국에서 진행한 버마 투자 반대운동 에 대해 이견이 발생했고, 2003~4년에 대대적으로 시행된 미등록노동자 단속에 대한 저항운동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었다. 비협조적인 태도로 인해 부천의 경우 연대관계가 느슨해졌다. 활동의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관한 이견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NLD 회원들의 경우 이주노동자 와 정치운동가 라는 이중 정체성 사이에서 혼란을 겪다가 결국 정치운동가의 입장을 선택했다. 반면 부천외국인노동자의집 은 NLD 회원들이 정치운동가의 정체성을 앞세우며 이주노동자의 인권문제인 미등록이주노동자 단속에 대한 저항운동에 불참하거나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인 데 대해 실망감을 금치 못했다. 이러한 입장 차이로 양자의 관계는 점차 소원해져, 점차 불가근불가원 상태에 접어들었다. 이후 부천외국인노동자의집 은 미얀마공동체를 포함한 미얀마이주노동자 조직사업, 버마 국경에 인접해 있는 태국의 메솟 지역 난민 지원 활동을 전개해왔고, 이란주가 이 단체를 떠나 설립한 아시아인권문화연대 는 미얀마 노동자에 대한 상담 지원활동, 귀환이주노동자와 연대하여 미얀마 사회 발전을 위한 교육 활동과 빈민운동 등을 해오다가 2021년 쿠데타 이후 미얀마민주주의네트워크 활동, 미얀마군부독재타도위원회 활동을 함께하고 있다. 한국 시민사회단체 자체의 부침도 이후 연대가 계속되지 못하게 되는 한 원인이 되었다. 예를 들어 나와우리 는 작은 풀뿌리 단체로서 벅찬 활동량을 소화해 나가며 활동하다가 차츰 역량이 소진되었다고 회고한다. 당시 나와우리 는 3개의 분과가 각각의 사업을 담당하는 형태였는데, 비상근 대표와 상근사무국장 1명만이 전업활동가이고 버마분과를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활동을 회원들의 자원봉사로 진행해야 했던 처지라 NLD 한국지부의 요구를 반영하여 활동하기에는 벅찼다고 한다. 나와우리 의 버마분과는 소식지인 를 2000년에만도 5회나 발간하고 매월 버마 NLD 한국지부와 정례 회의를 진행하면서 태국과 버마를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2001년에는 태국 소재 버마 망명정부 인사 5명을 초청하여 공공 기자회견과 시민단체 방문을 조직했다. NLD 한국지부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글교육을 진행하기도 했고, 난민 인정 신청인 중 한 사람인 망망르윈의 신부전증이 심각해지자 그의 치료를 위한 모금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만성신부전증으로 2001년 4월부터 개인병원에서 주 3회 혈액투석을 받아오며 신장이식을 희망했던 망망르윈은 2008년에 동생인 산르윈으로부터 신장을 기증받아 성공적으로 신장 이식수술을 받았다. 나와우리 는 사실상 가장 먼저 NLD 한국지부 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지원했던 단체였고, 한국시민사회에 이들의 활동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당시 회원 수와 역량에 비해 너무 많은 사업들을 감당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고 토로한다. 실제로 2003년 이후 나와우리 의 버마 지원 활동은 현저히 줄었고, 대표가 바뀐 뒤로는 관련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미얀마 사람들 난민으로 인정받기 위한 지난한 과정을 거쳐 한국에서 거주해오고 있는 미얀마 사람들 가운데는 유독 많이 알려진 사람들이 있다. 한국의 시민사회단체에서 함께 일을 하며 한국의 시민사회를 배워 본국에 가서 기여하고 싶다는 마웅저(Maung Zaw)와 이주노동자 밴드로 홍대 앞에서 유명세를 날리던 스탑크랙다운(Stop Crack down)의 보컬리스트인 소모뚜(Soe Moe Thu), NLD 한국지부 대표로 활동하던 네툰나잉(Nay Tun Naing) 등이 그들이다. 마웅저는 현재 한국에 없다. 조국의 민주화 소식에 가장 기뻐하며 2013년에 귀국하여 현재 미얀마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8년의 민주화항쟁에 참여했다가 군부의 탄압으로 1994년 한국에 와서 난민으로 살아왔던 20년간 그는 민주화 운동가, 이주노동자, 정치 망명가,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라는 다양한 정체성으로 살아왔다.16) 정치 운동보다는 이주노동 인권에 관심을 두고 한국의 시민사회를 배워 미얀마로 돌아가 시민운동을 하고 싶다던 그는 2002년 정치 활동에 주력하는 회원들과 갈등을 겪다가 결국 NLD를 탈퇴하였다. 이후 그는 국경지대 난민촌 아동의 교육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만원계를 조직하여 모금액을 보내다가 2010년 버마 청소년 교육지원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따비에(Thabyae)라는 단체를 설립해 활동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였던 소모뚜는 2003년 한국 정부의 이주노동자 강제추방에 맞서 성공회 대성당에서 농성을 벌인 이후 공개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버마 민주화를 위해 활동하는 버마행동 의 한국 총무, 이주노동자의 방송(MWTV) 대표, 다국적 노동자밴드 스탑크랙다운의 보컬, 이주민 인권 강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0년 11월 3일 난민인정 결정 불허결정처분 취소 청구소송 2심에서 승소하기도 했다. 소모뚜는 현재 2019년에 개소한 미얀마노동자복지센터 의 운영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복지센터는 미얀마 이주노동자의 노동, 건강, 체류 문제에 대해 SNS와 전화, 대면으로 상담하고 정보를 공유하는 이외에도 모금을 통해 미얀마를 지원하기도 한다. 2021년의 군부 쿠데타 이후 그는 미얀마 군부독재타도위원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고 있다. NLD 한국지부의 대표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네툰나잉은 수도 양곤에서 대학을 다니던 꿈 많은 청년이었다. 1988년에는 군사독재를 타도하기 위한 역사적인 8888 정치항쟁에 참여했다. 당시 학생 지도자로 활동하던 네툰나잉은 난민 인정 이후 NLD 한국지부 총무로 활동하면서 성공회대 아시아 국제 NGO 대학원 석사 과정에 입학하여 학업을 이어갔다. 2007년 2월부터 2008년 2월까지의 이 시기를 그는 매우 행복하게 떠올리며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항상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 교수님들 덕분에 나는 학비뿐만 아니라 생활비까지 제공받을 수 있었다. 처음 전화로 부모님께 이 사실을 알렸을 때 나는 무척 행복했고, 부모님 역시 나의 오랜 꿈이 실현된다고 생각하시고 매우 기뻐하셨다. 아버지는 1994년 내가 부모님 곁을 떠난 지 13년 만에 듣는 행운의 소식이라고 하시며 기뻐하셨다 라고 회고하기도 했다.17) 진중하고 의연한 지도자감18)이라고 평가받던 그는 안타깝게도 2015년 9월 4일 새벽 마흔여섯이라는 이른 나이에 심장질환으로 사망했다.버마민주화운동의 부침과 귀환 한국에 체류하는 NLD 회원들은 대체로 난민 인정 후 안정된 기반에서 활동할 수 있었지만 미얀마에서는 군부의 잔혹한 진압과 학살로 인한 유혈사태가 간단없이 이어졌다. 2003년 5월 30일 디베인 지역에서 아웅산수찌와 그 지지자들이 야간에 피습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 때문에 아웅산수찌는 다시 가택연금이 되었다. 2007년 8월 15일에는 군부가 예고도 없이 천연가스 가격을 약 5배, 휘발유/경유의 경우 1.66~2배 인상한 조치에 반발하여 일어난 항의시위에 승려들이 대거 참여한, 이른바 사프란 혁명(Saffron Revolution)이 발발했다. 민주화운동에 대해 대규모 탄압이 있을 때마다 국제사회는 미얀마 군부를 거세게 비난해왔지만,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2010년대에 이르러서야 미얀마에서는 정치 개혁이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이어 2015년 총선에서 아웅산수찌가 이끄는 NLD가 압도적 승리를 거두면서 길고 긴 군부독재도 막을 내리는 듯했다. 조국의 민주화과정을 바라보며 미얀마인 상당수가 귀국했다. 1999년 창립 초창기 40명이 넘던 NLD 한국지부의 당원도 현재는 10명 정도만 활동하고 있고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아웅산 수찌와 NLD가 선거에서 승리하고 불완전한 군사독재 청산인 상태로 민주화세력과 군부가 함께 하는 정권이 출범하자 많은 이들은 난민신청 사유가 소멸되었다고 보았고, 실제로 본국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남아서 이주노동자로 살아가거나 정치활동가로서 더 나은 미얀마를 만들기 위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8888 투쟁 이후 조국을 떠나 망명길에 올랐을 당시 이들은 한국을 목적지라기보다는 일본이나 미국으로 가는 여정의 일부라고 여겼다. 그런데 정작 와보니 한국은 8888 투쟁이 있기 한 해 전인 1987년 민주화투쟁을 통해 군부독재를 끝낸 성공신화 를 가진 나라였다. 이들은 1980년 광주에서 자신들의 고향에서 벌어지는 잔학상과 닮은꼴인 군부의 유혈탄압을 보았고, 광주시민들이 이에 평화적으로 시민연대를 이루며 대동세상 을 그려내는 것을 보았다. 어쩌면 그들은 비슷한 현대사의 굴곡을 가진 한국에서 민주화투쟁을 배우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던 것은 아닐까. 실제로 두 나라는 외세에 의한 침략과 점령, 독립, 군부독재, 민주화운동 등 매우 많은 부분에서 닮아있다. 샤린과 네툰나잉 등 NLD회원들은 인터뷰에서 광주 5.18 민주화운동과 한국의 민주화운동의 성과에 대해 언급하며 미얀마에도 언젠가 한국처럼 민주화운동을 통해 군부독재를 타도하는 일이 일어나기를 소망한다고 피력했다. 2021년 쿠데타가 발발하면서 미얀마는 다시 끓어올랐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한국의 관심도 다시금 끓어오르고 있다.한국과 미얀마: 어떻게 만날 것인가 미얀마와 한국, 어떻게 만날 것인가라는 질문에 버마행동 의 뚜라(Thura) 대표는 한국이 과거 민주화운동을 통해 군부독재 시대를 끝냈던 것처럼 언젠가 그들도 민주화를 이룰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희망의 원리는 바로 연대 라고 말하며, 일방적인 지원이 아닌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공감해 주는 것 이 그가 바라는 연대라고 덧붙였다.19) 2000년 당시 NLD 샤린의 구속과 강제추방을 막아보자는 다급함으로 시작한 버마민주화를 위한 모임은 난민 인정 조치와 더불어 규모와 활동이 점차 줄었고, 이런 배경에는 대등한 관계의 서로에게 공감하고 함께 활동하는 것보다 긴박한 사정 때문에 일방적인 지원으로 진행된 점 20)이 영향을 미친 것이라 진단된다. 2003년의 디베인 사건이나 2007년의 샤프란 혁명 당시 한국 시민사회는 다시 항의집회를 열고 성명을 발표했지만, 지속적 활동은 이주민 인권연대나 이주민의 본국 사회운동 지원 정도의 소극적인 차원에 머물렀다. 여기에 한국 시민사회단체와 NLD, NLD 회원들과 이들의 정책에 이견을 갖고 탈퇴하는 결정을 내린 다른 미얀마사람들의 관계는 앞에서 언급한 정치활동가로서의 정체성과 이주노동자로서의 이중 정체성의 문제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이 문제는 집단 간 정책과 노선의 차이를 노정해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NLD 회원들 역시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회적 약자로서 이주노동자와 미등록노동자의 지위를 공유하는 까닭에 미등록노동자 단속문제는 곧 그들 자신의 문제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정치활동가 정체성을 우선시하여 이 문제를 부차적으로 여겨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고, 그 결과 갈등이 시작되었다. NLD 본부의 정책 역시 갈등을 야기했는데, 예컨대 버마에 대한 투자를 반대한다는 본국의 정책은 당장 군부의 폭정에 신음하는 미얀마인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이라는 판단으로 동의하지 않는 의견도 있어 이를 강행하고자 하는 측과의 마찰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이 차이가 결국 연대하는 집단 사이에 거리를 만들어 낸 것으로 당시의 연대 당사자들이 회고한다. 여기에 더해 2017년, 미얀마에서 민주주의로의 이행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모두 믿었던 시기에 일어난 로힝자족 탄압사건은 미얀마 민주화를 지지하던 한국 시민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로힝자는 미얀마의 소수민족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아웅산수찌와 미얀마 정부를 지지하는 집회를 여는 국내 체류 미얀마인들의 태도를 보며 한국 시민사회는 경악하고 분노했다. 특히 NLD의 난민인정소송을 지원했고 미얀마 민주화를 지원하던 단체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란주는 버마족 중심의 미얀마에서 왜 그런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는지 그 입장에 대해 이해는 하지만 동의할 수 없어 개별적으로 또는 소수 그룹과 만나 설득하려는 노력도 전혀 소용이 없었다고 회상한다.21) NLD 한국지부는 본국의 정치 상황에 대하여 한국 사람들에게 설명하고자 했지만 격렬한 논쟁만을 불러일으킬 뿐이었고, 능동적으로 대처할 인적자원이 고갈된 상태에서 원활하지 않은 언어소통의 문제까지 더해져 서로를 이해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당시 한국단체는 미얀마에서의 로힝자 탄압상황을 묵인하는 이들에게 인권 개념에 대한 이해가 있기는 한 건지, 혹은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을 갖기까지 했다고 말한다. 로힝자족 연대사업은 대부분 이전 버마 민주화 모임에 속한 단체들도 함께 했는데 로힝자연대를 위한 해외 인사초청과 캠페인 등 활동을 벌이면서 이 사건은 소원해져가던 관계를 더욱 멀어지게 부채질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2021년 2월 또다시 발발한 군부 쿠데타와 이어지는 시민들의 항쟁은 한국에서 사그라지는 미얀마 민주화지원연대의 불꽃을 다시 살렸다. 이번에는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한 연대가 이루어지고 있다. 전국적으로 시민사회단체뿐 아니라 학생, 학계, 종교계를 망라해 항의서한을 작성하고 모금활동을 벌이며 지지와 연대를 보내고 있다. 미얀마 내에서 시민방위군이 소수민족무장단체와 연합하여 싸우면서 과거의 실수를 후회한 것처럼, 당시 아웅산수찌의 로힝자족 탄압을 묵과했던 NLD 한국지부도 기존의 태도를 바꾸었다. 그들은 유학생, 이주노동자뿐만 아니라 과거 적대시하던 이주노동자 정체성을 앞에 두던 버마행동 과도 공동으로 미얀마 군부독재 타도위원회 를 꾸려 활동하게 되었다.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공동의 과제를 수행하면서 정치적 목적을 우선시하여 소수종족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탄압을 정당화했던 기존의 인식과 행동에 성찰하고 사죄해야 한다는 대의명분을 되찾은 것은 쿠데타의 역설이라 할 것이다.맺으며: 연대의 자세 서두에 밝힌 것처럼 다른 어느 국가나 지역의 연대와 달리 가장 오랜 기간 부침을 거듭하면서 다각적인 연대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 한국-미얀마연대이다. 한국 내 이주노동자 지원으로 시작된 버마민주화연대활동은 난민신청과 인정을 위한 절박한 노력으로 이어졌고, 귀환하지 않고 한국에 거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연결과 동시에 이들을 통한 미얀마 현장의 상황에 대한 연대가 여전히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에는 미얀마 자체의 상황이 개선되지 않았다는 전제가 있지만, 그보다 한국사회에 의미가 있는 것은 상황의 동질성 때문이라 여겨진다. 미얀마사람들도 광주의 5 18과 1987년의 민주화운동을 언급하는 것처럼, 한국인들도 군부의 탄압과 학살, 언론검열 등 닮은꼴의 현장을 목도하며 같은 처지의 미얀마사람들에게 공감(sympathy)을 가진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이번 이슈페이퍼에서 더 중요한 시사점을 남긴 것은 연대에 임하는 자세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란주가 지적한 것처럼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일방적 지원 은 연대의 의미를 훼손한 요인이었을 수 있으며, 상호관계의 지속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인권, 평화, 민주라는 보편적 가치를 떠나 본국의 정치 판도를 뒤엎는 데 전념하여 지나치게 당파적 입장을 내세우는 NLD 회원들의 행보는 이들과 연대해온 한국 시민사회단체가 수용하기 어려운 지점도 있었다. 미얀마 상황이 좀처럼 호전되지 않는 가운데 다양한 이슈들과 씨름해야 했던 한국의 시민사회단체들의 부담은 갈수록 커졌고, 활동의 과부하는 역량의 소진으로 이어졌다. 몇몇 다른 미얀마 사람들은 NLD 한국지부의 활동에 동의하지 않고 탈퇴하거나 갈등했다는 점 역시 시사점을 준다. 즉 연대 활동에 임하는 자세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개인 대 개인, 집단과 집단 간의 동등한 주체에 대한 상호 인식이 전제되어야 하며 그 인식에 기반을 둔 인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강연배의 회상은 이러한 점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돌이켜보면 나와우리 버마분과는 국제연대 경험과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NLD 한국지부 를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버마민주화를 위한 모임 을 지향했고, 그럼에도 우선 NLD가 다급한 요청을 해오니 일단은 이에 응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진행하자는 것이 당시 분과 회원들의 의견이었다. 그들은 이주노동자가 아니라 정치조직, 정치난민 임을 지나치게 강조했고 야당 의원보다는 여당 국회의원을 선호했고 대단히 정치적 이었다. 그들만의 세계에 고립되어 있었다고 생각되며 보편적인 가치보다는 NLD에 유/불리한가가 가치 판단의 중심이었다고 생각된다. 단순한 지원이 아니라 진정한 연대, 소통이 필요했는데 나와우리 버마분과는 2000년 당시에는 한국사회에서 일하는 것이 서툰 그들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활동을 하는 데 급급했고, 활동의 범위도 점점 커져 매월 집회 참여, 번역작업, 국회의원 면담과 지지 요청 등의 일이 계속 이어졌다. 회원들의 자발적인 활동에 의존해야 하는 처지에서 매번 이러한 요구를 수용하기가 버거웠고, 결국 이로 인해 버마분과 활동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고 회상한다. 현재는 미얀마로 돌아간 마웅저는 귀국을 앞두고 인터뷰에서 버마에 돌아가서 국제연대활동을 하는 데 한국이 중심이 될 것이며, 한국-미얀마 청소년의 연대를 만드는 것 이라고 밝혔다. 한국에 거주하면서 배운 시민사회 활동과 민주, 평화, 인권을 조국에서 실천하고 싶다는 의지를 말한 것이다. 2000년에 우리 사회에 광범위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던 미얀마 민주화를 위한 연대는 현재 쿠데타 종식을 위한 연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 연대의 씨앗은 언젠가 미얀마 시민들이 힘겹고 긴 군부와의 싸움을 끝내고 안정된 상황에서 민주화 과정을 밟게 될 때를 예비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맹아는 한국의 어디에선가 이미 싹을 틔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각주1) Reuters. 2021. Myanmar military seizes power, detains elected leader Aung San Suu Kyi. Feb 1. https://www.reuters.com/article/myanmar-politics-int-idUSKBN2A11W62) AAPP(Burma) facebook 페이지 참고[https://www.facebook.com/search/top?q=assistance%20association%20for%20political%20prisoners%20(burma)]3) 2000년 3월 버마 NLD 한국지부 대외협력부장으로 활동하던 샤린의 강제출국상황에 맞서 한국 시민사회가 시작한 버마민주화를 위한 모임 연대 활동.4) 국제민주연대와 민주노총이 주축이 된 다국적 기업감시 네트워크가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개발된 가스의 수익이 결국 군부의 주요 수입원이 되고 있다는 국제적 비난에 토탈과 쉐브론 등 기업들은 2022년 1월 가스전 사업에서 철수했으며, 유럽연합은 2022년 2월 미얀마석유가스공사 MOGE에 대한 제재를 결정했다.5) 필자인 양영미는 버마민주화연대의 참여단체인 참여연대의 국제/국내연대 담당자로서 당시 활동에 참여하긴 했지만, 주도적 활동은 전술한 두 단체가 진행했다.6) 인터뷰 대상인 이란주가 당사자의 허락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익명으로 처리한다고 양해를 구해왔다.7) 죠스와린(Kyaw Swa Linn)이지만 한국 언론에서는 주로 샤린 또는 조샤린 , 저샤린 등으로 언급되었다. 관련 자료 검색이 용이하도록 이 글에서는 가장 많이 사용된 샤린 으로 표기한다.8) 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회, 나와우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 인권실천시민연대, 인권운동사랑방, 열린사회시민연합, 전국불교운동연합, 정치개혁시민연합, 좋은벗들(사), 참여연대, 한국노동사회연구소, 한국기독교사회선교협의회, 지구촌동포청년연대가 당시 성명에 참여했던 단체들이다.9) 당시에는 민변의 박찬운 변호사가 유일한 난민 전문 변호사였지만 2022년 현재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의 황필규 변호사, 공익법센터 어필 의 김종철 변호사 등이 난민 전문 변호사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박찬운 변호사는 이후 한양대 로스쿨 교수로 이직하고 현재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인권위원을 겸하고 있다.10) 박찬운. 2016. 내 친구 메르샴, 내 친구 내툰나잉: 난민변호사는 이렇게 탄생했다. 「박찬운의 아브라카다브라」. 2월 19일. https://chanpark.tistory.com/23311)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2006. 버마 난민 인정 심사 과정의 문제점과 원고 9인의 약력. 2월 6일.https://www.peoplepower21.org/index.php?dummy=1 mid=International listStyle=webzine search_target=tag search_keyword=%EB%82%9C%EB%AF%BC category=452434 page=2 document_srl=591952 12)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2006. 버마 난민 인정 심사 과정의 문제점과 원고 9인의 약력. 2월 6일.https://www.peoplepower21.org/index.php?dummy=1 mid=International listStyle=webzine search_target=tag search_keyword=%EB%82%9C%EB%AF%BC category=452434 page=2 document_srl=591952 13) 강국진. 2005. 5일 안으로 한국 떠나라? 버마 난민신청 탈락 9명에 출국 종용. 『시민의 신문』. 4월 21일. https://hrights.or.kr/speech_on/?pageid=280 mod=document uid=256014) 마웅마웅소 외 8명이 법무부를 상대로 낸 난민인정불허결정처분취소(2005구합20993) 청구소송15)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2006. [환영논평] 법원의 버마 난민인정불허결정처분취소소송 1심 판결을 환영한다. 2월 6일. https://www.peoplepower21.org/index.php?dummy=1 mid=International listStyle=webzine search_target=tag search_keyword=%EB%82%9C%EB%AF%BC category=452434 page=2 document_srl=59193316) 양영미. 2014. 마웅저씨의 한국에서의 20년. 『인권평론』. 5 18기념재단.17) 네툰나잉. 2008. 버마 난민으로 산다는 것. 『시민의 신문』. 9월 8일. http://www.ingo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383318)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융합자율학부 교수의 평가.19) 뚜라. 2009. 버마, 그리고 한국의 희망찾기. 『오마이뉴스』. 4월 16일.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11171220) 이란주 인터뷰 내용.21) 미얀마 내부의 갈등과 충돌을 지켜보며 조마조마했었는데 결국 터질 것이 터졌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이란주는 당시의 상황을 떠올렸다. [17] 아세안의 미얀마 사태 대응의 의미와 시사점 ㅣ 김형종 작성자 동남아연구소 조회수 1954 첨부파일 1 등록일 2022.01.05 초록2021년 2월 미얀마 쿠데타 발생 이후 국가폭력 사태에 대한 일련의 아세안 대응은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주요 회원국의 권위주의 정권이 내정불간섭 원칙의 적용과 미얀마 군부에 대한 적극적 관여를 선호하는 상황에서 아세안 회원국 차원의 단합되고 단호한 대응은 현실적으로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한편 아세안이 미얀마 군부를 정상회의에서 배제하는 등의 결정을 통해 국제적 인정은 지연시키면서도 제한된 대화채널을 통해 군부에 국제 사회 압력을 전달하고 있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미얀마 사태에 대한 아세안의 건설적 역할 확대가 아세안 규범의 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아세안 대응의 규범적 측면을 고찰하고자 한다.이슈페이퍼 17호 원문 내려받기 2021년 미얀마 쿠데타로 촉발된 민주주의와 인권의 위기가 지속되고 있다. 쿠데타 이후 전국적으로 전개된 불복종 운동을 군부가 무차별적으로 진압하며 최소 1,300여 명이 살해당하고 1만여 명이 구속되었다. 미얀마 사태에 대한 국제 사회의 비판 여론이 높지만 유엔과 아세안을 비롯한 국제기구의 역할은 여전히 제한적이다. 아세안은 2015년 정치안보 공동체 출범을 계기로 인권, 민주주의, 법치, 굿 거버넌스(good governance) 등을 주요 목표로 설정하였기에 미얀마 사태에 대한 대응은 미얀마의 인권과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당면 사안뿐 아니라 아세안 공동체 실현에 있어서도 중대한 도전이다. 아세안은 그간 내정불간섭 원칙을 내세우며 역내 주요 인권과 민주주의 위기에 소극적으로 대응해왔다. 그러나 이번 미얀마 사태에 대한 대응에서 아세안은 다소 차별화된 행보를 보이고 있다. 2021년 4월 아세안 정상은 민아웅흘라잉(Min Aung Hlaing) 사령관이 참석한 가운데 5개 합의사항을 도출했다. 하지만 이후로도 미얀마 군부의 시민학살이 멈추지 않은 상황에서 10월 아세안정상회의에 미얀마 군부의 참석을 배제시켰다. 5개 합의안에 대한 강제력이 없는 상태에서 미얀마 군부는 이를 무시하고 여전히 학살을 지속하고 있어 아세안의 한계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다. 미얀마 유혈사태 종식과 평화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아세안의 역할에 관해 다음의 질문이 제기된다. 아세안의 대응은 과거 행보와 어떤 점에서 차별되는가? 미얀마 사태는 아세안 규범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인가? 아세안의 미얀마 대응의 한계는 무엇인가? 이 글은 아세안 대응의 규범적 측면을 고찰하고 향후 아세안 역할과 한계를 살피고자 한다.아세안 규범의 발전 1967년 설립된 아세안에 대해 긍정과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지역의 안정과 평화 정착에 기여하고, 나아가 경제 협력과 지역 통합을 도모하는 아세안 공동체로의 전환은 긍정적 성과이다. 반면, 부정적 평가는 주로 정치적 측면에 집중된다. 아세안의 무조건적 내정불간섭 원칙과 만장일치 의사결정방식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아세안 방식 은 역내 민주주의와 인권 증진 등 주요 지역 현안에 대처하는 데 구조적 한계로 작용하고 있다는 평가이다. 아세안에 대한 평가는 아세안 규범의 변화 가능성을 바라보는 시각과 관련이 있다. 아세안 규범을 고정적인 것으로 간주할 경우 인권과 민주주의를 비롯한 지역 현안에 대한 아세안의 대응능력과 역할은 매우 비효율적이고 부정적인 전망으로 귀결된다. 반면 아세안 규범이 회원국의 국내 정치경제적 요인과 외부 환경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면 이러한 조건의 변화로 인해 아세안 규범의 변화가 가능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아세안 내정불간섭 원칙의 무조건적 적용은 회원국의 권위주의 정부간 암묵적 합의에서 비롯되었다. 인도네시아, 필리핀의 권위주의 통치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의 제한적 민주주의가 큰 갈등 없이 공존했다.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 등의 아세안 가입으로 아세안 내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와 진전은 더 어려워졌다. 필리핀의 1986년 민중혁명, 1992년 태국 민주화, 1998년 수하르또 체제의 붕괴 이후 몇몇 회원국의 민주주의 공고화 과정은 역내 민주화 논의에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되었다. 1990년대 후반 미얀마 사태를 계기로 아세안 내부에서는 전통적인 내정불간섭원칙에서 벗어나 유연한 관여(flexible engagement) 또는 건설적 개입 (constructive intervention)이 논의된 바 있다. 2003년 아세안 정치안보 공동체 건설에 합의하고 2008년 아세안헌장이 발효됨에 따라 아세안 발전에 있어 중요한 전기가 마련되었다. 아세안헌장은 아세안선언(1967), 우호협력조약(1976) 등 주요 협정과 다양한 역내 협력 프로그램 및 관련 규범을 체계적으로 규합하여 공동체 건설을 위한 법적,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 시도였다. 아세안헌장 초안 과정에서 논의된 2006년 아세안현자그룹보고서 (Report of Eminent Persons Group)는 아세안의 지속적 평화와 안정이 민주적 가치와 굿 거버넌스, 비헌법적 또는 비민주적 정부 교체에 대한 거부와 함께 추진되어야 함을 명시했다(ASEAN Secretariat 2006). 이를 위해서 아세안의 전원합의제 의사결정방식도 변화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만장일치 합의가 각 회원국의 주권과 이익을 보장하는데 기여하지만 아세안의 단결과 효율에는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여 이 보고서는 제도적 보완뿐만 아니라 아세안 규범과 규칙의 심각한 위반에 대한 제재 도입의 필요성 또한 주장했다. 이 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아세안헌장 제정은 역내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 확대를 의미한다. 아세안헌장의 비준 과정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미흡한 조치를 이유로 인도네시아, 태국, 필리핀 등은 비준을 연기하였다. 아세안헌장 초안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비정부기구와의 대화를 통해 정부 중심적 접근의 한계를 보완하고자 하였다. 아세안헌장에 모호하게 명시된 인권 메커니즘은 2012년 아세안인권선언 을 채택한 이후 아세안정부간인권위원회 (AICHR: ASEAN Intergovernmental Commission on Human Rights)로 구체화되었다. 회원국 간 이질성으로 인해 일괄적 합의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차선을 선택했지만 점진적인 민주주의와 인권의 강화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최종적으로 채택된 아세안헌장은 민주주의, 굿 거버넌스와 법치의 강화, 인권과 기본적 자유의 촉진과 보호를 명시하였지만 전원합의에 기반 한 의사결정제도, 국가 주권의 존중, 내정불간섭원칙을 유지했다. 규칙과 규범의 심각한 위반에 대해서는 아세안 정상회의에서 논의하여 결정한다고 명시했다. 이러한 최종안은 당시 회원국 간 이견을 극복하지 못하고 절충적으로 타협한 결과이다. 인도네시아, 필리핀, 태국이 민주주의와 인권 보호를 향한 아세안의 변화를 환영했던 것과 달리 다른 국가들, 특히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는 아세안 규범의 변화가 국내 정치에 대한 영향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여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 이들은 아세안의 무조건적인 내정불간섭 원칙을 자국 내 권위주의 통치를 방어하는 기제로 활용했다. 아세안의 경험과 회원국의 다양성을 고려할 때 아세안 헌장에 명시된 규범 간 상충 가능성이 존재한다. 역내 안정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전통적 방법인 내정불간섭 원칙을 유지하는 것과 민주주의와 기본적 자유를 촉진한다는 것은 실제 운영에 있어 상충 가능성이 높다. 아세안 회원국 간 경제발전의 격차와 정치체제 및 민주주의 차이는 이들 규범의 동시적이고 일괄적인 적용에 있어서 회원국 간 이견을 부각시키고 공동체로의 전환에 장애물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주요 회원국의 민주화 진전을 통해 지역 내 인권보호를 위한 적극적 역할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지만 실질적인 인권보호를 위한 제도적 장치들을 갖추지 못했고 AICHR도 정부 간 기구의 한계를 갖는다. 민주화의 진전이 특정 국가에 한정된 상황에서 태국의 탁신 축출과정에서 나타난 군사 쿠데타에 대해서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미얀마의 로힝자 사태와 인권탄압에 대한 아세안의 대응과 역할은 지극히 제한적이었으며 이에 따른 아세안의 비효율성, 나아가 존재 이유에 대해서도 비판이 제기되었다. 2015년 아세안공동체 출범 이후 주요 회원국의 재권위주의화 경향은 아세안 차원의 민주주의와 인권 증진과 보호에 대한 우려를 낳고 있다. 필리핀 두테르테 정권과 태국 군부의 집권은 아세안 회원국의 권위주의화를 심화시켰다. 역내 민주주의 진전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었던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도 코로나19 사태를 전후하여 권위주의 경향이 강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미얀마의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였다.미얀마 사태와 아세안의 대응 아세안 회원국의 재권위주의 강화와 코로나의 위기 속에 2021년 2월 1일 미얀마 군부는 쿠데타를 감행하고 아웅산수찌(Aung San Suu Kyi) 국가고문과 윈민(Win Myint) 대통령, 민주주의민족동맹(NLD: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관계자 등을 체포했다. 군부의 탄압에도 불복종운동은 확산되었고 연방의회대표위원회(CRPH: Committee Representing Pyidaungsu Hluttaw)는 국민통합정부(NUG: National Unity Government of Myanmar)를 출범시키며 저항했다. 2월 1일 아세안 의장국 브루나이는 성명을 통해 대화와 화해를 촉구하는 한편 아세안헌장의 민주주의, 법치, 굿 거버넌스, 인권과 기본적 자유 보호라는 목표와 원칙을 강조했다. 2월 24일 인도네시아 외무장관은 태국에서 미얀마 군부가 임명한 외무장관과 회동하며 사전 조율에 나섰고, 3월 2일 비공식 아세안장관회의에서는 미얀마 내 모든 당사자 간 폭력 금지와 대화를 촉구했다. 아세안 내부의 비판적 목소리도 아세안 규범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 역내 비정부 기구는 더욱 적극적으로 미얀마 쿠데타와 민간인 학살을 규탄했다. 2월 15일 AICHR 전 대표 8명이 성명을 발표하고 즉각적인 구속자 석방과 평화 시위에 대한 폭력 중단을 촉구했다. 3월 5일에는 말레이시아 현직 의원 59명이 미얀마 군부의 민간인 학살이 중단될 때까지 미얀마의 아세안 회원 자격을 박탈할 것을 아세안 회원국에 요구했다(Malaysiakini 2021). 아세안인권의원연합(APHR: ASEAN Parliamentarians for Human Rights)은 미얀마 사태에 관한 국제의원연합(IPAM: International Parliamentarians Alliance for Myanmar)을 결성하고 지속적으로 아세안과 유엔 등 국제사회에 적극적 대응을 요구하고 있다. 3월 19일 인도네시아 조꼬위 대통령은 성명을 발표하고 폭력사태를 규탄하며 아세안 의장에게 특별정상회담 개최를 요청하였고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필리핀이 이를 지지했다. 당시 말레이시아 총리는 미얀마 사태를 쿠데타로 규정하였다. 이들 국가의 요청으로 4월 24일에 정상회의가 개최되었다. 정상회의를 전후해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뿐만 아니라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도 폭력사용 중단과 구속자 석방을 요구했다. NUG는 아세안 정상에 보낸 공개서한을 통해 정상회의 참석 의사를 밝혔으나 결과적으로 흘라잉이 참석했다. 4월 24일 회의에서 미얀마의 즉각적 폭력중단과 모든 당사자의 자제, 국민을 위한 평화적 해결책을 찾기 위한 모든 당사자들 간의 건설적 대화, 아세안 사무총장의 지원을 통한 아세안 특사의 대화 중재 촉진, 인도적 지원 제공, 모든 관계자 면담을 위한 특사와 대표단의 미얀마 방문이 포함된 5개 합의사항이 도출되었다. 쿠데타 이후 유혈진압으로 국제사회와 단절되었던 미얀마 군부로부터 사태 진정을 위한 유의미한 합의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국제사회는 아세안의 5개 합의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당초 훌라잉의 참석이 국제적 인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비판을 의식해서 아세안 의장성명에는 훌라잉에 대한 공식 언급이 없었다. 그러나 아세안의 접근은 몇 가지 점에서 제한적이었다. 아세안을 가족 으로 언급하며 최근의 사태를 쿠데타로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쿠데타에 대한 헌법적 논란과 관련한 판단을 유보했다. 아울러 모든 당사자의 자제 를 요청한 것은 군부의 일방적 폭력 행사라는 현실과 달리 기계적 중립을 고수하려는 아세안의 접근이 반영된 것이다. 군부는 미얀마 헌법을 훼손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군부는 2020년 총선 과정에서 유권자 명단에 문제를 제기했다. 총선 당시 선거관리와 관련된 총 280여 건의 이의 제기가 접수되었다. 군부는 선관위에 총 유권자 명단의 제출을 요구했으나 헌법상 그러한 권한이 군부에 없다. 선관위 위원에 대한 임명권이 대통령에게 있기에 군부는 2021년 1월에 연방 상하원합동의회의 특별 회의 소집을 요구하며 정부를 압박했다. 흘라잉 군총사령관이 정년 65세에 임박함에 따라 민간정부가 군총사령관의 임명에 개입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시점이었다. 아울러 군부는 선관위 위원과 대통령에 대한 재량권 이탈 심사를 연방최고법원에 신청하기도 했으나 그 대상은 선거를 통한 당선자에 국한되는 것이었다. 연방최고법원장이 군부 출신이었으나 군부는 이 판단을 기다리지 않았다(Crouch 2021). 쿠데타 또한 국제사법재판소의 해석에 따르면 군부가 입법한 결함 있는 2008년 헌법에도 어긋난다. 미얀마 헌법 417조와 418조에 따르면 국가 주권을 수호하기 위해 대통령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할 수 있으며 군사령관에게 권한을 위임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는 군부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대통령을 체포한 이후 군부 출신 부통령 민 쉐(Myint Swe)에 의해서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부통령의 대통령 권한 대행은 대통령의 사망 또는 유고시에만 가능하다. 문민통치에 대한 군부의 책임은 법치의 핵심 사안으로 군부의 집권은 이에 위반된다. 비록 미얀마 2008년 헌법이 결사 및 표현의 자유, 구속적부심 청구 권리 등 인권 제한 가능성을 내포하지만 국제법상 이러한 기본적 자유의 제한은 국가 존폐와 관련된 심각한 위협이 있을 때로 국한하고 있다. 특히 사법적 절차에 의거하지 않는 군부의 임의적 구금과 체포권의 행사에 대해 면책적 특권을 행사하는 것은 심각한 인권 침해이다(ICJ 2021). 5개 합의사항에 대해 미얀마 군부는 아세안 정상과의 회의 참석이 아세안으로부터의 인정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일부 아세안 회원국 정부, 시민단체 및 국제사회는 5개 합의사항에 대한 조속한 이행을 촉구했지만 군부는 정작 합의사항이 제안 이라고 칭하며 미얀마 상황이 안정된 후에 고려할 수 있다고 밝혀 사실상 이를 거부했고 시위대에 대한 유혈진압은 계속되었다. 아세안의 후속 대응도 지연되었다. 6월 4일 브루나이 대표가 흘라잉과 미얀마 선거관리위원장을 면담하고 차기 선거와 관련하여 아세안과의 협력을 논의했다. 이 과정에서 의장국 브루나이의 접근에 문제가 드러났다. 미얀마 방문은 아세안 회원국과 사전 협의 없이 진행되었고 사후에 통보되었다. 더구나 아세안 특사 임명과 관련하여 군부의 동의를 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방문 결과 성명서에서 흘라잉을 의장으로 공식 언급했다가 뒤늦게 이를 삭제하기도 했다. 특사 자격이 아니었지만 사태의 심각성을 고려할 때 아웅산수찌 및 NUG 관계자의 면담이 절실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8월 1일 흘라잉이 아세안 특사가 임명될 경우 대화할 준비가 되었다고 밝힌 후 8월 4일에서야 브루나이 제2외교장관 에리완 유소프(Erywan Yusof)를 아세안 특사로 확정했다. 브루나이의 더디고 소극적인 대응의 배경에는 브루나이 국영 석유기업과 미얀마 군부의 석유가스 개발 이해관계 때문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특사 임명 이후 아세안의 대응은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인도적 지원에 집중되었다. 군부는 초기 코로나19로 인한 긴급 구호가 필요한 지역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거부했다. 8월 17일 유엔 안보리 회의에서 영국이 코로나 백신 프로그램의 실행을 위한 인도적 정전을 요구한 직후 아세안은 인도적 지원을 위한 회의를 개최했다. 9백만 달러 상당의 원조를 약속했으며 양곤에 아세안조정그룹을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8월 31일에는 아세안 특사가 원조활동을 위한 4개월간의 정전을 제안했다. NUG측은 정전 제안 이전에 군부의 민간인 구속 중지와 아웅산수찌 면담을 허용하는 등의 사전 조치가 필요했다고 아세안 특사의 제안을 비판했다(Irrawaddy 2021). 결국 9월 15일 아세안의 1백만 달러 상당의 구호품이 미얀마 적십자를 통해 전달되었다. 아세안 인도적 지원과 재해 관리를 위한 조정센터(AHA Centre: ASEAN Coordinating Centre for Humanitarian Assistance on disaster management)를 통해 전달되고 최종 배분은 미얀마 적십자가 맡았다. 10월 말 아세안 정상회의 및 관련 정상회의를 앞두고 아세안의 대응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정상회의를 앞둔 시점에서 군부가 수감된 일부 시위대를 석방하는 등 일종의 유화 제스처를 보인 것이다. 10월 초 아세안특사 파견이 추진되었으나 수감 중인 아웅산수찌의 면담이 불허됨에 따라 성사되지 않았다. 5개 합의사항이 이행되지 않은 상태로 아세안의 역할에 대한 국제적 압력도 증가하고 있었다. 미얀마가 참석할 경우 아세안 회원국내 반발은 물론 미국을 비롯한 관련 정상회의의 보이콧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10월 아세안 정상회의를 앞두고 의장국 브루나이는 5개 합의안 이행 미흡을 이유로 비정치적 대표자를 정상회의에 초대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아세안은 비정치적 대표자의 참석을 요청했고 미얀마측은 이를 거부했다. 군부는 아세안의 결정이 외부의 개입에 따른 것이라고 비판했다. 국제사회도 아세안과의 대화에 군부가 참여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10월 유엔사무총장은 미얀마 군부와의 공식 접촉을 피하기 위해 아세안 장관들과의 전화 대화를 연기했다(Hutt 2021). NUG도 정상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세안은 10월 29일 아세안 정상회의 및 관련 정상회의, 11월 아세안-중국 정상회의, 12월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Asia-Europe Meeting)에 미얀마 군부 참석을 배제했다. 미얀마 군부의 아세안 정상회의 참석 배제는 몇 가지 점에서 의미가 있다. 먼저 만장일치에 의한 의사결정제도의 예외라는 점이다. 전원합의제도는 특정 국가에 제재적 조치를 취할 경우도 대상국가의 동의를 필요로 했다. 2004년 미얀마가 의장직 수행을 포기한바 있으나 그 결정은 국제적 압력으로 인한 불필요한 논란을 회피하기 위한 것으로, 당시 미얀마 군부와 협의를 바탕으로 결정된 것이었다. 이번 결정은 군부와 합의 없이 배제 시킨 것이다. 규범과 규칙에 대한 심각한 위반 사항에 대해 정상회의가 최종 결정을 한다는 것이 결정 불가능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줬다. 중국과 일부 아세안 국가들이 군부의 참석을 허용하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으나 아세안 회원국 간 합의가 불가능했다. 이런 점에서 이번 결정은 모두가 동의한 배제 라기보다는 군부의 참석에 대해 모두의 동의를 얻지 못하여 배제가 결정된 일종의 역만장일치 가 적용된 셈이다. 모두가 만족하는 최저 수준에서의 합의를 선호해왔던 아세안의 전통에 비춰볼 때 이번 결정은 무조건적인 아세안 방식의 적용에 예외가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아세안-X 원칙이 경제 문제에 국한되어 모든 회원국의 선제적 동의를 전제로 허용되었으나 향후 비경제적 분야에서도 적용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둘째, 미얀마 군부입장에서 본다면 국제적인 정권 인정이 좌절된 것이다. 태국 군부가 집권 과정 중에 아세안 관련 회의에 참가했다는 점은 미얀마 군부에게도 아세안 관련 회의 참석이 대외적 인정의 중요한 기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군부는 4월 회의 참석을 아세안의 공식적 인정으로 주장한 바 있으나 이번 아세안의 결정으로 이러한 희망에 제동이 걸렸다. 아직까지 아세안의 공식사이트 내 회원국 소개 자료는 미얀마 정부 수반으로 윈민을 소개하고 있다.1) 나아가 NUG가 정상회의 참석을 요청한 사실을 아세안이 공식적으로 언급했다는 점은 비록 성사되지 않았지만 군부에 대한 압박의 일환으로 풀이된다(Ben Bland 2021). 아세안은 미얀마 군부에 대한 거리두기를 통해 국제 여론의 부담을 더는 한편 군부와의 협상에 보다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고자 했다. 미얀마 군부에 대한 국제 인정 여부는 유엔에서도 중대한 사안이다. 12월 7일 유엔 총회는 자격심사위원회의 권고를 승인하여 쪼모뚠(Kyaw Moe Tun) 유엔대사 자격을 유지하며 군부의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셋째, 쿠데타에 대한 헌법적 해석을 유보하는 동시에 정부가 아닌 국가 로서의 미얀마에 회원국 자격을 유지하고 있다. 군부를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한편으로 군부와의 공식 채널은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4월 당시 회의는 군부를 정부 수반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국내 정치적 안정과 민간 정부 이양을 추진하기 위한 협상 대상자로 군부를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실제 정상회담을 제외한 기타 다양한 수준의 아세안회의에 여전히 미얀마 군부가 장악한 정부 대표자들이 참석하고 있다. 10월 아세안 정상회의 의장성명서에는 아세안을 가족 으로 묘사하고 있다. 가족의 개념은 아세안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정치적 상황과는 분리하여 모든 회원국을 아세안의 일원으로 간주하고 있다. 아세안의 발전과 회원국 확대는 동남아시아의 지역 정체성 형성에 기여했는데 만약 미얀마가 제외될 경우 아세안 정체성이 훼손되고 공동체 건설도 차질이 불가피하다. 아세안은 공동체 건설과정에서 경제발전과 코로나 극복이라는 현실 과제에 집중하는 한편 미얀마 사태로 인한 영향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 넷째, 아세안 입장에서는 국제적 신뢰도를 유지하는 결정이었다. 군부가 5개 합의사항 이행을 사실상 거부함에 따라 아세안이 무력하게 비춰진 것이 사실이다. 미얀마 사태와 관련한 아세안 회원국 간 이견 심화로 아세안 정상회의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도출하지 못한다면 아세안의 국제 신뢰도와 아세안 중심성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우려되었다. 아세안 회원국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할 때 아세안 역할에 대한 한계가 예상된 시점에서 선제적인 군부의 참석 배제는 아세안이 국제사회 압력을 전달하는 통로로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지난 4월 안토니우 구테흐스(Antonio Guterres) 유엔 사무총장은 지역기구의 역할을 강조하며 안전보장이사회가 아세안과 협력할 것을 요청했다. 5월에는 미얀마 군부가 합의를 이행하도록 아세안이 신속하고 강하게 행동할 것과 국제 사회가 아세안을 지지하여 인권 보호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연합뉴스 2021). 아세안 5개 합의사항에 따른 특사 파견과 관련해서 향후 유엔과 공동 특사 파견도 모색된 바 있다. 아세안은 여전히 미얀마에 유의미한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지역기구로 인식되고 있다.아세안 대응의 한계와 가능성 미얀마 사태에 대한 아세안의 대응이 아세안 규범의 변화 가능성을 보였지만 여전히 한계를 가진다. 이는 아세안 회원국의 정치적 상황과 아세안 규범의 양면성에서 비롯된다. 아세안의 접근은 쿠데타에 대한 거부가 아닌 유혈사태 중단과 인도적 지원에 집중하고 있다. 유엔의 논의에서 아세안 회원국 정부는 여전히 미얀마 사태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2021년 6월 19일에 채택된 유엔 총회 결의안(119-1)은 폭력 중단, 2020년 선거에서 표출된 시민의 민주주의 의지 존중, 정치범 석방, 비상사태 종료 및 미얀마에 대한 무기 수출 금지를 촉구했다. 그러나 이 결의안 채택에서 브루나이,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과 중국은 기권했다. 심지어 모든 아세안 회원국이 미얀마로의 무기 수출 금지 조항의 삭제를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Forum-Asia 2021: 9). 협의를 중시하는 아세안의 전통을 고려할 때 민주주의와 인권에 있어 규범 촉진자로서 의장국 역할은 중요하다. 그러나 2021년 의장직을 수행한 브루나이의 경우 전제군주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샤리아법 도입과 함께 권위주의 통치가 강화되고 있다. 또한 석유와 천연가스에 의존도가 높은 경제구조로 인해 미얀마 군부와 경제적 이해관계를 맺고 있다. 아세안 특사 임명의 지연 과정에서 브루나이의 소극적 대응으로 아세안이 5개 합의사항 이행을 위해 추가적 압박을 취할 적기를 놓치는 결과를 낳았다. 군부의 정상회의 참여 배제도 브루나이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 회원국 간 합의 실패에 따른 절충안의 성격이 짙다. 차기 의장국인 캄보디아의 정치적 상황과 외교적 행보를 고려할 때 미얀마 군부와 타협으로 선회할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회원국 내 이견은 더욱 심화될 전망이다. 이미 캄보디아 훈센 총리는 미얀마를 아세안 가족의 일원으로 지칭하며 미얀마를 고립시키기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적극적으로 군부와 협력하여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밝혔다(Aljazeera 2021). 문제는 캄보디아가 아세안 회원국과 협의 없이 독단적으로 행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훈센 총리는 12월 7일에 미얀마 군부가 임명한 외무장관을 만난데 이어 2022년에 미얀마를 방문하여 흘라잉을 비롯한 군부 지도자를 만날 계획이라고 밝혔다. 캄보디아 외교부장관 쁘락 속혼(Prak Sokhonn)을 미얀마 특사로 임명했으나 아세안 회원국의 동의를 거치지 않았으며 군부 면담 계획만을 밝힌 상태이다. 캄보디아측은 2022년 3월 예정된 19차 아세안 군사령관회의에 흘라잉을 초대했다. 2012년 아세안 의장국인 캄보디아가 남중국해 이슈와 관련 중국 측 입장을 지지하면서 유례없이 공동성명서 채택이 무산된 바 있다. 더욱 심화된 중국에 대한 정치경제적 의존관계를 고려할 때 캄보디아가 미얀마 사태와 관련해서 중국 입장을 지지할 가능성이 높다. 아세안의 대응 과정에서 드러난 또 다른 규범은 중립성 원칙이다. 아세안은 냉전 시기 강대국 정치에서 어느 한편에 서기보다 중립성을 통해 정치적 자율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평화자유중립선언(ZOPFAN: Zone of Peace, Freedom and Neutrality) 이후 중립성 확보는 아세안의 주요 원칙이자 규범으로 발전했다. 현재 중미갈등에서 아세안 중립성을 유지함으로써 이른바 아세안 중심성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중립성은 단지 파워 게임에 국한되지 않는다. 미얀마 사태와 관련해서도 제재를 주도하는 미국 및 서방과 쿠데타 문제를 내정으로 간주하는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아세안의 대응은 그 중간에 위치한다. 미국은 쿠데타 직후 군부의 해외자산 동결을 강화하는 등 제재를 강화했으며 국가안보고문 제이크 설리반(Jake Sullivan)은 10월 25일 NUG측과 화상회의를 가졌다. 반면 중국은 미얀마 사태를 쿠데타로 규정하지 않으며 내정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중국의 경우 NLD 집권 시기에 추진된 일대일로 협력사업의 지속을 위해 군부와 협력을 원하고 있다. 이들 상임이사국의 입장차이로 유엔 안보리도 미얀마 관련 대응에 의미 있는 진전이 어려운 상황이다. 아울러 9월 기준 미얀마 인도적 지원을 위한 기금은 당초 목표액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UN News 2021). 강대국의 갈등 및 입장 차이와 중국의 지역 내 영향력을 고려할 때 아세안이 기계적 중립성을 지키는 데 그칠 경우 미얀마 사태 해결은 요원할 것이다.맺음말 미얀마 쿠데타 이후 국가폭력 사태에 대한 아세안 대응은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아세안의 주요 관심과 우려는 유혈사태 중단과 안정에 중점을 두고 있다. 5개 합의사항 이행과 특사 파견이 지연되는 상황에서 정상회의를 제외한 다양한 수준에서 미얀마 군부 대표자가 아세안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주요 회원국의 권위주의 정권이 내정불간섭 원칙의 적용과 미얀마 군부에 대한 적극적 관여를 선호하는 상황에서 아세안 회원국의 단합되고 단호한 대응은 현실적으로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제한된 대화채널을 유지하되 군부의 국제 사회 인정은 지연시키며 정상회의 참석 배제 등 군부에 다양한 방법으로 국제 사회의 압력을 전달하고 있다. 만장일치 규범의 무조건적 적용에서 다소 변화된 모습을 보인 것은 향후 아세안 역할과 활용 가능성에 있어 긍정적 변화이다. 정상회의에게 부여된 실질적 권한은 만장일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역 만장일치를 활용하여 규범의 심각한 위반에 대한 불이익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인도적 지원을 통한 관여는 정치적 인정을 거부하며 미얀마 시민을 도울 수 있는 의미 있는 역할로 국제 사회 연대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아세안의 향후 역할과 국제적 차원의 활용은 역설적으로 아세안 규범의 활용에 있다. 아세안의 규범적 중립성은 고정된 가치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아세안은 특정 사안에 대한 규범 스펙트럼에서 중간적 위치를 확보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여 왔으며 때로는 기계적 중립을 선호했다. 미얀마 사태에 대한 역내외의 지속적인 민주화 요구와 군부에 대한 규탄 압력은 아세안이 선택할 수 있는 규범 스펙트럼을 확장시킬 것이다. 