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21.06.07
수정일
2023.01.04
작성자
동남아연구소
조회수
973

[14] 미얀마 까야주에서 온 소식 ㅣ 김희숙·복사씨

[14] 미얀마 까야주에서 온 소식 ㅣ 김희숙·복사씨 첨부 이미지


초록


2월 1일 쿠데타가 발발한 이래 미얀마의 수많은 시민들이 쿠데타 세력에 저항하여 시민불복종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에 대한 군부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미얀마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 R2P에 대한 기대가 좌절되고, 폭력행사를 중단하라는 국제사회의 요구 또한 묵살하는 군부에 맞서 시민들은 무장저항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4월 16일, 국민통합정부가 출범하고, 이어 5월 5일 민중방위군이 창설된 이후 미얀마 곳곳에서는 무력충돌이 빈발하고 있다. 시민불복종운동을 지지하는 소수종족무장단체들의 조력으로 시민저항조직이 결성됨에 따라 이미 분쟁으로 인해 고통 받아왔던 소수종족주들은 다시금 격전의 장이 되어가고 있다. 이 글에서 소개하는 까야주 역시 이러한 움직임이 두드러진 지역들 중 하나로, 최근 이 지역에서는 쿠데타 세력의 군대와 저항군 간의 무장충돌로 인해 지역주민들의 삶이 위태로운 상황이다. 까야주에 살고 있는 한 미얀마 시민이 보내온 소식을 바탕으로 이 글은 군부의 공세가 집중되고 있는 이 지역의 근황과 지역주민들이 처해 있는 어려움을 알리고 이들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호소한다.


이슈페이퍼 14호 원문 내려받기





* 까야주에서 소식을 보내온 미얀마 시민의 이름은 신상의 안위를 염려하여 공개하지 않기로 하였다. 하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무명씨’로 남기고 싶지는 않았기에 김수영의 시 <사랑의 변주곡>에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의 맹아를 품은 존재로 비유된 ‘복사씨(복숭아씨)’를 가명으로 사용하였다. “아름다운 단단함”으로, 넉 달이 넘게 군부독재에 맞서 시민불복종운동을 이어가고 있는 미얀마의 모든 ‘복사씨’와 ‘살구씨’에게 지지와 응원의 마음을 담아 이 글을 바친다.



  2월 1일 쿠데타가 발발한 이래 미얀마의 수많은 시민들이 쿠데타 세력에 저항하여 시민불복종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에 대한 군부의 무차별적인 유혈진압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미얀마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 2021년 4월 16일, 반 군부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시민들의 열망을 담아 국민통합정부(NUG: National Unity Government)가 출범하고, 이어 5월 5일 자체 군대인 시민방위군(PDF: People’s Defense Force)이 창설됨에 따라 땃마도군1)과의 무력충돌은 점차 돌이킬 수 없는 국면에 접어들었다. 수많은 청년들이 무장저항을 위해 소수종족무장단체들(Ethnic Armed Organizations, 이하 ‘반군단체’)이 활동하는 정글로 들어가 군사훈련을 받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이 글에서 소개하는 까야주 역시 이러한 움직임이 두드러진 지역 중 하나다. 또한 이 지역은 쿠데타 반대 시위가 전개되기 시작한 첫째 주, 미얀마에서는 최초로 49명의 경찰이 반 군부 선언과 함께 시민불복종운동에 합류한 곳이기도 하다(Kyaw Ye Lynn 2020).

  이 글은 바로 그곳, 까야주에 살고 있는 한 미얀마 시민이 2021년 5월 10일에 보내온 소식을 담고 있다. 당초 이 소식이 필자에게 전해진 경위는 시민불복종운동의 새로운 전개, 즉 무장저항으로 무게추가 쏠리면서 저항의 새로운 거점이 된 소수종족주의 근황을 알려달라고 요청한데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이 소식이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까야주의 상황이 매우 심각해졌다. 중화기와 헬리콥터까지 동원한 땃마도군의 대대적인 공습이 시작된 것이다. 이 소식을 보내온 이가 살고 있는 곳이 피해지역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염려는 매우 컸다. 공습으로 인해 한동안 연락이 두절된 그의 안부를 초조하게 기다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행히 무사하다는 소식이 당도했다. 잠시 안도했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도 까야주에서는 연일 공습이 이어지고 있어 불안감은 가시질 않는다. 멀리서 느끼는 이 불안감이 공습의 현장에 남아 있는 지역주민들의 두려움과 불안에 감히 비할 바는 못 된다. 이 글에서 소개하는 까야주 소식에는 아직 무력충돌이 발발하지는 않았던 시점, 그러나 언제라도 땃마도군의 공습이 일어날 수 있다는 불안에 떨며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던 지역주민들의 상황이 담겨 있다. 그 고통을 공감하여, 멀리서나마 우리가 이들의 안위와 미얀마의 민주화를 위해 힘을 보탤 수 있는 방도를 함께 생각해보자는 것이 이 소식을 전하는 이유다.

