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25.07.16
- 수정일
- 2025.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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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남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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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음식, 미낭까바우 그리고 서부수마트라주 | 정정훈
![[37] 음식, 미낭까바우 그리고 서부수마트라주 | 정정훈 첨부 이미지](/sites/jiseas/atchmnfl/bbs/2245/thumbnail/temp_1752630316337100.png)
초록
이 글은 2024년 전북특별자치도와 인도네시아 서부수마트라주 간의 교류 확대를 배경으로, 서부수마트라주의 주요 도시와 문화자원에 대한 이해를 목적으로 한다. 서부수마트라주는 전체 인구의 90%를 차지하는 미낭까바우족의 문화적 본산지로, 파당과 부낏띵기를 중심으로 독특한 음식문화와 전통문화를 발전시켜왔다. 특히 파당은 '파당 음식'으로 불리는 인도네시아 대표 음식의 본고장으로 인식되어 '미식의 도시'라는 상징성을 갖는다. 미낭까바우족은 강한 이슬람 신앙, 모계친족사회, 뛰어난 요리 기술을 문화적 특징으로 한다. 부낏띵기는 해발 900미터 고원에 위치하며, 1940년대 독립 전쟁 시기 임시 수도 역할을 했던 유서 깊은 도시이다. 전북특별자치도와 서부수마트라주의 교류 협력 강화는 양 지역의 서로 다른 음식문화와 전통문화를 통한 상호 이해의 폭을 넓히고, 문화를 통한 지방외교의 새로운 토대를 구축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인도네시아 서부수마트라주(West Sumatra) 대표단은 2024년 10월 24일부터 27일까지 전북특별자치도를 방문해 양 지역간 교류 확대를 위한 논의를 진행했다. 이에 앞서 2023년 양 지자체는 교류의향서를 체결했고 2025년 우호협약 체결을 앞두고 있다. 양 지자체는 상호 보완적인 산업 구조를 가지고 있어 협력 강화가 향후 두 지역의 경제성장을 위한 발판이 될 것이다.
전북특별자치도와 서부수마트라주는 물리적으로 대략 5천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그럼에도 양 지자체는 각각 한국과 인도네시아에서 음식, 전통문화, 문화정체성이 뚜렷한 지역으로 인식되는 등 유사한 측면이 있다. 양 지역의 교류는 2017년부터 시작되었지만, 서부수마트라주는 우리에게 여전히 물리적 거리만큼 낯선 지역이다. 서부수마트라주의 주요 도시와 여러 문화자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시점이다.
음식과 도시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음식은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만든, 밥이나 국 따위의 물건’으로 정의한다.1) 인간에게 필수불가결한 영양분을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음식은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음식은 인간의 삶과 가까운 지점에 있기에 다양한 문화를 만들어가는 원천이자 그 자체로 문화가 된다. 인류학자 코니한은 ‘음식은 가장 폭넓고 가장 친숙한 상태 위에 만들어진 사회조직의 산물이자 거울’이라고 한다.2) 물론 음식이 사회나 단체가 아닌 개인적인 선호와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도 있다. 이는 인간 식습관의 다양함에서 비롯되었음을 의미한다.
인도네시아의 패스트푸드 식당에서는 햄버거나 치킨 등을 제공할 때 으레 쌀밥을 함께 제공한다. 또한 프렌치프라이를 찍어 먹는 소스 역시 케찹과 함께 인도네시아 전통 양념 중 하나인 삼발(sambal)을 제공한다. 인도네시아인은 튀김 요리와 밥을 양념 소스인 삼발과 함께 먹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음식 선호는 매우 개인적인 영역이지만, 어쩌면 인간이 직면한 문화적·생태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 인류학자 해리스는 ‘세계의 요리가 지역마다 주요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각기 생태학적 제약과 기회가 다르기 때문이다’라고 역설한다.3) 결국 개인의 성향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었던 음식의 생산, 분배, 소비의 과정이 지극히 문화적 행위임을 설명한다.
