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21.05.26
수정일
2023.01.04
작성자
동남아연구소
조회수
901

[13]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미얀마 군부 쿠데타와 민중의 저항 ㅣ 박진영

[13]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미얀마 군부 쿠데타와 민중의 저항 ㅣ 박진영 첨부 이미지


초록


지난 2월 1일 발생한 미얀마의 군사 쿠데타에 시민들은 대규모 시위로 저항하였다. 군부는 유혈 진압으로 대응하였고 그 결과 어린아이를 포함한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으며 시위는 소강 상태에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위가 격렬한 형태로 표출되지 않는다고 해서 군부 정권에 대한 저항이 완전히 사그라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다양한 방식의 일상적인 투쟁으로 전환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2011년 이후 지난 10년간 미얀마 사람들의 삶과 경제, 사회에 나타난 변화와, 이를 배경으로 뿌리내리기 시작한 민주주의에 대한 경험이 시민들의 지속적인 저항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고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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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 독재 치하에 사느니 죽는 게 낫다”

  지난 2월 1일 군부가 일으킨 쿠데타에 저항해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을 취재한 언론들이 빈번하게 인용했던 말이다. 이 말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었다. 실제 시민들은 전국에 걸친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고 저항을 이어갔으며 그 과정에서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5월 하순 현재 군부의 폭압적인 진압과 공포를 자아내는 전략으로 시위는 소강상태에 접어든 것처럼 보인다.

  1962년부터 2011년까지 군부 독재 하에 있었던 미얀마에서 군사 정부에 저항하는 시위가 발생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배급 식료품 부족과 사업장에서의 노사 분규가 맞물려 촉발되었던 1974년과 1976년 시위, ‘8888혁명’으로 알려진 대학생 주도 1988년 시위, 그리고 승려들이 시위를 이끌었던 2008년 ‘사프란 혁명’ 등 대규모 반 군부 시위는 그동안에도 빈발했다. 하지만 이번처럼 전국적으로 장기간에 걸쳐 전 계층이 참여하는 시위가 전개된 예는 드물다. 그간의 시위들이 유혈 진압으로 막을 내렸음을 감안해 볼 때 시위 참여가 가져올 위험성에 대해서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까지 불사하겠다는 시위대의 강력한 저항은 이번 시위가 단순한 정치적인 사안을 넘어 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떼인세인 정부 시기를 포함하여 민간정부로의 이행이 이루어진 2011년 전후로 일어난 변화를 살펴보는 것은 현재 군부 반대시위의 양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단편적이나마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기간 동안 시민들이 경험한 일상의 삶과 사회적인 측면에서 일어난 변화에 주목하여 현상황을 설명하고자 한다.


  필자가 처음 양곤을 방문한 것은 정치적 변화가 일어나기 직전인 2010년이었다. 당시 교육 관련 시민사회단체에서 일하고 있던 필자는 아시아 각국의 노동조합과 노동운동단체들과 연대하여 여성 활동가들의 요구를 파악하여 여성노동운동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미얀마도 사업에 포함시기키로 결정하였다. 수십 년에 걸친 군부독재 시기 동안 국제 사회로부터의 고립과 폐쇄의 길을 걸어온 당시의 미얀마는 노동운동은 물론 시민운동 단체들에 대해서도 외부에 알려진 것이 없었기에 필자는 제한된 정보만을 가진 채 미얀마 땅을 밟아야 했다.

  시도는 야심찼지만 결과를 말하면 목적했던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당시 불법이었던 노동조합은 말할 것도 없고 여성노동운동단체도, 노동 일반의 이슈를 제기하는 시민사회단체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지에서 만난 여성단체 활동가는 지하 조직을 제외하고는 공개적으로 활동하는 ‘노동’ 관련 조직이 없다고 했다. 정권에 도전이 될 가능성이 있는 어떠한 움직임도 허용하지 않는 군사 정부에게 노동 운동, 조직화는 초기부터 싹을 제거해야 할 불온한 조짐이었다. 군사정권은 정치적인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노동 운동을 극도로 억압했다. 노동 운동가들에 대한 탄압은 극심하였다. 노동절을 기념하여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토론회를 개최하려고 했던 활동가들은 체포되어 공공질서를 어지럽힌 죄목으로 징역을 살았고, 특히 그 중 주동자였던 활동가는 종신형 2회에 덧붙여 7년형을 언도 받았다. 노동 전문 변호사가 국제노동기구(ILO)와 접촉하여 노동자들의 상황에 대해 부정적인 정보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증거로 제시된 것은 ILO 스텝의 명함을 복사한 종이 한 장이었다.