  글의 전체 내용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부분에는 까야주에 관한 간략한 소개를 담았다. 이어 두 번째 부분에는 미얀마로부터 온 소식을 번역하여 수록하였다.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영어로 작성된 원문을 일부 의역하긴 했지만 가능한 한 원문 그대로 수록하고자 했다. 일부 혼동의 여지가 있거나 설명이 필요한 부분에는 각주를 달아 보완하였다. 마지막으로는 이 소식이 도착한 이후 까야주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간략히 정리하였다.


까야주는 어떤 곳인가?


  미얀마의 일곱 개 소수종족주(States) 중 하나인 까야주(Kayah State)는 미얀마 동부에 자리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샨주(Shan State), 남쪽과 서쪽으로는 까잉주(Kayin State)에 접해 있으며, 동쪽으로는 태국의 메홍손(Mae Hong Son) 지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주도는 롸이꺼(Loikaw)이며, 주요 종족집단은 까레니족(Karenni)이다. 붉은색 전통의상이 다른 집단과 구별되는 표지가 되었기에 스스로를 ‘까레-니(Karen-Ni)’, 즉 ‘붉은 까렌(Red Karen)’이라 칭해온 이들은, 그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통상 ‘카렌’으로 불리는 까렌 또는 까잉족의 하위 종족집단 중 하나다. 1951년, 당시 버마연방의 중앙정부였던 파사빨라(AFPFL: Anti-Fascist People’s Freedom League) 정부에 의해 ‘까야’로 변경되기 전까지 이 지역의 이름이 ‘까레니’였던 것도 이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한 가지 유의할 것은 까야주의 옛 명칭이었던 ‘까레니’가 반드시 주요 종족집단인 까레니족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보다는, 집단마다 차이는 있지만 큰 틀에서 까렌족이라는 상위범주에 포괄되는 다수의 까렌계 종족집단의 영토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어서 대다수가 이 명칭을 널리 수용해왔다. 그런데 버마정부가 일방적으로 주의 이름을 한 종족집단의 이름에 불과한 ‘까야’로 변경한 데 대해 지역 내 대다수 종족집단이 느낀 모멸감과 반감은 매우 컸다. 까레니족 지도자들은 이를 영국 식민정부의 전형적인 통치술이었던 ‘분리통치(divide-andrule)’ 전략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며 강력히 비난했는데, 실제 당시 중앙정부의 의도가 그러했다. 즉 독립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분리독립 운동을 전개해온 까렌족과 까레니족을 분리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까렌이라는 이름에서 다소 거리가 먼 까야족의 이름을 따 주의 이름을 변경했던 것이다. 일종의 상징적 분리였던 셈이다(TNI 2018: 18).

  까야주는 미얀마의 소수종족주 가운데서도 가장 작은 주지만 주의 명칭을 둘러싼 갈등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이 지역이 경험해온 역사는 오늘날까지도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는 평화 구축 및 사회정치적 전환과 관련한 주요 쟁점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풍부한 천연자원과 토지 점유권을 둘러싸고 다수의 정치집단이 난립하며 수십 년간에 걸쳐 경합하고 있는,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인도적 위기 상황에 처해 있는 곳이 바로 이 지역이다. 이런 점에서 까야주는 예외적이고 주변화된 변방의 한 영토로서가 아닌, 탈식민지 미얀마의 실패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장소로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 지역이다(TNI 2018: 10).

  이미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시피 미얀마 내 소수종족집단과 중앙정부 간의 갈등은 영국 식민 통치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식민당국의 분리통치 전략에 따라 소수종족주들은 식민통치시기동안 상당한 자치권을 누렸다. 그 중에서도 까야주(당시 까레니주)는 1875년, 당시 버마 왕이었던 민돈 왕과 영국 정부 간에 체결된 조약에 따라 공식적으로 독립을 보장받아 버마와 영국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일종의 제후국으로서 자치권을 누렸다. 이러한 역사를 가진 까닭에 까야주는 버마족이 다수를 차지하는 국가 건설에 유보적인 태도를 견지해왔다.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는 데 소수종족주의 힘이 필요하다고 인식한 미얀마의 독립 영웅 아웅산이 이들 지역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아 1947년 2월에 개최한 삥롱회담(Panglong Conference)에 불참한 것도 이러한 배경과 무관치 않다.

