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25.06.04
- 수정일
- 2025.06.11
- 작성자
- 동남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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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한국 동남아학계 후속세대 양성의 요람: 한국동남아연구소 연구회원 제도의 역사와 성과 | 부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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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한국의 동남아시아 연구는 1990년대부터 본격화되었다. 대학 교육이 제한적인 상황에서 동남아학계가 꾸준히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일찍부터 후속세대 육성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힘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동남아연구소의 ‘연구회원’ 제도는 핵심 기반이 되었다. 대학원생은 연구회원 세미나를 통해 자신의 연구지역과 학문분과를 넘어서 동남아시아 지역연구의 폭을 넓혔으며, 단기현지연수 프로그램을 통해 경험과 시야를 확장했다. 그리고 다양한 연구소 학술행사와 프로그램에 동등하게 참여함으로써 ‘선배’ 연구자와 유대를 강화하고 학계의 기풍을 익혔다. 다양한 재정적ㆍ학문적 지원 속에서 성장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한 연구회원은 정회원의 지위에서 또 다른 ‘후배’ 연구자를 이끌었다. 이와 같은 적극적인 초대학적ㆍ학제적 학문 후속세대 양성은 국내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우며, 학계 성장과 발전의 선순환구조 구축이라는 측면에서 가히 모범적인 사례로 평가할 만하다.
1989년 한국은 당시 개발도상국으로는 최초로 아세안(ASEAN)과 부분대화상대국 관계를 수립했으며, 2년 뒤인 1991년 완전대화상대국 관계를 수립했다. 이후 한국과 동남아시아의 관계는 비약적으로 발전했으며, 이제 양측은 경제, 외교, 안보, 사회, 문화 등 많은 부분에서 밀접하고 중요한 교류와 협력 대상이 되었다. 한국에서의 동남아시아 연구 역시 1990년대부터 본격화되었다(박승우 2009). 1980년대 말부터 동남아시아 지역을 사례 삼아 박사학위논문을 작성한 전문 연구자가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이 주축이 되어 1990년 동남아정치연구회, 1991년 한국동남아학회가 차례로 설립되었다. 동남아정치연구회는 1992년 동남아지역연구회로 확대되었으며, 이는 다시 2003년 한국동남아연구소 설립으로 이어졌다. 2020년 하나의 법인으로 통합되기 전까지 연성연대(soft solidarity) 조직인 한국동남아학회와 경성연대(hard solidarity) 조직인 한국동남아연구소는 한국의 동남아시아 연구 발전의 가장 중요한 두 축이 되었다(전제성 2006, 2014).1)
이 시기 동안 동남아시아에 대한 학문적 수요와 사회적 수요는 증가했지만, 이를 받쳐줄 대학의 동남아시아 관련 교육은 희소하고 제한적이었다(전제성 외 2008, 2021; 하채균 2018; Park 2008). 대학 교육이 원활한 공급망으로서 기능을 다하지 못함에도 한국의 동남아학계는 꾸준히 성장하고 발전했는데, 이는 학계가 초기부터 신진 연구자 육성에 적극적으로 힘을 기울인 덕분이었다. 특히 한국동남아연구소는 전신인 동남아지역연구회 시기부터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한 ‘연구회원’ 제도를 마련하여 학문 후속세대2) 유입과 양성에 힘써왔으며, 이는 학계의 지속적인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 기반이 되었다.