  또한 군사 정부의 언론 통제는 관제 신문과 방송만 허용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사람들의 말과 생각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칠 정도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활동가들이 대화 중 미묘하게 “organizing”이라는 단어를 불편하게 여기면서 “mobilizing”으로 대체해 사용하곤 했던 것은 그 일면이었다. 이에 대해 질문하자 한 활동가는 말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자기 검열을 하게 된 것 같다고 했다.

  일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 외에도 지금까지 강렬하게 남아 있는 몇 가지 기억은 열악한 인프라와 경제 상황, 그리고 군사정권이 자행하고 있던 극심한 통제였다. 이는 단기간 방문한 여행자에게도 너무나 명백해 보였다. 첫 기억은 현지에서 심카드(SIM Card: 유심칩)를 구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웃 태국에서는 2~3 달러에, 운이 좋으면 무료로도 구할 수 있었던 심카드가 미얀마에서는 하나에 1,000달러라고 했다. 그나마도1990년대 후반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3,300달러였는데 그때에 비하면 많이 저렴해진 거란다. 인터넷 사용을 위해 찾은 피씨방에서는 지메일 하나를 제외하고는 한메일, 야후 등 모든 메일이 먹통이었다. 정부에서 막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연락이 닿은 현지 활동가들을 만나기 위해 탄 택시는 낡아 바닥이 녹슬다 못해 구멍이 뚫려서 바람이 술술 들어올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군데군데 패인 아스팔트에서 노출된 돌이 차안으로 튀어 들어오기도 했다. 천연 에어컨이라며 농담을 건네던 택시 기사는 군사 정부에게 차량 수입 독점권을 얻은 차량 수입업자가 폭리를 취해서 새 차는 물론이고 중고차 값조차도 너무 비싸 차를 살 수 없어 그렇다고 설명했다. 태국에서 수입하는 중고 차량 가격이 태국 현지의 신차보다 훨씬 더 비싸니 정권과 가까운 극소수의 부유층을 제외하고는 차를 살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보수하지 않고 오래 방치된 듯 도로는 여기 저기 구멍이 패여 있어서 한 눈 팔고 걷다가는 발을 헛디디기 일쑤였다.

  일정을 도와주었던 현지인 친구는 우리를 자신의 집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호텔에 숙박시키면서 숙소를 제공하지 못하는 데 대해 몹시 미안해했다. 정부 기관에 등록된 거주자 외에는 외국인이든 내국인이든, 심지어 외지에서 생활하는 가족이나 친척, 친구라 하더라도 등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묵게 될 경우엔 경찰서에 신고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 절차가 몹시 번거로울 뿐 아니라 허용되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고 했다. 이를 어기고 몰래 외부인을 묵게 하였다가 발각되면 크게 문제가 된다고 하였다.

  빈번한 정전은 또 하나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당시 묵었던 숙소는 주택가 한가운데 있었는데 초저녁에 정전이 되면 동네 전체에 “아~~~” 하는 탄성이 울려 퍼지곤 했다. 다음날 만난 친구에게 들은 사연인 즉 당시 인기 있던 한국 드라마가 방영되던 시간이었는데 정전이 되면서 중간에 끊겨서 그렇단다.


  2011년부터 광범위한 개혁개방 정책이 추진되고, 이어 2015년에 치러진 선거를 통해 민간 정권의 등장이라는 정치적 변화와 더불어 미얀마는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2011년 노동조합의 합법화와 더불어 2년 사이 2천여 개의 노동조합이 만들어질 정도로 노동운동이 들불처럼 번져가는 것을 보면서 필자는 미얀마에 흥미를 가지고 연구 주제로 삼게 되었다. 그 후 연구자로 몇 차례에 걸쳐 방문한 미얀마는 갈 때마다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2011년부터 2020년까지 10년 동안 이루어진 변화는 시민의 일상뿐 아니라 사회의 거의 모든 측면을 변모시켰다.