  독립 직후부터 줄기차게 저항해왔지만, 군사정부가 소수종족들을 대상으로 자행한 무자비한 탄압 가운데서도 악명 높은, 이른바 ‘뺘레이뺘(Pya Ley Pya, Four Cuts)’라 불리는 군사작전으로 까야주를 비롯한 소수종족주들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반군단체들을 괴멸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추진된 작전으로, 식량과 자금, 정보, 신병모집을 철저히 차단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미얀마 전체 지도를 검은색(반군 점령지역), 갈색(교전지역), 흰색(반군 소탕지역)으로 구분하여 반군들의 거점지역들을 공격, 전체를 흰색으로 만든다는 목표로 이 작전이 추진되었다. 이를 위해 군부는 반군지역의 마을들을 통째로 강제로 이주시켰고, 남아있는 사람들은 반군세력으로 몰아 무차별적으로 살상하고 유린하였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실향민으로 전락하여 군이 지정한 정착지에서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는데, 까야주에서도 이렇게 강제이주 당한 사람들을 한데 모아놓은 “쑤시(Su See)” 마을들이 거의 모든 타운십들마다 생겨났다(TNI 2018: 89).

  그 피해가 너무도 컸기 때문에 까야주에서 활동해온 반군단체 대부분은 2012년 떼인세인 정부에 의해 추진된 전국정전협정(NCA) 전인 2009년에 중앙정부와 정전협정을 체결하였다. 그에 따라 병력을 미얀마군의 지휘를 받는 국경수비대나 민병대로 전환하고, 그 대가로 까야주 내 특정지역들을 관할권으로 할당받아 비즈니스 활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정전자본주의(ceasefire capitalism)’라 일컬어지는 거래가 이 과정에서 번창했는데, 마약거래를 비롯한 위험하고도 수지맞는 사업들이 이러한 활동에 포함되었던 까닭에 이는 또 그 자체로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Woods 2011). 반군단체들 간에 이권을 둘러싼 갈등이 무장충돌로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미얀마군과의 충돌도 완전히 사그라진 것은 아니어서, 지역 안에서는 상시적으로 긴장이 감돌았다.

  2021년 2월 1일 발발한 쿠데타로 인해 까야주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군부에 맞서 시민들이 연합전선을 이루어 무장저항에 나섬에 따라 소수종족주 곳곳이 다시 전장이 되고 있는 까닭이다. 버마족, 소수종족을 가리지 않고 청년들이 속속 반군단체 관할지역으로 이동해가자 군부는 군사훈련이 이루어지고 있는 거점지역들을 표적으로 삼아 무차별적인 공격을 퍼붓고 있다. 이로 인해 까친, 친, 샨, 까잉, 까야 등 소수종족주에서는 수많은 지역민들이 피난길에 오른 상황이다. 그 중에서도 까야주는 최근 땃마도 군대의 포격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그 피해가 매우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다음에서 소개하는 까야주로부터 온 소식은 이 같은 사태가 발발하기까지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까야주에서 온 소식: “미얀마에 대한 관심과 연대를 호소하며


  2021년 2월 1일, 미얀마 군부는 쿠데타를 감행하여 12개월 동안의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민간정부 지도자들과 주요 정치인들을 구금했다.

  그 후, 미얀마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군부는 보안군을 투입하여 쿠데타에 반대하는 수많은 시위자들을 살상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전국적으로 대규모 시위, 또는 산발적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청년들은 무장투쟁을 위한 군사훈련을 받기 위해 마을을 떠나고 있다. 군사훈련을 받으러 떠난 청년들은 열흘간 기초훈련을 받은 다음 3주간 심화훈련을 받게 된다. 젊은 여성들까지 훈련에 참가하고 있다. 군부의 감시망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지만 민주화운동에 투신하고 있는 지역의 저명한 정치지도자들과 마을 관리자, 시위 조직자들은 신변상의 위험 때문에 돌아오지 못한다. 보안군은 매일 밤마다 순찰을 돌며 도처에서 수시로 국경 관문을 지나는 차와 사람들을 불러 세워 검문하고 있다. 도시에서는 낮 시간대에도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 이러한 행위는 군부가 인권 보호에 관한 규정을 명시하고 있는 일련의 법들을 개정한 뒤에 더욱 강도 높게 이루어지고 있다.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 노인들만이 마을에 남아 두려움에 떨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쿠데타가 발발하기 전까지 한 집에 살던 가족들은 이제 서로 떨어져 지내는 처지다. 아버지와 아들들은 빼앗긴 권리를 되찾아 오리라는 큰 희망을 품고 시민방위군에 합류하기 위해 집을 떠나고 있다.

  2021년 2월 13일, 국가행정평의회(SAC: State Administration Council, 이하 ‘평의회’)는 시민의 사생활과 안전을 보장하도록 명문화된 일부 법 조항을 유예시키는 개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법에 따른 보호는 물론 기본적인 인권조차 보장받을 수 없게 만들었다. 원래 법대로라면 군경이 가택 수색을 하자면 반드시 두 사람의 증인을 동반해야 하지만, 법이 개정된 후론 경찰이 시도 때도 없이 자의로 들이닥쳐 거주자를 수색하고 체포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수색, 체포, 감시, 염탐 및 개인의 사생활과 안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해칠 소지가 있는 수사에 관한 법원의 지시도, 24시간 이상 구금할 수 없다는 규정도 더 이상 따를 필요가 없게 되었다.

