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22.03.16
수정일
2023.01.04
작성자
동남아연구소
조회수
653

[18] 한국 시민사회와 미얀마의 만남: 버마 민주주의민족동맹(NLD) 한국지부의 난민신청과 연대의 시작 ㅣ 양영미

[18] 한국 시민사회와 미얀마의 만남: 버마 민주주의민족동맹(NLD) 한국지부의 난민신청과 연대의 시작 ㅣ 양영미 첨부 이미지


초록


한국 시민사회는 장기간에 걸쳐 미얀마의 민주화를 위한 연대 활동을 전개해왔다. 2000년, 강제 출국 처지에 놓인 미얀마 망명자들의 난민 지위 인정 신청에서부터 본격화된 한국 시민사회의 미얀마연대 활동은 이후 미얀마 해상의 가스전 개발 사업으로 야기된 강제이주와 강제노동, 환경 문제에 대한 감시, 사이클론 피해 복구를 위한 인도적 지원, 미얀마-태국 국경지대의 난민 지원 등, 미얀마의 비민주적 정치 상황이 촉발한 여러 차원의 이슈들을 포괄해가며 그 범위를 확장해왔다. 이 글은 2000년에 시작된 미얀마 난민인정심사 과정의 진행 경과와 이를 지원했던 한국 시민사회단체의 활동가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하여 당시의 연대 활동이 가진 특징과 한계, 앞으로의 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장기화할 가능성이 큰 미얀마의 현 상황으로 볼 때 난민 인정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재점화될 수 있는 사안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당시 상황에 대한 활동가들의 회고와 성찰을 정리한 이 글이 앞으로의 연대와 관련하여 적지 않은 시사점을 제공해줄 것으로 본다.



이슈페이퍼 18호 원문 내려받기






들어가며


  2021년 2월 1일 아침, 미얀마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켜 아웅산수찌 국가고문과 윈민 대통령을 비롯한 민간정부의 주요 인사를 감금하고 1년간의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 날은 2020년 11월 총선에서 선출된 의원들로 구성된 의회가 개시되는 날이었지만 불법 쿠데타로 인해 민선 2기 정부는 출범조차 하지 못한 채 군 최고사령관인 민아웅흘라잉을 수반으로 하는 쿠데타 세력의 국가행정평의회(SAC: State Administration Council)에게 정치권력을 찬탈당했다.1) 쿠데타 직후 미얀마 시민들은 전국적인 시민불복종운동(CDM: Civil Disobedience Movement)을 전개하며 군부의 부당한 정권 찬탈에 항의했지만, 1년이 지난 2022년 2월 현재까지도 미얀마는 정상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평화시위에 대한 군부의 잔혹한 진압으로 유혈사태가 속출하는 상황에서 저항운동 진영에서는 소수종족무장단체와 연합하여 시민방위군(PDF)을 조직하여 무력투쟁에 나서는 한편, 지난 2020년 말 선출된 의원 및 다양한 사회집단의 대표자들이 참여하는 국민통합정부(NUG: National Unity Government)를 수립하여 군부에 맞서고 있다.

  미얀마 인권단체인 버마정치범지원협회(AAPP: Assistance Association for Political Prisoners)에 따르면 쿠데타 발발 이래 2022년 2월 25일 기준 1,682명의 시민이 살해당했고, 체포된 시민의 수도 1만 2천여 명에 달한다.2) 유엔난민기구(UNHCR: United Nations High Commissioner for Refugees)는 쿠데타 이후 인접국인 태국으로 건너가 체류하고 있는 피난민의 수도 2,500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상황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유엔과 아세안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태도는 미얀마 사태 개입에 소극적이다. ‘내정불간섭’ 원칙을 고수해온 중국은 쿠데타 군부를 지지하는 러시아와 함께 유엔의 개입을 막았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발의된 미얀마 군부에 대한 무기 금수 조치 결의안은 상임이사국인 이들 국가의 반대표로 통과되지 못했다. 국제사회의 이 같은 미온적인 태도와 비교할 때 한국 정부의 대응은 사뭇 눈에 띄었다. 한국은 김대중 정부 당시 버마 민주화를 지지하고 연대를 표명해왔고, 이번 쿠데타 이후 한국정부는 국가 차원에서는 최초의 독자적 제재라 할 수 있는 군수품 수출 중단, 인도적 지원을 제외한 국제개발협력 86% 예산 삭감 등 즉각적이고 단호한 정책발표를 이어갔다.

  정부 차원의 대응 못지않게 눈에 띄는 것이 한국 시민사회의 연대 활동이다. 군부의 불법적인 정권 찬탈을 규탄하며 국제사회의 연대를 호소하는 미얀마 시민들의 외침에 한국 시민사회는 즉각 응답했다. 쿠데타가 발발한 지 얼마 안 된 2월 26일, 106개 시민사회단체가 ‘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한국시민사회단체모임’을 결성하여 현재까지도 다방면에 걸친 연대 활동을 전개하고 있고, 힘겨운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저항을 이어가는 미얀마 시민들을 응원하며 힘을 보태려는 일반 시민들의 참여도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 그런데, 2021년 미얀마 쿠데타가 촉발한 국제적 저항의 연대가 한국 시민사회와 미얀마의 첫 만남은 아니다. 이에 앞서 1988년의 민주화운동 이후 한국으로 망명했거나 이후 이주노동자로 들어와 국내에 체류하는 미얀마 이주민들과 한국 시민사회가 맺어온 관계의 역사가 그 전사(前史)로 자리한다.

  한국 시민사회의 미얀마연대는 이 글을 통해 되짚어보려는 2000년 난민인정투쟁연대3)를 시작으로 20년 넘게 이어져 왔고, 2021년 쿠데타 이후엔 그 범위와 강도가 더욱 확장되고 공고해진 것 같다. 다른 나라와의 연대 활동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각적이고도 지속적인 연대 활동을 보여주었다는 점이 한국-미얀마연대 활동의 특징이다. 비단 민주화운동만이 아니라 라카인주의 슈에(Shwe) 가스전 개발과정에서의 강제노동과 강제 이주 등 인권침해 문제와 관련해서도 다국적기업감시운동4)이 오랫동안 전개되어왔으며, 2008년에는 14만여 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킨 사이클론 나르기스 피해 복구를 위해 적극적인 인도적 지원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이처럼 한국 시민사회의 미얀마 연대 활동은 다양한 계기와 범위에 걸쳐 오랫동안 전개되어왔다.