  미얀마에 처음 방문했을 당시 비싼 가격때문에 ‘금카드’였던 심카드는 이제는 1달러만 내면 길거리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심카드를 사기 위해서는 원칙적으로 신분증 등으로 등록을 해야 하는데, 사전에 현지인 이름으로 등록해 놓고 좌판에 늘어 놓고 파는 심카드를 번호를 보고 구미에 맞게 고를 수 있게 되었다. 외우기 쉬운 좋은 번호는 조금 더 비쌌다. 군부와 연결된 기업인 MPT가 독점하던 통신 시장에 Ooredoo, Telenor, Mytel 등의 기업들이 참여하면서 사람들은 저렴하고 양질의 인터넷 서비스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들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다양한 프로모션으로 저렴한 요금제를 제공하고 있는 까닭에 시민들은 여러 개의 심카드를 사서 요금제에 따라 통화와 데이터를 선택적으로 사용하는 등의 방식으로 서비스를 이용했다. 2010년에 휴대전화 심카드를 보유한 미얀마 인구는 1%에 불과했지만, 2016년이 되자 인구의 78%가 스마트폰을 이용하게 되었다. 세계은행 자료에 의하면 2010년 0.25%이던 인터넷 이용률은 2016년에 25%까지 증가하였다.

  스마트폰을 통해 손쉽게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인터넷이 주된 여론 형성의 장으로 기능하게 된 점도 개혁개방 이후 나타난 중요한 변화로 꼽을 수 있다. 특히 페이스북은 일반 시민들이 정보를 공유하고 확산시키는 대중적인 여론 플랫폼으로 부상하였다. 2015년 선거 때부터 시민들은 투표와 개표 과정에 마치 참관인처럼 참여하면서 실시간으로 페이스북에 정보를 올려 그 과정을 감시하고 공유하였다. 또한 군 고위 관계자 가족이 가사 서비스 노동자에게 행한 가혹 행위를 페이스북을 통해 폭로하여 비판 여론을 조성하여 공개 사과와 배상을 받아내기도 했다. 군부 정권 하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새로운 매체를 통해 가능해진 것이다.

  미얀마에서는 2011년까지도 검열이 존재했다. 영국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진 법에 근거한 것으로서, 서적에서부터 신문, 만화, 홍보용 인쇄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출판물을 사전에 당국에 제출하여 검열을 받도록 하였다. 2012년 사전 검열이 폐지되고, 관변언론 외에도 다양한 언론사들이 등장하여 다양한 내용으로 채워진 수십 개의 신문이 신문 가판대를 가득 메우게 되었다.

  도로가 새로 포장되고, 이전의 차량 수입 독과점이 폐지되어 차량 수입 경로가 다변화하고 가격도 저렴해지면서 거리에 교통 정체가 생기기 시작한 것도 하나의 변화였다. 한국에서도 중고버스가 수입되어 양곤 시내에서 양재역 이정표를 그대로 단 버스가 달리는 광경도 보게 되었다. 양곤 시 정부는 시내를 운행하는 버스 대부분을 에어컨을 갖춘 신형 버스로 교체하여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일반 시민들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2015년 11월에 치러진 선거는 정치적 변화의 정점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투표소에 길게 늘어선 줄에서 오래도록 기다리면서도 사람들은 지친 기색 없이 감격스러운 얼굴로 몇십 년 만에 주어진 ‘자유 선거’의 권리를 행사했다. 개표장에서 수개표를 통해 집계를 하는 개표 요원도, 개표 과정을 감시하는 참관인도 밤늦도록 이어진 개표 절차에도 아랑곳없이 시종 흥분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작업을 이어갔다. 개표장 밖에서는 아웅산수찌가 이끄는 NLD당이 승리할 것을 확신하는 지역 주민들로 북적거리는 축제 분위기가 이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는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나타났다. 군부 정권 시기 동안 미얀마 경제를 옥죄고 있던 미국과 유럽연합 등 서구의 경제 제재가 해제되면서 미얀마의 산업, 특히 저임금을 중심으로 한 의류 산업이 커지게 되었다. 2011년 7억7천만 달러였던 의류 수출액은 2019년에는 65억 달러로 늘어나 전체 수출액의 30%를 점하게 되었다. 의류 산업의 ‘마지막 프론티어’라고까지 불리는 미얀마로 싼 노동력을 찾아 온 외국 자본들을 중심으로 의류 공장이 늘어나 의류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10년 사이에 2만여 명에서 70만여 명으로 급증하였다. 이처럼 의류 산업 부문이 팽창하면서 여성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농촌에서 도시로 대거 이주하였고, 그에 따라 이들 노동자들의 저임금 문제도 필연적으로 대두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운동도 활발해졌다. 군부정권 하에서도 파업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큰 위험을 감수해야 했던 까닭에 그 횟수는 현저히 적었고, 간혹 발발한 파업도 소리 소문 없이 정리되곤 했다. ILO의 통계에 의하면 1999년부터 2008년 사이 연간 평균 11건의 파업이 있었고, 특히 2004년부터 2008년까지는 한 자리수의 파업만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군부는 파업이 일어날 경우에 외부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파업이 일어난 사업장 주변을 봉쇄하고 3일 내에 파업이 해결되지 않을 경우 사업체를 폐쇄하겠다고 위협했다. 이는 노동자뿐만 아니라 고용주에게도 해당되는 위협이어서, 노동자들은 간혹 파업을 통해 임금 인상 등의 결과를 얻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파업 관련 소식이 언론을 통해 기사화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파업을 주도한 노동자들은 해고당하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일자리를 얻기 어려웠다. 이들을 위해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 주는 것이 지하 노동운동 조직의 일이 되기도 하였다(노동운동가와의 인터뷰, 2015년 10월).