2억 8천만 명의 세계 4위 인구대국인 인도네시아 역시 여러 종족의 전통에서 비롯된 다채로운 음식이 있다. 나시고렝, 미고렝, 른당, 사떼 등 매우 낯선 명칭의 요리가 ‘인도네시아 음식’으로 불리면서 인도네시아, 동남아시아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소비된다. 그렇다면 인도네시아 도시 중 ‘음식의 수도’ 혹은 ‘음식의 도시’로 불린 곳은 어떤 곳일까? 도시가 가진 여러 특징 중 왜 음식이 한 도시의 중요한 상징이 되었는지를 찾아보는 여정을 떠나보자.
인도네시아 음식을 대표하는 곳이라고 내세워도 낯설지 않은 도시가 바로 ‘파당(Padang)’이다. 파당은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큰 섬인 수마트라섬(Pulau Sumatra) 남서쪽의 서부수마트라주(Provinsi Sumatra Barat)에 위치한다. 인도네시아인에게 파당은 ‘파당 음식’이라는 의미인 ‘마사칸 파당(Masakan Pandang)’으로 인식될 만큼 음식이 도시의 중요한 상징 중 하나이다. 특히 인도네시아 전역에 위치한 파당 음식점 혹은 미낭 음식점(Masakan Minang)4)의 본고장으로 여겨진다.5)
미낭까바우족의 고향 서부수마트라의 부낏띵기
서쪽으로는 넓고 푸른 인도양을 접하고, 북쪽으로는 가파른 협곡과 화산이 있는 지역, 동쪽 과 남쪽으로는 비옥한 토지와 열대우림 그리고 넓은 호수가 있는 지역이 있다. 수마트라섬의 중 서부 연안에 위치한 서부수마트라주는 다채로운 풍경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서부수마트라는 미낭까바우족이 전체 인구의 90%를 차지할 만큼 미낭까바우족의 정신적, 문화적 본산이다. 서부 수마트라의 전체 면적은 대한민국 영토의 절반이 조금 안 되는 42,012㎢이며 2022년 기준으로 5,667,434명의 인구가 거주한다. 주도인 파당과 미낭까바우의 문화적 본산이라고 여겨지는 부낏띵기(Bukittinggi)를 비롯한 7개 시와 전통적인 물소 경주로 유명한 따나 다타르(Tanah Datar), 파사만(Pasaman) 등 12개의 군으로 구성된다.
서부수마트라 지역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14세기 중반이다. 마자파힛 왕국의 왕족이었던 아딧야와르만(Adityawarman.1347-1375)이 따나 다타르 고원 지역에 파가루융 (Pagaruyung) 왕국을 건설하였다. 아딧야와르만은 이 지역의 금 채취와 교역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였다. 파가루융 왕국이 세워지기 이전까지 이 지역은 수마트라와 말레이 반도를 지배했던 스리비자야(Srivijaya)와 말라유(Malayu) 왕국의 변방 지역이었고, 주요 무역로의 일부로 활용되었다.
미낭까바우족 이름의 어원은 대략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마자파힛 왕국은 과거부터 무역로로 이 지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호시탐탐 정복을 꾀하였다. 미낭인들은 군사적으로 열세인 자 바인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물소를 이용한 결투를 신청하였다. 자바인은 이를 받아들였고 물소에게 좋은 음식을 먹이면서 결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반해 미낭인들은 힘쎈 물소 대신 작고 며칠간 굶긴 송아지를 준비했다. 대신 송아지의 뿔에 작은 칼을 묶어두었다. 결투가 시작되었고 어미의 젖을 찾던 송아지는 물소의 배를 단번에 찔렀고 미낭인이 승리하였다.
이후 자바인은 이 지역에서 물러났고,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승리라는 의미인 마낭(Manang)과 물소를 뜻하는 카바우(Kabau)가 이들 종족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는 이야기다. 이와 달리 ‘발상지’라는 의미인 ‘피낭 카브후(Pinang Kabhu)’에서 유래했다는 어원도 있다. 물소는 여전히 이 지역에서 중요한 가축 중 하나이다. 농사일에 여전히 이용되고 여러 음식의 주재료로 활용된다. 물소를 이용한 여러 축제가 펼쳐지기도 한다. 따나 다타르 지역에서는 추수 이후 물소 경주인 파쭈 자위(pacu jawi)가 열리기도 한다.