이 글은 한국동남아연구소의 빛나는 유산 가운데 하나인 연구회원 제도를 되짚어본다. 그동안 국내 동남아학계의 역사와 발전 과정, 교육 현황을 논하면서 부분적으로 연구회원에 대한 지원을 다루거나(전제성 2006: 120, 2014: 382; 전제성 외 2008: 277-279), 특정 시기의 연구회원을 대상으로 현황 분석을 시도한 바는 있으나(이창규 외 2008), 연구회원 활동 전반에 대한 정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연구회원에 관한 문자화ㆍ기록화된 사료 역시 집적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 글은 대학원생이라는 신분이 지닌 태생적 한시성과 이에 따른 구성원의 잦은 교체라는 구조적 불연속성으로 인하여 여기저기 흩어진 각자의 기록과 기억 속 연구회원의 흔적을 찾고, 그 편린들을 연결하고 접합하는 작업의 출발점으로서 작성되었다. 필자가 연구회원 활동을 주로 하던 시기는 2008년부터 2010년대 초까지로 연구회원 전체 역사(1993년~2025년 현재)의 중간 시점이다. 당시의 경험을 기반으로 하되 직접 경험하지 못한 시기와 불완전한 기억으로 인한 틈새는 옛 한국동남아연구소 웹사이트 갈무리, 활동 당시 주고받은 이메일, 여러 연구회원 선후배의 또 다른 기억과 자료로 보완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부분이 공백으로 남겨져있고, 이 글에서 기술된 내용 역시 교차 검증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는 점을 양지하기 바란다.
연구회원 제도의 시작
연구회원 제도가 시작된 것은 동남아지역연구회(이하 ‘연구회’) 시기인 19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3) 연구회 내에서는 일찍부터 학문 후속세대 육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그 필요성을 피력한 총무 신윤환 교수의 주도로 연구회원 제도가 실시되었다. 당시에는 대학 내 동남아시아 관련 수업이 지금보다 더 빈약했으며, 한국외대와 부산외대에서는 어문학 위주의 강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동남아시아 역사 및 사회과학 분야의 공부를 함께할 수 있는 자리는 사실상 연구회원 모임이 유일하다시피 했다. 따라서 자율적이되 집중력 높은 세미나가 진행될 수 있었고, 연구회는 이들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지원했다.4) 덕분에 출범 당시 10여 명(전제성 2006: 120) 수준이던 연구회원 수는 10년 뒤 한국동남아연구소(이하 ‘연구소’) 설립 시에는 25명5) 규모로 2.5배나 증가했다.
비록 정회원과 구분하기 위해 ‘연구’회원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이들은 총회 의결권을 제외한 월례발표회, 공동현지조사 등의 학술활동에 대해서는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참여했다(전제성 2006: 120). 초창기의 이러한 결정은 이후 정회원과 연구회원 간의 관계가 ‘수직적 스승-제자’보다 ‘수평적 선배-후배’에 가까운 풍토로 자리하는 데 밑바탕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연구회원 성원 및 운영
(1) 연구회원 가입과 성원
연구회원은 동남아시아 지역을 연구하거나 이에 관심이 있는 석ㆍ박사과정 대학원생으로 구성되었다. 개정 연구회원 세칙 제1조 가항은 연구회원을 “동남아시아 관련 공부를 하는 국내외 석ㆍ박사 과정 학생 중 연구회원에 가입하여 연구회원 세칙을 준수하는 자”로 정의하고 있다(<붙임 1> 참고). 다만 석사과정 졸업 후 박사과정 진학을 준비하거나 취업 후에도, 즉 ‘학생’ 신분이 아닌 상태에서도 연구회원 활동을 하는 경우가 여럿 있었기에 실질적으로 연구회원의 성원 범위는 재학 여부와 관계없이 ‘석사과정 입학부터 박사과정 졸업까지’로 넓게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연구회원의 조건으로 국적이나 소속 대학의 소재 등을 따지지 않았으나 실질적으로는 한국인으로만 성원이 구성되었다. 한때 학계의 확장을 위해 동남아시아 출신 유학생까지 포괄하는 것으로 연구회원의 범위를 적극적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제기되었으며, 몇몇 유학생이 ‘예비연구회원’ 명단에 오른 바 있으나 유의미한 교류와 활동으로 이어지진 못하였다. 전공 역시 별도의 제한이 없었지만, 정회원과 마찬가지로 인문ㆍ사회계열의 대학원생만 참여했다.
