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26.01.29
- 수정일
- 2026.01.29
- 작성자
- 동남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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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2021년 미얀마의 거리에서 한국의 대학으로 이어진 길: 한 미얀마 학생의 이야기 ㅣ 김소연
초록
이 글은 군사 쿠데타가 발발한 2021년, 미얀마의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던 한 대학생이 한국으로 와 대학에 다니기까지의 여정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는 2021년 쿠데타가 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저 평범하게 대학에 다니던 학생이었다. 나는 미얀마에서 수십 년 동안 지속된 군사정부 시기를 직접 경험한 세대는 아니지만, 사람들의 일상을 이상한 긴장감으로 몰아넣곤 했던 여러 사건들을 생생히 기억한다. 사프란 혁명과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사이클론 나르기스 사태 당시 벌어진 일들, 그리고 미얀마에서 개혁개방이 시작된 이후 나타난 일련의 사회적, 정치적 변화에 대한 기억과 경험을 나는 이 글에 담았다.
2021년 쿠데타는 평범한 대학생이던 나의 삶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엄혹한 군사정부 시절을 살았던 부모님의 만류를 뒤로 한 채 나는 거리로 나가, 사람들과 함께 “군사독재 반대”와 “민주주의”를 외쳤다. 그 중에서도 한국 대사관 앞에서의 시위는 내가 한국으로 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해준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나는 어떠한 우연과 인연이 겹쳐 그 새로운 길이 나를 향해 열렸는지를, 그리고 그렇게 주어진 새로운 삶을 통해 내가 배운 것과 앞으로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려 한다. 쿠데타 5주년을 맞아 나는, 그 5년이 지나도록 미얀마의 국민들이 여전히 군부 독재 아래 고통받고 있음을, 그렇지만 그 속에서도 계속해서 저항하고 있음을 잊지 말고 함께 연대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쓴다.
말로만 들었던 혁명의 역사, 그리고 첫 경험
미얀마 역사를 돌아보면 군부 독재에 반대하여 시민들이 들고 일어난 여러 항쟁들이 존재했다. 그렇지만 나를 비롯한 미얀마의 국민들은 그러한 항쟁의 역사를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책을 통해서는 배울 수 없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는 물론이고 대학 교육에 이르기까지도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온통 군부에 대한 미화와 선전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아버지 세대, 즉 ‘X세대’로부터 이야기로 전해 내려오는‘구전된 역사’를 통해서만 그러한 항쟁의 역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나마도 그런 이야기는 열린 장소에서 공공연하게 꺼낼 순 없는 화제여서, 내가 어릴 적만 해도 사람들이 “8888 항쟁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불법이고, 들키면 감옥에 갈 수도 있다”고 말했던 일이 떠오른다.
미얀마에서 성장하는 동안 내가 처음으로 직접 경험한 시민들의 항쟁은 2007년에 일어난 ‘사프란 혁명’이었다. 그 당시 우리집은 한국식으로 말하면 백반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부모님은 보통 저녁 시간부터 새벽 2시에서 3시경까지 장사를 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은 평소보다 일찍 식당 문을 닫았다. 이상하게 생각한 내가 "엄마, 왜 오늘은 일찍 문을 닫아?"라고 묻자 어머니는 "늦게까지 장사하면 경찰이 잡아갈 수도 있어. 그러니 일찍 문 닫고 집에 가야 돼."라고 대답했다. 당시 여덟 살이라는 어린 나이였음에도 그날의 상황이 내게는 무척 기이하다 생각되었던지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다. 사프란 혁명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이다.
또 다른 날, 친척집에 놀러 갔을 때의 일도 기억에 남아 있다. 그날 친척 어른들은 VCD를 통해 Democratic Voice of Burma에서 송출한 뉴스를 보고 계셨다. 당시에는 그런 뉴스를 보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다. 뉴스 화면에는 스님들이 거리에서 시위를 하고 있는 장면이 나왔는데, 자리에 있던 누군가는 그 스님들이 나쁜 일을 해서 경찰에게 맞았다고 했고, 다른 이는 “스님들이 왜 저런 행동을 하냐”고 비판하기도 했다. 실제로 비판하는 목소리가 꽤 많았는데, 스님들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스님들이 시위에 나서는 걸 좋지 않게 보는 사람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런 평가가 곧 군대에 대해 좋게 생각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 시절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았던 미얀마 전통 개그 공연 ‘아녜인’(anyeint)에서 군부에 대한 풍자가 단골 주제였다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사람들이 즐겨 보는 그런 공연을 군대는 가만 두지 않았다. 실제로 아녜인 무대에 섰던 배우들이 한번쯤 정치범으로 체포되는 일은 흔히 있었다.
사프란 혁명 당시에도 시위에 참여하는 청년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까이는 내 아버지의 친구 아들도 시위에 참여해서, 어느 날 아버지가 그 청년에게 "너 그거 아직도 계속하고 있어? 조심해야 돼. 그러다 걸리면 큰일 나."라고 경고하던 모습을 곁에서 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때 보았던 청년의 표정은 아버지의 말에 동의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여덟 살 때의 일이라 당시에 있었던 사건들을 세세하게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사프란 혁명이 일어났던 그때 주변의 분위기는 이런 에피소드들과 함께 지금까지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 내게 그처럼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사프란 혁명은 오래 가지 못하고 곧 진압되어 막을 내렸다.
2008년 나르기스의 기억
2008년 5월 2일 사이클론 나르기스(Nargis)가 미얀마에 상륙했다. 나르기스는 미얀마 인구의 절반가량이 거주하는 에야와디(Ayeyarwady) 삼각주와 양곤을 비롯한 서남부 지방을 강타했다. 군사 독재 정부의 미흡하고 늦은 정보 전달 탓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참혹한 재난이었다. 특히 사이클론이 직접 강타한 에야와디 지역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고, 내가 살던 양곤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어도 엄청난 강풍과 폭우로 상당한 피해를 겪었다.
그 당시에도 부모님은 백반집을 운영하고 계셨기에 우리 가족은 적어도 먹을 것만큼은 비교적 여유가 있었다. 그렇지만 동네의 다른 집들 사정은 달랐다. 돈이 있어도 먹을 것을 살 수 없는 상황이었고, 집집마다 물난리로 피해가 컸다. 우리 집도 사정은 비슷해서 앉을 자리도 없이 탁자 위에 냄비를 올려놓고는 한 사람씩 반찬을 나누어 주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동네의 상조회(နာရေးကူညီမှုအသင်း)1)에서는 피해가 극심한 에야와디로 직접 내려가 식품과 필수품을 나누어 주는 구호 활동에 나섰는데, 내 아버지도 마을 사람들과 함께 수해 지역으로 가서 구호 활동에 참여하셨던 일이 기억난다.