마자파힛 왕국의 침략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지역은 과거부터 교역의 중간 기착지로 인식되었 다. 수마트라섬 최북단의 아쩨(Aceh) 지역으로부터 전해진 이슬람은 미낭인들의 주요 종교가 되었고, 17세기 들어서 파가루융 왕국은 미낭까바우족의 첫 번째 술탄인 아리프(Alif)의 지배를 받는 술탄국으로 변화하였다. 이슬람은 현재까지도 미낭까바우족의 전통관습인 아닷(Adat)과 융화되어 신앙으로서 이들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중심으로 유럽인들이 세계 곳곳을 지배했던 ‘대항해시대’ 당시 서부수마트라 역시 주요한 교역로로 주목받았다. 특히 16세기 이 지역에서 생산된 금은 당시 포르투갈에도 알려질 만큼 주요한 교역 상품이었다. 이후 16세기에서 17세기까지 서부수마트라에서 생산된 고품질의 후추는 인도, 중국, 포르투갈, 영국, 네덜란드까지 지역 지배권을 둘러싼 갈등의 씨앗이었다. 결국 1663년 네덜란드가 파당 항구를 점령함으로써 지역의 지배권과 함께 후추와 황금의 주인이 되었다.
하지만 18세기 후반 황금이 고갈됨으로써 커피, 소금, 면직물이 주요 생산품이 되었다. 당시 수마트라 지역은 여러 술탄 왕국의 지배하에 있었고, 네덜란드 식민 당국은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일부 항구나 요새를 지배하는데 주력하였다. 따라서 황금이 고갈된 서부수마트라 지역의 정치적 패권은 술탄 왕국에게 넘어갔고, 커피, 소금, 면직물의 교역은 무슬림 상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네덜란드의 이러한 식민지 전략은 19세기에 들어 변화를 맞게 된다. 동인도회사를 통해 교역로 일부를 지배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인도네시아 전 군도에 대한 지배권 획득의 열망을 드러냈다. 당시 서부수마트라는 엄격한 이슬람 신앙을 가진 성직자인 파드리(Padri)가 중심이 되어 지배권을 확립했지만, 이 과정에서 전통 관습을 지지하는 일부 주민과 네덜란드 세력이 연합하여 파드리 세력과 충돌하였다. 파드리 운동(Gerakan Padri)이라고 불린 전쟁의 초기 파드리 세력 이 파당을 비롯한 해안지역을 점차 정복해 나갔고, 네덜란드는 코크 요새(Fort de Kock)라고 불린 현재의 부낏띵기 지역으로 물러갔다.
파드리 세력은 지역주민과 결합되어 강력한 세력을 유지했지만, 결국 1832년 파드리의 지도자인 뚜안꾸 이맘 본졸(Tuanku Imam Bonjol: 이하 이맘 본졸)이 패하면서 서부수마트라 지역은 네덜란드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파드리의 지도자인 이맘 본졸은 인도네시아의 5,000루피아 화폐의 주인공인 될 만큼 인도네시아인의 존경을 받는 국가 영웅으로 칭송받는다. 본명은 무하마드 샤합(Muhammad Shahab)이지만 이명인 이맘 본졸로 주로 불린다. ‘뚜안꾸’는 근대 인도네시아 관원의 직함, ‘이맘’은 이슬람의 지도자를 의미하며, ‘본졸’은 그가 태어난 지역명이다. 따라서 그의 이름은 ‘전직 관원이었던 본졸 지역의 이슬람 지도자’를 의미한다.