신규 연구회원은 주로 지도교수(정회원)나 동료 대학원생(연구회원)의 소개를 통해 가입했다. 연구회 시절 연구회원은 정회원 1인의 추천으로 가입되었으며,6) 연구소 설립 이후 제정된 연구회원 세칙 제1조는 정회원 1인 이상의 추천은 물론 “연구회원 대표와 면담을 통해 활동에 적합하다고 인정받은 자로서 연구회원 모임에 참석하여 가입의사를 명시적으로 표시”하는 것을 가입 조건이자 방법으로 규정했다(<붙임 2> 참고). 2008년 필자가 가입할 당시에는 연구회원 세미나에 3회 이상 참석이 필요하다는 조건이 부과되었는데, 이는 짐작건대 그동안의 연구회원 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가입 신청자의 의지와 성실성을 판별하고 무분별한 일회성 가입을 방지하기 위해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연구회원이 대학원생 집단이며, 특히 실질적으로 활동하며 중심을 이루는 이들이 대부분 석사 과정생이라는 점은 필연적으로 구성원의 잦은 변화를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석사 졸업 후에 박사 진학이든 취업이든 동남아시아를 더 이상 전공이나 업으로 삼지 않는 일도 있고, 현지조사, 유학, 해외 취업이나 주재원 파견 등으로 국내 활동이 불가능한 사례도 있었다. 이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누적되다 보니 명부상 인원과 실제 활동 인원 사이에는 늘 간극이 있었다. 연구회원 지위 가운데 ‘비활동회원’이라는 범주가 있었음에도 정회원의 요구나 연구회원 내부의 의견으로 인해 ‘명단 정리’에 대한 필요성이 주기적으로 제기되었고, 이를 슬기롭게 풀어나가는 일이 운영상의 과제였다.
(2) 연구회원 대표
연구회원 대표는 연구회원 모임을 이끌어가는 동시에 정회원과 연구회원의 가교 역할을 했다. 이들은 연구회원 모임 일정을 조율하고 참여를 독려하며, 신규회원을 유치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아울러 연구소의 공지사항이나 정회원이 공유하는 학술행사, 지원사업, 장학금, 취업 등의 안내 메일을 전달했으며, 반대로 연구회원의 의견이나 요구사항을 연구소 측에 개진하고 협의했다. 연구회원 대표는 별도의 명칭 없이 말 그대로 ‘연구회원 대표’로 명명되었으며, 이는 최초의 연구회원 세칙에도 반영되어 있다(제5조). 다만 초기부터 2000년대 중후반까지는 농담조로 ‘대장’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이후에는 ‘(연구)회장’이나 ‘반장’이라는 호칭이 주로 사용되었다.
연구회원 대표는 대개 석사과정생이 맡았다. 최초의 세칙은 대표의 조건을 규정하지 않았으나, 개정 세칙은 “석사 2학기 과정생을 우선으로” 하되 “석사 2학기 과정생이 없는 경우, 석사 3ㆍ4학기 과정생이” 후보가 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제5조 다항 및 바항). 또한 임기는 1년으로 정하고 있는데, 사정에 따라 1년의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거나, 혹은 1년 넘게 임기가 지속된 경우도 종종 발견된다.
2010년대에 들어서면 1인 대표 체제가 변화를 맞게 된다. 우선 2011년 5월부터 11월까지 세미나를 운영할 회원을 따로 지정하여 일시적ㆍ임시적으로 2인 체제가 가동되었다. 이듬해인 2012년 6월 회장과 부회장(총무 겸임) 체제로 개편하는 내용이 결정되었으며, 이후 2인 체제가 계속 유지되었다. 다만 이러한 변경 사항이 실제 규정에 반영된 것은 3년 뒤인 2015년의 일이며, 회장과 부회장을 ‘회장단’으로 명명했다(개정 세칙 제5조 가항).
이상을 미루어 보면 연구회원 모임의 운영은 문서화된 규정에 엄격하게 의지하기보다 당시의 상황에 따라 구성원 간 합의로 유연하게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모(母)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연구회 및 연구소가 비교적 엄격하고 강한 내부 규율을 지녔던 것(전제성 2006: 118-119)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대학원생이라는 신분의 특성이 반영된 측면도 있겠지만, 그만큼 연구회원 운영의 자율성을 보장받고 개방성을 견지했다고도 볼 수 있다.