  2월 14일에는 형법 개정안이 발표되었다. 이에 따라 자유로이 의사를 표현하거나 여하한 형태로든 공개적으로 군사쿠데타를 비난하는 행위는 영장 없이 체포하고 3년에서 20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게 되었다. ‘구/마을 행정에 관한 법(Ward and Village Administration Law)’도 개정하였다. 이에 따르면 관할 행정구역 내에 주소지를 두지 않은 사람이 밤 동안 마을에 묵게 될 경우 해당 사실을 반드시 마을 관리자에게 신고해야 하며, 마을 관리자는 이를 어긴 자에 대해 응분의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이 법을 개정한 후 평의회는 마을 관리자들을 새로 임명하고 있는데, 이렇게 임명된 사람들 가운데 주민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 몇몇 사람들은 공식적으로 직을 거절하기도 했다. 전직 마을 관리자들은 대부분 직을 맡는 걸 꺼리고 친 민주적 행정관으로서 임무를 수행할 의지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2) 이런 이유로 까야주의 마을들 중에는 관리자가 없는 곳들이 생겨나고 있다. 마을 행정체계가 평상시와 같이 작동하지 않게 됨에 따라 이들이 수행해오던 역할, 가령 대출 관련 업무나 출생증명서 발급, 호적 민원, 토지 등기 관련 업무는 물론이고 교육과 보건 프로그램들까지 모두 중단된 상태다.

  이처럼 기본권이 침해당하는 상황에서 지역주민들은 밤낮으로 촉각을 곤두세워 경계하고 있다. 언제라도 보안군이 집에 들이닥쳐 수색하고 재산을 압류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한다. 마을마다 자경단을 꾸려 교대로 불침번을 서고 있지만, 몇몇 마을들에는 보안군이 들이닥쳐 주민들을 체포해가는 일도 일어났다. 오토바이나 자동차에 타고 가도 군경의 정차 검문을 받게 된다. 검문에서 압류당한 오토바이는 돈을 내야만 되찾아올 수 있다. 총격전이 발발할 수 있다는 우려에 도시고 촌이고 할 것 없이 사람들은 집집마다 방공호를 파고 있다. 농사 일정을 비롯한 거의 모든 가구활동은 마을에 남아있는 노인과 여성, 어린 아이들에게 맡겨졌다. 모든 사정이 여의치 않다. 물가가 치솟아 한창 옥수수를 심어야 할 때인데 시장에서는 종자를 구할 수가 없다. 기본적인 소비재를 구할 수 없어 근심은 한 가득인데, 반군과 땃마도군 간의 긴장은 나날이 고조되어 사람들은 하시라도 땃마도군의 공습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불안에 가슴을 조인다. 이러한 상황이 지역주민, 특히 여성들에게 가하는 압박은 너무도 커서 모두가 걱정과 불안으로 침울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 시민불복종운동을 지지하는 소수종족무장단체와 보안군 간의 긴장

  까야주에서 활동하는 반군단체들은 적극적으로 시민불복종운동 참가자들의 신변을 보호하고있다. 이런 이유로 이 지역에서는 이들 단체와 땃마도 보안군 사이의 긴장이 날로 고조되어가는 상황이다. 까야주에는 일곱 개의 무장단체들이 활약하고 있다. 각 단체는 2009년 군부와 정전협정을 체결한 후 다섯은 민병대(People’s Militia Force Group)로, 하나는 국경수비대(BGF: Border Guard Force)로, 다른 하나는 특별배치부대(Special Arrangement Group)로 전환되었다. KNPP는 이들 중 가장 나중에 정전협정을 체결하였다. 각 단체를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KNPP(Karenni National Progressive Party)

1957년에 창설된 까레니족 정치기구로, 까레니군(Karenni Army)을 보유하고 있다.

1995년에 미얀마군과 정전협정을 체결한 적 있지만 석 달이 채 안 가 협정은 파기되었다.

국경수비대와 정부군이 2010년 KNPP 본부를 공격한 이후 2011년 한 해 동안 까레니군과 미얀마군 간의 교전이 산발적으로 발발하다가 2012년 6월 9일, 전국정전협정(NCA) 당시 다시 한 번 양측 간에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3) 이들의 주요 관할권은 모치, 파사웅, 롸이꺼, 샤도, 호야, 파루소, 도따마지 마을과 디머소 타운십이다.


KNPLF(Karenni National People Liberation Front)

1978년 결성되었으며, 1994년 5월 9일에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주로 까야주 남부 후에사이, 후에 뻘라웅, 메사이, 파사웅, 벌라케, 디머소, 롸이꺼 등을 포함한 제2특별지구에서 활동하고 있다. KNPLF는 2009년 11월 8일에 국경수비대로 전환되었다.