네덜란드 식민당국은 당시 술탄과 영주 세력을 규합하여 민중들을 핍박하고 착취했다. 이맘 본졸은 이들의 착취가 이슬람 원리에 어긋남을 지적하면서 저항했고 네덜란드로부터 독립 의지를 보였다. 이맘 본졸의 영웅적인 저항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서부수마트라 파사만군의 본졸 마을에는 박물관(Museum Tuanku Imam Bonjol)이 건립되어 있다. 또한 본졸 마을은 적도를 나누는 경계이기도 하다. 박물관 인근에는 이를 알리기 위한 적도 기념비(Monumen Equator)가 세워져 있고 남반구와 북반구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
파드리 운동의 영향으로 네덜란드는 파당에서 북서쪽 방향으로 대략 100km의 거리에 위치 한 부낏띵기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네덜란드가 서부수마트라 지역을 완전히 점령 한 이후 부낏띵기는 파당과 함께 이 지역의 주요한 거점 도시 역할을 하였다. 높은(Tinggi) 언덕 (Bukit)이라는 뜻을 가진 부낏띵기는 해발 900m 고원에 위치하기에 연평균 25도 내외의 선선한 날씨이다. 또한 수마트라의 파리(Parijs van Sumatra)라는 별칭처럼 식민지 시대의 건축물과 광장 그리고 미낭까바우족의 전통집인 루마 가당(Rumah Gadang)이 조화롭게 도시의 전경을 이룬다.
부낏띵기 여행은 1920년대 네덜란드 여왕이 전해준 큰 시계라는 의미인 ‘잠 가당(Jam Gadang)’에서 시작한다. 광장 중앙에 위치하며 시계탑의 끝에는 루마 가당의 지붕 모양인 물소 뿔(Gonjong)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부낏띵기 도심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아흐마드 야니 도로 (Jl. Ahmad Yani)와 미낭카바우 도로(Jl.Minangkabau)는 왜 이곳이 미낭까바우족의 문화적 중 심지인지를 알려준다. 미낭까바우족을 상징하는 여러 면직물 상점, 보석 판매점 그리고 미낭 전통음식점이 줄지어 위치한다. 길을 걷다보면 동서를 가로지르는 루마 가당 건축물 형태의 림파페 다리(Jembatan Limpapeh)가 보인다. 다리의 동쪽에는 주말마다 가족 여행객으로 붐비는 동물원이 있으며, 서쪽에는 네덜란드가 건설한 코크 요새가 위치한다.
부낏띵기를 둘러싸고 있는 세 개의 높은 산과 가파른 협곡, 환상적인 경관 그리고 선선한 날씨는 이 도시를 방문하는 주요한 이유이다. 이와 더불어 인도네시아인에게 부낏띵기는 미낭까바 우족을 넘어 인도네시아의 국가 영웅으로 칭송받는 모함마드 하따(Mohammad Hatta)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하따는 1902년 8월 12일 당시 코크 요새로 불렸던 부낏띵기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학업 성취를 보였던 하따는 네덜란드의 에라스무스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네덜란드에서 반식민주의·반제국주의 성향이 강한 민족주의 청년 조직인 인도네시아 협회(PI, Perhimpoenan Indonesia)의 주요 회원으로 활동한다. 이후 인도네시아로 귀국 후에도 청년지식인이자 독립운동가로 역할을 수행해 나갔다. 결국 그는 1945년 8월 17일 수카르노와 함께 독립선언을 주도하였고 인도네시아 공화국 수립의 주역이 되었다.
다음날 인도네시아 독립준비위원회(PPKI, Panitia Persiapan Kemerdekaan Indonesia)는 대통령으로 수카르노를 부통령으로 하따를 선출함으로써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시작을 전세계에 알렸다. 부통령과 총리 재임 시 하따는 여러 정치적 고난을 겪었고, 특히 수카르노와의 갈등이 그가 부통령직을 물러나게 된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하따의 정치적 활동에 대해서 여러 평가가 있겠지만, 그의 실용적인 외교노선은 여전히 인도네시아 사회에서 중요하게 받아들여진다. 하따는 1948년 ‘두 바위 사이에서 노 젓기’라는 연설을 통해 냉전시기 3세계 국가들의 역할에 대해 역설한다. 그는 ‘독립적이고 능동적인’ 외교 활동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이는 현재까지도 인도네시아 외교의 기본원칙이다.