연구회원 세미나
연구회원 모임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심적인 활동은 독회, 세미나, 스터디 등으로 불렸던 공부 모임이다(이하 ‘세미나’로 통칭). 세미나의 방식과 내용은 자율적으로 정해졌으며, 시기와 필요에 따라 계속 변화했다. 세미나 활동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유형화할 수 있다.
① 공통의 단행본이나 논문을 읽고 토론
대학원생 세미나의 가장 대표적이고 전형적인 형태이다. 분량을 나누어 발제를 맡는 경우가 많았다.
② 각자 원하는 주제와 읽을거리를 선별ㆍ제시하고 발제
전공, 연구지역, 연구주제 및 관심사가 제각기 다르기에 선택한 방식으로 풀이할 수 있다.
③ 연구계획 또는 진행 중인 연구 발표
주로 현지조사 전후나 논문 작성 과정에서 조언을 받기 위해 진행되었다.
완성된 학위논문을 발표하거나 학술대회 발표문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기도 했다.
④ 동남아시아 관련 영화 감상 및 논의
영화가 다루는 주제ㆍ소재에 관한 논문을 함께 읽기도 했다.
(예) <액트 오브 킬링>과 “시체 구덩이와 조명”(서지원 2012)
⑤ 정회원 초청
특정 주제나 연구에 대해 논하거나, 정회원의 학업, 연구, 현지조사 경험담을 청해 들었다.
특히 마지막 유형은 정회원과 연구회원 간 격의 없는 관계와 끈끈한 유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정회원은 연구회원의 요청이 있다면 주저 없이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전통은 연구회 시기부터 확립되었는데, 이를테면 Driven by Growth는 배긍찬 교수, The Moral Economy of the Peasant는 오명석 교수, Spirits of Resistance and Capitalist Discipline은 홍석준 교수 등과 같이 해당 분야에 해박한 정회원이 세미나를 함께하며 연구회원의 이해를 도왔다.7) 2010년대에 이르면 『농업의 내향적 정교화』(김형준 역), 『극장국가 느가라』(김용진 역) 등 저명한 동남아시아 연구서가 정회원이나 선배 연구회원에 의해 번역되면서 역자와 함께 세미나를 진행하는 기회도 마련되었다. 물론 이 외에도 많은 정회원이 기꺼이 시간과 노력을 내어주었다.
상기에 열거한 유형 외에도 자유롭게 연구 동향을 소개하거나 최신 이슈에 대한 토론이 이어지기도 했으며, 인도네시아어와 같이 현지 언어를 공부하는 소모임이 운영되기도 했다. 단행본 집필이나 번역이라는 목표를 두고 세미나를 진행하는 것에 대한 아이디어가 오고 간 적도 있으나 실행되진 않았다.
2004년 연구소 사무실이 마련되기 이전까지는 세미나 공간을 구하는 것이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오명석 교수의 배려로 서울대 지역종합연구소(현 국제대학원)가 주된 장소 중 하나로 사용됐으며, 정회원과 함께 세미나를 진행하는 경우 정회원의 연구실에서 모이기도 했다.8) 이후에는 연구소가 기본적인 세미나 공간이 되었지만, 월례발표회 등의 학술행사 전후로 세미나를 진행할 경우 행사장이나 주변 카페를 활용하기도 했다. 연구소는 연구회원 세미나가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월 지원금을 지급하거나 복사ㆍ제본비, 식사비, 다과비 등의 금전적 지원을 했으며, 지방에서 참석하는 연구회원에게 교통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여기에 더하여 연구회원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정회원의 특별기부나 서적 기증도 간간이 이루어졌다.