이 경우 아세안의 중립적 지점은 보다 민주주의와 인권 보호를 위한 실질적인 조치에 가깝게 이동할 것이다. 아세안의 중심성은 규범 활용을 통한 국제 신뢰도를 향상시키며 발전할 수 있었기에 미얀마 사태는 아세안공동체의 위기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시민사회 국제연대를 통해 인권 및 민주주의에 대한 아세안의 책임과 역할을 지속적으로 강조할 필요가 있다.* 각주1) https://asean.org/about-asean/member-states/myanmar-2.* 참고문헌연합뉴스. 2021. 유엔 사무총장, 아세안, 미얀마 군부에 강하게 대응해야. 5월 12일. https://www.yna.co.kr/view/AKR20210512063000084.Aljazeera. 2021. Cambodia s Cowboy Diplomacy in Myanmar Isolates ASEAN. December 22.https://www.aljazeera.com/news/2021/12/22/cambodias-cowboy-diplomacy-in-myanmarisolates-asean.ASEAN Secretariat. 2006. Eminent Persons Group(EPG) on the ASEAN Charter. https://www.asean.org/wp-content/uploads/images/archive/19247.pdf.Bland, Ben. 2021. ASEAN Muddles through on Myanmar. https://www.lowyinstitute.org/theinterpreter/asean-muddles-through-myanmar.Crouch, Melissa. 2021. Myanmar Coup Has No Constitutional Basis. East Asia Forum. https://www.eastasiaforum.org/2021/02/03/myanmar-coup-on-the-pretext-of-a-constitutional-fig-leaf.Forum-Asia. 2021. A Coalition of the Unwilling: ASEAN s Response to the Crisis in Burma/Myanma. https://www.forum-asia.org/?p=36053.Hutt, David. 2021. Does It Matter If Myanmar s Junta Leader Is Banned From the ASEAN Summit? https://thediplomat.com/2021/10/does-it-matter-if-myanmars-junta-leader-is-bannedfrom-the-asean-summit.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 2021. Myanmar: Military Coup d tat Violates Principles of Rule of Law, International Law and Myanmar s Constitution. https://www.icj.org/myanmarmilitary-coup-detat-violates-principles-of-rule-of-law-international-law-and-myanmarsconstitution/Irrawaddy. 2021. NUG Questions ASEAN s Ceasefire Agreement With Myanmar Junta. September 6. https://www.irrawaddy.com/news/burma/nug-questions-aseans-ceasefire-agreement-withmyanmar-junta.html.Malaysiakini. 2021. ASEAN Should Suspend Myanmar s Membership until Killing Stops. March 5. https://www.malaysiakini.com/columns/565468.UN News. 2021. Myanmar: UN Expert Says Current International Efforts Failing, Urges Change of Course.'" https://news.un.org/en/story/2021/09/1100752. [16] 베트남의 코로나 19 4차 유행과 대응 검토 ㅣ 백용훈 작성자 동남아연구소 조회수 1008 첨부파일 1 등록일 2021.12.15 초록코로나19 대응의 모범 국가로 주목을 받았던 베트남에서 4차 유행이 2021년 4월 말부터 지속되고 있다. 이 글의 주요 목적은 베트남의 1-3차 유행과 4차 유행 초기 시기의 양상을 확인하고 방역을 위한 서로 다른 접근이 얼마나 상이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가를 규명하여 그 시사점을 검토하기 위한 것이다. 이 글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주요 변수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대응 체계, 방식, 규율, 그리고 사회적 반응에 관한 것이다. 분석을 위한 시기적 범위는 4월 말부터 7월 초까지다. 이 시기는 두 대도시, 즉 하노이와 호찌민시 인근 지역에서 감염이 확산되기 시작한 시점부터 한 달 여 정도의 기간에 해당한다. 감염병의 확산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중앙 혹은 지방정부의 규율과 선제적 대응, 그리고 그 규율이 시민들에게 제공되는 방식의 일관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지방정부의 자율성이 보다 강화된 상황에서는 지역사회의 맥락에 기초한 정책 대응이 요구되고 이것이 올바르게 작동할 때 시민참여와 신뢰가 증진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이 선순환 될 경우 공공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행동 규범 역시 구성원들 간에 올바르게 공유되어 건강에 대한 긍정적인 효과를 가질 수 있다.이슈페이퍼 16호 원문 내려받기전동연의 공동연구원인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베트남학전공의 백용훈 교수가 작성한 전동연의 열 여섯 번째 이슈페이퍼가 발행되었습니다.이번 이슈페이퍼는 성공적인 대응을 보여준 베트남의 코로나 1~3차 유행 시기와, 정반대의 결과를 보여준 4차 유행의 초기 확산 시기를 대조하여 검토하면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대응 체계 및 방식과 규율, 그리고 사회적 반응을 주요 변수로 주목하여 차이점을 분석한 글입니다. [15] 우리가 미얀마에 R2P를 줄 수 있나요? ㅣ 김정현 작성자 동남아연구소 조회수 2167 첨부파일 1 등록일 2021.08.09 초록R2P(보호책임) 원칙은 그 개념이 탄생한 2005년도 이래 현재까지 16년간 존재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시리아, 수단, 예멘, 그리고 미얀마에서는 두번씩이나 심각한 인권 범죄를 막는데 실패했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미얀마에 R2P를 적용한 국제사회의 개입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되묻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얀마 사람들은 왜 국제사회에 R2P를 달라고 호소하는 것일까? 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번 이슈페이퍼는 R2P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이러한 개념이 탄생한 배경과 법률적 근거가 되는 유엔헌장과 유엔총회결의문을 자세히 살펴본다. 더불어, R2P원칙을 적용한 국제적 개입 선택지로서 5가지 정책을 미얀마 사태에 적용하여 그 활용과 한계를 분석한다.이슈페이퍼 15호 원문 내려받기서론: 우리가 미얀마에게 R2P를 줄 수 있나요? 지난 2021년 3월 26일 전북대학교 동남아연구소가 주최한 동남아지역설명회에서 한 활동가는 이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 올해 2월1일에 발생한 미얀마 군사 쿠데타에 저항하여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미얀마 시민들이 We Need R2P 라는 포스터를 들고 있는 사진을 보고, 정말 우리가 그들이 간절히 요청하는 R2P를 줄 수 있는지 절실한 마음을 담아 던진 질문이었다. R2P 원칙은 그 개념이 탄생한 2005년도 이래 현재까지 16년간 존재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시리아, 수단, 예멘, 그리고 미얀마에서는 두 번씩이나1) 심각한 인권 범죄를 막는데 실패했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미얀마에 R2P를 적용한 국제사회의 개입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되묻는다. 그렇다면 R2P는 대체 무엇이길래 미얀마 사람들은 국제사회에 R2P를 달라고 호소하는 것일까? 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번 이슈페이퍼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먼저 첫째 부분에서는 R2P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이러한 개념이 탄생한 배경과 법률적 근가 되는 유엔헌장과 유엔총회결의문을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R2P 원칙에기초한 국제 개입의 선택지와 현재 국제사회의 대응을 살펴보고, 과연 어떠한 국제 전략이 미얀마 사태를 해결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지 분석해보고자 한다.1. R2P의 정의 R2P란 Responsibility to Protect(보호 책임)의 줄임 말로 인류를 대상으로 한 최악의 폭력과 박해를 끝내고자 하는 정치적 다짐을 표현한 개념 또는 원칙이다. 이 보호 책임에는 두 가지 종류의 책임이 포함된다. 첫째, 국가는 집단 학살(genocide), 전쟁 범죄(war crime), 인종 청소(ethnic cleansing), 반인도적 범죄(crime against humanity)와 같은 최악의 인권 침해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해야 할 책임을 가진다. 둘째, 국가가 보호 책임의 의무에 실패했을 경우, 국제사회는 개입하여 그 국민들을 최악의 인권 범죄로부터 보호해야 할 책임을 가진다. 그러나 이러한 R2P의 개념은 무정부 상태의 국제사회 질서에서 국가가 자신의 영토 내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진다는 1648년도 베스트 팔렌 조약(Treaty of Westphalia)의 주권 국가 개념을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국제사회의 전통 질서라고 여겨졌던 주권 및 불가침 조약, 내정 불간섭 원칙에 대응하는 R2P원칙이 탄생한 배경은 무엇이며, 국제사회는 대체 어떤 근거로 한 국가의 내정에 개입하여 보호 책임의 의무를 발동할 수 있을까?2. R2P 탄생의 배경 국제사회는 제국주의와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국가의 폭력을 경험하고, 국제 평화와 안보를 추구를 위해서 중요한 가치들은 제도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그 노력의 결과 중 하나가 1945년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미국 전 대통령의 주도로 설립된 집단안보기구인 유엔이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홀로코스트로 인해 발생한 대량의 희생자와 난민 문제를 직접 목격한 엘리노어는 안보정책을 통한 평화 추구의 한계를 주장하며,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어야 진정한 국제 평화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녀가 바로 유엔인권위원회의 초대 위원장을 역임하고 세계인권선언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이하 UDHR)의 초안을 마련한 루즈벨트 대통령의 부인, 엘리노어 루즈벨트이다. 1948년 12월 10일2)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UDHR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모든 국가가 모두 모여 선언문에 담긴 30조 항목들을 인간의 최소한의 권리로 합의하고 만장일치로 채택했기 때문에 인권 역사상 가장 중요한 문서로 평가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선언문은 문서 특성상, 그 자체로는 어떠한 법률적 강제성도 가지지 않는다는 한계를 가진다.3) UDHR의 이러한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유엔은 1953년에 법률적 강제성을 가지는 시민적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 규약(International Covenant on Civil and Political Rights: 이하 ICCPR) 과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 규약(International Covenant on Economic, Social, and Cultural Rights: 이하 ICESCR)의 초안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 두 문서는 끝끝내 합쳐지지 못한 채 분리가 되어 1966년 유엔 총회를 최종 통과하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 우리는 UDHR, ICCPR, ICESCR 이 세 문서를 모두 합하여 국제인권장전(International Bill of Rights)이라고 부른다. 음식 메뉴판에서 메뉴를 고르듯 취사선택 할 수 없는 것이 불가분성(indivisibility)을 가진 인권의 특징이지만, 냉전 시대에 미국과 소련의 사상 경쟁은 UDHR을 종합적인 국제인권협약으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ICCPR과 ICESCR로 분리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한 냉전 역사의 그늘은 현재까지도 이어져, 아직까지도 미국은 ICESCR을, 러시아는 ICCPR을 비준하지 않은 상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우리에게 인권의 개념은 국제화 및 보편화 되었으나, 그 내용을 받아들이고 집행하는 것은 여전히 국가의 의지에 달려있다는 점을 시사한다(Donnelly 2003). 인간이라면 누구나 인종, 성별, 종교, 나이, 계급 등과 관계없이 동등한 존엄과 보편적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UDHR 1조),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같은 권리를 누리며 살고 있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인권의 보편성에 대해 가장 강하게 반기를 들고 일어선 그룹은, 미국도 아니고 러시아도 아닌, 바로 아시아 국가들이었다. 냉전 이후 급격한 경제 성장을 기반으로 몇몇의 아시아의 국가들은 국제 무대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예로 1993년 비엔나 세계인권회의 준비를 하기 위해 지역별로 비공식 회의를 열었는데, 아시아 국가들은 태국 방콕에서 모여 방콕선언문을 채택, 아시아적 가치(Asian values)를 강조하며 보편적 인권이라는 서양 중심의 가치가 아시아에서 똑같이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정말로 인권에 있어 아시아성(Asianess)이라는 것은 존재하는 것일까? 싱가폴의 초대 총리였던 리콴유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Foreign Affairs라는 저명한 미국 정치 잡지는1994년 리콴유를 인터뷰하고 그 내용을 문화는 운명(Culture is density) 이라는 제목의 글로 발표했는데, 리콴유에 따르면 아시아에서 개인은 가족 또는 사회라는 개념 안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개인의 인권보다는 단체의 가치가 더 중요하며, 다수의 이익을 위해서는 소수가 희생할 수도 있다. 또한, 아시아의 정부는 작은 정부 로 가족이 제공할 수 있는 복지는 국가가 대신하지 않으며, 민주주의는 서양의 문화로서 아시아에서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의 골자이다(Lee 1994). 이는 한 국가의 경제가 성장하면 할수록, 해당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수준도 함께 향상한다는 근대화 이론을 반박한 것으로, 리콴유는 오히려 독재국가 치하에서 더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독재국가라도 국민의 배를 부르게 하는 데는 민주주의보다 나으니, 국제사회는 불가침의 원칙을 되새겨 타국의 내정간섭을 멈추어야 한다. 문화적 상대성을 강조하며 인권의 보편성을 거부한 아시아적 가치(Asian Values)는 국제사회로부터 많은 질타를 받았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주목 할만 한 것은 리콴유의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김대중 대한민국 전 대통령이 그해 겨울에 같은 저널에 기고한 문화는 운명인가(Is culture destiny?) 라는 글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아시아에도 오래된 민주주의와 인권의 철학 및 전통이 있다며 한국의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사상, 평등한 인재 등용문이었던 과거제, 지방 행정부의 부패를 잡아내던 암행어사 제도, 국민이 정부의 최고 통치자와 직접 소통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둔 신문고제 등을 예로 들어 본인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그는 보편적 인권 가치 실현과 민주주의 건설에 방해가 되는 것은 문화적 유산이 아니라 독재자들의 저항과 변명 이라며, 뿌리깊은 민주주의 철학과 전통을 기초 로 아시아는 전세계 민주주의와 인권의 발전에 공헌 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Kim 1994). 이후 인권의 보편성을 거부하는 문화적 상대주의는 아시아를 넘어, 중동, 아프리카, 미국으로까지 확장되는 추세를 보였으나, 1990년대 구 유고슬라비아가 독립, 분리되며 일어난 발칸반도에서의 네 번의 전쟁과 1994년 르완다 사태 당시 일어난 집단 학살과 같은 잔혹행위를 멈추는데 국제 사회가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실패하자, 자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가운데 코피 아난 유엔 전 사무총장은 1999년 유엔 총회 연례보고를 통해 인류를 수호 하기 위해 유엔 회원국들은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 고 주장하고, 더 나아가 2000년 새천년보고에서 국제적 개입이 주권을 침해하는 용서할 수 없는 공격이라면, 우리의 공동 인류를 뒤흔드는 잔인하고도 체계적인 인권 침해에 국제사회는 도대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라고 되물으며 인간 안보를 구축하기 위한 국제 사회 개입의 토대 마련을 시작했다(UN 2021).3. R2P의 근거와 쟁점 한 국가가 인류를 대상으로 대규모의 인권 범죄를 저지를 때, 국제사회가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주권국가의 내정에 개입하고 보호 책임의 의무를 발동하기 위한 근거는 2005년 유엔 세계 정상 회의 결의문(2005 World Summit Outcome)과 유엔 헌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2005년 유엔 세계 정상 회의 결의문은 각국의 국가원수들이 직접 채택했기 때문에 새로운 인권 규범에 대한 국가들의 정치적 의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문서이다. 본 결의문에 따르면, 국가는 자국민들을 집단 학살, 전쟁 범죄, 인종 청소, 반인도적 범죄로부터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고, 다른 나라들이 보호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서로 돕기 위해 집단 행동을 취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심각한 인권 범죄는 보통 우연히 일어나기보다 점진적으로 악화일로를 걷는 과정을 수반하기 때문에 국가들은 유엔이 이러한 범죄에 대해 사전 경고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문단 138). 이 결의문의 핵심이 되는 것은 문단 139이다. 본 문단은 만약 주권 국가가 자국민에 대한 보호 책임을 다하지 못했을 경우, 국제 사회가 적절한 외교적 인도적 평화적 수단을 사용, 그 국민들을 심각한 인권 범죄로부터 구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천명했다. 나아가 만약 평화적 수단을 사용한 국제적 개입이 실패한다면, 국제사회는 유엔 헌장 7장에 입각하여,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이하 안보리) 및 관련 지역 기구와 함께 시의적절하고 단호한 집단 행동(collectiveaction, in a timely and decisive manner) 을 취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더불어 본 결의문은 보호 책임 실현을 위한 유엔의 역할과 인권 전문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유엔사무총장이 직접 임명하는 대량학살방지 특별보좌관(the Special Adviser of the Secretary-General on the Prevention of Genocide)의 자리를 새로 개설하기로 결의했다(문단 140). 이러한 국제사회의 개입에 관한 내용은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며, 그 개념의 뿌리는 유엔 헌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유엔헌장 7장은 만약 안보리가 한 국가의 행위가 평화에 대한 위협, 파괴, 또는 침략 전쟁 중 하나라고 판단할 시, 해당국에 대해 전면 또는 부분적 경제 제재 또는 외교 단절 과 같은 수단을 활용하여 제재를 가할 수 있도록 명시해 두었다(41조). 이는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다룬 유엔헌장 6장의 내용과도 일치하는 것으로, 국가 갈등 발생 시 우선적으로 협상과 중재 및 사법적 해결과 같은 평화적인 수단을 먼저 활용하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33조). 더불어 유엔헌장 8장 또한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우선시 하면서, 이 때에 지역 기구의 활용과 역할이 중요함을 명시했다(52조 2항과 3항). 여기서 주목할 사항은 만약 41조의 조치가 불충분 시에 안보리는 국제 평화와 안보의 복원을 위해서 유엔 연합군으로 구성된 육해공군 병력을 이용한 국제 개입을 고려할 수도 있다고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7장 42조). 현재 R2P의 근거가 된다고 널리 여겨지는 2005년 유엔 세계 정상 회의 결의문의 문단 138-140과 유엔헌장 6-8장을 분석해보면, 그 내용은 앞서 정의 내린 R2P의 두가지 책임으로 요약된다. 첫째, 국가는 자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가진다. 둘째, 위의 의무가 실패할 시, 국제사회는 개입하여 그 국민들을 보호할 책임을 가진다. 그리고 이러한 국제적 개입에 있어서 국제사회는 첫째, 평화적 수단(협상, 대화, 사법적 해결, 비난 성명, 외교적 고립 등)을 먼저 사용해야 하고, 이에 실패할 시에는 둘째, 각종 제재 행위(경제 및 무기 제재, 표적 제재 등)를 포함하여 무력 행위(인도적 개입, 비행 금지 구역 설정 등)를 취할 수도 있다. 그리고 셋째, 국제사회는 이러한 방법의 해결을 지역 기구를 활용하여 먼저 모색해야 한다. 이렇게 R2P의 개념을 적용한 구체적 대응법은 R2P의 도구(R2P toolbox) 또는 R2P의 세 기둥(R2P three pillars) 이라고도 불리우며, 이는 인권 문제에 대한 보호책임의 개념이 평화적 수단 활용을 넘어 무력을 사용한 해결방법인 인도적 개입의 개념까지 확장된 것으로, 안보리의 승인 하에 국제사회가 인권 향상의 목적을 가지고 전쟁을 치를 수 있도록 허락한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R2P원칙에 기반한 국제적 개입의 선택지와 활용 가능성 그렇다면 미얀마 군부의 반인도적 범죄에 대응하기 위한 R2P 원칙의 적용에 있어서 활용 가능한 구체적인 국제적 개입의 선택지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이번 장에서는 R2P 원칙을 적용한 다섯 가지 주요 국제 및 외교 정책 선택지들을 살펴보고, 현재 국제사회가 미얀마 군부를 상대로 이러한 정책들을 실제로 어떻게 활용하고 있으며, 이들의 의의와 한계는 무엇인지도 함께 논해보고자 한다.1. 유엔인권기구의 활용 R2P원칙의 법률적 근거가 되는 유엔 헌장과 유엔 결의문 등에서는 R2P를 외교정책에 적용함에 있어서 평화적인 수단의 사용을 우선 권고하고 있다. 평화적 수단이란, 구체적으로는 협상, 대화, 사법적 해결, 비난 성명, 외교적 고립 등과 같은 정책들을 일컫는데, 이 전략에 따라 실제로 현재 대한민국을 포함한 많은 국가들과 국제 기구들이 미얀마에 다양한 방법으로 압력을 넣고 있다. 그 중에서도 첫번째 가장 우선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전략은 유엔 인권 기구를 활용하여 미얀마에 압력을 넣는 방법이다. 유엔 인권 고등판무관 사무소(Office of the United Nations High Commissioner for Human Rights: 이하 OHCHR)는 1993년 비엔나 세계인권회의의에서 국제인권전문기구 설치 요구로 신설되어 스위스 제네바에 사무국을 두고 운영되고 있다. OHCHR는 국제인권장전을 포함한 다양한 국제인권법에 근거, 각 국의 인권 정책이 국제인권법을 준수하는 범위에서 실행되고 있는지 조사하고 인권 수준 향상을 위해 권고나 제안을 하는 역할을 한다. 유엔 인권 핵심 협약으로는 앞서 논의한 ICCPR과 ICESCR 외에도 고문방지협약, 여성 차별 철폐 협약, 대량 학살 금지 협약 등이 있는데, 이와 같은 주요 유엔 협약에는 연관된 위원회가 있다. 이들은 인권 침해와 관련한 해당 국가의 사례를 조사하고 청문회를 열거나 보고서를 발간하여 정보 공개를 하는 등의 방식으로 압력을 넣는 방법(information politics)이나, 비난 성명 등을 통해 인권 침해 가해국과 가해 당사자에게 수치심을 주는 전략(naming and shaming strategy) 등을 주로 활용하여 운영되고 있다. 또한, OHCHR는 유엔인권이사회(UN Human Rights Council: 이하 HRC)에 각국 인권 정책에 대해 평가한 보고서를 제출하는 등 HRC와 협력하여 인권 문제 해결을 도모한다. HRC은 유엔총회의 산하기관으로, 인권 위기 상황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 및 국제사회의 대화를 촉진하고 국가 간 협력을 증진하고자 (구)인권위원회가 HRC로 2006년도에 격상되었다. HRC의 좌석수는 현재 47개로, 이사회의 위원들은 유엔 총회에서 절대 과반수를 득표함으로써 선출되며, 그 좌석은 지역별로 배분된다. 따라서, 아시아 및 태평양 지역에 속한 국가는 총 47석 중 13석을 차지하며,4) 2021년 7월 현재 기준으로 아시아-태평양 회원국으로는 바레인, 방글라데시, 중국, 피지, 인도, 인도네시아, 일본, 마샬 아일랜드, 네팔, 파키스탄, 필리핀, 대한민국, 우즈베키스탄이 있고, 그 중에서도 동남아는 2개국으로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이 있다(OHCHR 2021). HRC는 중대한 인권 침해 사례가 발생 시, 독립된 인권 전문가인 특별보고관을 임명하여 해당 가해국과 인권 범죄 사건을 조사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등의 임무를 맡고 있으며, 그 외에도 대표적으로 보편적 정례인권검토(Universal Periodic Review: 이하 UPR)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UPR은 HRC산하의 UPR 실무 그룹이193개의 모든 유엔 회원 국가들의 인권 상황을 5년에 한번씩(매년 약 48개국 수준) 검토하는 제도이다. 검토를 받는 국가는 자국의 인권 현황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게 되는데 이렇게 제출된 보고서와 특별보고관이 작성한 특별 보고서, 국가인권기구 및 비정부기구가 작성한 보고서 등을 참고로 하여 UPR 실무진들이 약 3시간 동안 검토 중인 국가에 질문 또는 권고를 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혹자는 유엔 인권 메커니즘이 비난, 설득, 권고 등과 같이 지나치게 부정적인 유인책(negative inducements)과 강한 강제력이 없는 대응에만 집중되어 있다고 비판한다(Baldwin 1971; Donnelly 2003). 또한, UPR이 유엔회원국들이 스스로 제출한 보고서를 중심으로 서로의 인권 상황을 검토하고 권고를 한다는 점에 있어서 보고의 객관성, 평가에 있어서 이중 잣대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국가의 셀프 보고서는 때론 변명의 장이 되기도 하고, 타국의 인권 상황에 대한 평가는 각국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친한 국가의 문제는 눈 감아 주고, 적국의 문제는 더욱 날카롭게 비판하는 것이다. HRC에 선출되어 온 이사회위원들 또한 각국의 대표들로서 국가의 이해관계를 벗어나 인권 문제만을 중립적인 관점에서 논할 수는 없다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인권법과 이를 기준으로 한 유엔 인권기구들의 조사와 보고서 작성 등이 중요한 이유는, 나중에 심각한 인권 범죄가 발생하여 가해국 또는 가해자를 처벌하고자 할 때 이들이 작성하고 수집해 온 자료들이 범죄자들을 국제법정에서 처벌하는 중요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18년 9월, HRC는 미얀마를 위한 독립 조사 메커니즘(Independent Investigative Mechanism for Myanmar: 이하 IIMM)을 발족하여, 미얀마 내 로힝자를 포함한 소수 민족을 대상으로 한 인권 범죄 가해자를 고소하고자 증거를 분석하고 소장을 준비하는 일을 시작했다. HRC는 더 나아가 2019년 9월, 미얀마의 독립 국제 사실 조사 임무(Independent International Fact-Finding Mission on Myanmar: FFM)를 발족하여 미얀마가 대량학살 금지 협약을 위반했다고 결론짓고, IIMM의 업무에 박차를 가했다. 유엔인권기구의 이러한 활동은 시민사회 활동가들이 국가에게 국제인권법이 보장하는 권리를 요구하고, 정책 변화의 압력을 넣는 중요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2. 법률적 접근 R2P를 적용한 평화적인 외교 수단 활용의 두번째로 국제사회는 국제재판소를 활용하여 미얀마에 압력을 넣을 수 있다. 인권 보호를 위한 정의와 책임을 구축하기 위한 방법으로 두 가지 주요 사법적 경로가 있는데, 첫째는 국가의 국제법 위반 및 사법적 책임을 조사하고 처벌하는 기관으로 국제사법재판소를 활용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개인의 책임 조사와 처벌을 위한 국제형사재판소의 활용이 바로 그것이다.1) 국제 사법 재판소국제사법재판소(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 이하 ICJ)는 유엔 부속 사법 기관으로 유엔 법원(UN Court), 세계 법원(World Court)으로도 불리며 유엔 회원 국가 간 의 분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실로 2017년 8월 25일을 기점으로 정리 작업(clearance operations) 이라는 명목 하에 미얀마 라카인 주(Rakhine)에서 로힝자를 상대로 한 대량학살이 전면화 되고 이 과정에서 7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방글라데시로 도망쳐 난민이 되자, 세계 인권 활동가들과 법률 전문가들은 가장 먼저 ICJ를 통한 해결법을 강구했다. 2019년 11월 11일 서아프리카에 위치한 나라 감비아(Gambia)는 유엔 내 무슬림 국가들을 대표하여 미얀마 정부가 자국민들을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수 민족인 무슬림 로힝자들을 대상으로 대량학살 금지협약(Convention against Torture)을 위반했다 하여 ICJ에 소를 제기했다.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2020년 1월 2일, ICJ의 17명의 판사들은 만장일치로 미얀마 정부에 힘이 닿는 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all measures within its power) 대량학살을 막고,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잠정조치(provisional measures)를 통해 로힝자들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보통 ICJ에서 판결을 받기 위해서는 조사와 변호 등 절차상의 이유로 매우 긴 시간이 소요되지만 이번 명령은 매우 빨랐는데, 그 이유는 ICJ가 미얀마 정부의 로힝자를 대상으로 한 폭력이 대량학살금지법의 사법적 기준을 사실상(prima facie) 넘어선 인권 범죄로 판단했기 때문이다(GCRP 2020). 그러나 아직 최종 판결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ICJ는 잠정 조치를 통해 미얀마의 행동에 규제를 가하고자 했다. 잠정 조치의 내용에는 총 4가지 항목이 포함된다. 미얀마 정부는 첫째, 대량학살 예방 조치를 취해야 한다. 둘째, 미얀마 군 경이 대량학살을 저지르지 않도록 감시 해야 한다. 셋째, 대량학살이 발생 시, 모든 증거를 보존해야 한다. 넷째, 위의 내용을 준수했다는 보고서를 ICJ에 네 달 후에 최초 제출하고(5/23/2020), 이후 최종 선고가 있기 전까지 매 6개월마다 제출해야 한다. 위의 사항을 준수하지 않을 경우, 감비아는 ICJ에 추가 조치를 요청할 수 있고, 이는 안보리에서 다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미얀마 정부가 ICJ에 제출한 보고서를 살펴보면, 미얀마는 로힝자를 상대로 한 대량학살을 전면 부정하고 있으며(BBC News 2020), 이후 3번째 보고서를 제출하기도 전에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2) 국제형사재판소 인권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 개인 의 책임을 조사하고 처벌하는 기관으로 국제사회는 국제형사재판소를 활용할 수 있다. 국제형사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Court: 이하 ICC)는 1998년 로마규정(Rome Statute)의 권고로 최악의 가해자에 의해 자행된 최악의 범죄(worst crime) 대량학살, 침략 범죄, 전쟁 범죄, 반 인도 범죄 를 다루기 위해 2002년 네덜란드 헤이그에 그 사무국이 건설되었다. ICC는 ICJ와는 차이를 가지는데 유엔 산하에 있으면서 국가간의 분쟁 문제를 다루는 ICJ와는 다르게, ICC는 독립된 재판소로 개인의 형사적 책임을 묻는다는 특징이 있다. 다시 말해 ICJ에서는 고소인과 피고인이 모두 국가지만, ICC에서 피고인은 개인이 되는 것이다. 더불어 ICC에는 고소인의 역할을 하는 총 3 주체의 정책 행위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각자 3가지 다른 방식으로 ICC에 사건을 의뢰하게 된다. 첫째, ICC에는 독립된 검사들이 있는데, 이들이 직접 특정 인권 사안의 심각성을 깨닫고 자발적으로 조사를 시작하기도 하며, 둘째, 유엔 안보리의 권고로 사건 조사가 시작되기도 하고, 마지막으로 셋째 국가가 주로 반군의 지도자를 처벌하기 위해 스스로 사건을 의뢰하기도 한다. ICC는 리비아와 수단 다르푸르의 인권 문제 해결에 앞서면서 국가 압박에 중요한 구심점이 되며, 인권 보호 실현에 중심적인 역할이 늘고 있다고 평가된다(Palmer 2019). 그러나 ICC의 최대 한계는 ICC의 사법 관할권이 로마 규정에 사인하고 비준한 국가들에게만 제한된다는 것이다. 특히 아시아 및 태평양 지역에서는 53개중 19개국만 가입해 다른 지역에 비해 비준율이 저조한 상태로, 아시아에서는 ICC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많다는 한계가 있다.5) 그러다보니 동남아 및 아시아에서 중대한 인권 범죄를 지은 가해자라 할지라도 로마 규정의 사법 관할구역이 아닌 나라에 거주 중이거나 이미 그러한 국가로 도망친 경우, 국제법에 의해 체포 및 처벌할 수가 없다. 물론 가해자를 네덜란드 헤이그의 재판소로 데려오도록 인터폴과의 협력을 통해 범죄자의 국제 송환을 요청할 수는 있으나, 이는 해당 국가의 의지와 당사국들의 외교 및 이해관계에 많이 영향을 받기 때문에 실현 가능성이 매우 낮다. 예를 들어 이번 2021년 미얀마 쿠데타 책임자로 지목되는 민 아웅 흘라잉 군 최고 사령관이 4월 24일 아세안 정상회의 참석차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국제인권단체들과 미얀마 반 군부 진영은 인터폴에 인도네시아 경찰과 협조해 민 아웅 흘라잉을 체포하여 ICC로 송환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이는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Head 2021). 그러나 사실 아세안 회원국 중 ICC로마 규정을 비준한 국가는 캄보디아와 동티모르 단 2개국이다.6) 따라서 민 아웅 흘라잉의 ICC로의 강제송환을 위한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아세안 회원국들의 협조가 없는 것은 어쩌면 자명한 일이었다. 결국, 미얀마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ICC의 활용을 강구한 것은 아세안이나 이웃 아시아 국가들이 아니라 저 먼 아프리카 대륙 출신인 ICC검사, Fatou Bensouda에 의해서였다. 흥미롭게도 Fatou Bensouda검사는 ICJ에서 미얀마를 상대로 소를 제기했던 감비아 출신이다. Bensouda검사는 2019년 7월 4일 미얀마 사건 조사를 위해 ICC에 승인 요청을 하고, 같은 해 11월 ICC 예심 위원회는 이를 받아들였다(ICC-OPT 2019).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얀마는 로마 규정의 당사국이 아님으로 ICC의 사법 관할권이 미치지 않아, ICC검사가 미얀마에서 일어난 인권 범죄를 조사할 수 없다. 따라서 ICC는 로마 규정의 회원국인 방글라데시에서 2010년 6월 1일 이후7) 일어난 로힝자 대상 인권 범죄에 관해서만 조사를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현재 ICC는 미얀마 라카인 주에 거주하던 로힝자들이 정리 작업 당시 대거 인접국인 방글라데시로 강제 추방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인권 범죄 사례 조사에 집중하고 있다. 이렇게 장소와 기간이 제한된 ICC의 조사는 그동안 시민단체와 유엔기구들이 미얀마에서 수집한 자료와 증거들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과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동남아에서 일어난 인권 범죄를 처벌하기 국제 공권력이 주도하는 정의를 위한 한걸음이라는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 국제사회는 이렇게 국제법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지속적으로 강구하고 있으며, ICC본 재판을 통하여 민 아웅 흘라잉을 포함한 미얀마 내 인권 범죄 가해자들의 처벌을 기다리는 중이다.3) 지역 인권 재판소 ICC가 당장 미얀마 내 인권 범죄를 처벌할 수 없다는 한계 때문에, 국제 사회는 ICC의 보충적 역할로 지역 인권 재판소의 활용을 고려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2021년 현재 동남아, 넓게는 아시아에는 지역을 관할하는 인권 재판소가 부재하다. 지역 인권 재판소 시스템 하에서는 개인(고소인)이 정부(피고인)를 상대로 소를 제기하게 되며, 만약 재판을 통해 국가가 유죄로 밝혀지면 정부는 피해자에게 공개 사과는 물론 배상금을 지불해야 하고 더 나아가 자국의 인권 정책을 바꿔야 한다. 이러한 지역 인권 재판소를 가지고 있는 대륙은 세 곳으로 국제 정치에서 가장 강한 인권 지역 재판소로 손꼽히는 유럽 인권 재판소(European Court of Human Rights)가 있으며, 이를 모델로 한 미주 인권 재판소(Inter-American Court of Human Rights), 이제 시작 단계인 아프리카 인권 재판소(African Court on Human Rights and People s Rights)가 현존한다. 따라서 아시아는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지역 인권 재판소를 가지고 있지 않은 대륙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그러므로 동남아를 포함한 아시아에서 왜 지역인권재판소가 출범하지 못했는지, 이렇게 중대한 인권 시스템의 부재를 아세안 내의 인권 기구 중심으로 한 분석이 시급하다.3. 경제 제재를 중심으로 위는 2019년 8월 5일 HRC에서 발간한 보고서, 미얀마군의 경제적 이익(The economic interests of the Myanmar military) 에 미얀마 군부의 수뇌부가 운영하고 있다고 알려진 미얀마 대기업 미얀마경제홀딩스(MEHL: Myanmar Economic Holdings Limited)와 연루되어 있다고 밝혀진 대한민국의 기업명들이다. 미얀마 현지 사업에 맞게 이름들에 약간씩 변화가 있었지만, 이들은 분명히 포스코, 이노 그룹, 덕양 산업, 영인기술주식회사 등의 대한민국의 기업들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미얀마 군부는 해외 그룹과 구축한 산업 네트워크를 통하여 축적한 엄청난 자본을 바탕으로, 로힝자 탄압 및 군사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민들을 사살하는 등과 같은 인권 범죄를 저지르고, 이에 대한 책임마저 회피하는 면책권을 부여 받고 있다. 또한 미얀마에 투자되는 해외 자본들이 군부의 주머니로 바로 흘러 들어가고 있기 때문에, 미얀마 군부가 운영하는 대기업들과 협력하는 해외 그룹들은 직 간접적으로 미얀마 군부의 인권 범죄를 지원하는 공범들로 간주될 수 있다. HRC는 이와 같은 내용의 보고서를 발간 후, 해당 기업들에게 소명을 요청했고, 요청에 따라 받은 답신은 모두 유엔 홈페이지에 올려놓았다. 이와 관련된 많은 한국 기업들 중에 덕양산업만이 유일하게 답변을 보냈으나, 그 내용은 미얀마 군부와의 연관성을 전면 부정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2020년 9월 앰네스티를 포함한 국제인권단체 또한 군주식회사 라는 보고서를 통하여 한국의 포스코가 국제법상 범죄 및 인권 침해에 연루된 미얀마 군부대 자금 조달과 관련 있음을 발표했으며, 2021년 3월 24일, HRC는 군사 쿠데타 이후 미얀마 인권상황 결의안을 통과시키며, 해외기업들은 미얀마군이 운영하는 기업과 사업을 더 이상 진행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했다. 국제사회는 위와 같은 정보를 기반으로 미얀마군의 자금줄을 끊기 위해 경제 제재를 활용하여 미얀마 군부에 압박을 가할 수 있다. 이는 미얀마 특별 자문 위원회(SAC-M: Special Advisory Council for Myanmar)가 제안한 글로벌 3 cuts 전략 과 일치하는 것으로, 미얀마 군부로 흘러 들어가는 무기 와 자금 을 끊고, 나아가 인권 범죄 가해자들이 누리는 면책권을 박탈하자는 전략이다(Admin 2021). 경제 또는 무기 제재는 실제로 국제사회가 미얀마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방안이다. 영국은 미얀마 쿠데타가 일어나고 사흘 뒤인 2021년 2월 4일 긴급 안보리 회의를 소집해 비난 성명을 준비하고, 이후 12일에는 유엔인권이사회 특별 세션을 소집해 미얀마 제재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해갔다. 이달 18일에는 마침내 미얀마 군사 쿠데타 책임자 3인에 대한 긴급 자산 동결 및 여행 금지 조치를 취했으며, 더 나아가 내달 25일에는 미얀마와 모든 무역을 일시 중지하는 정책을 실시했다(UK 2021, 2021a, 2021b). 미국 또한 2월 11일 행정명령 14014호를 통해 미얀마 상황과 관련한 자산을 모두 차단했으며, 미국 내 또는 해외에 거주 중인 미국인을 포함한 전 국민을 대상으로 미얀마 군부와 관련된 기관과 업무 금지조치를 취했다(WH 2021; USDT 2021). 그러나 3월 23일, 중국과 러시아는 정상회담을 가지고 영국과 미국을 포함한 서방 국가들이 미얀마에 내정간섭을 하고 있다며 미얀마를 상대로 한 국제사회의 경제제재 노력에 반기를 들었다(AP 2021). 이러한 국제 정세에서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은 아시아 파트너 국가들에게 민주주의를 위한 동맹 을 요청하며 아시아 지역과 인도-태평양 전략을 위해 특히 한국이 더 많은 역할을 해주기를 부탁했다. 실로 한국은 미얀마에 미국보다 더 큰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국가로 평가된다. 2020년을 기준으로 한국은 미얀마의 6번째로 큰 해외 투자자로 기록되었으며, 한국은 단기간에 급속한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이뤄 미얀마를 포함한 많은 동남아 국가들에게 있어 롤 모델 국가로 인정받고 있다. 예를 들어, 2014년 미얀마 정부는 미얀마개발연구원(MDI: Myanmar Development Institute)을 설립했는데 이는 한국개발연구원(KDI: Korea Development Institute)을 모델로 한 것이다. 이 외에도 양국은 그동안 꾸준히 경제협력을 위해 노력해왔는데, 2019년 9월 문재인 대통령이 미얀마를 방문했을 때 양국은 무역 산업 에너지 투자 분야에 걸쳐 포괄적 협력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장관급 경제협력 채널인 통상산업협력공동위원회를 출범했다. 이에 따르면, 한국 정부는 한국 기업의 미얀마 진출 지원을 위하여 미얀마 정부 내에 코트라(KOTRA)를 통하여 Korea Desk를 설치하고, 2024년까지 양곤시 북측에 225만 제곱미터 규모의 경제협력산업단지를 구축해 신도시 개발과 기반시설분야에서 협력을 이어나가게 된다(하정욱 2020). 그러나 2021년 2월 2일 미국이 미얀마 사태를 공식적으로 군사 쿠데타 로 명명한 이후, 3월 12일 한국 정부는 미얀마군과의 협력 중단을 선언하고 군용물자 수출을 허용하지 않기로 하고, 미얀마와의 개발협력사업(ODA) 또한 재검토하기로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부는 현재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미얀마 국민에게 특별 체류 허가를 부여했다. 그러나 정부는 아직 미얀마 군부가 운영하는 기업이나 이와 협력하고 있는 한국 기업에 대해 경제 제재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따라서 현재 미얀마에 대한 한국 경제제재의 수위는 영국이나 미국의 것보다는 낮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포스코는 4월 16일 MEHL와 관련한 지분을 매각하기로 결정했는데, 포스코의 이런 정책결정은 한국 정부의 경제 제재 노력에 대한 결과라기보다는 시민단체들의 꾸준한 압박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앰네스티 2021).4. 인도적 개입 R2P를 외교정책에 적용함에 있어 국제사회는 보호책임 완수를 위해 각종 제재 정책을 포함한 무력의 사용(인도적 개입)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인도적 개입(Humanitarian Intervention)이란 전쟁을 의미하는 것으로 긴급구호, 재난대응과 같은 인도적 지원(Humanitarian assistance)의 개념과는 구별된다. 인도적 개입은 인권 향상이라는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시작되는 전쟁으로 그 목적은 다르지만, 이의 수단과 방법은 일반적인 전쟁과 같다.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국제사회는 R2P의 집행에 있어서 여러가지 정책적 전략을 고려해 볼 수 있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유엔헌장 6장이 제공하는 협상 및 성명, 사법적 해결과 같은 평화적 수단의 사용이고, 두 번째는 유엔헌장 7장이 제공하는 경제제재와 무력사용,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유엔헌장 8장에 따른 지역 기구의 사용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주지하고 있다시피 R2P의 첫 번째와 세 번째 정책 도구들은 이미 국제사회로부터 가장 먼저, 그리고 널리, 사용되는 국제 대응 정책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한계 또한 명확 하기에 국제 사회는 최근 두 번째 전략, 특히 인권을 위한 전쟁인 인도적 개입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아마도 미얀마 시민들이 쿠데타에 대항하여 민주화 운동을 전개해 나갈 때 국제사회에 간절하게 호소했던 R2P가 가리키던 진정한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주지해야 할 점은 근본적으로 타국에 대한 무력사용은 유엔헌장에 명시된 불가침(1장)과 비개입원칙(2조 4항과 7항)에 전면적으로 배치되는 사항이며, 무정부(anarchy) 상태인 국제체제에서 한 국가의 국경 내에 가장 높은 정치적 권력은 그 국가에 있다는 주권(sovereignty) 국가의 개념에도 위배되는 사항이다. 때문에 보편적 인권의 개념이 서구 중심의 개념이라 하여 문화적 상대성을 내세우며 반대하는 아시아 국가들, 그 중에서도 특히 동남아 지역에서는 인권 문제를 내세우며 내정에 간섭할 여지를 열어둔 유엔의 R2P 원칙과 인도적 개입이 곱게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더불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아무리 인권 향상과 같은 옳은 목적을 가진 전쟁이라도, 전쟁은 전쟁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전쟁의 비용과 부작용은 피할 수 없는 결과일 것이다. 따라서 국제사회가 인도적 개입에 대한 정책적 판단을 내릴 때에는 정의로운 전쟁 이론(just war theory)에 따라, 전쟁이 성공할 확률, 예상되는 부대 및 민간인 사상 사망자, 여론, 전략적 이익 등과 같은 요소들을 전쟁에 가기 전(jus ad-bellum)과 전쟁에 가서 적과 싸우는 과정(jus in-bello)중에 끊임없이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국제사회가 싸울만한- 도덕적으로, 법적으로, 전략적으로- 옳은 이유와 책임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인도적 개입을 바로 실행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주지해야 한다. 우리는 인도적 개입이 전쟁을 의미한다는 것을 인지해야 하며, 전쟁은 다른 수단을 사용한 정치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5. 지역 기구의 활용 마지막으로 미얀마 사태 해결을 위해 국제사회는 지역기구를 활용하여 미얀마 군부에 압박을 가할 수 있다. 유엔헌장에 따르면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정에 위협이 될 만한 갈등이 발생 시, 당사국들은 가장 먼저 지역기구를 활용하여 해결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유럽에 유럽연합이 있듯이, 동남아 또한 지역의 평화와 안정 및 경제 성장을 추구하고 사회 문화 발전을 도모한다는 목적 하에 1967년 아세안을 창설했다. 그리고 현재 아세안은 미얀마를 포함한 동남아 총 10개국을 회원으로 하여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사무국을 두고 운영되고 있다. 그렇다면 최근 미얀마의 군사 쿠데타와 민주화 운동 유혈 진압 사태에 대해 국제사회의 이목이 미얀마와 동남아의 인권 이슈로 주목되는 가운데, 아세안은 이에 대해 어떠한 대응을 취하고 있을까? 미얀마의 인권 사태에 대하여 동남아 지역 기구인 아세안의 더욱 큰 역할에 대한 요구가 국제사회로부터 빗발치는 가운데, 아세안 회원국의 정상들은 4월 24일, 아세안 특별정상회의를 통하여 미얀마 사태를 논의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 특별정상회의에 미얀마군 총사령관인 민 아웅 흘라잉이 참석하기로 하면서 국제사회는 아세안이 미얀마 사태에 좀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해줄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세안은 2009년 그 산하에 아세안 인권기구(ASEAN Intergovernmental Commission on Human Rights: 이하 AICHR)를 설립하고 2012년 아세안 인권선언문을 연달아 발표하면서, 인권을 바라보는 전통적인 아시아적 가치 시각에서 벗어나 회원국들에게 인권 정책의 수립과 집행에 있어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요구하도록 변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국제사회의 기대에 부응하듯, 특별정상회의 동안 아세안 회원국들은 미얀마 사태 해결을 위한 5개 합의 조항을8) 이끌어 내어 회담 초기 안보리를 포함한 국제사회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연합뉴스 2021a). 그러나 현재는 국제인권단체가 염원했던 인터폴의 민아웅 흘라잉의 체포도 수포로 돌아가고, 5개의 합의 조항들 또한 제대로 이행되지 못해 국제사회로부터 허울뿐인 메세지 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박선하 2021). 앞서 여러 번 논의했다시피, 아시아와 동남아 지역의 인권 정책에 대한 태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아세안의 원칙들이 있다. 아세안의 헌장에서 규정하고 있듯이 동남아 국가들은 주권 불가침(아세안 헌장 2장2조 a항), 무력사용 금지(c항), 내정불간섭(e항), 외부 간섭으로부터의 자유(f항) 등 아세안의 가치와 방식(ASEAN Way)을 최우선시 하고있다. 흥미로운 점은 인권 보호라는 가치를 위해서 어느 정도의 주권은 양보 되어야 하는 인권기구에서 마저도 주권을 강조하는 원칙들은 AICHR의 헌장에서 그대로 발견된다(AICHR ToR 2장 1조a와 b항). 뿐만 아니라 AICHR을 운영하는 구성원들이 각국에서 파견된 국가 임명직이라는 한계점도 존재한다. 특히 태국과 말레이시아에서는 AICHR에서 일할 공무원을 뽑는 방식으로 오픈 경쟁 체재를 도입해, 외교관 선발 과정에 있어 강한 국가의 충성심을 시험한다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실로 대다수의 아세안 회원국들은 보편적 인권 개념을 거부하는 추세이며, 지역 내 인권 문제 해결에 있어 아세안의 적극적인 역할을 선호 하지 않는다. 이는 싱가폴 제2외교부장관이 주장한 아세안 인권 기구가 규범적이기보다 자문적 역할에 그쳐야 한다는 성명과 일치하는 것이다(Hara 2019). 그렇다면 아세안은 미얀마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혹자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 대답의 배경에는 2005년 미얀마가 국제사회와 아세안 국가들의 압력에 의해 아세안 의장국 자리를 포기한 사건이 있었다. 아세안의 의장국은 알파벳 순서로 순환하는 방식으로 되어있는데, 2005년 7월 미얀마가 의장국을 맡게 될 순서가 오자 미국과 유럽은 [미얀마는] 인권을 유린하고 민주화 운동을 탄압한다 며 미얀마가 의장국이 되면 아세안 회의에 참석하지 않겠다 고 아세안을 압박했다. 당시 미국과 유럽으로부터 엄청난 지원금을 조달 받고 있던 아세안 입장에서 이들의 회의 불참은 곧 아세안에 대한 지원 중지를 의미했으므로, 아세안은 미얀마에 어쩔 수 없이 압력을 넣었다. 결과적으로 미얀마는 현재 추진 중인 민족 화합과 민주화 과정에 집중 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아세안 의장국 자리를 포기하게 된다(황장석 2005). 위의 사례는 아세안이 서방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며, 나아가 미얀마 또한 아세안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국제사회나 아세안은 이러한 메커니즘을 현명하게 활용하여 미얀마에 압력을 넣는 정책을 모색해 볼 수 있다.결론: 앞으로 나아갈 길 우리는 지금까지 R2P에 대해 알아보고, R2P원칙을 적용한 국제적 개입 선택지로서 5가지 주요 정책을 미얀마 사태에 적용하여 그 활용과 한계를 분석해보았다. 비록 R2P의 개념은 생소했더라도 구체적인 정책의 내용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인 독자들이 많았으리라 예상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R2P라는 개념이 아직 보편화된 국제인권규범으로 널리 받아들여진 원칙은 아니라는 점이다. R2P원칙은 2005년 처음 대두되어 심각한 인권 유린 사태가 발생할 때마다 국제사회에 더 큰 책임을 요구하며 주목받고 있으나, 국제사회는 아직도 중대한 인권 사안에 대해 R2P를 적용하는 것이 옳은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것은 국제사회의 R2P원칙에 대한 이해가 아직도 변화하고 있는 과정에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R2P적용 실효성에 대한 불확신의 결과물 일 수도 있다. 특히, R2P가 주목받았던 이유는 타국가의 인권 사태에 대해 무력을 사용한 국제 개입의 길을 열은 인도적 개입이라는 새로운 개념 때문이었으나, 유엔 안보리의 승인이 너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R2P를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모색한다는 의견도 있다. 유엔 안보리는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 등 5개의 상임이사국과 유엔총회를 통해서 선출되어 2년마다 교체되는 10개의 비상임이사국으로 구성되어 있다.9) 안보리의 결정은 투표로 이루어지는데 인도적 개입과 같은 중요한 사안은, 안보리 이사국 중 2/3 이상의 이사국이 찬성하고(9 votes) 상임이사국이 거부권을 사용하지 않았을 때(no veto), 안보리의 승인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모두 주지하고 있다시피, 중국과 러시아는 내정 불간섭의 원칙을 내세워 미얀마 사태에 대한 유엔의 개입을 전면 반대하고 있다. 그렇다면 국제사회는 현재 안보리의 의사 결정 구조를 유지하는 한 중대한 인권 문제를 방관 밖에 할 수 없을 것인가?