하따의 고향, 부낏띵기에서는 그의 흔적을 손쉽게 찾을 수 있다. 부낏띵기 여행의 시작점인 잠 가당 인근에는 하따의 궁전(Bung Hatta Palace)과 공원(Taman Monumen Proklamatior Bung Hatta)이 있다. 공원에는 연설하는 하따의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과 그의 일대기를 석조부조로 표현하여 반식민주의와 조국의 독립을 원했던 한 정치인의 삶을 보여준다. 하따가 태어나 11살 때까지 거주했던 집을 박물관으로 개조한 장소 역시 부낏띵기에 위치한다. 잠 가당에서 대략 동북쪽으로 1km 정도 이동하면 하따 생가 박물관(Rumah Kelahiran Bung Hatta)을 관람할 수 있다. 하따가 생전에 사용한 가구, 식기, 사진, 문서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음식은 미낭까바우인의 정체성이다.
서부수마트라 지역에서 음식은 결국 미낭 음식이라는 의미인 ‘마사칸 미낭(Masakan Minang)’으로 통용된다. 또한 도시명인 파당을 사용하여 파당 음식이라는 의미인 ‘마사칸 파당 (Masaskan Padang)’으로 명명한다. 이는 음식에 종족과 지역 이름을 더함으로써 종족과 지역 정체성을 부여하고, 나아가 종족 음식이 가진 가치를 극대화한다. 실제로 파당 음식은 하나의 브랜드화 되어 인도네시아 전 군도를 넘어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다른 국가와 도시로 이주한 미낭인이 식당을 운영하기도 하지만, 할랄 음식과 매콤한 맛에 대한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상업적 이익을 위해 타 종족의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파당 음식은 과연 어떤 음식이기에 종족과 지역 음식에서 국가 음식으로 변모하게 되었을까? 파당은 어떻게 ‘미식의 도시’라는 상징성을 부여 받았을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 우선 미낭까바우족에 대해 알아보자.
인도네시아에서 미낭까바우족에 대한 인식은 다양하겠지만 대체적으로 세 가지 지점에서 묘사가 이루어진다. 첫째, 인도네시아 사회에서 미낭까바우인은 이슬람에 대한 믿음, 즉 종교적 신념이 강한 종족으로 인식된다. 18세기말 수마트라에서 시작된 이슬람개혁운동은 미낭까바우 종족이 거주한 서부수마트라 지역에서 넓게 확산되었다. 이슬람개혁운동은 이슬람교리를 가르치 는 수피(sufi)가 그 중심이 되었고, 미낭까바우족의 관습과 절묘하게 융화되면서 이들 종족이 사회개혁운동의 선두로 나서게 된 것이다. 이슬람에 대한 깊은 신앙심은 여전히 현대의 미낭까바우인에게 중요한 삶의 척도가 된다. 음식과 관련해보면 미낭 음식이 돼지고기 금기뿐만 아니라 생활 전반의 할랄화를 추구하는 무슬림의 식문화와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둘째는 부계 중심의 이슬람 사회와 달리 미낭까바우족은 모계친족 사회를 이룬다는 점이다. 모계친족사회는 한 세대 나아가 여러 세대의 형제자매들도 어머니의 모계친족집단에 속한다. 예를 들어 모계사회의 전형적인 가족형태는 1세대이자 집안의 중심이 되는 할머니 그리고 그녀의 남편이 가족 구성원의 최상단에 위치한다. 이후 2세대인 딸과 사위 그리고 3세대인 손주가 있다. 경우에 따라 결혼하지 않은 2세대의 아들과 딸이 함께 거주한다. 2세대의 아들이 만약 혼인을 하게 되면 그는 집을 떠나 결혼하게 될 아내의 가족에 포함된다.