2018년 2월에는 ‘연구회원모임 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2개 세션에서 총 5명이 발표를 했으며, 우수 발표 3편에 대해서는 연구소 이사장 명의의 상장이 수여되었다. 연구회원모임 학술대회는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1회 개최에 그치고 말았지만, 연구회원의 학술 발표 참여는 한국동남아학회(이하 ‘학회’)가 주최하는 행사를 통해 계속되었다.9)
<그림 1> 2018 연구회원모임 학술대회 포스터
단기현지연수 프로그램
연구소는 한-아세안 협력기금(ASEAN-ROK Cooperation Fund)을 활용한 국제 학술교류의 일환으로 필리핀에 소재한 SEASREP 재단(South East Asian Studies Regional Exchange Program Foundation)과 함께 한국과 동남아시아의 대학원생 및 신진학자를 대상으로 동남아시아연구 심화세미나(Advanced Seminar on Southeast Asian Studies)를 시행했다. 이 프로그램은 2007년부터 2015년까지 말레이시아,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국, 베트남, 캄보디아를 순회하며 진행되었다. 그리고 2016년에는 규모를 확대하여 말라야대학교(University of Malaya) 아시아-유럽연구소(Asia-Europe Institute) 및 아세안지역주의연구소(Centre for ASEAN Regionalism)와 함께 한-아세안 신진학자 워크숍(ASEAN-Korea Young Scholars Workshop)을 개최했다(<표 1> 참고). 연구소는 심사를 통해 선발된 참가자에게 일체의 비용을 지원했다.
<표 1> 단기현지연수 프로그램 개요10)
심화세미나는 5일 내외, 신진학자 워크숍은 10일 동안 진행되었으며, 역사, 정치, 경제, 종교, 사회, 문화, 예술 등 분야별 저명한 학자들의 강의와 문화답사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를 통해 해당 국가에 대한 집중적인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은 물론, 한국 및 국외 참여자 간의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학술적 활동 지평을 확장해 주었다. 또한 개최 국가에서 유학이나 현지조사를 진행하고 있던 연구회원 선배가 있는 경우 반가운 회동이 성사되기도 했다.
프로그램의 한국 측 참가자는 연인원 100여 명에 달한다. 그런데 모든 참가자가 연구회원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회를 거듭할수록 그동안 연구회원으로 포섭되지 않았던 대학원생이 이를 계기로 연구회원에 가입하고 연구소 구성원으로 참여하는 사례가 나타났다. 즉, 단기현지연수 프로그램은 연구소 공동체의 시각에서 볼 때 학술적ㆍ교육적 효과에 더하여 내적 결속력 강화와 외적 규모 확장을 동시에 꾀할 수 있는 기회였던 셈이다.
연구회원 활동 종료와 재개
연구소 연구회원 활동은 2019년을 끝으로 ‘종료’되었다. 어떠한 명시적, 선언적 종료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2018년 하반기부터 각자의 사정으로 활동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2019년에도 1회 모임에 그치고 말았다. 이전에도 연구회원 활동이 멈추었다가 재개되거나 명맥만 겨우 유지한 채로 부침을 겪었던 시기도 있었지만, 이번 경우에는 2020년 연구소가 학회 산하로 통합되면서 연구소 연구회원의 역사도 자연스럽게 같이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2021년 학회 교육위원회는 연구회원 제도의 부활을 알렸다. 코로나19 대유행이 아직 가시지 않았던 11월 5일, 1차 모임(예비모임)이 대면(서강대)과 비대면(줌 회의)으로 개최되었고, 이 자리에는 20여 명이 참석해 동남아시아 지역연구 대학원생 모임에 대한 갈망이 여전히 크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재출발한 연구회원 모임의 초대 대표는 전경진 회원이 맡았으며, 2023년 10월부터 연구소 연구회원의 마지막 대표였던 이정우 회원이 다시 대표를 이어받았다. 이 시점부터 학회 회원의 공식 직위인 ‘준회원’으로 명명되기 시작했지만,13) 옛 명칭인 연구회원과 대학원생 모임 등의 표현도 여전히 혼용되고 있다.
<그림 2> 2021 연구회원 세미나 1차 모임 포스터
연구회원 제도의 재개는 연구소를 통합한 학회가 후속세대 양성의 유산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1차 모임 당시 김형준 학회장이 직접 참석했으며, 연구회원 출신 정회원들도 선배의 입장으로 함께하여 따뜻한 조언을 건넸다. 진행을 맡았던 정정훈 교육위원장 역시 연구회원 출신이다. 이로써 연구회원 제도는 동남아지역연구회 시대(1993~2003)와 한국동남아연구소 시대(2003~2019)를 거쳐 한국동남아학회 시대(2021~)를 맞게 되었다.