이런 따뜻한 이야기와는 달리, 내 마음을 깊이 흔든 충격적인 장면도 떠오른다. 시장에서 유엔(UN) 로고가 찍힌 소금, 모기장, 이불이 버젓이 팔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그 이유를 몰랐지만, 지금 돌아보면 구호 물품이 피해 지역 사람들에게 제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채 중간에서 빼돌려져 전용되었던 것 같다.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발벗고 나서 서로 도우며 재건을 위해 애쓰고 있을 때, 군사 독재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들은 국민을 돕기는커녕, 피해 지역 구호를 위해 미얀마로 들어오려던 국제 봉사단체들의 입국을 막았다. 그렇게 구호 활동이 지연되는 사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건만, 군부는 그 혼란의 와중이던 5월 10일, 재난 구호는 뒷전으로 한 채 자신들이 제정한 헌법 승인을 위한 국민투표를 강행했다. 2008년 미얀마 헌법은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도로와 건물이 붕괴되는 참혹한 재난 상황에서 통과되었다.
나르기스와 헌법이라는 쌍둥이 재난이 발생한 2008년 당시 미얀마 인구는 약 4,800만 명이었다(PopulationPyramid.net). 그중 투표에 참여한 사람들 수는 약2,700만 명에 불과했다. 전체 인구의 절반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고, 그나마도 군부가 밝힌 수였다. 당시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티던 상황이라 투표할 여유조차 없었다. 훗날 대학에 입학한 뒤 수강한 강의에서 한 교수님도“그때는 먹고 사는 문제로 정신이 없어 투표는 뒷전이었다”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2008년 군부는 투표 결과 93.82%가 찬성, 6.18%가 반대로 나왔다고 발표했다. 내가 수업을 받았던 그 교수님도 당시 투표에서 찬성표를 던졌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투표 전 총장이 교수들을 불러 모아 “투표를 잘해 주시기 바랍니다. 잘못하면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라는 경고를 해서였다고 말씀하셨다. 그만큼 군부 독재 아래서의 삶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람들의 의지까지 꺾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정치적 분기점 2010년 선거, 희망의 시작 2015년 선거
사이클론 피해로 큰 혼란에 빠진 와중에 미얀마 군부는 사회주의 시절에 제정된 1974년 헌법을 대체하는, 군대의 정치 개입을 합법적으로 보장하는 2008년 헌법을 통과시켰다. 그렇게 어떤 상황에서도 군대가 권력을 잃지 않을 수 있도록 준비를 마친 군부는 2010년이 되자 총선을 실시했다. 미얀마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아웅산 수찌의 NLD(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민주주의민족동맹) 당이 선거를 보이콧하여 참여하지 않은 가운데 선거 결과는 군부가 미는 USDP(Union Solidarity and Development Party, 연방단결발전당)의 승리로 나타났다. 그렇기는 해도 이후 출범한 새 정부는 이전의 군사독재 정부와는 다른 변화를 가져왔다. 개혁개방 정책이 시작된 것이다. 특히 2012년의 보궐선거는 정치에서의 개혁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2012년, 아웅산 수찌가 이 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을 때 집에 있던 부모님을 비롯한 어른들이 무척 기뻐하셨던 모습이 생생하다. 또 2010년에서 2015년 사이, 휴대전화의 유심카드 가격이 점차 내려 Ooredoo 통신사의 유심카드가 1,500짯(당시 한화로 약 1,500원)에 판매되기 시작했다(Petulla 2022). 2010년 전까지만 해도 유심카드 한 장이 몇 백만 짯에 달했던 데 비하면 엄청난 변화였다. 사람들은 “떼인 세인 대통령 덕분에 이제 국민 모두가 유심을 살 수 있게 됐다”고 말하곤 했다.
그 무렵부터 거리에서 시위하는 사람들도 늘었고, 정부를 비판하는 개그나 영화 작품들도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전 군사독재 정부 시절에는 감히 꿈도 꾸지 못했을 일이다. 세상이 변한 것을 실감할 만했다. 그렇기는 해도, 이 시기에 내가 시위에 참여하는 등의 특별한 활동을 한 경험은 없다. 거리에 나선 농민이나 노동자들과는 달리, 아직 학생이었던 내가 정부를 상대로 요구할 일은 없었던 것 같다. 다만, 2010년 총선 이후 개혁개방과 함께 달라진 정치 분위기 속에서 새로 열리는 선거에 대해서는 관심이 컸다.
2015년에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당시 미얀마의 고등학교는 2학년까지만 있었는데, 2학년이 된 그 해 마침 총선이 열리게 되어 주변의 들뜬 분위기에 관심을 가졌다. 동네 곳곳에서는 NLD 당의 선거운동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학원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마다 선거운동 현수막과 확성기 소리가 가득했다. 미성년자였기에 나는 투표권은 없었지만, 부모님이 투표소로 향하는 모습을 보며 어린 마음에도 설렘을 느끼며 ‘다음 총선 때는 나도 꼭 투표를 해야지’라고 마음을 먹었다.
그해 선거에서 NLD는 상원과 하원 모두에서 이겨 다수당이 되었고, 이듬해 미얀마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 정권을 출범시켰다. 당시 나는 정치에 대해선 깊이 알지 못했지만, ‘이제 군부 독재에서 벗어나게 되었구나’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NLD 집권 시기, 청춘의 기억
2015년부터 2020년까지는 미얀마 역사에서 가장 소중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 시기 나는 양곤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양곤대는 1988년 8888 항쟁 이후 군사정부가 학생들의 집회를 막기 위해 장기간 문을 닫고 학생을 받지 않았다. 학생들이 모여 시위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군사정부가 학교 문을 닫아, 이후 개혁개방이 시작된 2013년에 다시 문을 열 때까지 양곤대는 학생이 없는 ‘이름뿐인 대학’이었다. 2016년 12월에 입학한 나는, 재개교 이후 제4기 입학생이었다.
국제관계학과에 입학하면서 나는 정치에 대해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에 한국어 공부도 시작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대학 강의에서도 여전히 군부의 미화와 선전이 그대로 반복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기억에 남는 일 한 가지는, 어느 날 한 학생이 교수님께 “교수님, 시험에 이 내용(미얀마가 군부 덕분에 많이 발전되었다는 등의 내용)이 시험 문제로 나오면 책에 적힌 대로가 아니라 진짜 이야기를 써도 되나요?”라고 물었던 일이다. 질문에 대해 교수님은 “책에 있는 내용에서 벗어나면 안 됩니다”라고 답했다. 예감대로 그 내용이 서술형 시험 문제로 출제되었다. 나는 일부러 답을 쓰지 않았다. 외우는 것조차 싫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학교 교육 현장에서 버젓이 강요되고 있는 가짜 역사에 대한 내 나름의 저항이었던 셈이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나는 초·중·고 시절에는 배우지 못했던 양곤대학교의 역사를 처음 접했다. 선배들은 늘 “7월 7일을 잊지 말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그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 선배들에게서 들은 그날의 일을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다. 1962년 7월 7일은, 네윈 장군이 그해 3월 2일에 일으킨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위가 양곤대에서 처음 벌어진 날이었다. 그날 군부는 학생들을 향해 전쟁에서도 사용한 적 없는 무기를 들고 학교로 들이닥쳐 시위하는 학생들을 잔혹하게 진압했다. 역사책에서는 볼 수 없었던 그날의 실상을 알게 된 나는 억울함에 눈물이 났다. 8888 항쟁이 미얀마 최초의 시민 항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나는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양곤대에 입학했을 때 아버지가 했던 말도 떠오른다. “딸아, 학생회에는 들어가지 마라.” 아버지가 왜 그렇게 당부하셨는지를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나는 학생회에 들어가 활동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아버지 말을 따른 것인지, 기회가 없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두려움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나는 그런 일에 참여하지 않은 채 조용히 학창 시절을 보냈다.
