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24.02.01
- 수정일
- 2024.02.01
- 작성자
- 동남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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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1027 작전'은 미얀마의 봄을 앞당길 수 있을까?
초록
2023년 10월 27일, 미얀마 북동부에 자리한 샨주 북부의 12개 도시에서 세 개의 소수민 족무장단체 연합군인 ‘형제동맹’이 군부군에 대한 일제 공격을 개시했다. 공격이 개시된 날 짜를 따 ‘1027 작전’으로 명명된 이 군사 행동을 시작으로 반군부 무장저항운동이 맹렬히 전개되기 시작했고, 수많은 군부 진지와 전초기지, 주요 무역로와 도시들이 저항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형제동맹이 첫 공격의 주체이긴 했으나, 1027 작전 이후 미얀마 전역으로 확 산한 저항군의 연합공세는 오랜 무장투쟁의 역사를 가진 ‘올드보이’와 신흥 저항군의 연대 라는 특징을 보인다. 이처럼 다양한 저항 세력이 공동전선을 형성하여 군부를 공격하는 일 은 미얀마 역사상 전례 없던 일이며, 또한 동남아시아에서도 최강의 군대로 꼽히던 미얀마 군대가 지난 몇 달간 보여주고 있는 것과 같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모습 또한 이 나라 역사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일이다. 이런 점에서 1027 작전은 3년을 끈 미얀마 군부 대 시민 의 긴 대결이 새로운 국면에 진입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은 쿠데타 이 후 무력 충돌로 전환된 미얀마 상황에서 1027 작전이 갖는 의미를 고찰한다. 이를 위해 현 상황과 관련된 역사적 배경을 간략히 설명하고, 이 연합공세의 주요 특징과 전개 현황, 그 리고 이 과정에서 중요 변수로 지목되고 있는 중국의 행보가 갖는 의미를 분석한다. 끝으로 현 국면이 미얀마의 봄을 앞당기는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기 위해 앞으로 맞서야 할 과제들을 제시한다.
변방의 북소리
2021년 2월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미얀마 군부는 전국적인 규모로 전개된 시민들의 평화시위와 시민불복종운동을 무력으로 잔혹하게 진압하였다. ‘봄 혁명(Spring Revolution)’으로 불리는 이 나라 시민들의 저항이 거세어질수록 군부의 총성도 높아졌고, 그에 따라 수많은 시민이 목숨을 잃고 삶을 빼앗겼다. 이에 미얀마 시민들은 보호책임(R2P: Responsibility to Protect)을 외치며 국제사회의 개입을 요구했지만, 아무런 응답도 받지 못했다. 결국 이 나라 시민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무기를 들었고, 군부와 저항운동에 나선 시민의 대치는 쿠데타가 발발한 지 3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병력과 무기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는 군부에 맞서 싸우는 일은 흡사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에 비견할 만한 것이어서, 군부의 무차별적인 포격과 공습에 목숨을 잃거나 고통받는 시민들의 희생으로만 이 긴 싸움의 막이 내리는가 하는 절망감도 엄습했다. 그렇게 다시 또 고통스러운 한 해를 마치게 되는가 싶었던 지난해 말, 이러한 상황에 일대 전환점이 될 만한 사건이 이 나라의 북동부 변방,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샨주(Shan State) 북부에서 발생했다. 2023년 10월 27일, 중국과의 국경무역 주요 관문에 자리한 12개 도시에서 일단의 소수민족무장단체(Ethnic Armed Organizations, 이하 EAOs)가 군부군과 친군부 민병대를 향해 일제 공격을 개시한 것이다(Fishbein et al. 2023).
공격이 개시된 날짜를 따 ‘1027 작전(Operation 1027)’라 명명된 이 군사 행동을 이끈 것은 20여 개에 이르는 미얀마 내 EAOs 가운데 세 단체―미얀마민족민주동맹군(MNDAA: Myanmar National Democratic Alliance Army), 따앙민족해방군(TNLA: Ta’ang National Liberation Army), 아라칸군(AA: Arakan Army)―가 연합한 ‘형제동맹(Brotherhood Alliance)’이었다. 이 첫 공격을 시작으로 샨주 북부에 자리한 수많은 군부 진지와 전초기지, 주요 도로는 빠른 속도로 동맹군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그 여파는 곧 샨주를 넘어 미얀마 전역으로까지 확산되었다. 미얀마 남동부의 까렌니주(까야)와 꺼잉주에서는 ‘1107 작전’, ‘1111 작전’과 같은 후속 작전도 전개되었다. 군부가 사수하고 있는 네피도와 양곤, 만달레이 등의 주요 대도시 인근 지역에서도 EAOs와 시민방위군(PDF: People’s Defence Forces)의 연합군이 주요 도로를 봉쇄하고 군부 진지를 점령했다는 소식이 연일 들려온다(Michaels 2023).