맺는말
“저한테는 동남아연구소의 연구회원 모임이 있었습니다. 어떤 수업보다도 이 연구회원 모임이 저한테는 큰 스승이었고, 이로 인해서 저는 지금까지 동남아를 하고 있습니다.”14)
연구회원이 처음 결성되던 1990년대는 국내에서 어문학을 제외하고 동남아시아 관련 수업이 극히 제한되어 있었기에 연구회원 세미나가 동남아 역사 및 사회과학 관련 연구 자료와 동향을 접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창구였다. 또한 동남아시아 수업이나 연구를 찾는 것과 더불어 동남아시아를 연구하려는 대학원생 동료를 찾는 것도 ‘하늘의 별 따기’였던 시절이다. 따라서 연구회원 모임은 단순히 지식과 정보를 얻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연구자의 정체성과 소속감을 재확인하고 학업과 연구 동력을 제공하는 심리적 안식처가 되었다.
대학원생은 연구회원 세미나를 통해 자신의 연구지역과 학문분과를 넘어서 동남아시아 지역연구의 폭을 넓혔으며, 월례발표회, 공동현지조사 등 다양한 연구소 학술행사와 프로그램에 참여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선배’ 연구자와의 거리를 좁히고 유대를 강화했다. 또한 연구소 간사, 조교로 활동하거나 각종 행사의 스태프를 맡아 학술적ㆍ행정적으로 연구소를 지원했다. 다양한 재정적ㆍ학문적 지원 속에서 성장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한 연구회원은 정회원의 지위에서 또 다른 ‘후배’ 연구자를 이끌었다. 이와 같은 적극적인 초대학적ㆍ학제적 학문 후속세대 양성은 국내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우며, 학계 성장과 발전의 선순환구조 구축이라는 측면에서 가히 모범적인 사례로 평가할 만하다.
물론 학계의 교수와 박사 구성원이 대학원생 제자와 후배를 이끌어주는 모습은 전혀 낯선 것이 아니다. 다만 한국 동남아학계의 특징이라면 대학원생을 ‘가르침과 지도가 필요한 대상’이라기보다 ‘학문과 연구를 함께할 동료’로 여기고 평등한 관계를 지향했다는 점, 소속 대학과 전공, 연구지역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제자나 후배처럼 아꼈던 점, 적극적인 프로그램 개발과 재원 마련에 나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혜택을 제공했다는 점 등에서 상대적으로 더 두드러졌다고 할 수 있다. 연구회원 제도는 수평지향적 개방성과 연대성에 기반한 이러한 학계 문화가 생성되고 재생산되는 데 핵심 기제로 작동했다.
초기 연구회원 활동을 하였던 이들은 이제 중견 학자가 되어 한국 동남아학계의 중추를 이루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2023년에 출범한 학회 제17대 회장단과 임원은 매우 상징적이다. 30년이 넘는 학회 역사 최초로 연구회원 출신인 전제성 교수가 회장이 되었으며, 부회장과 임원 다수도 연구회원으로 활동했던 이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후 세대 연구회원 출신의 신진 박사들이 지금도 지속적으로 유입되고 있다. 연구회원 제도라는 학문 후속세대 양성의 노력이 여러 세대에 걸쳐 성공적으로 결실을 맺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과거와 달리 동남아시아를 연구하는 대학원생 수가 증가하고 관련 연구와 정보 접근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대학 교육은 여전히 부족하지만, 거점이 될 만한 대학 연구소가 여럿 생겨나 활발히 활동하는 것도 고무적이다. 하지만 대학별 원심력이 강해지면서 초대학적 연구회원 모임의 구심력은 그만큼 약화되었다. 전술한 것처럼 학회에서 야심차게 연구회원 모임의 중흥을 도모했지만, 초기의 많은 관심에 비해 현재는 동력이 다소 저하된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시대가 달라진 만큼 다른 방식으로 연구회원의 유산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방안을 고민할 시점이 된 것이다. 학계 내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온 동남아시아 연구자로서의 상호 유대감과 동지 의식을 지키면서도 달라진 대학과 학문 환경에 맞는 전략이 필요한 때이다.