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프랑스와 멕시코는 2013년 10월 29일, 대규모 잔혹 범죄를 논의함에 있어 안보리 내 상임이사국의 거부권 사용을 자발적으로 방지하는 제안서를 공동 제출했다(UNSC 2013). 그리고 2020년 3월을 기점으로 105개국이 이 제안에 대해 지지를 표명했으며, 이 중에 동남아 국가로는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폴, 필리핀, 태국, 동티모르, 총 7개국이 지지를 표명했다. 우리는 아직 유엔안보리의 개혁이 가능할지, 가능하다면 언제 실현이 될 수 있을지 알지 못9한다. 그렇기 때문에 R2P 의 원칙이 인도적 개입까지 확대되어 적용되기를 마냥 손 놓고 기다릴 수만은 없다. 또한, 유엔인권기구 일각에서는 현재 미얀마에서 시민불복종운동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전쟁을 통한 해결 방법은 무고한 시민들의 대규모 사상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UN News 2021).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R2P원칙이 적용되는 여러 가지 국제적 개입 정책을 다각적으로 동시 진행하는 것을 고려해야만 한다. 미얀마 사태를 해결하는 방법에는 유엔인권기구 활동, 국제재판소 활용, 경제제재 및 지역기구 활용과 같은 여러 가지 해법이 있으며, 이러한 정책을 추진하고 미얀마에 압박을 가하는 주체로는 국제기구, 국가, 시민단체들이 있다. 다양한 전략과 정책 행위자 모두가 그 나름 특징을 가지고 서로 상호 보완 및 지원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미얀마 사태를 위해 다각도로 협력하며 군부에 대한 압박의 수위를 높여가야 할 것이다.* 각주1) 첫 번째는 미얀마 로힝자 대량학살 사태, 두 번째는 최근 발생한 미얀마 군사 쿠데타에 대한 저항 운동으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국민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 폭력과 시위진압을 일컫는다.2) 이후 매년 12월 10일은 세계 인권의 날이 되었다.3) 세계인권선언문을 국제관습법으로 간주하여 국제법으로 강제성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4) 47개의 HRC좌석은 지역별로 배분되는데, 아시아-태평양13개국, 아프리카 13개국, 동유럽 6개국, 중남미 8개국, 서유럽 외 7 개국으로 구성되어 있다.5) 2021년도 7월 현재, 유엔회원국(139개국) 중 124개국이 로마 규정을 비준했다. 로마 규정을 비준한 아시아 및 태평양 지역의 국가로는 아프가니스탄, 방글라데시, 캄보디아, 쿡 아일랜드, 사이프러스, 피지, 일본, 요르단, 키리바시, 몰디브, 먀샬 아일랜드, 몽골, 나우루, 대한민국, 사모아, 타지키스탄, 동티모르, 바누아투, 팔레스타인(팔레스타인은 2012년부터 유엔에서 비회원국 옵저버의 지위를 가지고 있으며, 2015년 유엔 사무총장이 팔레스타인의 로마규정 승인을 허락)이 있다.6) 태국은 2000년10월 2일에 로마 규정에 사인했으나 아직까지 비준은 하지 않았으며, 브루나이와 필리핀은 로마 규정의 당사국이었으나 이를 각각 2017년도, 2019년도에 철회했다.7) 방글라데시는 2010년 6월 1일, 로마 규정을 비준했다(CICC 2019).8) 미얀마 사태 해결을 위한 5개의 합의 조항은 다음과 같다. 1. 미얀마 당국의 즉각적인 폭력 중단 2. 평화적 해결책을 위한 건설적 대화 3. 아세안 의장과 사무총장의 대화 중재 4. 인도적 지원 제공 5. 특사와 대표단의 미얀마 방문(연합뉴스 2021).9) 10개의 상임이사국 좌석은 지역별로 배분되는데, 동유럽 1개국, 서유럽과 기타지역 2개국, 중남미 및 캐리비안 지역 2개국, 아시아 2개국, 아프리카 3개국으로 구성되어 있다.* 용어정리AICHR: ASEAN Intergovernmental Commission on Human Right 아세안인권기구HRC: UN Human Rights Council 유엔인권이사회ICC: International Criminal Court 국제형사재판소ICCPR: International Covenant on Civil and Political Rights 시민적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 규약ICESCR International Covenant on Economic, Social, and Cultural Rights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 규약ICJ: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 국제사법재판소OHCHR: Office of the United Nations High Commissioner for Human Rights 유엔 인권 고등판무관 사무소R2P: Responsibility to Protect 보호책임UDHR: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세계인권선언문UPR: Universal Periodic Review 보편적 정례인권검토* 참고문헌박선하. 2021. "'핵심 빠진 아세안 합의문, 미얀마 사태 해결에 도움 안돼' 국내외 비난 빗발." 조선일보 공익섹션 더나은미래. 4월 27일.앰네스티. 2021. "포스코, 미얀마 군 소유 기업 투자 단절 결정." 4월 19일. 연합뉴스. 2021. "'미얀마 사태' 아세안 정상회의 합의, 실천으로 완성해야." 4월 25일.---. 2021a. "유엔안보리 아세안 '미얀마 폭력중단' 합의 지지." 5월 11일.하정욱. 2020. "미얀마와의 포괄적인 경제협력 채널 시동." 산업통상자원부 신남방통상과. 황장석. 2005. "[황장석기자의 아시아 창] 미얀마의 아세안 의장 포기 속사정." 7월 30일.ᅠAdmin, Aliran. 2021. "SAC-M Says Myanmar Military is Engaging in Terrorism and Calls for Global 'Three Cuts' Strategy." Special Advisory Council for Myanmar. March 29. Albert, Eleanor. 2021. "China and Russia Shows Solidarity at Meeting of Foreign Ministers." The Diplomat. March 24. AP. 2021. "China, Russia Officials Meet in Show of Unity against EU, US." March 23.BBC News. 2020. "Myanmar Rohingya: Government Rejects ICJ Ruling." January 23. Coalition for the International Criminal Court(CICC). 2019. "The Philippines' Membership in the ICC Comes to an End." March 15.Donnelly, Jack. 2003. Universal Human Rights in Theory Practice. Cornell University Press.Global Centre for the Responsibility to Protect(GCRP). 2020. "Q A: The Gambia v. Myanmar, Rohingya Genocide at The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 May 2020 Factsheet." May 21. Hara, Eby Abubakar. 2019. "The Struggle to Uphold a Regional Human Rights Regime: the Winding Role of ASEAN Intergovernmental Commission on Human Rights(AICHR)." Revista Brasileira de Politica Internacional 62(1): e011. Head, Jonathan. 2021. "미얀마 군부 최고사령관, 아세안서 '폭력진압 즉각 중단' 뭇매." BBC News. 4월 25일.ICC-OPT. 2019. "ICC Prosecutor, Fatou Bensouda, Requests Judicial Authorization to Commence an Investigation into the Situation in Bangladesh/Myanmar." Office of the Prosecutor, ICC. July 14. Kim, Dae-Jung. 1994. "Is Culture Destiny?" Foreign Affairs 73(6). Lee, Kwan-Yew. 1994. "Culture is Destiny." Foreign Affairs 73(2).OHCHR. 2021. "Current Membership of the Human Rights Council, 1 January - 31 December 2021 by Regional Groups." United Nations Human Rights Council. Palmer, Emma. 2019. "Can the ICC bring justice to Myanmar? United Nations." The Interpreter. Lowy Institute. UK. 2021. "Condemning the coup in Myanmar: G7 Foreign Ministers' Statement." February 3. ---. 2021a. "UK Sanctions Myanmar Military Generals for Serious Human Rights Violations." February 18. ---. 2021b. "UK Sanctions Major Military Business Interests in Further Measures against Myanmar Military Regime." March 25.UN. 2021. "Responsibility to Protect - Background." United Nations Office on Genocide Prevention and the Responsibility to Protect. UN News. 2021. "Myanmar Crisis: Stand with the People and Protect Them, Urges UN Rights Expert." April 19. UNSC. 2013. "Speakers Call for Voluntary Suspension of Veto Rights in Cases of Mass Atrocity Crimes, as Security Council Debates Working Methods." SC/11164. October 29. US Department of the Treasury(USDT). 2021. "Treasury Sanctions Military Holding Companies in Burma." March 25.The White House(WH). 2021. "Executive Order 14014. Presidential Documents: Blocking Property With Respect to the Situation in Burma." The Federal Register. February 10. [14] 미얀마 까야주에서 온 소식 ㅣ 김희숙·복사씨 작성자 동남아연구소 조회수 1391 첨부파일 1 등록일 2021.06.07 초록2월 1일 쿠데타가 발발한 이래 미얀마의 수많은 시민들이 쿠데타 세력에 저항하여 시민불복종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에 대한 군부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미얀마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 R2P에 대한 기대가 좌절되고, 폭력행사를 중단하라는 국제사회의 요구 또한 묵살하는 군부에 맞서 시민들은 무장저항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4월 16일, 국민통합정부가 출범하고, 이어 5월 5일 민중방위군이 창설된 이후 미얀마 곳곳에서는 무력충돌이 빈발하고 있다. 시민불복종운동을 지지하는 소수종족무장단체들의 조력으로 시민저항조직이 결성됨에 따라 이미 분쟁으로 인해 고통 받아왔던 소수종족주들은 다시금 격전의 장이 되어가고 있다. 이 글에서 소개하는 까야주 역시 이러한 움직임이 두드러진 지역들 중 하나로, 최근 이 지역에서는 쿠데타 세력의 군대와 저항군 간의 무장충돌로 인해 지역주민들의 삶이 위태로운 상황이다. 까야주에 살고 있는 한 미얀마 시민이 보내온 소식을 바탕으로 이 글은 군부의 공세가 집중되고 있는 이 지역의 근황과 지역주민들이 처해 있는 어려움을 알리고 이들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호소한다.이슈페이퍼 14호 원문 내려받기* 까야주에서 소식을 보내온 미얀마 시민의 이름은 신상의 안위를 염려하여 공개하지 않기로 하였다. 하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무명씨 로 남기고 싶지는 않았기에 김수영의 시 사랑의 변주곡 에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의 맹아를 품은 존재로 비유된 복사씨(복숭아씨) 를 가명으로 사용하였다. 아름다운 단단함 으로, 넉 달이 넘게 군부독재에 맞서 시민불복종운동을 이어가고 있는 미얀마의 모든 복사씨 와 살구씨 에게 지지와 응원의 마음을 담아 이 글을 바친다. 2월 1일 쿠데타가 발발한 이래 미얀마의 수많은 시민들이 쿠데타 세력에 저항하여 시민불복종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에 대한 군부의 무차별적인 유혈진압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미얀마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 2021년 4월 16일, 반 군부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시민들의 열망을 담아 국민통합정부(NUG: National Unity Government)가 출범하고, 이어 5월 5일 자체 군대인 시민방위군(PDF: People s Defense Force)이 창설됨에 따라 땃마도군1)과의 무력충돌은 점차 돌이킬 수 없는 국면에 접어들었다. 수많은 청년들이 무장저항을 위해 소수종족무장단체들(Ethnic Armed Organizations, 이하 반군단체 )이 활동하는 정글로 들어가 군사훈련을 받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이 글에서 소개하는 까야주 역시 이러한 움직임이 두드러진 지역 중 하나다. 또한 이 지역은 쿠데타 반대 시위가 전개되기 시작한 첫째 주, 미얀마에서는 최초로 49명의 경찰이 반 군부 선언과 함께 시민불복종운동에 합류한 곳이기도 하다(Kyaw Ye Lynn 2020). 이 글은 바로 그곳, 까야주에 살고 있는 한 미얀마 시민이 2021년 5월 10일에 보내온 소식을 담고 있다. 당초 이 소식이 필자에게 전해진 경위는 시민불복종운동의 새로운 전개, 즉 무장저항으로 무게추가 쏠리면서 저항의 새로운 거점이 된 소수종족주의 근황을 알려달라고 요청한데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이 소식이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까야주의 상황이 매우 심각해졌다. 중화기와 헬리콥터까지 동원한 땃마도군의 대대적인 공습이 시작된 것이다. 이 소식을 보내온 이가 살고 있는 곳이 피해지역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염려는 매우 컸다. 공습으로 인해 한동안 연락이 두절된 그의 안부를 초조하게 기다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행히 무사하다는 소식이 당도했다. 잠시 안도했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도 까야주에서는 연일 공습이 이어지고 있어 불안감은 가시질 않는다. 멀리서 느끼는 이 불안감이 공습의 현장에 남아 있는 지역주민들의 두려움과 불안에 감히 비할 바는 못 된다. 이 글에서 소개하는 까야주 소식에는 아직 무력충돌이 발발하지는 않았던 시점, 그러나 언제라도 땃마도군의 공습이 일어날 수 있다는 불안에 떨며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던 지역주민들의 상황이 담겨 있다. 그 고통을 공감하여, 멀리서나마 우리가 이들의 안위와 미얀마의 민주화를 위해 힘을 보탤 수 있는 방도를 함께 생각해보자는 것이 이 소식을 전하는 이유다. 글의 전체 내용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부분에는 까야주에 관한 간략한 소개를 담았다. 이어 두 번째 부분에는 미얀마로부터 온 소식을 번역하여 수록하였다.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영어로 작성된 원문을 일부 의역하긴 했지만 가능한 한 원문 그대로 수록하고자 했다. 일부 혼동의 여지가 있거나 설명이 필요한 부분에는 각주를 달아 보완하였다. 마지막으로는 이 소식이 도착한 이후 까야주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간략히 정리하였다.까야주는 어떤 곳인가? 미얀마의 일곱 개 소수종족주(States) 중 하나인 까야주(Kayah State)는 미얀마 동부에 자리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샨주(Shan State), 남쪽과 서쪽으로는 까잉주(Kayin State)에 접해 있으며, 동쪽으로는 태국의 메홍손(Mae Hong Son) 지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주도는 롸이꺼(Loikaw)이며, 주요 종족집단은 까레니족(Karenni)이다. 붉은색 전통의상이 다른 집단과 구별되는 표지가 되었기에 스스로를 까레-니(Karen-Ni) , 즉 붉은 까렌(Red Karen) 이라 칭해온 이들은, 그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통상 카렌 으로 불리는 까렌 또는 까잉족의 하위 종족집단 중 하나다. 1951년, 당시 버마연방의 중앙정부였던 파사빨라(AFPFL: Anti-Fascist People s Freedom League) 정부에 의해 까야 로 변경되기 전까지 이 지역의 이름이 까레니 였던 것도 이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한 가지 유의할 것은 까야주의 옛 명칭이었던 까레니 가 반드시 주요 종족집단인 까레니족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보다는, 집단마다 차이는 있지만 큰 틀에서 까렌족이라는 상위범주에 포괄되는 다수의 까렌계 종족집단의 영토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어서 대다수가 이 명칭을 널리 수용해왔다. 그런데 버마정부가 일방적으로 주의 이름을 한 종족집단의 이름에 불과한 까야 로 변경한 데 대해 지역 내 대다수 종족집단이 느낀 모멸감과 반감은 매우 컸다. 까레니족 지도자들은 이를 영국 식민정부의 전형적인 통치술이었던 분리통치(divide-andrule) 전략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며 강력히 비난했는데, 실제 당시 중앙정부의 의도가 그러했다. 즉 독립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분리독립 운동을 전개해온 까렌족과 까레니족을 분리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까렌이라는 이름에서 다소 거리가 먼 까야족의 이름을 따 주의 이름을 변경했던 것이다. 일종의 상징적 분리였던 셈이다(TNI 2018: 18). 까야주는 미얀마의 소수종족주 가운데서도 가장 작은 주지만 주의 명칭을 둘러싼 갈등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이 지역이 경험해온 역사는 오늘날까지도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는 평화 구축 및 사회정치적 전환과 관련한 주요 쟁점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풍부한 천연자원과 토지 점유권을 둘러싸고 다수의 정치집단이 난립하며 수십 년간에 걸쳐 경합하고 있는,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인도적 위기 상황에 처해 있는 곳이 바로 이 지역이다. 이런 점에서 까야주는 예외적이고 주변화된 변방의 한 영토로서가 아닌, 탈식민지 미얀마의 실패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장소로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 지역이다(TNI 2018: 10). 이미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시피 미얀마 내 소수종족집단과 중앙정부 간의 갈등은 영국 식민 통치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식민당국의 분리통치 전략에 따라 소수종족주들은 식민통치시기동안 상당한 자치권을 누렸다. 그 중에서도 까야주(당시 까레니주)는 1875년, 당시 버마 왕이었던 민돈 왕과 영국 정부 간에 체결된 조약에 따라 공식적으로 독립을 보장받아 버마와 영국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일종의 제후국으로서 자치권을 누렸다. 이러한 역사를 가진 까닭에 까야주는 버마족이 다수를 차지하는 국가 건설에 유보적인 태도를 견지해왔다.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는 데 소수종족주의 힘이 필요하다고 인식한 미얀마의 독립 영웅 아웅산이 이들 지역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아 1947년 2월에 개최한 삥롱회담(Panglong Conference)에 불참한 것도 이러한 배경과 무관치 않다. 독립 직후부터 줄기차게 저항해왔지만, 군사정부가 소수종족들을 대상으로 자행한 무자비한 탄압 가운데서도 악명 높은, 이른바 뺘레이뺘(Pya Ley Pya, Four Cuts) 라 불리는 군사작전으로 까야주를 비롯한 소수종족주들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반군단체들을 괴멸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추진된 작전으로, 식량과 자금, 정보, 신병모집을 철저히 차단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미얀마 전체 지도를 검은색(반군 점령지역), 갈색(교전지역), 흰색(반군 소탕지역)으로 구분하여 반군들의 거점지역들을 공격, 전체를 흰색으로 만든다는 목표로 이 작전이 추진되었다. 이를 위해 군부는 반군지역의 마을들을 통째로 강제로 이주시켰고, 남아있는 사람들은 반군세력으로 몰아 무차별적으로 살상하고 유린하였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실향민으로 전락하여 군이 지정한 정착지에서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는데, 까야주에서도 이렇게 강제이주 당한 사람들을 한데 모아놓은 쑤시(Su See) 마을들이 거의 모든 타운십들마다 생겨났다(TNI 2018: 89). 그 피해가 너무도 컸기 때문에 까야주에서 활동해온 반군단체 대부분은 2012년 떼인세인 정부에 의해 추진된 전국정전협정(NCA) 전인 2009년에 중앙정부와 정전협정을 체결하였다. 그에 따라 병력을 미얀마군의 지휘를 받는 국경수비대나 민병대로 전환하고, 그 대가로 까야주 내 특정지역들을 관할권으로 할당받아 비즈니스 활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정전자본주의(ceasefire capitalism) 라 일컬어지는 거래가 이 과정에서 번창했는데, 마약거래를 비롯한 위험하고도 수지맞는 사업들이 이러한 활동에 포함되었던 까닭에 이는 또 그 자체로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Woods 2011). 반군단체들 간에 이권을 둘러싼 갈등이 무장충돌로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미얀마군과의 충돌도 완전히 사그라진 것은 아니어서, 지역 안에서는 상시적으로 긴장이 감돌았다. 2021년 2월 1일 발발한 쿠데타로 인해 까야주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군부에 맞서 시민들이 연합전선을 이루어 무장저항에 나섬에 따라 소수종족주 곳곳이 다시 전장이 되고 있는 까닭이다. 버마족, 소수종족을 가리지 않고 청년들이 속속 반군단체 관할지역으로 이동해가자 군부는 군사훈련이 이루어지고 있는 거점지역들을 표적으로 삼아 무차별적인 공격을 퍼붓고 있다. 이로 인해 까친, 친, 샨, 까잉, 까야 등 소수종족주에서는 수많은 지역민들이 피난길에 오른 상황이다. 그 중에서도 까야주는 최근 땃마도 군대의 포격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그 피해가 매우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다음에서 소개하는 까야주로부터 온 소식은 이 같은 사태가 발발하기까지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까야주에서 온 소식: 미얀마에 대한 관심과 연대를 호소하며 2021년 2월 1일, 미얀마 군부는 쿠데타를 감행하여 12개월 동안의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민간정부 지도자들과 주요 정치인들을 구금했다. 그 후, 미얀마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군부는 보안군을 투입하여 쿠데타에 반대하는 수많은 시위자들을 살상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전국적으로 대규모 시위, 또는 산발적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청년들은 무장투쟁을 위한 군사훈련을 받기 위해 마을을 떠나고 있다. 군사훈련을 받으러 떠난 청년들은 열흘간 기초훈련을 받은 다음 3주간 심화훈련을 받게 된다. 젊은 여성들까지 훈련에 참가하고 있다. 군부의 감시망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지만 민주화운동에 투신하고 있는 지역의 저명한 정치지도자들과 마을 관리자, 시위 조직자들은 신변상의 위험 때문에 돌아오지 못한다. 보안군은 매일 밤마다 순찰을 돌며 도처에서 수시로 국경 관문을 지나는 차와 사람들을 불러 세워 검문하고 있다. 도시에서는 낮 시간대에도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 이러한 행위는 군부가 인권 보호에 관한 규정을 명시하고 있는 일련의 법들을 개정한 뒤에 더욱 강도 높게 이루어지고 있다.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 노인들만이 마을에 남아 두려움에 떨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쿠데타가 발발하기 전까지 한 집에 살던 가족들은 이제 서로 떨어져 지내는 처지다. 아버지와 아들들은 빼앗긴 권리를 되찾아 오리라는 큰 희망을 품고 시민방위군에 합류하기 위해 집을 떠나고 있다. 2021년 2월 13일, 국가행정평의회(SAC: State Administration Council, 이하 평의회 )는 시민의 사생활과 안전을 보장하도록 명문화된 일부 법 조항을 유예시키는 개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법에 따른 보호는 물론 기본적인 인권조차 보장받을 수 없게 만들었다. 원래 법대로라면 군경이 가택 수색을 하자면 반드시 두 사람의 증인을 동반해야 하지만, 법이 개정된 후론 경찰이 시도 때도 없이 자의로 들이닥쳐 거주자를 수색하고 체포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수색, 체포, 감시, 염탐 및 개인의 사생활과 안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해칠 소지가 있는 수사에 관한 법원의 지시도, 24시간 이상 구금할 수 없다는 규정도 더 이상 따를 필요가 없게 되었다. 2월 14일에는 형법 개정안이 발표되었다. 이에 따라 자유로이 의사를 표현하거나 여하한 형태로든 공개적으로 군사쿠데타를 비난하는 행위는 영장 없이 체포하고 3년에서 20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게 되었다. 구/마을 행정에 관한 법(Ward and Village Administration Law) 도 개정하였다. 이에 따르면 관할 행정구역 내에 주소지를 두지 않은 사람이 밤 동안 마을에 묵게 될 경우 해당 사실을 반드시 마을 관리자에게 신고해야 하며, 마을 관리자는 이를 어긴 자에 대해 응분의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이 법을 개정한 후 평의회는 마을 관리자들을 새로 임명하고 있는데, 이렇게 임명된 사람들 가운데 주민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 몇몇 사람들은 공식적으로 직을 거절하기도 했다. 전직 마을 관리자들은 대부분 직을 맡는 걸 꺼리고 친 민주적 행정관으로서 임무를 수행할 의지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2) 이런 이유로 까야주의 마을들 중에는 관리자가 없는 곳들이 생겨나고 있다. 마을 행정체계가 평상시와 같이 작동하지 않게 됨에 따라 이들이 수행해오던 역할, 가령 대출 관련 업무나 출생증명서 발급, 호적 민원, 토지 등기 관련 업무는 물론이고 교육과 보건 프로그램들까지 모두 중단된 상태다. 이처럼 기본권이 침해당하는 상황에서 지역주민들은 밤낮으로 촉각을 곤두세워 경계하고 있다. 언제라도 보안군이 집에 들이닥쳐 수색하고 재산을 압류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한다. 마을마다 자경단을 꾸려 교대로 불침번을 서고 있지만, 몇몇 마을들에는 보안군이 들이닥쳐 주민들을 체포해가는 일도 일어났다. 오토바이나 자동차에 타고 가도 군경의 정차 검문을 받게 된다. 검문에서 압류당한 오토바이는 돈을 내야만 되찾아올 수 있다. 총격전이 발발할 수 있다는 우려에 도시고 촌이고 할 것 없이 사람들은 집집마다 방공호를 파고 있다. 농사 일정을 비롯한 거의 모든 가구활동은 마을에 남아있는 노인과 여성, 어린 아이들에게 맡겨졌다. 모든 사정이 여의치 않다. 물가가 치솟아 한창 옥수수를 심어야 할 때인데 시장에서는 종자를 구할 수가 없다. 기본적인 소비재를 구할 수 없어 근심은 한 가득인데, 반군과 땃마도군 간의 긴장은 나날이 고조되어 사람들은 하시라도 땃마도군의 공습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불안에 가슴을 조인다. 이러한 상황이 지역주민, 특히 여성들에게 가하는 압박은 너무도 커서 모두가 걱정과 불안으로 침울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시민불복종운동을 지지하는 소수종족무장단체와 보안군 간의 긴장 까야주에서 활동하는 반군단체들은 적극적으로 시민불복종운동 참가자들의 신변을 보호하고있다. 이런 이유로 이 지역에서는 이들 단체와 땃마도 보안군 사이의 긴장이 날로 고조되어가는 상황이다. 까야주에는 일곱 개의 무장단체들이 활약하고 있다. 각 단체는 2009년 군부와 정전협정을 체결한 후 다섯은 민병대(People s Militia Force Group)로, 하나는 국경수비대(BGF: Border Guard Force)로, 다른 하나는 특별배치부대(Special Arrangement Group)로 전환되었다. KNPP는 이들 중 가장 나중에 정전협정을 체결하였다. 각 단체를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KNPP(Karenni National Progressive Party) 1957년에 창설된 까레니족 정치기구로, 까레니군(Karenni Army)을 보유하고 있다. 1995년에 미얀마군과 정전협정을 체결한 적 있지만 석 달이 채 안 가 협정은 파기되었다. 국경수비대와 정부군이 2010년 KNPP 본부를 공격한 이후 2011년 한 해 동안 까레니군과 미얀마군 간의 교전이 산발적으로 발발하다가 2012년 6월 9일, 전국정전협정(NCA) 당시 다시 한 번 양측 간에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3) 이들의 주요 관할권은 모치, 파사웅, 롸이꺼, 샤도, 호야, 파루소, 도따마지 마을과 디머소 타운십이다. KNPLF(Karenni National People Liberation Front) 1978년 결성되었으며, 1994년 5월 9일에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주로 까야주 남부 후에사이, 후에 뻘라웅, 메사이, 파사웅, 벌라케, 디머소, 롸이꺼 등을 포함한 제2특별지구에서 활동하고 있다. KNPLF는 2009년 11월 8일에 국경수비대로 전환되었다. KNPDP(Karenni National Peace and Development Party) 1999년 KNPP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조직으로, 지역에서는 까요니(Kayaw Ni, Red Kayaw) 로 알려져 있다. 롸이꺼와 디머소 타운십이 주요 관할지역이며, 일부는 국경수비대로, 또 다른 일부는 호야민병대 비즈니스그룹(Hoya militia business groups)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KNDP/A(Karenni National Development Party/Army) 1996년 KNPP로부터 갈려나온 조직이며, 지역에서는 나가그룹(Naga/Dragon Group) 으로도 알려져 있다. 롸이꺼와 파루소 타운십 일대가 관할권이다. 군부의 압박으로 2009년 민병대로 전환되었다. KNUSO(Karenni National Unity and Solidarity Organization) 2002년 KNPP로부터 갈려나온 조직으로, 지역에서는 쩨퓨(White Star) 로 알려져 있다. 롸이꺼, 파루소가 주요 활동지역이며, 연락사무소는 롸이꺼에 자리하고 있다. 2009년 민병대로 전환되었다. KNG(Kayan National Guard) 1991년 KNLP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조직으로, 주로 까야주 제1특별지구(Kayah State Special Region(1))가 주요 활동지역이다. 1992년 2월 27일에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모비에, 롸이꺼, 양곤에 연락사무소를 두고 있다. 2009년에 민병대로 전환되었다. KNLP(Kayan New Land Party) 특별배치부대에 속해 있는 단체로, 1964년에 결성되었고. 1994년 7월 26일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롸이꺼, 따운지, 만달레이, 양곤에 연락사무소를 두고 있다. 시부(Seebu), 삔라웅(Pinlaung), 페콩(Phekhon) 지역을 포함하는 까야주 제3특별지구(Kaya State Special Region(3))가 이들의 관할지역이다. 2010년 4월 7일, 정부로부터 민병대로 전환하라는 압력을 받아왔지만 이에 응하지 않은 채 정전협정 단체로 남았다. 정치적 불안정성이 커진 현재 KNLP는 중재를 통해 임의 체포된 민주화운동 지도자들과 교사, 그리고 강력한 라이벌 당이기도 한 NLD 당원이 풀려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반군단체들은 시민불복종운동에 참가한 경찰―80%가량이 이 지역 출신 경찰이다―과 군인들의 신변을 보호하고 있다. 경찰, 군인, 시위 지도자들, 활동적인 청년들, NLD 소속 주 장관과 의원들을 포함한 시민불복종운동 참가자들이 이들 반군단체의 보호를 받으며 속속 피신처로 이동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음식과 의복, 의약품, 은신처 등이 필요하다. 2021년 2월 14일 평의회는 기존 형법에 새로 124조를 추가하여 국가의 안위를 위한 국방부와 사법기관의 업무 수행을 저해하거나 방해하려는 자 에게 최대 20년의 형을 부과할 수 있게 하였다. 이 조항은 보안군이 탈영하여 시민불복종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또는 그렇게 하도록 독려하는 자들의 행위를 불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추가되었다. 지방매체 깐따라와디(Kantarawaddy) 의 보도에 따르면 2021년 4월 30일에 72명의 청년들이 까야주의 파루소에서 체포되었다. 이들은 KNPP 아래서 군사훈련을 수료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당국은 이들의 휴대전화 속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있는 모습을 담은 사진과 훈련 수료증을 찾아냈다고 발표했다. 이들 중 69명은 롸이꺼의 감옥에 보내졌고, 나머지 3명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현재까지 이들 중 누구도 풀려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한 반군단체의 측근이 전한 말에 따르면 5월 10일까지도 이들을 석방하지 않을 경우 땃마도군과의 충돌은 불가피해질 것이며, 그 결과 지역주민들의 안위도 보장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한다.■ 보건 및 응급 서비스 현황 마을 보건소는 직원들이 시민불복종운동에 참가함에 따라 제 기능을 못하는 상황이다. 2세 이하 유아를 위한 예방접종 프로그램은 중단되었고, 산전산후 진료 역시 중단되었다. 취약계층 임산부들은 숙련되지 않은 조무사의 도움을 받아 집에서 출산을 해야 하는 형편이다. 롸이꺼시의 민간클리닉에서 신생아 돌봄 서비스를 받을 수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가난한 농촌 지역 주민들은 그럴 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다. 응급상황이라도 발생하면 필요한 장비를 갖추고 있는 롸이꺼 종합병원으로 가야만 하는데, 병원에 가도 대부분의 직원이 시민불복종운동에 참여하고 있어 대체 인력을 고용하고 있는 까닭에 진료를 받자면 5천 짯이나 되는 돈을 내야만 한다. 일부는 진료비가 매우 저렴하거나 무료인 가유나미션사회연대(KMSS: Karuna Mission Social Solidarity)4)에서 운영하는 가유나 클리닉에서 출산 서비스를 받기도 한다. 응급상황으로 분류되는 젠더기반폭력(Gender-Based Violence) 관련 의료서비스는 종합병원에선 받을 수 없다. 의료사회부 담당자는 이런 유의 진료는 민간병원에서나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 같은 문제를 포함하여 지역주민들이 처해 있는 어려움을 부분적으로나마 완화하자면 다음과 같은 지원이 절실하다. 가난한 가구들에 대한 기초 식량과 생계보장을 위한 현금 및 바우처 지원 시민불복종운동에 참가하는 이들을 위한 재정 지원 산전산후 건강관리를 위한 위생키트 배부 코로나19와 군사 쿠데타가 야기한 이중의 위기에서 생계유지를 위한 현금 지원 이 긴급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자금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신속하게 현장평가를 실시하여 긴급한 필요에 따라 우선순위를 정하여 사람들을 도울 것이다. 까야주에서 시민불복종운동에 참가하는 공무원들과 가난한 여성, 소녀들에게는 이러한 도움이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지금, 까야주에서는 정치범지원협회(AAPP: Assistance Association for Political Prisoners)에 따르면 2021년 6월 4일까지 최소 845명의 미얀마 시민이 땃마도에게 목숨을 잃었고 5,708명이 체포되었다. 4,500여 명은 여전히 구금 중이다(AAPP 페이스북 페이지 참고). 시위 초반부터 가파르게 상승하던 사망자수 표시 곡선은 4월 들어 다소 완만해졌지만 여전히 많은 시민들이 군부에 의해 목숨을 잃고 있다. 보호책임(R2P: Responsibility to Protect) 을 요청하며 시위에 나섰던 시민들의 절박한 바람은 중국과 러시아의 거부권에 막혀 하릴없이 꺾였고, 일대 진전을 이룬 것으로 보였던 아세안 지도자급 회의의 합의안도 미얀마로 돌아가자마자 상황이 안정된 뒤에 신중히 고려하겠다며 사실상 묵살한 쿠데타 집단의 기망으로 기약할 수 없게 되었다(The Irrawaddy 2021/4/27). 국제사회로부터 원군을 얻지 못한 미얀마의 시민들은 스스로를 지키는 것 외엔 다른 방도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고, 곧 화염병과 새총, 돌멩이를 들고 거리에 나섰다. 하지만 경찰과 민병대까지 합하면 50만이 넘는 군부의 병력은 새총과 화염병으로 맞설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급기야 시민들은 지역 곳곳에서 저항군을 결성하여 무장투쟁에 나서기에 이르렀다. 사가잉 지역에서는 깔레이시민군(Kalay Civil Army)이, 친주에서는 친랜드방위군(Chinland Defense Force)이, 에야와디 지역에서는 에야와디연방군(Ayeyarwaddy Federal Army)이 결성되는 등 수많은 지역 저항조직들이 생겨났다. 분쟁 상황을 추적하는 비영리단체 ACLED(Armed Conflict Location and Event Data Project)에 따르면 미얀마 전국에 최소 58개의 방위군이 결성되었고, 이 중 12개가 실제 활동 중이라고 한다(The Guardian 2021/6/1). 3월 31일, 연방의회대표위원회(CRPH: Committee Representing Pyidaungsu Hluttaw)가 연방민주주의헌장을 공표하고, 이어 4월 16일 국민통합정부가 출범하면서 소수종족집단과의 연대가 탄력을 얻음에 따라 연방군 창설에 관한 구상은 한층 구체화되었다. 오래지않아 5월 5일, 땃마도에 맞서는 시민들의 군대로서 민중방위군(People s Defense Force, 이하 PDF )이 창설되었다. 이후 소수종족주를 중심으로 기존 반군단체와 함께 땃마도군에 맞서는 지역민중방위군이 새로 결성되었다. 까야주도 그 중 한 곳이다. 특이한 것은, 까친독립군(Kachin Independence Army)이나 까렌민족연합(Karen National Union)과 같은 기존 반군단체가 땃마도군의 적수로 활약하는 다른 지역들과 달리 이 지역에서는 까레니민중방위군(Karenni People s Defense Force, 이하 KPDF )이 주역이라는 점이다(Myanmar Now 2021/5/26). 까레니군(Karenni Army)이나 KNPP 등과 같은 기존 반군단체로부터 군사훈련을 받고 있긴 하지만 민중방위군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조직을 결성하여 무장저항에 나서고 있는 점은 연방민주주의 국가 수립을 향한 이들의 열망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를 짐작케 한다. 그러나 그러한 열망이 실행에 옮겨짐에 따라 발생한 결과는 너무도 참혹하다. 저항군과 땃마도 간의 무력충돌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지역주민들은 화를 피해 정글로 숨어들어가는 상황이다. 유엔난민기구(UNHCR) 보고에 따르면 쿠데타 이래 이 지역에서 신규 발생한 피난민의 수는 10만 명가량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 대부분이 5월 21일 땃마도군이 디머소를 포격한 이래 발발한 최근의 충돌로부터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쿠데타가 발발한 이래 신규로 발생한 피난민의 수는 지난 2주간 61,000명에서 175,000명으로 세 배 가까이 증가했는데, 이 중 10만 명가량이 까야주에서 발생했다(UNHRC 2021/6/1). 이미 3월 말부터 까렌민족해방군(KNLA) 및 까렌민족연합(KNU), 까친독립군(KIA) 등과 교전하던 땃마도군이 이처럼 까야주에 공격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은, 이 지역이 바고(Bago)에 가까워 양곤 등지로부터 저항세력이 결집하기에 용이할 뿐만 아니라 태국과 인접해 있어 국제적 지원을 얻기에도 유리한 입지에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땃마도의 입장에서는 정전협정을 통해 민병대 및 국경수비대로 전환된 반군 병력을 동원하기에도 용이할 것이다. 소수종족주의 반군단체들이 모두 같은 목표와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동질적인 집단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면 무장충돌의 지속이 될 경우 이 지역의 상황은 더욱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도 커 보인다. 2014년에 이루어진 미얀마 인구센서스 자료에 따르면 까야주의 총인구수는 286,738명으로 30만 명이 채 안 된다(MIMU and PSF 2016). 이를 기준으로 보면 쿠데타 이후 최근까지 발생한 신규 피난민 수는 전체 인구의 1/3이 넘는다. 땃마도군의 방화와 약탈, 무차별적인 포격을 피해 정글로 들어가 숨어 지내고 있는 피난민들이 겪을 고통은 직접 보지 않아도 가히 상상할 만하다. 앞서 소개한 까야주 소식을 통해서도 이미 지역민들은 갖가지 어려움에 직면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공습을 피해 달아난 피난민들의 처지는 말할 것도 없다. 먹을 것은 물론 식수조차 구하기 어려운 정글로 들어가 동굴이나 얼기설기 겨우 지붕을 얹은 처소에서 지내는 실정인데, 때마침 우기까지 겹쳐 건강문제가 한층 걱정되는 상황이다. 이미 상당수 피난민들이 이질이나 설사 등 수인성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다고도 한다. 땃마도군이 도로를 차단하고 구호단체들의 접근을 막고 있어 비상식량과 의약품을 전달하는 일조차 어렵다고 한다(Radio Free Asia 2021/6/11). 내전으로 치닫게 될 기미가 짙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미얀마가 민주화를 이룩하리라는 희망을 내려놓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 민주주의를 열망하며 넉 달이 넘게 버티고 있는 시민들 때문이다. 악명 높은 뺘레이뺘 작전으로 소수종족주의 반군단체들이 땃마도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을 지지해주는 사람들을 잃게 되었기 때문이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물론이요 생명조차 지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기약할 수 없는 미래를 위한 이상과 의지도 지키기 어렵다. 그러니 미얀마의 민주화를 바란다면 무엇보다 현재의 상황을 가장 견디기 어려운 약자들부터 우선 도와야 할 것이다. 복사씨 의 말에 따르면 우리 돈 2백만 원 정도면 45명에게 두 달 분량의 먹을거리를 제공할 수 있다고 한다. 필시 간신히 배를 주리지 않게 할 정도에 불과할 것이나 하루하루가 위태로운 지역주민들에게는 힘이 되어 줄 것이다. 45명의 두 달이 아닌 30만 명의 하루, 혹은 넉 달이 넘게 저항을 지속하고 있는 수백, 수천만 명의 미얀마 시민들이 단 몇 시간만이라도 버틸 수 있도록 힘을 모았으면 한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이 각자가 서있는 자리에서, 각자가 알고 있는 방법으로 미얀마의 시민들을 돕는 데 나서주기를 희망한다.* 각주1) 이 글에서 땃마도군 과 미얀마군 은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다. 땃마도(Tatmadaw) 라는 어휘 자체가 군대를 의미하기 때문에 땃마도군 이라는 표현은 사실상 동어반복인 셈이다. 하지만 쿠테타를 통해 정부를 해산한 이후의 군은 군부가 사병화한 병력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고, 따라서 국군의 지위를 갖는 미얀마군 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다. 또한 근래 땃마도라는 용어가 쿠데타 세력인 군부를 지칭하는 말로 더 많이 사용되고 있는 점을 고려하여 이 글에서는 2월 1일 쿠데타 이후 군부가 지휘하는 병력은 땃마도군 으로 칭하여 미얀마군 과 구별하고자 하였다.2) 필자가 알고 있는 다른 미얀마인 지인의 말에 따르면 시위자들이 마을사무소나 군부가 지명한 새 이장을 공격하고 있는 데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직을 고사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시위자들은 체포를 피하기 위해 호구 기록이 보관되어 있는 마을사무소를 방화하는 등과 같은, 스콧의 말을 빌면 약자의 무기 라 칭할 만한 저항의 양식들을 구사하며 쿠데타 세력에 맞서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3) 이 부분은 다소 혼동의 여지가 있어 설명을 덧붙인다. KNPP와 미얀마군과의 정전협정은 2012년 3월에 체결된바 있다. 하지만 이때의 정전협정은 당시 발생한 적대행위를 종결시키기 위한 협정이었을 뿐 떼인세인 정부에 의해 추진된 전국정전협정에 서명한 것은 아니었다. 이후 2015년 총선 승리로 NLD 정부가 출범한 후 이듬해 추진된 21세기 삥롱회담 에 따라 KNPP도 전국평화프로세스(National Peace Process)에 참여하여 정부측과 협상을 진행해왔다. 하지만 2018년 10월 20일에 미얀마군과 KNPP 간에 무장충돌이 발생하고, 이에 양측이 2012년의 정전협정을 위반했다며 서로를 비난하는 등 갈등은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NLD 정부의 평화협상은 70여년에 이르는 내전을 종식시킬 평화협정의 기본원칙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회담의 당사자들은 정치, 경제, 토지 문제 등과 관련된 51개 기본원칙에는 동의했지만 안보 부문에 관해서는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다. 군부가 미얀마에 군대는 오직 하나여야 한다 는 원칙을 고수하며 소수종족무장단체들에게 무장해제를 요구하고 있는 데 따른 난항이다. 이에 관해서는 김희숙(2020) 및 박은홍(2019)을 참고하기 바란다.4) KMSS는 까야주에 상주하는 지역사회기반단체(CBOs: Community Based Organizations) 중 하나로, 가톨릭교회를 기반으로 지역주민들을 위해 교육, 보건, 생계지원, 사회보호 및 긴급구호 활동을 펼치고 있다. 보다 상세한 정보는 이 단체의 홈페이지(https://www.kmss.org.mm)를 통해 얻을 수 있다.* 참고문헌김수영. 1993. 『거대한 뿌리』. 서울: 민음사[원본초간: 1974].김희숙. 2020. 미얀마 2019: 로힝자 위기 이후 국제관계의 변화와 총선을 향한 정치과정. 『동남아시아연구』 30(2): 1-37.박은홍. 2019. 미얀마 2018: 로힝자 위기 와 민주주의 공고화의 갈림길. 『동남아시아연구』 29(2): 89-126.AAPP(Assistance Association for Political Prisoners). https://www.facebook.com/burmapoliticalprisoners.CNA. 2021/6/5. Myanmar Self-Defence Groups Take Fight to Junta with Homemade Rifles. CNN. 2021/6/3. As Bomb Rain down on Myanmar s Hotbeds of Rural Resistance, Tens of Thousands Flee to the Jungle without Food or Water. KMSS(Karuna Mission Social Solidarity). https://www.kmss.org.mmKyaw Ye Lynn. 2020. Police Breaking Ranks amid Rising Unrest in Myanmar. AA. May 3.MIMU and PSF. 2016. Situation Analysis of Southeastern Myanmar.Myanmar Now. 2021/5/26. Karenni Resistance Fighters Open New Front against Junta. Radio Free Asia. 2021/6/1. Fresh Clashes in Myanmar s Kayah State Kill Two as Displaced Surpass 100,000. The Guardian. 2021/6/1. Rise of Armed Civilian Groups in Myanmar Fuels Fears of Full-Scale Civil War. The Irrawaddy. 2021/4/26. Thousands of Sagaing Region Villagers Flee Myanmar Military. . 2021/4/27. Myanmar Military Launches Air Raid in Karen State. . 2021/5/23. Around 40 Myanmar Junta Troops Killed in Kayah State. TNI(Transnational Institute). 2011. From War to Peace in Kayah(Karenni) State. Amsterdam: Transnational Institute.UCA News. 2021/5/24. Four Die in Military Attact on Myanmar Church. . 2021/6/2. More Catholic Villagers Flee as Fighting Escalates in Myanmar UNHRC. 2021/6/1. Myanmar Emergency Update. Woods, Kevin. 2011. Ceasefire Capitalism: Military-Private Partnerships, Resource Concessions and Military-State Building in the Burma-China Borderlands. Journal of Peasant Studies 38(4): 747-770.Yahoo News. 2021/6/1. Residents of Myanmar s Kayah State Flee to Jungle to Escape Military Junta. [13]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미얀마 군부 쿠데타와 민중의 저항 ㅣ 박진영 작성자 동남아연구소 조회수 1259 첨부파일 1 등록일 2021.05.26 초록지난 2월 1일 발생한 미얀마의 군사 쿠데타에 시민들은 대규모 시위로 저항하였다. 군부는 유혈 진압으로 대응하였고 그 결과 어린아이를 포함한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으며 시위는 소강 상태에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위가 격렬한 형태로 표출되지 않는다고 해서 군부 정권에 대한 저항이 완전히 사그라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다양한 방식의 일상적인 투쟁으로 전환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2011년 이후 지난 10년간 미얀마 사람들의 삶과 경제, 사회에 나타난 변화와, 이를 배경으로 뿌리내리기 시작한 민주주의에 대한 경험이 시민들의 지속적인 저항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고 분석한다.이슈페이퍼 13호 원문 내려받기 군부 독재 치하에 사느니 죽는 게 낫다 지난 2월 1일 군부가 일으킨 쿠데타에 저항해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을 취재한 언론들이 빈번하게 인용했던 말이다. 이 말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었다. 실제 시민들은 전국에 걸친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고 저항을 이어갔으며 그 과정에서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5월 하순 현재 군부의 폭압적인 진압과 공포를 자아내는 전략으로 시위는 소강상태에 접어든 것처럼 보인다. 1962년부터 2011년까지 군부 독재 하에 있었던 미얀마에서 군사 정부에 저항하는 시위가 발생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배급 식료품 부족과 사업장에서의 노사 분규가 맞물려 촉발되었던 1974년과 1976년 시위, 8888혁명 으로 알려진 대학생 주도 1988년 시위, 그리고 승려들이 시위를 이끌었던 2008년 사프란 혁명 등 대규모 반 군부 시위는 그동안에도 빈발했다. 하지만 이번처럼 전국적으로 장기간에 걸쳐 전 계층이 참여하는 시위가 전개된 예는 드물다. 그간의 시위들이 유혈 진압으로 막을 내렸음을 감안해 볼 때 시위 참여가 가져올 위험성에 대해서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까지 불사하겠다는 시위대의 강력한 저항은 이번 시위가 단순한 정치적인 사안을 넘어 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떼인세인 정부 시기를 포함하여 민간정부로의 이행이 이루어진 2011년 전후로 일어난 변화를 살펴보는 것은 현재 군부 반대시위의 양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단편적이나마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기간 동안 시민들이 경험한 일상의 삶과 사회적인 측면에서 일어난 변화에 주목하여 현상황을 설명하고자 한다. 필자가 처음 양곤을 방문한 것은 정치적 변화가 일어나기 직전인 2010년이었다. 당시 교육 관련 시민사회단체에서 일하고 있던 필자는 아시아 각국의 노동조합과 노동운동단체들과 연대하여 여성 활동가들의 요구를 파악하여 여성노동운동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미얀마도 사업에 포함시기키로 결정하였다. 수십 년에 걸친 군부독재 시기 동안 국제 사회로부터의 고립과 폐쇄의 길을 걸어온 당시의 미얀마는 노동운동은 물론 시민운동 단체들에 대해서도 외부에 알려진 것이 없었기에 필자는 제한된 정보만을 가진 채 미얀마 땅을 밟아야 했다. 시도는 야심찼지만 결과를 말하면 목적했던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당시 불법이었던 노동조합은 말할 것도 없고 여성노동운동단체도, 노동 일반의 이슈를 제기하는 시민사회단체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지에서 만난 여성단체 활동가는 지하 조직을 제외하고는 공개적으로 활동하는 노동 관련 조직이 없다고 했다. 정권에 도전이 될 가능성이 있는 어떠한 움직임도 허용하지 않는 군사 정부에게 노동 운동, 조직화는 초기부터 싹을 제거해야 할 불온한 조짐이었다. 군사정권은 정치적인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노동 운동을 극도로 억압했다. 노동 운동가들에 대한 탄압은 극심하였다. 노동절을 기념하여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토론회를 개최하려고 했던 활동가들은 체포되어 공공질서를 어지럽힌 죄목으로 징역을 살았고, 특히 그 중 주동자였던 활동가는 종신형 2회에 덧붙여 7년형을 언도 받았다. 노동 전문 변호사가 국제노동기구(ILO)와 접촉하여 노동자들의 상황에 대해 부정적인 정보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증거로 제시된 것은 ILO 스텝의 명함을 복사한 종이 한 장이었다. 또한 군사 정부의 언론 통제는 관제 신문과 방송만 허용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사람들의 말과 생각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칠 정도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활동가들이 대화 중 미묘하게 organizing 이라는 단어를 불편하게 여기면서 mobilizing 으로 대체해 사용하곤 했던 것은 그 일면이었다. 이에 대해 질문하자 한 활동가는 말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자기 검열을 하게 된 것 같다고 했다. 일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 외에도 지금까지 강렬하게 남아 있는 몇 가지 기억은 열악한 인프라와 경제 상황, 그리고 군사정권이 자행하고 있던 극심한 통제였다. 이는 단기간 방문한 여행자에게도 너무나 명백해 보였다. 첫 기억은 현지에서 심카드(SIM Card: 유심칩)를 구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웃 태국에서는 2~3 달러에, 운이 좋으면 무료로도 구할 수 있었던 심카드가 미얀마에서는 하나에 1,000달러라고 했다. 그나마도1990년대 후반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3,300달러였는데 그때에 비하면 많이 저렴해진 거란다. 인터넷 사용을 위해 찾은 피씨방에서는 지메일 하나를 제외하고는 한메일, 야후 등 모든 메일이 먹통이었다. 