KNPDP(Karenni National Peace and Development Party)

1999년 KNPP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조직으로, 지역에서는 ‘까요니(Kayaw Ni, Red Kayaw)’로 알려져 있다. 롸이꺼와 디머소 타운십이 주요 관할지역이며, 일부는 국경수비대로, 또 다른 일부는 호야민병대 비즈니스그룹(Hoya militia business groups)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KNDP/A(Karenni National Development Party/Army)

1996년 KNPP로부터 갈려나온 조직이며, 지역에서는 ‘나가그룹(Naga/Dragon Group)’으로도 알려져 있다. 롸이꺼와 파루소 타운십 일대가 관할권이다. 군부의 압박으로 2009년 민병대로 전환되었다.


KNUSO(Karenni National Unity and Solidarity Organization)

2002년 KNPP로부터 갈려나온 조직으로, 지역에서는 ‘쩨퓨(White Star)’로 알려져 있다. 롸이꺼, 파루소가 주요 활동지역이며, 연락사무소는 롸이꺼에 자리하고 있다. 2009년 민병대로 전환되었다.


KNG(Kayan National Guard)

1991년 KNLP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조직으로, 주로 까야주 제1특별지구(Kayah State Special Region(1))가 주요 활동지역이다. 1992년 2월 27일에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모비에, 롸이꺼, 양곤에 연락사무소를 두고 있다. 2009년에 민병대로 전환되었다.


KNLP(Kayan New Land Party)

특별배치부대에 속해 있는 단체로, 1964년에 결성되었고. 1994년 7월 26일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롸이꺼, 따운지, 만달레이, 양곤에 연락사무소를 두고 있다. 시부(Seebu), 삔라웅(Pinlaung), 페콩(Phekhon) 지역을 포함하는 까야주 제3특별지구(Kaya State Special Region(3))가 이들의 관할지역이다. 2010년 4월 7일, 정부로부터 민병대로 전환하라는 압력을 받아왔지만 이에 응하지 않은 채 정전협정 단체로 남았다.


  정치적 불안정성이 커진 현재 KNLP는 중재를 통해 임의 체포된 민주화운동 지도자들과 교사, 그리고 강력한 라이벌 당이기도 한 NLD 당원이 풀려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반군단체들은 시민불복종운동에 참가한 경찰―80%가량이 이 지역 출신 경찰이다―과 군인들의 신변을 보호하고 있다. 경찰, 군인, 시위 지도자들, 활동적인 청년들, NLD 소속 주 장관과 의원들을 포함한 시민불복종운동 참가자들이 이들 반군단체의 보호를 받으며 속속 피신처로 이동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음식과 의복, 의약품, 은신처 등이 필요하다.

  2021년 2월 14일 평의회는 기존 형법에 새로 124조를 추가하여 ‘국가의 안위를 위한 국방부와 사법기관의 업무 수행을 저해하거나 방해하려는 자’에게 최대 20년의 형을 부과할 수 있게 하였다. 이 조항은 보안군이 탈영하여 시민불복종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또는 그렇게 하도록 독려하는 자들의 행위를 불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추가되었다.

  지방매체 ‘깐따라와디(Kantarawaddy)’의 보도에 따르면 2021년 4월 30일에 72명의 청년들이 까야주의 파루소에서 체포되었다. 이들은 KNPP 아래서 군사훈련을 수료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당국은 이들의 휴대전화 속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있는 모습을 담은 사진과 훈련 수료증을 찾아냈다고 발표했다. 이들 중 69명은 롸이꺼의 감옥에 보내졌고, 나머지 3명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현재까지 이들 중 누구도 풀려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한 반군단체의 측근이 전한 말에 따르면 5월 10일까지도 이들을 석방하지 않을 경우 땃마도군과의 충돌은 불가피해질 것이며, 그 결과 지역주민들의 안위도 보장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한다.


■ 보건 및 응급 서비스 현황

  마을 보건소는 직원들이 시민불복종운동에 참가함에 따라 제 기능을 못하는 상황이다. 2세 이하 유아를 위한 예방접종 프로그램은 중단되었고, 산전산후 진료 역시 중단되었다. 취약계층 임산부들은 숙련되지 않은 조무사의 도움을 받아 집에서 출산을 해야 하는 형편이다. 롸이꺼시의 민간클리닉에서 신생아 돌봄 서비스를 받을 수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가난한 농촌 지역 주민들은 그럴 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다. 응급상황이라도 발생하면 필요한 장비를 갖추고 있는 롸이꺼 종합병원으로 가야만 하는데, 병원에 가도 대부분의 직원이 시민불복종운동에 참여하고 있어 대체 인력을 고용하고 있는 까닭에 진료를 받자면 5천 짯이나 되는 돈을 내야만 한다. 일부는 진료비가 매우 저렴하거나 무료인 가유나미션사회연대(KMSS: Karuna Mission Social Solidarity)4)에서 운영하는 가유나 클리닉에서 출산 서비스를 받기도 한다. 응급상황으로 분류되는 젠더기반폭력(Gender-Based Violence) 관련 의료서비스는 종합병원에선 받을 수 없다. 의료사회부 담당자는 이런 유의 진료는 민간병원에서나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 같은 문제를 포함하여 지역주민들이 처해 있는 어려움을 부분적으로나마 완화하자면 다음과 같은 지원이 절실하다.


