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22.09.29
수정일
2023.01.02
작성자
동남아연구소
조회수
632

[21] 싱가포르의 이주노동자와 시민사회를 찾아서 ㅣ 김주영

[21] 싱가포르의 이주노동자와 시민사회를 찾아서 ㅣ 김주영 첨부 이미지


초록


이 글은 2022년 8월 9일부터 19일까지 11일 동안 싱가포르에서 진행한 이주노동자와 시민사회에 관한 짧은 현지조사의 기록으로 정부, 시민사회단체, 이주노동자 단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정부는 2022년 6월 말에 문을 연 우리의 이주노동자 갤러리(Our Migrant Workers Gallery)를 그들이 원하는 이주노동자와 노사관계의 모습, 체계적인 코로나19 대응 서사를 드러내는 장으로 활용한다. 이 과정에서 이주노동자가 경험하는 어려움은 사라지고, 시민사회의 비판 역시 가시화되지 않는다. 시민사회는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거나 옹호활동을 하지 않는 자선단체가 다수인 복잡한 지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부 정책에 비판적인 시민사회단체가 설 자리가 부족한 실정이다. 이주노동자가 스스로 조직한 단체는 이주노동자의 임파워먼트를 강조하고, 싱가포르 사회에 기여함으로써 제한된 저항이라도 가능한 환경을 조성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지만 이주노동자의 건강과 의료보장에 대해서는 문제의식 자체가 거의 없거나, 여전히 고용주 책임의 틀에서 사고하는 한계를 보인다.


이슈페이퍼 22호 원문 내려받기





새로운 연구 현장을 탐색한 11일의 기록


이 글은 2022년 8월 9일부터 19일까지 11일 동안 싱가포르에서 진행한 이주노동자와 시민사회에 관한 짧은 현지조사의 기록으로 정부, 시민사회단체, 이주노동자 단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11일은 연구주제와 관련된 현지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쌓거나 충분한 정보를 획득하기에는 부족한 시간이지만, 낯선 누군가가 자신만의 시간과 곁을 잠시 내어줄 수 있는 기간이기도 했다. 이 시간 동안 나는 아는 이 하나 없는 낯선 싱가포르에 친구까지는 아니더라도 지인을 만들어두고 싶었다. 1년 이상 체류했던 예전의 현지조사 경험을 상기하면, 내가 어떤 지역을 좋아하는 데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 요인은 바로 사람이었다. 내가 마음에 두는 사람이 머무는 그 곳이 그 사람에게 더 좋은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연구를 하는 또 다른 이유기도 하다. 이번 여정에서 내게 그런 사람들이 조금은 생겼다는 점에서 성과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11일의 기록을 크게 네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보여주려고 한다. 첫 방문인 만큼 정부, 시민사회단체, 이주노동자로 나누어 이들 각각의 입장에서 싱가포르의 상황을 이해해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싱가포르 시민사회에 관한 선행연구를 검토했을 때, 정부 관료와 직접적으로 시민사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았다. 기존의 연구들은 시민사회가 자유롭게 이주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할 수 없는 싱가포르의 제한된 정치적 상황을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었다. 문헌 속에서 싱가포르 시민사회는 정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어휘와 표현을 신중하게 선택하면서 이주노동자 지원활동에 참여해야 했다. 따라서 정부의 입장은 2022년 6월 말에 문을 연 ‘Our Migrant Workers Gallery’의 전시를 통해 간접적으로 보여줄 것이다. 

시민사회에 관한 이야기는 싱가포르에서 이주노동자 옹호활동의 대표적인 단체인 이주경제학을 위한 인도주의적 단체(HOME: Humanitarian Organization for Migration Economics), Transient Workers Count Too(TWC2)의 활동가들과의 만남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이들이 전달해준 싱가포르 시민사회의 특징을 중심으로 활동의 지형도를 파악해보고자 한다. 세 번째로, 이주노동자가 스스로 조직한 단체의 대표를 만나 그들의 활동을 정부와 시민사회단체의 관계 속에서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전북대 동남아연구소의 주요 연구주제인 보건과 관련하여 이주노동자의 건강과 의료보험을 둘러싼 현지인과 이주노동자의 입장을 간략하게 보여주고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 이주노동자는 취업허가(work permit) 비자를 소지한 저임금‧저숙련의 노동자를 지칭한다. 시민사회단체의 활동도 이들을 주요 대상으로 한다. 싱가포르에서 취업허가 비자는 건설업, 해양‧조선업, 제조업에 주로 종사하는 인도, 방글라데시 등에서 온 남성 노동자와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에서 온 여성 가사노동자가 2년 단위로 받는다. 취업허가 비자 소지자는 가족을 동반할 수 없고 싱가포르인과의 혼인은 인력부(Ministry of Manpower)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등 여러 제약이 있다. 이번 방문에서는 방글라데시와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을 주로 만났다. 