  이 글의 목적은 미얀마 민주화운동에 대한 한국 시민사회의 연대 활동을 회고하고, 그로부터 이러한 연대 활동이 가진 특징과 한계를 되짚고 앞으로의 과제를 도출하려는 데 있다. 이는 한국-미얀마연대 활동이 다른 경우와 달리 장기간 지속하며 단일 사안이 아닌 다각적 측면에서 활동이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에 착안한 것으로서, 현 상황으로 볼 때 장기화할 가능성이 큰 미얀마 사태와 관련하여 과거에 대한 회고와 성찰이 적지 않은 시사점을 제공해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일환으로 필자는 2000년 난민인정투쟁 연대활동에 대한 회고와 더불어 그 경험이 한국의 미얀마공동체와 우리 시민사회에 남긴 과제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관련 문서기록을 살펴보는 한편, 당시 이를 지원했던 한국 시민사회단체의 활동가에게 질문지를 이메일로 발송하여 답변을 받는 방식으로 서면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초고 작성 후에는 전화로 추가 인터뷰를 진행하여 내용을 보완하였다. 당시 <부천외국인노동자의집>에서 사무국장직을 맡아 활동하였던 이란주, <나와우리> 버마분과에서 활동하던 강연배가 이 귀찮은 제안을 흔쾌히 수락해주었다. 이란주는 이후 <아시아인권문화연대>를 설립하여 대표로 활동했고, 강연배는 현재 몸담고 있는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활동을 통해 <나와우리> 시절 맺은 버마와의 인연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5) 지면을 통해 두 분께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2000년 봄, 버마민주화를 위한 모임 결성


  <부천외국인노동자의집>에서는 버마 민주주의민족동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하 NLD) 한국지부의 조직화를 위해 일찍이 1999년부터 이들의 난민 지위 인정을 위한 투쟁을 구상했다. 이 무렵 회원 A6)가 단속에 걸려 강제추방을 당한 일이 벌어졌는데, 당시에는 아직 단체를 결성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미얀마 본국이 아닌 태국으로 갈 수 있도록 법무부에 협조를 구하여 미얀마 대사관에 통보하지 말 것, 변장 도구를 반입할 수 있게 하는 일 등을 진행하였다. NLD 한국지부는 이후 A가 태국에 머물면서 버마 망명정부(NCGUB: National Coalition Government of the Union of Burma)의 승인을 받아 비로소 설립될 수 있었다.

부천에는 수도권 이주노동자들이 그러하듯 다양한 국적의 노동자들이 크고 작은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며 생활 정보와 편의를 나누는 공간이 많다. 미얀마 출신 이주노동자들 또한 비교적 많이 모여 살고 있어 <부천외국인노동자의집>을 중심으로 미얀마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훗날 NLD 한국지부를 설립하게 된 미얀마인들도 이 공동체에 속해 있었는데, 1998년 무렵 이들은 정치 운동을 해보자는 뜻을 공유하고 한국에 NLD 지부를 설립하기 위한 과정을 함께 도왔다. 당시엔 한국에 체류하면서도 여전히 군부를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아 정치적 의견이 담긴 선전물이나 NLD 홍보물을 단체 안팎에 전시하는 것을 두고 NLD 회원과 미얀마공동체 회원들 사이에 충돌이 빚어지기도 했다.

  시민사회연대모임의 결성을 촉발한 것은 NLD 대외협력부장이었던 샤린7)의 구속이었지만, 전술했듯이 <부천외국인노동자의집>에서 난민인정투쟁을 구상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은 1999년, A가 태국으로 추방당한 사건이었다. 이후 2000년 3월에 샤린이 체포되자 이란주는 유엔난민기구에 지원을 요청하고 시민사회에 연대를 호소하는 등 강제추방을 막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난민 인정 신청을 위해 인천출입국관리사무소와 물밑 접촉을 시도하기도 했다.

  1998년 초 설립된 <나와우리>는 “소외된 집단과의 만남을 바탕으로 열린 사회, 문화적 다원주의에 근거해 자연과 사람이 함께 사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꿈꾼다”는 기치로 시작된 작은 풀뿌리 단체이다. 초기에는 일본, 베트남 관련 사업을 주로 진행하였으나 우리 사회 소수자인 이주노동자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 관련 활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주노동자 관련 인사를 초청하여 강좌를 진행하기도 했는데, NLD 한국지부의 모조(Moe Zaw) 사무국장도 강사로 초청된 인사 중 한 명이다. NLD 지부와 함께 한국의 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이 안장된 마석 모란공원을 다녀오는 등의 활동을 통해 노동문제 및 민주화운동에 대한 의지와 열망을 공유하기도 했다.

  이후 <나와우리>는 2000년 3월에 열린 회원총회에서 버마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버마분과’를 만들고 NLD 지원 사업을 결정했다. 3월 4일에 샤린이 인천출입국관리소에 구금되자 버마 민주화를 위한 모임(이하 버마모임)이 소집되었다. 버마모임 소속 강연배, 김규환, 김종현, 김은정 등은 언론홍보를 위해 “버마 민주화를 위한 모임(Friends of Burma)” 보도자료와 소식지를 발간하고 3월 12일 버마 대사관 앞 집회, 3월 15인 프리 버마(Free Burma) 홈페이지를 개설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3월 22일에는 14개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연대성명을 발표하여 유엔에서 거듭 지적해왔던 심대한 인권침해가 자행되고 있는 버마로 강제 송환된다는 것은 사형 선고나 다를 바 없다고 지적하며, 첫째 한국 정부는 이미 가입한 난민 지위에 관한 국제조약과 고문방지조약 등이 규정하고 있는 ‘정치적 박해자들에 대한 강제송환금지’라는 국제법적 의무를 이행하고, 둘째 샤린에 대한 난민지위신청 조사절차가 강제송환을 위한 요식절차가 되지 않도록 국제인권기준에 부합하는 민주적 심사절차를 보장하며, 셋째로 이 사건을 위시하여 현재 진행되고 있는 다른 난민지위신청사건에서도 충분하고도 전문성 있는 조사절차를 거쳐 난민 지위 여부를 전향적으로 결정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8) 이어 난민 인정 신청과 관련하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하 민변)에 <나와우리>의 의견서를 보내 협조를 구했다.