정부에서 막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연락이 닿은 현지 활동가들을 만나기 위해 탄 택시는 낡아 바닥이 녹슬다 못해 구멍이 뚫려서 바람이 술술 들어올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군데군데 패인 아스팔트에서 노출된 돌이 차안으로 튀어 들어오기도 했다. 천연 에어컨이라며 농담을 건네던 택시 기사는 군사 정부에게 차량 수입 독점권을 얻은 차량 수입업자가 폭리를 취해서 새 차는 물론이고 중고차 값조차도 너무 비싸 차를 살 수 없어 그렇다고 설명했다. 태국에서 수입하는 중고 차량 가격이 태국 현지의 신차보다 훨씬 더 비싸니 정권과 가까운 극소수의 부유층을 제외하고는 차를 살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보수하지 않고 오래 방치된 듯 도로는 여기 저기 구멍이 패여 있어서 한 눈 팔고 걷다가는 발을 헛디디기 일쑤였다. 일정을 도와주었던 현지인 친구는 우리를 자신의 집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호텔에 숙박시키면서 숙소를 제공하지 못하는 데 대해 몹시 미안해했다. 정부 기관에 등록된 거주자 외에는 외국인이든 내국인이든, 심지어 외지에서 생활하는 가족이나 친척, 친구라 하더라도 등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묵게 될 경우엔 경찰서에 신고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 절차가 몹시 번거로울 뿐 아니라 허용되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고 했다. 이를 어기고 몰래 외부인을 묵게 하였다가 발각되면 크게 문제가 된다고 하였다. 빈번한 정전은 또 하나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당시 묵었던 숙소는 주택가 한가운데 있었는데 초저녁에 정전이 되면 동네 전체에 아~~~ 하는 탄성이 울려 퍼지곤 했다. 다음날 만난 친구에게 들은 사연인 즉 당시 인기 있던 한국 드라마가 방영되던 시간이었는데 정전이 되면서 중간에 끊겨서 그렇단다. 2011년부터 광범위한 개혁개방 정책이 추진되고, 이어 2015년에 치러진 선거를 통해 민간 정권의 등장이라는 정치적 변화와 더불어 미얀마는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2011년 노동조합의 합법화와 더불어 2년 사이 2천여 개의 노동조합이 만들어질 정도로 노동운동이 들불처럼 번져가는 것을 보면서 필자는 미얀마에 흥미를 가지고 연구 주제로 삼게 되었다. 그 후 연구자로 몇 차례에 걸쳐 방문한 미얀마는 갈 때마다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2011년부터 2020년까지 10년 동안 이루어진 변화는 시민의 일상뿐 아니라 사회의 거의 모든 측면을 변모시켰다. 미얀마에 처음 방문했을 당시 비싼 가격때문에 금카드 였던 심카드는 이제는 1달러만 내면 길거리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심카드를 사기 위해서는 원칙적으로 신분증 등으로 등록을 해야 하는데, 사전에 현지인 이름으로 등록해 놓고 좌판에 늘어 놓고 파는 심카드를 번호를 보고 구미에 맞게 고를 수 있게 되었다. 외우기 쉬운 좋은 번호는 조금 더 비쌌다. 군부와 연결된 기업인 MPT가 독점하던 통신 시장에 Ooredoo, Telenor, Mytel 등의 기업들이 참여하면서 사람들은 저렴하고 양질의 인터넷 서비스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들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다양한 프로모션으로 저렴한 요금제를 제공하고 있는 까닭에 시민들은 여러 개의 심카드를 사서 요금제에 따라 통화와 데이터를 선택적으로 사용하는 등의 방식으로 서비스를 이용했다. 2010년에 휴대전화 심카드를 보유한 미얀마 인구는 1%에 불과했지만, 2016년이 되자 인구의 78%가 스마트폰을 이용하게 되었다. 세계은행 자료에 의하면 2010년 0.25%이던 인터넷 이용률은 2016년에 25%까지 증가하였다. 스마트폰을 통해 손쉽게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인터넷이 주된 여론 형성의 장으로 기능하게 된 점도 개혁개방 이후 나타난 중요한 변화로 꼽을 수 있다. 특히 페이스북은 일반 시민들이 정보를 공유하고 확산시키는 대중적인 여론 플랫폼으로 부상하였다. 2015년 선거 때부터 시민들은 투표와 개표 과정에 마치 참관인처럼 참여하면서 실시간으로 페이스북에 정보를 올려 그 과정을 감시하고 공유하였다. 또한 군 고위 관계자 가족이 가사 서비스 노동자에게 행한 가혹 행위를 페이스북을 통해 폭로하여 비판 여론을 조성하여 공개 사과와 배상을 받아내기도 했다. 군부 정권 하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새로운 매체를 통해 가능해진 것이다. 미얀마에서는 2011년까지도 검열이 존재했다. 영국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진 법에 근거한 것으로서, 서적에서부터 신문, 만화, 홍보용 인쇄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출판물을 사전에 당국에 제출하여 검열을 받도록 하였다. 2012년 사전 검열이 폐지되고, 관변언론 외에도 다양한 언론사들이 등장하여 다양한 내용으로 채워진 수십 개의 신문이 신문 가판대를 가득 메우게 되었다. 도로가 새로 포장되고, 이전의 차량 수입 독과점이 폐지되어 차량 수입 경로가 다변화하고 가격도 저렴해지면서 거리에 교통 정체가 생기기 시작한 것도 하나의 변화였다. 한국에서도 중고버스가 수입되어 양곤 시내에서 양재역 이정표를 그대로 단 버스가 달리는 광경도 보게 되었다. 양곤 시 정부는 시내를 운행하는 버스 대부분을 에어컨을 갖춘 신형 버스로 교체하여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일반 시민들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2015년 11월에 치러진 선거는 정치적 변화의 정점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투표소에 길게 늘어선 줄에서 오래도록 기다리면서도 사람들은 지친 기색 없이 감격스러운 얼굴로 몇십 년 만에 주어진 자유 선거 의 권리를 행사했다. 개표장에서 수개표를 통해 집계를 하는 개표 요원도, 개표 과정을 감시하는 참관인도 밤늦도록 이어진 개표 절차에도 아랑곳없이 시종 흥분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작업을 이어갔다. 개표장 밖에서는 아웅산수찌가 이끄는 NLD당이 승리할 것을 확신하는 지역 주민들로 북적거리는 축제 분위기가 이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는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나타났다. 군부 정권 시기 동안 미얀마 경제를 옥죄고 있던 미국과 유럽연합 등 서구의 경제 제재가 해제되면서 미얀마의 산업, 특히 저임금을 중심으로 한 의류 산업이 커지게 되었다. 2011년 7억7천만 달러였던 의류 수출액은 2019년에는 65억 달러로 늘어나 전체 수출액의 30%를 점하게 되었다. 의류 산업의 마지막 프론티어 라고까지 불리는 미얀마로 싼 노동력을 찾아 온 외국 자본들을 중심으로 의류 공장이 늘어나 의류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10년 사이에 2만여 명에서 70만여 명으로 급증하였다. 이처럼 의류 산업 부문이 팽창하면서 여성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농촌에서 도시로 대거 이주하였고, 그에 따라 이들 노동자들의 저임금 문제도 필연적으로 대두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운동도 활발해졌다. 군부정권 하에서도 파업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큰 위험을 감수해야 했던 까닭에 그 횟수는 현저히 적었고, 간혹 발발한 파업도 소리 소문 없이 정리되곤 했다. ILO의 통계에 의하면 1999년부터 2008년 사이 연간 평균 11건의 파업이 있었고, 특히 2004년부터 2008년까지는 한 자리수의 파업만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군부는 파업이 일어날 경우에 외부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파업이 일어난 사업장 주변을 봉쇄하고 3일 내에 파업이 해결되지 않을 경우 사업체를 폐쇄하겠다고 위협했다. 이는 노동자뿐만 아니라 고용주에게도 해당되는 위협이어서, 노동자들은 간혹 파업을 통해 임금 인상 등의 결과를 얻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파업 관련 소식이 언론을 통해 기사화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파업을 주도한 노동자들은 해고당하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일자리를 얻기 어려웠다. 이들을 위해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 주는 것이 지하 노동운동 조직의 일이 되기도 하였다(노동운동가와의 인터뷰, 2015년 10월). 2011년부터 시작된 정치 변동은 군부정권 하에서 자행되었던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을 앞선 세대들의 이야기로 만들었다. 새로 도입된 노동조합법은 노동조합의 합법화와 파업권을 보장 하였다. 노조는 순식간에 그 수가 2천개를 헤아리게 되었고, 노동자들은 파업을 통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요구 사항을 관철시킬 수 있게 되었다. 같은 공장에서 여러 차례 파업이 일어나는 것도 드문 일이 아니었는데, 이는 파업과 고용주의 보복(엄격한 규율 도입, 작업 강도 강화, 해고 등), 그리고 이에 반발하는 파업이 다시 재개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었다(노조 간부 다수 인터뷰, 2015년 10월 11월). 이 같은 악순환은 이전의 온정주의적이고 위계적인 노사 관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노사 관계 정립을 요구하는 노동자들과 이를 거부하는 고용주 간의 갈등의 결과이기도 하다. 민주화 이전에는 고용주들은 먹거리와 월급을 주는 신 (Lin and Michael Haack 2021/03/02)이었다는 어느 노조 간부의 회상이나 부모가 자식 가르치듯 잘못하면 야단쳐서 가르치고, 그러면 울며 일하면서도 말을 듣던 시기였다 는 고용주의 이야기가 말해주듯이, 고용주와 노동자들은 평등하다기보다는 위계적인 관계가 기본이었다(고용주 인터뷰, 2015년 10월). 민주화와 함께 시작된 노동운동을 통해 노동자들은 그러한 관행을 바꾸어 동등하게 협상에 응해줄 것을 요구하였고, 이를 거부하는 고용주의 태도는 또 다른 갈등을 낳는 결과로 이어졌다. 파업을 통해 노조가 결성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점도 흥미로운 변화다. 이전까지는 언론 통제 때문에 소문으로만 들을 수 있었던 파업 소식이 이제는 신문의 일면에도 오르게 되었고, 이것이 다른 노동자들의 파업을 격려하는 효과를 낳았다. 당시 활동했던 조직가는 그때는 파업을 조직하기가 아주 쉬웠다. 노동자들이 통근 버스에 같이 타서 노동 조건의 부당함에 대해 알리는 것으로도 파업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고 말했다(노조 간부 인터뷰, 2017년 4월). 파업은 많은 경우 임금 인상으로 이어졌으며 이렇게 축적된 파업의 경험들은 노동자들 스스로 자신들의 힘을 자각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한 노조 간부가 말한 것처럼 노동자들은 파업의 맛을 알게 되었다. 그 맛은 달콤했다 (Lin and Michael Haack 2021/03/02). 군부가 일으킨 쿠데타는 이 다채롭고 역동적으로 형성되어가던 신생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는 시도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시민들은 즉각적으로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인터넷을 통한 정보와 뉴스의 보급은 시위가 조직되고 확산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군부의 잔혹한 진압 장면은 기자들의 카메라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휴대전화로도 촬영되어 인터넷을 통해 공유되면서 공분을 불러 일으켰다. 이 때문에 군부는 인터넷 접속을 통제하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 인터넷의 수혜를 받은 Z세대라 불리는 젊은 층의 다양한 채색들, 재기 넘치는 방식들이 언론의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시위의 면면을 보면 한 집단으로 묶기 어려운 다양한 집단이 참여하였는데, 의사, 공무원, 은행원, 봉제산업 노동자, 농부, 학생, 소수민족 활동가, 동성애자 그룹 등이 그들이다. 그 중에서도 노동자들의 집단적인 참여는 시위 대열이 늘어나고 확산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가장 먼저 저항의 목소리를 낸 것은 공공병원에 근무하는 의사들이었다. 쿠데타 다음날인 2월 2일 의사들과 의료 서비스 노동자들이 파업을 선언하고 시위를 시작하면서 100여개가 넘는 공공 병원들이 운영을 중지하였다(Frontier 2021/02/03). 이들을 시작으로 철도 노동자의 대다수가 시위에 동참함으로써 철도 운행이 중단되었다. 부두에서 하역하는 노동자들의 파업은 물류의 흐름을 멈추게 하였다. 국영은행을 비롯한 은행원들의 파업은 현금의 흐름을 중단시켰고, 은행원들은 특히 군부가 은행에서 돈을 출금하는 것을 막기 위해 출근을 거부했다. 군부 소유의 군수 산업 노동자들의 파업은 군수 물자의 생산을 마비시켰다. 공무원들의 대규모 시위 참여로 정부 부처 사무실이 텅 비게 되었고 조세 등 다양한 부분의 행정이 전면 중지되었다(Paddock 2021/02/15). 노동조합은 보다 적극적이고 조직적으로 시위에 참여하였다. 10만여 명의 조합원을 가진 교사노조를 비롯한 교원 단체들이 파업을 선언하고, 미얀마의 주요 도시인 양곤 주변 산업단지 노동자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봉제 공장 노동자들도 대규모로 시위에 참여하였다. 쿠데타가 발생하자 다양한 연맹 소속이었던 봉제 공장 노조들은 긴급회의를 소집해 의견을 모으고 총파업을 통해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현장 노동자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일례로 500여명의 노동자가 일하던 먄이(Mian Yi) 공장에서는 300명의 노동자가 파업을 선언하고 시위에 참여하였다. 2월 6일 공단 지역에서 도심으로 행진을 시작한 봉제노동자들의 시위대는 학생 등 다른 조직들과 연대하여 시위를 대규모로 확대시켰다. 이러한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그간 축적해 온 파업과 시위 경험이 매우 유효했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노동자들은 그간 정치적인 이슈로부터 거리를 두어왔다(Haack and Nadi Hlaing 2021/09/03). 노동자들의 권리를 요구하는 자신들의 목소리가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경계하거나 군부가 뒷받침하는 야당에게 이용되어 NLD 정부에 타격을 입히는 것을 우려한 것도 한 이유였다. NLD 정부가 친자본 정책을 펼치고 있다는 비판과는 별개로, 민간정부에 근거한 민주주의를 통해서만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군부의 재등장은 그러한 가능성을 모두 봉쇄하고 이전의 억압적인 체제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군부는 시위의 확대를 막기 위해 인터넷 사용을 제한하고 공단 지역을 포함해 시위가 격심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는 한편 개혁개방과 함께 사문화되었던 거주자 등록제를 부활시켜 야간에 주거 지역을 기습하여 시위 주도자와 노조 간부들을 체포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시위에 참여한 공공부문 노동자들과 공무원들을 회유하거나 위협하여 직장으로의 복귀를 유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회유와 위협은 죽는 한이 있어도 군부 독재 시절로 돌아갈 수 없노라며 저항하는 시민들의 시위를 억누르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시민들은 노조와 소속 단체 등을 통해서 조직적으로, 그리고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인터넷 플랫폼을 통해 산발적으로 시위에 참여하면서 시민 불복종 운동을 확대시켰다. 인터넷이 막히면 우회 경로를 뚫고, 전화를 막으면 태국 심카드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돌파구를 마련하기도 했다(Milko 2021/02/09). 결국 2월 하순에 미얀마 군부는 무장하지 않은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적인 발포를 시작하였다. 최전방에 배치되었던 군대를 동원해 평화시위를 벌이던 시민들을 학살하고 부상자들을 돕는 의료진에게 폭력을 가하고, 무고한 어린아이들에게까지 발포를 자행하였다. 정치범지원협회(AAPP: Assistance Association for Political Prisoners)가 5월 23일 발표한 바에 따르면 군경의 발포와 폭력으로 현재까지 어린아이를 포함한 818명의 시민이 사망하고 5,392명이 연행당했으며, 그 중 4,296명이 구금 중이거나 형을 선고 받았다. 이와 함께 계엄령 위반 혐의로 19명에게 사형 선고 (17명 궐석 재판), 여성을 살해한 혐의로 7명에 대한 사형 선고를 내렸다. 1988년 이후로 사형 집행이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공포를 조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체포된 시위자들에게 참혹한 고문과 폭행을 가한 후 그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진을 방송으로 내보내는 것도 이와 유사하게 시민들의 저항의지를 꺾기 위한 심리전의 일환으로 보인다. 최근 연락이 닿은 미얀마 현지의 지인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에서도 그렇고 뉴스에서도 보다시피 이제 소규모의 산발적인 시위를 제외하고 거리 시위는 소강상태에 접어든 듯싶다. 하지만 영화 제목에서 따온 이 글의 제목처럼 끝날 때까지 끝난 건 아니다. 광주의 5월이 1980년에 끝나지 않고 끈질기게 이어져 결국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거대한 항쟁으로 되살아난 것처럼, 미얀마 사람들에게는 이제부터가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의 시작일 것이다. 실제 미얀마 활동가들은 희생자가 발생하는 거리 시위가 아닌 다양한 방식의 저항들( 희생자 추모, 저항 메시지 매단 풍선 날리기, 군부 소유 기업 상품 불매 등)을 고안해 내고 있다. 그 한 예가 지난 3월 24일에 있었던 침묵 파업(silent strike)이었다. 인터넷을 통해 조직된 이날 시위에 대부분의 상점들이 문을 닫고 차량은 운행을 멈추고 시민들도 일제히 거리에서 사라져 도시 전체를 침묵에 잠기게 함으로써 군부를 당혹케 하였다. 또한 지난 4월 13일은 미얀마 최대의 명절이자 신년 물축제인 띤잔이 시작되는 날도 그러했다. 예년 같으면 일주일 동안 이어지는 축제로 온 나라가 떠들썩할 시기이다. 그러나 거리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이는 미얀마 시민들의 군부에 대한 저항의 일환이었다. 이처럼 미얀마 사람들은 결코 군부에 굴복하지도,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며 결의를 다지고 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처럼 모든 것은 흔적을 남긴다. 저항은 기억을 남긴다. 그 기억을 기록으로, 역사로 남기고 그 역사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바꾸는 것은 남은 자들의 몫일 것이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끊임없는 관심과 지지, 지원일 것이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울 때 받았던 국제적인 연대와 지지, 지원이 민주주의를 향한 지난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던 투쟁을 지속할 힘이 되어 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참고문헌Lin, Kevin and Michael Haack. 2021. Myanmar s Labor Movement Is Central to the Fight Against Authoritarianism: An Interview with Ma Moe Sandar Myint . Jacobin. March 2. https://jacobinmag.com/2021/02/myanmar-labor-movement-authoritarianism-coupFrontier. 2021. Teachers, Students Join Anti-coup Campaign as Hospital Staff Stop Work. Frontier Myanmar. Feb. 3. https://www.frontiermyanmar.net/en/teachers-students-join-anti-coup-campaign-as-hospital-staff-stop-work/Paddock, Richard C. 2021. We Can Bring Down the Regime : Myanmar s Protesting Workers are Unbowed. The New York Times. Feb. 15.https://www.nytimes.com/2021/02/15/world/asia/myanmar-workers-coup.htmlHaack, Michael and Nadi Hlaing. 2021. Workers in Myanmar Are Launching General Strikes to Resist the Military Coup: An Interview with Ma Moe Sandar Myint, Ma Ei Ei Phyu, Ma Tin Tin Wai. Jacobin. Sep. 3.https://jacobinmag.com/2021/03/myanmar-burma-general-strike-coup.Milko, Victoria. 2021. EXPLAINER: How are the Myanmar Protests Being Organized? abcNEWS. Feb. 9. https://abcnews.go.com/Politics/wireStory/explainer-myanmar-protests-organized-75771742 [12] '끝없는 1차 유행': 인도네시아의 코로나19 전개와 정부의 대응 ㅣ 김형준 작성자 동남아연구소 조회수 1367 첨부파일 1 등록일 2021.03.10 전동연의 열두번째 이슈페이퍼가 발행되었습니다. 우리 연구소의 공동연구원인 강원대 김형준 교수가 인도네시아의 코로나19 확산 상황과 대응양상을 개괄적으로 살펴보면서 책임 떠넘기기 가 정부의 방역정책 관련 담론의 특징임을 보여주는 글입니다. 초록이 이슈페이퍼는 2020년에 초점 맞추어 인도네시아의 코로나 확산 상황과 대응양상을 개괄적으로 살펴본다. 끝없는(계속되는) 1차 유행(endless first wave) 이라는 표현은 인도네시아의 코로나 상황을 적절하게 요약한다. 1차 유행 후 2차, 3차 유행기를 맞이한 다른 나라와 달리, 인도네시아의 확진자 수는 큰 폭의 감소세 없이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그럼에도 2021년 1월 13일을 기준으로 할 때, 백만 명당 누적 감염자수는 3,095명으로 세계 137위, 백만 명당 누적 사망자는 112위였다. 이런 자료만을 놓고 보면, 코로나 대응에 있어 소기의 성과가 있었다고 평가될 수 있다.사회적 제한이 강하게 적용된 첫 방역정책(PSBB) 이후, 정부는 완급을 조절하는 방식으로 세 차례 정책을 변경했다. 2021년 초 시행된 네 번째 방역정책(PPKM Skala Mikro)은 가장 낮은 행정단위에 일부 방역 권한을 위임함으로써 마을 공동체를 방역의 대상이 아닌 동반자로 간주하는 인식 전환을 내포했다. 코로나가 미친 사회경제적 영향에 대응하기 위해 정부는 695조 루삐아(미화 약 470억 달러, 한화 약 55조원) 규모의 국가경제회생(Pemulihan Ekonomi Nasional) 정책을 시행했다. 6개 영역으로 나뉘어 시행된 정책 집행률은 연말에 83%에 이르렀지만, 인도네시아 관료제의 비효율성을 고려할 때 낮은 수치라고만 평가될 수 없다. 방역과 함께 경제 회생을 목표로 한 정부의 정책은 일정한 성과를 가져왔다. 2020년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2.07%를 기록했지만, 이는 예측치보다는 좋은 결과였으며, 코로나 피해가 심각하지 않던 주변 국가보다도 낮은 감소폭이었다. 2021년 1월부터 시노백 백신 접종이 시작되었으며, 전체 인구의 67%인 1억 8천여만 명을 대상으로 15개월 동안 진행될 계획에 놓여 있다. 백신 접종은 무료이며, 이를 위해 74조 루삐아의 예산이 책정되었다. 의료진을 중심 대상으로 한 초기 접종 과정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방역정책과 관련된 담론에서 나타난 특징은 책임 떠넘기기였다. 대통령이 공무원에 대한, 공무원이 일반인에 대한, 일반인을 대신한 전문가가 정부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는 순환적 상황이 코로나 초기부터 현재까지 지속했다. 이 중 일반인에게 코로나 확산의 책임을 떠넘기는 담론은 코로나 확산을 효과적으로 막지 못한 정부의 무능력함, 저소득층에 돌아가야 할 지원품을 착복한 사회부 장관이 예시하는 엘리트 집단의 부정부패, 정보의 독점과 정보제공의 불투명성, 코로나를 빌미로 가중된 권력기관의 억압과 통제로부터 일반 대중의 관심을 돌리고, 그 책임을 이들에게 전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이슈페이퍼 12호 원문 내려받기 [11] 인도네시아 노동권에 대한 일자리창출법의 파장: 현지의 노동변호사 겸 활동가 인터뷰 ㅣ 전제성·엔당 로카니 작성자 동남아연구소 조회수 1816 첨부파일 1 등록일 2021.01.21 초록인도네시아에서 일자리창출법은 사업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여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취지에서 2020년 11월 2일에 제정되었다. 그렇지만 여러 노동조합들은 이 법이 노동권을 심각히 침해한다며 시위를 연이어 전개하고 헌법재판소에 제소하였다. 이렇게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 된 일자리창출법이 노동권과 노동조합운동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에 관해 30년 관록의 현지 노동변호사 겸 활동가 엔당 로카니의 의견을 이메일 인터뷰를 통하여 들어보았다. 그녀는 노동 측의 권리와 이익을 침해하는 변화로서 업종별지역최저임금 철폐를 포함하는 최저임금제도의 간소화, 소기업과 영세기업의 최저임금 지급 의무 면제, 계약직 사용기한 자율화, 일방적 해고 절차 허용 및 퇴직금 삭감 등을 지목하고, 특히 최저임금제도와 해직 절차의 변화를 심각한 이익 침해로 강조하였다. 그리고 노동조합의 개입과 후폭풍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입법 과정에서 노동조합운동은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행동을 전개하였으나 불리한 법의 제정을 막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세 부류로 분열되었기에 향후 반목을 이어갈 가능성도 낳고 말았다. 지역별 최저임금 결정 절차에서 노동조합이 참여하는 임금위원회의 제안을 감안하던 절차의 폐지는 노동조합연맹의 영향력을 약화시킬 것으로 전망된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우리가 함께 생각해볼 숙제가 부연된다. 노동권의 후퇴에도 불구하고 이번 입법으로 촉진될 신규 투자가 일자리를 괄목할 만하게 창출하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벌써 제기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과 각료뿐만 아니라 국회까지 사업 친화적인 태도를 숨기지 않는 작금의 새로운 정치가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삶을 앞으로 어떻게 변형시킬지 주목해야 할 것이다.이슈페이퍼 11호 원문 내려받기인터뷰의 목적과 방법전제성: 인도네시아에서 일자리창출법 (고용창출법)이 2020년 10월 5일에 국회를 통과하고 조코 위도도(Joko Widodo, 줄여서 조코위 Jokowi) 대통령이 11월 2일에 서명함으로써 법으로 제정되었다. 이 법은 노동, 조세, 금융, 교육 등 여러 분야에 관련된 78개 법의 1,200여개 조항을 한꺼번에 개정 또는 폐기하겠다는 특별법이기 때문에 옴니버스법 (omnibus law)이라고 불려온 사상 초유의 파격적인 법이다. 법을 하나씩 고치면 수십 년 걸릴 개정작업을 수개월 만에 완수했다. 그런 만큼 논란이 많았고 반발도 거셌다. 코로나19 대유행 속에서도 많은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 격하게 분노를 표출하였고 세계 각지 주요 언론의 이목을 끌었다. 일자리창출법은 투자 허가를 간소화하고 기업 규제를 완화함으로써 고용을 증대시키겠다는 취지로 제정이 추진되었다. 코로나19로 인한 실업 위기도 긴급한 입법의 필요성으로 나중에 부연되었다. 사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 일자리를 늘이겠다는 명분으로 기존에 일각에서 투자와 사업에 제한을 가한다고 지목하던 법률 조항들을 대거 폐기하거나 수정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개정은 노동권, 환경 보존, 지방분권, 관습적 토지점유권 등을 침해한다는 비판이 강력히 제기되었다. 일자리창출법을 거부하는 이들은 이 법이 인도네시아의 미래에 장기적인 손상을 입힐 것이며 지구적으로도 해악을 끼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일자리창출법의 다양한 파장 가운데 우리는 노동자 권리(노동권) 측면을 먼저 살펴보기로 했다. 전북대 동남아연구소가 설정한 주요 연구 분야 가운데 하나가 노동 문제이고 일자리창출법을 가장 거세게 반대하고 시위를 앞장서 조직한 이들이 노동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기사 몇 편만 읽어도 노동자들의 분노와 좌절이 느껴졌다. 반대 시위에 참여한 금속업종 여성노동자는 팬데믹은 우리의 오늘을 빼앗고 이 법은 우리의 미래를 빼앗는다 며 좌절했고, 자카르타의 남성노동자는 코로나가 한 세대에 관련된다면 이 법은 일곱 세대에 영향을 줄 것 이라고 우려했다(BBC 2020.10.09). 동부 자바의 공장 파업을 주도한 여성노동자는 대통령이 당선되도록 표를 준 보통사람들이 아니라 금전적으로 후원한 이들에게 보답하고 있다 며 분노했다(The New York Times 2020.10.08). 일자리창출법은 노동 관련 분야에서 노동에 관한 2003년 13호법(노동법), 국가사회보장제도 (BPJS)에 관한 2004년 40호법(사회보장법), 국가사회보장공단에 관한 2011년 24호법(사회보장공단법), 인도네시아이주노동자보호에 관한 2017년 18호법(이주노동자법)의 조항들을 개정하는 광범한 효과를 갖는 것으로 알려졌다(SSEK 2020.12.04). 그런데 노동권에 대한 파장은 한 때 근로기준법 이라 번역되었던 노동법(2003년 13호법)과 일자리창출법을 비교함으로써 일단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반대 시위에 참여한 노동자와 학생들은 주로 최저임금, 계약직 고용, 퇴직금, 모성 보호 휴가 관련 제도와 절차의 개정을 문제 삼았는데, 이런 제도는 모두 기존 노동법에 명시되고 보장되던 것들이기에 하나씩 짚어가며 변화의 여부와 정도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궁금했던 점은 노동조합의 입법과정 참여에 관한 것이었다. 노동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법이라면 허다한 노동조합들은 입법과정에서 무엇을 했는지 의문이었다. 2003년 노동법은 경제위기의 충격에 대응하고 권위주의 제도 청산의 필요가 우선시되던, 이른바 개혁시대 를 반영한 법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차례 법 개정의 필요가 제기되었으나 노동조합운동은 잘 방어해 왔는데, 이번엔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번의 패배가 향후 노동조합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줄 것이라 여겨졌다. 그래서 필자는 현지의 관록 있는 노동변호사 겸 활동가와 서면 인터뷰를 추진함으로써 일자리창출법 제정이 초래한 노동권의 변화를 가늠하고 노동조합운동의 대응과 후폭풍도 함께 파악해 보고자 하였다. 엔당 로카니(Endang Rokhani)는 노동조합에 자문을 제공하고 노동자를 법정에서 변호해온 노동변호사이다. 1991년부터 2006년까지 여러 노동권옹호단체에서 근무한 바 있고 지금도 각종 노동조합 연대회의에 개인 자격으로 참여하는 활동가이기도 하다. 필자는 수하르토 집권 말기였던 1995년 여름에 엔당을 자카르타의 노동발전재단(YBM: Yayasan Buruh Membangun) 사무실에서 처음 만났다. 해외진출기업 노동인권문제를 파악하러 파견된 참여연대 조사단의 일원으로 한인기업 노동실태에 관한 의견을 들었다. 당시 엔당이 근무하던 YBM은 국가조합주의 하의 어용노총(SPSI)과 협력하는 단체였다. 필자는 진보적인 법률구조재단(LBH: Lembaga Bantuan Hukum)에서 근무했던 변호사가 왜 어용노총과 협력하는 단체에서 일하는지를 물었는데, 엔당은 조직이 아니라 거기 속한 노동자들을 봐야 한다며 상담이 필요한 노동자들을 만나 법적 조언을 해 줄 수 있다면 어용노총과도 협력할 수 있다고 답했다. 이후 엔당은 이슬람신도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단체인 도시사회봉사회(PMK: Pelayanan Masyarakat Kota)로 이적하여 활동가로 근무하며 노동조합 간부들에게 상담을 제공했다. 수하르토 독재 체제가 종식된 뒤에 다시 만난 엔당에게 필자는 종교가 문제되지 않느냐고 물었는데, 이때도 엔당은 전과 유사하게 노동조합 간부들에게 자문할 수 있다면 종교는 상관없다고 답했다. 당시 엔당은 노동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노동권 안내서도 단독 집필하여 출판했다(Endang 1999). 노동조합 전성시대가 도래하자 노동운동에 점차 흥미를 잃은 PMK로부터 10년 만에 방출된 엔당은 각자도생의 길을 찾아야 했다. 국립인도네시아대학교에서 사업장 단위의 복수노조 간 경쟁과 갈등에 관한 석사학위 논문을 작성하여 사회학 석사학위를 받았기에(Endang 2006 2007) 연구보조원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요즘 인도네시아 노동운동연구에서 쌍벽을 이루는 연구자들이 모두 엔당에게 노동자 인터뷰를 대행시켰으니 엔당의 노동자 접근성과 면접 조사능력은 탁월했다 할 수 있다. 최근에 엔당은 수도와 서부자바를 무대로 노동조합연맹 간부들에게 법률 자문을 제공하고 법정에서 노동자 측을 대리하는 변호사로 활동하며 생계도 꾸리고 운동성도 유지하고 있다. 노동 편에 서지만 노동조합연맹 간부들이나 조합원들의 미진한 행태에 대해서도 비판을 잊지 않는다. 늘 현장 지향적인 엔당은 조직이 아니라 사람을 보았고, 이념이나 종교가 아니라 삶과 실천을 중시해왔다. 그래서 필자는 혼란스러운 일자리창출법에 관한 평가도 엔당에게 먼저 들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필자는 일자리창출법안의 국회 통과 1주일 뒤인 10월 12일에 이메일 인터뷰를 제안했고 엔당은 흔쾌히 동의해주었다. 인도네시아어로 질문들을 작성하여 10월 19일에 보냈다. 엔당은 일자리창출법안을 입수 검토한 뒤에 인도네시아어로 작성한 답변을 11월 3일에 보내주었다. 답변을 읽고 추가 질문들을 보냈고 추가 답변은 11월 14일에 도착했다. 엔당의 답변을 통해 여러 궁금증이 다소 해소되자 게을러지기 시작했다. 전북대 정치외교학과 1학년에 재학 중인 인도네시아 학생 니탈리아 위자야(Nitalia Wijaya)에게 인터뷰 내용을 연습 삼아 할 수 있는 만큼만 한글로 번역해보라며 맡겼다. 니타가 실로 애써 번역한 결과를 전달받은 날이 12월 11일이었으니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이다. 다른 해야 할 일이 많아 미뤄 두었다가 엔당의 신년 인사를 받고서야 더 이상 늦어서는 안 될 것 같아 부랴부랴 작성에 들어갔다. 필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원문을 대조하며 다시 번역하였고 설명이 부족한 부분이나 재차 확인이 필요한 부분은 엔당에게 몇 차례 간단한 질문들을 보내서 답을 또 받았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가 인터뷰의 몇 곳에 해설 각주를 달았고 엔당이 보내준 사진들에 설명을 붙였다. 끝으로 머리말과 맺음말을 추가하고 연구소 동료들의 교정을 거쳐 이렇게 이슈페이퍼로 내놓게 되었다.엔당 로카니 인터뷰전제성(이하 전): 인도네시아에서 최근 논란의 중심이 된 일자리창출법, 일명 옴니버스법 이 어떤 과정을 거쳐 제정되었는지 간략히 말씀해주세요.엔당 로카니(이하 엔당): 조코 위도도 대통령은 2019년 10월 20일에 국민협의회(MPR)에서 두 번째 임기의 대통령 취임 연설을 할 때 고용창출을 위한 옴니버스법을 만들겠다는 아이디어를 처음 공개하였습니다. 이어서 12월 17일에 국회(DPR)는 이 옴니버스법을 포함하는 50개 법안을 2020년의 우선 입법 계획 목록으로 정하는 데 정부와 합의하였습니다. 2020년 2월 12일 수요일에 정부가 국회에 법안을 상정하면서 입법과정이 시작됩니다. 대통령이 연설할 때 100일 이내에 이 옴니버스법을 제정할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제정 과정에서 각계의 거부에 부딪쳤습니다. 노동자, 농민, 환경운동, 아닷(adat: 독자적인 관습법)을 지키는 지역민들은 정부가 초안을 국회에 이관할 때부터 반대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2020년 10월 5일에 국회 총회에서 옴니버스법안이 통과되었습니다. 국회 통과 이후 대학생들의 지지를 받는 노동자들이 계속적인 시위를 전개하여 거부의 입장을 표출했습니다. 그렇지만 2020년 11월 2일에 조코위 대통령이 서명함으로써 옴니버스법은 고용창출에 관한 2020년 제11호 법(Undang-Undang Nomor 11 Tahun 2020 tentang Cipta Kerja)으로 제정되었습니다.전: 법안 통과 직후에 많은 노동자와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분노에 찬 시위를 연이어 전개한 이유 중에 하나는 입법 과정에서 관련 당사자들이 법안을 공유하고 협의하는 사회화 (sosialisasi) 과정이 잘 안 되었기 때문인가요?엔당: 노동자들은 입법과정 초반부터 여러 가지 이유로 일자리창출법을 거부했습니다. 그런 이유 가운데 하나는 노동자들이 이 법을 입안하는 과정의 논의에서 배제되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입법과정에 노동 측을 결부시키고자 여러 노동조합을 정부의 법안 검토 위원회에 초대하였습니다. 수차례 회의에 참석한 뒤 일부 노동조합은 위원회를 탈퇴하기로 했습니다. 그 이유는 정부가 노동자의 희망을 실제로 반영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탈퇴한 노동조합은 안디 가니 누와웨아(Andi Gani Nuwawea) 위원장이 이끄는 KSPSI(Konfederasi Serikat Pekerja Seluruh Indonesia: 전인도네시아근로조합총연맹)와 KSPI(Konfederasi Serikat Pekerja Indonesia: 인도네시아근로조합총연맹)였습니다. 정부 위원회에 잔류한 노동조합은 요리스 라웨야이(Yorrys Raweyai) 위원장이 이끄는 KSPSI(Konfederasi Serikat Pekerja Seluruh Indonesia: 전인도네시아근로조합총연맹), KSBSI(Konfederasi Serikat Sejahterah Indonesia: 인도네시아번영노동조합총연맹), KSPN(Konfederasi Serikat Pekerja Nasional: 전국근로조합총연맹),K-Sarbumusi(Konfederasi Sarekat Buruh Muslimin Indonesia: 인도네시아무슬림노동조합연맹)였습니다.1) 저는 일자리창출법안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에 따라 노동조합들을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정부와 같은 편에 서 있는 부류로서 정부 위원회에 잔류했던 요리스의 KSPSI, KSBSI, KSPN, K-Sarbumusi가 여기에 속합니다. 두 번째 부류는 정부 법안에 동의하지 않지만 국회에 입장을 전달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함으로써 마치 국회와 같은 편인 것처럼 보이는 안디 가니의 KSPSI, KSPI, 그리고 전국복지운동연대(GEKANAS) 소속 노동조합연맹들입니다. 세 번째 부류는 법 제정을 애초부터 강경하게 거부했고 정부나 국회와 어떤 대화도 시도하지 않았던 KASBI(Kongres Aliansi Serikat Buruh Indonesia: 인도네시아노동조합동맹회의)와 GSBI(Gabungan Serikat Buruh Indonesia: 인도네시아노동조합연합)를 비롯하여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노동조합들입니다. 그러므로 협상과 사회화 과정이 원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이 법을 완강히 거부하는 부류도 있었던 것입니다. 일자리창출법이 통과되자 두 번째와 세 번째 부류는 예상 가능하듯이 가만있지 않고 시위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정부와 같은 편으로 간주되었던 KSBSI마저도 여러 차례 시위를 전개하였습니다. 정부와 국회를 불신하는 분위기가 만연했는데, 그동안 공개적으로 배포된 법안들의 들쭉날쭉한 페이지 수 변화는 일자리창출법이 엉망이라는 징표처럼 보여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전: 정부 안에 반대하면서 국회에 로비를 전개했던 두 번째 부류에 속하는 복지운동 연대조직 그카나스(GEKANAS)에 대해 더 자세히 소개해 주세요.엔당: 그카나스는 전국복지운동(Gerakan Kesejahteraan Nasional)의 줄임말입니다. 1945년 헌법과 국시 빤짜실라(Pancasila)의 가치를 받들며 민주적이고 수평적인 연대 관계로 이루어진 특별위원회입니다. 그카나스는 사회보장행동위원회(KAJS: Komite Aksi Jaminan Sosial) 운동을 계승하는 조직으로 2015년 6월 23일에 결성되었습니다. KAJS는 아시다시피 국가사회보장공단(BPJS: Badan Penyelenggara Jaminan Sosial)에 관한 법(2011년 24호법)의 제정을 촉진하고 수호했던 연대운동조직이었죠. 그카나스는 12개 노동조합연맹이 창설했습니다. 회원 조직으로 전인도네시아근로조합총연맹(Konfederasi Serikat Pekerja Seluruh Indonesia, KSPSI) 산하의 화학에너지광업근로조합연맹(FSPKEP - SPSI: Federasi Serikat Pekerja Kimia Energi Pertambangan), 금속전자기계근로조합연맹(FSP LEM - SPSI: Federasi Serikat Pekerja Logam Elektronik Mesin), 담배식음료근로조합연맹(FSPRTMM - SPSI: Federasi Serikat Pekerja Rokok, Tembakau, Makanan dan Minuman) 및 직물신발가죽근로조합연맹(FSPTSK SPSI Federasi Serikat Pekerja Tekstil, Sandang dan Kulit), 그리고 인도네시아근로조합총연맹(Konfederasi Serikat Pekerja Indonesia, KSPI) 산하의 화학에너지광업근로조합연맹(FSPKEP - KSPI: Federasi Serikat Pekerja Kimia Energi Pertambangan), 관광업근로조합개혁연맹(FSP PAR REF - KSPI Federasi Serikat Pekerja Pariwisata Reformasi) 및 인쇄출판언론정보근로조합연맹(FSP PPMI KSPI: Federasi Serikat Pekerja Percetakan Penerbitan dan Media Informasi)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근로조합연맹(FSPI: Federasi Serikat Pekerja Indonesia), 1998년창설인도네시아무슬림근로형제단(PPMI'98: Persaudaraan Pekerja Muslim Indonesia 1998), 전인도네시아노동조직연합(GOBSI: Gabungan Organisasi Buruh Seluruh Indonesia), 인도네시아독립근로조합연합(GASPERMINDO: Gabungan Serikat Pekerja Merdeka Indonesia), 가루다인도네시아승무원협회(IKAGI: Ikatan Awak Kabin Garuda Indonesia) 같은 독립 노조연맹들도 함께하고 있으며, 노동권옹호정책분석센터(ELKAPE: Lembaga Analis Kebijakan dan Advokasi Perburuhan)나 노동권옹호및정책연구소(PAKKAR: Pusat Kajian Kebijakan dan Advokasi Perburuhan) 같은 비영리단체도 동참하고,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는 연구자들도 연계되어 있습니다.전: 일자리창출법은 최저임금제도의 변화를 꾀하고 있어서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고 들었습니다. 최저임금제도와 관련된 중요한 변화는 무엇인가요?엔당: 일자리창출법은 주지사에게 최저임금(UM: Upah Minimum)을 정할 의무를 부여하지만, 시(Kota)/군(Kabupaten) 단위 지역별 최저임금(UMK: Upah Minimum Kabupaten/Kota)을 정할 의무는 없앴습니다. 그리고 지역의 업종별 최저임금(UMSK: Upah Minimum Sektoral Kabupaten/Kota)을 폐지했습니다. 최저임금을 지역별 물가인상과 경제성장을 변수로 집어넣은 특정한 공식으로 계산토록 했고, 구체적인 방안은 정부의 시행령(PP: Peraturan Pemerintah)에서 명시하도록 했습니다. 노동에 관한 2003년 제13호 법(UUK: Undang-Undang Nomor 13 Tahun 2003 tentang Ketenagakerjaan, 근로기준법 또는 노동법) 제89조 제3항은 주지사가 임금위원회(Dewan Pengupahan)의 추천을 근거로 최저임금을 정하도록 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일자리창출법에 의해 노동법 제89조가 폐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지사가 최저임금을 정하기 위한 토대는 권위 있는 통계 전문기관이 제공하는 노동 및 경제 상황에 대한 데이터뿐입니다(일자리창출법 제88C조 참조). 시/군 단위는 물론이고 주(Propinsi) 단위의 최저임금 결정 절차에서 임금위원회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일자리창출법이 소기업과 영세기업(usaha mikro)에 최저임금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확실히 명시한 점은 아주 새롭습니다. 소규모 사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체계적인임금 차별로 불이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전: 그렇다면 일자리창출법으로 인한 최저임금제도의 변화가 노동자들에게 상당히 불리하게 작용하겠군요?엔당: 물론입니다. 노동자들에게 불리합니다. 우선적으로 주 지역 최저임금(UMP: Upah Minimum Propinsi)에 비해 상당히 높은 액수로 결정되는 시/군 지역 최저임금(UMK)의 혜택을 누리던 지역의 노동자들이 손해를 볼 것입니다. 자바섬의 경우를 보면 UMP만 있는 수도 자카르타특별주를 제외한 모든 주의 시/군에서 UMK가 매년 따로 정해져 왔습니다. UMK와 UMP의 비교를 위해 2020년 중부 자바주와 서부 자바주의 예를 표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시/군단위 최저임금뿐만 아니라 업종별 시/군단위 최저임금(UMSK)과 업종별 주단위 최저임금(UMSP: Upah Minimum Sektoral Propinsi)도 있었잖습니까? UMSP는 UMP보다 더 높게 책정되었고 UMSK는 UMK와 UMSP보다 더 높게 책정되곤 했습니다. 일자리창출법이 업종별 최저임금을 폐지하였으니 이제 이런 이득은 사라지게 됩니다. 추가적인 불이익은 노동 측의 대표자들이 더 이상 시장 가격 조사에 개입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정기적으로 수행되던 물품 가격 조사가 없어지면 최저임금 결정은 해당 지역의 실제 상황을 반영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됩니다.2)전: 일자리창출법은 계약직과 아웃소싱(outsourcing, 외주노동) 사용을 늘리는 효과도 주겠죠? 반대 시위에 참여하는 이들은 일자리창출법으로 인해 계약직으로 평생 전전하는 처지가 될 것이라고 말하던데, 이런 우려를 어떻게 보시나요?엔당: 일자리창출법은 계약직의 근로 유형과 계약 기간을 상세하게 명시하지 않고 그런 것들은 나중에 정부시행령(PP)으로 정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정부시행령에 담길 내용에 대해 이미 회의적입니다. 노동자들은 지금 정부가 사업가 측 편의를 많이 봐주고 있다고 보고 있어서 앞으로 만들어질 정부시행령이 노동자의 이익을 확고히 보호해 줄 것이라고 크게 기대하지 않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을 매우 우려하게 만드는 것은 일자리창출법이 계약노동의 사용 기한을 명확히 제한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2003년 제13호 노동법은 계약 기간을 최대 3년으로 제한하였습니다.3) 그런데 일자리창출법은 계약 기한을 비롯한 모든 사안을 노동자와 사용자의 고용계약에 따르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규정은 큰 우려를 낳습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인도네시아 노동자는 고용 계약 과정에서 자신의 이익을 앞세우며 협상할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계약직 노동 관련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일자리창출법 제61A조 1항에 계약 기간이 끝난 노동자에게 고용주가 해직보상금(uang kompensasi)을 지급할 의무가 명시되었습니다. 이어지는 2항은 보상금액이 근속 기간에 비례하도록 명시하였습니다. 물론 다른 경우처럼 3항에서 더 상세한 규칙은 정부시행령에서 정한다고 미뤄두었습니다. 그러나 보상금 지급 조항이 그저 법 조항일 뿐 실행은 어려우리라 예상합니다. 실행 방법을 짐작하기 어려워 일종의 사탕발림 (gula-gula) 조항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보상금을 계약 기간이 종료된 노동자들이 자동적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계약서에 따로 명시되어 있어야 받을 수 있는 것인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알려면 관련 정부시행령을 기다려 봐야 합니다. 한편 일자리창출법 제66조는 아웃소싱 노동자들을 보호할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제66조 2항은 아웃소싱 노동자 보호, 임금 및 복지, 근로 조건, 그리고 발생하는 분쟁 조정은 법이 정한 바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며 그 책임이 아웃소싱회사(perusahaan alih daya: 인력제공회사)에게 있다고 했고, 3항은 계약 기간 중에 아웃소싱회사가 바뀌더라도 업무가 남아있는 한 아웃소싱 노동자의 권리가 보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만약 일자리창출법의 이런 조항들이 잘 지켜진다면 계약직 노동자와 아웃소싱 인력에게 제공되는 보호의 여지가 아직 남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만, 인도네시아에서 이런 법 조항의 집행은 대체로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전: 노동자를 위한 수당과 복지 측면에서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까? 일자리창출법 반대 시위대는 생리 휴가나 출산 휴가 같은 모성 보호가 사라질 것이라 주장하던데, 과연 그런가요?엔당: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큰 변화는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실업보험(Jaminan Kehilangan Pekerjaan)이 생겨서 조금 개선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는데 법의 실행을 의심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실업보험이 전에 없었던 것이기도 하거니와 이 보험의 재원이 국가재정 지출로 조달될 것이기 때문에 인도네시아의 경제 상황을 고려한다면 실행이 어려울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법 초안에는 여성들만의 휴가를 누릴 권리, 즉 생리 휴가와 출산 휴가에 관해 언급함으로써 변화를 꾀할 것 같았습니다만, 최종안에서 명시되지 않아서 이런 권리들은 노동법에 따라 그대로 존속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일자리창출법에서는 생리휴가와 출산휴가에 관한 설명이 없기 때문에 기존 노동법의 보장 규정이 유효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전: 계약직 노동에 대해서나 모성보호 측면에서나 사위대의 주장이 사실과 다른 면이 있는데, 그렇다면 정부가 주장한 것처럼 시위대들이 일자리창출법에 관한 가짜뉴스(hoax)에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시나요?엔당: 정부가 지적한 일자리창출법안에 대한 가짜뉴스 유포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narasi)가 가짜인지 진짜인지 구별하려면 그 이야기가 만들어진 시점과 준거 문서를 알아야 합니다. 일자리창출법의 초안을 살펴보면 맞는 이야기지만 최종안을 보면 틀린 이야기가 됩니다. 국회의 법안 심의 과정에서 변경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일자리창출법의 초안에서 여성만을 위한 모성 보호 휴가 권리를 폐지한다는 조항을 담았다가 최종안에서는 빼버린 경우가 그렇습니다. 또한 계약직 노동자 관련해서 일자리창출법 초안은 근로기준법 제59조를 변경하여 계약직 노동의 사용 기한 규정과 사용 가능 업무 제한 규정을 모두 철폐했습니다만, 최종적으로 제정된 법은 근로기준법 제59조를 대체로 유지하면서 그 4항으로 계약직의 직무 유형, 근로 시간, 고용계약 연장의 기한 제한 등은 정부시행령으로 정한다는 규정을 추가했을 뿐입니다. 물론 이 조항에 의해 추후 제정될 정부시행령에서 이런저런 제한이 가해질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전: 해고 관련 문제는 어떤가요? 일자리창출법에 따라 사용자가 지불해야 할 퇴직금이 줄었고, 앞으로 해고가 용이해질 것이라던데요.엔당: 일자리창출법을 읽으며 제가 가장 실망했던 것은 고용관계중단(PHK: pemutusan hubungan Kerja) 절차와 관련된 것입니다. 앞으로 해고가 훨씬 더 쉽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노동자는 회사가 결정한 해고를 거부할 수 없게 됩니다. 회사 측에서 해당 노동자에게 통보만 하면 해고가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회사 측이 노동자를 해고하고자 한다면 그 노동자는 자신의 일자리를 지킬 가능성이 거의 없게 된 것이죠. 일자리창출법이 노동법 제155조를 폐지하였기 때문에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경영자에 의한 해고를 무효화 (pembatalan) 할 수 있는 여지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노동법 제155조 1항은 일정한 요건(151조 3항)을 갖추지 않은 해고는 법적으로 무효 (batal demi hokum)라고 명시했습니다.4) 근로기준법 제155조 1항 덕분에 해고당하는 노동자에게 일정한 교섭 여지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회사가 노동자의 실수를 증명할 수 없거나 확실한 해고 사유를 제시하지 못하면 -이를테면 2년 내내 회사가 손해를 보았다든가- 노사관계법원(PHI: Pengadilan Hubungan Industrial, 간단히 노동법원)이 회사에 의한 해고를 무효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자리창출법이 노동법 155조를 폐지했으므로 해고의 무효화 여지도 이젠 없어지겠죠. 또한 노동자들은 기존 노동법을 적용했을 때보다 퇴직금(pesangon)을 더 적게 받을 것입니다. 노동법은 퇴직의 원인에 따라 퇴직금이 다르도록 명시했는데 이제는 퇴직의 이유가 무엇이든 퇴직금이 같도록 변경되기 때문입니다. 이에 더하여 의료비와 이사비용 명목으로 퇴직수당 또는 근속수당의 15%에 해당하는 금액을 추가 지급하도록 명시했던 노동법 제156조 4c항도 없애버렸기 때문입니다.전: 지금까지 살펴본 일자리창출법은 궁극적으로 노동운동에 어떤 영향을 줄까요?엔당: 노동운동과 관련하여 볼 때 일자리창출법이 가한 중요한 변화는 노동조합이 최저임금의 결정과 무관해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최저임금결정에 관한 정부 시행령을 기다려봐야 하지만, 주 단위와 시/군 단위 임금위원회(Dewan Pengupahan)의 격하된 지위는 기본적으로 달라지지 -이를테면 노동법의 규정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노동조합을 절단 낸 것과 같아요. 왜냐하면 이러한 정부 정책으로 인해서 노동조합연맹들이 최저임금을 인상시키는데 기여할 수 없다면 조직에 대한 회원들의 실망이 아주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노동자들이 자기 회사 측과 임금 인상을 교섭할 수 있지만, 사업장 단위의 노동조합이 교섭력이 약하거나 자기 회사의 경영자들이 정부가 정한 최저임금에 딱 맞춰서 임금을 지급하려들기 때문에,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정부의 최저임금 인상에 크게 기대고 의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제 노동조합들이 각 사업장에서 투쟁하지 않으면서 정부가 최저임금을 올려 주리라 믿고 있을 수는 없게 된 것이죠. 많은 이들이 조코위 정부가 일자리창출법과 여러 정책을 통해서 기업가 편을 너무 들어준다며 실망하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의 실망은 -물론 일부 노조는 정부 편이지만- 실로 엄청납니다. 일자리창출법 제정에 이어서 2020년 인력부장관회람서신(SE Menaker No.M/11/HK.04/X/2020)을 통해 2021년 최저임금은 2020년 최저임금과 동일할 것, 즉 2021년 최저임금의 동결을 공표했기 때문입니다. 노동조합의 투쟁은 계속 힘겨울 것입니다. 