내가 대학에 다니던 그 시절에 주변에서는 많은 시위가 있었다. 선배들은 라카인주(Rakhine State)와 친주(Chin State)에서 군부가 인터넷을 차단한 데 항의하는 시위를 하기도 했고(ACAPS 2020/08/26), 여자 기숙사에 오후 6시 이후 통금을 부과한 것에 항의하는 전단지를 돌리기도 했다. 아웅산 수찌가 양곤대를 방문했을 때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한 선배들도 있었고, 로힝자(Rohingya) 사태에 대한 정부의 대응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시위에 나선 선배들도 있었다. 그때의 광경들이 아직까지도 눈에 선하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그 모든 시위를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당시에는 선배들의 주장과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이해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잘못 돌아가고 있는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했던 건지, 아니면 그런 일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건지, 혹은 학생회 활동 같은 건 하지 말라던 아버지의 말 때문이었는지, 그도 아니면 그런 문제는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많은 시위를 보면서 대학 생활을 보냈다.
코로나19 시기, 붕괴의 시작
다소 과장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온 중요한 시기를 꼽자면 2020년 코로나19 시기를 빼놓을 수 없다. 미얀마는 한국과 달리 학기제가 달라서 1학기는 12월에 시작해 3월까지 이어지고, 이후 여름방학을 보낸 뒤 6월에 2학기가 시작되어 9월에 끝난다. 미얀마에서 코로나19 팬데믹은 2020년 3월, 첫 확진자가 발생하면서 시작되었다. 첫 확진자가 발생한 그 시기는 마침 4학년 1학기 기말고사 기간이었고, 내가 수강한 여섯 과목 중 네 번째 과목의 시험을 치르는 날이었다. 하지만 세 명의 확진자 발표가 나면서 그날부로 모든 시험이 중단되고 학교 문이 닫혔다.
당시 스무 살이었던 나는 ‘시험을 안 봐도 된다’는 생각에 솔직히 조금 들뜨기도 했다. 코로나에 대한 두려움과 시험 부담에서의 해방감이 뒤섞인 묘한 감정이었다. 그런데 그날이 학생 신분으로 학교에 가는 마지막 날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팬데믹으로 학교에 갈 수 없는 동안 나는 집에서 집안일을 하며 지냈다. 부모님 모두가 일을 하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코로나19로 인한 일자리 감원 대상에 포함되어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때부터 집안의 경제 사정이 빠른 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학교도 못 다니는 상황에서 ‘밖에 나가 일을 해야 하나’ 고민했고, 부족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이력서를 작성해 여러 곳에 지원했다. 하지만 졸업하지 않은 사람을 받아주는 일자리는 거의 없었다.
그 무렵 나는 한국어학원을 다니며 한국어를 배우고 있었는데, 코로나19로 대면 수업이 모두 중단된 상황에서도 다행히 학원에서 온라인으로 수업을 이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한국어 공부를 계속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팬데믹 와중에도 세종한국어 8 과정까지 모두 이수할 수 있었고, 이후 취업을 위해 미얀마에 있는 한국계 회사에 이력서를 제출했다.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동네에 있는 절에서 스님이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달라는 제안을 하셨다.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절에서, 일종의 재능기부로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2020년 선거와 예상치 못한 쿠데타
코로나19가 극성이던 2020년은 첫 민선 정부인 NLD 정부의 임기 만료를 앞두고 다시 한번 총선이 열리는 해이기도 했다. 총선은 11월 8일에 치러졌고, 나는 선거와 관련된 활동에 참여하고 싶어 ‘미얀마 공정선거연대’(People’s Alliance for Credible Elections, PACE Myanmar)에 선거 감시자(observer)로 지원했다. 감사하게도 선발되었고, 선거 당일 투표소에서 참관 활동을 해야 했던 나는 선거일에 앞서 사전투표를 했다. 미얀마에서는 사전투표를 하려면 정당한 사유가 필요했기 때문에 나는 ‘선거 감시 활동을 위해 사전투표를 한다’는 서류를 제출하고 투표했다. 나는, 여러 가지로 부족한 면이 있긴 하지만 그나마 믿을 수 있는 정당이자 유일하게 투표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NLD에 표를 던졌다.
선거 당일, 내가 배정된 투표소는 집 앞 학교여서 비교적 여유롭게 갈 수 있었다. 선거 감시자는 투표 시작 시간보다 훨씬 일찍 투표소에 도착해야 하는데, 현장에 가보니 나보다 더 일찍 온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투표를 하려고 온 시민들이었다. 우리 집에서도 무슨 일이 있어도 투표를 빠뜨린 적이 없는 아버지를 비롯해 투표권이 있는 가족 모두가 나보다 먼저 투표소에 도착하여, 그것도 사람들이 늘어선 줄 맨 앞에 서서 투표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우리 가족만 그렇게 일찍 왔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오전 6시부터 도착하여 줄을 선 사람들이 많았다.
코로나 시기였기에 투표소에 온 사람들은 모두 마스크를 쓴 채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가 차분히 투표했다. 선거 감시자의 역할은 투표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상황을 기록하는 것이었지만, 내가 배정된 투표소에서는 다행히 특별한 문제없이 모든 투표가 안전하고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나는 개표 시간까지 자리를 지켜 투표함이 열리고 표를 세는 과정까지 끝까지 지켜봤다. 그날 선거는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선거 결과 NLD 후보들이 대거 당선되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상했던 대로라 나 역시도 그 결과에 놀라지 않았다. 그렇게 선거가 끝나고, ‘이제 조금만 더 버티면 코로나도 끝나겠지’ 하는 마음으로 나는 절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며 이력서를 제출한 한국계 회사에서 좋은 소식이 오기를, 그리고 학교가 다시 문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군부가 선거 부정을 지적하며 선거 결과가 무효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나아가 자신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쿠데타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뜻까지 내비쳤다. 하지만 당시 대부분의 국민들은 물론 나 역시도 군부의 주장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개그 공연을 보는 것처럼 웃어넘겼다.