  2011년부터 시작된 정치 변동은 군부정권 하에서 자행되었던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을 앞선 세대들의 이야기로 만들었다. 새로 도입된 노동조합법은 노동조합의 합법화와 파업권을 보장 하였다. 노조는 순식간에 그 수가 2천개를 헤아리게 되었고, 노동자들은 파업을 통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요구 사항을 관철시킬 수 있게 되었다. 같은 공장에서 여러 차례 파업이 일어나는 것도 드문 일이 아니었는데, 이는 파업과 고용주의 보복(엄격한 규율 도입, 작업 강도 강화, 해고 등), 그리고 이에 반발하는 파업이 다시 재개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었다(노조 간부 다수 인터뷰, 2015년 10월 11월). 이 같은 악순환은 이전의 온정주의적이고 위계적인 노사 관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노사 관계 정립을 요구하는 노동자들과 이를 거부하는 고용주 간의 갈등의 결과이기도 하다. 민주화 이전에는 “고용주들은 먹거리와 월급을 주는 신”(Lin and Michael Haack 2021/03/02)이었다는 어느 노조 간부의 회상이나 “부모가 자식 가르치듯 잘못하면 야단쳐서 가르치고, 그러면 울며 일하면서도 말을 듣던 시기였다”는 고용주의 이야기가 말해주듯이, 고용주와 노동자들은 평등하다기보다는 위계적인 관계가 기본이었다(고용주 인터뷰, 2015년 10월). 민주화와 함께 시작된 노동운동을 통해 노동자들은 그러한 관행을 바꾸어 동등하게 협상에 응해줄 것을 요구하였고, 이를 거부하는 고용주의 태도는 또 다른 갈등을 낳는 결과로 이어졌다.

  파업을 통해 노조가 결성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점도 흥미로운 변화다. 이전까지는 언론 통제 때문에 소문으로만 들을 수 있었던 파업 소식이 이제는 신문의 일면에도 오르게 되었고, 이것이 다른 노동자들의 파업을 격려하는 효과를 낳았다. 당시 활동했던 조직가는 “그때는 파업을 조직하기가 아주 쉬웠다. 노동자들이 통근 버스에 같이 타서 노동 조건의 부당함에 대해 알리는 것으로도 파업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노조 간부 인터뷰, 2017년 4월). 파업은 많은 경우 임금 인상으로 이어졌으며 이렇게 축적된 파업의 경험들은 노동자들 스스로 자신들의 힘을 자각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한 노조 간부가 말한 것처럼 “노동자들은 파업의 맛을 알게 되었다. 그 맛은 달콤했다”(Lin and Michael Haack 2021/03/02).