Our Migrant Workers Gallery: 정부의 이주노동자 담론 생산의 장


현지조사를 준비하면서 싱가포르의 인력부에서 2022년 6월 30일에 이주노동자와 관련된 전시관인 ‘우리의 이주노동자 갤러리(Our Migrant Workers Gallery)’를 새롭게 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갤러리는 주로 교육적 목적으로 싱가포르 내 학교의 단체견학 장소로 활용되었고 대중에게 언제 공개될지는 알 수 없어서 메일로 방문 가능 여부를 문의해야 했다. 갤러리 운영은 인력부 산하의 ACE(The Assurance, Care and Engagement) group이 담당하고 있었다. 이주노동자 기숙사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한 이래로 이주노동자를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ACE group은 2021년에 인력부의 정식부서로 출범하였다.1) 관계자는 갤러리를 직접 안내해주겠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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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E group에서 두 명의 직원이 안내한 갤러리는 이주노동자가 싱가포르에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이들이 노동 이외에도 싱가포르 사회를 위해서 어떠한 기여를 하고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주노동자의 중요성은 싱가포르가 자부심을 느끼는 공공주택과 대중교통 체계를 건설한 그들의 노동력에서 나온다. 이주노동자들은 좋은 고용주와 팀 덕분에 싱가포르에서 일하는 것이 즐겁고, 컴퓨터나 의사소통 방식과 같은 특정한 기술을 배웠으며, 열심히 일한 만큼 보상을 받아서 가족들을 잘 돌볼 수 있고, 정부가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이주노동자들을 도와주어서 감사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고용주들은 기대 이상을 충족시키는 이주노동자들의 헌신과 기여를 강조하고 감사를 표하며 그들의 절대적 필요성을 언급했다. 

이상은 전시장 밖에서도 흔하게 반복되고 있는 공통적인 서사로 분명 사실이다. 내가 만났던 방글라데시 노동자(건설업 10년 종사)는 싱가포르를 무척 좋아하며 생활에도 만족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이주노동자 본인이 맡은 일만 잘 한다면 고용주가 좋아하고 문제도 없을 것이라고 부연했다. 또 다른 방글라데시 노동자(건설업 15~16년 종사) 역시 자신의 능력과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월급이 올랐다면서, 싱가포르에서는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인도네시아 출신의 가사노동자(15년 종사)는 고용주 부부가 옆에 있어도 어려움을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관계가 원활한 편이다. 음악교사인 여성 고용주가 피아노 반주를 하고 본인이 노래를 부르는 등 취미생활도 함께 한다. 아플 때는 의사인 남성 고용주의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는다. 이주노동자가 취약할 수밖에 없는 1차진료에 대한 접근성이 의사인 고용주를 만나면서 쉽게 해결된 것이다. 

다만, 내가 만났던 이주노동자들은 전시에서 보여주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었다. 이들은 본인이 열심히 하기도 했지만 반드시 “운이 좋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고용주가 채용, 의료보험, 거주지 등을 이주노동자에게 제공해야 하는 환경에서 기꺼이 법과 규정을 준수하고 호의를 베푸는 좋은 고용주를 만나는 운이 필요한 것이다. 그 운을 가지지 못한 이주노동자들은 고용주에게 계약 내용을 사기당하고, 월급을 받지 못하는 등의 문제를 가지고 시민사회단체를 찾는다. 갤러리에 전시된 이주노동자의 이야기는 이면의 또 다른 지점에 침묵하는 절반의 사실만을 담고 있었다. 코로나19로 인해 기숙사에만 머물러야 했던 이주노동자가 경험한 어려움은 공식적인 이야기 이면에 가려진 절반의 사실 중 하나이다. 싱가포르에서 19년 동안 건설업에 종사했던 방글라데시 남성은 작년 10월 페이스북에서 정부의 코로나19 대응을 비판하며 기숙사를 경찰이 포위했다고 주장하고 이주노동자를 “노동 노예들”로 표현했다.2) 정부는 방글라데시 남성의 허위 정보 전달과 도발적인 표현을 비판하며 올해 6월 취업허가 비자 갱신을 승인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고용주와 이주노동자가 조화로운 관계를 맺고 있다는 공식 담론에 포함되어 전시될 수 없다. 