미얀마어로 ‘쿠데타를 일으키다’는 ‘아나 떼인디’(အာဏာသိမ်းသည်)라고 하는데, 여기서 ‘아나’는 ‘권력’을, ‘떼인디’는 ‘정리하다’, ‘치우다’라는 뜻이다. 전체를 한국어로 직역하면 ‘권력을 치우다’가 된다. 당시 사람들은 이 표현을 비틀어 “치울 거면 (권력 말고) 쓰레기나 치워라”(သိမ်းချင် အမှိုက်သိမ်း)고 말하며 군부를 조롱했다. 나도 그 말에 따라 웃었고, 군부의 위협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있다고는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다. 사실 페이스북에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지만, 사람들은 그런 주장을 무시했다. 나 역시도 21세기에 그런 일이 벌어질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1990년에도 군부가 선거 결과를 무효화한 적이 있었지만, NLD가 같은 일을 두 번이나 당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2021년 2월부터도 NLD 정부가 계속 집권할 것이라고 확신하며, 그저 ‘학교가 언제 다시 문을 열까’만을 궁금해하며 뉴스를 기다렸다.
그러던 2021년 2월 1일 새벽, 나는 잠결에 휴대폰을 확인했다.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았다. 미얀마에서는 가끔 인터넷 장애가 있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다시 잠들었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도 여전히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았다. 대학교에 다니면서 이렇게 오래 인터넷이 끊긴 것은 처음이었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전화조차 연결되지 않았다. 그 순간, 뭔가 심상치 않다는 예감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의 표정은 평소와 달랐다. 그리고 곧바로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선거 결과를 부정하던 군부가 실제로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이었다. 인터넷도 안 되고 전화 연결도 안 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그 소식을 군부가 내보낸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들었다. 내 삶에서 가장 끔찍했다 할 정도 나는 그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 새벽부터 군인들이 아웅산 수찌 국가고문과 대통령을 비롯해 전국의 국회의원들, 특히 NLD 소속 의원들을 체포했다. 정치 활동가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군부 특유의 방식대로, 사람들 모르게 새벽에 전격적으로, 그리고 은밀하게 체포 작전을 벌였다. 방송국과 주요 정부 기관도 모두 군부의 통제 아래 들어갔다.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킬 때마다 반복되는 패턴 중 하나가 있다. 바로 통신을 차단해 국민들이 서로 소식을 전하지도, 소통을 통해 함께 힘을 합쳐 공동 대응에 나서지도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새벽에 인터넷과 전화가 동시에 끊겼고, 그 틈을 타 군부는 반대 세력을 체포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쿠데타 이후, 국민의 혼란과 분노
나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무조건 나가서 시위해야 한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고, 시위에 입고 나갈 옷부터 챙겼다. 부모님은 단호하게 말렸다. 그럼에도 나는 페이스북에서 시위를 조직하는 그룹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 당장 시위에 나가면 안 된다’는 정보가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그 내용은 “쿠데타 직후 36시간 동안 집에 가만히 있으면 쿠데타를 부정하는 뜻이 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3일 동안 나가지 말자’는 주장까지 나왔다.
국제관계학을 전공하면서도 이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정보 때문에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다. 시위에 나서야 한다는 사람들에게 “쿠데타를 인정하는 사람”이라고 욕을 하는 경우도 있었고, 나 역시 그런 주장들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망설였다. 결국 ‘나중에 사람들이 나가면 나도 나가자’고 결심했다. 당장은 SNS에 쿠데타 반대 해시태그를 올리고 온라인으로만 목소리를 냈다.
이틀 뒤, 더 이상 참지 못한 만달레이 의대생들이 가장 먼저 거리로 나왔다. 그 장면이 SNS에 퍼지자 점점 사람들이 거리로 모이기 시작했고, 시위는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곧바로 시위하면 안 된다’는 정보는 군부가 퍼뜨린 가짜 뉴스였다. SNS에서는 이를 “psywar”(심리전)이라고 불렀다. 군부는 그런 가짜 뉴스로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들어 시위 시점을 늦추었고, 그 사이 국회의원들과 주요 인사들을 완전히 장악했다. 정치 지식이 부족했던 미얀마 국민 상당수가 그 함정에 걸렸고, 나 역시 그중 한 사람이었다.
전국 시위와 하나 된 국민들
군부가 퍼뜨린 가짜 뉴스로 처음 이틀 동안엔 침묵이 이어졌지만, 사람들이 행동에 나서기 시작하자 시위는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그렇지만 나는 시위에 나가지 말라는 아버지의 만류로 처음부터 시위 현장에 나가지는 못했다. 시위가 시작된 며칠 동안은 집에 머물며 SNS를 통해서만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다 2021년 2월 10일 무렵(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드디어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시위에 참여할 수 있었다.
우리집은 양곤에 있었지만 시내와는 꽤 먼 거리였기에 시위에 나가려면 약 두 시간 정도 버스를 타야 했다. 집에서 나와 버스를 탔을 때 버스 안은 이미 시위에 나가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버스비도 받지 않았다. 사람들은 버스 안에서 8888 항쟁 당시 불렸던 노래(Kabar Ma Kyay Bu)를 힘차게 부르며 시내로 향했다.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하고 집에서 나가 시내에 도착한 나는 곧 친구와 함께 시위에 참여했다. 먼저 양곤대 근처인 흘레단(Hledan) 거리에서부터 시작했고, 이후 시위대 행진에 합류하여 싱가포르 대사관까지 걸어갔다.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시위에 동참하고 있었는데,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다. 수많은 인파로 차량은 도로에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시위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시위대를 지원하는 시민들도 많았다. 어떤 이들은 차량에 물, 음식, 음료수를 가득 실어 와서 시위대에 나눠주었다. 나 역시 그들이 나눠준 물과 음식을 받아먹으며 시위를 이어갔다. 그 순간 나는 우리 국민들이 서로를 위해 보여주는 따뜻한 마음과 대동단결의 정신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시위 현장에서의 그 경험은 ‘우리는 반드시 이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는 결심을 더욱 굳혔다.
한국대사관 앞에서 외치다
며칠간 시위가 이어지던 중, 독일 대사관 앞에서 한 여성이 독일 대사에게 편지를 전달하는 장면이 SNS를 통해 퍼졌다. 이 소식은 곧 또 다른 아이디어로 확산되었다. 바로, 각자가 할 수 있는 언어를 활용해 해당 국가의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하자는 것이었다. 일본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일본 대사관 앞으로, 중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중국 대사관 앞으로, 러시아어를 아는 사람은 러시아 대사관 앞으로 가는 방식이었다.
사실 이전에도 많은 이들이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했다. 대사관 앞이라면 경찰이나 군인이 함부로 폭력을 행사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특히 미국 대사관과 유엔 사무실 앞에는 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한국어를 배운 나와 내 친구는 한국어로 우리의 상황을 알리고 호소하기 위해 한국 대사관 앞으로 가기로 했다. 날짜는 2021년 2월 18일이었다.