미낭까바우의 모계 사회에서 재산 상속의 권한이 없는 남성들은 젊은 시절 성공을 위해 떠난 여행이라는 의미인 ‘머란따우(Merantau)’를 행한다. 머란따우를 행한 대표적인 인물이 앞서 소개한 하따이다. 하따의 인생 여정처럼 미낭까바우 남성들은 가깝게는 메단이나 팔렘방 그리고 멀게는 자카르타, 쿠알라룸푸르, 싱가포르 등지로 떠나 성공을 꿈꾼다. 성공한 남성은 고향으로 돌아와 지역 발전에 기여하지만, 대부분은 이주한 지역에서 계속 정착을 한다. 미낭까바우족은 대략 700만 명으로 집계되는데, 이중 400만 명은 서부수마트라 지역에 거주하고 300만 명은 인도네시아와 말레이 반도 곳곳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일구고 있다. 결국 미낭까바우인의 이주지역에서 음식을 비롯한 생활 문화가 소개되면서, 파당 음식이 국가음식화 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셋째는 미낭까바우인의 미각이 뛰어나고 이 지역에서 배출한 훌륭한 요리사가 많다는 인식이다. 흐물흐물하고 단 맛이 강한 자바의 음식과 비교하여 파당음식은 좀 더 걸쭉하고 맵고 짭짤한 맛이 특징이다. 파당 음식의 주요 재료는 인도네시아의 다른 종족 음식과 같이 소고기, 닭고기, 염소, 오리와 같은 육고기와 다양한 종류의 생선을 주재료로 사용한다. 이들 재료를 굽거나, 찌 거나, 튀기는 방식으로 요리를 한다.
하지만 서부수마트라 지역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훌륭한 농산물 생산지로서 명성을 이어온다. 쌀, 카사바, 감자, 고구마, 땅콩, 옥수수 등 농작물은 비옥한 화산토양의 영향으로 훌륭한 맛을 보인다. 물론 인도네시아 타 지역 음식과 결정적 차이는 양념이다. 미낭인은 파당 음식의 정체성을 코코넛 밀크와 다양한 향신료에서 비롯된 매운 소스에서 찾는다. 코코넛 밀크와 매운 향신료가 파당 음식을 걸쭉하고 맵게 함으로써 자바 음식과의 차이를 갖는 음식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파당 음식은 샬롯, 마늘, 생강, 강황, 고추, 레몬그라스 등의 향신료를 이용하여 다양한 소스 조합을 만들어냄으로써 맛을 끌어 올리고 다양한 변주의 요리로 완성된다. 향신료 사용이 빈번한 것은 이 지역이 과거부터 다양한 향신료의 생산지이자 교역로였기 때문이다. 인도양으로 직접 나갈 수 있는 파당항은 황금, 커피, 향신료 등의 매매가 이루어지는 국제무역항이었고, 아랍인, 페르시아인, 네덜란드 그리고 중국인이 공존하는 코스모폴리탄 지역이었다. 여러 민족의 음식문화가 서부수마트라에서 생산된 여러 재료와 만나면서 지역음식문화가 다양해 진 것이다. 결국 미낭까바우인에 대한 인도네시아인의 인식, 미낭까바우인의 전통관습 그리고 지역의 사회문화적 환경이 조화되면서 파당이 미식의 도시라는 상징성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해변, 음식 그리고 문화유산
미낭까바우인의 문화 중심지가 부낏띵기라면 파당은 정치, 교육 그리고 경제의 중심지이다. 국제무역항, 국제공항, 시장과 백화점 그리고 서부수마트라 주청사가 도시에 위치한다. 서부수마트라의 주도인 파당은 약 백만 명(2022년 기준)이 거주하는 도시이며, 파당 광역 대도시권의 인구는 약 140만 명으로 수마트라 지역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이다.
열대우림기후의 파당은 연간 강수량이 4,000㎜가 넘는 인도네시아에서도 손꼽히게 많은 비가 내리는 지역이다. 또한 ‘불의 고리’로 불리는 환태평양 지진대에 속해 빈번하게 지진이 발생한다. 하지만 미낭까바우인의 문화적 전통이 잘 지켜지고, 상대적으로 선선한 날씨 그리고 관광산업이 성장하면서 지속적으로 인구가 증가하는 도시이다.
파당을 상징하는 것은 미낭까바우족의 전통 가옥인 루마 가당이다. 루마 가당은 루마 고당 (Rumah Godang), 바곤종(Bagonjong), 바안주앙(Baanjuang)으로도 불린다. 물소의 뿔처럼 휘어진 지붕 모양을 가지고 있으며, 양쪽 끝에 높게 솟은 곤종(Gonjong)은 물소의 뿔을 형상화 한다. 전통적으로 루마 가당은 박공지붕의 형태로 주로 야자섬유를 사용하여 지붕을 완성한다. 현대에 들어서는 건축 편의성을 높이기 위해 양철을 사용하여 지붕을 완성한다.