· 가난한 가구들에 대한 기초 식량과 생계보장을 위한 현금 및 바우처 지원

· 시민불복종운동에 참가하는 이들을 위한 재정 지원

· 산전산후 건강관리를 위한 위생키트 배부

· 코로나19와 군사 쿠데타가 야기한 이중의 위기에서 생계유지를 위한 현금 지원


  이 긴급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자금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신속하게 현장평가를 실시하여 긴급한 필요에 따라 우선순위를 정하여 사람들을 도울 것이다. 까야주에서 시민불복종운동에 참가하는 공무원들과 가난한 여성, 소녀들에게는 이러한 도움이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지금, 까야주에서는


  정치범지원협회(AAPP: Assistance Association for Political Prisoners)에 따르면 2021년 6월 4일까지 최소 845명의 미얀마 시민이 땃마도에게 목숨을 잃었고 5,708명이 체포되었다. 4,500여 명은 여전히 구금 중이다(AAPP 페이스북 페이지 참고). 시위 초반부터 가파르게 상승하던 사망자수 표시 곡선은 4월 들어 다소 완만해졌지만 여전히 많은 시민들이 군부에 의해 목숨을 잃고 있다. ‘보호책임(R2P: Responsibility to Protect)’을 요청하며 시위에 나섰던 시민들의 절박한 바람은 중국과 러시아의 거부권에 막혀 하릴없이 꺾였고, 일대 진전을 이룬 것으로 보였던 아세안 지도자급 회의의 합의안도 미얀마로 돌아가자마자 “상황이 안정된 뒤에” 신중히 고려하겠다며 사실상 묵살한 쿠데타 집단의 기망으로 기약할 수 없게 되었다(The Irrawaddy 2021/4/27).

  국제사회로부터 원군을 얻지 못한 미얀마의 시민들은 스스로를 지키는 것 외엔 다른 방도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고, 곧 화염병과 새총, 돌멩이를 들고 거리에 나섰다. 하지만 경찰과 민병대까지 합하면 50만이 넘는 군부의 병력은 새총과 화염병으로 맞설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급기야 시민들은 지역 곳곳에서 저항군을 결성하여 무장투쟁에 나서기에 이르렀다. 사가잉 지역에서는 깔레이시민군(Kalay Civil Army)이, 친주에서는 친랜드방위군(Chinland Defense Force)이, 에야와디 지역에서는 에야와디연방군(Ayeyarwaddy Federal Army)이 결성되는 등 수많은 지역 저항조직들이 생겨났다. 분쟁 상황을 추적하는 비영리단체 ACLED(Armed Conflict Location and Event Data Project)에 따르면 미얀마 전국에 최소 58개의 방위군이 결성되었고, 이 중 12개가 실제 활동 중이라고 한다(The Guardian 2021/6/1).

  3월 31일, 연방의회대표위원회(CRPH: Committee Representing Pyidaungsu Hluttaw)가 연방민주주의헌장을 공표하고, 이어 4월 16일 국민통합정부가 출범하면서 소수종족집단과의 연대가 탄력을 얻음에 따라 연방군 창설에 관한 구상은 한층 구체화되었다. 오래지않아 5월 5일, 땃마도에 맞서는 시민들의 군대로서 민중방위군(People’s Defense Force, 이하 ‘PDF’)이 창설되었다. 이후 소수종족주를 중심으로 기존 반군단체와 함께 땃마도군에 맞서는 지역민중방위군이 새로 결성되었다. 까야주도 그 중 한 곳이다. 특이한 것은, 까친독립군(Kachin Independence Army)이나 까렌민족연합(Karen National Union)과 같은 기존 반군단체가 땃마도군의 적수로 활약하는 다른 지역들과 달리 이 지역에서는 까레니민중방위군(Karenni People’s Defense Force, 이하 ‘KPDF’)이 주역이라는 점이다(Myanmar Now 2021/5/26). 까레니군(Karenni Army)이나 KNPP 등과 같은 기존 반군단체로부터 군사훈련을 받고 있긴 하지만 민중방위군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조직을 결성하여 무장저항에 나서고 있는 점은 연방민주주의 국가 수립을 향한 이들의 열망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를 짐작케 한다.