그날 아침, 아버지는 나에게 시위에 나가지 말라고 단호히 말씀하셨다. 나는 "오늘까지만 마지막으로 나가고 돌아오겠다"며 아버지를 설득하고는 집을 나섰다. 사실 그날 내가 집으로 곧장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아버지는 알지 못하셨을 것이다.
한국 대사관을 향해 버스를 타고 가던 중, 도로는 이미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막혀 있었다. 한국 대사관까지 차로도 한 시간은 더 걸리는 거리였기에 결국 나는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다. 다행히 나 혼자가 아니었다.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었고, 우리는 함께 구호를 외치며 힘차게 걸어갔다. 중간에 친구와 만나 다시 함께 한국 대사관으로 향했다.
오전 10시가 조금 넘어 도착한 한국 대사관 앞에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시위를 하고 있었다. 나도 그들과 함께 목소리를 높이며 호소했다. 시위대에게는 시민들이 가져온 물과 음식, 음료가 나눠졌다. 그날 하루 종일 나는 한국 대사관 앞에 머물렀다. CCTV 앞에서 피켓을 들고 무릎을 꿇으면 혹시 대사관에서 나와 주지 않을까 싶어 그렇게 기다리기도 했다. 구호를 외치던 중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왔고, 내 울음소리를 들은 옆 사람들도 함께 울기 시작했다. 우리는 다 함께 눈물을 흘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저희를 도와주세요. 저희는 쿠데타를 반대합니다. 저희 편에 서서 함께 싸워 주세요.”
행인들도 우리가 우는 모습을 보고 다가와 위로의 말을 건네 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하나 둘 자리를 떠났지만, 나는 ‘오늘은 대사님이 퇴근할 때까지 기다리자’고 결심했다. 오후 5시쯤이 되자 대사가 탄 차량이 나왔고, 우리는 차량을 향해 마지막 힘을 다해 구호를 외쳤다. 그렇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나와 친구는 “내일 다시 오면 좀 달라지지 않을까?”라며 서로를 다독이고는 그날의 시위를 마무리했다.
집으로 돌아가면 아버지가 다시 시위를 못 나가게 할 것이 분명했기에, 나는 친구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은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알리고는 친구 집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친구와 함께 SNS 활동을 이어갔다.
다음 날인 2월 19일, 나는 다시 시위에 나설 준비를 하고 한국 대사관으로 향했다. 오전 10시쯤 대사관 앞에 도착하자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전날과는 다른 얼굴들이었다. 우리도 서둘러 그들 사이에 섞여 함께 구호를 외쳤다. 그 중에는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는 한 언니가 있었는데, 그녀는 한국 대사에게 전달할 편지를 준비해 왔다고 했다. 언니는 자신의 학생들과 함께 스피커로 “대사님, 나와서 편지를 받아 주십시오!”라고 외쳤고, 나와 친구도 그들과 함께 목소리를 높였다.
그날도 사람들은 음료와 음식을 가져와 시위대에 나누어 주었다. 우리는 그 음식과 물로 하루를 버티며 대사관 앞에서 계속 호소했다. 시간이 흘러도 대사는 나오지 않았다. 경비원들에게 물어보니, 대사가 외무부 담당자와 함께 편지를 받을지 말지를 상의 중이라고 답했다. 우리는 “그냥 나와서 편지만이라도 받아 주실 수는 없나요?”라고 정중히 물었지만, 경비원은 기다려 보라고만 했다.
답답한 마음에 나는 다시 무릎을 꿇기로 했다. 스피커를 손에 들고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저희는 밤마다 두려움 속에 살고 있습니다. 저희 나라와 저희 미래를 위해 도와주십시오. 제발 저희를 살려 주십시오”라고 한국어로 외쳤다. 눈물이 흘렀고, 내가 우는 모습을 본 다른 시위자들도 하나 둘 무릎을 꿇고 함께 외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사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결국 경비원들이 대신 편지를 전달해 주겠다고 했는데, “공식적인 형식으로 다시 써 와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동의했고, 그날 시위를 마친 뒤 나는 친구 집으로 가 한국인 한국어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다. 부족한 한국어 실력을 보완하기 위해서였다. 선생님의 도움으로 편지를 정식으로 작성해 봉투에 넣고, 내일 다시 대사관에 가져가기로 했다.
가로막힌 편지
다음 날 아침, 전날 만났던 언니와 연락해 오전 10시에 대사관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러나 뜻밖의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 대사관과 미국 대사관이 있는 대학로가 경찰에 의해 완전히 봉쇄된 것이다. 길이 막히면서 일찍 도착한 사람들은 안에 갇힌 채 나오지 못했고, 나중에 온 사람들은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나도 대사관 앞까지 가지 못했다. 밖에 있던 사람들은 길을 열어 달라고 요구하며 시위를 이어갔지만, 경찰은 완강히 길을 막았다. 경찰들은 심지어 소방차를 동원해 “물을 뿌리겠다”고 협박하기까지 했다. 사람들 틈에 섞여 있던 나는 그 말을 듣고는 도망쳤고, 잡힐까 두려워 근처 어느 집으로 몸을 피했다. 다행히 그 집 사람들은 우리에게 음료와 음식을 내주며 잠시 쉬게 해 주었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시위는 계속 이어졌다. 저녁이 되어서야 안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밖으로 나올 수 있었고, 나와 친구도 다시 친구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은 군부가 대사관 앞 시위를 본격적으로 막기 시작한 첫날이었다. 다음 날 다시 대사관으로 향했지만, 대사관 앞 도로는 이미 철저히 봉쇄되어 있었다. 그 이후로는 대사관에서 조금 떨어진 큰 길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시위를 이어 갔다. 그렇게 대사관으로 향하는 길이 가로막힘에 따라 우리는 끝내 그 편지를 직접 한국 대사에게 전하지 못했다. 대신 나는 한국어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직접 전하지 못한 편지를 이메일로 보냈다.
그날 이후 나와 친구도 큰 길로 나가 시위에 합류했다. 사람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며 “국민의 힘으로 군대를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을 안고 하루도 빠짐없이 거리에 섰다. 아버지는 전화를 걸어 “시위를 해도 소용없으니 집으로 돌아오라”고 하셨지만, 나는 집에 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친척들에게 용돈을 조금씩 받아 친구 집에 머물며 계속 시위에 참여했다.
한국 방송을 타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한국 대사관 앞에서 시위하는 모습이 KBS와 MBC 등 한국의 방송매체 뉴스를 통해 보도되었다. 다행히 나는 뒷모습만 나와서, 나의 한국어 선생님조차 처음에는 영상을 보고도 뉴스에 나온 사람이 나인 줄 모르셨다가 내가 직접 얘기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알아차리셨다. 이후 MBC 뉴스에서 내가 한국 대사관 앞에서 호소하는 장면이 길게 보도되었고, 그때부터 나는 한국의 방송사들로부터 인터뷰 제안을 받기 시작했다.