루마 가당은 미낭까바우인의 모계 대가족 제도를 지탱하는 구심점 역할을 한다. 가족의 생활 거주지뿐만 아니라 출생, 성인식, 결혼, 장례 등 전통 관습을 실행하는 공간으로 활용된다. 어머 니가 딸에게 집을 상속하며 아버지 대신 외삼촌이 대외적인 일의 가족 대표로서 역할을 한다. 파당에서 루마 가당은 도시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국제공항, 박물관, 주청사, 학교, 식당 심지어 이슬람 사원의 지붕까지 양쪽 끝이 높게 솟은 지붕을 볼 수 있다.
미낭까바우인의 종교와 관습을 함께 경험한다는 의미에서 ‘서부수마트라 대모스크(Masjid Raya Sumatra Barat)’는 파당 여행의 시작으로 적당하다. 서부수마트라 대모스크는 황금빛이 감도는 이슬람 사원의 화려함과 미낭까바우 전통 건축형태가 절묘한 조화를 이룬 종교시설이다. 사원은 총 3층 높이에 4,430 평방미터의 규모를 가진다. 최대 6,000명이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시설로서 2007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2019년에서야 완공된 대역사의 현장이다. 대모스크 관람 후 수디르만 거리(Jl. Jend Sudirman)를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다보면 거리 주변으로 주지사 사무실, 서부수마트라 인도네시아 은행 등 큰 규모와 다채로운 형태의 루마 가당을 볼 수 있다.
파당에서 미낭까바우족의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지역은 도시의 남쪽에 위치한 구도심인 식민지 지구(Colonial Quarter)이다. 특히 주정부가 운영하는 박물관인 ‘아딧야와르만 박물관 (Adityawarman Museum)’이 구도심 여행의 시작점이다. 서부수마트라 지역과 미낭까바우족의 역사와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민족지박물관이다. 박물관 건물은 루마 가당의 형태로 건축되었고 미낭까바우족의 쌀 보관 건물인 랑키앙스(Rangkiangs) 두 채가 박물관 건물을 호위하듯이 서있다.
박물관을 나와 서남쪽으로 향하면 일몰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고고한 하얀 백조처럼 있는 ‘알-하킴 모스크’가 있다. 인근의 파당 비치, 시티공원은 일몰을 관람하고 저녁 식사를 위해 나온 파당 시민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박물관을 나와 동남쪽으로 향하면 과거 네덜란드와 중국인 들이 팽팽한 긴장감을 가진 채 거주한 구도심이 나온다. 강변을 따라 지어진 복층 구조의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의 창고는 현재 식당과 호텔 등으로 개조되어 여전히 화려한 색감을 자랑한다. 구도심은 또한 차이나타운의 일부이기도 하다. 쎼힌키옹(See Hin Kiong) 사원을 중심으로 화인 집단거주지가 있으며, 화려한 붉은색 조명과 건물 아래 화인 식당이 즐비하다.
인도네시아인에게 파당은 음식이라는 의미와 동일하게 사용되듯이, 파당 음식은 이 도시의 대표상품이자 미낭까바우인의 문화적 정수라 할 수 있다. 파당 음식에 이들의 삶과 문화가 온전히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한정식 상차림처럼 파당 음식은 넓은 테이블에 대략 15개 정도의 음식이 차려진다. 소스로 활용되는 녹색, 노란색, 빨간색의 카레, 공심채 볶음과 같은 채소무침, 튀기거나 쪄서 나온 생선, 튀기거나 숯불에 구워서 나온 닭고기 그리고 대표 소고기 요리인 른당(Rendang)이 나온다.
손님이 테이블에 앉으면 남성웨이터들은 겹쳐서 쌓아 올린 10여개의 접시를 손님 앞으로 내어 놓는다. 흰쌀밥이나 강황이 들어간 노란색 밥을 개인 접시에 담은 후 테이블에 깔린 요리 중 마음에 드는 요리를 조금씩 가져다가 먹는다. 서빙을 한 웨이터는 손님이 먹은 음식의 종류와 수를 적고 손님은 식사 후 이를 계산하면 된다. 먹지 않는 요리는 그대로 놔두거나 웨이터에 가져가라고 하면 된다. 개인 접시에 밥과 요리가 놓이면 손님은 오른편에 있는 물그릇에 손을 씻은 후 식사를 시작한다. 스푼으로 매콤한 소스를 조금 던 후 밥, 고기, 채소를 함께 비벼서 먹는다.
