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23.09.07
- 수정일
- 2023.09.07
- 작성자
- 동남아연구소
- 조회수
- 598
인도네시아연구의 '호주 전성시대' 낳은 해롤드 크라우치 별세

지난 8월27일 호주국립대 명예교수 Harold Crouch가 향년 83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말년의 지병으로 학술활동이 십년정도 중단되었지만 197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인도네시아정치 연구의 핵심 학자군에 속했던 분입니다.
박사논문을 보강하여 출판한 [인도네시아 군부와 정치]는 엘리트들을 많이 만나 인터뷰하고 내밀한 진술을 끌어내는 조사방법을 사용하여 그에게 국제적 명성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러나 곧 수하르토 체제의 금서가 된 이 책 때문에 크라우치는 인도네시아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답니다. 수하르토 체제 탄생 과정과 군부 정치에 대해 너무 많이 알아냈던 것입니다.

당시 크라우치는 막스 베버의 가산제를 응용한 신가산제(neo-patrimonialism) 개념으로 인도네시아의 정치를 해석하는 논문도 발표했습니다. 가산제는 봉건제의 정치형태로서 공사구분 없이 공적 업무를 사적으로 다루는데 이런 정치가 탈봉건 이후도 자행될 경우를 신가산제라 부릅니다. 부패할 수밖에 없고 봉건적인 정치체라고 지목받은 수하르토체제는 그를 무척 싫어했을 것입니다.
말레이시아 정치연구도 병행합니다(https://www.amazon.com/Government-Society-Malaysia-Asia-South/dp/0801483107?fbclid=IwAR05YxQ28mtknQW3gO2K20yfHO6oP6F_uTVUN5h5chPdBvT-iy3u5IWXauU). 말레이시아 역사학을 전공한 대학원 동료 엘렌 카스노(Ellen Khasnor)와 결혼하고 말레이시아의 대학에서 함께 교편을 잡았습니다. 싱가포르동남아연구소(ISEAS) 지원을 받아 필리핀 역사도 연구하게 됩니다. 그 때 연구성과가 우리나라에서 제목을 바꿔 번역 출판된 [동남아 권위주의의 역사적 기원]입니다(https://m.yes24.com/Goods/Detail/3583375).

1984년에 출판한 이 책의 원래 제목에 그가 보고자했던 것이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두 세기에 걸친 경제적 변형(economic change)이 사회 구조(social structure)를 어떻게 바꾸고 정치체제(political system)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를 밝히려고 필리핀을 중심에 두고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을 비교연구했습니다. 이 동남아 5개국이 모두 권위주의체제이던 시절이었기에 왜 민주화가 지체되는지가 핵심 질문이었습니다. 동남아의 지구화에서 광업의 중요성, 자본가의 종족성, 견고한 토착귀족관료, 취약한 사회적 대항력에 주목한 이 연구는 초판이 소진된 뒤에 절판되었습니다. 책을 읽고자 하는 분은 전동연 이메일로 연락주세요.
크라우치 교수는 인도네시아 입국이 가능해진 뒤에 호주대사관의 자문역을 거쳐 International Crisis Group의 인도네시아지부 초대소장(2000-2001)으로 위촉됩니다. 자카르타에서 가족과 함께 다년간 근무하며 시의적인 이슈페이퍼들을 다수 발간했습니다. 쓰나미 피해 복구 중인 아체에서 현지 대학 연구역량복원 원조사업 책임자로서 2005년부터 수년간 체류합니다. 인도네시아의 거대한 변동이 진행되던 시기에 현지에서 중책을 연이어 담당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관찰한 결과를 담은 책 [수하르토 퇴진이후 인도네시아의 정치 개혁]도 출간합니다(https://bookshop.iseas.edu.sg/publication/387?fbclid=IwAR2f_kUldBPp-1D1l_CO5s1hQ8xzG0VgBuO41ge2t2rFafuLhUk9EMFsgmg). 정년 기념으로 그의 동료들과 제자들이 헌정한 책 [수하르토의 신질서와 그 유산]은 호주국립대 츨판부 사이트에서 무료로 내려받아볼 수 있습니다(https://press.anu.edu.au/publications/series/asian-studies/soehartos-new-order-and-its-legacy?fbclid=IwAR00Dcj6TmF4WH1xytD-O8krTV2lKtqoo6GEH0p_LUFkV-LmMOrnkgBdeRw).
그는 현지인 인터뷰와 현장 감각을 중시한 학자였습니다. 인도네시아 현지조사를 떠나는 제자에게 수십명의 현지 엘리트 연락처를 들려보냈습니다. 활용할 이론을 먼저 고민하던 박사과정생에게 일년간 현지에서 살아보고 논문계획서를 쓰라고 권했답니다. 당시는 호주 대학에서 장기 현지조사비를 대학원생들에게 넉넉하게 지원할 때였습니다. 강한 현지성을 갖춘 제자들에게 교수직도 물려주었고 그들은 다작형으로 그리고 현지인 공조형으로 인도네시아 연구의 '호주 전성시대'를 엽니다. 그런 제자 가운데 대표적인 에드 아스피날(Ed Aspinall) 교수가 부고를 게재했네요( https://bellschool.anu.edu.au/content-centre/article/news/vale-emeritus-professor-harold-crouch?mibextid=S66gvF&fbclid=IwAR0hsZZyI4blIaPvh_WN6hxVGIMuKfgvQH3L7kvP-69-8mPeDPHPmcd2oEA).
한국인과 일본인 학생들에게도 다정했고 늘 미소로 응대했다는 해롤드 크라우치 교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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