  일련의 발 빠르고 적절한 <부천외국인노동자의집>과 <나와우리>의 대응 이후 시민사회단체연대모임의 공동대응이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4월 19일 민변 사무실에서 열린 “버마 NLD 한국지부원들의 안전문제와 관련한 민간단체회의”, 4월 23일 광화문 지구의 날 행사장에서 진행된 샤린 석방을 위한 엽서 보내기 캠페인, 4월 29일 <지구촌동포청년연대(KIN: Korean International Network)>가 주관한 “난민신청 제도의 문제점과 대책” 토론회 개최 등이 그것이다. 한국 시민사회의 이러한 공동대응 노력에 힘입어 샤린은 같은 해 5월 10일에 석방되었다.


난민신청과 기각


  한국은 1992년에 유엔 난민협약에 가입했다. 하지만 2002년까지 난민으로 인정된 사람은 단 두 명에 불과했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는 난민 인정의 장벽이 높고 난민 보호에 초보적 수준이었음을 말해준다. 난민 지위 신청자나 난민에 대한 처우개선은 매우 시급한 문제이다. 법률상으로는 난민으로 인정될 경우 외국인등록증을 발급받음과 동시에 F2(거주) 체류자격을 획득하여 의료보험을 비롯한 각종 사회보장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이와 달라서, 당시 한국 사회에서 난민에게 제공되는 제도적, 물질적 지원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샤린의 강제송환을 막기 위해 대책을 논의하던 시민사회는 민변의 국제연대위원회에 이 일을 의뢰하였다. 당시 민변은 국제연대위원장인 박찬운 변호사9)가 이라크 출신 난민의 이의신청 사건을 맡아 진행하여 유엔난민기구의 인도적 지위 인정을 받아 성공적으로 난민 인정을 받아낸 직후였다. 이후 민변은 ‘유엔난민기구가 특정 난민신청자에 대해 법률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인정해 민변에 지원을 요청하면 민변은 그에 대한 법률적 지원을 한다’는 내용의 양해각서(MOU)를 유엔난민기구와 체결하였다.

  2000년 5월 17일 버마 NLD 한국지부 회원 21명은 샤린의 강제송환을 막기 위해 함께 집단으로 난민신청을 했다. 총 21명의 난민 지위 신청은 처음에 예외 없이 기각되었다. 대규모 집단신청은 한국 정부로서도 적지 않은 부담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미얀마 정부와의 관계를 고려할 때도 골치 아픈 일이었을 법하다. 일반적으로 난민신청인들이 대체로 본국과의 관계에서 신분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조용히 절차를 진행하곤 했던 것과 달리 버마 NLD 한국지부 회원들은 거침없이 미얀마 군사정권에 대해 비판의 날을 세워 발언하고 미얀마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에서 NLD 회원에 대해 난민 인정을 한 것이 영향을 끼쳤는지 모르지만, 이후 한국 정부도 전향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하여 한 명 두 명 난민 인정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10) 정작 샤린은 2004년 한국 정부에 난민 신청했던 것을 철회하고 유엔난민기구의 인도적 지위 인정을 받아 체류하고 있었다.


1) 난민심사과정의 문제점

  당시 한국의 난민 지위 인정을 위한 심사과정은 신청인의 인권 보호나 적절한 심사를 위한 충분한 정보제공 등이 모두 부족한 초보적 수준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었다. 많은 논란 끝에 현재는 일부 개선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더 많은 변화가 필요하다고 인권시민사회는 입을 모은다.

  버마 NLD 한국지부 회원들이 집단으로 난민 지위 인정 신청서를 접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출입국관리소에서 이들을 모두 불러 모아 넓은 회의실에서 단체로 조사를 진행하였다. 조사는 모두가 나란히 앉아있는 상태에서 한 사람에게 질문하고, 또 다음 사람에게 질문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신청인의 인권 보호에 매우 취약한 것이었다. 타국으로 떠나와 민주화운동이라는 깃발 아래 모인 사람들이라 해도 신청인 개개인은 서로 버마에서의 행적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신뢰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닐 수 있어, 혹 버마 군부에서 나왔거나 비밀경찰이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존재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질문에 응답하는 조사방식은 이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는 것이다. 정치 망명을 신청한 사람의 신상이 처지나 정치적 입장이 다를 수 있는 사람들 앞에서 공개되는 데 대한 우려로 할 이야기를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돌려서 말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더구나 신청인들은 제대로 된 통역의 도움도 받지 못했다. 조사 당시 출입국관리소가 제공한 통역인은 버마 출신 이주노동자로 정치적인 문제나 민주화운동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을뿐더러, 그런 내용까지 통역할 수 있는 한국어 실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었다. 난민신청 사유는 민주화운동과 그에 따른 정치적 박해위협이 핵심이기 때문에 이런 상황은 신청인들에게 대단히 불리한 것이었다. 또한 미얀마대사관을 자주 드나들며 군사정부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온 인물이었던 통역은 신청인들의 진술 내용을 적절하고 충분하게 전달해주려 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몇몇은 해당 통역을 거부하기도 했지만, 조사는 그대로 진행되었다. 이후로는 조사가 있을 때 신청인 중 한국어를 약간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이가 나서서 통역을 진행하였다.