오히려 전시는 운동과 예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긍정적인 이주노동자를 재현하며 이들도 싱가포르인과 같은 열망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 전시 구성은 코로나19에 대한 대응이 이러한 인식하에서 이주노동자를 전적으로 지원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보여주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코로나19 확진자에 대한 병원비 지원, 기숙사의 청결한 환경 유지를 위한 노력, 고립된 이주노동자의 정신건강을 위한 프로그램 등은 정부의 대응을 홍보하는 차원에서 상기되었다. 동시에, 이러한 지원이 인력부뿐만 아니라 시민사회단체, 기숙사 운영자, 고용주, 이주노동자도 참여하는 자원봉사자 네트워크와의 협력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강조했다. 전시는 어떤 갈등도 없는 화합의 세계 속에서 이주노동자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었다. 전시 관람객들은 아름다운 싱가포르를 건설해준 이주노동자에게 감사하고, 이들에게 싱가포르가 제2의 고향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소감을 메모로 남겼다. 

내가 싱가포르에 도착한 8월 9일은 국경일 기념행사가 한창이었다. 싱가포르 곳곳에 나부낀 “Stronger Together, Majulah(전진하라)!”라는 올해의 국경일 슬로건은 함께 더 강해지자는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있었다. 체류하는 기간 동안 내내 국경일을 기념하는 크고 작은 행사가 이어졌다. 이 행사에는 이주노동자들도 참여해 싱가포르의 국경일을 유쾌하게 축하했다. ‘함께’, ‘제2의 고향’, ‘기여에 대한 감사’, ‘이주노동자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 ‘같은 열망을 가진 사람’과 같은 표현은 아름답게 국경일 행사장과 갤러리를 부유하고 있었다. 마치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시민사회단체의 지형도와 협소한 옹호활동의 공간


내가 만났던 한 활동가는 싱가포르에서 이주노동자를 지원하는 시민사회단체를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이 세 가지 유형이 명확하게 분류되지는 않지만, 현지 활동가의 관점에서 싱가포르 시민사회를 이해하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주목할만 하다.

첫째, 정부가 설립하거나 운영에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단체가 있다. 이주노동자센터(Migrant Workers’ Center, 이하 MWC), 사회적 지지와 훈련을 위한 가사노동자 협회(Foreign Domestic Worker Association for Social Support and Training, 이하 FAST), 가사노동자센터(The Center for Domestic Employees, 이하 CDE)가 여기에 속한다. FAST는 인력부의 지원을 받아 2005년에 설립된 단체로 가사노동자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 운영, 상담 및 법률지원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CDE는 2016년 싱가포르전국노동조합의회(National Trades Union Congress, 이하 NTUC)가 만든 단체로, 싱가포르에 입국한 모든 가사노동자는 인력부의 지침에 따라 몇 달 동안 이곳에서 진행하는 인터뷰에 참여해야 한다. NTUC는 싱가포르에서 유일한 노동조합이지만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MWC는 NTUC와 싱가포르고용주연합(Singapore National Employers’ Federation)이 함께 2009년에 설립한 단체로 법률지원, 음식 나눔, 상담을 진행하며 인력부에서 의무화하는 이주노동자정착프로그램(Foreign Worker Settling-in Programme) 운영을 주관한다. 활동가는 이러한 단체들을 통해 싱가포르 시민사회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효과가 발생한다고 꼬집었다. 활동가는 실제로 정부가 설립했든, 노동조합이 만들었든 이들을 포괄적으로 정부로 판단하고 분류하는 것으로 보인다. 몇몇 이주노동자들도 전술한 단체의 설립과 운영 주체에 대한 세부적인 구분 없이 일괄적으로 정부와 관계있는 단체로 인지하곤 했다. 

둘째, 자발적인 복지단체(Voluntary Welfare Organization)가 있다. 2020년에 조직된 이주노동자 코로나 지원 연합(COVID Migration Support Coalition)과 이주민상호지원(Migrant Mutual Aid SG), 2015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비오는날의우비(It’s Raining Raincoats), 의사들의 네트워크인 나의 싱가포르 형제(My Brother SG) 등 전업이 아닌 자원봉사자 기반의 활동을 이어가는 단체가 많다. 이러한 단체는 자선의 관점에서 활동하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활동가는 이들이 이주노동자를 도와주지만 옹호하지 않는, 예를 들어 말하자면 빈곤한 사람들을 돕지만 빈곤 그 자체는 절대 비판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활동의 면면을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발언이다. 관람차인 싱가포르 플라이어(Singapore Flyer) 투어 프로그램을 제공하거나 무료로 시력검사를 하고 안경을 맞춰주는 활동은 그 자체가 의미는 있지만 본질적인 문제와는 다소 동떨어져 있다. 