* 각주
1) 이 글은 2024년 12월 20일 <한국동남아학회 사단법인(한국동남아연구소) 20주년 기념 포럼: 초대학적 연구중심의 전성시대와 그 유산>에서 발표한 “한국동남아연구소와 대학원생(연구회원): 초대학적ㆍ학제적 학문 후속 세대 양성”을 수정ㆍ보완한 것이다. 필자의 크고 작은 질문에 답변해 주신 연구회원 선후배 김용진, 김현경, 서보경, 서지원, 성인규, 이정우, 장준영, 전경진, 전제성, 조영묵, 채현정 선생님, 그리고 자료 확인에 도움을 주신 김희숙 선생님에게 감사드린다.
2) 학계에서 제도적, 관용적으로 흔히 사용하는 ‘학문 후속세대’라는 표현에 대해 여러 비판의 목소리가 있다(강내희 2019; 임종태 2015 등). 그러나 이 글에서는 통용성을 고려하여 이를 그대로 사용했다. 주요 비판 지점으로 제기되는 위계성과 차별성 문제가 연구회원에는 크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도 한몫했다.
3) 기존 문헌에서 연구회원 제도의 시작 시기는 1993년(전제성 2006: 120)과 1994년(전제성 2014: 382, 2019: 10; 전제성 외 2008: 277-278)으로 달리 기술되고 있으나, 확인 결과 전자에 무게가 실리는 것으로 판단한다. 석사과정 중 초대 연구회원 대표를 지냈던 황선복의 석사학위논문 제출 시점이 1993년 7월이라는 점도 이와 같은 정황을 뒷받침한다.
4) 전제성 서면 인터뷰 2024.12.12.
5) https://www.kaseas.org/services-1
6) 전제성 서면 인터뷰 2024.12.12.
7) 전제성 서면 인터뷰 2024.12.12.
8) 전제성 서면 인터뷰 2024.12.12.
9) 한국동남아학회 연례학술대회에서 대학원생 패널이 조직되는 등 연구회원의 학술대회 참여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2023년 연례학술대회부터는 대학원생 패널 발표 중 우수한 발표를 선정하여 시상하고 있으며, 2024년에는 대학원생과 박사학위 취득 5년 이내의 신진박사를 대상으로 ‘신진학자 캠프’를 새롭게 개최하기 시작했다.
10) 일자, 국가 및 호스트 기관의 정보는 아래에서 확인했다.
- 2007~2014년: https://www.seasrepfoundation.org/archives/
- 2015년: https://prachatai.com/activity/2015/01/57591
- 2016년: https://umcms.um.edu.my/sites/aei/asean-korea-young-scholars-workshop-2016
11) 인원은 한국 측 참가자 수를 일컬으며, 김형종(2024)이 취합한 자료를 참고하되 일부 오류를 정정했다. 다만 이 수치는 기존 전제성(2019: 11)의 자료와 부분적으로 불일치하는 부분이 있어 향후 재확인이 필요하다.
12) 2010년 심화세미나는 연구소에서 선발한 8명 외에 서울대 인류학과에서 6명이 추가로 참여했다. 필자를 포함하여 이 6명 가운데 5명이 동남아시아를 연구하여 석ㆍ박사 학위논문을 작성했으며, 연구회원으로 활동하거나 정회원이 되었다. 따라서 2010년 한국 측 참가인원 수는 연구소의 예산과 성과를 기준으로 보면 8명이지만, 연구회원 내지 대학원생을 기준으로 놓고 보자면 14명으로 간주할 수 있다.
13) 준회원이라는 명명은 훨씬 이전부터 나타났다(전제성 2006; 전제성 외 2008). 하지만 이후에도 통상적으로는 여전히 연구회원으로 일컬어졌다.
14) 이재현 이메일 2011.6.3.
* 참고문헌 및 출처는 원문을 참고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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