  마지못해 형식적으로 심사절차를 진행하고 있음은 조사관들의 태도나 불성실한 조사 내용에서도 역력히 드러났다. 조사관들은 고압적인 태도로 신청인들에게 반말과 부정적 언사를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불법체류를 연장하려는 불순한 목적으로 심사를 신청한 게 아니냐는 모욕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매번 앞서 한 진술 내용과 현 거주지, 직장 등을 되묻는 형식적인 조사가 반복되었고, 그나마도 질질 끈 채 심사는 마냥 지연되었다. 신청인들은 첫 조사 후에는 간간이 개별적으로, 2000~2001년에는 서너 달에 한 번씩 출입국관리소에 불려가 거주지, 직장, 버마에서의 행적 등에 관한 형식적인 질문을 받았다. 그러다 2002년에는 그 주기가 6개월에 한 번으로 늘어지더니, 2003년부터 최종결정이 내려진 2005년까지 2년 동안에는 조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청인들의 정치적 활동 내용을 증빙할 수 있는 문서나 사진 등의 자료 요청조차도 없었다.

  신청인들은 난민 인정 심사에 버마의 현실이 고려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1988년의 민주화 항쟁 이후 버마 국내에는 수천 명의 학생 및 시민이 정치범으로 구속되어 있었다. 국제노동기구(이하 ILO) 자료에 의하면 버마 군부는 2003년, ILO의 인터뷰에 응했다는 이유만으로 무고한 시민을 재판에 회부하여 사형을 언도하기도 했다. 군부는 같은 해 5월, 평화적 집회를 습격하여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고 아웅산수찌를 비롯하여 NLD 주요 인사를 불법 감금한 디베인(Depayin) 학살사건을 저질렀을 뿐 아니라 여하한 정치적 발언과 집회를 금지하고 강제노동과 소년병 징집, 소수종족 억압 등과 같은 인권탄압까지 버젓이 자행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대응으로 미국이 미얀마에 대해 전면적인 경제제재를 부과하는 등과 같은 엄중한 조치를 내놓기까지 하는 상황이었지만, 난민 심사과정에서는 이러한 현지 상황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2) 난민 신청 기각과 행정소송

  21명에 대한 난민 지위 인정 심사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진행되었다. 아래 연표는 심사 진행경과를 요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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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진행 상황에서 보듯 난민인정은 긴 시간에 걸쳐, 그리고 매우 제한적으로만 이루어졌다. 신청 후 근 3년이 지난 2003년에 3명, 다시 2년이 지난 2005년에 4명이 추가되어 전체 21명 중 7명에 대해서만 인정되었다. 불허된 9명12)이 이의신청을 했지만 같은 해 4월, 5일 이내에 출국하라는 권고와 함께 최종불허 결정이 내려졌다.13) 이후 행정소송14)을 진행하여 최종적으로 2006년 다시 8명이 난민인정을 받게 되었다. 2006년 2월 3일 서울행정법원 제3재판부는 마웅마웅소 외 8명이 법무부를 상대로 낸 난민인정불허결정처분취소(2005구합20993) 청구소송에서 원고 중 1명(마웅마웅저)을 제외한 8명에 대한 불허결정을 취소하라고 선고했다. 정작 난민인정 신청의 발단이 되었던 샤린은 2004년에 한국정부에 의한 난민인정이 아닌 유엔난민기구의 권고에 의한 인도적 지위로 체류허가를 받았다.

  버마 민주화운동 지원모임 중 하나였던 참여연대가 당시 이 결정에 대해 발표한 환영 논평 —“원고측 변호인단(정정훈, 황필규, 장석윤 - 공익변호사그룹 공감)은 이번 판결에 대해, 법원이 난민인정여부 판단에 있어서 상대국과의 외교관계 등 정치적 고려를 중요한 판단기준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법무부의 주장이 이유 없고, 아울러 법무부가 난민인정 심사 시 통역을 제공치 않고도 제공했다고 거짓 주장을 하는 등 위법한 행정처분을 한 사실 등을 인정한 것이라며 환영의 뜻을 표했다.”15)—은 그간 한국 정부의 난민 지위 인정 심사 업무가 얼마나 후진적이고 반인권적으로 이루어졌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난민 지위 인정 신청이 불허됨에 따라 신청자인 NLD 회원들은 5일 이내에 출국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들은 출국연장서를 제출하여 3개월씩 단기 체류 허가를 연장해가며 숨막힐 듯한 긴장 상태에서 그 기간을 버텨야 했다.


난민 인정 그후


  우여곡절 끝에 난민 인정을 받은 NLD 회원들은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마침내 한국 사회에 받아들여진 데 대해 사의를 표했고, 이후 버마 민주화를 위한 다양한 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NLD 한국지부를 통해 버마의 민주화를 해외에서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으로, 한국 단체에서 시민사회 활동을 함께하는 이들도 있었다.

  NLD 한국지부 내부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난민 인정 신청과 심사과정에서 초미의 관심은 서로 간에 다를 것이 없었으나 난민 인정 이후 활동을 해나가며 NLD 한국지부와 미얀마공동체는 서로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여 충돌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였다. 예를 들어 2003~2004년 미등록 노동자 단속추방 저지 운동에 NLD 회원들은 냉담한 태도를 보인 채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 이주노동자 조직인 <미얀마노동자회>가 대사관에 대한 항의 활동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을 때도 NLD 측은 거절했다. 이후 미얀마공동체는 미얀마 대사관의 여권밀매, 세금강탈, 비자발급수수료 강탈 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싸우다 <버마행동>이라는 별도 조직을 구성하여 독립해 나갔다. NLD는 이 단체에 대해 적대시하며 차별화를 꾀하기도 했다. 그러나 2021년 미얀마 군부 쿠데타 이후에는 두 단체가 다시 뜻을 모았다. <미얀마 군부독재 타도위원회>는 NLD 한국지부원들이 개별적으로 참여하고 <버마행동>과 유학생, 이주노동자들과 모두 모여 설립한 조직이다.

  NLD 한국지부 내부의 갈등과 다른 한편으로 이들을 지원했던 한국 시민사회와의 관계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긴 심사기간 동안 난민 인정 심사를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부천외국인노동자의집>이나 <나와우리> 등 한국시민사회단체는 이들과의 동행에 종종 갈등과 무리가 있었음을 고백한다. 대표적으로 아웅산수찌와 NLD 본부의 지시로 한국에서 진행한 ‘버마 투자 반대운동’에 대해 이견이 발생했고, 2003~4년에 대대적으로 시행된 미등록노동자 단속에 대한 저항운동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었다. 비협조적인 태도로 인해 부천의 경우 연대관계가 느슨해졌다.