그런데 이러한 분류도 명확하게 나누어지지는 않는다. 이주민상호지원과 같은 단체는 “자선이 아니라 연대를(Solidarity not Charity)”이라는 슬로건을 전면에 내세우며 싱가포르인으로부터 이주노동자에게 자원을 재분배하는 플랫폼을 표방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자선단체와는 다르다. 이들은 긴급한 지원이 필요한 이주노동자를 위해 기금을 조성하는 동시에 이주노동자의 월급을 조사하고, 이주노동자 사망지도(Migrant Death Map in Singapore)를 제작하는 등 옹호단체와 유사한 활동을 수행하고 있기도 하다. 2006년 의사들이 설립한 헬스서브(HealthServe)는 이주노동자에게 의료서비스를 저렴하게 제공하는 클리닉을 운영하며 코로나19 당시 정부와 많은 지원 활동을 함께 했다. 2021년 인력부로부터 ‘인력부의 소중한 파트너상(MOM’s Valued Partner Award)’을 받아 그 협력의 긴밀함을 가늠할 수 있다. 

셋째,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옹호활동 단체로, 현지의 활동가는 이들을 전술한 두 가지 분류와 차별화된 진정한 NGO로 명명했다. 활동가가 NGO의 진정성을 옹호활동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옹호활동은 정책비판과 개선방안 제시, 연구 및 출판을 통한 대중의 인식변화를 포괄한다. 이주경제학을 위한 인도주의적 단체(Humanitarian Organization for Migration Economics, 이하 HOME), Transient Workers Count Too(이하 TWC2)가 여기에 해당된다. 내가 인터뷰를 할 수 있는 단체도 이들이었다. TWC2의 활동가는 싱가포르에서 NGO가 정부를 비판하기란 매우 어렵지만, 문제가 있는 정책이 개선되지 못할 때 그것을 지적하고는 한다. 이 단체도 직접적인 서비스를 이주노동자의 필요에 따라서 제공하는 활동을 한다. 아주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는 무료 식사 지원과 산업재해와 월급과 관련된 법률 자문이 대표적인 서비스 제공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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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C2는 이주노동자 의료보험제도의 개선도 필요하지만 받을 수 있는 보상을 제대로 받는 방향에 초점을 맞추어 활동하고 있다. 활동가는 건강권이 전반적인 권리와 연결되어 있다면서 고용주가 노동자에 관한 다양한 책임을 떠맡은 상황에서는 의료접근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특히 회사 규모가 작은 고용주의 경우 의료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에 분쟁이 발생할 때 정부는 사기업의 일이니 간섭하지 않는다는 기조를 유지하며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한 발 뒤로 물러나 있다. 

리틀 인디아 로웰로드의 법률상담을 참관하면서 갑자기 취업허가 비자가 중단되어 버린 이주노동자를 만난 적이 있다. 1996년부터 싱가포르에서 일한 방글라데시 노동자는 회사가 이름을 변경하고 몇몇 노동자만 새로운 회사에 채용하는 과정에서 갑작스럽게 해고를 당하고 4개월 동안 월급이 밀렸다고 도움을 요청했다. TWC2의 자원봉사자는 이러한 회사는 규모도 작고 운영이 문제적이라며 인력부에게 먼저 알리고 중재를 받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렇지만 인력부는 고용주가 체불임금을 지급할 돈이 없다고 하면 법정으로 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태도로 일관해 노동자가 월급을 받아내기란 쉽지 않다. 이주노동자는 고용주가 중국인이기 때문에 정부가 중국인 편을 들 것이라며 중재 결과를 비관했다. 그래서 인력부가 아니라 시민사회단체를 먼저 찾은 것이다.