  그러나 그러한 열망이 실행에 옮겨짐에 따라 발생한 결과는 너무도 참혹하다. 저항군과 땃마도 간의 무력충돌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지역주민들은 화를 피해 정글로 숨어들어가는 상황이다. 유엔난민기구(UNHCR) 보고에 따르면 쿠데타 이래 이 지역에서 신규 발생한 피난민의 수는 10만 명가량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 대부분이 5월 21일 땃마도군이 디머소를 포격한 이래 발발한 최근의 충돌로부터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쿠데타가 발발한 이래 신규로 발생한 피난민의 수는 지난 2주간 61,000명에서 175,000명으로 세 배 가까이 증가했는데, 이 중 10만 명가량이 까야주에서 발생했다(UNHRC 2021/6/1). 이미 3월 말부터 까렌민족해방군(KNLA) 및 까렌민족연합(KNU), 까친독립군(KIA) 등과 교전하던 땃마도군이 이처럼 까야주에 공격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은, 이 지역이 바고(Bago)에 가까워 양곤 등지로부터 저항세력이 결집하기에 용이할 뿐만 아니라 태국과 인접해 있어 국제적 지원을 얻기에도 유리한 입지에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땃마도의 입장에서는 정전협정을 통해 민병대 및 국경수비대로 전환된 반군 병력을 동원하기에도 용이할 것이다. 소수종족주의 반군단체들이 모두 같은 목표와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동질적인 집단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면 무장충돌의 지속이 될 경우 이 지역의 상황은 더욱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도 커 보인다.

  2014년에 이루어진 미얀마 인구센서스 자료에 따르면 까야주의 총인구수는 286,738명으로 30만 명이 채 안 된다(MIMU and PSF 2016). 이를 기준으로 보면 쿠데타 이후 최근까지 발생한 신규 피난민 수는 전체 인구의 1/3이 넘는다. 땃마도군의 방화와 약탈, 무차별적인 포격을 피해 정글로 들어가 숨어 지내고 있는 피난민들이 겪을 고통은 직접 보지 않아도 가히 상상할 만하다. 앞서 소개한 까야주 소식을 통해서도 이미 지역민들은 갖가지 어려움에 직면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공습을 피해 달아난 피난민들의 처지는 말할 것도 없다. 먹을 것은 물론 식수조차 구하기 어려운 정글로 들어가 동굴이나 얼기설기 겨우 지붕을 얹은 처소에서 지내는 실정인데, 때마침 우기까지 겹쳐 건강문제가 한층 걱정되는 상황이다. 이미 상당수 피난민들이 이질이나 설사 등 수인성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다고도 한다. 땃마도군이 도로를 차단하고 구호단체들의 접근을 막고 있어 비상식량과 의약품을 전달하는 일조차 어렵다고 한다(Radio Free Asia 2021/6/11).

  내전으로 치닫게 될 기미가 짙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미얀마가 민주화를 이룩하리라는 희망을 내려놓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 민주주의를 열망하며 넉 달이 넘게 버티고 있는 시민들 때문이다. 악명 높은 ‘뺘레이뺘’ 작전으로 소수종족주의 반군단체들이 땃마도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을 지지해주는 사람들을 잃게 되었기 때문이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물론이요 생명조차 지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기약할 수 없는 미래를 위한 이상과 의지도 지키기 어렵다. 그러니 미얀마의 민주화를 바란다면 무엇보다 현재의 상황을 가장 견디기 어려운 약자들부터 우선 도와야 할 것이다. ‘복사씨’의 말에 따르면 우리 돈 2백만 원 정도면 45명에게 두 달 분량의 먹을거리를 제공할 수 있다고 한다. 필시 간신히 배를 주리지 않게 할 정도에 불과할 것이나 하루하루가 위태로운 지역주민들에게는 힘이 되어 줄 것이다. 45명의 두 달이 아닌 30만 명의 하루, 혹은 넉 달이 넘게 저항을 지속하고 있는 수백, 수천만 명의 미얀마 시민들이 단 몇 시간만이라도 버틸 수 있도록 힘을 모았으면 한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이 각자가 서있는 자리에서, 각자가 알고 있는 방법으로 미얀마의 시민들을 돕는 데 나서주기를 희망한다.




* 각주

1) 이 글에서 ‘땃마도군’과 ‘미얀마군’은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다. ‘땃마도(Tatmadaw)’라는 어휘 자체가 군대를 의미하기 때문에 ‘땃마도군’이라는 표현은 사실상 동어반복인 셈이다. 하지만 쿠테타를 통해 정부를 해산한 이후의 군은 군부가 사병화한 병력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고, 따라서 국군의 지위를 갖는 ‘미얀마군’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다. 또한 근래 땃마도라는 용어가 쿠데타 세력인 군부를 지칭하는 말로 더 많이 사용되고 있는 점을 고려하여 이 글에서는 2월 1일 쿠데타 이후 군부가 지휘하는 병력은 ‘땃마도군’으로 칭하여 ‘미얀마군’과 구별하고자 하였다.