회사 측이 계약직과 아웃소싱 노동자를 더 쉽게 채용할뿐더러 노동자를 더 쉽게 해고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변화는 노동조합의 회원수에 심각한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됩니다. 유연한 노동관계와 손쉬운 해고의 맹공격을 받으며 노동조합이 조합원을 지켜낼 수 없을 때 노동조합의 가장 기본적인 힘도 상실될 것이 확실합니다. 노동조합의 힘은 회원 수에 있다는 여러 이론들이 알려주듯이, 노동조합이 노조원을 지탱하지 못한다면 당연히 노동조합이 약해져서 노동자의 이익에 어긋나는 정책에 맞서는 교섭 능력도 사라지게 되겠죠.전: 이렇게 매우 불리하게 전개되는 정책 변화에 맞서 노동운동은 어떤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고 보시나요?엔당: 노동운동이 구사해야 할 전략에 관해서는 저도 지금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아직 잘 모르기에 답하기 어렵습니다. 노동조합들이 여전히 분열되어 있는 상황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다양한 노동조합 연맹의 이름으로 쪼개져 있을 뿐만 아니라 정부와 국회를 상대하는 입장에 따라 또한 분열되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국가를 상대하는 입장에서 세 부류로 나눠져 있지요. 즉, 정부의 어떤 정책이든 완전히 지지하는 첫 번째 부류, 정부의 정책을 지지하지 않으나 정부나 국회와 소통하려고 노력하는 두 번째 부류, 정부의 노동 정책을 거부하며 정부나 국회와 소통하지 않는 세 번째 부류. 이렇게 세 부류로 나눠진 상황은 노동조합 진영이 정부 정책에 최대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위해 최대한 응집하는 것을 아주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전: 마지막으로 그동안 일자리창출법 제정에 반대했던 사람들의 투쟁들에 대해 부연하실 말씀이 있으면 어떤 것이든 남겨주세요.엔당: 고용창출 옴니버스법 제정 거부 운동은 처음부터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사실 일자리창출법이라는 명칭 자체가 그 이름을 갖고 말장난하는 방식으로 전개된 사회적 저항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법안(RUU: Rancangan Undang-Undang)의 처음 명칭은 찝따 라빵안 꺼르자(Cipta Lapangan Kerja)에 관한 옴니버스법안이었지만 나중에 찝따 꺼르자(Cipta Kerja)에 관한 옴니버스법안이라고 바뀌게 됩니다.5) 노동자, 대학생은 물론이고 학자들까지 집단적인 방식으로 찝따 라빵안 꺼르자를 찔라까(CILAKA)라는 줄임말로 만들어 불렀기 때문입니다. 찔라까(cilaka)는 자바와 순다 말로 인도네시아어의 쩔라까(celaka: 재앙, 고난, 역경, 불운, 불행, 저주)와 같은 뜻입니다. 이 캠페인이 아주 효과적이었습니다. 아주 자극적이고 기억하기 쉽기 때문이었죠. 결국 정부는 명칭을 찝따 꺼르자 법안으로 변경해야 했습니다. 다른 유형의 저항은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을 감안하여 각종 현수막 내걸기, 소셜 미디어에 글 올리기, 온라인 세미나 개최하기 등의 방식을 통해 전개되었습니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위를 다양하게 전개한 것은 물론이고요, 특히 노동조합 측이 여러 분파로 갈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위를 계속 벌였지요. 노동자들은 법안 심의 초반부터 여러 가지 방식으로 거부 행동을 전개했습니다. 시위, 국회 청원, 포스터 제작 배포에다가 심지어 무슬림합동기도회(istigosah)를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노동자들의 저항은 노동조합연맹의 본부, 지부, 사업장 단위의 모든 층위에서 전개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시민사회(masyarakat)의 다양한 그룹들이 거부 행동을 전개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어민 단체, 농민 단체, 농지 개혁을 주장하는 단체, 아닷(adat: 관습법)을 지키는 지역주민 단체들과 여러 학문분야의 학자들이 일자리창출법안에 대한 거부에 동참했고, 나흐다툴 울라마(NU: Nahdatul Ulama)와 무함마디아(Muhammadiyah) 같은 이슬람단체를 비롯한 대중적 종교단체들도 -이 단체들은 교육 관련 개정 사안에 초점이 있었지만- 거부의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렇지만 시위를 계속적으로 전개할만한 에너지와 인원을 지닌 측은 노동자와 학생조직이었습니다. 여기엔 중등교육과정의 학생들도 포함됩니다. 그런데 가끔 폭력이 수반되는 시위에 기술계 고등학교 아이들이 참여한다는 것이 적절한지 여부에 관하여 시민사회 내부에서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시위와 소셜 미디어에 글을 올리는 거부 행동 외에 법안의 조항들이 지닌 문제를 일일이 비판하면서 법 조항의 개선을 제안하거나 노동 분야 개정안 전체의 철폐를 요청하기 위해 국회에 의석을 가진 정당들과 정부에 대한 지속적 로비를 전개한 노동자 조직과 학자 집단도 있었습니다. 국회가 일자리창출법안 심의 회의장을 계속 바꾸었지만 참관하려는 이들이 매번 도착했고, 이 역시 반대 실천의 일환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일자리창출법안은 통과되고 말았습니다. 법이 만들어졌지만 거부 투쟁은 아직 멈추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도 매주 대통령궁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일부 조직들은 헌법재판소에 사법 심사를, 국회에는 입법심사(legislative review)도 요청하였습니다.6)인터뷰를 마치고전제성: 일자리창출법의 제정으로 인한 파장을 온전히 가늠하기엔 아직 이르다. 법률 조항의 해석과 비교가 더 필요하고 곧 제정될 정부시행령이나 대통령령을 기다려봐야 한다. 그리고 법의 조항들이 집행 과정에서 어떻게 관철 또는 굴절되는지도 앞으로 살펴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인터뷰를 통해서 노동권에 대한 영향과 관련하여 현지의 노동 편에서 관심을 갖고 우려하는 사안들이 어떤 것인지 대체로 파악할 수 있었다. 현지의 노동변호사 겸 활동가인 엔당 로카니는 노동자의 권리와 이익을 침해하는 변화로서 지역별 최저임금제도에서 업종별지역최저임금이 폐지되고 기초단위(시/군단위)지역최저임금의 제정이 의무에서 제외된 점, 최저임금 결정과정에서 지역별 임금위원회의 추천을 반영하는 절차를 삭제한 점, 소기업과 영세기업의 최저임금 준수 의무를 면제한 점, 계약직(기간제) 사용기한을 고용계약의 자율에 맡긴 점, 서면 통보만으로 해고가 가능해진 점, 퇴직금이 삭감된 점 등에 주목하였다. 계약직 근로자에 대한 퇴직보상금 지급, 아웃소싱 노동자 보호 명시, 실직보험 신설 등은 노동 측에 유리한 조항들이지만 그 실행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고 보았다. 그 사이 우리 공관도 일자리창출법 제정으로 인한 노사관계 변화를 분석한 정보를 대사관 홈페이지에 게시하였다(주인도네시아대한민국대사관 2020). 우리 공관의 노무관은 엔당이 지적하지 않은 노사관계 관련 변화에 대해서도 세부적으로 적시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외국인력 고용허가 면제 대상의 확대, 초과근로시간 한도의 확대(하루 3시간 주간 14시간 한도에서 하루 4시간 주간 18시간 한도로 변경), 6년간 근속한 근로자에게 최소 2개월간 장기휴가 부여 조항의 삭제, 주된 업무나 생산 활동에 아웃소싱 사용 금지 규정 삭제, 회사 파산 또는 청산 시 일반 채권보다 임금 우선 지급 규정, 해고 가능 사유로서 기업 합병 및 분리, 경영효율화나 근로자의 구속 등 다양하게 새로이 명시, 근로관계 해지 사유에 따라 보상금이 달리 가산되던 조항 삭제 등이다. 이런 안내는 본 인터뷰와 함께 읽어볼 가치가 있는 선제적 정보라 할 수 있다. 사업가 편의 분석을 제공하는 현지 로펌의 설명도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다(SSEK 2020.12.04). 다국적 변호사들이 참여하는 이 로펌은 엔당처럼 정규직 해고 절차의 변화를 가장 중시하였다. 물론 취지는 정반대였다. 인도네시아에서 드디어 고용주가 일방적으로 해고할 권리(right to unilaterally terminate employment) 를 얻게 되었고 이로써 노동자의 교섭력을 부당하게 (unfair) 높여준다고 재계가 오랫동안 문제 삼았던 절차가 폐기되었다고 평가하였다. 계약직 사용 기간의 제한 폐지를 매우 중요한 변화 로 보았고, 특정한 프로젝트의 완료 를 근거로 계약직 노동자의 해고가 가능해진 점도 소개했다. 정규직 퇴직금 삭감을 비롯한 퇴직금 계산 방식 변화는 소개만 했으나 계약직 노동자 퇴직금 지급에 대해서는 매우 중요하고 논쟁적인(controversial) 변화 라고 표현했다. 실직자에게 6개월 봉급 이하의 현금 지급을 계획하고 초기 자금은 정부가 제공한다는 내용으로 국가사회보장시스템에서 실업보험을 창설하겠다는 조항들에 대해서는 매우 야심찬(ambitious) 변화 라고 언급했다. 최저임금결정제도의 변화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2021년 최저임금 동결에 관한 장관 서신, 코로나19로 인한 최저임금 유예 관련 절차만 간단히 소개하였다. 이런 로펌의 법 해석도 엔당 인터뷰와 함께 비교해 볼 가치가 있다. 시일이 흐르며 다양한 분석들이 제시되고 있지만, 이번 인터뷰의 특별한 가치는 노동조합운동의 개입과 후폭풍도 함께 살펴본 점이라 할 수 있겠다. 엔당은 일자리창출법 제정 과정에서 전개된 노동조합과 시민사회의 거부 행동을 사진과 문서 자료와 함께 상세히 전달하였다. 이러한 저항을 통하여 노동조합 진영은 완패를 면할 수 있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엔당은 그 시행 가능성을 의심하지만, 기간제 근로자 해직 시에 보상금 지급이나 실업보험을 신설한 것은 분명히 노동 측에게 유리한 조항이다. 우리 공관의 노무관이 지적하였듯이 법의 원안에서 기간제(계약직) 근로자의 사용사유 제한을 폐지하고자 했으나 유지되었고, 생리 질병 결혼 등으로 인한 유급휴가 보장 규정을 삭제코자 했으나 최종안에서는 유지되었다(주인도네시아대한민국대사관 2020). 노동조합의 저항이 강했기 때문에 절충된 부분들이 있고 그런 만큼 이번 싸움에서 노동조합 진영이 완패한 것은 아니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의 한인기업 경영자들이 일자리창출법이 애초의 기대만큼은 못하다고 여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지만 엔당은 노동조합운동이 상당한 타격을 입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엔당이 설득력있게 강조한 근거는 크게 두 가지로서, 첫째는 이번 입법과정에서 노동조합운동이 크게 세 쪽으로 갈린 것이고 둘째는 지역별 최저임금 결정 절차에서 임금위원회의 무력화이다. 이런 상황의 심각성은 이전 시기 노동조합운동이 보여준 역동성을 떠올려본다면 잘 이해될 수 있다(전제성 2013; 2016). 인도네시아 노동조합운동은 수많은 노조연맹들로 분립되어 있지만 사안별로 광범한 연대를 형성함으로써 방어적 효과성을 발휘해 왔었는데 이번에는 그러하지 못했다. 더구나 엄중한 국면에 노정된 심각한 분열의 경험은 앞으로 노동조합 진영 내부의 깊은 반목을 조성할 수도 있겠다. 최저임금결정에서 임금위원회를 통하여 노조연맹들이 노동자 대표성을 발휘하고 위력을 과시해 왔는데, 임금위원회가 절차에서 배제된다면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조직의 힘과 가치를 증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변화의 결과뿐만 아니라 과정도 문제이다. 이번 입법 과정 전반에서 정부나 국회가 예전과 달리 대다수 노동조합연맹들을 포괄하는 사회적 대화 를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권 수호를 위한 전국적인 대표기관으로서 노동조합연맹들의 위상에 이미 심각한 타격을 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정부가 기존 관행과 달리 전국적 수준이든 지방적 수준이든 노동조합을 폭넓게 포괄하고 배려하지 않는 정책을 계속 펼친다면, 이런 낯선 배제 의 굴레를 앞으로 노동조합 진영이 어떻게 돌파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일자리창출법이 노동권이나 노사관계를 넘어서 엄청 다양한 분야와 관련된 법이기 때문에 앞으로 관련 연구들도 많이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관련된 산업분야만 열거해도 농업, 어업, 임업, 광물, 석탄, 석유 및 천연가스, 전력, 원자력, 건설, 철도, 항공, 영화, 방송, 보건, 병원, 방위산업 등에 걸쳐 있다고 한다(이대호 2020). 이런 산업부문의 사업 허가 및 규제의 완화는 노동권 약화뿐만 아니라 환경 침해 문제와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이슬기 2020). 환경 침해 문제는 침해당하는 환경과 연동되어 살아가는 주민들의 생계와 권리도 타격할 것이다. 그래서 일자리창출법이 대대적인 인권의 위기 를 초래하는 반면에(Usman and Ary 2020), 사업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특권층의 배만 불릴 것이라는 우려가 벌써 제기되고 있다(Aulia 2020). 그런데 이런 후퇴를 대가로 지불하고 법의 명칭대로 일자리 창출 이 괄목할만하게 이루어 질 것인가? 수업 중에 전북대 학생들에게 인도네시아 일자리창출법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우리 학생들의 의견은 팽팽하게 갈렸다. 입법을 지지하는 절반의 학생들은 일자리를 위해서 권리는 유보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투자진흥법 이 적절한 명칭인데 왜 일자리창출법이라 이름 지어 논란을 키웠을까 생각했었는데, 우리 학생들의 지지의견을 들으니 오히려 정부가 이름 덕을 본 것 같다. 그런데 권리보장만 후퇴하고 일자리가 늘지 않는다면, 이 법은 반대 캠페인 용어처럼 민중들에겐 재앙 (celaka)일 것이다. 논쟁적인 옴니버스 법의 제정은 정착된 법률과 관행을 흔들어 투자자들이 싫어하는 불확실성을 유발함으로써 외국인 투자가들을 망설이게 만들 것이므로 투자 여건 개선을 통한 고용창출이라는 입법취지의 실현 가능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무디스의 우려가 이미 보도되었다(The Jakarta Post 2020.10.09). 더 주목할 만한 주장은 최근 수년간 투자와 고용 추이에 대한 분석에 근거한 비관이다. 2013년부터 2019년까지 인도네시아에서 투자 실현은 계속 증대하였다. 이를 근거로 파이살 바스리(Faisal Basri)같은 저명한 경제학자는 옴니버스법을 무리하게 제정할 필요가 없었다고 주장했다(VOI 2020.12.08). 그런데 더 중요한 지적은 같은 시기에 투자만 증대하고 신규채용은 계속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자리 창출을 원한다면 투자 유치가 아니라 어떤 투자인지가 관건이라는 것이다. 돌이켜 살펴보니 최근 투자 증대의 주역은 제조업이 아니라 3차 산업(서비스 부문)이고, 인프라(건설, 통신, 교통, 전력 등)와 농장, 광업, 산림 부문이 가세하는 형국이었는데, 이런 부문들은 대체로 고용의 양과 질에서 취약하다는 것이다(Aulia 2020). 이로부터 두 가지 어두운 가능성이 제시될 수 있다. 일자리창출법이 증대시킬 투자가 고용을 크게 증대시키지 못할 것이고, 기존의 제조업 일자리의 질만 추락시킬 것이라는 우려이다. 과연 그러할지 우리는 앞으로 수년간 더 추적해 봐야 할 것이다. 이런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입법을 추진한 동기는 무엇일까? 대통령의 말처럼 인도네시아 노동인력의 다수는 교육수준이 낮기 때문에 그런 인력을 위한 일자리가 많이 필요하다 는 명목적 취지 외에 또 다른 동기가 있을까? 이번 일자리창출법 제정 과정에서는 인도네시아 입법 과정의 미덕이라 할 수 있는 숙의적 절차로서 사회적 대화 혹은 무샤와라(musyawarah)의 관행이 중시되지 않았다. 법안의 내용이 과정은 물론이고 통과 이후에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큰 혼란을 초래했다. 혼란의 원인은 정부와 의회가 제공했으나 정부는 가짜 뉴스를 유포하는 불순한 배후세력들이 시위대를 조종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대학생들이 거리로 나선 이유도 이해 당사자들이 참여하는 숙의과정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익집단을 포괄적으로 참여시키지 않아 학생들의 거리 정치가 부활하고 그에 대해 배후 세력 운운하는 정부의 태도는 과거 수하르토 독재 시대의 통치와 언술 방식을 떠올리게 한다(Aspinall 2020). 그런데 과거 회귀적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새로운 배경도 있어 보인다. 일자리창출법 제정 과정에서 조코위 대통령은 흙수저 출신 보다는 사업가 출신 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7) 국회의 협조도 두드러졌다. 9개 정당 중에 2개 정당만 법안에 반대했을 뿐이라니(한국일보 2020.10.22), 대통령과 각료뿐만 아니라 국회의원들 역시 사업친화성을 숨기지 않은 것이다. 정당보다 금전과 개인이 더 중요한 영향력을 발하도록 선거제도가 변한 뒤에 인도네시아의 청년정치인들이 금수저 사업가 출신들로 채워졌다는 최근의 분석(서지원 2020)은 사업친화적 일자리창출법의 제정 배경을 인도네시아 선거정치의 변화 측면에서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지난 20여 년간 인도네시아 정치에 역동성을 불어넣었던 정당정치와 시민사회의 상호작용은 이렇게 퇴조하고 있는 것인지, 이런 식의 새로운 정치가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삶을 어떤 방향으로 몰고 갈 것인지 앞으로 더 살펴봐야겠다.* 각주1) 수하르토 집권기 단일노총이었고 민주화 이후 최대노총으로 간주되는 KSPSI는 몇 해 전에 리더십 승계문제로 양분되었으나 조직 명칭을 여전히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위원장이 누구인지로 구분하여 요리스의 KSPSI와 안디 가니의 KSPSI라 부르곤 한다.2) 최저임금을 구성하는 생필품 목록이 법으로 정해져 있고 그 지역별 가격을 반영하여 지역별 최저임금이 결정되어 왔다. 생필품의 지역별 가격은 지역별 임금위원회에서 조사와 협의를 통해 정한다. 임금위원회에서 노동조합 측 대표들은 가격 조사 결과를 무기로 경영자단체 측의 가격 조사 결과와 대결하며 최저임금 교섭을 수행하곤 했다. 그 교섭 결과가 임금위원회 권고였던 것인데, 일자리창출법은 임금위원회의 권고를 받는 절차를 삭제했다. 따라서 노동조합들은 기존의 교섭 전략을 사용할 수 없으며 노동조합의 노동자 대표성도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3) 계약직 사용기간에 대한 현행 법적 제한은 2+1+2 법칙 이라 불린다. 2년 계약하고 1년 연장 가능하다. 그 인력을 다시 사용하려면 30일 간격을 둔 뒤에 2년 더 고용할 수 있다고 한다. 엔당의 최대 계약 3년은 30일 간격 이전의 2+1을 말한 것 같다.4) 노동법 제151조 3항은 노동자와의 협의가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노동분쟁조정기구의 결정을 통해 근로관계를 종결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즉 해고당하는 노동자가 합의하지 않으면 노동분쟁조정 절차를 수개월간 거쳐야 한다. 이에 근거하지 않은 해고는 무효라고 명시한 것이 155조 1항이다. 요컨대 기존 노동법에 따르면 노동자와 합의를 해야 해고 절차가 신속 간편한 것이다.5) 찝따 는 만들다/창출하다는 뜻이고, 꺼르자 는 일/직업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찝따 꺼르자 법안은 단순히 일거리/일자리를 창출하는 법안을 뜻할 것이다. 그런데 운동장/필드/마당이라는 뜻의 라빵안 이 더해진 라빵안 꺼르자 는 일거리가 한데 모인 마당이나 일자리가 생성되는 공간을 뜻하는 것일 테니 찝따 라빵안 꺼르자 는 일자리 관련하여 좀 더 집합적이고 기본적인 여건을 창출한다는 정책적 함의가 담겼던 명칭으로 간주할 수 있겠다.6) 헌법재판소 제소는 11월 3일에 공식 접수되었으며 사이드 이크발(Said Iqbal)이 이끄는 KSPI 노총과 안디 가니가 이끄는 KSPSI 노총이 주도하였다(VOI 2020.12.08).7) 석탄 광업의 치명적 횡포와 정치인 관련성을 다뤄 2019년 선거 과정에서 크게 주목받았던 다큐멘터리 Sexy Killers는 광산업과 깊이 연관된 정치인들을 지목하면서 조코위 대통령도 포함시켰다. 유튜브에 전체 영상이 무료 공개되어 있는데(Watchdoc Image 2019), 석탄광업과 정치인 연계망은 영상의 마지막 부분에서 펼쳐진다.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워치독은 올 해의 광주인권상 특별상 수상단체로 선정되었다.* 참고문헌서지원. 2020. 금수저와 창업자: 금권 시대 인도네시아의 청년정치.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웹진 『다양성+아시아』 http://snuac.snu.ac.kr/seacenter/?p=10854 연합뉴스. 2020.11.03. 조코위 인니 대통령 '일자리 창출법' 서명 노동계 반발. https://www.yna.co.kr/view/AKR20201103061300104 (검색일: 2021.01.05.)이대호. 2020. 인도네시아 일자리창출 특별법(옴니버스법) 전체 개관 설명. KOTRA해외시장뉴스. https://news.kotra.or.kr/user/globalBbs/kotranews/8/globalBbsDataView.do?setIdx=246 dataIdx=186231 (검색일: 2021.01.11.)이슬기. 2020. 인도네시아 2020 옴니버스 법안과 시민사회의 인권 민주주의 환경정의 투쟁. FreedomDignityAsia 38 (September 22).전제성. 2013. 민주화의 위력 보여준 인도네시아 노동조합운동.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11452?no=111452#0DKU (검색일: 2021.01.10.)전제성. 2016. 인도네시아의 역동적인 노사관계. 『세계시민』 7 (겨울).주인도네시아대한민국대사관. 2020. 노동법 주요 개정 사항. http://overseas.mofa.go.kr/id-ko/brd/m_2877/view.do?seq=1327111 srchFr= amp;srchTo= amp;srchWord= amp;srchTp= amp;multi_itm_seq=0 amp;itm_seq_1=0 amp;itm_seq_2=0 amp;company_cd= amp;company_nm= page=1 (검색일: 2021.01.11.)한국일보. 2020.10.22. 경제조정장관 단독 인터뷰 투자 빅뱅 열린다 .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0102011290003283 (검색일: 2020.10.22.)Aspinall, Edward. 2020. Indonesian Protests Point to Old Patterns. New Mandala. 12 October. https://www.newmandala.org/indonesian-protests-point-to-old-patterns/ (검색일: 2020.10.14.)Aulia Nastiti. 2020. Mengapa UU Cipta Kerja tidak menciptakan lapangan kerja tapi memperkuat oligarki. The Conversation. October 9. https://theconversation.com/mengapa-uu-cipta-kerja-tidak-menciptakan-lapangan-kerja-tapi-memperkuat-oligarki-147448 (검색일: 2021.01.09.)BBC. 2020.10.09. Omnibus Law: Alasan buruh berdemo di tengah ancaman virus corona - Covid-19 berdampak satu generasi, Omnibus Law hingga tujuh turunan . https://www.bbc.com/indonesia/indonesia-54382465 (검색일: 2020.10.11.)Endang Rokhani. 2007. Konflik Antar Serikat Buruh Jurnal Kajian Perburuhan Sedane 4(1).Endang Rokhani. 1999. Pengetahuan Dasar Hak-Hak Buruh. Jakarta: Yayasan Komunikasi Masyarakat. Endang Rokhani. 2006. Union Conflict: Greater freedom to organise also means more opportunity for division. Inside Indonesia 86 (April-June).Monitor. 2020.10.06. Akademisi Tolak Omnibus Law UU Cipta Kerja. https://monitor.co.id/2020/10/06/akademisi-tolak-uu-cipta-kerja/ (검색일: 2021.01.03.)SSEK. 2020.12.04. Legal Updates: Omnibus Job Creation Law - Changes to Indonesian Employment Laws. https://www.ssek.com/blog/omnibus-job-creation-law-changes-to-indonesian-employment-laws (검색일: 2020.12.30.)Tagar.id. 2020.10.11. Tanpa Pelajar dan Mahasiswa, Mogok Buruh Tak Ada Apa-apanya. https://www.tagar.id/tanpa-pelajar-dan-mahasiswa-mogok-buruh-tak-ada-apaapanya (검색일: 2021.01.04.) Tempo.co. 2020.10.24. Ini Sebab Faisal Basri Sebut Omnibus Law Tak Atasi Akar Masalah Utama Investasi. https://bisnis.tempo.co/read/1398998/ini-sebab-faisal-basri-sebut-omnibus-law-tak-atasi-akar-masalah-utama-investasi?page_num=2 (검색일: 2021.01.12.)The Jakarta Post. 2020.10.09. Environmental concerns, protests may discourage foreign investment: Moody s. https://www.thejakartapost.com/news/2020/10/09/environmental-concerns-protests-may-discourage-foreign-investment-moodys.html. (검색일: 2020.10.10)The New York Times. 2020.10.8. Protests Spread Across Indonesia Over Jobs Law. https://www.nytimes.com/2020/10/08/world/asia/indonesia-protests-jobs.html (검색일: 2020.10.11.) The New York Times. 2020.11.03. Indonesian President Quietly Signs Divisive Bill into Law Overnight. https://www.nytimes.com/2020/11/03/world/asia/indonesia-stimulus-bill-signed.html (검색일: 2020.11.04.)Usman Hamid and Ary Hermawan. 2020. Indonesia s Omnibus Law is a Bust for Human Rights. New Mandala. 9 October. https://www.newmandala.org/indonesias-omnibus-law-is-a-bust-for-human-rights/ (검색일: 2020.10.14.)VOI. 2020.12.08. Faisal Basri Hopes The Constitutional Court Abolishes The Omnibus Law On Job Creation: This Is A Defective And Rotten Product. https://voi.id/fr/bernas/22393/faisal-basri-hopes-the-constitutional-court-abolishes-the-omnibus-law-on-job-creation-this-is-a-defective-and-rotten-product (검색일: 2021.01.12.)Watchdoc Image. 2019. Sexy Killers, A Documentary. https://www.youtube.com/watch?v=qlB7vg4I-To (검색일: 2021.01.12.) [10] 태국과 홍콩의 사회운동에서 청년세대의 연대 배경과 분기점 ㅣ 김주영 작성자 동남아연구소 조회수 1327 첨부파일 1 등록일 2021.01.14 초록2020년 태국과 2019년 홍콩에서는 사회운동의 열기가 거셌다. 태국에서는 군부의 영향력이 강한 현 정부뿐만 아니라 그동안 금기의 영역이었던 군주제를 비판하며 국민의 것으로서 태국을 외치는 새로운 세대가 등장했다. 홍콩에서는 범죄인 중국 송환 반대를 계기로 이전부터 중요한 의제였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다시 한 번 크게 일었다. 이 두 지역에서 운동의 주요 주체로 부각된 청년세대는 이전과는 다른 전략을 활용해 시위에 참여하며 이목을 끌었다. 흥미롭게도, 두 지역의 청년세대는 각자의 문제에 집중하면서도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며 연대를 표명하고 있는 상황이다.이 글은 비슷한 시기에 기성의 권력에 문제를 제기하며 태국과 홍콩에서 각자 결집했던 이들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해 연결되기 시작한 공통의 배경에 주목한다. 동시에, 이러한 배경 속에서 유사하게 나타나는 다중의 목소리와 지향이 두 지역의 독특한 맥락으로 인해 분기하는 차이의 영역도 조명해본다. 이와 같은 목적을 중심으로 이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첫째, 두 지역의 청년세대가 처음 결합하게 된 주요한 배경인 중국식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적 지향을 살펴본다. 둘째,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한 불합리한 법이 무분별하게 작동해 반대 목소리를 내는 활동가들을 탄압하는 상황을 드러낸다. 셋째, 국가와 왕실에 대한 사랑을 강요하며 비민주적인 체제를 감내하라는 요구와 반발의 양상을 분석한다. 마지막으로, 청년세대라는 공통점 이외에 LGBTQ, 여성, 소수민족, 이주민이 부각되는 특정한 흐름을 통해 사람을 중심에 두는 청년세대 연대의 향방을 논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이슈페이퍼 10호 원문 내려받기2020년의 태국과 2019년의 홍콩 2020년 태국은 새로운 정치적 열망을 가진 청년세대의 등장으로 뜨겁다. 이들은 그동안 태국에서 금기시되어온 군주제를 비판하며 태국은 왕이 아니라 국민의 것이라고 외치고 있다. 작년 2월 정치개혁을 추구하는 청년세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제3당으로 부상했던 신생 정당 아나콧마이당(Future Forward Party)의 강제 해산 반대로 시작된 시위는 코로나19로 인해 한동안 주춤했다 7월부터 재개되었다. 2014년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뒤 2019년 3월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정권을 장악한 군부세력의 민주화 활동가 탄압과 부적절한 왕의 행실은 청년세대의 시위에 불을 지폈다. 이러한 배경에서 쿠데타를 주도했던 쁘라윳 짠오차(Prayut Chan-o-cha) 총리의 사퇴, 군부 제정 헌법의 개정, 군주제 개혁의 세 가지가 시위대의 주요 요구사항으로 제시되었다. 시위대는 영화 헝거게임 에서 차용한 검지, 중지, 약지의 세 손가락을 치켜드는 수신호를 저항의 상징으로 활용하며 세 가지 요구를 태국을 넘어 세계로 알리고 있다. 2019년 홍콩은 송환법 개정안에 반대하는 운동으로 전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행정장관 직선제를 요구했던 2014년 우산운동 이후 장기간 침체기에 있었던 홍콩의 대규모 군중집회가 범죄자의 중국 송환 가능성 앞에서 100만, 200만 명의 거리 운집으로 폭발적인 시작을 알렸다. 홍콩에서도 청년세대는 단연 시위의 중심에 있었다. 여러 요인이 있지만, 이들은 개정안이 민주주의 활동가들의 무분별한 중국 송환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두려움과 1997년 반환당시 중국이 50년 동안 약속했던 일국양제(一國兩制)가 점점 무의미해지고 있다는 위기감을 중심으로 집단행동에 나섰다. 송환법 개정안 철회, 시위대를 폭도로 명명하는 것의 중단, 경찰의 강경진압 조사, 체포된 시위대의 석방, 행정장관과 입법의원의 전면적인 직선제 실시가 시위대의 다섯 가지 요구사항이었다. 다섯 손가락을 쫙 핀 팔을 들어 올려 요구사항을 외치던 시위대는 2021년 지금까지도 2019년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홍콩에서 저항을 이어가고 있다. 태국과 홍콩, 비행기로 3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두 지역은 2019년과 2020년 사이에 유사한 진통을 강렬하게 경험했다. 이 과정에서 두 지역의 청년세대는 지역의 문제를 국제적 차원의 연대를 통해 확산하고 서로 지지함으로써 운동의 동력을 얻어가고 있다. 이 연결은 트위터와 페이스북과 같은 SNS를 통해 촉발되었고, 이후 오프라인으로도 영향을 미쳤다. 홍콩 청년세대가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는 태국 시위를 응원하고, 이전만큼의 열기는 아니지만 특정 이슈를 가지고 이어지고 있는 홍콩 시위를 태국 청년세대가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각자 다른 역사적 맥락을 가진 두 지역의 청년세대가 필연적으로 조우하는 지점을 찾아내 연대의 공통적인 배경을 분석해본다. 동시에, 다중의 목소리와 지향이 두 지역의 독특한 배경 속에서 분기하는 차이의 영역도 조명한다. 입헌군주제 태국과 중국의 특별행정구역인 홍콩 사이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유일하게 식민지배를 받지 않은 국가라는 자부심이 있는 태국과 150년 이상 영국의 통치하에 있었던 홍콩, 군부-국왕-불교의 삼각 구도로 내적인 권력을 공고히 해온 태국과 영국-중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이익을 챙겨온 사업가들의 도시 홍콩 사이에는 분명한 간극이 있다. 따라서 특정 사안에 대한 공통적인 비판의식과 지역 특유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청년세대가 연결되고 갈라지는 지점을 동시에 주목하려고 한다.밀크티동맹(#MilkTeaAlliance): 우리는 중국과 그 권위주의의 희생자들이다. 연대의 시작은 중화권에서 흥행한 드라마 2gether: The Series 로 인기를 얻은 태국 배우 브라이트(Vachirawit Chivaaree)의 트위터였다. 작년 4월 브라이트는 한 사진작가가 홍콩이 포함된 도시 네 곳의 사진과 함께 이 네 장의 사진은 다른 네 국가의 모습이다 라는 글이 게시된 트윗에 좋아요 를 눌렀다(Dan McDevitt 2020). 홍콩을 국가 로 명명한 트윗에 좋아요 를 남긴 브라이트의 행동은 수많은 중국 팬들의 분노를 유발했다. 하나의 중국을 표방하는 민족주의적인 중국 팬들을 향해 브라이트가 홍콩독립을 지지하는 듯한 신호를 보낸 것이다. 화가 난 중국 팬들은 브라이트의 여자친구 SNS까지 찾아가 코로나19가 중국 실험실에서 시작되었다고 추측한 글과 중국과 다른 대만을 지지한다는 글을 발견해 공격의 빌미로 삼았다. 여기에 브라이트의 팬들까지 대응하면서 트위터에서 격렬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홍콩으로 인해 촉발된 사건이어서 홍콩의 트위터 유저들도 빠르게 논쟁에 동참했다. 홍콩에서 독립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극소수이지만, 중국을 향한 고도자치 요구와 맞물리면서 이 사건 자체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1) 트위터의 좋아요 가 촉발한 태국, 중국, 그리고 홍콩 사이의 인터넷 전쟁은 각 지역의 정치적 상황과 긴밀하게 얽혀 있었다. 태국의 트위터 유저들은 태국을 가난하다고 비난하는 중국의 트위터 유저들에게 my country is poor but your country is pooh (Gabriela Bernal 2020)라고 비아냥거리며 응대하기도 했다. 시진핑 주석과 비슷해 종종 그를 풍자하는데 활용되어온 만화 캐릭터 곰돌이 푸는 중국에서 검열 대상이다. 홍콩에서도 여전히 오바마 대통령과 함께 걷고 있는 시진핑 주석의 모습을 곰돌이 푸와 비교한 사진이 공유되고 있다. 홍콩에서는 조슈아 웡(Joshua Wong Chi-fung)과 네이선 로(Nathan Law Kwun-chung)같은 활동가들이 태국을 지지하는 트윗을 올리며 논쟁에 참여했다. 2012년 중국의 애국 강요 국민교육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을 성공적으로 조직한 조슈아 웡은 우산운동에서도 기존의 활동가들과는 다른 존재감을 과시했다. 네이선 로 역시 우산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리더 중 한 명으로 꼽히며 2016년 입법의원 선거에서 최연소로 당선된 바 있다. 2012년 당시 조슈아 웡은 16살이었고, 네이선 로는 23살에 처음 입법회에 발을 디뎠다. 조슈아 웡은 자유를 사랑하는 우리 태국 친구들이 중국의 괴롭힘에 맞서 싸우고 있다 는 글을, 네이선 로는 공산당 지지자들이 브라이트를 공격하려고 온라인 전쟁을 치르고 있는 모습을 보면 참 우스꽝스럽다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브라이트의 팬들이 매우 젊고 진보적이라는 것, 그리고 공산당 지지자들은 언제나 잘못된 공격을 한다는 것이다 (Poowin Bunyavejchewin 2020)라는 글을 올려 논쟁의 불을 지폈다. 중국에게 홍콩과 비슷한 정서를 가지고 있는 대만의 유저들도 참전하면서 태국, 홍콩, 대만을 중심으로 한 밀크티동맹이 본격적으로 결성되었다. 지역마다 스타일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즐겨 마시는 밀크티를 상징으로 내세워 세 지역의 연대를 표명한 것이다. 밀크티동맹은 #MilkTeaAlliance 를 트윗할 때마다 사용함으로써 노출의 빈도를 높여나갔다. #MilkTeaIsThickerThanBlood 도 백만 회 트윗 되어 그 열기를 짐작할 수 있다(Nathan Wilson 2020). 태국에서 펭귄 으로 불리는 시위대의 리더 중 한 명인 패릿 치와락(Parti Chiwarak)은 동맹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중국과 그 권위주의의 희생자들이다. 우리의 우호감은 자연스럽다 고 말했다(Timothy Mclauglin 2020). 중국은 현 정권의 기반인 2014년 군부 쿠데타를 사실상 인정하며 태국의 최대 무역상대국으로서 경제적 공생관계를 구축했고, 일대일로(一帶一路)에 협력적인 태국과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정립해왔다(김홍구 이미지 2017: 58-59). 때문에 방콕의 중국대사관은 위 사건에 대한 페이스북의 공식 성명서에서 중국과 태국은 형제다 (Poowin Bunyavejchewin 2020)라고 강조하며 밀크티동맹으로 의도치 않게 확대된 갈등을 봉합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형제라는 가족 수사는 중국과 태국 정부 사이에서만 유의미하게 작동할 뿐, 청년세대 중심의 트위터 유저들에게는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들은 메콩강 상류의 댐 건설로 태국을 포함해 여러 동남아시아 국가에 환경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국에 반발하며, 밀크티동맹과 함께 #StopMekongDam을 올리기도 했다(Akshay Narang 2020). 2019년 홍콩시위는 여러 이름으로 불리지만 반송중(反送中) 운동 으로 종종 명명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중국 으로의 송환이 핵심에 있었다. 범죄인 송환법 개정안은 2018년 대만에서 여자친구를 살해한 뒤 홍콩으로 돌아온 남성을 대만으로 송환해 처벌받게 하기 위해서 처음 논의되었다. 살인죄로 남성을 송환해 기소하려는 대만의 협조요청은 두 지역이 체결한 범죄인 인도협정이 없어 법적으로 불가능했고, 홍콩도 대만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이 아니라 홍콩에 돌아와 피해자의 통장에서 현금을 훔친 죄목으로만 처벌할 수 있었다(ejunsight 2019/12/04). 결국 홍콩정부는 공식 성명서를 통해 홍콩법원은 이 사건에 대해 관할권이 없다 (Cindy Sui 2019)고 밝혔다. 이러한 배경에서 범죄인 송환법 개정안은 대만, 마카오, 중국을 포함해 홍콩과 협정이 체결되지 않은 지역으로 범죄인 송환을 가능하도록 했지만, 시위대의 초점은 민주주의 활동가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을 중국 송환에의 두려움에 맞춰져 있었다. 태국과 홍콩을 이어주는 밀크티동맹은 중국과의 유사한 관계 설정에서 촉발되었다. 연대의 시작은 태국 배우의 SNS였지만, 이미 2월부터 시작된 태국 내의 반정부 움직임과 2019년 이래로 지속적인 긴장 상태에 있던 홍콩의 상황이 결합되어 중국이라는 공통지점에서 물꼬를 텄다. 태국 청년세대는 이미 엄격한 언론검열 속에서 정치적 견해를 공유하는 새로운 장으로 트위터를 자유롭게 활용해오면서 군주제를 비판하는 등 금기에 도전하고 있었다(Supalak Ganjanakhundee 2020). 이들이 2014년 우산운동 이후 지금까지 소셜미디어를 시위 도구로 적극적으로 사용해온 홍콩 청년세대와 온라인에서 결합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2019년 홍콩시위의 전략들, 예를 들어 특정한 지도자 없는 형태, 한 장소를 점유하는 것이 아니라 물이 되는(Be Water) 게실라식 이합집산, 경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헬멧과 고글 착용, 방패로서 우산의 활용, 텔레그램을 통한 집단 의사결정 등이 2020년 태국 시위에서 재현된 것도 온라인 소통의 결과물이다(Kent Ewing 2020; Shibani Mahtani and Paritta Wangkiat 2020). 현재 #MilkTeaAlliance는 해상을 통해 대만으로 밀입국을 시도하다 중국 경찰에 의해 구금된 홍콩 활동가 12명을 구하자는 #save12hkyouths, 2019년 시위 주동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수감된 조슈아 웡 등의 활동가 세 명을 응원하는 #SaveJoshuaWong과 #SaveHKThreeActivist, 태국의 시위를 지지하자는 #StandwithThailand와 #whatishappeninginthailand 등과 함께 공유되고 있다(트위터: 2020.11.23. 검색). 밀크티동맹을 지지하는 Anti One China TH 라는 태국의 활동가 조직은 작년 11월 24일 방콕에 위치한 중국대사관 앞에서 수감된 홍콩 활동가들의 석방을 주장하며 집회를 열었다(페이스북 페이지 Thailand and Hong Kong Together 2020.11.24. 게시글). 집회에서 시위대는 곰돌이 푸 캐릭터에 시진핑의 얼굴을 붙여 넣은 사진, 대만 국기와 수감 위기에 처한 활동가 세 명의 사진을 들고 One China, One Taiwan, One Hong Kong 이라는 글귀가 적힌 종이를 흔들었다. 이 조직의 활동을 시작한 쭐라롱꼰대학 정치학과 학생은 나는 공산당에 반대한다. 그들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홍콩, 대만, 티베트, 위구르의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다. 나는 태국도 중국의 통제에 놓이게 될까봐 걱정스럽다. 우리의 정부 역시 권위주의적이다. 정부는 중국 모델을 똑같이 따르고 있다 고 밝혔다(Khaosod English 2020/10/02). 이들에게 군부 기반의 태국식 권위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닌 체제를 가진 중국 공산당의 통제와 동일하게 간주된다. 두 지역의 청년세대가 독재체제를 공고히 하고 있는 중국을 자신들이 추구하는 민주주의와는 구별되는 참조점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일치하지만, 그 세부적인 결은 다소 차이가 있어 보인다. 태국에서는 민주주의가 아닌 체제나 거대자본을 기반으로 한 일방적 개발의 부정적인 측면을 환기하는 과정에서 중국이 주로 드러나고, 홍콩에서는 이것을 넘어서는 차원에서 중국이 존재한다. 영국의 오랜 식민지배 이후 중국으로 반환된 홍콩에서는 홍콩이 점차 고유한 특색을 잃고 중국화되어 갈 것이라는 전망이 부정적으로 공유되어 왔다. 여기에서 중국화는 중국의 비민주적인 정치체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홍콩은 중국에게 경제적으로 특별한 존재였다.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중국이 경제적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오랫동안 유지해온 홍콩이 필요했고, 홍콩과 인접한 남부지역을 경제특구로 지정해 개발을 가속화함으로써 성장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국의 경제발전이 홍콩을 넘어서면서 홍콩은 모호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2003년 사스(SARS)로 침체된 중국의 경기부양책 시행 이후 홍콩은 더욱 혼란스러운 형국에 접어들었다. 중국은 자국 관광객을 대거 홍콩으로 유입시키며 경기부양을 시도했고,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이후 중국과 접경을 마주한 지역의 상권이 거주민이 아니라 관광객중심으로 재편되면서 불만이 발생했고, 관광객들로부터 이 지역을 되찾자는 운동이 간헐적으로 이루어졌다. 중국 이주민들이 더 나은 복지나 교육을 찾아 홍콩에 몰려온 메뚜기떼 로 묘사되기도 했다(베리 사우트먼 옌하이룽 2016). 2019년 시위에서도 중국 관광객들이 주로 찾는 지역에서 홍콩을 되찾아야 한다는 구호가 청년세대를 중심으로 공유되었다. 뿐만 아니라, 영국의 식민지였던 홍콩은 여러 측면에서 중국보다는 선진적인 홍콩을 상상해왔고, 이는 서구를 보다 우월하게 바라보는 관점과 맞물려 왔다(Yidong Wang 2019). 하지만 중국보다 여러모로 발전했다고 여겨진 홍콩은 이제 희미해지고 있다. 이러한 특수한 배경에서 홍콩과 중국의 관계는 다소 복잡하게 나타나며, 밀크티동맹에 참여하는 홍콩 청년세대의 중국에 대한 태도도 독재 권력 비판이라는 관점으로만 해석하기엔 충분하지 않다. 태국과 홍콩 청년세대의 중국에 대한 저항은 독재정권 타도에서 모아지지만, 홍콩의 지역적 배경으로 인해 갈라지는 지점이 존재한다. 다수의 중국계가 거주하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태국에서도 청년세대 민족주의의 특수성이 중국에 대한 입장을 어떻게 주조하고 있는지 현재로선 가늠하기 어렵다. 공식적으로 거론되지는 않지만 중국의 어떤 민족 집단 출신인지에 따라서 정치적 성향을 가르기도 하는 사례를 보면(베네딕트 앤더슨 2015), 태국에서도 중국을 응시할 때 정치경제적 측면 이외의 변수는 중요해 보인다. 밀크티동맹은 서로 다른 두 지역 청년세대의 연대가 가시화된 계기로서 의미가 있다. 그렇지만 다소 느슨한 온라인 기반의 연대체로 누구나 #MilkTeaAlliance를 사용하면 되는 형태여서, 이 통로로만 두 지역 청년세대의 목소리를 드러낼 수 없다. 따라서 밀크티동맹의 활동 양상에 국한하지 않고 시위대가 처한 유사한 배경과 그 세부적인 맥락의 차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불합리한 법의 지배 태국 군부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헌법을 개정해 군부 기반의 통치 체계를 구축하고 이를 비판하는 세력을 탄압해왔다. 시위대가 개정을 요구하는 문제적인 헌법은 2016년 국민투표로 가결되었지만, 상원의원의 군부 임명과 비선출직 의원 중에서도 선발 가능한 총리와 같이 군부 권력을 강화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비판받아왔다(김홍구 이미지 2016: 247-248). 특히 상원의원 250명이 실질적으로 군부에 의해 임명된다는 내용은 사실상 의회 안에 군인정당이 선거 없이 들어앉는 것과 마찬가지 로 간주될 정도로 비민주적이다(이유경 2016c). 더구나 미뤄지고 미뤄지다 진행된 2019년 3월 총선으로도 군부의 독주를 막을 수 없었다. 군부의 지지를 받는 팔랑쁘라차랏당(Palang Pracharath Party)이 제2당에 머물렀지만 군소정당과 함께 연립정부를 수립한 것이다. 개정헌법과 그 이후의 군부 정치가 국민의 선택에 의한 민간정당 중심의 의회 구성을 어렵게 함에 따라 진정한 정당정치를 염원하는 태국 국민들, 특히 억압적인 환경 속에서 새로운 정치적 기대로 투표에 참여한 청년세대가 직접 목소리를 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로 보인다. 작년 2월 청년세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아나콧마이당의 강제 해산도 군부에 반대하는 정당의 최후를 대외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2018년 창당된 아나콧마이당은 타나톤(Thanathorn)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군부를 강하게 비판하며 국방비 삭감, 시민이 주체가 되는 헌법 초안 작성, 의료 및 사회보장 확대 등과 같은 정책을 내세워 군부독재에 지친 청년세대의 마음을 얻었다(김홍구 2019: 10-11). 하지만 정치자금 모금의 불법성을 이유로 정당이 강제 해산되면서 정치인으로서 타나톤의 활동이 불투명해졌고 잠시나마 변화를 꿈꾸었던 청년세대의 기대도 좌절되었다. 아나콧마이당의 강제 해산 이후 발생한 대학생 중심의 게릴라 시위는 비민주적으로 개정된 헌법과 민간이양의 탈을 쓰고 의회를 차지한 군부정권에 대한 문제의식이 점차적으로 고조된 결과였다(Termask Chalermpalanupap 2020: 5). 타나톤은 아나콧마이당 해산 이후 시위가 시작되면서 그 배후에 있다는 의심을 종종 받아왔지만, 그들 뒤에 우리가 있지 않다. 그들의 의지로 거리에 나온 것이다 라고 선을 그으며 시위를 태국 정치 전반에 대한 문제의식이 축적된 결과로 해석하고자 했다.2) 쿠데타 이후 군부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여러 법적인 조항을 근거로 처벌이나 위협을 받으면서 자유로운 견해 표명마저 어려워진 태국에서 버텨왔다. 국왕에 의해 정당성을 승인 받으려한 군부는 최대 15년형까지 선고받을 수 있는 형법 제112조 왕실모독법 적용을 강화하였고, 형법 제116조 선동죄와 컴퓨터 범죄법을 활용해 반대자들을 탄압했다(이유경 2016a, 2016b). 반대자들이라고는 하지만 국왕의 반려견을 조롱한 사례도 포함되어 있어 공권력이 실제로 합법적으로 적용된 것인지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더구나, 캄보디아에 망명한 활동가가 실종된 사건의 배후에 군부가 있다는 의심이 싹트면서 군부의 영향력이 합법과 비합법의 경계에서 반대자 응징을 위해 무차별적으로 작동되고 있다는 비판이 만연하다. 지도자 없는 시위로 불리지만 종종 선두에 서서 이름이 알려진 대학생들이 체포되는 사례도 지속적으로 보도되고 있다. 2020년 10월 기준으로 휴먼라이트와치는 시위가 진행되면서 최소 85명의 시위대가 불법집회 혐의로 기소될 위험에 처했으며, 이 중에서 최대 7년형을 선고받을 수 있는 폭동 혐의를 받는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다고 밝혔다(Human Rights Watch 2020). 2019년에는 라오스에서 실종되거나 살해당한 활동가가 5명, 베트남과 말레이시아에서 강제 송환된 뒤 행방이 묘연해진 활동가가 3~4명에 이른다(Sunai Phasuk 2019). 그럼에도 태국을 떠나는 활동가들은 여전히 많다. 한 기사에 따르면 2014년 쿠데타 이후 망명한 태국인만 최소 102명에 이른다고 한다(Patpicha Tanakasempipat and Kay Johnson 2020). 불합리한 법, 연이은 체포, 그리고 망명은 홍콩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2019년 시위의 신호탄이 된 송환법 개정안뿐만 아니라 작년 6월 30일 중국에 의해 통과되어 현재 적용 중인 국가보안법, 행정장관과 입법의원 직선제를 어렵게 하는 소헌법인 기본법은 홍콩 활동가들에게는 가장 큰 장벽이다. 이 중 국가보안법은 홍콩의 종말 (Grace Tsoi and Lam Cho Wai 2020)로 불릴 정도로 홍콩의 자치를 위협하는 법으로 여겨진다. 국가보안법은 홍콩의 고도자치, 일국양제, 법적 권리 보호 원칙을 전제로 함을 서두에 밝히는 동시에 분리독립, 전복, 테러활동, 외국 혹은 국가안보에 위협이 되는 외부요소와의 공모를 위법행위로 규정하며 최대 종신형까지의 처벌을 명시하고 있다.3) 사실상 2019년과 같은 시위가 되풀이될 경우 강하게 처벌하겠다는 중국의 의지 표명이나 마찬가지다. 분리독립과 전복은 홍콩독립을 외치며 체제를 위협하는 일부 시위대에 대한 경고이고, 테러활동은 시위대가 MTR 역과 친중국 기업 건물을 훼손하는 일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의지이다. 외국과의 공모는 중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미국에 지지를 호소해 홍콩인권법까지 통과시킨 행위의 부적절함을 지적하는 것으로 보인다. 국가보안법 하에서는 2019년 시위의 다양한 활동을 위법으로 해석할 여지가 충분히 있다. 개인에 대한 폭력과 공공보건이나 안전을 위협할 수도 있는 행위와 같은 모호한 표현은 이 법이 해석의 여지가 많고 특정 의도에 따라서 적용될 가능성이 높음을 보여준다. 언론, 출판, 결사, 조직, 시위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하면서도 안보를 위해 학교, 사회조직, 미디어, 인터넷에 대한 철저한 관리감독이 수반되어야 함을 명시하는 모순이 그 억압적 성격을 반증한다. 국가보안법을 관장하는 국가보안보호위원회의 장은 행정장관이지만, 고문을 중국에서 임명하고 정기회의에 배석하도록 해 홍콩을 관리감독하겠다는 중국의 의도가 다분하다. 위원회의 일은 그 어떤 조직에 의해서도 간섭되지 않으며 공개되거나 사법적인 이유로 수정될 필요도 없다. 국가보안법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자는 입법위원 선거출마가 불가한 등 공식적으로 정치행위를 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기도 하다. 이는 홍콩 시민사회에 대한 전방위적 탄압이다. 6월 30일 발표하고 7월 1일부터 바로 시행된 국가보안법은 홍콩독립 이라는 배너를 바닥에 두고, 시위의 구호인 광복홍콩, 시대혁명(光復香港, 時代革命) 이라고 적힌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있던 남성을 체포하는 것으로 그 시작을 알렸다(Vivian Wang and Alexandra Stevenson 2020). 시위대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흰 종이를 들고 다니거나, 빈 포스트잇을 벽에 붙이거나, 시위의 구호를 암호로 표시해 공유하는 등 창의적인 방법으로 국가보안법을 비판했다.4) 그렇지만 국가보안법이 시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홍콩 활동가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해외 언론에 칼럼을 쓰는 한 홍콩인은 검열보다 종말 인 국가보안법 하에서 아무것도 쓸 수 없게 된 상황을 자조하고, 1989년 천안문사건을 기억하는 박물관 설립자는 우리는 그들이(중국이) 우리 기관을 어떻게 분류할지 모른다 며 자료의 디지털 아카이빙과 유물의 해외 이관 계획을 세웠다(Laignee Barron 2020). 2020년 10월 기준으로 국가보안법 하에서 25명의 민주화 활동가들이 체포되었고 이 중 1명이 기소 당했으며, 홍콩 일간지 애플데일리 창립자인 지미 라이(Jimmy Lai)가 기소되는 등 언론사가 직접적으로 공격을 받았다(Helen Davidson 2020). 작년 11월에 열린 홍콩중문대학교 졸업식에서 2019년 시위의 구호를 들고 평화롭게 행진했던 학생 6명과 구의원 2명이 체포되었고, 시위대 사이에서 미국으로의 망명을 위한 정보가 활발히 공유되고 있다(Emily Feng 2020; Selina Cheng 2020). 대만으로 망명하려다 해상에서 잡힌 12명의 젊은 활동가들이 현재 중국에 억류되어 있기도 하다. 국가보안법 시행 직전에 망명을 공표하고 영국에 머무르는 네이선 로는 모르거나 충분한 신뢰가 없는 사람은 만나지 않는다.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Jeffie Lam and Chris Lau 2020)고 밝혀 망명 이후에도 안전이 담보되지 않는 현실을 보여준다. 태국과 홍콩에서 표현의 자유는 노골적으로 억압되고 있다. 태국에서는 국왕에 대한 비판과 반정부적 메시지를 위법으로 규정하고, 홍콩에서는 중국에 반대하는 어떤 행위든지 국가보안을 이유로 처벌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상황은 근래에 들어서 대규모 시위를 통해 강렬한 방식으로 문제시되고 있을 뿐, 이미 태국과 홍콩 내부에서 조금씩 징조가 나타나고 있었다. 2013년 한 기사는 2011년 태국 방문시 왕실모독죄로 체포된 미국인, 왕실을 비판하는 문자를 보내 20년형을 선고받고 옥사한 태국인, 추밀원과 왕정을 재고해야 한다고 강연한 탐마삿 대학 교수가 당한 수난 등을 소개하며, 왕정 자체에 대해 논의를 하고 싶어 하는 대학생은 분명히 늘어나고 있다 는 현지의 목소리를 보도했다(김회권 2013). 홍콩에서도 2003년 국가보안을 위해 법률을 제정할 수 있도록 한 기본법 23조를 근거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50만 명의 사람들이 반환기념일 집회에 참여해 반대하면서 무산되었지만, 2020년 중국은 홍콩 입법회를 무시하고 직접 쓴 국가보안법을 밀어붙였다. 중국은 지속적으로 홍콩을 중국이라는 국가의 경계에 두길 원했고, 중국 중심의 국가관이 희미한 홍콩이 그 경계에서 벗어나려는 잠재적 위험을 관리하고 싶어 했다. 삼엄한 법과 악화되는 상황에서도 떠나기보다는 여전히 남아서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청년세대도 많다. 태국에서 왕실개혁안 10조를 대중 앞에서 낭독한 활동가 렁(Panusaya Sithijirawattanakul)은 목소리를 내려고 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변화하지 않을 테니까요. 우리의 제안은 혁명이 아니라 개혁이에요 라고 말하며 왕실모독죄로 15년형까지도 선고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체포 이전과 이후에 무엇을 할 건지 계획을 세워야 해요. 이 운동이 멈추지 않고 계속될 수 있도록이요 라며 의지를 드러냈다(ABC NEWS 2020/09/23). 렁은 실제로 체포된 후에 낯선 감옥 환경에서 두려움을 느꼈지만 내 길을 선택했고, 이 길은 희생이 필요 하다며 털어내고 보석 이후에도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Mazoe Ford, Supattra Vimonsuknopparat, and Nat Sumon 2020). 홍콩에서도 대다수의 청년세대는 남아있기를 선택했다. 16살 때부터 민주화 활동에 참여해온 이삭(Isaac Cheng Ka-long)은 결과에 상관없이 홍콩에 남아있을 거예요. 전 홍콩을 사랑하니까요 라며 국가보안법 이후 제기된 자신의 망명 소문을 일축했다(Chris Lau and Jeffie Lam 2020). 몇 년 형을 살게 되더라도 홍콩에서 저항을 이어가겠다는 것이다. 