활동가는 정부가 의료와 교육과 같은 필수적인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주노동자를 예외로 하는 것은 문제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TWC2는 이주노동자 정책의 미비점을 지적하고 개선방안을 제시하는 활동을 중점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그렇지만 사회적 진보보다는 경제적인 번영을 중시하는 정부와 이에 동의하는 분위기 속에서 이주노동자의 권리가 주장되기는 어렵고 정부와 단체 사이의 대화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차원에서는 인력부의 ACE group과 협업할 때도 있지만, 정책을 논할 때는 정부와의 직접적인 소통이 매우 제한적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HOME의 활동가도 집회와 표현의 자유가 제한된 싱가포르에서 시민사회단체가 목소리를 내기가 어렵다고 토로했다. 정책에 대한 열린 토론은 불가능하며, 간단한 글을 온라인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정부에게 경고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터뷰 하루 전, 이주노동자가 오물로 가득 찬 하수구에서 열악하게 일하는 사진을 SNS에 올리며 노동환경을 지적했다가 정부로부터 연락을 받기도 했다. 때로는 특정 게시글을 내리라는 직접적인 요구도 이어진다. 취업허가 비자 갱신이 이루어지지 않은 방글라데시 노동자에 대해서 정부에 서신을 보내 문제를 제기했지만, 정부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의견만을 반복했다. 정부의 힘이 강한 싱가포르에서 NGO가 운신할 수 있는 폭은 그렇게 크지 않으며. 국제적인 NGO의 영향력도 매우 제한적이라고 활동가는 지적했다.

HOME의 활동가는 싱가포르의 교육시스템에서 ‘열심히 하면 성공한다’는 생각이 강한 것도 옹호활동을 어렵게 하는 배경으로 꼽는다.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모든 사람들이 괜찮은 수준의 일자리와 생활수준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게 만드는 요인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들의 관점을 바꾸는 것이 중요한 옹호활동의 목적이라고 활동가는 강조했다. 동시에, 대부분의 활동이 자선을 기반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에도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며, “스스로를 좋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부와 자원을 재분배해야 한다는 공감대 형성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HOME의 활동가는 이러한 생각이 조금씩 만들어지고 있다면서 낙관적인 태도를 잃지 않으려 했다. TWC2의 활동가도 어려운 상황이지만 5~8년 전에 단체가 제안했던 정책 개선방안을 정부가 채택하기도 하는 등의 성과도 있어서 발전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예를 들어, 월급을 현금이 아니라 계좌이체로 지급하자는 주장을 오랫동안 해왔고 2020년에 비로소 받아들여진 것이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조금씩 변화해가고 있다는 믿음으로 활동가들은 협소한 옹호활동의 공간에서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이주노동자 단체의 활동: 임파워먼트, 기여, 그리고 제한된 저항의 내러티브


싱가포르에는 다양한 이주노동자 단체가 활동하고 있다. 이주노동자를 위해 활동하는 사람들은 싱가포르인들뿐만 아니라 이주노동자 당사자이기도 한 것이다. 이번 방문에서는 이주노동자밴드(Migrant Band in Singapore), 24 asia, 인도네시아가족네트워크(Indonesian Family Network in Singapore, 이하 IFN)에서 활동을 해온 이주노동자를 만났다. 

방글라데시 노동자로 구성된 이주노동자밴드는 주말마다 모여서 방글라데시 노래를 연습하고 공식적인 행사에 초청받아 공연을 하기도 한다. 내가 방문했던 기간 동안 이루어진 국경일 기념행사와 시민사회단체의 자선행사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24 asia는 영주권 소지자인 방글라데시 남성이 2018년에 설립했다. 24 asia는 방글라데시에서 온 이주노동자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고 교육과 기술 수준을 높이는 임파워먼트(empowerment)를 위해 활동한다. 인도네시아가족네트워크에서도 유사하게 춤, 합창, 공예, 영어, 컴퓨터 등을 가르치는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이주노동자들이 본국으로 돌아가 창업하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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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기술과 역량을 향상시켜 보다 높은 월급을 받고 미래를 대비한다는 관점은 이주노동자 단체의 교육 프로그램에 투영되어 있다. 24 asia의 대표는 교육 프로그램이 이주노동자의 정신건강을 돕고 직장에서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학위를 취득해 취업허가 비자에서 S Pass 비자로 전환한 이주노동자의 월급이 4배 가까이 올랐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대표는 “싱가포르인들은 많은 것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배우기 때문에 업무의 질과 생산력이 분명히 다르다”면서 현지인과 이주노동자 사이의 월급 차이를 자연스럽다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개인의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이러한 배경에서 가능하다.