닭고기 요리인 아얌 발라도(ayam balado), 생선 요리인 굴라이 이칸 메라 파당(gulai ikan merah padang), 매콤한 맛이 일품인 굴라이 아얌 파당(gulai ayam padang) 등 파당 요리는 매콤한 칠리소스의 맛과 부드러운 코코넛 밀크가 조화롭게 어울린다. 파당 요리 중 대중에게 인지도와 인기가 많은 대표 음식은 른당이다. 미낭인에게 른당은 가족과 공동체에 특별한 행사나 종교 의례가 있을 때 먹는 음식이다. 제대로 만든 른당은 오랜 시간과 여러 가지 귀중한 재료가 들어간 값비싼 음식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가정의 소중한 자산 중 하나인 물소가 주재료이기에 른당은 음식을 넘어 미낭까바우 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완벽한 른당은 매우 거칠 질감의 양념이 묻어 있는 우리네의 소갈비찜의 모습이다. 짭짤한 맛과 매운맛이 절묘하게 어울리며 코끝을 자극하고, 코코넛 밀크로 오랜 시간 조리하기에 소고기는 입안에 들어가면 부드럽게 녹아내린다. 코코넛 밀크와 빨간색 및 녹색의 칠리는 른당의 원재료이다. 여기에 가족 혹은 공동체에 따라 다양한 향신료 배합을 통해 각각의 개성을 드러낸다. 샬롯, 마늘, 갈랑갈, 캔들넛, 강황, 강화잎, 라임잎, 레몬글라스, 정향, 육두구, 생강까지 다양한 향신료가 배합된다. 른당은 원래부터 느리게 완성되는 요리이다. 시나몬 나무를 장작으로 활용하여 은근한 불로 대략 8시간 정도 요리한다. 완성된 른당은 밥이나 하얀 콩과 함께 준비된다.
서부수마트라는 인도네시아의 수도인 자카르타에서 비행기로 이동시 2시간이 걸린다. 그에 비해 싱가포르나 쿠알라룸푸르에서는 대략 1시간 내외로 이동할 수 있다. 버스와 페리를 이용하여 싱가포르로 이동하는 사람도 제법 된다. 인도네시아에 소속된 하나의 주이지만 문화적으로 말레이반도와도 긴밀하게 연결된다. 또한 이 지역은 미낭까바우의 전통과 관습이 서부수마트라 주의 주된 생활방식이 된다. 한 종족이 만들어 낸 전통 관습에 다양한 이주민의 문화가 혼용되면서 서부수마트라만의 독특한 문화적 양식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문화적 양식은 서부수마트라의 중심도시인 파당과 부낏띵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파당과 부낏띵기는 그곳의 역사성과 함께 여러 사람들에게 특별함을 안겨주는 도시이다.
전북특별자치도와 서부수마트라주의 교류 협력 강화는 양 지역의 경제 성장을 위한 상호보완적인 특성을 보인다. 이에 더하여 두 지역의 서로 다른 음식문화와 전통문화를 경험하고 학습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양 지자체가 상호 이해의 폭을 넓히고, 나아가 문화를 통한 지방외교의 새로운 토대를 구축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 각주
1)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View.do
2) 코니한, 캐롤 M. 2005. 『음식과 몸의 인류학』. 김정희(역). 서울: 갈무리
3) 해리스, 마빈. 2018. 『음식문화의 수수께끼』. 서진영(역). 파주: 한길사.
4) 파당 지역이 속한 서부수마트라주의 주요 종족이 미낭까바우족이기에 파당 음식은 일종의 미낭족의 음식이다.
5) 인도네시아 파당 음식점 협회(Ikatan Warung Padang Indonesia)는 자카르타를 포함한 수도권 지역에 대략 20,000개의 파당음식점이 운영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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