나의 한국어 선생님은 “앞으로는 위험할 수 있으니, 인터뷰 제안이 오면 꼭 선생님에게 먼저 알리라”고 당부하셨다. 나는 그 당부대로 한국에서 인터뷰 제안을 받고 나면 먼저 선생님에게 알렸고, 선생님이 하지 말라고 한 인터뷰는 모두 거절했다. 그러던 중, 선생님으로부터 직접 제안이 들어왔다. TBS 라디오 방송으로부터 온 제안이었는데, 인터뷰를 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나도 하기로 했다. 나는 미리 질문지를 받아 답변을 준비하고, 방송을 위해 한국어 연습도 했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날 새벽 7시(한국의 아침 생방송 시간)에 전화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 방송에서는 나의 한국어 선생님도 함께 인터뷰에 참여하셨는데, 그 방송에서 선생님은 “지금 미얀마 상황에서 이 학생은 위험하다. 이 학생이 한국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줄 분이 있으면 연락해 달라”고 공개적으로 요청하셨다. 그날 이후 선생님은 나에게 “시위에 나가지 말고 연락을 기다리라”고 하셨다. 한국 대사관 앞에서의 나의 호소 장면이 한국의 뉴스와 미얀마 페이스북 공간에서 널리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찰이나 군인이 직접 나를 찾아올 만큼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는데, 당시 밀려 들었던 인터뷰 요청을 선생님과 상의한 끝에 거절한 것이 나를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한국에서 유학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연락이 선생님에게 왔다. 선생님은 이제 정말로 시위에 나가지 말고, SNS 활동도 멈추고, 한국 유학 준비에 집중하라고 하셨다. 우선 여권을 만들어야 했지만, 시위 때문에 여권 사무소도 문을 닫아 언제 다시 열릴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몇 달은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할 순 없었던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어기고 다시 시위에 나갔다. 그때는 이미 군인과 경찰이 시위대에 최루탄을 던지고 곤봉으로 때리며 체포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시위에 나가는 사람들은 혹시 다쳤을 경우를 대비해 팔에 부모님이나 가족의 연락처를 적고 나갔다. 나도 그렇게 했지만, 여자이기도 하고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맨 앞에 서지는 못했다. 대신 뒤쪽이나 중간쯤 되는 자리에 서서 구호를 외치다 최루탄이 날아오면 물을 끼얹어 터지지 않게 하거나, 경찰이 진입했다는 소리가 들리면 도망치는 등의 방식으로 시위를 계속 이어갔다.
양곤에서 시위가 벌어지던 장소 주변에는 아파트 단지가 많았다. 그곳에 사는 주민들이 우리를 지켜주었다. 주민들은 경찰이 다가오면 “집 안으로 들어오라”고 불러 숨겨 주었다. 그렇게 집 안으로 숨어 들어가 경찰이 계속 보이면 밖으로 나가지 못한 채 장시간 머물기도 했다. 주민들은 시위대를 위해 밥을 준비해 두었고, 우리가 밖으로 나갈 수 없을 때는 아파트 단지에 사는 주민들이 서로 연락하여 필요한 음식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우리는 그렇게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끼니를 해결하며 숨어 있다가, 주변이 잠잠해지고 나서야 밖으로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공포에도 굴하지 않고, 시민과 함께
쿠데타 이후 계속 시위에 나가면서 심한 공포를 느낀 날들이 많았다. 그런 날들 중 하나, 양곤대학교 안에서 시위를 했던 날이 떠오른다. 당시 나와 친구는 학생회에 연락을 하여 함께 시위에 참여하기로 했다. 우리는 학교 앞에 모여 잠겨 있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학교 안으로 들어가 보니 양곤대학교의 상징과도 같은, 미얀마 민주주의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하는 기념비적 장소이기도 한 총회관(Convocation Hall) 건물 앞에 이미 경찰들이 들어와 대기하고 있었다. 경찰들은 그 자리에서 바로 학생들을 체포하진 않았다. 우리는 경찰들 앞에서도 힘차게 구호를 외치며, 1962년 7월 7일 많은 학생들이 희생당한 붉은 광장(Red Square)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시위를 이어갔는데, 역사적인 장소에서 외친 구호는 더욱 절실하게 울려 퍼졌다.
양곤의 다운타운인 산차웅(San Chaung) 지역에서 시위를 했던 날도 기억에 남는다. 그날 사람들은 경찰이 던질 최루탄과 소음탄에 대비해 물풍선과 젖은 수건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시위가 시작된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곧 최루탄과 소음탄이 쏟아졌다. 우리는 물을 뿌려 연기를 줄이며 버텼다. 곧 앞쪽에 섰던 시위대가 “경찰이 진입한다”고 외쳤고, 사람들은 서로 부딪히지 않도록 조심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와 친구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무작정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뒤를 돌아보니 경찰들이 바로 뒤에서 쫓아오고 있었다. 골목 앞쪽에도 경찰이 나타나면 끝이라는 생각에 더욱 필사적으로 달렸다. 다행히 근처 아파트 주민이 우리를 불러주었고, 우리는 맨 위층으로 올라가 몸을 숨길 수 있었다. 그 집 안에는 이미 10명 넘는 사람들이 피신해 있었다. 창문으로 내려다보니 골목은 경찰들로 가득했고, 몇 분 뒤에는 누군가 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공포영화 같은 순간이었다. 혹시 경찰일까 두려워 문을 열지 않았고, 우리는 각자 방 안으로 흩어져 숨었다. 한참 동안 계속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멎고 나서야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창밖을 내다보니, 여전히 경찰들이 거리를 가득 메운 가운데 몇몇 사람들이 잡혀가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그 광경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경찰이 빠져나갈 때까지 우리는 그 집에서 기다리며 집주인이 준비해 준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몸을 추슬렀다. 경찰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뒤에야 나는 친구와 함께 그 집에서 나왔다. 그렇게 시위 중에 가까스로 도망쳐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숨었던 경험이 여러 번 있었다. 경찰의 폭력으로 다쳐 구급차에 실려 가는 사람들도 많이 목격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어김없이 시위에 나가 있던 나는 한국어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소연 씨, 어디에 있어요?”라는 물음에 나는 “저 시위 중이에요”라고 답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이제 시위에 나가지 말라고 했잖아요. 지금 한국에 유학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어요. 그때까지는 안전하게 있어야 합니다. 군부는 점점 더 끔찍한 방법을 쓸 거예요. 한국에 가면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요. 이제 시위에는 그만 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선생님의 말소리는 단호했고, 나는 ‘네’하고 대답했다.