이런 장외투쟁은 제도개혁을 압박하는 차원에서도 지속되고 있지만 아직 성과는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 태국에서는 그간의 경험을 통해 헌법 개정으로 문제 해결 가능성을 점치기도 했다. 태국시민들은 민주적 헌법을 경험해본 적이 있다. 평균 4년에 한 번씩 헌법을 제정해온 태국에서 1997년 국민의 헌법 은 최초로 국민직선 상원제와 불안정한 연립정권 수립을 불가능하게 하는 제도를 마련하는 등 역사상 가장 민주적인 헌법으로 꼽힌다(윤진표 2017: 21-22). 군부 제정 헌법이 민주적 헌법을 역행해 비민주적 체제로의 전환을 모색하고 있지만, 이미 헌법을 시민들의 손으로 바꾸어본 경험이 있는 태국에서는 낮은 기대라도 가졌었다. 시위대가 제안한 개정안이 무산된 뒤에는 의원들이 한 투표일뿐이에요. 우리들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완성된 헌법 초안을 발의할 책임은 바로 우리들에게 있는 거니까요 라고 응수하며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고 전했다(Maya Taylor 2020). 반면, 홍콩은 우산운동 이후 행정장관과 입법의원의 전면적 직선제 실시를 두고 싸워왔지만 출로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70명으로 구성된 입법의원 중 절반은 지역구에 기반한 직선으로, 나머지 절반은 직능단체에 의한 간선으로 선출된다. 행정장관은 1,200명의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로 선출되며 후보 지명에 중국의 영향력이 크다. 중국의 의회 장악력도 강하다. 2017년 중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의원선서를 한 의원 6명이 자격을 박탈당해 큰 파문이 인 적이 있었다. 작년 11월에도 범민주파 의원 4명이 외세와 결탁해 국가보안을 위협했다는 혐의로 중국에 의해 자격을 박탈당했다. 이 사건의 여파로 범민주파 의원 전원이 사퇴하는 등 정국은 혼란에 빠졌다. 시위에 참여했던 청년세대 몇몇이 작년 9월로 예정되어 있었던 입법의원 선거의 후보자로 선출되었지만 행정장관은 코로나19를 이유로 선거를 1년 연기했다. 우산운동 이후 치러진 2016년 입법의원 선거에서 두드러진 청년세대의 약진, 2019년 시위 도중 진행된 구의원 선거의 범민주파 압승 등의 전례를 고려하면 입법의원 선거 연기는 정치적 선택인 것으로 보인다.강요되는 사랑 중국은 범민주파 의원 4명의 자격을 박탈하면서 애국심을 언급했다. 국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입법의원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홍콩은 지속적으로 중국에 의해 애국을 강요받아 왔다. 조슈아 웡은 2012년 국민교육 반대운동으로 학생운동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고, 국민교육 의무 시행을 철회하는 나름의 성과도 얻었다. 그렇지만 홍콩과 중국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어질수록 중국은 애국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고, 중국보다는 홍콩을 열정적으로 사랑하기 시작한 청년세대는 이를 비판하며 자신들의 사랑을 주체적으로 결정하길 원했다. 시위가 한창 진행 중이던 작년 11월 중국은 애국교육 가이드라인 개정안을 발표하며 모국으로서 중국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와 공산당 모두를 사랑할 것을 강조했다(Guo Rui 2019). 이러한 흐름 속에서 국가보안법 시행은 국가에 대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사실상 국가를 사랑하라는 요구는 공식적으로 사회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중국 공산당에의 동의를 강요하며 반대 목소리를 탄압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이 장기간의 영국 식민지배와 갑작스러운 반환을 경험한 홍콩의 복잡한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 국가=사회주의=공산당 에 대한 사랑을 주장하면서 홍콩을 통합하려는데 문제가 있다. 홍콩이 150년 이상 영국 식민지배를 받고 중국에 반환된 지 이제 겨우 23년이 됐다. 홍콩에 켜켜이 쌓여있는 영국 식민지의 기억과 새롭게 맞이한 중국과의 뒤섞임은 중국이 원하는 애국을 그대로 수용하기 어려운 상황을 조성해왔다. 반환 이전 중국과 영국의 협상에 정작 홍콩이 스스로 나서지 못했다는 좌절감도 여기에 결부되어 있다. 영국 식민지였던 시절이나 중국 반환 이후나 홍콩에 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가시화되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불합리한 법으로 홍콩을 통치하려는 중국이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사랑은 청년세대에게 희미한 기억으로 남은 영국 식민시절을 상기하게 하고, 급진적으로 홍콩독립을 주장하는 흐름을 만들어내는 데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97년 탄생해 복잡한 정국에서 23살을 맞이한 반환둥이 청년세대가 영국이 반환 이전 홍콩 거주민에게 부여했던 BNO(British National [Overseas]), 영국해외시민) 여권을 가진 동갑내기 친구를 승자라고 부르며 부러워하는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5) 시위 대열에서 영국 국기를 흔들고 마지막 식민총독이었던 크리스 패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상황은 중국이 반복하는 애국의 모호함을 드러낸다. 부모가 중국 복강성 출신인 한 시위자는 중국은 내가 사랑하는 국가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스스로 애국자라고 하지 못하겠다. 중국은 국가와 정권을 동의어로 보고 모두를 사랑하라고 말한다. 이것은 날 고통스럽게 한다 고 밝히며 시위 과정 중 경험하는 애국의 난감함을 토로했다.6) 애국의 강요가 근래의 일이 아니듯 홍콩인이 경험하는 혼란스러운 국가에 대한 사랑도 2019년의 시위를 기점으로 새롭게 대두된 현상은 아니다. 홍콩에서 사랑이 향하는 지점은 중국인지, 홍콩인지, 아니면 특정한 정권을 떠나서 홍콩이라는 땅 그 자체인지 늘 모호했다(장정아 2017). 이는 반환 이래로 요동쳐온 홍콩 사람들의 정체성과 무관하지 않다. 한 때 중국정부를 신뢰한다는 여론도 있었지만, 우산운동 이후에는 중국에 반하는 정서가 눈에 띄게 증가하기 시작해 홍콩만의 이익을 보다 강조하는 강경 본토파가 등장하기도 했다(장정아 2016: 203-204). 이러한 논의는 천안문사건을 추모하던 홍콩 민주화 운동의 진영을 비판하고, 중국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적 발언과 정책을 옹호하는 일부 흐름으로 모아졌다. 중국본토 출신의 이민자를 막아야 한다는 강경 본토파를 기반으로 한 정당이 2016년 입법의원 선거에서 2석을 차지하며 그 위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태국에서도 왕실은 국민들의 절대적인 사랑과 존경을 요구한다. 애국을 둘러싼 홍콩의 복잡한 상황과 비교할 때 태국의 사랑은 나름 일관성 있었고, 이번 시위는 그 일관성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개혁을 주장한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청년세대와 그들 부모 사이의 의견 차이가 가장 확연한 부분도 군주제이다. 부모세대는 2016년 서거한 푸미폰 국왕 시대를 살아왔다. 반복되는 쿠데타에도 정국을 안정시켜온 국왕의 역할은 태국에서 중요한 것이었다. 때문에 군부를 비판하더라도 군주제는 예외로 해야 한다는 부모세대의 입장과 오늘날 태국 정치의 근본적 문제가 군주제에 있다는 청년세대의 주장은 충돌할 수밖에 없다. 몇몇 청년세대는 푸미폰 국왕의 서거를 애도하고 슬퍼했던 이전의 행위마저도 프로파간다에 포섭된 결과에 불과하다고 여기며 부모세대의 군주제 신격화와 맹목적 사랑을 비판하고 있다(BBC 2020/10/17). 이미 조금씩 새어나오고 있었던 군주제 논의 열망은 와찌랄롱꼰 국왕이 재임하면서 거세졌다. 국왕은 코로나19의 비상상황에 독일에 장기체류하면서 원성을 샀다. 시위대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왕이 국민들의 어려움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개인적 즐거움에 몰두하는 것을 비판했다. 사랑을 요구하는 국왕이 정작 국민들을 사랑하지 않는 듯한 태도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작년 8월 공개 선언된 군주제 개혁 10조는 왕실모독법과 왕실재산법 폐지, 왕실재산의 정부 관리와 국왕 개인자산의 분리, 왕실예산 축소와 열린 회계 도입, 일방적으로 왕실을 미화하는 홍보와 교육 중단, 쿠데타 지지와 승인 불가 등을 포함한다. 이는 군주제에 대한 시위대의 비판지점을 보여준다. 왕실이 국민에게 바라는 일방적인 사랑은 문제제기 없이 국가를 왕실의 것으로 전유하게 하는 도구 중 하나였다. 오늘날 청년세대는 납세자인 자신들이 국정 운영에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왕실이 원하는 절대적 사랑이라는 충성의 감정을 납세자로서 마땅히 주장할 수 있는 민주적 통치의 요구로 치환해 응수하고 있다. 이 와중에 군주제도는 태국인들의 마음과 영혼의 통합체 (Mazoe Ford, Supattra Vimonsuknopparat, and Nat Sumon 2020)라는 왕당파의 주장은 청년세대에게 가 닿기 어렵다. 역사적으로 군주제는 현실정치와 밀접히 관계를 맺으며 존립해왔으며, 시위대는 이를 비판하고 있다. 마음과 영혼의 통합체라는 추상적인 신성화는 오늘날 정치를 비판적으로 응시하기 시작한 청년세대의 입장과 다소 괴리되어 있는 것이다. 군주제가 약화되면 내부 갈등이 발생해 외세가 간섭할 수 있다 (Patpicha Tanakasempipat and Kay Johnson 2020)는 왕당파의 발언도 독일 대사관 앞에서 국왕의 해외 권력 남용 조사를 요구하고, 왕실모독법 폐지를 위한 UN 개입을 주장하며, 해외의 시위대와 연대해 유사한 문제의식으로 해법을 찾아가는 청년세대에게 중요하지 않다. 시위가 한창이던 작년 10월 국왕은 왕실을 지지하며 모인 사람들을 찾아 그들(시위대)을 모두 똑같이 사랑한다 고 말하며 정작 군주제 개혁안에 침묵했다. 홍콩과 태국에서 권력자에 대한 사랑은 언제나 일방적으로 요구되어 왔다. 이제 청년세대는 그들이 원하는 사랑을 말하고 있다. We just really fucking love Hong Kong(我哋真係好 撚鍾意香港) 은 시위대의 표어로 공유되며 홍콩에의 사랑을 보다 강조한다. 하지만 홍콩을 격하게 사랑하는 청년세대는 그 사랑의 수위 조절이 쉽지만은 않다. 일부에서는 지나친 사랑이 홍콩독립 주장으로 이어지며 국가보안법의 처벌 대상이 되기도 했다. 밀크티동맹에서도 Hong Kong is a country 라는 메시지가 종종 공유되며 홍콩독립을 공공연하게 지지하는 듯한 모습이 나타난다. Anti One China TH 조직에서 외치는 하나의 홍콩 도 대만과 함께 독립적인 국가로서 홍콩을 호명하는 것처럼 비춰진다. 밀크티동맹이 처음 결성되었던 배경에도 국가로서 홍콩을 명명한 트윗이 있었듯, 청년세대의 자발적인 사랑이 이 연대를 통해 독립이라는 강경한 입장과 맞닿는 지점도 일부 보인다. 그렇지만 이전에 중국인과 다른 홍콩인의 존재가 배타적으로 강조되면서 이들이 원하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충분히 논의되지 못했던 상황과 비교하면 2019년 이후로는 여러 갈래의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파리에 망명한 한 활동가는 우산운동과 2019년의 시위를 비교하며, 2019년에는 시위대가 홍콩 내부의 이질적인 존재-이주민, 소수민족 등-를 인식하기 시작하고 인종차별적인 태도를 개선해나갔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았다.7) 특히 이러한 지향이 태국과 같이 유사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지역과 연대를 확장하면서 두드러졌다는 점을 강조했다. 홍콩 시위대가 주장하는 그들만의 사랑이 다양한 국제 연대를 통해 외연을 확장한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연대는 영화 뮬란 의 주인공 유역비가 시위를 폭력적으로 제압한 홍콩 경찰을 옹호하고, 중국의 인권탄압 의혹이 있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를 배경으로 촬영했다는 이유로 보이콧하기도 했다. 이 사례는 홍콩 청년세대가 홍콩인만의 가치지향에서 벗어나 중국본토에서 억압받는 다른 집단을 지지했다는 측면에서 이전의 강경한 흐름과 구분되는 지향을 보여준다. 이는 민주주의가 홍콩-중국 구분 없이 모두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의 확장이자 중국과 공산당을 동일시하며 배타적으로 대응했던 태도에서 탈피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청년세대의 입장이 늘 동일한건 아니다. 어떤 이들의 사랑은 여전히 홍콩인을 향한다. 2019년 시위에서 중국본토 이주민에 대한 반대운동이 조직되어 인종차별적이라는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플랫폼C 2019/12/12). 홍콩에서 다이마(大馬)로 불리는 중년의 이주민 여성들은 공공장소에서 음향장비를 갖추고 공연을 하곤 한다. 당시 이들을 반대하는 시위는 소음을 이유로 들었지만, 그 이면에는 여성들이 공연 관람객인 남성들을 대상으로 성매매를 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공원을 되찾자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중국 이주민들에게 빼앗긴 홍콩의 공공공간을 되찾자는 주장은 급진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이러한 태도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왔지만 대체적으로 송환법 반대 시위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졌다. 한 편에서는 남아시아 이주민이 민주화 활동가를 공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또 다른 편에서는 근거 없는 루머를 인종차별적으로 전파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저마다 다른 사랑의 범위는 2019년 홍콩 시위에서 여러 진동을 만들어냈다. 태국 청년세대도 자신들만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작년 10월 시위대가 정부에 발송하려 한 편지는 그들이 결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정부는) 우리가 국가, 종교, 군주제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 사랑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국가는 정부가 아니다. 국가는 바로 국민이다. 그래서 나는 국가를 사랑하지만, 나만의 방식으로 사랑할 것이다...죽음과 수감의 공포 아래서 무슨 생각을 해야 하고, 누구를 사랑할지 우리에게 말하는 권력때문이 아니라. (Joel Selway 2020) 이들은 국가, 종교, 군주가 아닌 사람 에 대한 자발적인 사랑을 외치고 있다. 시위 현장의 목소리도 직접적으로 사랑이 향해야하는 다른 지점을 가리킨다. 우리가 진보를 이야기할 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어야지, 후퇴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총리는 군주제를 도구로 활용해 태국을 퇴보시키려 한다.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진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모두 평등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왕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왕을 사랑하는 척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감옥에 갈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미래의 진보는 왕의 초상화를 벽에 걸어둘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8) 그런데 왕실을 사랑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평등을 지향하는 것으로서 진보는 현재 시위대 내에서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작년 12월 시위에 활발하게 참여해 온 여러 조직 중 하나인 Free Youth 가 페이스북 페이지에 새로운 캠페인 소개 글을 게시했다(2020.12.7.). 이후 빨간색 배경에 Restart Thailand 의 약자인 RT 를 새겨진 이미지가 망치와 낫을 연상시킨다는 부정적인 반응과 함께 공산주의 논쟁이 일어났다. Free Youth는 해당 게시글에 왕이 아니라 노동자가 이 나라를 세웠다 라는 문구와 함께 우리는 모두 억압받는 노동자이다. 라고 선언하며 모든 사람이 동등해야함을 주장했다(Tappanai Boonbandit 2020). 운동의 외연을 확장하기 위해 모두로서 노동자를 호명한 것으로 초반의 논쟁이 정리되었지만, 이후 Free Youth가 추가적으로 페이스북 페이지에 글을 게시하면서 모호함은 더욱 증대됐다. 빨간 장미를 배경으로 공산주의는 독재와 동일하지 않다 는 문구를 입힌 게시글은 (공산주의는) 전제주의 자본가들이 두려워하는 경제 민주주의 시스템의 이름 (Khaosod English 2020/12/15)이라며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의식과 경제민주화로서 공산주의를 강조했다. 청년세대 내에서도 다소 급진적인 이러한 흐름은 공화국(#RepublicofThailand)을 주장하는 트위터 해시태그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작년 9월 의회가 헌법 개정 논의를 지연시킨 이후로 #RepublicofThailand는 트위터 트렌드 랭킹 상위에 오르며 82만회 이상 트윗 되었다(Sebastian Strangio 2020). 혁명이 아니라 개혁을 원한다고 했던 시위대 사이에서 터져 나온 공화국 언급 이후 3개월 만에 공산주의가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RepublicofThailand와 함께 Free Youth의 RT 캠페인은 일부 급진주의자들의 주장이라는 비판이 아직까지는 두드러진다. Thai Enquirer의 필진들은 다수가 동의하지 못하는 망치와 낫을 연상시키는 로고가 운동의 결집력을 떨어뜨릴 수 있으며, 중국 공산당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결성된 밀크티동맹의 기조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국제연대 전선에 어색함이 감돌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Thai Enquirer 2020/12/08). 하지만 이들의 페이스북 게시글은 노동자들에 대한 불공정한 대우나 불평등 심화를 주요 문제로 지적하는 차원에서 공산주의를 언급해,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공산주의와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태국과 홍콩에서 청년세대가 자율적으로 결정한 사랑은 급진적인 조류와 맞물리면서 예견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태국에서는 만민평등의 가치가 공산주의와 공화국, 홍콩에서는 자유와 민주가 독립과 명확한 개념 구분 없이 뒤섞여 사용되면서 이러한 흐름이 두드러졌다. 홍콩의 2019년 시위에서는 우산운동 이후 고조되었던 강경 본토파의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는 성찰이 일부 목격되었지만, 여전히 홍콩인을 향한 사랑이 거세다. 태국에서도 사랑의 대상으로서 만민이 동등해야한다는 평등의 주장이 어떤 구체적 제도와 정책변화로 달성될 수 있을지 깊이 논의되지 않는다면 대중에게는 낯선 사랑의 외침으로 남을 수 있다. 특히 정치개혁의 주체였던 청년세대가 한때 공산주의자로 몰려 탄압당한 역사가 있는 태국에서 급진적 사랑이 의도했든, 아니든 공산주의와 맞닿는 형국을 신중히 독해해야 한다.청년세대의 내적 다양성과 연대의 향방2020년 태국과 2019년 홍콩에서 청년세대는 시위 주체로 외신의 주목을 받았다. 이들이 활용하기 시작한 재기발랄한 시위 전략이나 공산당과 왕실 같은 절대 권력에 대한 도전은 외신에서 주목하기 충분한 이야기 거리를 제공해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청년세대가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지역별로 다른 맥락 속에서 사회운동의 주체로서 나름의 존재감을 가져왔다. 태국에서 청년세대는 1973년 10월, 1976년의 10월, 1992년 5월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과 같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에 참여해 족적을 남겼던 것과 달리 1990년대 이후 정치영역에서 물러나 있었다(Matha Matkhao and Siwawong Sooktawee 2005: 135-138). 태국에서는 노동자와 농민으로 구성된 친탁신 계열인 레드셔츠와 도시 중산층 기반의 반탁신 왕당파 옐로우셔츠 사이의 갈등이 한때 두드러졌다. 청년세대는 레드와 옐로우의 적대적 대립과 반복되는 군부 쿠데타 하에서 민간이양 되지 않은 불안정한 정부를 경험했다. 정치적 의사표현이 제한된 환경에서 청년세대가 레드와 옐로우로 나누어진 운동 진영에 등장해 2020년 이전부터 개혁을 외치기 시작했다. 2015-2016년에는 쿠데타 기념일(2014.5.22.)에 학생과 활동가들이 집회를 열어 군부를 비판하고 헌법 개정안 투표에 반대했으며, 새로운 민주주의 운동(New Democracy Movement)이라는 학생 집단이 활동을 시작해 나름의 성과를 냈다(Austine Silvan 2016). 2017년 8월 쭐라롱꼰대학 학생회는 학교에서 열리는 라마 5세와 6세에 대한 존경과 충성 맹세의식을 비판하며 참석을 거부하기도 했다(이유경 2017). 홍콩에서는 우산운동 이전부터 사회운동 진영에서 청년을 호명하는 일이 잦아졌다. 대표적으로 고속철도 반대운동을 통해 청년세대가 홍콩 사회운동의 새로운 주체로 부상했다. 홍콩과 중국을 연결하는 고속철도 건설 과정에서 마을 거주민이 모두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2009년에 반대운동이 일어났고, 80후(後) 세대로 불린 운동의 주체들은 색다른 방식으로 기존의 사회운동과 다른 투쟁을 이어갔다. 이후 국민교육 반대운동과 우산운동에서 청년세대는 범민주의 노란색과 친중국의 파란색으로 이분화되어 있던 정치진영을 가르며 등장했다. 우산운동은 범민주 진영의 기성 활동가들이 공개적으로 계획한 평화와 사랑의 센트럴 점령(Occupy Central with Love and Peace) 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학생들의 동맹휴업과 광장 점거로 여러 집단에 의해 갑자기 촉발되었다. 태국과 마찬가지로 홍콩에서도 청년세대는 대부분 학생이다. 특히 대학교와 중등학교 학생들은 시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2019년 홍콩 시위에서는 학교, 시장, 직장의 세 영역에서의 총파업이 주요 전략으로 등장했다. 근면성실하게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홍콩의 오랜 관념상 정치적 신념으로 인해 학교나 직장을 빠지는 일은 드물다. 중등학교 학생들은 교복을 입고 시위에 참여하거나 지하철역에서 슬로건을 들고 시위대를 지지했다. 시위대가 홍콩중문대학과 이공대학에서 경찰에 포위되어 대탈출 작전을 펼치며 대학을 시위의 주요 무대로 인식시키기도 했다. 태국에서도 Bad Student 라는 학생집단이 학교의 엄격한 규율과 만연한 폭력을 지적하며 학생인권을 강조하기 시작했다(Sunai Phasuk 2020). 태국 사회 전반에 드리워져 있는 위계적 관계를 비판하며 학교에서의 권위주의 역시 청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두 지역에서 시위의 주요 주체인 학생은 저마다의 지역적 배경에서 기성의 권력에 문제를 제기하며 (재)등장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단지 학생의 정체성만을 내세우는 것은 아니다. 특히 태국에서 청년세대로 뭉뚱그려지는 운동의 주체들 중 LGBTQ 커뮤니티는 적극적으로 시위에 참여하며 성소수자의 인권문제를 부각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시위의 주요 리더들 중 몇몇이 스스로 LGBTQ 정체성을 드러내면서 이러한 흐름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여성들도 시위현장에서 임신중절과 성매매 논쟁을 꺼내고, 여성이 불교 승려로 임명될 수 없는 현실과 남성에 비해 낮은 월급을 비판했다(Nanchanok Wongsamuth 2020). 학생들이 학교에서 LGBTQ 학생들에 대한 차별과 여학생들을 향한 성희롱을 문제시하는 모습은 청년 주체들 사이의 내적 다양성을 보여준다. 태국에서 성 소수자와 여성을 중심으로 한 젠더 이슈는 사회개혁 요구와 맞물려 부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시위 전반의 문제의식과 결합시키고자 한다. 방콕에서 시위를 주도하는 단체 중 하나인 Women for Freedom and Democracy 는 우리의 신체와 재생산 건강에 관한 결정이 여전히 정부에 의해 통제된다면 진정한 민주주의를 주장할 수 없다 며 민주주의와 젠더 이슈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했다(Leah Rodriguez 2020). 민주주의가 단지 제도적인 차원에서 정착되는 것을 넘어서 실제 생활 전반을 관장하는 기본적인 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홍콩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감지되기는 하지만 다소 제한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홍콩에서 경찰의 성적인 폭력은 시위에 대한 강경 진압으로 경찰의 이미지가 실추된 상황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홍콩중문대학교 학생이 얼굴을 공개하며 경찰에 의해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면서 논쟁은 더욱 거세졌다. 경찰의 성적인 폭력을 지탄하는 시위가 열렸고 많은 여성들이 피해 사실을 밝혔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젠더 이슈를 경찰 폭력과의 관계 속에서만 한정하는 경향을 보였다. 온라인상에서 여성 시위대에게 차별을 가하는 주체도 간체자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친중국적 견해를 가진 중국인이라고 의심되고는 했다(CNA 2019/09/02). 젠더 이슈가 친중국 입장을 대변한다고 간주되는 경찰과 중국본토인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주로 주목받는 것이다. 중국본토 이주민 여성에 대한 성적인 차별과 편견이 홍콩 시위에서 드러났던 점을 상기해보면, 젠더 이슈가 보편적인 차원에서 논의되는 토양이 부족해 보인다. 물리적 충돌도 불사했던 시위 최전선에 여성들이 많이 나서긴 했지만, 정작 중국본토 이주민 여성을 중심으로 성차별적인 인식이 확산되었을 때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오히려 성 노동자들이 연대 성명을 통해 송환법이 백색테러를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성 노동자들의 입장이 되어 보아라. 성 노동자들은 언제나 이런 테러의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면서 시위대가 공감하기 어려운 이슈를 상기시키고자 했다(Poultry Alliance from the Margins of Depravity 2019).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젠더에 무감각한 태도가 목격된다. 한 다큐멘터리에서 4명의 남성 활동가들이 입법의원 선거에 출마하려는 여성 활동가에게 (네가) 여자인 건 중요하지 않아. 예쁜 여자인 게 중요해. 넌 서부 신계(출마한 지역구)의 꽃이야 라고 말하며 불편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장면이 고스란히 담겼다.9) 여성 활동가는 언짢은 심정을 내비쳤지만 그들은 농담이다 고 말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젠더뿐만 아니라 다른 소수자들과의 새로운 연결도 두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다. 불교도가 대다수인 태국에서 남부(Deep South)의 말레이 무슬림은 긴장을 유발하는 존재이다. 이들은 태국에서 지속적으로 탄압 당해왔으며, 2004년 딱바이(Tak Bai)에서 태국정부와 충돌해 85명이 사망한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 태국시위가 한창 진행 중이던 11월, 상황을 진단하려는 여러 학자들이 패널을 구성해 라운드테이블을 열었다. 이 중에서 한 연구자는 이번 시위에 남부지역 빠따니(Pattani)에서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방콕에 모여들어 민주주의를 외치기 시작했다고 말하며, 빠따니의 운동가들과 시위대가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10) 시위대가 태국 정부에 의해 탄압 당했던 이질적 존재를 인식하며 정의와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관점에서 연결되고 있다는 것이다. 홍콩 시위에서도 (동)남아시아 출신 이주민들과 새로운 연대가 형성되는 조짐이 보인다. 이들은 총파업에 참여하거나 시위대에 결합해서 전제주의 앞에 인종적 구분은 없다. 우리도 홍콩인이다. 우리도 홍콩의 일부 라면서 주류사회에 대한 연대의 감각을 처음으로 느끼게 되었다고 말한다(Linda Lew 2019). 하지만 시위에서 활동가가 거리에서 습격당해 큰 부상을 입었을 때 남아시아 출신 이주민의 소행으로 소문이 나기도 하는 등 차별은 몇몇 시위대에 의해서 반복되고 있다. 동시에 확인되지 않은 정보로 이주민들을 차별하지 말라는 반박도 존재한다. 시위 진압에 사용된 파란 화학염료가 섞인 물대포가 모스크에 분사되었을 때도 시위대가 모스크를 직접 청소해주면서 이주민들에게 화합의 신호를 보냈다. 작년 11월 태국, 홍콩, 대만의 활동가들이 온라인에 모여 각 지역의 운동 현황을 논의하고 서로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11) 홍콩 활동가는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특정 지역의 시민이기 이전에 인간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면서 사람 을 중심에 두고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의와 인본주의가 다른 가치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태국과 대만의 활동가들은 이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다소 추상적으로 여겨지는 인권과 정의의 강조는 이들 연대의 핵심이기도 하다. 각 지역이 처한 특수한 상황에 따라서 문제시되는 권력의 유형이나 특징이 다를 수 있지만, 억압당하는 모든 사람들과 스스로를 위해 결연히 맞서겠다는 이들의 다짐은 연대로 표명되어왔다. 하지만 이들의 연대가 강조하는 가치들을 서로 어떻게 공유하며 실천하고 있는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사람 중심의 연대를 중시하는 홍콩에서 젠더와 이주민 문제는 제한적으로만 논의되며, LGBTQ와 여성의 목소리가 두드러지는 태국에서는 이를 국제적으로 공유할 사안으로 확장하지 못했다. 태국과 홍콩의 연결은 공공연하게 지지를 선언하며 서로 힘을 실어주는 차원에서만 그치고 있는 듯 보인다. 두 지역의 사회운동 연대는 이제 시작이다. 이들의 연대가 보편적 인권에 기반을 둔 운동으로 촘촘하게 연결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주체들에 대한 조명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들이 강조하는 범아시아 풀뿌리 운동 으로서 연대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인권이 각 지역에서 어떻게 실현되어야 할지 구체적인 논의가 수반되어야 한다. 특정 지리적 위치가 아니라 사람 을 중심에 둔 범아시아의 연결은 각각의 의제를 가진 다양한 주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서 시작될 수 있다. 여기에서 사람은 청년뿐만 아니라, 여성, LGBTQ, 성 노동자, 이주민, 소수민족 등 각 사회를 구성하는 모두를 가로질러야 한다. 이는 민주주의의 당위성 주장을 넘어 그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위해서 어떤 민주주의를 달성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2021년 1월 현재 홍콩에서는 민주화 활동가들의 대규모 체포가 진행 중이다. 심지어 망명한 활동가들에 대한 수배도 거론되고 있는 상황이다. 태국에서는 12월 이후 시위가 잠잠해졌다. 비교적 안정적으로 통제해왔던 코로나19가 수산시장을 기점으로 확산되면서 태국 내의 관심이 옮겨진 듯 보인다. 거리에서 이루어진 대규모 운집 형태의 사회운동은 두 지역 모두에서 잠시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다고 해서 멈춘 것은 아니다. 이제 수면 아래에서 진영을 가다듬어야할 때이다. 이 과정에서 두 지역의 연대가 무엇을 지향할 것인지, 공통의 의제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 어떻게 공동의 대응방식을 구축해 나갈 것인지 논의할 시기가 왔다. 이후의 사회운동은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에 달려있다.* 각주1) 1,021명의 홍콩 시위참가자를 조사한 로이터(Reuters)에 따르면, 41%는 홍콩독립을 강하게 반대 한다. 다소 반대 한다는 26%를 포함하면 67%가 홍콩독립을 반대하는 것이다. 단 8%만이 홍콩독립을 강하게 지지 하며, 다소지지 한다는 9%와 합치면 17%이다(James Pomfret and Clare Jim 2019).2) 태국 영자신문 Khaosod English와 타나톤의 인터뷰(Khaosod English 페이스북 페이지 2020.11.23. 게시 인터뷰, 검색일: 2020.11.27.)3) 이 글에서 국가보안법 내용은 원문인 The Law of the People s Republic of China on Safeguarding National Security in the Hong Kong Special Administrative Region (2020) 참고.4) 홍콩에서 시위를 지지하는 메시지를 적은 포스트잇을 벽에 붙여 레논 벽(Lennon Wall) 을 만드는 것은 중요한 상징적 행위이다. 시위대는 국가보안법 시행으로 포스트잇 메시지를 쓰기 어렵게 되자 아무런 글도 쓰지 않은 빈 포스트잇을 벽에 붙이기 시작했다.5) CNA Insider 유튜브 채널 23: Born In The Year Of Hong Kong Handover To China, What Will Their Future Hold? | CNA Documentary 동영상(2020.11.6. 게시) (검색일: 2020.12.10.)6) BBC 영상. Hong Kong protests: 'I can't say I love China any more' (2019.9.30.) (검색일: 2020.12.9.)7) The Dissident Club이 온라인으로 개최한 Civil Rights Movement and Protest: Hong Kong, Thailand, and Taiwan. (2020.11.22.)에서 홍콩 활동가의 발언 참고8) 태국 영자신문 Khaosod English의 시위 라이브 영상(Khaosod English 페이스북 페이지 2020.11.27. 게시글 Live Part2 from anti-government protest at Lat Phrao Intersection. 검색일: 2020.11.30.)9) CNA Insider 유튜브 채널 23: Born In The Year Of Hong Kong Handover To China, What Will Their Future Hold? | CNA Documentary 동영상(2020.11.6. 게시) (검색일: 2020.12.10.). 신계(新界)는 구령, 홍콩섬, 란타우섬과 함께 홍콩을 구성하는 한 지역이다.10) University of Wisconsin-Madison의 Center for Southeast Asian Studies에서 개최한 라운드테이블 Uprising Thailand(2020.10.28.)에서 Daungyewa Utarasint가 언급함.11) The Dissident Club이 온라인으로 개최한 Civil Rights Movement and Protest: Hong Kong, Thailand, and Taiwan. (2020.11.22.)* 참고문헌김홍구. 2019. 불공정 논란 속 팔랑쁘라차랏당 최다 득표: 향후 연립정부 구성 등 해결해야 할 과제 산적. CHINDIA Plus 135(2019년 5월호): 10-13.김홍구 이미지. 2016. 태국 2016: 푸미폰 국왕의 서거와 정치 경제적 불확실성. 『동남아시아연구』 27(2): 245-271.______. 2017. 태국 2017: 군부의 권력 유지 위한 명분 찾기. 『태국학회논총』 24(2): 29-68.김회권. 2013. 존경받는 국왕이 외려 민주주의의 적 . 시사저널. 8월 14일. 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37927 (검색일: 2020.12.7.)윤진표. 2017. 합리성, 구조, 문화적 시각을 통한 태국의 정치변동 분석. 『한국태국학회논총』 24(1): 1-39.이유경. 2016a. 점쟁이의 의문사. Penseur21. 2월 16일. https://penseur21.com/2016/02/16/%EC%A0%90%EC%9F%81%EC%9D%B4%EC%9D%98-%EC%9D%98%EB%AC%B8%EC%82%AC/ (검색일: 2020.11.9.)______. 2016b. 군부의 쿠데타 이후 타이의 긴조 시대. 시사인. 6월 14일.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6246 (검색일: 2020.11.9.)______. 2016c. 선거 없이 군인 정당 들어서는 것. 한겨레신문. 8월 23일.(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42257.html (검색일: 2020.12.1.)______. 2017. [공존의 위기 분쟁의 미래] 태국 최고 엘리트 대학의 굴욕 . 쿠키뉴스. 8월 19일. http://www.kukinews.com/newsView/kuk201708180267 (검색일: 2020.11.9.) 장정아. 2016. 본토 라는 유령: 토착주의를 넘어선 홍콩 정체성의 가능성. 『동향과 전망』 98: 194-235. 플랫폼C. 2019. 보다 급진적인 홍콩을 위한 상상력: 튄문공원(屯門公園) 시위에서 나타난 본토주의에 대한 고찰. 12월 12일. http://platformc.kr/2019/12/radical-hk-imagination/ (검색일: 2020.12.16.)ABC NEWS. 2020. Thailand s Young Protesters Say They ll Risk Arrest as They Try to Reform the Country s Powerful Monarchy. 23 September. https://www.abc.net.au/news/2020-09-24/young-student-taking-on-thailands-monarchy/12692276 (검색일: 2020.11.25.)Akshay Narang. 2020. In Thailand, the Youth are Pushing Against a Pro-China Government with All Their Might to Preserve Democracy. 19 September.https://tfipost.com/2020/09/in-thailand-the-youth-are-pushing-against-a-pro-china-government-with-all-their-might-to-preserve-democracy/ (검색일: 2020.11.23.)Austine Silvan. 2016. New Democracy Movement: achievements and future. PRACHATAI ENGLISH. 9 June.https://prachatai.com/english/node/6244 (검색일: 2020.12.22.)Chris Lau and Jeffie Lam. 2020. I m Ready for Jail : the Hong Kong dissidents who chose to stay and fight. South China Morning Post. 10 October.https://www.scmp.com/week-asia/politics/article/3104908/im-ready-jail-hong-kong-dissidents-who-chose-stay-and-fight (검색일: 2020.12.9.)Cindy Sui. 2019. The Murder Behind the Hong Kong Protests: A case where no-one wants the killer. BBC News. 23 October.https://www.bbc.com/news/world-asia-china-50148577 (검색일: 2020.11.23.)CNA. 2019. Attacked for Gender, Not Views: Hong Kong women protesters facing troll army. 2 September. https://www.channelnewsasia.com/news/asia/hong-kong-women-protesters-attacked-gender-sexual-harrased-11863530 (검색일: 2020.12.22.)Dan McDevitt. 2020. In Milk Tea We Trust : How a Thai-Chinese Meme War Led to a New (Online) Pan-Asia Alliance. The Diplomat. 18 April. https://thediplomat.com/2020/04/in-milk-tea-we-trust-how-a-thai-chinese-meme-war-led-to-a-new-online-pan-asia-alliance/ (검색일: 2020.11.23.)Ejinsight. 2018. Taiwan Issues Arrest Warrant for HK Youth Suspected of Murder. 04 December. https://www.ejinsight.com/eji/article/id/2006980/20181204-taiwan-issues-arrest-warrant-for-hk-youth-suspected-of-murder (검색일: 2020.11.23.)Emily Feng. 2020. Hong Kong Residents Are Getting Political Asylum In The U.S. NPR. 14 October. https://www.npr.org/2020/10/14/923737050/hong-kong-residents-are-getting-political-asylum-in-the-u-s (검색일: 2020.12.8.)Gabriela Bernal. 2020. The Milk Tea Alliance: How Thailand, Taiwan, and Hong Kong are supporting each other s fight for democracy. FOR SEA. 20 August https://forsea.co/the-milk-tea-alliance-how-thailand-taiwan-and-hong-kong-are-supporting-each-others-fight-for-democracy/ (검색일: 2020.11.23.)Grace Tsoi and Lam Cho Wai. 2020. Hong Kong Security Law: What is it and is it worrying? BBC. 30 June. https://www.bbc.com/news/world-asia-china-52765838 (검색일: 2020.12.7.)Guo Rui. 2020. China Updates Patriotic Education Push to Forge Stronger National Identity: including in Hong Kong. South China Morning Post. 14 November. https://www.scmp.com/news/china/politics/article/3037606/china-updates-patriotic-education-push-forge-stronger-national (검색일: 2020.12.9.)Helen Davidson. 2020. Hong Kong Security Law May Break International Laws . The Guardian. 02 October. https://www.theguardian.com/world/2020/sep/04/hong-kong-security-law-may-break-international-laws-china-human-rights-un (검색일: 2020.12.7.)Human Rights Watch. 2020. Thailand: Water Cannon Used Against Peaceful Activists. 17 October. https://www.hrw.org/news/2020/10/17/thailand-water-cannon-used-against-peaceful-activists (검색일: 2020.12.1.)Jeffie Lam and Chris Lau. 2020. National Security Law and Hong Kong s Exiled Dissidents: the world s listening now but for how long? South China Morning Post. 10 October. https://www.scmp.com/week-asia/politics/article/3104917/national-security-law-and-hong-kongs-exiled-dissidents-worlds (검색일: 2020.12.9.)Jasmine Chia. 2020. Why Thais Stand With Joshua Wong. Thai Enquirer. 24 November.https://www.thaienquirer.com/21011/why-thais-stand-with-joshua-wong/ (검색일: 2020.11.24.)James Pomfret and Clare Jim. 2019. Exclusive: Hong Kongers support protester demands; minority wants independence from China-Reuters poll. Reuters. 31 December.https://www.reuters.com/article/us-hongkong-protests-poll-exclusive-idUSKBN1YZ0VK (검색일: 2020.11.04.)Joel Selway. 2020. Thailand s National Moment: Protests in a continuing battle over nationalism. Brookings. 2 November. https://www.brookings.edu/blog/order-from-chaos/2020/11/02/thailands-national-moment-protests-in-a-continuing-battle-over-nationalism/ (검색일: 2020.12.15.)Khaosod English. 2020a. Activists Take Aim at China Rights Abuse, One China Policy at Embassy Protest. 2 October. https://www.khaosodenglish.com/politics/2020/10/02/activists-take-aim-at-china-rights-abuse-one-china-policy-at-embassy-protest/ (검색일: 2020.12.15.)______. 2020b. Prank or What? Free Youth Touting Communism Puzzles Allies. 15 December. https://www.khaosodenglish.com/politics/2020/12/15/prank-or-what-free-youth-touting-communism-puzzles-allies/?fbclid=IwAR1jC6mTImfCma1KSXNu-Q57VeagNoR8LbPW7412gA8voTN6nVV-Ristuww (검색일: 2020.12.17.)Kent Ewing. 2020. Why the Hong Kong-inspired Thai Protests are Something to Feel Good about. Hong Kong Free Press. 01 November. https://hongkongfp.com/2020/11/01/why-the-hong-kong-inspired-thai-protests-are-something-to-feel-good-about/ (검색일: 2020.11.23.)Laignee Barron. 2020. It s So Much Worse Than Anyone Expected. Why Hong Kong s National Security Law Is Having Such a Chilling Effect. TIME. 23 July. https://time.com/5867000/hong-kong-china-national-security-law-effect/ (검색일: 2020.12.7.)Leah Rodriguez. 2020. How Young Women Are Leading Thailand s Protests Against the Patriarchy. Global Citizen. 25 September. https://www.globalcitizen.org/en/content/thailand-democracy-protests-gender-equality/ (검색일: 2020.11.16.)Linda Lew. 2019. The Hongkongers from Ethnic Minorities who Thank Protest Movement for Helping Them Finally Feel Part of the City. South China Morning Post. 30 October. https://www.scmp.com/news/hong-kong/society/article/3035258/hongkongers-ethnic-minorities-who-thank-protest-movement (검색일: 2020.12.25.)Maya Taylor. 2020. Anti-government Activists Condemn Rejection of Ilaw Draft, Vow to Fight on. The Thaiger. 19 November. https://thethaiger.com/hot-news/protests/anti-government-activists-condemn-rejection-of-ilaw-draft-vow-to-fight-on (검색일: 2020.12.8.)Mazoe Ford, Supattra Vimonsuknopparat, and Nat Sumon. 2020. Thai Anti-government Protester Rung feared She d be Thrown in Jail for Speaking Out Against the King: Then came a knock at her hotel room door. ABC NEWS. 22 November. https://www.abc.net.au/news/2020-11-22/thai-protester-continues-to-speak-out-after-jail/12897202 (검색일: 2020.11.25.)Matha Matkhao and Siwawong Sooktawee. 2005. Going Against the Flow: Political Participation of Thai Youth. Go! Young Progressive in Southeast Asia. pp. 123-144.http://library.fes.de/pdf-files/bueros/philippinen/04526/countrypapers_thailand.pdf (검색일: 2020.12.22.)Nanchanok Wongsamuth. 2020. Thai Women Use Pro-democracy Protests to Challenge Sexism. The Japan times. 15 November.https://www.japantimes.co.jp/news/2020/11/15/asia-pacific/thailand-women-protests-sexism/ (검색일: 2020.12.24.)Nathan Wilson. 2020. Milk is Thicker than Blood: The Rise of the Milk Tea Alliance in Southeast Asia. The Jackdaw Post. 17 April. https://jackdawpost.com/2020/04/17/milk-is-thicker-than-blood-the-rise-of-the-milk-tea-alliance-in-southeast-asia/ (검색일: 2020.11.04.)Patpicha Tanakasempipat and Kay Johnson. 2020. Illegal Thoughts : how some exiled critics of Thai king are fuelling a revolt. Reuters. 10 September. https://uk.reuters.com/article/us-thailand-protests-exiles/illegal-thoughts-how-some-exiled-critics-of-thai-king-are-fuelling-a-revolt-idUSKBN2603HS (검색일: 2020.12.7.)Poowin Bunyavejchewin. 2020. Will the Milk Tea War Have a Lasting Impact on China-Thailand Relations? The Diplomat. 02 May. https://thediplomat.com/2020/05/will-the-milk-tea-war-have-a-lasting-impact-on-china-thailand-relations/ (검색일: 2020.11.23.)Poultry Alliance from the Margins of Depravity. 2020. Hong Kong s Sex Workers are a Key Part of the Struggle against Police Violence. Lausan. 7 July. https://lausan.hk/2019/sex-workers-discuss-restore-tuen-mun/ (검색일: 2020.12.24.)Selina Cheng. 2020. District Councillors among 8 Arrested by Hong Kong Police over Peaceful Campus Demo report. Hong Kong Free Press. 7 December. https://hongkongfp.com/2020/12/07/freshgrad-arthur-yeung-among-8-arrested-by-hong-kong-national-security-police-over-peaceful-campus-demo-report/?fbclid=IwAR2F7eQwtok6RIFxhChQj6slNoaSD6m0ZKPXfJB81QL19kBi3a0x_ZCjJHo (검색일: 2020.12.8.)Sebastian Strangio. 2020. What Lies Behind Thailand s Hashtag Republicanism? The Diplomat. 29 September.https://thediplomat.com/2020/09/what-lies-behind-thailands-hashtag-republicanism/ (검색일: 2020.11.26.) Shibani Mahtani and Paritta Wangkiat. 2020. Thai Protesters Inspired by Hong Kong Tactics in Fight against the Government. The Washington Post. 19 Oct. https://thestringernews.com/2020/10/20/thai-protesters-inspired-by-hong-kong-tactics-in-fight-against-the-government/ (검색일: 2020.11.23.)Sunai Phasuk. 2019. Unending Repression Under Thailand s Military Junta. Human Rights Watch. 22 May.https://www.hrw.org/news/2019/05/22/unending-repression-under-thailands-military-junta (검색일: 2020.12.7.)Sunai Phasuk. 2020. Thailand s Bad Students are Rising Up for Democracy and Change. The Washington Post. 17 September. https://www.hrw.org/news/2020/09/17/thailands-bad-students-are-rising-democracy-and-change (검색일: 2020.12.22.)Supalak Ganjanakhundee. 2020. Social Media and Thailand s Struggle over Public Space. PERSPECTIVE. ISEAS(Yusof Ishak Institute). 22 June.https://www.iseas.edu.sg/wp-content/uploads/2020/05/ISEAS_Perspective_2020_67.pdf (검색일: 2020.11.23.)Tappanai Boonbandit. 2020. Activists Defend Hammer-Sickle Logo Slammed by PM Prayut. Khaosod English. 9 December. https://www.khaosodenglish.com/politics/2020/12/09/activists-defend-hammer-sickle-logo-slammed-by-prayut/?fbclid=IwAR17LnDzd-qrY-Xr3fJ5gVGDFbqBb1bJrXUX_1A4hvPQlM1E8HAaCo997AU (검색일: 2020.12.17.)Termask Chalermpalanupap. 20020. Weak Party System Dooms Thai Political Party Reforms. PERSPECTIVE. ISEAS(Yusof Ishak Institute. 8 April. https://www.iseas.edu.sg/wp-content/uploads/2020/02/ISEAS_Perspective_2020_27.pdf (검색일: 2020.12.1.)Thai Enquirer. 2020. Our Writers Weigh-in on Free Youth s Controversial New Logo. 8 December. https://www.thaienquirer.com/21417/our-writers-weigh-in-on-free-youths-controversial-new-logo/ (검색일: 2020.12.17.)Timothy Mclaughlin. 2020. How Milk Tea Became an Anti-China Symbol. The Atlantic. 13 October.https://www.theatlantic.com/international/archive/2020/10/milk-tea-alliance-anti-china/616658/ (검색일: 2020.11.23.)Vivian Wang and Alexandra Stevenson. 2020. In Hong Kong, Arrests and Fear Mark First Day of New Security Law. The New York Times. 13 July. https://www.nytimes.com/2020/07/01/world/asia/hong-kong-security-law-china.html (검색일: 2020.12.7.) [9] 미얀마 코로나19 대응: 위기와 기회의 변곡점 ㅣ 김희숙·이우철 작성자 동남아연구소 조회수 1346 첨부파일 1 등록일 2020.10.14 초록미얀마에서의 코로나19 감염 확산은 해외 입국자에서 지역사회 전파 사례로, 이어 해외로부터 입국한 자국민 이주노동자 사례가 이를 대체하였다가 8월 16일부터 다시 지역사회 감염 사례가 급증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특이한 것은 감염 집단의 범주가 시기별로 매우 말끔히 구별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글은 먼저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미얀마가 직면하게 된 주된 위험요인은 무엇이었고, 이에 대처할 수 있는 국가 방역역량 수준은 어느 정도였으며, 이에 따라 미얀마 정부가 채택한 방역 전략의 특징은 무엇이었는지를 들여다봄으로써 이 같은 전개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고자 한다.