이주노동자 단체는 시민사회단체와도 관계를 맺으며 활동한다. TWC2는 이주노동자 단체의 활동을 여러모로 돕는다. 이주노동자밴드가 연습을 할 수 있도록 로웰로드에 위치한 TWC2의 활동 공간을 내어주거나 금전적인 지원을 하기도 한다. 이주노동자밴드는 TWC2로부터 악기 구입 등에 필요한 돈을 지원받은 적이 있고, IFN도 지원 받은 연간 활동 예산에 대한 정산 보고서를 TWC2에 제출하고 있다. 시민사회단체는 이주노동자 단체의 활동을 후방에서 지원하며, 이주노동자 단체는 필요한 도움의 종류에 따라 적절한 시민사회단체와 협력한다. IFN의 대표는 시민사회단체가 이주노동자를 위해 일하고 있다고 생각할 뿐, 이들 사이의 지향과 방향성 차이를 인지하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가사노동자를 인터뷰하고 정기적으로 일터인 집을 방문하여 문제가 있는지 직접 확인하는 CDE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이들이 가사노동자의 편에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일상적 지원활동은 싱가포르 정부가 인도네시아 정부보다 가사노동자들을 더욱 신경 쓰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개인의 역량을 높이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해서 이주노동자가 경험하는 문제를 개인의 측면으로만 국한하지는 않는다. IFN은 불공정한 정책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내면서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 정부 모두를 비판한다. 인도네시아 대사관이 가사노동자를 위한 쉼터를 운영하고 있지만 실제로 문제가 발생할 경우 필요한 도움을 주고 있지 못한다는 점, 은행이나 보험회사가 대사관 직원과 함께 가사노동자를 찾아 불필요한 금융 및 보험 상품 구매를 유도하는 점 등을 문제로 지적한다. IFN은 이러한 문제를 정리해 인도네시아 대사관에 메일을 보내기도 한다. IFN의 입장에서 메일 발송은 다른 단체가 거의 시도하지 않는 적극적인 옹호활동이다. 주로 TWC2와 함께 공공기관에 문제와 해결을 요구하는 메일을 발송하며, 가사노동자의 자유로운 결혼과 임신에 대한 건의, 이주노동자의 의료비를 부담하지 않는 고용주 비판 등의 내용으로 구성된다. IFN의 대표는 시위를 할 수 없는 싱가포르에서 인력부가 그나마 자신들의 의견을 청취하려 한다는 점에서 발전이 있다고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24 asia도 이주노동자에게 법적인 문제가 발생했을 때 TWC2에 도움을 요청하지만, 이주노동자 단체가 언제나 도움을 받기만 하지는 않는다. IFN과 24 asia가 참여하는 이주노동자혈액 기부 활동은 스스로를 싱가포르 사회에 또 다른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위치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IFN의 대표는 3개월에 한 번 씩 싱가포르인들에게 혈액을 기부함으로써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는 감각을 느낀다고 말했다. 싱가포르 저소득층에게 무료로 식사를 나누어주는 봉사활동에도 참여하는 IFN은 다른 단체와 협업을 통해서 이러한 일들을 지속하고 있다. 24 asia는 해안가에서 플라스틱 쓰레기를 줍는 협력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이주노동자들이 싱가포르를 두 번째 고향으로 느낄 수 있게 한다. 싱가포르 사회에 대한 기여는 이주노동자가 다른 단체와의 협력을 통해 가질 수 있는 또 다른 감각인 동시에, 자신들이 경험하는 문제를 당당하게 비판하고 개선방안을 요구하는 근거가 된다. 

교육을 강조하는 24 asia는 싱가포르 정부에게 이주노동자를 위한 교육펀드 조성방안을 제안한 바 있다. 싱가포르인의 직업능력을 강화하는 미래 기술(Skill Future) 프로그램을  ‘이주노동자의 미래 기술(Skill Future Migrant Workers)’이라는 이름으로 이주노동자에게도 제공할 것을 요청한 것이다. 고용주가 고용하는 이주노동자 한 명당 월별 납부해야 하는 고용분담금(levy)을 이주노동자가 학위를 취득하는 데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 제안의 골자였다. 예를 들어, 학위취득에 필요한 비용을 인력부에서 50%, 고용주가 30%, 이주노동자가 20%를 공동으로 지불할 수 있는 펀드를 조성하는 것이다. 

24 asia 대표는 고용분담금이 정부의 이익으로만 남아 있을 뿐, 어떻게 사용되는지 알 수 없다면서 고용주가 이주노동자 고용에 따라 납부하는 세금인 고용분담금을 이주노동자를 위해 사용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동안 24 asia는 이주노동자의 휴식공간인 레크레이션 센터에서 인력부의 협력 하에 프로그램을 제공하면서 인력부와 좋은 관계를 맺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인력부에 고용분담금을 활용하는 방안을 제안할 수 있었다. 트럭 짐칸에 이주노동자를 태우는 통근 교통수단인 로리(lorry)의 위험성 때문에 이를 버스로 바꾸자는 제안도 인력부에게 하고 있다. 한 번에 로리를 버스로 바꿀 수 없다면 30%는 버스, 70%는 로리를 이용하고 점진적으로 늘려가는 방안도 제안했다. 