2) 필자가 알고 있는 다른 미얀마인 지인의 말에 따르면 시위자들이 마을사무소나 군부가 지명한 새 이장을 공격하고 있는 데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직을 고사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시위자들은 체포를 피하기 위해 호구 기록이 보관되어 있는 마을사무소를 방화하는 등과 같은, 스콧의 말을 빌면 ‘약자의 무기’라 칭할 만한 저항의 양식들을 구사하며 쿠데타 세력에 맞서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 이 부분은 다소 혼동의 여지가 있어 설명을 덧붙인다. KNPP와 미얀마군과의 정전협정은 2012년 3월에 체결된바 있다. 하지만 이때의 정전협정은 당시 발생한 적대행위를 종결시키기 위한 협정이었을 뿐 떼인세인 정부에 의해 추진된 전국정전협정에 서명한 것은 아니었다. 이후 2015년 총선 승리로 NLD 정부가 출범한 후 이듬해 추진된 <21세기 삥롱회담>에 따라 KNPP도 전국평화프로세스(National Peace Process)에 참여하여 정부측과 협상을 진행해왔다. 하지만 2018년 10월 20일에 미얀마군과 KNPP 간에 무장충돌이 발생하고, 이에 양측이 2012년의 정전협정을 위반했다며 서로를 비난하는 등 갈등은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NLD 정부의 평화협상은 70여년에 이르는 내전을 종식시킬 평화협정의 기본원칙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회담의 당사자들은 정치, 경제, 토지 문제 등과 관련된 51개 기본원칙에는 동의했지만 안보 부문에 관해서는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다. 군부가 ‘미얀마에 군대는 오직 하나여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하며 소수종족무장단체들에게 무장해제를 요구하고 있는 데 따른 난항이다. 이에 관해서는 김희숙(2020) 및 박은홍(2019)을 참고하기 바란다.

4) KMSS는 까야주에 상주하는 지역사회기반단체(CBOs: Community Based Organizations) 중 하나로, 가톨릭교회를 기반으로 지역주민들을 위해 교육, 보건, 생계지원, 사회보호 및 긴급구호 활동을 펼치고 있다. 보다 상세한 정보는 이 단체의 홈페이지(https://www.kmss.org.mm)를 통해 얻을 수 있다.


* 참고문헌

김수영. 1993. 대한 뿌리. 서울: 민음사[원본초간: 1974].

김희숙. 2020. “미얀마 2019: 로힝자 위기 이후 국제관계의 변화와 총선을 향한 정치과정.” 동남아시아연구 30(2): 1-37.

박은홍. 2019. “미얀마 2018: ‘로힝자 위기’와 민주주의 공고화의 갈림길.” 동남아시아연구 29(2): 89-126.

AAPP(Assistance Association for Political Prisoners). https://www.facebook.com/burmapoliticalprisoners.

CNA. 2021/6/5. “Myanmar Self-Defence Groups Take Fight to Junta with Homemade Rifles.”

CNN. 2021/6/3. “As Bomb Rain down on Myanmar’s Hotbeds of Rural Resistance, Tens of Thousands Flee to the Jungle without Food or Water.”

KMSS(Karuna Mission Social Solidarity). https://www.kmss.org.mm

Kyaw Ye Lynn. 2020. “Police Breaking Ranks amid Rising Unrest in Myanmar.” AA. May 3.

MIMU and PSF. 2016. Situation Analysis of Southeastern Myanm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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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dio Free Asia. 2021/6/1. “Fresh Clashes in Myanmar’s Kayah State Kill Two as Displaced Surpass 100,000.”

The Guardian. 2021/6/1. “Rise of Armed Civilian Groups in Myanmar Fuels Fears of Full-Scale Civil War.”

The Irrawaddy. 2021/4/26. “Thousands of Sagaing Region Villagers Flee Myanmar Military.”

        . 2021/4/27. “Myanmar Military Launches Air Raid in Karen State.”

        . 2021/5/23. “Around 40 Myanmar Junta Troops Killed in Kayah St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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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CA News. 2021/5/24. “Four Die in Military Attact on Myanmar Church.”


        . 2021/6/2. “More Catholic Villagers Flee as Fighting Escalates in Myanm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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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ods, Kevin. 2011. “Ceasefire Capitalism: Military-Private Partnerships, Resource Concessions and Military-State Building in the Burma-China Borderlands.” Journal of Peasant Studies 38(4): 747-770.

Yahoo News. 2021/6/1. “Residents of Myanmar’s Kayah State Flee to Jungle to Escape Military Jun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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