다른 한편으로 이 글은 국가 방역역량의 절대적 부족이라는 한계 상황에도 불구하고 미얀마의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나타난 긍정적인 측면에도 주목한다. 각기 독자적인 거버넌스를 유지해오던 여러 이해주체들이 방역 관리를 위해 공조에 나서고 있는 점이다. 로힝자족 문제를 비롯하여 소수민족무장단체와 미얀마군의 무장충돌이 야기한 소수민족 거주지역의 취약성, 주변 국가들의 봉쇄조치에 따른 해외 이주자들의 대규모 입국 등 여러 위험요인들이 겹겹이 자리하는 가운데 소수민족무장단체와 정부, 미얀마군 및 국제기구, 국내외 시민사회단체가 코로나19 공동대응을 위해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19 연대 라 칭할 수 있을 만한 이 같은 움직임에 주목하여 이 글은 이러한 과정이 갖는 사회적, 정치적 함의를 짚어보고자 한다.이슈페이퍼 9호 원문 내려받기미얀마에서의 코로나19 감염 확산 추이 미얀마에서 코로나19 첫 확진 사례가 보고된 것은 2020년 3월 23일로, 라오스와 함께 동남아 국가들 가운데서도 가장 늦게 감염 확산이 시작된 사례로 꼽힌다. 3월 27일 첫 지역사회 감염 사례로 기록된 8번째 사례가 나타나기 전까지 미얀마의 초기 확진 사례는 모두 외국으로부터의 유입에 의한 것이었으며, 미국, 영국 등에서 출발하여 태국이나 싱가포르 등을 경유하여 입국한 이들이 초기 확진 사례의 주를 이루었다. 이후 외국인을 동반하여 유명 관광지를 안내해온 미얀마인 가이드가 첫 국내 감염 사례로 기록을 올리고 종교모임 등을 통한 집단 감염사례가 나타나는 등 지역사회 감염 사례가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감염 확산 초기 미얀마의 코로나19 확진 건수는 하루 10~20건 내외로, 첫 확진 사례가 나타날 즈음 주변 국가들에서 확진건수가 급증하였던 데 비하면 비교적 안정적으로 확산을 억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감염 확산은 일정 수준으로 통제하고 있었지만 주변 국가들에서 확진 건수가 급증하는 상황은 미얀마에도 큰 부담을 안겼다.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해 주변 국가들이 국경을 폐쇄하고 경제활동을 잠정 중단하는 조치를 내림에 따라 해외 이주자들의 대규모 귀환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입국자의 수가 많은 것도 걱정이지만 이들을 격리 수용하는 과정에서 감염이 확산될 경우 미얀마 전체로 퍼지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문제일 따름이었다. 특히 3월 20일 태국이 국경 폐쇄를 선언하면서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는데, 동남아 최대 노동력 수입국인 태국의 전체 이주노동자 가운데 미얀마 출신 노동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약 70.2%에 이르고 있다는 점이 이러한 긴장의 배경이다(2014년 미얀마 인구센서스 자료 기준, ILO 홈페이지 참조). 미등록 노동자들까지 포함하면 300만을 훌쩍 넘을 것으로 추산되는 미얀마 이주자 가운데 최소 십만 여명이 실직으로 인해 귀국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만큼 미얀마 정부로서는 이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는 일이 시급했다. 하지만 4월이 다 되도록 미얀마는 이들 이주자들의 주된 유입 지점이 될 육로 관문 검역에 필요한 준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웅산수찌는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해외에 나가 있는 미얀마 국민은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 며 해외 이주자들에 대한 무조건적 수용 입장을 밝혔지만, 검사는 고사하고 이들을 수용할 만한 격리 시설조차도 마련되지 않은 형편이었다. 이에 미얀마 정부는 태국에 체류 중인 미얀마 국민에게 당분간 입국하지 말아달라고 호소하는 한편 태국 정부에도 격리시설 마련을 위해 4월 15일까지 입국을 막아달라고 요청했다(Zaw Zaw Htwe 2020). 이후 이 기한은 4월 30일까지 미뤄져, 5월에 들어서자 태국으로부터 귀환 노동자의 대규모 입국 행렬이 본격적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국제이주기구(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Migration, 이하 IOM)의 집계에 따르면 3월 이래 미얀마로 입국한 해외 이주노동자의 수는 총 142,000명에 이르며, 이 중 97,342명이 태국으로부터 입국한 것으로 확인된다(OCHA 2020/08/10). 비공식 경로를 통한 입국자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이를 훨씬 상회할 것으로 추정된다(IOM 2020/08/26). 해외 이주노동자들의 대규모 입국에 따른 국내 확산 우려는 매우 높았지만, 이 기간 중 미얀마의 코로나19 확진 건수는 이전과 큰 차이 없이 낮은 수준으로 유지되었다. 더욱 인상적인 점은 귀환자들의 확진 건수가 보고되는 사이 지역사회 감염 사례는 거의 보고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미얀마 보건체육부(Ministry of Health and Sports, 이하 MoHS)가 첫 확진 사례 발생 시점부터 하루 단위로 상세하게 공개해오고 있는 코로나19 현황보고서를 놓고 보면 미얀마는 지역사회 감염을 거의 성공적으로 통제한 가운데 해외 이주노동자들을 받아들였고, 이들 가운데서도 양성 판정을 받은 이는 많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수치상으로만 보자면 미얀마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코로나19 확산을 억제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림 1 참조). 하지만 8월 16일부터 상황은 급반전을 이루어 지역사회 확산 사례가 해외 유입에 의한 전파 사례를 순식간에 따라잡았을 뿐 아니라 곳곳에서 무더기로 감염 사례가 속출하기 시작하였다. 여카잉주(Rakhine State)의 시뜨웨(Sittwe)에서부터 시작된 이 두 번째 확산은 매우 빠른 속도로 양곤 등 미얀마의 주요 도시로 퍼져나가 연일 하루 최다 확진 건수 기록을 갈아치웠다. 해외이주노동자 귀환에 따른 감염 확산 고비를 가까스로 넘기고 난 후 재개된 지역사회 전파 속도는 매우 빨라, 첫 확진 사례가 보고된 3월 23일 이후 8월 15일까지 374건에 불과하던 누적 확진 건수는 10월 5일 현재 17,794건을 기록하고 있다. 두 달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50배 가까이 그 수가 급증한 것이다. 이 중 17,471건이 지역사회 감염 사례로, 전체 확진 사례의 98% 가량을 차지한다. 이후로도 확진 건수는 빠른 속도로 늘고 있고, 4월 3일 첫 사례가 보고된 이래 9월 3일까지 5개월 동안 6건으로 유지되었던 사망 건수도 9월 4일부터 빠른 속도로 추가되어 10월 5일 현재 412건으로 급증한 상태다(MoHS 2020/08/16, 2020/10/05; Worldometers, Our World in Data 데이터 참조). 8월 16일 미얀마의 서북부로부터 시작되어 양곤과 만달레이 등의 주요 도시를 덮치고 있는 코로나19의 대규모 확산 물결이 최초에 어떤 경로로 시작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해외 체류 이력이나 확진자와의 접촉이 없었던 은행 직원으로부터 시작되어 곧 동시다발적으로 곳곳에서 유사한 발병 사례들이 속출하고 있는데, 이미 지역사회 내에 널리 퍼져 있다가 뒤늦게 포착된 것일 가능성이 커서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한 달 동안 지역사회 감염 사례가 보고되지 않고 있던 사이 정부 규제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일상이 어느덧 발병 전과 유사한 수준으로 돌아가 있던터라 앞으로도 확진 사례는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증가할 것이 예상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쉽게 경계를 풀어버린 시민들을 탓하기에 앞서 이 같은 전개의 근본적인 원인을 찾자면 포괄적인 검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꼽아야 할 것이다. 10월 5일까지도 미얀마의 총 검사 건수는 291,484건에 불과하고 검사 정책 역시 감염 확산 초기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확진자와의 접촉사례와 의심환자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제한적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해외 입국자에서 지역사회 감염 사례로, 다시 귀환노동자들의 사례로 주요 감염집단의 범주가 이동해가는 발병 전개는 이 같은 방역 역량의 한계와 밀접히 연관된 것으로서, 주요 감염원으로 인지된 집단 범주에 국가 방역 역량이 총동원되는 사이 지역사회 방역은 소홀해진 데 따른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코로나19 사태에 대처할 수 있는 국가 방역역량의 수준이 어느 정도였으며, 그러한 상황에서 미얀마 정부가 어떠한 방역 전략을 채택했는지를 들여다보는 것은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선택과 집중: 코로나19 방역 전략과 사회경제적 영향 해외 입국자가 주가 되는 초기 감염 사례에서 지역사회 전파 사례로, 이후 귀환 이주노동자들 사례로 이행하는 감염 전개가 아주 이상한 것은 아니다. 상당수 국가들이 이와 흡사한 전개를 보여준 바 있다. 미얀마 사례에서 특이점이란 주요한 노동력 송출국가로서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이들이 대거 입국함에 따라 감염 우려가 높아졌다는 정도다. 하지만 미얀마에서의 감염 전개과정에서 나타나는 이상한 점은 다른 경로의 감염 사례가 들어설 여지없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말끔하게 단일범주의 사례가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전체 감염 건수 가운데 외국인 노동자 기숙사 감염 사례가 95%가량을 차지한 싱가포르에서나 볼 수 있었던 현상으로, 집단 발병이 나타난 외국인 노동자 기숙사를 봉쇄한 채 지역사회 감염 확산을 막는 데 총력을 집중시킨 싱가포르 정부 특유의 이원적 방역전략의 결과였다(김희숙ㆍ양영란 2020). 싱가포르의 경우 방역의 우선순위는 시민과 영주권자들로 이루어진 지역사회에 있었으며, 주요 감염원인 외국인 노동자 기숙사로부터의 감염 확산을 차단함으로써 이루어낸 성과였다. 미얀마의 경우는 이와 달리 표적 집단이 된 귀환 노동자들의 검역 관리에 방역 역량이 집중된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가뜩이나 부족한 방역 역량을 지역사회에까지 할당할 만한 여력은 없었던 것이다. 지역사회 사례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최근의 감염 확산 사태는 방역 역량의 절대적 부족 상황에서 채택한 선택과 집중 전략이 초래한 위기라 할 수 있다. 미얀마에서 자체적으로 코로나19 검사를 할 수 있게 역량을 갖추게 된 것은 2월부터다. 이전까지는 코로나19 검사가 가능한 PCR 분석기는 보유하고 있었지만 시약이 없어 검사를 할 수 없는 형편이어서 태국의 WHO 실험실로 보내 검사 결과를 기다려야만 했다. 이후 태국과 미국, 일본에서 시약을 지원해줌에 따라 자체 검사가 가능하게 되긴 했지만 장비와 시약만 있다고 검사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미국의 질병통제예방센터(CDC, 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에서 보내준 기술자들로부터 검사 교육을 받고 난 2월 말부터서야 본격적으로 자체 검사가 가능해졌다. 검사 시행 초기에는 착오를 줄이기 위해 방콕의 WHO 실험실에도 샘플을 보내 이중으로 검사를 시행할 것이라고도 했다(Ad Shofar 2020/02/12). UN, WHO 및 싱가포르, 태국, 중국, 일본 등으로부터 분석기와 진단키트, 시약을 지원 받고 민간부문으로부터도 의료진을 위한 개인보호구와 마스크를 지원 받아 미얀마의 검사 및 의료역량은 점차 증강되었다. 양곤의 국립보건연구소 외에도 만달레이와 몰라먀잉 등에도 추가로 코로나19 검사를 할 수 있는 실험실을 설립하여 군 시설을 포함, 총 7개의 실험실이 확충되었다(OCHA 2020). 공공시설과 지역사회 학교와 사원 등을 동원하여 귀환 노동자들을 비롯하여 의심환자를 수용할 격리시설도 확보해가는 등 정부의 방역역량은 빠른 속도로 향상되었다. 하지만 이는 사실상 전무하던 상태에서 조금 나아진 정도지 충분하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실험실을 확충하여 검사능력은 높아졌지만 시약 부족 현상은 여전하여 현재까지도 검사는 제한적인 수준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확진 환자들을 수용하고 치료할 의료시설이 넉넉지 않은 상황이어서 환자 수를 늘리게 될 검사를 능력껏 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을 것이다. 해외 이주노동자들의 입국이 본격화된 4월부터 7월까지 검사 건수 대비 확진 건수는 거의 무시해도 될 만큼 낮은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가장 많은 검사가 이루어진 6월의 검사 규모조차 하루 1,000명에서 2,000명을 오가는 수준이었다. 8월 초순까지 미얀마에 설립되어 있는 5개 실험실을 모두 가동했을 때 하루에 2,000건 정도를 검사할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 전체 기간 평균은 하루 1,000건에도 미치지 못한다(OCHA 2020). 미얀마 정부가 태국 정부에 육로 입국자를 하루 1,000명으로 제한해 달라고 요청한 사실로부터도 하루 입국자 수는 이 수치를 훨씬 상회했을 것으로 짐작되는바, 입국자들을 모두 검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 한 보건체육부 대변인과의 인터뷰 내용이 소개된 기사에서도 제한된 검사 역량으로 인해 입국자의 5~10%만이 검사를 받고 있다고 밝힌 바 있기도 하다(Nyan Hlaing Lin 2020). 8월 중순 이후 확진사례가 급증함에 따라 검사역량을 더욱 보강하여 10월 3일 기준 하루 3,200~3,700건 정도를 검사할 수 있게 되었지만(OCHA 2020), 감염환자의 증가세를 감안하면 여전히 충분치는 않다. 지속적으로 격리시설을 확충해가긴 했지만 국경 관문에 모든 인원을 수용할 만한 여력은 없었던 터라 당국은 증상이 없는 이들은 출신지에 마련된 격리시설로 보냈고, 그곳에서 21일 동안의 격리 의무기간을 채운 후 집으로 돌아가 7일 동안 자가 격리를 하도록 했다. 검사 자체가 포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만큼 임시 격리시설로 동원된 전국 각지의 사원이나 학교 시설에서 격리 기간을 채운 후 증상 발현 없이 집으로 돌아간 수도 적지 않을 것이다. 8월 16일부터 급속히 증가하고 있는 지역사회 감염 사례는, 이런 점에서 미얀마 내에 이미 코로나바이러스가 널리 퍼져 있을 수 있다는 염려가 기우만은 아닐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를 더욱 확증해주는 것은 검사 건수 대비 확진 건수 비율로, 9월 초까지 1%를 넘지 않았던 이 비율은 10월 5일 현재 6.1%대로 높이 치솟아 있는 상태다. 검사 역량이 높아지는 속도보다 발병 확산이 더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확진 환자의 접촉 범위 내에서 이루어진 제한적 검사의 결과가 이정도고, 그 중 상당수는 증상이 없는 이들이라고 하니, 실제 검사 대상으로 포착되지 않은 무증상 감염자의 수는 어느 정도일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미국 보건연구소에 따르면 미얀마의 보건역량은 오랜 군부통치 기간 중 지속적으로 약화되어, 2006년 이후 미얀마는 심각한 의료인력 부족 위험에 직면한 57개 위기국가 중 하나로 이름을 올렸다(Brennan 2017; Lintner 2020). 군부통치 하 미얀마의 정부 총지출 대비 보건지출 비율은 3%에도 미치지 못하여, 주변의 태국(6.1%), 중국(5.6%), 인도(6.1%), 캄보디아(12%) 등의 국가들과 비교하는 것조차 무색한 수준이다(Stover et al. 2006: 1). 무려 40%에 이르는 국방비 지출 비율과 비교하면 그 불균형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국가 안보 수호를 존립명분으로 강조해 온 군부의 안보의식 안에 국민의 건강은 거의 고려되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일면이다. 개혁개방이 본격화된 2011년 이후 보건 부문에 대한 개선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결과 국내총생산 대비 0.2%로 전 세계에서 최하위를 기록하였던 미얀마 정부의 보건비 지출 비율은 2014년 가까스로 1%를 넘기는 수준으로 늘었다(MoHS 2016). 보건비 지출이 이처럼 낮은 상황에서 의료 인력의 충원이 제대로 이루어졌을 리도 없다. 2016년 보건체육부 발표 자료에 따르면 보건당국 관할 하에 있는 전국의 1,134개 공공병원에 근무하는 의사 수는 16,292명, 간호사 수는 36,054명이고, 그나마도 2006년 이래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다. 장시간 근무와 업무 과중, 열악한 근무환경과 낮은 보수 때문에 의료 종사자들이 공공의료 부문을 기피하고 있는 것이 주된 원인이다. 민간부문 및 해외로의 두뇌 유출이 늘고 있어 공중보건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어려움이 더욱 큰 형편이다(Yu Mon Saw et al. 2018). 사정이 이러하니 코로나19 확산 사태에 대한 대응이 적절히 이루어지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사스 등 아시아지역을 휩쓴 주요 감염병 위기를 경험하지 않은 탓에 감염병 대응체계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더 문제다. 당시엔 국제사회로부터의 오랜 고립이 가져다 준 거의 유일한 이점이었을 것이나 현재로선 그러한 경험의 부재조차 아쉬운 형편이다. 검사와 치료에 필요한 자원, 즉 의료 인력과 물자, 시설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처지에서 강구할 수 있는 최상의 방책은 예방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형편을 의식하여 미얀마 정부는 시민들에게 코로나19의 위험성을 알리고 예방 수칙을 전달하는 캠페인에 힘을 쏟았는데, 아웅산수찌가 직접 나서 손 씻는 방법을 시연하고 마스크 만들기 경연대회를 개최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이에 대한 시민들의 협조도 잇따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 곳곳에 손을 씻을 수 있는 설비가 자발적으로 설치되어 정부의 코로나19 예방 캠페인을 도왔다. 하지만 방역 역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만큼 코로나19에 대한 미얀마 정부의 대응은 시종일관 지역 봉쇄(lockdown)와 이동 제한과 같은 통제조치에 의존하고 있는 형편이다. 첫 확진 사례가 보고된 초기부터 미얀마 정부는 항공편 및 육로를 통한 입국 제한을 통해 외부로부터의 바이러스 유입을 막는 한편 감염 사례가 많이 발생한 지역들을 대상으로 봉쇄령과 통행금지령을 내려 지역사회 감염을 막는 데 주력하였다. 봉쇄령이 내려진 지역의 경우 직장 출근과 필수품 구입, 그리고 병원에 가기 위해서가 아니면 집밖 출입을 자제할 것을 당부하였고, 차량을 이용할 때도 운전사 외에 허용된 인원 이상이 탑승할 수 없게 하였다. 부득이하게 허용된 것보다 많은 인원이 탑승해야 할 경우엔 거주지 관할관청의 승인을 거쳐야만 한다. 밤 10시부터 이튿날 새벽 4시까지 야간통행금지령도 내려졌다. 이후 통금 시간은 자정부터로 조금 완화되었지만 종교행사 등을 통해 집단 감염 사례가 출현할 때마다 지역 봉쇄령과 함께 통행금지령도 계속 연장되고 있는 상황이다(Kyaw Soe Htet 2020; Mckenzie 2020). 국내 거리두기 조치를 비롯한 코로나19 방역 조치의 강도로 보면 미얀마는 동남아 국가들 가운데서도 상당히 높은 강도의 통제조치를 실시한 국가 중 하나로 꼽힌다.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각국 정부가 내놓은 대응 조치를 수치로 환산하여 국가별 비교를 가능케 해주고 있는 옥스퍼드 연구팀의 자료에 따르면 미얀마에서 정부 대응강도가 최고 수준에 이르렀을 때의 환산 수치는 86.11(최고=100)로, 초기 국면이었던 4월 17일부터 5월 3일까지 이 수준이 유지된 것으로 확인된다. 이 기간 중의 조치 내용을 보면 전체 휴교, 필수업종 외 직장 폐쇄, 공공행사 취소, 10명 미만으로 대중모임 제한, 대중교통 운행 중단, 재택 명령, 출입국 제한, 국내 지역 간 이동제한 등으로, 통제조치와 관련한 모든 항목들이 강도 높게 실시되었음이 확인된다. 옥스퍼드 연구팀에서 정부 대응강도 비교를 위해 구성한 항목은 세 가지로, 각종 통제조치(C), 경제정책(E), 보건정책(H)이다. 각 항목들은 다시 세부지표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통제조치의 경우 8개 지표(학교 폐쇄, 직장 폐쇄, 공공행사 취소, 대중모임 제한, 대중교통수단 운행 중지, 재택 명령, 국내이동제한, 출입국 제한)로, 경제정책은 4개 지표(소득지원, 채무 경감, 재정조치, 국제 원조)로, 보건정책은 6개 지표(공공홍보 캠페인, 진단검사 정책, 밀접 추적, 보건부문 긴급투자, 백신투자, 안면보호구 착용 의무)로 세분되어 있다. 미얀마의 경우 두 차례에 걸쳐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긴급생계지원금이 투입된 것과 보건정책에서 5월 14일부터 외부 활동 시 마스크 착용이 의무화된 것을 제외하고는 C와 E 항목은 거의 같은 수준을 유지하여, 대응강도 변화는 거의 전적으로 통제조치와 관련해서만 나타나고 있다(OxCGRT 사이트 참조). 대규모 종교 모임으로 인한 집단 감염 사태를 경험한데다 태국과 중국 등지로부터 자국민 이주노동자들이 대거 입국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미얀마 정부의 지역사회 방역 전략은 이처럼 강도 높은 통제조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광범위한 검사와 방역을 위한 자원할당 없이 통제조치에만 의존해서는 방역의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오히려 시민들은 통제조치가 초래한 여러 형태의 부작용에 노출되어 있는 실정이다. 강도 높은 통제조치에 의존한 방역 관리의 사회경제적 영향, 특히 저소득층의 생계와 안전에 미치는 충격은 이미 전 세계 곳곳에서 보고되고 있다. 빈곤지수가 높은 미얀마에 대해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더욱 크다. 감염 확산 초기 중국을 비롯하여 주요 교역 상대국이 봉쇄 조치를 내림에 따라 미얀마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제조업과 관광업 부문에 대한 타격이 크다. 첫 확진 사례가 발생하기 전부터 중국으로부터 원자재 공급이 중단됨에 따라 봉제업 등 주요 산업부문의 생산이 중단되었고, 팬데믹 전개 속에서 유럽 등지로부터의 주문 자체가 급감하자 상당수 공장들이 휴업하거나 아예 문을 닫고 미얀마로부터 빠져나갔다. ILO 보고에 따르면 2020년 5월 18일 기준 공식 등록된 제조업체들 가운데 5,100개 사업장이 코로나19로 인해 임시 휴업에 들어가 이들 사업장에 고용된 노동자들 129,000여 명이 실업 상태에 처해 있다(ILO 2020). 몇 달째 임금을 체불하고 있던 일부 공장들은 이 사태를 틈타 하룻밤 사이 공장 문을 닫고 야반도주하는 일까지 발생하여 가뜩이나 어려운 노동자 가구의 생계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킨다. 이에 노동자들이 정부당국에 휴업이나 폐업 신청을 하는 공장들을 대상으로 실사를 진행해 줄 것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지만, 원자재 부족과 주문량 급감이라는 현실적 어려움이 자리하는 만큼 제조업체들의 휴ㆍ폐업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며, 그에 따른 대규모 실업 사태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코로나19 사태가 야기한 대규모 실업 사태가 노동자 가구의 생계는 물론 안전까지 위협하고 있음은 주요 발병지역의 분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양곤의 흘라잉따야(Hlaingthayar), 쉐비따(Shwepyithar), 인세인(Insein), 띤간준(Thinganzun) 등이 그러한 지역들로, 이들 지역은 코로나19 확산 초기 국면부터 미얀마 정부가 실시한 부분 봉쇄의 대상 지역으로 줄곧 이름을 올리고 있다. 공장 노동자들을 비롯하여 저소득층 및 소수민족 밀집 거주지역이기도 한 이들 지역의 거주환경은 거리두기는 고사하고 기본적인 위생시설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을 정도로 열악하다. 실업과 휴교, 통제조치로 인해 가구원 전원이 임시 가건물에 가까운 비좁은 공간 안에 갇혀 지낼 뿐 아니라 가구 간 거리도 확보되지 않아 감염 확산의 위험은 그만큼 더 커진 상태다. 9월 들어서는 주요 제조업 부문의 조업 중단 명령까지 내려진 상태라 방역을 위한 봉쇄조치가 이들 취약계층의 생계와 안전에 미칠 타격의 강도와 범위는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관광업에 미친 타격도 제조업 부문 못지않다. 팬데믹 사태를 맞아 국제 관광이 전반적으로 급감한 데 따른 것이어서 미얀마 정부의 출입국 제한 조치를 탓할 일만도 아니다. 제조업 부문에 대한 충격이 주로 양곤지역에 한정되는 것과 달리 관광업에 대한 타격은 경제 여파가 전국적인 수준으로 확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요 관광지가 지역적으로 널리 분포하고 있는 까닭이다. 특히 별다른 생계 원천 없이 관광수익에 의존해온 소수민족 거주지 지역민들에 대한 타격은 더욱 클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한 경기 침체와 시민들의 생계 위협에 직면하여 미얀마 정부는 4월 27일, 코로나19경제구호계획(CERP, COVID-19 Economic Relief Plan)을 수립하여 공중보건 및 경제구호 조치에 나섰다(MoPFI 2020/04/27). 거시경제 환경 개선, 투자 및 교역, 금융 부문의 개선을 통한 민간부문에 대한 타격 완화, 노동자 가구 및 시민들에 대한 지원, 보건의료체계 강화 등을 골자로 하는 7대 목표와 10대 전략, 36개 실행계획과 76개의 조치로 구성된 이 계획을 위해 정부는 세계은행(IBRD/IDA)을 비롯하여 아시아개발은행(ADB), 국제통화기금(IMF)의 국제금융기구와 일본 등으로부터 12억 5천만 달러에 이르는 대출을 받아 기금을 편성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봉제업, 호텔관광업, 중소기업에 대한 1% 대출이자 제공 상환기한 연기, 면세 혜택 등을 제공하는 한편 최하위 소득그룹을 우선 대상으로 두 차례에 걸쳐 한화 약 1만 5천에서 2만 원 상당의 특별재난지원금을 배포하였다. 하지만 경제 활동 전반이 중단되고 기업이나 시민들에 대한 타격이 장기화되어가는 가운데 이 같은 지원책이 위기 극복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다(Gan et al. 2020; Nwet Kay Khine 2020).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 타격을 완화하기 위해 정부가 제공한 당근 이 보잘 것 없었던 데 반해 방역 수칙을 준수하도록 휘두른 채찍 은 지나치게 가혹했다. 지역 봉쇄와 통행금지 조치, 마스크 착용 의무 규정을 위반하는 데 대한 처벌 강도가 너무 커서 감염병 대응에 역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가 여기저기서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Article 19 2020; Human Rights Watch 2020; Nwet Kay Khine 2020). 휴먼라이츠워치(Human Rights Watch)에 따르면 2020년 3월 말부터 미얀마에서 방역 수칙을 위반한 혐의로 최소 500명이 1개월에서 1년 사이의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마스크 착용 위반혐의로 벌금형에 처해진 사람들의 수는 이보다 훨씬 더 많다. 국제인권법에서는 심각한 공중보건 비상 상황에서 일부 권리에 대한 제한이 정당화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긴 하나 이러한 조치가 과학적 증거에 근거하여 합법적으로, 그리고 범위와 기간이 제한되어야 하며 자의적이거나 차별적이지 않아야 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재난관리법(National Disaster Management Law), 감염병 예방 및 통제에 관한 법(Prevention and Control of Communicable Diseases Law) 등 다양한 형법 조항을 근거로 지자체마다 자의적으로, 차별적으로 부과된 처벌 내용은 이러한 원칙을 벗어나 있다(Human Rights Watch 2020). 엄격한 처벌이 불러온 방역의 역효과보다 더 염려스러운 것은 봉쇄로 인해 가뜩이나 어려운 처지에 빠진 시민들이 수감이나 벌금형 등으로 인해 한층 더 어려운 처지로 내몰리고 있는 점일 것이다. 미얀마 정부의 통제조치는 가짜뉴스가 유발할 공황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인터넷 사용을 제한하는 형태로도 나타났다. 4월에는 휴대전화의 심(SIM) 카드를 일제히 재등록케 하여 인터넷 사용자의 신원을 단속하는 조치도 내렸다. 이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도 고조되어가는 상황이다. 이에 250여 개 시민사회단체가 비상시의 통제되지 않는 권력의 활용이 야기할 수 있는 인권침해와 시민들의 삶에 미칠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해 경고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Nwet Kay Khine 2020). 이보다 더 심각한 사례는 미얀마 정부가 2019년 6월부터 인터넷을 차단하고 있는 여카잉주와 친주의 9개 묘네(township)의 상황이다.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 위기 상황에서 정보에 대한 접근성은 미얀마와 같이 방역 역량이 부족한 국가에서는 특히 중요하다. 이들 지역을 근거지로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반군들에게 정보가 입수되는 것을 차단하고 허위정보로 인해 갈등이 심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도입된 이 조치로 인해 해당 지역 주민들이 겪는 고통은 매우 심각하다. 외부 소식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오히려 그릇된 정보들이 더욱 활개를 쳐, 코로나19에 감염되면 사이클론이 지나치는 섬에 유폐될 수 있다는 소문이 떠돌아 격리시설을 이탈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국제인권단체 및 시민사회의 촉구에 따라 5월부터 인터넷 차단은 해제되었지만 속도가 현저히 느린 2G, 3G 서비스만이 제공되고 있어 불편은 여전하다(ICJ 2020/04/30; Kyaw Hsan Hlaing and Fishbein 2020).코로나19 연대: 방역 위기가 가져다준 새로운 기회 의료 인력과 시설, 물자, 검사능력과 격리시설 등 방역 관련 자원이 전반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미얀마 정부는 대규모 확산의 우려가 있다고 인지한 집단에 역량을 총동원하는 선택과 집중 전략으로 방역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경제활동을 비롯한 사회생활 전반이 중단되어 생계 위협을 더하는 상황이다. 저소득층 및 사회적 취약계층, 특히 군과 반군의 무장충돌로 인해 고향을 잃은 채 실향민 캠프에서 살아가고 있는 소수민족 유민들에게 가해지는 충격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국가 보건의료역량의 약화가 시민들의 건강은 물론 사회생활 전반에 미치는 파장이 얼마나 심대하고 광범위할 수 있는지를 미얀마보다 더 잘 보여줄 수 있는 사례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19 위기 상황이 마냥 비관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코로나19의 위험성과 이에 대한 미얀마의 취약성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여 여러 이해관계자들이 코로나19 공동 대응을 위한 연대에 나서고 있는 점은 분명 희망의 전조로 볼 만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정부와 소수민족단체, 그리고 군부가 공조의 첫걸음을 뗀 것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미얀마군과 소수민족무장단체의 교전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는 미얀마 국내는 물론 국제사회로부터도 큰 우려가 제기되어왔던 터다. 분쟁상태가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로 위기에 처한 시민들의 안전을 더욱 극심한 지경으로 몰아넣을 것임은 너무도 분명하다. 이를 우려하여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3월 23일, 우리 삶을 위협하는 진정한 싸움에 모두 집중하라 며 전 지구적 휴전을 호소하기도 했다. 미얀마에서 첫 확진 사례가 보고된 날이기도 한 이 날의 호소에 가장 먼저 응답한 것은 군과 교전상태에 있던 소수민족무장단체들이었다. 먼저 3월 26일 카렌민족연합(Karen National Union)이 코로나19와 싸우기 위해 모두가 협력할 수 있도록 무조건적이고 전국적인 휴전을 선언하라고 정부에 촉구했다. 친민족전선(Chin National Front)과 까레니민족진보당(Karenni National Progressive Party)도 비슷한 성명을 발표하며 이 대열에 합류했다. 형제단동맹 (Brotherhood Alliance)으로도 알려져 있는, 최근까지도 미얀마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아라칸군(Arakan Army)과 땅민족해방군(Ta ang National Liberation Army), 미얀마민족민주동맹군(Myanmar National Democratic Alliance Army)의 연합체 역시 구테흐스의 요청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며 4월 말까지로 일방휴전 기간을 연장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호응하여 4월 1일 미얀마 주재 18명의 외국 대사들 역시 모든 분쟁 당사자들이 적대행위를 중단하고 분쟁지역에 대한 인도주의적 접근을 보장하라고 촉구하기도 했다(Crisis Group 2020/05/19; Kyaw San Hlaing and Fishbein 2020; Weng 2020). 미얀마군은 이러한 제안이 비현실적 이라며 거부했지만 5월 9일, 국내외적으로 압박이 커져가는 가운데 마침내 8월 31일까지 휴전을 선포하였다. 하지만 군의 휴전 범위는 정부가 테러리스트로 규정한 집단이 자리 잡는 곳을 제외한 모든 지역 으로 한정된 것으로서, 3월 23일 정부가 공식적으로 테러 조직 및 불법 단체로 지정한 아라칸군과 이들의 활동 근거지인 여카잉주와 친주의 일부 지역은 휴전 대상지역에서 빠진 불완전한 것에 그쳤다. 다른 소수민족무장단체와의 교전이 거의 발생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핵심 교전 상대를 배제한 것은 군의 휴전 선언이 분쟁 중단을 위한 실질적이고 의미 있는 시도라기보다는 정치적 제스처에 가까운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배경이다(Crisis Group 2020/05/19; Kyaw San Hlaing and Fishbein 2020; Weng 2020). 이후 형제단동맹은 일방휴전기간을 8월 31일로 연장하는 한편 여카잉주를 휴전 대상 지역에서 배제해선 안 된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했지만 미얀마 군은 이에 응하지 않았고 6월 세 단체가 제안한 평화협상 제안도 거부하는 등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상태다(Lawi Weng 2020; Radio Free Asia 2020/06/02). 미얀마군과 형제단동맹 간의 대치상태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긴 하지만 다른 소수민족단체와 정부가 협력하여 코로나19 대응에 나서고 있는 것은 새로운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미얀마 정부가 소수민족의료제공자들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협력을 제안한 것은 코로나19 방역과 관련하여 중요한 첫발을 내디딘 것으로서 평가할 수 있다. 4월 21일 발표된 보건체육부의 코로나19 대응계획 최종버전에는 3월 발표된 초기버전에서 누락되었던 소수민족의료제공자를 도(Regions) 및 주(States) 수준의 조정기관 안에 포함시켜 분쟁 피해 지역의 취약한 인구를 치료하기 위한 신속대응팀과 이동진료소 배치 등에 관한 도움을 받는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4월 28일에는 코로나19 예방과 통제, 치료를 위한 소수민족무장단체와의 공동대응 위원회를 구성하여 협력관계를 공식화하기도 했다(Crisis Group 2020/05/19).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구체화된 소수민족단체와의 공조는 당장의 코로나19 위기 극복은 물론 향후 국가 보건역량을 강화하는 데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집단별 편차는 매우 큰 편이지만 몇몇 소수민족무장단체들은 잘 구축된 거버넌스 구조를 갖추고 있다. 카렌민족연합(KNU)나 연합와군(United Wa State Army), 까친독립기구(Kachin Independence Organization) 등이 그러한 단체들로, 특히 카렌민족연합의 카렌보건복지부(Karen Department of Health and Welfare, 이하 KDHW)는 1956년 설립된 이래 미얀마 남동부 지역의 카렌족(미얀마어로는 꺼잉족)에게 기초보건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크게 기여해왔다. 1990년대 미얀마군의 압박 아래서 KDHW는 배낭의료팀(BPHWT, Backpack Health Worker Team), 버마의료협회(BMA, Burma Medical Association), 태국의 메타오클리닉(Mae Tao Clinic) 등의 의료단체 및 구호활동단체들과 함께 이동보건진료소 모델을 발전시키기도 했다. 오늘날 KDHW는 61개 진료소, 700여 명의 의료 인력을 통해 미얀마 남동부 전역의 인구들에게 보건 서비스를 제공해오고 있다(Davis and Joliffe 2016: 14; Si Tura and Schroeder 2018: 92에서 재인용). 카렌민족연합을 포함하여 네 개의 소수민족무장단체 보건부서와 세 개의 지역사회 기반 비정부기구(CBOs, Community Based Organizations)들의 연합체를 일컫는 소수민족보건기구(Ethnic Health Organization, 이하 EHOs)는 원래부터도 부실한 미얀마 정부의 보건서비스 전달체계에 분쟁으로 인한 차별까지 더해져 더욱 취약한 미얀마 남동부 지역에서 일차 의료 공급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왔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은 미얀마군과 소수민족무장단체 간의 무력충돌이 지속됨에 따라 미얀마 보건체계에서는 인정받지 못해왔다. 이후 2012년 떼인세인 정부가 주도한 정전협정과 2015년의 평화협상을 계기로 보건서비스 전달에 관한 협력관계가 논의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개 단체가 서명을 거부함에 따라 불완전한 채로 종료된 평화협상과 신뢰 부족으로 인해 이러한 시도는 의미 있는 결실을 맺지 못했다. 하지만 이때 이루어진 여러 시도들은 2016년 출범한 NLD 정부가 공약으로 내걸었던 보편적 건강보장(Universal Health Care)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EHOs 및 시민사회와 협력할 수 있는 토대가 되어 주었다. 2016년 발표된 미얀마 국가보건계획(Myanmar National Health Plan 2017-2021, 이하 NHP)은 그 결실로, EHOs 대표로 KDHW가 이 계획의 수립 과정에 참여하기도 했다. NHP는 소수민족보건기구를 중요한 보건서비스 공급자로서 인식하여 보편적 건강보장을 위한 국가보건체계 구축을 위해 협력하겠다는 내용을 공식화한 최초의 문서로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Si Thura and Schroeder 2018).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정부 보건당국과 EHOs가 공동대응 위원회를 구성한 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협력관계는 특히 미얀마에서 코로나19 확산과 관련하여 최대 위험요인으로 인식된 귀환 이주노동자와 분쟁으로 인해 발생한 31,2000여 명에 이르는 국내실향민(Internally Displaced People) 캠프의 방역과 치료에 더할 수 없이 긴요한 것이기도 하다. 2012년부터 시도된 정부와 소수민족무장단체 간의 보건협력 논의가 그간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좌초되었던 경험으로 볼 때 앞으로도 쉽지 않은 노정이 기다리고 있을 것임은 분명하다. 협력관계의 정치화가 자칫 코로나19 대응을 위한 공조를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정치를 배제하고 기술적 협력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Crisis Group 2020/05/19). 보건협력 논의가 정부나 소수민족무장단체의 지도부 간 평화협상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해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국가보건계획 수립을 계기로 다시 시작되어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더욱 구체화된 양자의 협력적 관계가 가져다줄 정치적 효과는 적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정부와 군의 협상의지를 불신하는 소수민족들과의 관계에서 신뢰를 구축하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코로나19 방역 위기는, 이런 점에서 정부와 소수민족 간의 관계가 얼마간 진전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정부와 소수민족집단 간에 코로나19 공동대응을 위한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미얀마 정부를 구심점으로 국제기구 및 시민사회의 연대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2017년 발생한 로힝자 사태를 계기로 여카잉주 및 분쟁피해지역 주민들이 겪게 된 인도주의 위기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은 고조되어왔다. 특히 2019년 유엔인권위원회가 발표한 보고서는 이들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미얀마군과 소수민족무장단체 모두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 인권 유린과 가혹행위의 실상을 낱낱이 드러내어 크나큰 충격을 안긴바 있다(UNHRC 2019). 코로나19 위기를 맞아 여카잉주 및 분쟁피해지역 실향민 캠프의 안전문제는 더욱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국제난민기구(UNHCR)와 유니세프(UNICEF), 국제노동기구(ILO), 국제이주기구(IOM) 등의 국제기구를 비롯하여 수많은 국내외 시민사회단체가 미얀마의 방역 지원에 나서고 있는 상황이다. 실향민 캠프에 대한 지원 활동과 함께, 이들은 특히 이주노동자들의 대규모 귀환 행렬을 맞아 국경지대 방역에 적극 협력하여 격리 수용된 이주노동자에게 식량과 마스크 등의 위생용품을 나누어주는 등의 활동을 전개해오고 있다. 이러한 활동이 자원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 미얀마 정부의 방역 관리에 큰 도움이 되고 있음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전 세계 난민 및 분쟁피해지역 인구를 위한 국제사회의 지원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미얀마 맥락에서 보자면 이러한 지원이 대대적이고 눈에 띄게, 그리고 미얀마 정부와의 공조 아래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로힝자 사태 이후 미얀마에 쏟아진 국제사회의 비난 여론은 2019년 감비아가 로힝자족에 대한 집단학살 혐의로 국제사법재판소(ICJ,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에 미얀마를 제소하면서 더욱 거세졌고, 아웅산수찌가 대표 발언자로 나서 혐의를 부인하면서 비난은 절정에 달했다. 이후 미얀마에서는 국제사회의 개입을 달가워하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사실 미얀마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원 노력은 그 역사가 오래되었고, 특히 소수민족 거주지역에 대한 보건 지원 노력은 여러 차례 시도된바 있다. 그러나 미얀마 군부는 국제사회와 소수민족 간의 직접적인 연결이 가져올 정치적 효과를 우려하여 이를 제약해 왔고, 그 결과 지원이 철회되는 일도 종종 있어왔다(Stover et al. 2007). 이러한 사정을 감안할 때 코로나19 위기는 분명히 이러한 관계가 일대 진전을 이를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해주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이루어진 소수민족단체와의 협력관계 구축, 그리고 국제사회와의 연대는 미얀마의 코로나19 방역에 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아웅산수찌가 이끄는 NLD 정부가 군부와 힘의 균형을 이루어가는 데도 큰 힘을 보태줄 것으로 예상된다. 2008년 헌법상의 제약으로 인해 권력의 분점이라고 볼 수도 없을 만큼 군부에 국가 통치에 관한 대부분의 실권을 빼앗긴 NLD 정부가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었다. 이로 인해 선거 전 공약들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소수민족 지역과의 관계는 오히려 역행하여 불신이 커져오기까지 했다. 소수민족들의 불만은 난립해있던 소수민족 정당들이 연합하는 정치과정을 부추겼고, 그로 인해 올해 11월 8일에 치러지게 될 총선의 판도도 크게 달라져 NLD의 압승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되어왔던 터다(김희숙 2020). 코로나19 방역 관리는 이러한 정치지형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다줄 것으로 예상된다. EHOs와의 코로나19 공동대응 노력은 평화협상의 실질적 진전까지 바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소수민족들의 신뢰를 조금이나마 회복하는 데는 도움이 되어줄 것이다. 국제사회의 지원 노력이 미얀마 정부의 지휘체계 아래 이루어지고 있는 점도 정부의 지도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정부를 중심으로 한 이러한 연대는 무엇보다 국가적 재난이라는 비상사태의 관리자로서 군부가 정부를 대신하여 통제 불가의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견제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이 같은 연대 움직임 속에서 군부 역시 정부에 적극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공식적으로 표명하고 있다(Thiha Lwin 2020). 군이 쥐고 있는 자원과 동원능력을 고려하면 정부의 코로나19 방역에 더할 수 없이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국내외 세력들이 모두 힘을 합쳐 코로나19 방역에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 군이 이에 협조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전시성이 크게 부각되는 군의 협력 행보는 선거를 앞둔 상황인 만큼 정치적 이점도 적지 않을 것이다. 선거는 정부와 군 모두가 힘을 겨루는 싸움이다. 어느 쪽이든 이기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힘겨루기가 코로나19 사태에 대한 대응 성과를 두고 경주하는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는 점은, 적어도 사람들의 목숨을 살리는 일이 시급한 현재로서는 무척 다행한 일이다. 2016년 수립한 국가보건계획을 통해 미얀마는 다양한 이해주체들이 참여하는 포괄적 공중보건체계를 구축함으로써 보편적 건강보장 실현을 위한 첫발을 내딛었다.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더욱 진전을 이룬 이 같은 공조는 보편적 건강보장을 향한 정부의 보건계획이 단지 구상에 그치는 것만은 아닐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해주었다. 코로나19의 위기는, 그 광범위한 타격에도 불구하고 미얀마 사회의 미래를 다시 한 번 그려볼 수 있는 더없이 소중한 기회의 장을 열어주었다. 바이러스가 가져다준 기회, 나머지는 사람의 몫이다.* 참고문헌김희숙. 2020. 미얀마 2019: 로힝자 위기 이후 국제관계의 변화와 총선을 향한 정치과정. 『동남아시아연구』 30(2): 1-37.김희숙ㆍ양영란. 싱가포르의 이원적 코로나19 방역 전략과 그 함의. 『동아연구』 39(2): 45-82.Crisis Group. 2020/05/19. Conflict, Health Cooperation and COVID-19 in Myanmar. https://www.crisisgroup.org/asia/south-east-asia/myanmar/b161-conflict-health-cooperation-and-covid-19-myanmar(검색일: 2020.09.06.)Gan, Andre, Kenneth See and Kimberly Ng. 2020. Myanmar: The COVID-19 Economic Relief Plan. Global Compliance News. May 18. https://globalcompliancenews.com/myanmar-the-covid-19-economic-relief-plan-20200504/(검색일: 2020.09.1.)Human Rights Watch. 2020/05/28. Myanmar: Hundreds Jailed for Covid-19 Violations. https://www.hrw.org/news/2020/05/28/myanmar-hundreds-jailed-covid-19-violations(검색일: 2020.09.03.)ICJ. 2020. COVID-19: Myanmar s Ongoing Internet Shutdown and Hostilities Threaten Right to Health. April 30. https://www.icj.org/myanmars-ongoing-internet-shutdown-and-hostilities-threaten-right-to-health/(검색일: 2020.09.01.)Davis, Bill and Jolliffe, Kim. 2016. Achieving Health Equity in Contested Areas of Southeast Myanmar. The Asia Foundation. https://asiafoundation.org/wp-content/uploads/2016/07/Achieving-health-equity-in-contested-corner-of-southeast-myanmar_ENG.pdf(검색일: 2020.09.11.)Kyaw Hsan Hlaing and Fishbein, Emily. 2020. To Fight the Coronavirus, Myanmar Needs a Cease-Fire in Rakhine. Frontier Myanmar. September 3. https://foreignpolicy.com/2020/09/03/myanmar-coronavirus-covid-rakhine-ceasefire/(검색일: 2020.09.06.)Kyaw Soe Htet. 2020. Health Ministry Issues Stay-at-Home Order for Seven Yangon Townships after Spike in Local Transmissions. Myanmar Times. 2020/09/01 https://www.mmtimes.com/news/health-ministry-issues-stay-home-order-seven-yangon-townships-after-spike-local-transmissions(검색일: 2020.09.02.)ILO. 2020/06/22. COVID-19: Impact on Migrant Workers and County Response in Myanmar. https://www.ilo.org/wcmsp5/groups/public/---asia/---ro-bangkok/---ilo-yangon/documents/briefingnote/wcms_754998.pdf(검색일: 2020.09.01.) . Labour Migration in Myanmar. https://www.ilo.org/yangon/areas/labour-migration/lang en/index.htm(검색일: 2020.09.01.)IOM Myanmar. 2020. COVID-19 Response Situation Report 11. August 6. https://migration.iom.int/reports/covid-19-response-situation-report-11-21-24-april-2020(검색일: 2020.09.01.)Lawi Weng. 2020. Myanmar Rebel Coalition Calls for Military to Extend Ceasefire to Rakhine. The Irrawaddy. May 11. https://www.irrawaddy.com/news/burma/myanmar-rebel-coalition-calls-military-extend-ceasefire-rakhine.html(검색일: 2020.09.24.)Mckenzie, Baker. 2020. Myanmar: COVID-19 Updates New Stay-at-Home Orders and Mandatory Quarantine for Nay Pyi Taw. Lexology. September 4. https://www.lexology.com/library/detail.aspx?g=0c722ef1-28ee-4403-997e-b7dd089765d9(검색일: 2020.09.01.)MoHS(Ministry of Health and Sports) 2016. Myanmar National Health Plan 2017-2021. Ministry of Health and Sports, The Republic of the Union of Myanmar 2016.11.MoPFI(Ministry of Planning, Finance and Industry, Myanmar). 2020. Overcoming as One. COVID-19 Economic Relief Plan. April 27. https://www.mopfi.gov.mm/my/blog/45/11310(검색일: 2020.09.01.)Nyan Hlaing Lin. 2020. New Laboratory and Machine May Mean Wider Covid-19 Testing Health Ministry. Myanmar Now. April 21. https://myanmar-now.org/en/news/new-laboratories-and-machine-may-mean-wider-covid-19-testing-health-ministry(검색일: 2020.09.01.)Nwet Kay Khine. 2020. Hitting where It Hurts: Impacts of COVID-19 Measures on Myanmar Poor. Transnational Institute. 2020/07/06) https://www.tni.org/en/article/hitting-where-it-hurts-impacts-of-covid-19-measures-on-myanmar-poor(검색일: 2020.09.03.)OCHA. 2020. Myanmar: COVID-19 Situation Report 1-7. https://reliefweb.int/updates?primary_country=165 source=1503 format=10.5#content(검색일: 2020.09.03.)Radio Free Asia. 2020. Myanmar Army Rejects Cease-Fire Proposal from Arakan Army and Allies. 2nd June. https://www.rfa.org/english/news/myanmar/ceasefire-proposal-06022020180245.html(검색일: 2020.09.24.)Shoon Naing and Zaw Naing Oo. 2020. Myanmar Races to Build Field Hospital as Coronavirus Surge Stretches Health System. Reuters. September 16. https://uk.reuters.com/article/us-health-coronavirus-myanmar/myanmar-races-to-build-field-hospital-as-coronavirus-surge-stretches-health-system-idUSKBN2671HC(검색일: 2020.09.21.)Si Tura and Tim Shroeder. 2018. Health Service Delivery and Peacebuilding in Southeast Myanmar. in Justine Chambers, Gerard Mccarthy, Nicholas Farrelly, and Chit Win, eds. Myanmar Transformed? People, Places and Politics. Singapore: ISEAS Publishing.Stover, Eric, Voravit Suwanvanichkij, Andrew Moss, David Tuller, Thomas J. Lee, Emily Whichard, Rachel Shigekane, Chris Beyrer, David Scott Mathieson. 