  군부가 일으킨 쿠데타는 이 다채롭고 역동적으로 형성되어가던 신생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는 시도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시민들은 즉각적으로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인터넷을 통한 정보와 뉴스의 보급은 시위가 조직되고 확산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군부의 잔혹한 진압 장면은 기자들의 카메라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휴대전화로도 촬영되어 인터넷을 통해 공유되면서 공분을 불러 일으켰다. 이 때문에 군부는 인터넷 접속을 통제하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 인터넷의 수혜를 받은 Z세대라 불리는 젊은 층의 다양한 채색들, 재기 넘치는 방식들이 언론의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시위의 면면을 보면 한 집단으로 묶기 어려운 다양한 집단이 참여하였는데, 의사, 공무원, 은행원, 봉제산업 노동자, 농부, 학생, 소수민족 활동가, 동성애자 그룹 등이 그들이다. 그 중에서도 노동자들의 집단적인 참여는 시위 대열이 늘어나고 확산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가장 먼저 저항의 목소리를 낸 것은 공공병원에 근무하는 의사들이었다. 쿠데타 다음날인 2월 2일 의사들과 의료 서비스 노동자들이 파업을 선언하고 시위를 시작하면서 100여개가 넘는 공공 병원들이 운영을 중지하였다(Frontier 2021/02/03). 이들을 시작으로 철도 노동자의 대다수가 시위에 동참함으로써 철도 운행이 중단되었다. 부두에서 하역하는 노동자들의 파업은 물류의 흐름을 멈추게 하였다. 국영은행을 비롯한 은행원들의 파업은 현금의 흐름을 중단시켰고, 은행원들은 특히 군부가 은행에서 돈을 출금하는 것을 막기 위해 출근을 거부했다. 군부 소유의 군수 산업 노동자들의 파업은 군수 물자의 생산을 마비시켰다. 공무원들의 대규모 시위 참여로 정부 부처 사무실이 텅 비게 되었고 조세 등 다양한 부분의 행정이 전면 중지되었다(Paddock 2021/02/15).

  노동조합은 보다 적극적이고 조직적으로 시위에 참여하였다. 10만여 명의 조합원을 가진 교사노조를 비롯한 교원 단체들이 파업을 선언하고, 미얀마의 주요 도시인 양곤 주변 산업단지 노동자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봉제 공장 노동자들도 대규모로 시위에 참여하였다. 쿠데타가 발생하자 다양한 연맹 소속이었던 봉제 공장 노조들은 긴급회의를 소집해 의견을 모으고 총파업을 통해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현장 노동자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일례로 500여명의 노동자가 일하던 먄이(Mian Yi) 공장에서는 300명의 노동자가 파업을 선언하고 시위에 참여하였다. 2월 6일 공단 지역에서 도심으로 행진을 시작한 봉제노동자들의 시위대는 학생 등 다른 조직들과 연대하여 시위를 대규모로 확대시켰다. 이러한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그간 축적해 온 파업과 시위 경험이 매우 유효했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노동자들은 그간 정치적인 이슈로부터 거리를 두어왔다(Haack and Nadi Hlaing 2021/09/03). 노동자들의 권리를 요구하는 자신들의 목소리가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경계하거나 군부가 뒷받침하는 야당에게 이용되어 NLD 정부에 타격을 입히는 것을 우려한 것도 한 이유였다. NLD 정부가 친자본 정책을 펼치고 있다는 비판과는 별개로, 민간정부에 근거한 민주주의를 통해서만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군부의 재등장은 그러한 가능성을 모두 봉쇄하고 이전의 억압적인 체제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군부는 시위의 확대를 막기 위해 인터넷 사용을 제한하고 공단 지역을 포함해 시위가 격심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는 한편 개혁개방과 함께 사문화되었던 거주자 등록제를 부활시켜 야간에 주거 지역을 기습하여 시위 주도자와 노조 간부들을 체포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시위에 참여한 공공부문 노동자들과 공무원들을 회유하거나 위협하여 직장으로의 복귀를 유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회유와 위협은 죽는 한이 있어도 군부 독재 시절로 돌아갈 수 없노라며 저항하는 시민들의 시위를 억누르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시민들은 노조와 소속 단체 등을 통해서 조직적으로, 그리고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인터넷 플랫폼을 통해 산발적으로 시위에 참여하면서 시민 불복종 운동을 확대시켰다. 인터넷이 막히면 우회 경로를 뚫고, 전화를 막으면 태국 심카드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돌파구를 마련하기도 했다(Milko 2021/02/09).

  결국 2월 하순에 미얀마 군부는 무장하지 않은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적인 발포를 시작하였다. 최전방에 배치되었던 군대를 동원해 평화시위를 벌이던 시민들을 학살하고 부상자들을 돕는 의료진에게 폭력을 가하고, 무고한 어린아이들에게까지 발포를 자행하였다. 정치범지원협회(AAPP: Assistance Association for Political Prisoners)가 5월 23일 발표한 바에 따르면 군경의 발포와 폭력으로 현재까지 어린아이를 포함한 818명의 시민이 사망하고 5,392명이 연행당했으며, 그 중 4,296명이 구금 중이거나 형을 선고 받았다.