그날의 시위를 마지막으로, 나는 더 이상 시위에 나가지 않았다. 한동안은 친구 집에 머물다가, 얼마 후부터는 같은 동네에 사는 친척집에 머물며 지냈다. 당시 집으로 가는 길이 막혀 있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며칠 뒤 아버지가 직접 데리러 오셔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아마 그때가 4월쯤이었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뒤 나는 SNS 활동도 중단하고 조용히 지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것이 불안했고, 한국에 가기 전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한국어 학원에서 개설한 비즈니스 한국어 수업을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한국에 갈 준비를 하면서 여권 사무소가 다시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한국 시민사회의 연대가 열어준 새로운 길
그로부터 두 달 뒤, 6월이 되어서야 여권 사무소가 다시 문을 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곧바로 여권 발급에 필요한 서류를 갖추고, 동시에 학교 입학을 위한 지원서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권 사무소에서 여권을 발급받는 일은 쿠데타 전보다 훨씬 어려워졌다. 신청하려는 사람들이 몰려 줄이 끝이 안 보일 정도로 길었다. 결국 아버지는 여권 사무소에서 일하는 지인에게 연락하여 약간의 돈을 뇌물로 건네고 나서야 조금 빨리 여권을 받을 수 있었다.
여권과 함께 학교 지원과 비자 신청에 필요한 각종 서류들도 준비해야 했다. 그러나 당시 우리 가족에게는 여권 발급과 서류를 갖추는 데 필요한 돈조차 여유가 없었다. 그때 한국어 선생님이 나를 위해 그 비용을 모두 빌려주셨다. 선생님의 도움 덕분에 나는 비로소 한국 유학을 위한 준비를 이어갈 수 있었다.
내가 한국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된 계기는 우연과 인연이 겹쳐 만들어졌다. 한국에서 나를 받아 준 학교는 광주광역시에 있는 광주대학교였는데, 학사 과정을 마칠 때까지 생활비를 제공해 준 단체는 다름 아닌 5·18기념재단이었다. 그런데 내가 이런 인연을 맺을 수 있게 된 것은 당시 광주 MBC의 사장님 덕분이었다. 그 사장님은 미얀마에 있는 나의 한국어 선생님에게 직접 연락을 취해 내가 유학을 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다.
나중에 한국에 와서 알게 되었는데, 그 분이 그처럼 내게 도움을 주고자 나선 이유는 바로 광주에서 있었던 5·18민주항쟁에 대한 기억과 깊이 연관된 것이었다. 한국 대사관 앞에서 호소하는 나의 모습을 본 그 분은,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민주화 시위가 한창이던 때 직접 목격한, 한 여학생이 시민들을 향해 차량에 올라 스피커로 간절히 호소하던 모습을 떠올렸다고 했다. 그 기억에 더해, 당신의 딸 이름과 나의 한국 이름(소연)과 같다는 인연까지 겹치면서 더욱 간절히 돕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고 했다.
이런 인연으로 나는 마침내 2021년 10월 5일,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당시엔 코로나19 상황이 엄중했기 때문에 한국에 도착한 후에는 먼저 호텔에서 1주일간 격리 생활을 보내고 난 후에야 광주로 향할 수 있었다. 광주MBC 사장님은 내가 광주까지 가는 택시비는 물론이고, 광주에 도착한 후 학교에서 다시 1주일간의 추가 격리를 마치고 나왔을 때 당장 생활할 돈까지 지원해 주셨다. 그 분이 봉투에 담아 건네 주신 50만 원 덕분에 나는 한국에서 한 달을 버틸 수 있었다.
격리에서 나온 직후인 2021년 10월 22일과 23일에는 5·18기념재단이 주최한“코로나 이후 아시아 인권과 포용적 민주주의”라는 주제의 네트워크 거점회의에 참여해 미얀마의 민주화 상황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5·18기념재단의 업무 담당자들과도 직접 이야기를 나누며 앞으로 5·18정신과 관련하여 내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그 후 나는 광주대학교에서 어학연수 과정을 밟으면서 동시에 5·18기념재단의 국제연대 부서(현재의 글로컬센터)에서 국제 인턴으로도 활동하기 시작했다. 재단은 생활비를 지원해 주는 동시에 업무 경험을 쌓을 기회까지 제공해 주었는데, 그러한 경험이 나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한국에 입국한 외국인 유학생은 입국 후 6개월이 지나야 합법적으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6개월 뒤부터 주 10시간씩 일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엔 한국어능력시험(TOPIK) 자격증이 없었기 때문에 근무 시간이 제한적이긴 했지만, 그마저도 나에게는 소중한 기회이자 경험이었다.
광주에서의 배움과 그 너머
5·18기념재단에서 2년 넘게 일을 하는 동안 얻은 배움과 경험은 정말로 많았다. 무엇보다도 드라마나 책을 통해서만 알았던 광주의 5월을 직접 체험하며 몸으로 배우게 된 것이 가장 큰 의미였다. 그 경험은 단순한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마치 현장에서 살아 움직이는 역사를 만나는 듯한 감동을 주었다. 특히 시민들의 저항이 미얀마의 봄 혁명과 닮은 점이 많아 더욱 깊이 공감할 수 있었고, 두 나라의 민주화 투쟁이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울렸다. 재단에서의 업무 경험은, 단순히 국제 인턴에게 주어진 일만 하는 게 아니라, 5·18의 역사와 정신을 더 깊이 이해하고 배울 수 있는 훈련을 받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 기간 동안 나는 5·18뿐만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의 전체적인 흐름과 역사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다. 업무 과정에서 ‘대동심’이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되었고, ‘공동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5·18 당시 시민들이 나누어 먹었다던‘주먹밥’ 이야기가 나에게는 큰 울림을 주었는데, 미얀마에서 시위를 하던 시절의 기억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배고픔 속에서도 나눔을 통해 연대했던 순간들이 오버랩되면서, 민주주의라는 가치가 단순히 제도나 정치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과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실감했다.