  활동의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관한 이견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NLD 회원들의 경우 ‘이주노동자’와 ‘정치운동가’라는 이중 정체성 사이에서 혼란을 겪다가 결국 정치운동가의 입장을 선택했다. 반면 <부천외국인노동자의집>은 NLD 회원들이 정치운동가의 정체성을 앞세우며 이주노동자의 인권문제인 미등록이주노동자 단속에 대한 저항운동에 불참하거나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인 데 대해 실망감을 금치 못했다. 이러한 입장 차이로 양자의 관계는 점차 소원해져, 점차 불가근불가원 상태에 접어들었다. 이후 <부천외국인노동자의집>은 미얀마공동체를 포함한 미얀마이주노동자 조직사업, 버마 국경에 인접해 있는 태국의 메솟 지역 난민 지원 활동을 전개해왔고, 이란주가 이 단체를 떠나 설립한 <아시아인권문화연대>는 미얀마 노동자에 대한 상담 지원활동, 귀환이주노동자와 연대하여 미얀마 사회 발전을 위한 교육 활동과 빈민운동 등을 해오다가 2021년 쿠데타 이후 미얀마민주주의네트워크 활동, 미얀마군부독재타도위원회 활동을 함께하고 있다.

  한국 시민사회단체 자체의 부침도 이후 연대가 계속되지 못하게 되는 한 원인이 되었다. 예를 들어 <나와우리>는 작은 풀뿌리 단체로서 벅찬 활동량을 소화해 나가며 활동하다가 차츰 역량이 소진되었다고 회고한다. 당시 <나와우리>는 3개의 분과가 각각의 사업을 담당하는 형태였는데, 비상근 대표와 상근사무국장 1명만이 전업활동가이고 버마분과를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활동을 회원들의 자원봉사로 진행해야 했던 처지라 NLD 한국지부의 요구를 반영하여 활동하기에는 벅찼다고 한다. <나와우리>의 버마분과는 소식지인 를 2000년에만도 5회나 발간하고 매월 버마 NLD 한국지부와 정례 회의를 진행하면서 태국과 버마를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2001년에는 태국 소재 버마 망명정부 인사 5명을 초청하여 공공 기자회견과 시민단체 방문을 조직했다. NLD 한국지부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글교육을 진행하기도 했고, 난민 인정 신청인 중 한 사람인 망망르윈의 신부전증이 심각해지자 그의 치료를 위한 모금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만성신부전증으로 2001년 4월부터 개인병원에서 주 3회 혈액투석을 받아오며 신장이식을 희망했던 망망르윈은 2008년에 동생인 산르윈으로부터 신장을 기증받아 성공적으로 신장 이식수술을 받았다.

  <나와우리>는 사실상 가장 먼저 NLD 한국지부 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지원했던 단체였고, 한국시민사회에 이들의 활동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당시 회원 수와 역량에 비해 너무 많은 사업들을 감당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고 토로한다. 실제로 2003년 이후 <나와우리>의 버마 지원 활동은 현저히 줄었고, 대표가 바뀐 뒤로는 관련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


미얀마 사람들


  난민으로 인정받기 위한 지난한 과정을 거쳐 한국에서 거주해오고 있는 미얀마 사람들 가운데는 유독 많이 알려진 사람들이 있다. 한국의 시민사회단체에서 함께 일을 하며 한국의 시민사회를 배워 본국에 가서 기여하고 싶다는 마웅저(Maung Zaw)와 이주노동자 밴드로 홍대 앞에서 유명세를 날리던 스탑크랙다운(Stop Crack down)의 보컬리스트인 소모뚜(Soe Moe Thu), NLD 한국지부 대표로 활동하던 네툰나잉(Nay Tun Naing) 등이 그들이다.

  마웅저는 현재 한국에 없다. 조국의 민주화 소식에 가장 기뻐하며 2013년에 귀국하여 현재 미얀마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8년의 민주화항쟁에 참여했다가 군부의 탄압으로 1994년 한국에 와서 난민으로 살아왔던 20년간 그는 민주화 운동가, 이주노동자, 정치 망명가,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라는 다양한 정체성으로 살아왔다.16) 정치 운동보다는 이주노동 인권에 관심을 두고 한국의 시민사회를 배워 미얀마로 돌아가 시민운동을 하고 싶다던 그는 2002년 정치 활동에 주력하는 회원들과 갈등을 겪다가 결국 NLD를 탈퇴하였다. 이후 그는 국경지대 난민촌 아동의 교육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만원계를 조직하여 모금액을 보내다가 2010년 버마 청소년 교육지원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따비에(Thabyae)라는 단체를 설립해 활동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였던 소모뚜는 2003년 한국 정부의 이주노동자 강제추방에 맞서 성공회 대성당에서 농성을 벌인 이후 공개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버마 민주화를 위해 활동하는 <버마행동>의 한국 총무, <이주노동자의 방송(MWTV)> 대표, 다국적 노동자밴드 스탑크랙다운의 보컬, 이주민 인권 강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0년 11월 3일 ‘난민인정 결정 불허결정처분 취소’ 청구소송 2심에서 승소하기도 했다. 소모뚜는 현재 2019년에 개소한 <미얀마노동자복지센터>의 운영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복지센터는 미얀마 이주노동자의 노동, 건강, 체류 문제에 대해 SNS와 전화, 대면으로 상담하고 정보를 공유하는 이외에도 모금을 통해 미얀마를 지원하기도 한다. 2021년의 군부 쿠데타 이후 그는 미얀마 군부독재타도위원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고 있다.