1027 작전은 대립하는 양측 모두 아무것도 남지 않을 파국을 향해 기력을 다 소진해 가는 듯 보였던 미얀마의 내전 상황이 새로운 국면에 돌입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쿠데타 이래 저항운동 진영과 일정한 거리를 두며 군부와 휴전 상태에 있던 형제동맹이 돌연 군부를 상대로 대대적인 협공을 벌인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이들이 저항운동 진영과 함께 연합공세를 펼치고 있는 상황은 더욱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을 압도하여 가장 놀라움을 안긴 것은 스스로 ‘땃마도(Tatmadaw)’라는 존칭을 붙여 국가 안보와 주권의 수호자임을 자처해온, 동남아시아에서도 가장 강력한 군대로 손꼽히는 이 나라 군대의 패배였다. 미얀마 군부에 대해 이처럼 전방위적인 공격이 가해진 전례도 없었지만, 군대가 그처럼 무력하게 진지와 무기를 빼앗기고 고전하는 모습도 독립 이래 미얀마 역사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일이다. 반대로 2년이 넘도록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던 저항군은 1027 작전을 시작으로 두 달 만에 400여 개의 군부 진지와 무기를 빼앗고 20여 개의 도시를 탈환했다. 저항군이 탈환한 첫 도시인 사가잉 지역의 껄린(Kawlin) 타운십에는 국민통합정부(NUG: National Unity Group)의 지휘 아래 민간 행정이 복원되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The Irrawaddy 2023/12/08).
이 글은 지난 3년 가까이 교착 상태에 빠져 있는 듯 보였던 미얀마 군부와 저항세력 간의 대치 국면을 새로운 단계로 도약시킨 1027 작전에 대해 조명한다. 이를 위해 현재 미얀마 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상황과 관련된 간략한 역사와 1027 작전의 전개 현황과 결과를 살펴볼 것이다. 아울러 1027 작전이 수행되고 있는 주요 장소 및 경로와 관련하여 밀접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까닭에 중요한 변수로 지목되고 있는 중국의 행보에 대해서도 간략히 살펴볼 것이다. 끝으로 미얀마 역사상 초유의 사태라 할 수 있는 이 사건이 2021년 쿠데타 이후 미얀마 상황에서 갖는 의미를 고찰하고 앞으로의 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소수민족무장단체와 군부: 오랜 악연과 공생의 역사
미얀마에서 버마족 중심의 중앙정부와 소수민족 간 반목과 충돌의 역사는 길다. 저지대의 버마족 영토를 에워싸고 있는 소수민족주의 여러 민족집단은 독립 직후인 1940년대 후반부터 자치를 요구하며 무장단체를 결성하여 정부군에 맞서왔고, 자치를 향한 이들의 투쟁은 쿠데타 직전까지도 계속되었다. 이처럼 긴 충돌의 역사는 1824년부터 1948년까지 미얀마를 지배했던 영국의 식민지 통치 전략이 남긴 후유증이기도 하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민족집단만도 135개에 이르는 다민족 국가 미얀마에서 영국은 분리 통치(divide and rule) 전략을 구사하여 민족집단 간의 분열을 조장하였다. 전체 인구의 70%가량을 차지하는 버마족 영토는 직접 통치하면서, 식민당국이 접근하기 어려운 소수민족 거주 지역에는 상당한 수준의 자치를 허용하였다. 꺼잉족(카렌)을 비롯한 일부 소수민족에게는 군인이나 관료, 경찰 등과 같은, 식민 지배를 받는 사람들로서는 결코 쉽게 오를 수 없는 요직을 허용하여 우대하기도 했다. 소수민족을 군인과 경찰로 동원하여 버마족 중심의 독립운동을 짓밟게 하는 등, 식민 통치 기간 영국이 활용한 분리 통치 전략은 미얀마 내 여러 민족집단 간의 갈등을 증폭시켰고, 그 후유증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Walton 2008; Sadan 2013). 1948년에 마침내 독립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얀마에서 국가 건설의 과정이 여전히 미완인 상태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그 후유증은 크다.
1947년 아웅산이 삥롱회담에서 약속했던 소수민족 자치의 꿈은 이듬해 독립을 맞은 버마에서 실현되지 않았다.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정치적 혼란과 진통 속에서 소수민족들은 곧 자치와 독립을 요구하며 버마족 군대에 맞서 무장투쟁에 나섰다. 1949년 결성된, 미얀마 소수민족 정치기구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까렌민족연합(KNU: Karen National Union)은 까렌민족해방군(KNLA: Karen National Liberation Army)을 창설하여 버마군에 맞섰고, 이어 까렌니, 까친 등의 다른 소수민족집단도 까렌니군(KA: Karenni Army), 까친독립군(KIA: Kachin Independence Army) 등의 군대를 만들어 자치를 위한 투쟁에 나섰다. 독립 이래 수십 년간 중앙정부에 도전했던 버마공산당(CPB: Communist Party of Burma) 내부에서도 버마족 지도부에 항거한 소수민족 사병의 반란이 발생하여 1989년에 해산되었는데, 그로부터 다시 네 개의 새로운 무장단체가 창설되었다. 1027 작전을 개시한 형제동맹의 일원인 꼬깡족 무장단체 MNDAA와, 미얀마 내