2007. The Gathering Storm: Infectious Diseases and Human Rights in Burma. California and Baltimore: Human Rights Center,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and Center for Public Health and Human Rights, Johns Hopkins Bloomberg School of Public Health.Thiha Lwin. 2020. Myanmar Military Offers More COVID-19 Quarantine Beds to Civilians. The Irrawaddy. September 17. https://www.irrawaddy.com/specials/myanmar-covid-19/myanmar-military-offers-covid-19-quarantine-beds-civilians.html(검색일: 2020.09.19.)UNHRC. 2019. The Economic Interests of Myanmar Military: Independent International Fact-Finding Mission on Myanmar. UN Human Rights Council. August 5. https://www.ohchr.org/EN/HRBodies/HRC/MyanmarFFM/Pages/EconomicInterestsMyanmarMilitary.aspx(검색일: 2019/12/26).Yu Mon Saw, Thet Mon Than, Sandar Aung, Laura Wen-Shuan Shia, El Mon Win, Moe Khaing, Nyein Aye Tun, Shigemi Iriyama, Hla Hla Win, Kayako Sakisaka, Masamine Jimba, Nobuyuki Hamajima, Thu Nandar Saw. 2019. Myanmar s Human Resources for Health: Current Situation and Its Challenges. Heliyon 5(3) March 2019, e01390. https://doi.org/10.1016/j.heliyon.2019.e01390 (검색일: 2020.09.08.)Zaw Zaw Htwe. 2020. Myanmar Migrants Return from Thailand Delayed Over Travel Hassles. The Irrawaddy. April 30. https://www.irrawaddy.com/specials/myanmar-covid-19/myanmar-migrants-return-thailand-delayed-travel-hassles.html(검색일: 2020.09.01.)주요 데이터 제공 사이트미얀마 보건체육부(Ministry of Health and Sports): https://mohs.gov.mm/HomeAd Shofar: https://news.myantrade.com/Blavatnik School of GovernmentㆍUniversity of Oxford| Coronavirus Government Response Tracker: https://www.bsg.ox.ac.uk/research/research-projects/coronavirus-government-response-trackerOur World in Data. https://ourworldindata.org/coronavirusWorldometers. https://www.worldometers.info/coronavirus/ [8] 베트남의 국제노동기구 기본협약 비준 배경 및 함의 ㅣ 유민지·이창휘 작성자 동남아연구소 조회수 1219 첨부파일 1 등록일 2020.09.23 초록우리나라는 1991년 UN에 가입함에 따라 국제노동기구(International Labour Organization:ILO)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ILO의 회원국이라면 기본적으로 비준해야 할 의무사항인 기본협약(핵심협약) 4개 분야(결사의 자유, 강제노동 금지, 차별 금지, 아동노동 금지) 8개 기본협약 중에 2개 분야(결사의 자유, 강제노동 금지)의 4개 협약(87호, 98호, 29호 105호)을 우리나라는 비준하지 않은 상태이다. ILO 기본협약 비준을 두고 노 사 정 합의에 도달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나라와는 대조적으로 문재인 정부의 신남방정책의 외교 대상국 중 하나인 베트남은 공산당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총 8개 기본협약 중 7개 협약을 비준하였다. 가장 최근에는 2019년 7월 5일, 베트남 정부가 ILO 협약 제98호를 비준하였으며 올해 6월에는 제105호를 비준하였으며 사실상 공산당 국가에서 제98호와 105호의 비준은 놀라운 성과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이는 비준과 입법 동시 진행 이라는 가장 이상적인 선례였다. 선(先)비준 후(後)입법 이냐 선(先)입법 후(後)비준 이냐를 가지고 논쟁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다시금 바라보게 한다.전동연 이슈페이퍼 8호는 베트남의 최근 ILO 기본협약 비준을 이끌어낸 주역인 ILO 베트남 대표 이창휘 박사와의 인터뷰로 구성하였다. 본 이슈페이퍼는 사람중심 신남방정책은 노동이 존중되는 사회에서 꽃 필 수 있다고 보고 최근 베트남의 ILO 기본협약 제98호와 105호의 비준 과정과 함의를 ILO 베트남 대표 이창휘 박사와의 두 차례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전달하고자 한다.이슈페이퍼 8호 내려받기인터뷰를 추진하며유민지: 2019년은 국제노동기구(International Labour Organization: ILO)가 창립 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ILO는 지난해 6월 100주년 기념총회를 열고, 문재인 대통령에게 100주년 기념총회 공식 초청장을 발송했으며 대통령의 참석이 기대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기념총회 기간 동안 북유럽3개국 순방 일정이 겹치면서 대통령의 참석은 안타깝게도 무산되었다. 노동계는 이를 두고 ILO 기본협약(핵심협약)을 비준하지 못한 노동법 후진국의 대통령이 참석하기에 쉽지 않은 자리였을 것이라 말하며 정부의 지지부진한 기본협약 비준을 비판하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ILO 회원국이라면 기본적으로 비준해야 할 의무사항인 기본협약 4개 분야(결사의 자유, 강제노동 금지, 차별 금지, 아동노동 금지) 8개 기본협약 중에 2개 분야(결사의 자유, 강제노동 금지)의 4개 협약(87호, 98호, 29호, 105호)을 아직 비준하지 않은 상태이다. 사람중심경제정책을 표방하는 문재인 정부는 ILO 기본협약 비준을 노동 분야 대선 공약과 국정 과제로 내세웠다(대한민국 정책브리핑 2020년 9월 10일). 이는 우리나라가 아직 비준하지 않은 결사의 자유 기본협약(87호, 98호)과 강제노동금지 기본협약(29호와 105호)을 모두 비준하고, 이에 따른 국내법 개정을 통해 국가 위상에 걸 맞는 노동기본권 보장을 이루겠다는 것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9월에는 방한한 가이 라이더(Guy Ryder) ILO 사무총장을 만나 기본협약의 비준 의지를 밝히기도 하였다. 문재인 정부는 2019년 ILO 핵심협약 3개(29호, 87호, 98호)의 비준안과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노동조합법, 공무원노조법, 교원노조법 등 노조 3법과 병역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등 비준을 위한 절차를 밟아왔다. 그러나 20대 국회 임기 만료로 자동 폐기되었고 올해 7월에 동일 사안이 국무회의를 거쳐 다시 국회에 제출된 상태이다. 이와 같은 정부의 비준을 위한 준비는 정부의 노력을 가늠하게 하나 2019년 ILO 100주년 총회라는 상징적인 행사 이전에 비준절차를 마치지 못하였다는 점은 그 추진 의지에 의문을 갖게 한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비준되지 않았던 ILO 기본협약의 비준에 대하여 소극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정부는 ILO 기본협약이 한국의 국내법과 상충되는 부분이 있다는 이유로 국내법 개정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이는 사회적 합의 도출이 비준보다 앞서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ILO와 노동계는 선(先)비준 후(後)입법 을 주장하며 정부의 의지를 우선 천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후자의 경우, ILO 기본협약의 비준은 입법보다는 정치(政治)의 영역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며 이는 노동협약의 비준을 노동기본권이라는 인간존엄 가치의 영역으로 해석하고 있는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ILO 기본협약의 비준은 정치의 영역이며 정부의 의지로 관철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를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 찾을 수 있다. 인도네시아, 캄보디아와 필리핀은 8개 기본협약을 모두 비준하였으며, 아세안 10개국 중 미얀마, 라오스, 브루나이를 제외하고, 모든 국가들이 최소 6개 이상의 협약에 비준을 한 상태이다. 가장 최근에는 2019년 7월 5일, 베트남 정부가 ILO 협약 제98호를 비준하였으며 올해 6월에는 제105호를 비준하였다. 이로써 베트남은 제87호 결사의 자유와 단결권의 보장 협약을 제외한 7개의 기본협약 비준을 완료하였다. 사실상 공산당 국가에서 제98호와 105호의 비준은 놀라운 성과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이는 비준과 입법 동시 진행 이라는 가장 이상적인 선례로 정부 의지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낮은 임금으로 비교우위를 점하고 중국 다음으로 세계의 공장이 되어야만 했던 동남아시아에서 비준된 ILO 기본협약의 숫자가 우리나라보다 많다는 것은 우리나라가 노동기본권 글로벌 스탠다드에서 상당히 뒤쳐져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본 전동연 이슈페이퍼는 사람중심 신남방정책은 노동이 존중되는 사회에서 꽃 필 수 있다고 보고 최근 베트남의 ILO 기본협약 제98호와 제105호의 비준 과정과 함의를 ILO 베트남 대표 이창휘 박사와의 두 차례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전달하고자 한다. 제98호 협약 비준 이후인 작년 11월에 인터뷰가 수행되었으나 105호까지 비준되면서 올해 9월에 보강 인터뷰를 진행해야 했다. 이창휘 박사는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ILO에 노사관계 전문가로 참여하기 시작하여 제네바, 태국, 베트남, 중국 등지에서 근무하였고, 중국과 베트남 노사관계에 관한 학술 논문들도 발표한 바 있다(Lee, Chang-Hee 2006; Simon Clarke, Chang-Hee Lee, and Do Quynh Chi 2007). 5년 전인 2015년 9월에 ILO 베트남 사무소 대표로 부임하였으며, 베트남 사랑이 깊은 외국인으로 현지에 잘 알려져 있다. 무엇보다 최근 두 개의 ILO 기본협약에 관한 베트남의 비준을 이끌어낸 주역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인터뷰를 진행하기로 했다. 바쁘신 가운데 귀한 시간을 할애해주신 이창휘 대표께 감사드린다.이창휘 ILO 베트남 대표 인터뷰유민지(이하 민 ): 베트남에서 ILO 제98호 기본협약이 비준되었는데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이창휘(이하 휘 ): 베트남 국회가 2019년 6월 14일 ILO 핵심협약 중 하나인 단결권 및 단체교섭권에 관한 98호 협약 비준을 압도적으로 인준함으로써, ILO 핵심협약 8개 중 6개 협약을 비준하게 되었습니다. 비준과 관련된 모든 과정에 몇 년간 참여한 당사자이지만, 98호 협약 비준이 현실로 되는 날이 오게 될 줄은 몰랐어요. 비준을 주도한 베트남 정부 및 국회 담당자들도 자신들이 해낸 일에 너무 감격했고요. 결사의 자유에 관한 87호 협약 보다는 쉽지만, 98호 협약도 공산당 체제를 갖고 있는 베트남에게 비준 및 적용이 쉬운 협약은 결코 아닙니다. 중국 등 모든 구사회주의 국가들의 노동조합 내부를 살펴보면 기업 차원 노조의 지도부가 대부분 인사담당부서 간부 등 경영진에 의해 채워지고 있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98호 협약이 중점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사용자에 의한 부당노동행위의 금지 및 노동조합과 사용자의 상호 독립적인 관계입니다. 일단 98호 협약을 비준함으로써 노동조합과 사용자의 상호독립성 및 부당노동행위 금지에 관한 정책의 커다란 방향은 잡혔다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경영진이 기업별 노조 지도부의 일부를 이루는 관행은 조직적으로 문화적으로 너무나도 오랜 기간, 광범위하고, 깊게 뿌리를 내린 관행이라 이걸 실제로 개선해가는 작업은 앞으로도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민: 제98호 비준이 예상보다 빨리 이루어질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설명해주시겠습니까?휘: 베트남 정부의 발전 전략의 핵심에 자유무역협정의 적극적 체결을 통한 글로벌 통합 (global integratzion) 전략이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듯 합니다. 2019년에 1월에 발효된 CPTPP(Comprehensive Progressive Trans Pacific Partnership: 포괄적 점진적 환태평양 동반자 협정), 그리고 2019년 7월에 서명이 이루어졌고 2020년 8월 1일에 발효된 EU(유럽연합)와의 FTA(자유무역지대협정)에 주목해야할 듯 합니다. 두 FTA는 노동 및 환경권을 대폭 강화한 이른바 신세대 FTA이고, 두 FTA는 모두 ILO 핵심협약 비준(EU) 혹은 ILO 핵심협약에 따른 노동법 및 노사관계 개혁을 참가국들에게 의무지우고 있습니다. 국가발전 전략 차원에서 당과 정부가 글로벌 통합 전략을 채택했고, 그 핵심에 최대 시장인 북미, 태평양, 유럽을 아우르는 FTA 가입이 놓인 이상, ILO 핵심협약 비준 및 적용은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된 것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외부적 동력이 필요조건이긴 했지만, 외부적 요구만으로는 개혁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충분조건으로 내부적인 동력이 요구되는 것이고. 그 내부 동력은 베트남에 개혁개방을 시작한 이래 계속적으로 노동시장의 개혁을 주창해왔던 내부 개혁세력의 존재입니다. 소수파였지만, 글로벌 통합전략이 당/국가 차원에서 채택되자 이들 개혁적 소수파의 목소리가 힘을 얻게 된 것이지요. 또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동일한 공산당 일당체제이지만, 중국과 베트남에서의 실제적인 정책 결정 과정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공산당이 top down(하향식) 방식으로 정부, 인민대표대회 및 모든 사회 조직을 일사분란하게 통제하는 중국과 비교하면, 베트남은 정부, 국회, 사회단체가 비교적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정치적 사회적 공간이 열려있는 편입니다. 이러한 공간이 있기 때문에, 외부적인 환경이 변화하거나, 어떤 기회가 오면, 소수파인 개혁세력도 자기들의 아젠다를 관철시킬 수 있는 것이지요. 여기에는 집단지도체제가 관철되고 있는 베트남 공산당 내부의 독특한 의사결정과정도 한 몫을 하고 있고요. 즉 서로 다른 견해를 지닌 세력들이 조용하게 서로 경합하고, 설득하는 그런 과정이 커튼으로 가려진 실제 의사결정과정에 존재하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 불가능해 보이는 ILO 핵심협약 비준도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추가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국부인 호치밍의 독특한 사상과 위치입니다. 호치밍은 동시대의 공산주의 지도자인 마오, 스탈린, 김일성 등과는 매우 다른 사상의 궤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호치밍은 1910년대 런던 체류 시절에 일찌감치 노동운동과 연결이 되었고, 공산주의로 전환한 1920년 이후에도 자유(liberty)와 평등이라는 보편적인 인권 사상을 끝까지 견지했던 사람이고, 1919년 파리평화회의에서 베트남 인민에게 결사의 자유를 허용할 것을 요구하는 편지를 쓰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이런 호치밍의 폭넓은 사상적 배경은 현 세대의 지도자들이 방향 전환을 모색할 때 비교적 넓게 선택할 수 있게 해주는 측면이 있지요. 저는 ILO 베트남 대표로 부임한 이후, 아주 일관되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결사의 자유는 외부에서 들어온 사상이 아니고 바로 호치밍의 일관된 사상이었다고 당과 정부의 지도자들에게 이야기해왔고, 그런 접근이 상당한 호소력이 있었던 듯합니다.민: 노사정 합의를 이끌어 내는데 주도적인 역할은 누가 담당했는지요? 정부와 노동조합의 경우 단일 조직인 반면, 사측은 회원사와 기업들의 대표성을 가지는 다양한 조직으로서 여러 목소리가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글로벌 가치사슬/글로벌 생산 네트워크에서 다양한 층위의 기업들이 있고 다양한 목소리가 있었을 텐데, 이를테면 삼성 상무가 베트남 국회에서 결사의 자유가 사회혼란을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를 표했다는 보도(한겨레신문 2019.06.26)도 있었습니다만, 합의가 원만하게 이루어진 배경은 무엇이었을까요?휘: 일단은 당, 정부 및 국회의 핵심 정책 결정자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2000년대 초반 이후 노동법 및 노사관계 개혁을 구상해온 개혁파들이 소수파이긴 하지만 당, 정부 및 국회에 존재해 왔습니다. 특히 2005년 이후 법의 틀에서 벗어난 파업(wildcat strike) 건수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이런 현상은 현존하는 노동조합 체계의 대표성 결여에 기인하는 것이고, 결사의 자유를 인정하는 방향의 노동법 개혁 및 노사관계 개혁이 없이는 해결할 수 없다는 인식이 노동사회정책을 다루는 핵심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기업들의 태도나 입장은 매우 다양하지요. 일단 미국 및 유럽 다국적 기업들은 대체로 ILO 핵심협약을 자신들이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 정책에 반영하고 있는 경우가 많고, CPTPP 및 EU FTA의 수혜자들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개혁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면서 자신들 밑에 있는 베트남 하청기업들에게도 그런 것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물론 말 과 실제 행동 사이에는 일정한 괴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요. 동아시아 다국적 기업들, 특히 한국과 중국계(타이완 포함) 기업들은, 뭐, 제가 말씀 안 드려도 짐작하실 수 있을테고요. 베트남의 모든 사용자들을 대표하는 베트남상공회의소(Vietnam Chamber of Commerce and Industry)는 개혁에 찬성하는 입장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노동조합연맹(Vietnam General Confederation of Labour)의 경우는 훨씬 미묘합니다. 일단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2014년 11월에 당시 노총 위원장이 TPP(환태평양동반자협정) 및 결사의 자유에 관한 기본적인 지지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이 막판 TPP 협상을 물꼬를 열었다는 점입니다. 공산당 일당 국가이고 그 국가가 TPP를 추진하고 있지만, 만약 노총이 끝까지 반대할 경우에는 당시 TPP 협상팀은 아마 노동권 문제에 걸려 더 이상 협상을 진전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노총위원장이 공개지지를 표명하면서 물살이 빨라진 것이지요. 하지만 노총 내부를 들여다보면 훨씬 복잡합니다. 기본적으로 새로운 독립노조가 출현할 것이라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있지만, 어떻게 새로운 상황에 대처할 것인지 등 많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월급 1%에 해당하는 노동조합비 이외에 사용자에게 징수해왔던 월급 2%에 해당하는 노동조합지원비가 뜨거운 감자입니다. 사용자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어려워진 기업 사정을 들며 사용자가 지불하는 노동조합지원비를 폐지할 것을 요구하고 있고, 또 한편에서는 이 어마어마한 규모의 지원비를 새롭게 등장할 독립노조와 나누어야 한다는 논의도 있거든요.민: 올해 6월 베트남은 제 105호 협약(강제 노동 폐지 조약)도 비준하였습니다. 이는 군 대체복무 와 관련하여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ILO의 해석과 차이를 보이면서 가장 마지막 비준 협약이 될 것 같은데요. 베트남은 105호 비준 과정에서 어떠한 정치적 논점이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설명해주시겠습니까?휘: 105호의 경우는 기술적으로는 또 다른 강제노동 핵심협약인 29호나 결사에 자유에 관한 87호 협약과 비교해서 매우 간단한 협약입니다. 그런데 정치적으로는 그리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105호의 핵심적인 요구사항은 노동운동 등과 관련되어 수감된 양심수에 대해서 감옥에서 노동을 강제로 부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강제노동을 부과할 수 있는 수감자 리스트에서 이들을 제외하면, 간단히 기술적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양심수의 존재를 인정해야하는 정치적인 어려움이 있지요. 그래서 비준 과정에서 노동부가 나서서, 공안부 및 법무부를 설득하여, 형법 및 그 시행령을 고치는 작업을 하는 힘든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저도 이것이 과연 가능할까 반신반의했는데, EU 베트남 자유무역협정을 통과시켜야 한다는 국가적 과제를 등에 업은 노동부의 설득으로 결국 비준이 되었지요. 2020년 6월 8일 아침 국회는 먼저 EU 베트남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비준 찬성투표를 한 뒤 곧 바로 ILO 105호 협약 비준 찬성투표를 했습니다. 이러한 순서는 EU측에 EU 베트남 자유무역협정의 준수사항을 바로 이행했다는 신호를 보이기 위해 기획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98호 및 105호 비준 과정을 보면서 가장 감탄했던 것은 베트남 정부의 뛰어난 외교능력이었습니다. 외교역량이 국가경쟁력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실감했습니다.민: 이제 베트남은 제87호의 비준만 남겨두었습니다. 결사의 자유 협약의 비준은 공산당 체제에서 부담스러울 수 있을 것 같은데, 비준 전망을 어떻게 보시는지요?휘: 결사의 자유에 관한 87호 협약 비준안은 2023년에 제출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98호 협약이 노동조합과 사용자 사이의 상호 독립성에 관한 것이라면, 87호 협약은 노동조합이 국가/정부의 개입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치체제의 성격을 고려한다면 쉽지 않은 과제이지요. 노동시장에서의 결사의 자유와 공산당 체제가 과연 양립 가능한가라는 이론적 질문도 있을 수 있고요.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점은 2019년 11월말에 채택된 개정 노동법이 이미 결사의 자유 원칙을 기업 차원에서 허용하기로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2021년 1월 1일에 법안이 발효되면 그때부터 기업차원 복수 노조가 가능해지는 것이지요. 87호 비준 여부는 이렇게 도입된 기업차원의 결사의 자유에 기반을 둔 새로운 노사관계 시스템이 순조롭게 작동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고 보입니다. 만약 새로운 시스템이 커다란 불안정화를 초래함이 없이 부드럽게 안착한다면, 2023년의 87호 협약 비준도 현실이 될지도 모르지요. 98호 협약 및 87호 협약은 노동부 차원에서 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결국 정치국의 결단이 필요한 사안입니다. 앞으로 정부나 국회뿐만 아니라, 당 지도부와도 많은 대화를 나누어야겠지요.민: 마지막으로 베트남의 최근 ILO 기본협약 비준이 대한민국에게 주는 함의가 있다면 말씀해주시겠습니까?휘: 제가 한국 상황을 잘 모르기에 무어라 비교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베트남이 98호 협약을 비준할 것이라는 것은 5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고, 결사의 자유에 대해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조차 놀라운 것이 베트남의 현실이었습니다, 몇 년 전까지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 상상과 꿈이 현실이 되었고 현실이 되어 가고 있어요. 그런 점에서 모든 이해당사자들이 자기들의 이해관계를 조금 옆으로 치워놓고 자유로운 상상을 통해서 미래를 함께 만들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꿈같은 이야기 로 답변을 대신해야할 듯합니다.인터뷰를 마치며: 노동존중 사람중심 신남방정책을 위하여유민지: 공산당 일당체제라는 정치제도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은 2019년과 2020년 각각 ILO 기본협약 98호와 105호를 차례대로 비준하는 성과를 이룩하였다. 아래로부터의 개혁의 목소리, 글로벌 통합 전략, 그리고 호치민의 자유와 평등사상은 베트남의 신속하고 원만한 비준을 이끌어낸 요인이었다고 이창휘 소장은 설명하고 있다. 물론 내부 진통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개개인의 단기적 이익보다 공동체가 꿈꾸는 미래에 대한 합의가 베트남의 저변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상상해본다. 그리고 그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은 정치의 영역이라는 사실을 다시 되새길 필요가 있다.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도 베트남과 크게 다르지 않다. 노동계의 요구를 차치하더라도 유럽연합이 FTA 규정 위반 여부를 두고 전문가 패널에 의견서를 제출하였다는 사실은 우리에게도 ILO 기본협약의 비준은 매우 다급한 현실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다만 언제부터인가 노동은 비용이고 기업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믿음이 확고해지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노동의 의미가 퇴색되어 가고 있으니 사회적 합의라는 것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1970년대 20퍼센트 중반이었던 노동조합 조직률은 지속적으로 감소하여 이제는 10퍼센트를 겨우 웃돌고(1977년 25.4%, 2018년 11.8%, 국가지표체계), 노동형태의 다양화에 따라 노동자의 정치적 대표성도 미약해지고 있으니 정부의 리더십 없이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 ILO 기본협약 비준을 (마치 가치중립 이라 여겨지는) 법과 경제의 영역으로 치부하고, 사회적 합의를 기다리고 , 유럽연합에 방어적 태도로 일관하는 정부의 모습이 베트남과 가장 크게 대비되는 지점이지 않을까. 베트남 사례를 통해 기본협약 비준은 온전히 정치 영역임을 그래서 정부의 리더십이 그 무엇보다 중요함을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 정부가 추진하는 신남방정책의 사람(People), 평화(Peace), 번영(Prosperity)의 3P를 하나로 연결할 수 있는 키워드는 노동 이다. 노동은 사람중심이라는 신남방정책이 아세안 노동 일상에 닿고 한국과 아세안의 연결성을 강화하여 성공에 이르게 할 핵심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국내의 노동문제와 아세안 국가들의 노동문제를 연결하고 노동권과 노동환경을 개선하는데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국가지표체계. 『노동조합조직률』 http://www.index.go.kr/unify/idx-info.do?idxCd=4220 (검색일: 2020.09.10.).김완. 2019. 삼성 상무, 베트남 국회서 결사의 자유, 사회혼란 부를 것. 『한겨레신문』 6월 26일.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99446.html (검색일: 2020.08.10.)대한민국 정책브리핑. 2020. ILO 핵심협약. 『정책위키: 한눈에 보는 정책』 http://www2.korea.kr/special/policyCurationView.do?newsId=148862514 (검색일: 2020.08.15.)ILO. NORMLEX: Information System on International Labour Standards. https://www.ilo.org/dyn/normlex/en/f?p=NORMLEXPUB:1: (검색일: 2020.09.10)ILO Viet Nam. 2015. Interview: Welcome Aboard New Head of ILO Viet Nam! Newsletter, ILO Country Office for Viet Nam . https://www.ilo.org/hanoi/Informationresources/Publicinformation/feature-articles/WCMS_407361/lang en/index.htm (검색일: 2020.09.10.)ILO Viet Nam. 2019. ILO 100 Years Journey for Social Justice: Shared Ideals with Ho Chi Minh. Documentary. https://www.ilo.org/hanoi/Informationresources/Publicinformation/Videos/WCMS_716586/lang en/index.htm (검색일: 2020.09.11.)Lee, Chang-Hee. 2006. Recent Industrial Relations Developments in China and Viet Nam: The Transformation of Industrial Relations in East Asian Transition Economies. Journal of Industrial Relations 48(3).Simon Clarke, Chang-Hee Lee, and Do Quynh Chi. 2007. From Rights to Interests: The Challenge of Industrial Relations in Vietnam. Journal of Industrial Relations 49(4). [ 7] 캄보디아 노동중재 사례의 감소와 노동 정치적 함의 ㅣ 박진영 작성자 동남아연구소 조회수 1311 첨부파일 1 등록일 2020.07.23 초록노동중재위원회를 포함한 캄보디아의 노사 관계 제도는 국제 사회, 특히 미국의 적극적 개입으로 2000년대 초반 그 틀이 형성되었고, 정부의 소극적 노동 정책을 배경으로 나름의 균형을 유지하며 최근까지 운영되어 왔다. 2016년 노동조합법의 도입은 노동중재위원회의 중재 건수를 급격하게 감소시킴으로써 그간 유지되어 왔던 균형에 균열을 일으켰다. 이러한 변화의 시발점은 2013/14년 노동자들의 최저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에 정치적 위기의식을 느낀 정부의 노동 정책의 변화였다. 정부와 여당은 기존 법제도의 개선과 새로운 법의 도입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식을 통해 적극적으로 노동 이슈에 개입, 통제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다. 노동자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늘리고 온정주의적인 정책을 적극 도입하여 그들의 지지와 지원을 끌어내는 한편, 노동조합의 활동을 위축시키기 위해서 노동조합법을 도입하는 등 노동운동에 대한 공세적인 통제를 실시하고 있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상승은 정부의 온정주의를 반영하기도 하나 노동자들의 집단적인 압력이 이루어낸 성과이기도 하다. 이를 노동 운동의 성과로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는 그간 국제 사회의 역할에 크게 기대어 왔던 캄보디아 노동 운동의 당면 과제이다.이슈페이퍼 7호 내려받기들어가며 캄보디아의 노동중재위원회(AC, Arbitration Council)는 2003년대 설립 이후 캄보디아 노사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노동 조건 모니터 프로젝트인 Better Factories Cambodia와 함께 노동중재위원회는 유일하게 제대로 기능하는 노사관계 제도 (캄보디아 주재 외국대사관 관계자 인터뷰 2018년 9월)라고 까지 여겨져 왔다. 그런데 2017년 이후 노동중재위원회의 중재 건수가 급격하게 감소하였다. 위원회 내부 자료에 따르면 2003년 설립 이후 2016년까지 한 해 평균 190여건의 중재를 실시하였으며 특히 2014년과 2015년에는 각각 361건과 338건에 이르렀으며, 노동조합법 시행 첫 해인 2016년에도 248건을 처리하였다. 그러나 2017년부터 급격하게 감소하여 2017년 50건, 2018년 59건으로까지 중재 건수가 줄어들었다.1) 이러한 중재 건수의 감소에 대해 중재위원회의 위상과 역할 축소에 대한 우려가 일고 있다. 이와 함께 노동법원을 도입하려는 정부의 움직임은 노동중재위원회의 존립 근거를 위태롭게 하기까지 하였다. 실제 미국 정부는 2003년 이후 지속되었던 중재위원회에 대한 재정 지원을 2019년 중단하기로 결정하여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2) 그러한 결정에는 트럼프 행정부 내부의 정치적 상황과 함께 중재 건수의 급격한 감소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중재위원회는 보고 있었다(중재위원회 관계자 인터뷰 2019년 1월). 이러한 변화에 대해 혹자는 캄보디아의 노사 관계가 성숙하여 노사 분규가 줄어들었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이러한 주장으로는 그 급격한 변화의 추이를 충분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2016년 도입된 노동조합법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여겨진다. 본고에서 필자는 현지 조사 과정에서 입수한 자료를 이용하여 노동조합법이 노동쟁의 중재 사례 수 변화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볼 것이다. 나아가 중재 건수의 변화를 캄보디아의 산업화 과정과 노사관계 제도의 도입 및 발전을 둘러싼 사회, 정치적 맥락과 연관지어 살펴볼 것이다. 즉, 노동 중재 사례 수의 축소는 단순한 수치의 감소뿐만 아니라 더 커다란 정치, 사회적 맥락의 변화 과정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제시하고자 한다.캄보디아의 노사분규 조정 제도와 노동조합법의 영향 캄보디아 노사분규 조정제도는 작업장 단위의 협상(negotiation), 노동부에서의 조정(conciliation), 노동중재위원회에서의 중재(arbitration)의 세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캄보디아 노동법(제300조~제317조)은 개별 분규와 집단 분규를 구분하여 정의하고 처리 절차를 달리하고 있다. 개별 분규는 사용주와 노동자 개인 혹은 다인과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근로계약서, 단협, 노동법의 해석이나 적용과 관련된 분쟁으로 정의한다. 집단 분규는 하나 또는 일인 혹은 다인의 사용주와 몇 명의 노동자 간 노동조건, 노동조합의 권리 행사, 사업장 내 노조 인정, 노사 관계 등과 관련된 것으로, 기업의 효율적 운영이나 사회 안정을 위태롭게 할 만한 이슈를 둘러싼 분쟁으로 규정된다. 개별 분규와 집단적 분규 모두 노동부에 조정 신청을 할 수 있는데, 조정 과정에서 합의에 이르지 못한 집단 분규만이 노동중재위원회로 이관되게 된다. 노동조합법 도입 이전까지 노조가 개입되어 있는 경우 통상적으로 집단 분규로 조정을 신청할 수 있었다(노조 간부 인터뷰 2018년 9월).1) 노동중재위원회의 역할과 현 상황 노동중재위원회는 노사분규를 다루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위원회는 노사 양측에서 높은 공신력을 얻고 있는데 이는 부패가 만연한 것으로 비판받고 있는 캄보디아 공공 기관에서 극히 예외적인 사례로 인정받고 있다. 노동중재위원회의 판결 결과는 분쟁 당사자 양측 모두가 동의하는 경우에만 법률적인 구속력을 가진다는 점에서 그 영향력이 제한적이기는 하나, 노동조합은 중재 결과를 법률 이외의 방법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노동자들은 주로 다국적 의류 브랜드인 원청 기업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고용주인 하청기업에 압력을 행사해 중재 결과를 이행토록 하는 전략에 중재 결과를 이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쟁의 해결에 있어 노동중재위원회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지 조사 과정에서 만난 주요 노조의 간부에 따르면, 노조들은 사업장에서의 협상이나 노동부에서의 조정을 중재위원회로 가기 위한 다리 역할 (노조 간부 인터뷰 2018년 11월)로 간주하고 있다. 2016년 도입된 노동조합법은 노사 분규 조정 절차에 영향력을 발휘하여 중재위원회로 이관되는 사례를 축소시키고 있었다. 아래의 표는 필자가 2018년 10월 현지 조사 기간에 해당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노동부 관료를 통해 입수한 노동부 내부 데이터이다. 아래의 표는 2014년부터 2018년 9월까지 조정을 위해 접수된 노사 분규 사례수를 제시하고 있다. 이 표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노동부에 조정을 위해 접수된 사례는 2015년 1,166건으로 정점을 찍은 후 점점 감소하고 있는데, 특히 집단적 분규 사례가 대폭 감소하고 있다. 조정 절차에 접수된 전체 분규 사례 중 집단적 분규 사례의 비중은 2016년까지 70~80%에 이르다가 2017년과 2018년에는 각각 21%와 26%로 감소하였다. 이 중에도 특히 노동중재위원회로 이관 대상이 되는 사례인 미합의 집단 분규 사례는 2015년 586건에서 2018년 46건으로 2015년 대비 약 8%의 수준으로 감소하였다. 이는 노동부의 조정 단계에서 많은 사례가 집단적 분규가 아닌 개별 분쟁으로 접수되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조정 담당 공무원 역시 개별 분규 사례가 비정상적으로 증가하였다고 인정하고 있었다(조정 담당 공무원 인터뷰 2018년 12월). 조정 과정에서 개별적 사례로 접수되었다는 것은 조정에서 합의에 이르지 못한다고 해도 노동중재위원회에 접근할 기회가 없음을 의미한다. 위 표에서 제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2017년 노동부에 조정 신청을 한 총 603건의 사례 중 집단적 분규는 127건이었으며, 이 중 합의에 이르지 못한 70건의 사례만이 노동중재위원회로 이관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참고로, 2017년중재위원회에서 중재한 사례 수는 50건이었다. 이러한 변화를 가져온 것은 앞서 언급한 2016년 도입된 노동조합법이다. 새로운 노조법은 30%를 초과하는 노동자를 조직한 다수 노조만이 노동부에 집단 사례를 위한 조정 신청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다수의 소수 노조들만 존재하고 다수 노조가 없는 사업장의 경우 30%를 초과하는 노동자들이 지문 날인을 통해 집단적 분규 조정신청을 할 수 있는 예외를 두었다. 600여개 사업장에 3,000여개 노동조합이 난립하고 있는 캄보디아의 상황에서 대다수 노조들은 집단적 분규로 조정 신청을 하기 어려웠으며, 이들이 제소한 대다수의 조정 신청이 개별 사례로 접수되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중재위원회의 중재 사례 축소로 이어졌다.2) 노동중재 사례 축소의 영향 노동중재 대상 사례의 대폭 축소는 여러 가지 측면에 영향을 미쳤다. 우선 노동중재위원회 운영 관련 어려움을 야기하였다. 2000년대 초반 ILO와 미국 정부 등 해외의 인적 물적 지원에 기반하여 설립된 이후 미국 정부의 지속적인 재정적 지원을 받아왔던 노동중재위원회에 대한 미국 정부의 재정지원 중단 결정이 그 중 하나이다. 이후 부족한 재정은 스웨덴 정부 기금과 더불어 캄보디아 정부가 지원하기로 하였으나, 기관 운영과 관련하여 캄보디아 정부로부터의 독립성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노동조합이 그간 이용해왔던 효과적인 도구를 잃게 되었다는 점이다. 캄보디아의 노조들은 노동중재위원회의 판결을 활용하여, 원청 브랜드들에게 하청 기업에서 발생한 부당 노동행위 구제를 위해 개입하도록 요구하는 국제캠페인을 전개해왔다. 위원회의 판결은 그 법적 구속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중재위원회의 공신력과 중립성, 그리고 전문성 덕분에 현지 노사뿐만 아니라 원청 브랜드들의 신뢰를 얻고 있었다. 현지에서 만난 한 유럽 의류 브랜드 관계자는 노동중재위원회의 판결이 있으면 우리는 반드시 그것을 존중하며 우리 파트너(하청기업)들도 이를 따르도록 한다 고 말하였다. 현지에서 만난 노조 간부 역시도 중재위원회의 판결 없이는 원청 브랜드들을 압박하여 하청 기업으로 하여금 노동법을 준수토록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는 특히 캄보디아 정부의 미약한 행정력과 현장에서의 노동법 위반 사례로 인해 발생하는 노사분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전략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최근의 변화는 캄보디아 노동조합의 주요 성과 중 하나였던 국제 캠페인과 브랜드에 대한 압력을 통해 즉각적이고 가시적인 성과를 얻어낼 기회를 제약하게 된다. 노동중재위원회가 이처럼 공신력을 가지게 된 배경 중 하나는 위원회가 가진 역사와 크게 관련이 있다. 다음 장에서는 캄보다이의 산업화 과정과 노사관계 제도의 도입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캄보디아의 산업화와 노사관계 제도의 도입 노동중재위원회의 도입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미국이었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지속된 내전이 끝난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시작된 경제 개발과 산업화 과정에서 국제사회의 지원은 필수적이었는데, 특히 미국은 재정적 지원뿐만 아니라 노사관계 제도 구축에 주요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내전은 전체 인구의 1/3의 사망을 초래했을 정도로 캄보디아 사회 전반을 초토화시켰으며, 특히 크메르루즈에 의해 인민의 적으로 지목되었던 지식인층의 대다수는 사망하거나 도피하여 인적 자원의 손실이 컸다. 예를 들어, 베트남이 크메르루즈를 수도 프놈펜에서 국경지역으로 밀어냈던 1979년 국내에 생존해 있던 법대 졸업생이 10명에 불과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Hall 2000: 120). 초토화된 산업 기반 및 인적 자원, 풍부하지 못한 천연 자원 등의 조건에서 캄보디아의 산업화 전략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노동집약적인 의류, 봉제업을 중심으로 한 수출 지향적 산업화 전략으로 전환되었다. 이에 따라 국제 브랜드들을 위한 하청 생산 위주의 의류 산업이 급격하게 성장한다. 1995년 20개에 불과하던 의류 공장은 대만, 홍콩,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한국 자본을 바탕으로 한 공장 설립을 통해 2000년에 190개, 2017년에 660여개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산업화 구조는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의류 산업은 최근 캄보디아 수출 재정의 90%를 차지하며 70만 명을 고용하고 있는, 제조업의 가장 큰 부문으로 성장하였으며, 고용주의 95%가 중국, 대만, 한국 등에서 온 외국인이다. 의류 산업의 성장 배경에는 미국과 유럽 시장의 관세 혜택 및 지원이 큰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미국은 클린턴 행정부 시절 캄보디아를 자유 무역을 통한 경제 성장과 노동권 보호 우수 사례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의류 공장에서의 노동 조건이 개선될 경우 미국 의류 시장의 쿼터를 늘려주는 미-캄보디아 섬유 의류 무역 협정(the US-Cambodia Textile and Apparel Trade Agreement)이 대표적이었다(Arnold and Shih 2010). 이 협정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미국은 국제노동기구(ILO, International Labour Organization)를 지원하여 노사 관계와 관련된 두 가지 제도를 만들게 되는데, 노동 조건 모니터 프로젝트인 Better Factories Cambodia(BFC)와 노동분쟁중재 기구인 노동중재위원회 Arbitration Council(AC)이 그것이다. 이 협정에 따르면, 미국은 캄보디아 의류 수출에 대한 무관세 쿼터를 매년 6% 증가시키는 것과 동시에 노동조건이 실질적으로 개선될 경우 최고 14%까지 추가로 쿼터를 늘려주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노동조건의 개선을 보장할 제도와 이를 운영할 신뢰할 만한 기관이 필요하였고, ILO가 그 역할을 담당하였다. 2001년 ILO의 의류 공장 노동 조건 모니터링 프로젝트(ILO Garment Sector Project)의 주요 목적은 노동 조건 개선 여부를 미국 정보에 보고하는 것이었다. 2004년 섬유 쿼터를 규율했던 다자간섬유협정(Multi-Fiber Arrangement) 종료 이후 미국이 더 이상 섬유 쿼터를 부여할 수 없게 되자, BFC로 이름을 변경한 동 프로젝트는 국제 의류 브랜드들로 타겟을 바꾸고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와 함께 빈번하게 발생하는 노사 갈등을 규율할 제도로서 노사중재위원회가 오랜 준비 끝에 2003년 시작되었다. 전문적인 역량을 바탕으로 공정한 판결을 내리는 노사중재위원회와 더불어 신뢰할만한 국제기구인 ILO가 운영하는 BFC 프로젝트는 제3세계 노동자들의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 악명 높은 국제 의류 산업 생산구조에서도 캄보디아를 윤리적인 생산지로 브랜드화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캄보디아의 정치 상황 변동과 노동 정책1) 정치적 안정과 소극적 노동 정책 의류 수출을 통한 산업화 및 경제 발전 과정에서 외국, 특히 미국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상황에서 1990년대 이후 장기 집권을 하고 있는 훈센 총리 하의 캄보디아 정부는 노사 관계에 소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노동 정책이나 노사 관계 정책은 오랫동안 정책적인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었다. 노동 관련법의 제 개정은 물론이고, 제정된 법의 시행조차도 무기한 연기되는 일이 빈번했다. 그 예 중 하나가 2002년 제정된 사회보장법(National Social Security Law)이다. 동 법은 노동자들을 위한 사회 보장 제도를 담고 있으나, 그 시행 관련 일정이 불투명한 상태였다가 2016년에야 시행되게 된다. 캄보디아 정부는 정책을 통하기 보다는 친정부 노조를 통해 노사 관계를 안정화시키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캄보디아의 노동조합은 그 정치적 성향에 따라 세 그룹으로 구분되는데 친정부, 친야당, 그리고 정치 세력으로부터 독립적인 노조가 그것이다. 이 중 친정부 노조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데, 3,000여개의 단위노조, 120여개 노동조합연맹 중 대다수가 이 그룹에 속하며 나머지 두 그룹에 속하는 노조 연맹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친정부 노조의 지도자들에게는 정부에서 노동사안 자문위원이라는 직책이 부여되며, 친정부 노조의 경우 여타의 노조들에 비해 파업의 빈도가 현저하게 낮다(Nuon et al. 2018).2) 2013/14년 노동자 시위와 최저임금 2013년 노동자들의 대규모 시위는 정부의 이러한 소극적 노동 정책을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노동 이슈는 중요한 정치 이슈로 대두되었다. 2013년 노동자들의 대규모 시위를 촉발시킨 계기는 최저임금 인상 요구였다. 캄보디아의 최저임금은 산업 노동자들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의류 산업 종사 노동자들에게 적용된다. 최저임금은 그 명목과는 달리 노동자들이 받는 기본급이 된다. 즉, 최저임금에 몇 가지 수당을 더한 금액이 노동자들이 실질적으로 받게 되는 임금인 셈이다. 또한 의류 산업에서의 최저임금 인상은 다른 산업에서의 임금을 견인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따라서 최저임금 결정은 노동자들의 가장 큰 관심사가 되었다. 캄보디아의 최저임금이 최초로 도입된 것은 1997년으로, 노조와 협의 과정 없이 정부와 기업은 최저임금을 40달러로 결정하였다. 이후 최저임금은 부정기적으로 인상되었는데 인상의 동인은 노동자들의 시위였다. 노동자들의 시위는 최저임금을 2000년 45불, 2009년 56불로 인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2010년은 최저임금 인상 요구가 대규모로 확산된 시기였다. 2010년 노조 추산 200,000명(경영자 단체 추산 30,000명)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 이후 최저임금은 61불로 인상된다. 이는 그 때까지의 노동자 시위 중 가장 대규모였다. 2010년 이후 최저임금은 점점 주요한 사회, 정치적 이슈로 부상하였으며 2013년 총선 국면을 맞아 최대의 정치적인 사안이 되었다. 당시 야당이었던 Cambodia National Rescue Party(CNRP)는 선거에 승리할 경우 당시 80불이던 최저임금을 160불로 인상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비록 야당이 4% 차이로 선거에서 패배하였으나 이는 1990년 이후 의회의 절대 다수를 장악해왔던 집권 여당에게는 선거 패배와 마찬가지로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나 선거 이후 이어졌던 2013년 말부터 2014년 초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졌던, 최저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수십만 노동자들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는 집권 여당의 절대적인 정치적 위기로 등장하였다.3) 최근의 정치 국면과 노동정책의 변화 2014년 이후 캄보디아 정부는 다양한 제도와 정책 도입을 통해 노동자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한편 노동조합을 통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지지를 유도하기 위한 유화 정책으로 대표적인 것은 훈센 총리가 2주에 한 번씩(2018년 총선 국면에는 주 2회) 모든 공장 노동자들을 직접 만나는 자리를 마련하여 정부 정책을 선전하고 노동자들의 애로를 청취하며 직접 해결해 주는 것이다. 해당 날짜에 지정된 사업체들은 하루 휴업하고 노동자들에게 유급 휴가를 주어 행사에 참여시켜야 했다. 한 관계자의 말을 빌자면, 정부 고위 관리가 노동자들을 직접 만나는 일조차 없었던 캄보디아에서 총리가 움직이는 초유의 상황인 것이다. 훈센 총리는 이 행사에서 노동자들을 내 조카들 (nephews and nieces)이라고 호칭하며, 노동자들의 애로를 위로하고 보살피는 자애로운 모습을 연출하는 한편으로, 이 때 접수된 노동자들의 요구 사항을 직접 정책에 반영하기도 한다. 대중 행사에 참여한 노동자들에게 현금을 선물로 지불하고, 임신 여성 노동자를 위한 현금 지원을 위해 4백만 달러 이상의 예산을 책정했다고 발표하거나(The Japan Times 2018/06/15) 사업체 폐업으로 인해 퇴직금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애로 사항에 노동법을 개정하여 근속보상금제도 도입과 중간 정산 법제화한 것도 그 예이다. 법제도 개선 역시도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노동부 산하에 법률팀(Legal Team)이라는 비공식적인 특별 부서를 설치하여 해외에서 교육받거나 국제단체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젊은 엘리트들을 채용하여 이들에게 법제도의 검토 및 새로운 법안 수립의 역할을 담당하게 하였다 (담당 공무원 인터뷰 2018년 12월). 노동법을 개정하여 해고 수당(indemnity pay)을 근속 보상 수당(seniority pay)으로 변경하고 중간 정산 의무화(2018년)와 앞서 언급했던 2002년 제정된 이후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던 사회보장법(National Social Security Law)에 근거한 직장의료보험(2016년) 등도 시행된다(OECD 2017). 또한 최저임금 인상에 있어서도 온정주의적인 태도를 보여주고자 하고 있다. 즉, 노사정으로 이루어진 최저임금결정기구(LAC, Labor Advisory Committee, 2019년부터는 최저임금위원회)가 논의를 통해 결정해 정부에 승인을 요청한 금액에 정부가 일정 금액을 더 얹어 최종 인상 금액을 발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2019년 정부 발표 최저임금은 182불이었는데 이는 최저임금 결정 기구가 논의를 통해 정부에 요청한 177불보다 5불 많은 금액이었으며, 2020년 최저임금은 최저임금위원회가 요청한 187불보다 3불 많은 190불로 발표되었다. 이러한 유인책과 함께 정부는 노동조합 통제도 적극적으로 진행하고 있는데 주로 법, 제도의 틀을 이용하고 있다. 우선 2013년과 2014년에 걸친 대규모 노동자 시위와 관련하여 다수의 주요 노조 간부들을 사회 안정 저해 혐의로 기소하고, 이후에도 파업 관련하여 노조 연맹 대표를 기소하는 등의 방식으로 노조 활동을 위축시키고 있다. 노동조합 통제에 가장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법 중 하나는 앞서 언급한 노동조합법이다. 1997년 제정된 노동법 이외에는 노동조합을 규율할 법이 없는 상황에서 노동조합법의 제정은 이전에도 몇 차례 논의되었으나 모두 무산된 상태였다. 2016년 노동조합법은 노조, 특히 친정부 노조 이외의 노조들이 반대하는 상황에서도 정부의 강력한 정책적 의지로 제정되었다. 노조들은 동법이 노동조합의 설립과 운영, 해산에 정부의 개입 여지를 확대하고 노조 활동에 여러 가지 제약을 두어 노조 활동을 위축시키고 있다고 비판한다. 동법 시행 이후, 노조 설립 시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서류를 요구하거나 접수된 서류를 빈번하게 반려함으로써 친정부 노조 연맹에 연계되지 않은 단위노조들의 설립을 어렵게 하는 한편, 노조 운영 관련해서 다양한 자료와 문서를 정부에 보고토록 의무화하며, 파업 요건을 강화하는 등 노조 운영에 많은 제약을 가함으로써 노동자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내용 중 하나가 앞서 논의한 노사 분규의 협상과 조정과 관련된 내용이다. 노동조합법은 분쟁 협상과 조정 과정에서 상급 연맹의 개입을 금지하여 상대적으로 법적 지식과 관련 전문 인력이 부족한 단위 노조는 분쟁 처리 절차에서 고용주에 비해 상대적인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부분은 앞서 언급한 다수 노조 지위를 가진 노조만이 노사분쟁사례를 노동중재위원회에 제소할 수 있다는 조항이다. 소규모 노조가 난립하고 있는 캄보디아 노동 운동 상황에서 대다수의 노조들은 노사 분규를 노동중재위원회에 제소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이는 특히 캄보디아 노동운동의 전략이 작업장 내 분쟁 해결을 위해 내부 협상력보다는 국제 연대를 통한 외부의 힘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노동조합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영향력 있는 도구를 잃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그 영향이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2016년 노동조합법을 둘러싼 논란 중 하나는 노동법원의 설립이었다. 노동법원은 1997년 제정된 노동법에 처음 언급되고 있으나 설립 관련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2016년 노동조합법이 노동법원의 역할을 보다 구체적이고 포괄적으로 제시하면서부터였다. 동 법은 노동법원이 노조의 등록 취소, 노조와 사용자 단체의 해산 권한, 노조 관련 선거 관할, 파업과 직장 폐쇄의 합/불법 판단 권한 등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캄보디아 정부는 2017년 노동법원을 개원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Khmer Times 2016/07/06). 그러나 국제 사회는 부패가 만연한 캄보디아 사법 체계를 고려할 때 노동법원의 설립이 노동권을 보호하는데 도움이 될 것인가에 대해 회의적인 한편, 노동법원 설립이 중재위원회를 약화시킬 것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였다(국제기구 관계자 인터뷰 2018년 9월). 결국 캄보디아 정부는 2018년 노동법원이 필요하지 않다는 입장으로 선회하였다(The Phnompenh Post 2018/02/07).나가며 캄보디아의 사례는 국제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