  NLD 한국지부의 대표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네툰나잉은 수도 양곤에서 대학을 다니던 꿈 많은 청년이었다. 1988년에는 군사독재를 타도하기 위한 역사적인 8888 정치항쟁에 참여했다. 당시 학생 지도자로 활동하던 네툰나잉은 난민 인정 이후 NLD 한국지부 총무로 활동하면서 성공회대 아시아 국제 NGO 대학원 석사 과정에 입학하여 학업을 이어갔다. 2007년 2월부터 2008년 2월까지의 이 시기를 그는 매우 행복하게 떠올리며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항상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 교수님들 덕분에 나는 학비뿐만 아니라 생활비까지 제공받을 수 있었다. 처음 전화로 부모님께 이 사실을 알렸을 때 나는 무척 행복했고, 부모님 역시 나의 오랜 꿈이 실현된다고 생각하시고 매우 기뻐하셨다. 아버지는 1994년 내가 부모님 곁을 떠난 지 13년 만에 듣는 행운의 소식이라고 하시며 기뻐하셨다”라고 회고하기도 했다.17) 진중하고 의연한 지도자감18)이라고 평가받던 그는 안타깝게도 2015년 9월 4일 새벽 마흔여섯이라는 이른 나이에 심장질환으로 사망했다.


버마민주화운동의 부침과 귀환


  한국에 체류하는 NLD 회원들은 대체로 난민 인정 후 안정된 기반에서 활동할 수 있었지만 미얀마에서는 군부의 잔혹한 진압과 학살로 인한 유혈사태가 간단없이 이어졌다. 2003년 5월 30일 디베인 지역에서 아웅산수찌와 그 지지자들이 야간에 피습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 때문에 아웅산수찌는 다시 가택연금이 되었다. 2007년 8월 15일에는 군부가 예고도 없이 천연가스 가격을 약 5배, 휘발유/경유의 경우 1.66~2배 인상한 조치에 반발하여 일어난 항의시위에 승려들이 대거 참여한, 이른바 사프란 혁명(Saffron Revolution)이 발발했다. 민주화운동에 대해 대규모 탄압이 있을 때마다 국제사회는 미얀마 군부를 거세게 비난해왔지만,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2010년대에 이르러서야 미얀마에서는 정치 개혁이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이어 2015년 총선에서 아웅산수찌가 이끄는 NLD가 압도적 승리를 거두면서 길고 긴 군부독재도 막을 내리는 듯했다.

  조국의 민주화과정을 바라보며 미얀마인 상당수가 귀국했다. 1999년 창립 초창기 40명이 넘던 NLD 한국지부의 당원도 현재는 10명 정도만 활동하고 있고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아웅산 수찌와 NLD가 선거에서 승리하고 불완전한 군사독재 청산인 상태로 민주화세력과 군부가 함께 하는 정권이 출범하자 많은 이들은 난민신청 사유가 소멸되었다고 보았고, 실제로 본국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남아서 이주노동자로 살아가거나 정치활동가로서 더 나은 미얀마를 만들기 위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8888 투쟁 이후 조국을 떠나 망명길에 올랐을 당시 이들은 한국을 목적지라기보다는 일본이나 미국으로 가는 여정의 일부라고 여겼다. 그런데 정작 와보니 한국은 8888 투쟁이 있기 한 해 전인 1987년 민주화투쟁을 통해 군부독재를 끝낸 ‘성공신화’를 가진 나라였다. 이들은 1980년 광주에서 자신들의 고향에서 벌어지는 잔학상과 닮은꼴인 군부의 유혈탄압을 보았고, 광주시민들이 이에 평화적으로 시민연대를 이루며 “대동세상”을 그려내는 것을 보았다. 어쩌면 그들은 비슷한 현대사의 굴곡을 가진 한국에서 민주화투쟁을 배우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던 것은 아닐까. 실제로 두 나라는 외세에 의한 침략과 점령, 독립, 군부독재, 민주화운동 등 매우 많은 부분에서 닮아있다. 샤린과 네툰나잉 등 NLD회원들은 인터뷰에서 광주 5.18 민주화운동과 한국의 민주화운동의 성과에 대해 언급하며 미얀마에도 언젠가 한국처럼 민주화운동을 통해 군부독재를 타도하는 일이 일어나기를 소망한다고 피력했다.

  2021년 쿠데타가 발발하면서 미얀마는 다시 끓어올랐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한국의 관심도 다시금 끓어오르고 있다.


한국과 미얀마: 어떻게 만날 것인가


  미얀마와 한국, 어떻게 만날 것인가라는 질문에 <버마행동>의 뚜라(Thura) 대표는 한국이 과거 민주화운동을 통해 군부독재 시대를 끝냈던 것처럼 언젠가 그들도 민주화를 이룰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희망의 원리는 바로 연대”라고 말하며, 일방적인 지원이 아닌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공감해 주는 것”이 그가 바라는 연대라고 덧붙였다.19)

  2000년 당시 NLD 샤린의 구속과 강제추방을 막아보자는 다급함으로 시작한 버마민주화를 위한 모임은 난민 인정 조치와 더불어 규모와 활동이 점차 줄었고, 이런 배경에는 “대등한 관계의 서로에게 공감하고 함께 활동하는 것보다 긴박한 사정 때문에 일방적인 지원으로 진행된 점”20)이 영향을 미친 것이라 진단된다. 2003년의 디베인 사건이나 2007년의 샤프란 혁명 당시 한국 시민사회는 다시 항의집회를 열고 성명을 발표했지만, 지속적 활동은 이주민 인권연대나 이주민의 본국 사회운동 지원 정도의 소극적인 차원에 머물렀다.

  여기에 한국 시민사회단체와 NLD, NLD 회원들과 이들의 정책에 이견을 갖고 탈퇴하는 결정을 내린 다른 미얀마사람들의 관계는 앞에서 언급한 정치활동가로서의 정체성과 이주노동자로서의 이중 정체성의 문제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이 문제는 집단 간 정책과 노선의 차이를 노정해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NLD 회원들 역시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회적 약자로서 이주노동자와 미등록노동자의 지위를 공유하는 까닭에 미등록노동자 단속문제는 곧 그들 자신의 문제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정치활동가” 정체성을 우선시하여 이 문제를 부차적으로 여겨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고, 그 결과 갈등이 시작되었다. NLD 본부의 정책 역시 갈등을 야기했는데, 예컨대 버마에 대한 투자를 반대한다는 본국의 정책은 당장 군부의 폭정에 신음하는 미얀마인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이라는 판단으로 동의하지 않는 의견도 있어 이를 강행하고자 하는 측과의 마찰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이 차이가 결국 연대하는 집단 사이에 거리를 만들어 낸 것으로 당시의 연대 당사자들이 회고한다.