  이와 함께 계엄령 위반 혐의로 19명에게 사형 선고 (17명 궐석 재판), 여성을 살해한 혐의로 7명에 대한 사형 선고를 내렸다. 1988년 이후로 사형 집행이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공포를 조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체포된 시위자들에게 참혹한 고문과 폭행을 가한 후 그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진을 방송으로 내보내는 것도 이와 유사하게 시민들의 저항의지를 꺾기 위한 심리전의 일환으로 보인다.

  최근 연락이 닿은 미얀마 현지의 지인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에서도 그렇고 뉴스에서도 보다시피 이제 소규모의 산발적인 시위를 제외하고 거리 시위는 소강상태에 접어든 듯싶다. 하지만 영화 제목에서 따온 이 글의 제목처럼 끝날 때까지 끝난 건 아니다.

  광주의 5월이 1980년에 끝나지 않고 끈질기게 이어져 결국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거대한 항쟁으로 되살아난 것처럼, 미얀마 사람들에게는 이제부터가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의 시작일 것이다. 실제 미얀마 활동가들은 희생자가 발생하는 거리 시위가 아닌 다양한 방식의 저항들( 희생자 추모, 저항 메시지 매단 풍선 날리기, 군부 소유 기업 상품 불매 등)을 고안해 내고 있다. 그 한 예가 지난 3월 24일에 있었던 침묵 파업(silent strike)이었다. 인터넷을 통해 조직된 이날 시위에 대부분의 상점들이 문을 닫고 차량은 운행을 멈추고 시민들도 일제히 거리에서 사라져 도시 전체를 침묵에 잠기게 함으로써 군부를 당혹케 하였다. 또한 지난 4월 13일은 미얀마 최대의 명절이자 신년 물축제인 띤잔이 시작되는 날도 그러했다. 예년 같으면 일주일 동안 이어지는 축제로 온 나라가 떠들썩할 시기이다. 그러나 거리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이는 미얀마 시민들의 군부에 대한 저항의 일환이었다.

  이처럼 미얀마 사람들은 결코 군부에 굴복하지도,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며 결의를 다지고 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처럼 모든 것은 흔적을 남긴다. 저항은 기억을 남긴다. 그 기억을 기록으로, 역사로 남기고 그 역사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바꾸는 것은 남은 자들의 몫일 것이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끊임없는 관심과 지지, 지원일 것이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울 때 받았던 국제적인 연대와 지지, 지원이 민주주의를 향한 지난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던 투쟁을 지속할 힘이 되어 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 참고문헌

Lin, Kevin and Michael Haack. 2021. “Myanmar’s Labor Movement Is Central to the Fight Against Authoritarianism: An Interview with Ma Moe Sandar Myint”. Jacobin. March 2. https://jacobinmag.com/2021/02/myanmar-labor-movement-authoritarianism-coup

Frontier. 2021. “Teachers, Students Join Anti-coup Campaign as Hospital Staff Stop Work.” Frontier Myanmar. Feb. 3. https://www.frontiermyanmar.net/en/teachers-students-join-anti-coup-campaign-as-hospital-staff-stop-work/

Paddock, Richard C. 2021. “‘We Can Bring Down the Regime’: Myanmar’s Protesting Workers are Unbowed.” The New York Times. Feb. 15.

https://www.nytimes.com/2021/02/15/world/asia/myanmar-workers-coup.html

Haack, Michael and Nadi Hlaing. 2021. “Workers in Myanmar Are Launching General Strikes to Resist the Military Coup: An Interview with Ma Moe Sandar Myint, Ma Ei Ei Phyu, Ma Tin Tin Wai.” Jacobin. Sep. 3.

https://jacobinmag.com/2021/03/myanmar-burma-general-strike-coup.

Milko, Victoria. 2021. “EXPLAINER: How are the Myanmar Protests Being Organized?” abcNEWS. Feb. 9.

https://abcnews.go.com/Politics/wireStory/explainer-myanmar-protests-organized-7577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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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미얀마 까야주에서 온 소식 ㅣ 김희숙·복사씨
동남아연구소 2021-06-07 08:41: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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