싱가포르에서 이주노동자는 정부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기 위해서 매우 세심한 전략을 펼쳐야 한다. 그 세심한 전략은 전술했던 취업허가 비자 갱신이 취소된 방글라데시 남성 노동자가 선택했던 SNS에서의 과격한 비판과는 거리가 있다. 그는 이주노동자 사이에서 사려 깊고 활동적인 사람으로 기억되는 동시에 ‘제한선을 넘어선(beyond the limit)’ 사람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제한선’은 정부 비판이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는 기준점에서 작동된다. 제한선을 넘어섰다는 의미는 그가 사실이 아닌 발언을 온라인상에 유포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라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사실에 근거해서 이야기하며, 추정에 의해서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여기에서 사실은 직접 본 것과 경험한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을 이야기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은 안전하게 제한선 안에 위치한다. 이러한 제한선은 일견 합리적이지만 정부의 공식 입장처럼 이주노동자 기숙사를 ‘노동 캠프’로 이주노동자를 ‘노동 노예’로 지칭한 그의 표현을 모두 거짓으로 치부하는 것이3) 적절한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이주노동자의 건강과 의료보장을 둘러싼 다른 입장들


내가 만났던 이주노동자는 아직 심각한 건강상의 문제를 경험해보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고용주가 제공하는 의료보장의 불충분함을 인지하지 않았다.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은 고용주에게만 책임을 지우는 의료보장의 문제를 인지하고 있지만, 제도적으로 큰 변화를 고민하고 있지는 않았다. 기존의 제도가 제공하는 의료보장을 이주노동자가 잘 받을 수 있도록 하거나, 정부가 보조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생각이 활동가들의 주된 의견이었다. 

또 다른 생각도 있었다. 영주권을 획득하고 이주노동자 단체를 설립한 방글라데시 남성은 고용주가 가입한 보험이 보장하지 못하는 의료비가 있지만, 정부가 고용주에게 포괄적인 보험 제공을 강제한다면 그 비용이 오히려 소비자에게 전가될 것이라고 염려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지금도 비싼 집값이 이주노동자의 임금을 올려줌으로써 더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현지인의 입장과 비슷했다.

곧 영국 유학을 앞둔 TWC2의 인턴인 20대 싱가포르인은 싱가포르가 아름답다는 나의 말에 이주노동자의 “노예화된 노동(slaved labor)에 의해 건설된 나라”라고 시니컬하게 대답했다. 그는 이주노동자의 쉼터인 레크레이션 센터가 싱가포르인들이 이용하는 커뮤니티 센터와 달리 수익의 관점에서 운영을 고민한다는 점을 비판할 정도로 이주노동자의 삶의 질에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주노동자의 임금 인상에 대해서는 복잡한 문제라고 선을 그었다. 이윤 창출을 목표로 하는 회사가 이주노동자의 임금을 인상해야 한다면 그 비용을 소비자에게 전가할 것이라는 우려였다. 그러면서 이주노동자의 임금이 낮고 싱가포르의 물가가 비싸기는 하지만 고용주가 식사와 주거를 모두 이들에게 제공하기 때문에 이주노동자가 직접 지불하는 생활비가 많지 않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정작 SGD1012(한화 약 100만원)를 월급으로 받는 방글라데시 노동자(건설업 9년 종사)는 월급이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높은 에이전시 비용도 낮은 월급에 불만을 가지게 만드는 구조적 요인 중 하나다. 

의료보험도 싱가포르인들과 비교하면 이주노동자에 대한 보장이 나쁜 편이지만, 중동이나 말레이시와 비교하면 훨씬 낫다는 의견을 펼치기도 했다. 정부가 의료자원의 많은 부분을 이주노동자에게 제공한 코로나19의 경험이 이러한 인식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싱가포르 정부는 어떤 나라보다도 더 많은 지원을 이주노동자에게 제공했다”는 이야기나 “기숙사에 이주노동자를 고립시킨 것은 좋은 점과 나쁜 점 모두를 가지고 있다. 좋은 면은 그들이 코로나19로부터 안전해졌다는 것이고, 나쁜 점은 일을 할 수 없고 자유롭게 다니기도 어려웠다는 것이다”는 의견이 그렇다. 이주노동자의 출신 국가와 비교했을 때 싱가포르의 의료시스템은 보다 선진적인 것으로 여겨진다는 점도 이러한 인식을 뒷받침한다. 인도네시아는 싱가포르에 체류하는 이주노동자에게 아무런 의료보험을 지원하지 않고, 오히려 사보험 회사를 통해 상품을 판매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인다. 반면, 싱가포르 정부는 적어도 고용주를 통해 의료보험을 제공하도록 한다. 이러한 대조는 싱가포르의 상황을 상대적으로 우위에 배치하는 효과를 만든다. 