  여기에 더해 2017년, 미얀마에서 민주주의로의 이행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모두 믿었던 시기에 일어난 로힝자족 탄압사건은 미얀마 민주화를 지지하던 한국 시민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로힝자는 미얀마의 소수민족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아웅산수찌와 미얀마 정부를 지지하는 집회를 여는 국내 체류 미얀마인들의 태도를 보며 한국 시민사회는 경악하고 분노했다. 특히 NLD의 난민인정소송을 지원했고 미얀마 민주화를 지원하던 단체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란주는 버마족 중심의 미얀마에서 왜 그런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는지 그 입장에 대해 이해는 하지만 동의할 수 없어 개별적으로 또는 소수 그룹과 만나 설득하려는 노력도 전혀 소용이 없었다고 회상한다.21)

  NLD 한국지부는 본국의 정치 상황에 대하여 한국 사람들에게 설명하고자 했지만 격렬한 논쟁만을 불러일으킬 뿐이었고, 능동적으로 대처할 인적자원이 고갈된 상태에서 원활하지 않은 언어소통의 문제까지 더해져 서로를 이해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당시 한국단체는 미얀마에서의 로힝자 탄압상황을 묵인하는 이들에게 인권 개념에 대한 이해가 있기는 한 건지, 혹은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을 갖기까지 했다고 말한다. 로힝자족 연대사업은 대부분 이전 버마 민주화 모임에 속한 단체들도 함께 했는데 로힝자연대를 위한 해외 인사초청과 캠페인 등 활동을 벌이면서 이 사건은 소원해져가던 관계를 더욱 멀어지게 부채질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2021년 2월 또다시 발발한 군부 쿠데타와 이어지는 시민들의 항쟁은 한국에서 사그라지는 미얀마 민주화지원연대의 불꽃을 다시 살렸다. 이번에는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한 연대가 이루어지고 있다. 전국적으로 시민사회단체뿐 아니라 학생, 학계, 종교계를 망라해 항의서한을 작성하고 모금활동을 벌이며 지지와 연대를 보내고 있다. 미얀마 내에서 시민방위군이 소수민족무장단체와 연합하여 싸우면서 과거의 실수를 후회한 것처럼, 당시 아웅산수찌의 로힝자족 탄압을 묵과했던 NLD 한국지부도 기존의 태도를 바꾸었다. 그들은 유학생, 이주노동자뿐만 아니라 과거 적대시하던 이주노동자 정체성을 앞에 두던 <버마행동>과도 공동으로 ‘미얀마 군부독재 타도위원회’를 꾸려 활동하게 되었다.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공동의 과제를 수행하면서 정치적 목적을 우선시하여 소수종족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탄압을 정당화했던 기존의 인식과 행동에 성찰하고 사죄해야 한다는 대의명분을 되찾은 것은 쿠데타의 역설이라 할 것이다.


맺으며: 연대의 자세


  서두에 밝힌 것처럼 다른 어느 국가나 지역의 연대와 달리 가장 오랜 기간 부침을 거듭하면서 다각적인 연대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 한국-미얀마연대이다. 한국 내 이주노동자 지원으로 시작된 버마민주화연대활동은 난민신청과 인정을 위한 절박한 노력으로 이어졌고, 귀환하지 않고 한국에 거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연결과 동시에 이들을 통한 미얀마 현장의 상황에 대한 연대가 여전히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에는 미얀마 자체의 상황이 개선되지 않았다는 전제가 있지만, 그보다 한국사회에 의미가 있는 것은 상황의 동질성 때문이라 여겨진다. 미얀마사람들도 광주의 5·18과 1987년의 민주화운동을 언급하는 것처럼, 한국인들도 군부의 탄압과 학살, 언론검열 등 닮은꼴의 현장을 목도하며 같은 처지의 미얀마사람들에게 공감(sympathy)을 가진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이번 이슈페이퍼에서 더 중요한 시사점을 남긴 것은 연대에 임하는 자세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란주가 지적한 것처럼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일방적 “지원”은 연대의 의미를 훼손한 요인이었을 수 있으며, 상호관계의 지속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인권, 평화, 민주라는 보편적 가치를 떠나 본국의 정치 판도를 뒤엎는 데 전념하여 지나치게 당파적 입장을 내세우는 NLD 회원들의 행보는 이들과 연대해온 한국 시민사회단체가 수용하기 어려운 지점도 있었다. 미얀마 상황이 좀처럼 호전되지 않는 가운데 다양한 이슈들과 씨름해야 했던 한국의 시민사회단체들의 부담은 갈수록 커졌고, 활동의 과부하는 역량의 소진으로 이어졌다. 몇몇 다른 미얀마 사람들은 NLD 한국지부의 활동에 동의하지 않고 탈퇴하거나 갈등했다는 점 역시 시사점을 준다. 즉 연대 활동에 임하는 자세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개인 대 개인, 집단과 집단 간의 동등한 주체에 대한 상호 인식이 전제되어야 하며 그 인식에 기반을 둔 인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강연배의 회상은 이러한 점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돌이켜보면 <나와우리> 버마분과는 국제연대 경험과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NLD 한국지부’를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버마민주화를 위한 모임’을 지향했고, 그럼에도 우선 NLD가 다급한 요청을 해오니 일단은 이에 응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진행하자는 것이 당시 분과 회원들의 의견이었다. 그들은 이주노동자가 아니라 ‘정치조직, 정치난민’임을 지나치게 강조했고 야당 의원보다는 여당 국회의원을 선호했고 대단히 ‘정치적’ 이었다. 그들만의 세계에 고립되어 있었다고 생각되며 보편적인 가치보다는 NLD에 유/불리한가가 가치 판단의 중심이었다고 생각된다.”