5·18기념재단에서 광주민주포럼, 5·18 아카데미 등 다양한 행사와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보조 업무를 맡으면서 나는 한국뿐 아니라 국제적인 민주주의 네트워크에도 함께하는 기회를 얻었다. 그 과정에서 미얀마 민주주의와 연대를 위해 활동하는 한국의 여러 인사들과 만나고, 또 다른 나라에서 온 많은 활동가들과도 교류하며 관계를 더욱 넓히는 기회도 가졌다. 이는 단순한 인턴십 경험을 넘어, 내 삶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학업 면으로는, 광주대학교에서 1년 동안 한국어 어학연수를 마친 후 물류무역학과 3학년으로 편입했다. 미얀마에서는 국제관계학을 전공했지만, 광주대에는 동일한 학과가 없었기에 가장 가까운 전공이라 생각해 무역학을 선택했다. 이후 3년 동안 등록금과 기숙사비를 전액 장학금으로 지원받으면서 학업에 전념할 수 있었다. 전공 수업에만 머무르지 않고 청소년상담·평생교육학과에서 시민교육 관련 수업을 듣기도 했으며, 교양으로는 ‘시민사회와 NGO’ 등 평소 관심 갖고 있던 여러 과목도 수강했다. 이러한 수업들을 통해 한국 사회와 민주주의의 작동 원리를 이전보다 훨씬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무역학 전공이 나의 관심사와는 조금 거리가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결국 나는 학부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하여 이전부터 관심 갖고 있던 쪽으로 공부를 계속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는데, 어떤 전공을 선택해야 할지가 가장 큰 고민이 되었다. 미얀마에서 전공했던 국제관계학을 계속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여전히 강했고, 그래서 행정학이나 정치외교학 같은 분야로 방향을 잡고자 했다. 다시금 전공을 살려 미얀마와 관련된 연구나 활동을 이어가고 싶다는 열망이 내 안에 크게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대학원 진학과 도전
고민 끝에 내가 미얀마에서 한국에 온 이유는 단 하나만이 아니었다. 미얀마가 다시 발전할 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가장 컸고, 또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었다. 동시에 미얀마에 남아 있는 가족에게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처음엔 한국에 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쁘고 설레었지만, 나라가 무너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친구와 가족을 남겨둔 채 혼자 한국으로 떠난다는 사실이 큰 죄책감을 안겨주었다. 그래서 한국에 들어온 뒤 인터뷰를 할 때마다 늘 “내 어깨에는 무거운 짐이 있다”라는 말을 되뇌곤 했다. 가족과 친구를 두고 왔다는 죄책감, 그리고 그만큼 미얀마를 위해 반드시 무언가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언제나 나의 머리와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지식을 쌓을 필요가 있었다. 미얀마에 있을 때나 한국에 와서도 배움은 계속해 왔지만, 아직 많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다. 한국에서 석사를 하면서 더 깊이 배우고 성장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부 4학년 1학기부터 대학원을 알아보기 시작했고, 2학기에는 구체적으로 지원할 학교를 정했다.
우선 5·18 기념재단에서 추천서를 받고, 지도교수님께도 추천서를 부탁드렸다. 광주대 교수님의 소개로 연세대학교 행정학과 교수님과 연락을 했는데, 그곳에 BK21 프로그램이 함께 운영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연세대 행정학과에 지원했다. 또 다른 지인의 조언으로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에도 지원을 했다. 그리고 전북대학교도 알아보았는데, 그곳에는 동남아연구소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전북대 대학원에 지원하려면 반드시 전북대 교수님의 추천서가 필요했다. 당장 지도교수를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5·18 기념재단에서 함께 일하던 팀장님께 도움을 요청했다. 다행히 내가 지원하려던 정치학과에서 5·18 기념재단과 협력 관계에 있던 교수님이 계셔서 재단 팀장님 소개로 추천서를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여러 대학의 대학원에 지원했고, 최종적으로 서울대는 탈락했지만 연세대와 전북대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다. 조건은 연세대가 더 좋았지만, 전북대에는 동남아연구소가 있다는 점이 큰 매력으로 다가왔기에 결국 나는 전북대를 선택했다.
전북대학교 정치학과 대학원에 다니면서 나는 미얀마에서 배웠던 정치 지식과 더불어 5·18을 통해 알게 된 한국의 역사와 민주화 과정을 다시 깊이 있게 배우게 되는 매우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그렇지만 대학원에서의 학위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특히 석사과정 졸업 요건 중 하나가 바로 논문인데, 연구라는 게 내게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모든 과정이 새롭고 낯설었다. 지금도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지만, 사실 아직 완전히 익숙해지지는 못한 부분이 많다.
다행히 나는 대학원에 다니는 동안 전북대학교 동남아연구소에서 연구보조원으로 일할 기회를 얻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연구소에서 미얀마에 관해 연구하는 박사님들이 현지 조사 과정에서 녹취한 미얀마어 인터뷰 내용을 번역하거나 정리하는 일을 도우면서 배우는 게 적지 않다. 미얀마에 살던 시절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거나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던 미얀마 사회의 모습을 다시 돌아보게 되고, 또한 거기에 더해진 학문적 해석들도 접하게 되었다. 내가 가진 미얀마어 능력과 경험이 미얀마를 위해 유용한 학문적 결과물을 생산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뿌듯함과 함께, 스스로도 미얀마에 대해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이러한 경험들이 내게는 무척 값진 배움이 된다. 또한 연구소장님이 지도교수이자 동남아 전문가이시기 때문에, 학문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동남아와 관련된 많은 지식과 통찰도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배움의 과정을 이어오면서 요즘 나는 어떤 주제로 논문을 쓸지를 깊이 고민하는 중이다. 최근 나는 난민과 인도적 체류자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자료를 조사하며 한국의 난민법에 따라 체류하고 있는 난민이나 인도적 체류자를 다룬 사회학적 연구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특히 2021년 쿠데타 이후 한국에 체류하는 미얀마 시민들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인도적 체류자’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국 정부는 미얀마 군사 쿠데타 이후, 본국 송환 시 박해나 고문의 위험이 있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2021년 3월 12일부터 국내 체류 미얀마인을 대상으로 인도적 특별체류 조치를 시행하고 있다(법무부 2021/03/12). 한국 정부가 그렇게 정치적으로 박해받는 미얀마 시민들을 돕고 있어서 다행이다. 그렇지만 당장 주변에서 접할 수 있는 사람들 얘기만 들어봐도 인도적 특별체류 조치에는 문제점 또는 한계도 적지 않다. 앞으로 한국에서 인도적 특별체류 자격으로 생활하는 미얀마인들이 더 많아질 수 있는 만큼, 이 제도가 좀 더 실질적인 도움이 되도록 개선하기 위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를 위해 나는 2021년 쿠데타 이후 정치적 위험을 피해 도망쳐 온 사람들을 더 깊이 이해하고, 이들이 한국에서 살면서 겪는 어려움을 면밀히 파악하는 연구를 할 계획이다. 그렇게 내가 수행한 연구가 미얀마 출신뿐 아니라 한국에 거주하는 다양한 국적의 인도적 체류자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학술적 자료가 된다면 더 없이 기쁠 것 같다.
한국에 와서 배운 것 중 하나는 불행과 어려움이 비단 우리 국민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힘든 상황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나는 목표를 다시 세웠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미얀마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돕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많은 도움을 받아 지금의 자리에 올 수 있었던 만큼, 내가 받은 도움을 사회에 환원하며 더 의미 있는 일들을 해 나갈 생각이다.
* 각주
1) 편집자주: 미얀마에서 대부분의 마을마다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봉사 조직으로, 주로 장례식과 같은 조사[弔事, 미얀마어로는‘나예’(နာရေး)]를 돕는 일을 한다. 2008년 사이클론 나르기스 사태는 이러한자발적 봉사 조직들이 재난 구호 활동에 대대적으로 참여한 첫 사례로, 이후 비슷한 풀뿌리 조직들이 자연재해는 물론 사회 봉사 활동에까지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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