이번 방문에서 만나지 못한 의료분야 시민사회단체인 헬스서브를 통해 이주노동자 건강, 의료보험, 의료지원활동, 건강권 옹호활동의 면면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주노동자 단체를 통해서도 이러한 부분을 탐색할 수 있을 것이다.



함께 한 저녁 식사를 기억하며


8월 17일 수요일 저녁 9시 인적이 드문 공원에 앉아 인도네시아와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을 기다렸다. 인도네시아에서 온 리사(가명)는 2007년부터 싱가포르에서 가사노동자로 일했다. 리사는 남편과 이혼하고 혼자 딸을 키우고 있다. 방글라데시 출신인 피르자다(가명)는 2015년 싱가포르에 왔다. 피르자다는 작년에 결혼해 몇 주 전에 딸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피르자다가 리사를 소개해주어 함께 아랍스트리트를 거닐고, 인도네시아식 아침을 먹고, 보타닉 가든을 산책했다. 피르자다는 이주노동자밴드를 따라다니다 알게 되었다. 리사는 피르자다와 함께 저녁을 먹자고 제안했다. 식사는 모두 리사가 준비했다. 마침 리사의 고용주가 호주여행으로 장기간 집을 비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피르자다는 일을 끝내자마자 공원을 찾았고, 양손에 먹을거리를 잔뜩 들고 온 리사도 늦지 않게 합류했다. 공원은 고요했다. 

리사는 힌두교도인 피르자다가 먹을 수 있는 음식과 한국인인 내가 좋아할 치킨김밥을 고추장과 함께 준비해왔다. 이슬람 신자인 리사 본인이 먹을 음식도 가져왔다. 김밥은 놀라울 정도로 한국적인 맛이었는데, 리사는 구글에서 레시피를 검색해 만들었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고용주는 내게 어떤 음식이 먹고 싶다고만 말하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가르쳐주지 않아. 언제나 구글 검색을 통해 음식을 만들고는 해.” 우리는 모두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었고, 리사와 피르자다는 싱가포르에서 영어를 배워 억양이 매우 독특했다.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단어와 표현들이 있었지만, 짧은 문장들과 현란한 손짓으로 어떻게든 의미를 교환했다. 대화의 주제도 다양했다. 리사는 피르자다에게는 방글라데시의 결혼과 이혼제도를, 나에게는 한국 페이스북의 검열 여부를 물었다. 피르자다는 열심히 방글라데시 제도를 옹호하고 종교의 다양성을 포용하려는 그의 노력을 설명했다. 

싱가포르의 인적이 드문 동네 공원에서 인도네시아, 방글라데시, 한국에서 온 낯선 이들이 함께 각양각색의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날의 분위기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어쩌면 그날의 기억이 앞으로 나를 싱가포르로 이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어렴풋이 들었다. 이 사람들이 싱가포르에서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앞으로의 연구를 해보려 한다.

기꺼이 나를 만나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내어준 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전한다.



* 각주

1) Ng, Jun Sen. 2021. “MOM’s ACE Group to become permanent division to ensure govt presence in migrant worker dorms.” 26 September. https://www.todayonline.com/singapore/forward-deployed-moms-ace-group-become-permanent-division-ensure-govt-presence-worker (검색일: 2022.9.2.)

2) Vochelet, Robin. 2022. “Who Gets to Speak for Migrant Workers in Singapore?” 13 July.  https://thediplomat.com/2022/07/who-gets-to-speak-for-migrant-workers-in-singapore/ (검색일: 2022.9.2.)

3) Ministry of Manpower. 2022. “MOM statement in response to media queries on the non-renewal of Mr Zakir Hossain’s work permit.” 22 June. https://www.mom.gov.sg/newsroom/press-replies/2022/0622-in-response-to-media-queries-mom-statement-on-non-renewal (검색일: 2022.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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