  단순한 지원이 아니라 진정한 연대, 소통이 필요했는데 <나와우리> 버마분과는 2000년 당시에는 한국사회에서 일하는 것이 서툰 그들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활동을 하는 데 급급했고, 활동의 범위도 점점 커져 매월 집회 참여, 번역작업, 국회의원 면담과 지지 요청 등의 일이 계속 이어졌다. 회원들의 자발적인 활동에 의존해야 하는 처지에서 매번 이러한 요구를 수용하기가 버거웠고, 결국 이로 인해 버마분과 활동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고 회상한다.

  현재는 미얀마로 돌아간 마웅저는 귀국을 앞두고 인터뷰에서 “버마에 돌아가서 국제연대활동을 하는 데 한국이 중심이 될 것이며, 한국-미얀마 청소년의 연대를 만드는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에 거주하면서 배운 시민사회 활동과 민주, 평화, 인권을 조국에서 실천하고 싶다는 의지를 말한 것이다.

  2000년에 우리 사회에 광범위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던 미얀마 민주화를 위한 연대는 현재 쿠데타 종식을 위한 연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 연대의 씨앗은 언젠가 미얀마 시민들이 힘겹고 긴 군부와의 싸움을 끝내고 안정된 상황에서 민주화 과정을 밟게 될 때를 예비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맹아는 한국의 어디에선가 이미 싹을 틔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 각주

1) Reuters. 2021. “Myanmar military seizes power, detains elected leader Aung San Suu Kyi.” Feb 1. https://www.reuters.com/article/myanmar-politics-int-idUSKBN2A11W6

2) AAPP(Burma) facebook 페이지 참고[https://www.facebook.com/search/top?q=assistance%20

association%20for%20political%20prisoners%20(burma)]

3) 2000년 3월 버마 NLD 한국지부 대외협력부장으로 활동하던 샤린의 강제출국상황에 맞서 한국 시민사회가 시작한 <버마민주화를 위한 모임> 연대 활동.

4) 국제민주연대와 민주노총이 주축이 된 다국적 기업감시 네트워크가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개발된 가스의 수익이 결국 군부의 주요 수입원이 되고 있다는 국제적 비난에 토탈과 쉐브론 등 기업들은 2022년 1월 가스전 사업에서 철수했으며, 유럽연합은 2022년 2월 미얀마석유가스공사 MOGE에 대한 제재를 결정했다.

5) 필자인 양영미는 버마민주화연대의 참여단체인 참여연대의 국제/국내연대 담당자로서 당시 활동에 참여하긴 했지만, 주도적 활동은 전술한 두 단체가 진행했다.

6) 인터뷰 대상인 이란주가 당사자의 허락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익명으로 처리한다고 양해를 구해왔다.

7) 죠스와린(Kyaw Swa Linn)이지만 한국 언론에서는 주로 ‘샤린’ 또는 ‘조샤린’, ‘저샤린’ 등으로 언급되었다. 관련 자료 검색이 용이하도록 이 글에서는 가장 많이 사용된 ‘샤린’으로 표기한다.

8) 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회, 나와우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 인권실천시민연대, 인권운동사랑방, 열린사회시민연합, 전국불교운동연합, 정치개혁시민연합, 좋은벗들(사), 참여연대, 한국노동사회연구소, 한국기독교사회선교협의회, 지구촌동포청년연대가 당시 성명에 참여했던 단체들이다.

9) 당시에는 민변의 박찬운 변호사가 유일한 난민 전문 변호사였지만 2022년 현재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황필규 변호사, <공익법센터 어필>의 김종철 변호사 등이 난민 전문 변호사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박찬운 변호사는 이후 한양대 로스쿨 교수로 이직하고 현재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인권위원을 겸하고 있다.

10) 박찬운. 2016. “내 친구 메르샴, 내 친구 내툰나잉: 난민변호사는 이렇게 탄생했다.” 「박찬운의 아브라카다브라」. 2월 19일. https://chanpark.tistory.com/233

11)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2006. “버마 난민 인정 심사 과정의 문제점과 원고 9인의 약력.” 2월 6일.

https://www.peoplepower21.org/index.php?dummy=1&mid=International&listStyle=webzine&search_target=tag&search_keyword=%EB%82%9C%EB%AF%BC&category=452434&page=2&document_srl=591952 

12)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2006. “버마 난민 인정 심사 과정의 문제점과 원고 9인의 약력.” 2월 6일.

https://www.peoplepower21.org/index.php?dummy=1&mid=International&listStyle=webzine&search_target=tag&search_keyword=%EB%82%9C%EB%AF%BC&category=452434&page=2&document_srl=591952 

13) 강국진. 2005. “5일 안으로 한국 떠나라? 버마 난민신청 탈락 9명에 출국 종용.” 『시민의 신문』. 4월 21일. https://hrights.or.kr/speech_on/?pageid=280&mod=document&uid=2560

14) 마웅마웅소 외 8명이 법무부를 상대로 낸 난민인정불허결정처분취소(2005구합20993) 청구소송

15)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2006. “[환영논평] 법원의 버마 난민인정불허결정처분취소소송 1심 판결을 환영한다.” 2월 6일. https://www.peoplepower21.org/index.php?dummy=1&mid=International&listStyle=webzine&search_target=tag&search_keyword=%EB%82%9C%EB%AF%BC&category=452434&page=2&document_srl=591933

16) 양영미. 2014. “마웅저씨의 한국에서의 20년.” 『인권평론』. 5·18기념재단.

17) 네툰나잉. 2008. “버마 난민으로 산다는 것.” 『시민의 신문』. 9월 8일. http://www.ingo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3833

18)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융합자율학부 교수의 평가.

19) 뚜라. 2009. “버마, 그리고 한국의 희망찾기.” 『오마이뉴스』. 4월 16일.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111712

20) 이란주 인터뷰 내용.

21) 미얀마 내부의 갈등과 충돌을 지켜보며 조마조마했었는데 결국 터질 것이 터졌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이란주는 당시의 상황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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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인도네시아 노동운동과 복지의 정치: 현지의 노동 전문 연구자 인터뷰 ㅣ 프란시스쿠스 조요아디수마르타·전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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